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7화
그 엉뚱한 고백 이후에도 준성의 태도는 달리 변함이 없었다.
수혁이 취향이라는 말은 그 자리의 누구도 믿지 않았겠지만, 준성에겐 그 자신을 평가하는 말이 꽤 불쾌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을 정정해 줄 만한 기회는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건 몰라도 준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준성은 늘 다정했고, 변함없이 인간적인 매력을 뿜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를 처음 알았던 3월부터 그해 12월까지.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하며 느낀 건, 그가 마냥 자상하고 서글서글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상당히 고집이 셌고, 지나치게 정의로운 탓에 고지식한 면도 있었다. 불의를 참지 않는 면모는 몇몇 거친 녀석들과의 트러블로 이어질 때가 많았고, 책임감이 강하고 변명을 싫어하는 그 특유의 성격은 뜻밖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성격을 제대로 겪어 본 건 도서관에서 처음 그와 마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호감이 생겼다 해도 딱히 진전은 없던 때였다. 애초에 뭔가 시도를 해 보기에 앞서 그는 진입 장벽이 너무 컸다. 같은 학과라 해도 동기들만 백여 명. 그 많은 사람 틈에서 특별히 제가 눈에 띈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수업이 자주 겹치는 건지 강의실 저 멀리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종종 볼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틈에 끼어들어 말을 건네 볼 만큼 담이 큰 사람도 아니었다.
“저, 김수진. 맞지?”
그래서 그녀는 보는 눈으로 가득한 강의실에서, 떡하니 제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어, 응. 넌…… 송준성이지?”
“어, 나 아는구나? 다행이다. 혹시 모르면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나 했어.”
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기막힌 소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이미 MT도 함께 다녀온 사이건만, 제대로 통성명을 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얼떨떨해 더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 대신 옆에 있던 연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오, 송준성. 네가 웬일이야? 먼저 와서 말을 다 걸고.”
“별일 아니야. 그냥 좀, 수진이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부탁이라니?”
다른 무엇보다 송준성이 제게 바라는 게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의아함 가득한 시선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 실은 네 노트 좀 빌리고 싶은데……. 괜찮을까?”
“아아.”
약간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를 볼 수가 없었는데, 집안 사정으로 열흘 정도 외국에 나가 있었다는 소식을 언뜻 들은 기억이 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수업을 빠졌으니 곤란하겠구나,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친구를 두고 왜 하필 나야?
“하긴, 이쪽으로 도움받기엔 우리 수진이만 한 사람이 없긴 하지. 이게 수석 입학자의 위력 아니겠어? 근데 어째 손이 비어 있네?”
“야아. 하지 마.”
“아니, 암만 우리 학교 최고의 인기남 송준성이라도 그냥은…… 읍!”
너스레를 떠는 연희의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웃자 준성의 얼굴에도 설핏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사이 버둥대던 연희가 틀어막힌 입을 열더니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어우, 어우, 막지 마. 받을 건 제대로 받으란 말이야. 송준성. 그래서 그냥 맨입으로 받아 가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저기, 괜찮으면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할래? 근사한 데서 보답할게.”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태도에선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남에게 거절을 당해 본 적 없는 사람의 당당함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사실 그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딱 그다운 태도였고, 그녀 역시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마주 앉은 상황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턱 하니 제동을 거는 느낌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냅다 따라나서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야. 그냥 노트 한번 빌려주는 건데 뭐. 그런 걸로 저녁까지 얻어먹긴 거창하고.”
얼른 손사래를 친 수진은 필요한 노트가 뭔지 묻고는 이내 가방을 열었다.
“이거 다음 수업은 월요일이거든. 그날 아침까지만 돌려주면 돼.”
노트를 받아 든 준성의 얼굴이 조금 미묘했다. 뭔가 예상 못 한 듯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금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그래. 고마워. 그리고 저기…….”
“그럼 난 바빠서 먼저 가 볼게. 알바가 있어서.”
먼저 걸음을 뗀 수진의 뒤로 연희가 따라붙으며 수선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오늘도 알바였어? 금요일인데?”
“아, 사장님이 집에 일이 생기셨대. 당분간만 주말까지 다 하기로 했어. 딱히 별일도 없고 주말엔 손님도 별로 없어서 남은 시간엔 공부해도 되니, 뭐. 겸사겸사.”
“하여간 너 대단하다. 그럼 가는 길에 같이 가자. 그렇지 않아도 수진이표 커피 땡겼는데 잘됐다.”
“너 밤에 마셔도 괜찮아?”
“어차피 오늘은 밤새울 거야. 아주 금요일 밤을 몽땅 불태워 버릴 예정이니까. 그동안 근로 장학생은 일이나 하셔.”
키득거리며 대꾸한 연희가 그녀의 팔짱을 꼈다. 그런 연희를 보며 픽 웃어 버린 수진이 흘깃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그 자리에 선 채 저를 바라보는 준성이 시야에 스쳤지만 더는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강의실에 들어섰다. 오늘따라 옷을 고르는 일에 꽤 시간이 걸렸다. 늘 로션이 끝이었던 얼굴에 공들여 뭔가를 바르기도 하고, 늘 단정히 묶어 놓았던 머리카락도 곱게 드라이를 해 풀어 보았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묘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그녀는 조금 들떠 있었다. 다소 긴장한 손으로 강의실 문을 연 그녀는 항상 그가 앉아 있던 창가의 자리를 흘깃 바라봤다. 하지만 가볍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 준성은 없었다. 서너 명의 여학생 사이에서 늘 그와 함께였던 수혁의 얼굴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몽실몽실 피어올랐던 거품이 훅 꺼지는 기분을 애써 누르며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와, 이거 장난 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눈에 들어오게 해 놨지?”
“그러게. 이 정도면 돈 주고 팔아도 되겠는데?”
“글씨도 엄청 잘 썼더라. 폰트인 줄 알았어. 근데 이거 누구 거야?”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건지. 한 톤 올라간 여학생들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마지막으로 노트를 건네받은 여학생의 손에 시선이 닿은 순간, 수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나 그것 좀 보여 줄래?”
너무 낯이 익은 표지였다. 그렇다 해도 설마 제 것은 아니겠거니, 했다. 그것도 익숙한 글씨체를 발견하기 전까지였지만.
확인을 마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송준성한테. 왜? 혹시 이거 네 거였어?”
“아, 김수진 거였어? 어쩐지 엄청 정리가 잘되어 있더라니.”
“역시 수석 합격자는 필기하는 것부터가 다르네. 근데 이런 걸 수혁이랑 송준성한테만 빌려주는 거야? 우리도 좀 보여 주지.”
멋쩍음 반, 빈정거림 반으로 이어지는 말들을 묵묵히 흘려들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어딘지 당황한 듯한 수혁의 얼굴을 봤지만, 굳이 그 자리에서 뭔가를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조건 없이 뭔가를 빌려주려 한 건 분명 제 호의였다. 그 호의가 이렇게 가벼이 취급당한 게 너무도 불쾌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수진은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섰다. 오후에 수업이 있는 연희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누군가 제 앞을 가로막았다. 흠칫하며 멈춰 서자 언제 온 건지 준성이 당황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이미 마음을 다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말투가 경직되는 것까진 막을 수가 없었다. 제 목소리에 제가 더 정이 떨어지는 것만 같아 표정은 더욱 굳어 버렸다. 준성의 입가에 어색하게 머물러 있던 미소가 가라앉았다. 최악이다.
“아, 네가 노트 받아 갔다는 말을 들어서.”
“할 말은 그거뿐이야?”
“어? 어. 미안. 내가 제대로 관리했어야 했는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기분 나쁜 일이라는 거 알아. 이런 일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난처한 얼굴로 정중히 사과하는 준성을 가만히 바라봤다. 애초에 사과할 짓을 하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니, 뭔가 변명이라도 했다면 좀 더 나은 기분이었을까.
“그래, 알겠어. 수업 전에 무사히 돌려받았으니까 된 거지 뭐. 그럼 난 가 볼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하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래 봤자 달라질 게 뭐가 있다고.
고작 이런 일 하나로 그에게 실망했다느니 어떻다느니 할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울적했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알게 된 건 그날 오후였다. 느닷없이 도서관으로 저를 찾아온 수혁은 세상 불쌍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가며 거듭 용서를 빌었다.
“다 내 잘못이야. 진짜 내가 죽일 놈이다. 미안하다, 진짜. 네가 무슨 욕을 하든 때리든 다 맞아 줄게.”
준성의 집에 놀러 간 날 책상 위에 고이 놓여 있던 노트를 들춰 봤다가 이게 웬 떡이냐 했단다. 몰래 복사까지 완료한 후 월요일 날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마침 자리로 찾아온 여자애들이 노트에 관심을 보이자 내심 자랑이 하고 싶었단다. 당연히 준성의 것으로만 생각했기에 트러블이 나도 끽해야 한두 대 쥐어박히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고.
“설마 그게 너한테 빌린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내 평생 그놈이 남한테 뭘 도와 달라고 한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나 얘 이렇게 화내는 거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 본다니까. 종일 날 쌩까고 있는데. 와, 이런 적은 처음이라 무서워 죽겠어.”
제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한탄하는 수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건 사과를 하러 온 건지, 하소연을 하러 온 건지 알 수가 있나.
“근데 수진이 넌 준성이랑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냐?”
“친한 거 아니야. 그냥 상황이 딱해 보여서 도와준 거뿐이고.”
“그래? 에이,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이번 일은 내 단독 범행이니까 준성이 너무 미워하지 말고. 정 맘이 안 풀리면 날 미워해도 되니까, 준성이랑은 꼭 화해 좀 해 줘. 응?”
남의 말을 듣기는 하는 건지. 기어이 제게서 알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수혁은 자리를 떴고 그녀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왠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다. 유난히 올곧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제가 책임졌어야 할 일에 남의 실수를 입에 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변명을 늘어놓느니 제 실수에 대한 것만 딱 잘라 사과하는 게 훨씬 그다운 일일지도.
하지만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았다곤 해도 이제 와 제가 할 일은 없어 보였다. 오해를 받고 있는 당사자가 말을 꺼내지 않는데, 굳이 제가 나서서 해명해 달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