상무님, 방 잡을까요?
9화
유난히 긴 하루였다. 고작 반나절 남짓한 시간 동안 겪은 일이 그 지경이니 당연한 소리인가.
어쨌거나 남은 일정을 버릴 수 없기에 정신력을 긁어모아 마지막 미팅까지 해치웠다. 다행히 더 이상 멘탈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지만,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9시가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텅 빈 사무실을 홀로 지키고 있던 나 과장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어, 그렇지, 뭐.”
“저녁은 드셨어요?”
“별로 입맛이 없어서.”
“그래도 드시면서 해야죠.”
“그럴 시간이 어디 있나. 세상은 넓고, 고객은 많은데……. 근데 그건 뭐냐?”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나 과장이 기지개를 켜며 뒤를 돌아보다 멈칫했다.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인 수진이 씩 웃었다.
“이번에 ‘멜로우’에서 나온 신상이요. 오늘따라 단게 무지 먹고 싶어서요. 겸사겸사 쿠폰 북에도 넣으면 괜찮을 거 같아서 가져와 봤는데, 오늘은 다들 일찍 퇴근하셨나 봐요?”
“그러게. 나도 와 보니 아무도 없더라.”
“어떡하지? 혹시 많이들 남아 계실까 봐 큰 거로 샀는데……. 아, 예린이 좀 가져다주실래요? 아니다, 남은 건 좀 그렇죠?”
“아니야. 나야 주면 고맙지. 우리 예린이 케이크 귀신이야. 이야, 이거 엄청 맛있게 생겼네.”
“그쵸? 그쵸? 진짜 예뻐서 저절로 손이 막 가더라구요. 안 살 수가 없었어요.”
“쯧쯧. 그렇게 단걸 왜 사 들고 와? 김 주임 혹시 그날이야?”
난데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복도로 향했다. 때마침 지나는 길이었는지 신 부장이 싱글거리며 말을 붙여 왔다.
“암만 당 땡기는 때라도 너무 그런 거만 먹으면 살쪄. 나 과장도 이젠 그럴 나이 아니잖아? 특히 우리 김 주임은 우유 들어간 건 더 조심해야 하고.”
능글맞게 웃던 신 부장이 버젓이 가슴께에다 C 자를 그려 보인다.
저 인간이 또…….
수진의 입술이 어색하게 비틀렸다.
평소에도 웃기지도 않는 농담과 시도 때도 없는 성희롱으로 혈압을 올리는 데 일조해 온 인간이었다. 짜증 나는 건 본인은 저게 칭찬인 줄 안다는 점이고, 더 짜증 나는 건 그래서 고칠 마음도 없다는 점이다.
두고 보자 인간아. 내가 준성이랑 옛날처럼 친해지면 모은 자료들 가져다 확 찔러 버릴 테니까. 오늘 전화번호도 교환했거든?
물론, 이렇게 평탄한 사회생활을 위해 속으로만 구시렁대는 저와는 달리 지금도 속 시원하게 할 말 다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게요. 우리야 뭐, 이런 거만 끊으면 바로 관리가 되긴 하는데 우리 부장님은…….”
능숙하게 받아친 나 과장이 신 부장의 두툼한 몸매를 슥 훑어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그래도 그 연세에 그만하면 평균보다 쪼오금 떨어지는 거니까 뭐, 기죽으실 거까진 없구요. 어차피 이젠 남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실 연세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음? 뭐. 흠, 허흠.”
시뻘게진 신 부장이 헛기침을 하자 수진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회장 일가와 한 다리 건너 친척뻘이라는 배경을 내세우며 제 밑의 직원들에게는 대단히 위세를 부리는 신 부장이었지만, 호텔 설립 이후 최고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 나 과장만큼은 못 당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눌러 보려 안간힘을 쓰는 신 부장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되돌려 주는 나 과장의 기 싸움을 종종 보게 된다. 당연히 구경하는 입장에서의 재미는 쏠쏠한 편이다.
“그보다 김 주임. 마침 잘됐네. 상무님 지금 자리에 계시니까 커피랑 다과 좀 준비해서 가져다줘요.”
근데 불똥은 왜 일루 튀는 거야!
“네? 제, 제가요?”
“이럴 때 점수 좀 따 놓으면 좋잖아. 늦게까지 계실 것 같던데 어차피 같이 고생하는 김에 좀 챙겨 드려. 듣자 하니 예전에 알던 사이라며? 그럼 취향도 잘 알겠네.”
“아니, 잠시만요. 굳이 제가 그런 거까지 챙기지 않아도……. 부, 부장님?”
대뜸 폭탄을 던져 놓은 신 부장이 총총 사라졌다. 멍하니 신 부장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굳어 버린 그녀의 옆에서 슬금슬금 몸을 일으킨 나 과장이 씨익, 웃어 보였다.
“어머, 잘됐다― 자기.”
잘되긴 뭐가요!
* * *
잠시 후. 가장 깨끗한 쟁반 위로 플라스틱 컵이 아닌 도자기 컵에 다소곳이 담긴 커피와 예쁘게 커팅된 케이크가 놓였다. 구경하는 나 과장의 얼굴에 놀리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꿋꿋했다.
그래도 하늘 같은 상무님 앞에 가져다 바치는 건데 평소처럼 대강 늘어놓는 건 좀 그렇잖아요.
사무실을 나선 수진은 바로 보이는 계단을 조심조심 오르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9층짜리 사무용 빌딩의 3층이 현재 그녀가 일을 하는 사무실이고, 임원실은 바로 위층이었다.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길인데, 이 길의 끝에 준성이 앉아 있다 생각하니 절로 등골이 빳빳해진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없었다. 문득 비서들도 다 퇴근한 텅 빈 사무실 앞에서 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다.
‘그새 퇴근했나?’
잔뜩 부풀어 있던 거품이 푹 꺼진 듯 어깨가 처졌다. 그러게, 이상하게 들뜨더라니.
돌아서려던 수진은 문틈으로 새 나오는 빛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노크를 하고 슬그머니 문을 열어 봤다. 환하게 불이 켜진 집무실 안, 바로 보이는 커다란 책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헉! 죄, 죄송합니다. 대답이 없으시기에 그냥……!”
들어온 건데.
뒷말을 집어삼키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의자에 기대앉아 잠들어 있는 준성을.
“…….”
천천히 다가선 수진은 들고 있던 쟁반을 책상 한쪽에 내려 뒀다.
역시 낮의 일이 문제였던 건가.
“그냥 내가 나갔어도 됐는데…….”
최근 알게 된 회사 내부 사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영업 실적이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라든가, 설상가상 면세점 비리 건에 연루된 게 있다든가, 좀 더 두드러지기 시작한 파벌의 존재라든가 하는 뭐, 그런 것들.
준성이 돌아온 것도 아마 그 일들을 수습하기 위함이라 들었다. 그녀에겐 한 다리 건너 뉴스로나 접할 그런 일들이 그에겐 현실적으로 떨어진 숙제일 것이다. 책상 위, 한가득 쌓인 서류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치열한 하루가 눈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오죽 피곤했으면 그 시간에 잠깐이라도 쉬러 들어왔을까.
피곤에 절어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제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도 저를 내보내지 않고 자신이 그 방을 나섰다. 그런 꼴의 여자를 바깥에 내보내느니 본인이 피곤한 게 낫겠다고 생각했겠지.
“어쩌면 하나도 안 변했어.”
나직하게 중얼거린 수진이 물끄러미 잠이 든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누구도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 많은 걸 누리고 있는 사람.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먼저 눈에 박히고, 마음에 와닿았던 건 바로 이런 그의 모습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배려와 여유. 설령 그것이 가진 자의 여유로 보일지언정 굳이 감추고 꾸미려고 들지 않는 모습이 좋았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 온 그를 좋아했다. 그런 그와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 친구라는 이름마저 지키지 못했지만.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휴대폰을 꺼내며 작게 중얼거린 수진이 살금살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오, 저 기다란 속눈썹.
오오, 저 날렵한 콧날과 섹시한 입술.
잠시간 그 얼굴을 핥듯이 훑어본 수진이 정성스럽게 휴대폰 각도를 맞췄다. 찰칵, 소리가 의외로 커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이스 샷!’
어떻게 이렇게 대충 찍는데도 화보가 나오니!
자는 얼굴까지 예술이다. 곱게 저장된 사진을 확인하던 수진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절로 어깨춤이 나올 지경이다. 이 짜릿한 수확의 기쁨을 영원히 홀로 간직하리라 다짐하며 막 휴대폰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덥석.
거센 힘이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히익!”
기함하며 고개를 돌린 곳엔 어느새 눈을 뜬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김수진.”
그가, 정확히 제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아득했던 건 근사한 목소리 탓인지, 손목에서 느껴지는 비현실적인 감촉 탓인지 모르겠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눈. 또렷한 눈매와 정확히 그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선 방금 전까지 잠들어 있던 사람 특유의 흐릿한 기미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 추태를 다 본 건 아니겠……지?
“뭐 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김수진 주임님.”
한결 느른해진 음성이 심장을 긁어내린다. 다시금 아득해진 수진이 허겁지겁 남은 정신력을 끌어모아 침착하게 대꾸했다.
“주, 주무시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것에 대답해 줘야 할 의무 있습니까? 내 구역을 침범한 건 김수진 씨인데.”
“그렇……죠.”
“다시 묻죠. 김수진 씨는 왜 들어왔습니까?”
“어, 그, 그게 피곤하실 거 같아서 커피를…….”
“가져다 놓고 겸사겸사 사진도 찍으시고?”
“……네.”
“자는 사람 얼굴을 한참 관찰하시던데. 거기다 사진까지 찍는 거면 묘한 페티시라도 생기셨나, 아니면…… 스토킹?”
아, 역시 다 봤구나. 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야!
흠칫하며 얼굴을 본 순간 여유롭게 웃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슬며시 올라간 입가. 길게 휘어진 눈매.
제대로 걸렸구나, 하는 표정에 수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에요! 무슨 그런, 그런 게 아니고 이건 그냥 쓸데가 있어서……!”
“…….”
“이게 그러니까, 호, 홍보실이요. 홍보부에서 송준성 상무님의 사진을 소식지에 싣고 싶어 해서!”
“그런데 자는 얼굴을 찍습니까?”
“그게, 싫어하실 거 같아서 몰래…….”
“…….”
“죄송합니다.”
말을 할수록 본전도 못 건지는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점점 서늘하게 굳어 가는 남자의 시선 앞에 있으려니 절로 군기가 바짝 든다. 가뜩이나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는 분인데 거기다 불을 지폈나 보다. 붙들려 있던 손을 후다닥 빼낸 수진이 휴대폰을 치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