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8화
그렇게 맘속으로 선을 그어 버리고 나니 다 끝난 일이 되어 버렸다. 이후로도 종종 그와 마주쳤지만, 데면데면한 태도로 서로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게 끝이었다. 평소엔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그의 존재감이 왜 이런 때에만 더 생생해지는 건지.
결국 사이만 더 어색해지고 끝난 해프닝이었다.
그러고도 2주나 더 지난 어느 일요일 오전. 카페의 문을 열 때만 해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할머님. 혹시 아드님 전화번호나, 어디 가시려고 했던 건지 기억나세요?”
“으응? 글쎄. 모르겠어. 나 여기 어디야. 에구구, 또 내가 정신을 놨나 봐.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어떡하지?”
“괜찮아요, 할머님. 제가 꼭 찾아 드릴 테니까, 일단 이거 다 마시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내내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기어이 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자그마한 몸집의 할머니 한 분이 우산도 없이 카페 앞을 서성이는 게 눈에 띄었다.
한눈에도 이런 곳에 머물 만한 분이 아니라 예의 주시하며 바라보는데, 터덜터덜 걸어온 할머니는 카페 쇼윈도 앞의 턱에 주저앉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봄도 한창 무르익은 때였지만, 내리는 비를 다 맞고 있기엔 걱정스러운 날씨였다. 결국 문을 열고 나가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와 30여 분째 같은 이야길 반복 중이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찾으러 왔다는데, 도저히 그 나이대의 아들이 있는 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치매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몰래 한숨을 내쉰 수진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할머니 손에 쥐여 드리곤 카운터에 놓인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경찰서로 모시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인 것 같은데, 카페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신고를 하자니 난데없이 경찰이 들이닥치면 괜히 놀라실까 걱정이 되어 망설이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연희라도 불러 도움을 청해 볼까, 생각했을 때였다.
“저기.”
“아, 어서 오세…….”
얼마나 고민을 했던 건지, 손님이 와 있었던 것조차 몰랐던 모양이다. 난데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수진이 멈칫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걸까. 누가 알려 줬을까. 아니 날 찾으러 온 건 맞나. 그냥 우연인가?
수없이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똑같이 저를 발견한 준성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가득해서 그 역시 예상 못 한 상황임을 짐작했다. 서로가 말문이 막힌 채 머뭇거리는 사이 준성의 시선이 흘깃 할머니를 향했다가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아, 저기. 요 앞에서 길을 잃으신 분인데…….”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연 순간 고개를 끄덕인 준성이 대뜸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더니 몸을 숙였다.
“할머님. 그거 다 드셨어요?”
“응? 응. 다 먹었어. 맛있네. 고운 처자가 맛있는 걸 줬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괜찮아요. 제가 사 드릴 테니까, 저랑 같이 가실래요? 그만 댁에 돌아가셔야죠. 다들 걱정하세요.”
“그래, 가야지. 가야지. 우리 집 가야지.”
역시 미남이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먹히는 법이지.
준성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만연했다. 선선히 일어나는 할머니를 부축한 준성이 다시 그녀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수진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요 앞 지구대로 모시려고. 걱정 마. 놀라시지 않도록 조심할게.”
그걸 걱정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차마 내색할 수 없었던 수진은 그냥 웃어 버렸다. 너무나도 송준성다운 일이라서.
준성은 꽤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돌아왔다. 고맙다며 라테 한 잔을 건네자 조금 멋쩍은 얼굴을 하더니 할머님이 저를 놓아주지 않아서 가족이 올 때까지 함께 있어 드렸다고, 가족을 금방 찾아 다행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구석진 데라 다들 잘 모르던데.”
“아 참, 수혁이랑 여기서 만나기로…….”
무심히 대꾸하던 준성이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끊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왠지 더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뭐, 알다시피 그런 놈이긴 한데, 나쁜 애는 아니야.”
“그런 거 같아. 앞뒤 생각 안 하고 일단 저지르는 타입인 거 같긴 한데, 악의는 없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
동시에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야기는 의외로 아주 편안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도서관에서 말이야. 도와준 것도 모르고 화내서 미안.”
“아냐. 놀라서 그런 거잖아. 이해해.”
“그래도 왠지 계속 그때 일이 마음에 남아서.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했어야 했는데. 아, 물론 노트 빌려준 건 딱히 그 일 때문만은 아니야. 그냥 인사는 인사고,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거니까.”
“알아. 넌 해야 할 말은 앞에서 하는 성격이잖아.”
“안다고? 날 알고 있었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어째선지 준성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쑥스러움 가득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늘 어른스럽고 여유 만만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제 또래의 풋풋함이 가득해서 제 가슴속이 다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저도 모르게 피어 나오려는 미소를 감추려 입술을 깨문 사이, 준성은 처음 노트를 빌렸을 때처럼 낮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노트 빌려준 건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부족했던 부분까지 다 보충했거든. 나도 공부엔 제법 자신 있는 편인데, 네 거 보고는 반성 좀 했어.”
“무슨, 반성까지야.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그보다 수혁이한테 다 들었어. 사정이 있었다며. 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을 안 해?”
“그런 걸 말한다고 내 실수인 게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물건 간수 못 한 건 엄연히 내 책임이지, 뭐.”
“……너 그런 성격 손해야.”
진심으로 안타까워 슬쩍 덧붙이자 그가 웃었다. 정말로 그게 마음의 짐이라도 됐던 건지, 용서의 의미가 담긴 그녀의 말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서로에 대한 질문을 해 가며 친분을 쌓아 갔다.
어느새 슬그머니 나타난 수혁이 그 자리에 끼어들어 한결 풀어진 두 사람을 향해 제 덕분에 더 친해진 거라 우겨 댔다. 도무지 미워할 수만은 없는 능청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 그를 오해했던 일은 결국 두 사람이 진짜 친구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오해는 어떤가.
누군가의 잘못이 확실한 상황이라면 차라리 다투기라도 하며 풀어 볼 텐데, 취향이 아니라는 오해라니. 이 얼토당토않게 애매한 이야기는 도무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있으면서도 조금 멀어진 느낌이었다. 여전히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든든한 공부 메이트로 함께하긴 했지만, 미묘한 어색함은 점차 커져만 갔다. 그 전처럼 단둘이라는 상황이 편하지가 않았다.
어차피 친구일 뿐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서로의 감정까지 간섭할 만한 사이는 아니니까. 아무 말 없이 멀어진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만약, 그가 제 곁을 완전히 떠나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좀 더 일찍부터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 * *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알록달록한 빛이 아련하기 그지없다. 연말 분위기로 가득한 풍경 속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남자는 오늘도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묵묵히 책을 읽고 있는 수려하게 잘빠진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담기자마자 그녀의 동공이 흔들린다.
‘이번에야말로 꼭.’
굳게 마음을 먹은 수진이 커다란 머그컵 두 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마감 시간이 지난 카페엔 단 두 사람뿐.
준성이 카페에 나타난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더 정확히는 꼭 전할 말이 있어 모든 용기를 긁어모아 연락을 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든다. 수진은 자연스럽게 한 잔을 내밀었다.
“라테 아주 연하게. 괜찮지?”
“어, 고마워. 마무리는 다 된 거지? 너도 앉아.”
그의 입가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주 앉은 수진은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진정해. 진정해라, 내 심장아.
“무슨 일이야? 이런 시간에 그냥 커피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어? 어, 아니 뭐, 그냥. 할 말도 있고.”
“할 말?”
어딘지 무심한 되물음에 수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어…… 그게. 시간 빠르다. 그치? 벌써 겨울이고.”
“그러게. 여기서 할머님 한 분 모시고 나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얼결에 창밖을 내다보며 한 말이었는데 마치 마음속을 꿴 듯 되돌아온다.
“유학, 간다며?”
“응.”
조금은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쉽게 나왔다. 이 질문이 먼저 나올 거란 것쯤은 이미 예상한 것처럼.
“언제 출국하는 거야?”
“다음 주 수요일.”
“되게 갑자기네.”
“그런가?”
미묘한 투로 대꾸한 그가 다시 커피 잔을 입에 댔다. 다른 건 몰라도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라는 건 사실이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태도에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잠시 주변은 어색한 침묵으로 뒤덮였다.
“네가 내려 주는 커피도 이게 마지막이겠고.”
그 침묵을 깨듯 준성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심장이 뛰게 만들었던 그 목소리조차 지금은 전혀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하는 그녀 앞에서 그는 천천히 남은 커피를 마셨다.
“잘 마셨어. 그럼.”
“저기, 나 실은 할 말이.”
동시에 말을 뱉고서 동시에 멈칫했다. 눈이 마주치자 먼저 말하라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오늘은 꼭 말해야 했다. 오늘만큼은 기필코.
사실은 오래전부터 널 좋아했어. 그런 말을 할 기회가 없어서 그냥 친구로 지내는 것에 만족했었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너랑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어.
난 이렇게 널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러나 진지하게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거짓말처럼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려 한참 만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잘…… 다녀오라고. 건강 조심하고.”
나직한 웃음과 함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빈 컵이 툭, 놓였다. 드물게 차가워진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겨우 그 말 하려고 불러내고, 붙잡은 거야?”
“어? 어, 이제 오래 못 만날 테니까.”
“그래. 그렇겠지. 이게 너답긴 해.”
“…….”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역시, 내 착각이었나 보다.”
“…….”
“또 보자는 말은 별로 의미 없을 거 같네. 너도 잘 지내.”
뭔가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땡그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고요가 찾아왔다. 수진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잔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잘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이 감정을 말로 전한다고 해서 다른 결과가 오진 않을 거라 각오도 했는데.
어설픈 용기는 아니 내는 것만 못했나 보다. 그 차가운 태도에 제 가슴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으, 쓰다. 맛없네.”
괜히 커피를 탓해 본 수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굳어 있던 눈빛이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