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6화
동시에 튀듯이 돌진한 수진이 그대로 수혁의 팔을 붙들었다.
“뭐! 뭐! 뭘 원해? 어? 심플하게 말로 하자, 어?”
“아이고, 우리 수진이는 참 눈치도 빠르고 하는 짓도 참 예쁘고.”
“에이 씨! 뭔데, 빨리 말해! 이상한 소리 하면 죽어, 진짜!”
고개를 끄덕인 수혁이 키득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슬쩍 휴대폰을 떼어 내며 속삭였다.
“나 밑반찬 떨어졌어. 알지?”
아, 내가 악마를 소환했구나!
“어, 그래. 준성아. 무슨 일이야? 나? 나야 일하러 왔지.”
능청스럽게 통화를 시작한 수혁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대체 어쩌다 저 제멋대로인 녀석이 친구랍시고 찰거머리처럼 곁에 자리 잡은 건지. 어쩌다 송준성 같은 비현실적인 남자와 연이 닿고 엮이게 된 건지. 제 지나온 인생을 곰곰이 돌아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10년 전, 초가을.
그날의 화제는 다소 뜬금없었다.
“관심 있는 사람?”
아니, 수진은 그렇게 되묻는 순간 분명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 뭐…….”
“있구나! 있어. 누구야? 누구?”
그 짧은 머뭇거림에서 뭘 읽은 거야. 득달같이 달려드는 친구 연희의 반응에 수진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때마침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이 그새 살짝 열이 오른 뺨을 스쳐 갔다.
대학에 진학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훌쩍 넘은 때였다. 쌀쌀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언덕길을 오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후텁지근했던 여름도 지나 다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어 있었다.
“있기는 뭐가. 아냐, 없어.”
“아닌데. 뭔가 있는데. 너 얼굴 빨개졌거든?”
“헐, 진짜? 아니, 그게 아니고, 없어. 없다니까?”
“이거 봐, 이거. 웃는 거 보니 더 수상해. 어? 진짜 빨개지네.”
“아니라니까. 너야말로 뭐야. 그런 이야긴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서.”
정말 얼굴이 빨개지도록 내내 놀리는 투로 몰아가던 연희가 새삼 새침을 떨며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찬찬히 훑어 내리는 시선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수업을 앞둔 강의실은 조금 소란스러웠고, 두 사람의 목소리는 크게 튀지 않아 다행이었다.
“딱 봐도 그렇잖아. 너 정도면 얼굴도 괜찮고, 몸매도 괜찮고. 어디 하나 빠지는 데도 없는데 이 좋은 자원을 왜 썩히나.”
“썩히긴 뭘.”
“혹시 너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보다 곧 수업인데 이제…….”
“실은 나 관심 있는 애 생겼거든.”
“……어? 진짜?”
“궁금하지? 궁금하지? 나 분명 솔직하게 말했다? 들었지? 그니까 너도 솔직하게 말해 봐. 이렇게 서로 상담해 주다 보면 혹시 알아? 이러다 서로 도와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왜 결론은 그쪽이냐고.
“응? 야아. 너 진짜 없는 거야? 진짜로?”
뭔가 낌새를 챈 건지, 아니면 단순히 제 반응이 재밌어서인지.
그날따라 연희는 정말로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웃어넘겨 버렸을 타이밍인데, 저렇게까지 눈을 빛내며 덤비는 친구를 차마 무시하기가 힘든 게 문제였다. 애초에 수진은 살살 애교를 부려 가며 저를 녹여내는 연희에게 너무도 약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책을 만지작거리던 수진은 잠시 후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뭐, 그냥 좀…… 나도 내 취향인 애는 있어.”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정확히는 입학식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눈에 확 들어왔던 그 남자의 모습이.
‘야야, 저기 좀 봐. 저기 키 큰 애. 보여?’
‘어, 헐. 와…… 뭐야. 대박이다. 누구야, 아는 사람?’
‘쟤를 몰라? 송준성이잖아.’
‘아! 쟤가 그 송준성이야?’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아니더라도 첫눈에 보자마자 알았다. 저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가 신입생 OT 때부터 줄곧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 송준성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지만, 왜 그리 호들갑들이었는지는 바로 이해가 됐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선이 고운 얼굴 안에 자리한 뚜렷한 이목구비였다. 잘 자리 잡은 콧대와 흐트러짐 없이 단아한 눈썹. 기다란 눈매와 적당히 도톰한 입술까지. 무엇 하나 거슬리는 것 없이 완벽해서 한 폭의 정교한 그림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조금 각이 진 턱과 이마를 반쯤 가린 세련된 헤어스타일, 맞춘 듯 잘 갖춰 입은 슈트에선 묘하게 금욕적이면서도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이 느껴졌다. 아직 소년티가 묻어나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어른스럽게 그 모든 걸 소화하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유난히 맑고 검은 눈동자는 선해 보였지만, 그 밖의 외적인 조건이 모두 합쳐지니 약간 고집스럽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당시 낯선 환경에 떨어져 잔뜩 긴장한 저 자신과는 달리 자신감과 여유로 가득했던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조금 거만해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강렬했던 첫인상에 대한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노력만으로 삶을 일궈 왔다. 학창 시절엔 줄곧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고, 명문으로 이름난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해 4년 전액 장학금까지 타 낸 건 그녀 나름의 자부심이었다.
지금까지야 생각했던 대로 이뤄 낸 삶이었지만, 앞날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까지 지금의 성적을 유지하고, 원하는 직장을 얻어 화려하게 독립하는 게 당시 그녀의 목표였다. 입시보다 더한 취업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감정 따윈 방해만 될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레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 모두가 좋아하는 남자, 제 잘난 맛에 살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선입견 때문인지 사실 첫인상도 그리 좋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건 언제 어디서 툭, 하고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어? 저기 자, 잠깐만요! 그거 지금 내가 보려던 건데!’
그건 어느 날 불쑥, 제 눈앞에 나타난 이 커다란 손처럼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개강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들렀을 때의 일이었다. 하필 제일 위에 빡빡하게 꽂혀 움직이지도 않는 책을 꺼내느라 낑낑거리던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새치기를 당했다.
순간 몇 분 동안 그 망할 책과 씨름하느라 쌓여 있던 짜증이 훅 터져 버렸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뻔히 용을 쓰는 걸 보고도 그걸……!’
홱 하니 고개를 돌려 그 손의 주인공을 노려봤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제 날카로운 눈초리에 조금 당황한 듯 싱긋 웃으며 책을 내미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아, 난 이거 샀어.’
왜 여기에 송준성이 있는 거지?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도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책을 건넨 준성은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멋쩍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뒤늦게 고맙다는 인사를 떠올렸지만, 이미 저만치 멀어진 그는 친구로 보이는 한 남학생과 투닥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아…… 실수했네.’
그와 친해질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날카로운 모습까지 보일 건 없었는데.
괜히 찝찝해진 채로 그날의 일과를 마무리할 무렵, 학교 근처의 서점에서 다시 우연찮게 그를 발견했다. 그가 구입한 몇 권의 책 중에는 도서관에서 제게 내밀었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금세 알았지만, 왠지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아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버렸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저 스쳐 넘어갈 일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일은 그녀가 제대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일지 모르겠다고.
그 빛나는 외모가 도리어 진짜 그를 알아보기 힘들게 가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와 친구가 되고, 이젠 송준성이라는 존재가 남자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란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작된 후였다.
평생 말하지 못할 길고 긴 짝사랑이.
“송준성이야.”
“……어, 뭐?”
“내가 관심 있는 사람 말이야. 준성이라고.”
수진은 얼떨떨한 채로 연희를 바라봤다.
저렇게 생기 넘치는 얼굴로 하필,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넌 누군데? 혹시 너도 준성이?”
“아니!”
저도 모르게 부정해 버렸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다. 머릿속은 이미 혼돈의 카오스.
“난 그, 그렇게 너무 눈에 띄는 타입은 좀 별로라서. 내 취향은 좀 무난하거든.”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아니다, 그냥 딱 까놓고 말해 봐. 누군데?”
“어, 그러니까, 그게…….”
어찌나 당황했는지 벌써 반년을 넘게 알고 지내 온 그 많고 많은 동기의 이름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송준성만 아니면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송준성 말고 언제나 그 옆에 있던…….
“아, 수혁이야! 차수혁!”
“수혁이? 걔가 어딜 봐서 눈에 안 띄어? 너 눈 진짜 높다. 수혁이 정도면 강남 한복판에 던져 놔도 눈에 띌 앤데?”
“어? 그, 그런가?”
“게다가 너 준성이랑 친하지 않았어? 수혁이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네 취향은 준성이 쪽인데.”
이쯤 되니 피가 말라붙는 게 어떤 느낌인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수혁이가 어때서? 잘생겼지, 성격……은 좀 못됐지만 그래도 은근 다정한 구석도 있어. 그리고 사실 준성이가 친구긴 하지만 편하게 대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서. 뭐랄까, 왠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멋대로 주절거리는데 갑자기 뒷목이 싸해지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있어. 등 뒤에 뭔가 있다고. 있어선 안 될 무언가가.
수진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뒤를 돌아봤다.
“어, 그래, 수진아. 날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다니 영광이다?”
먼저 저를 반긴 건 간신히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지껄여 대는 수혁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준성을 발견한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 아니 그게 굳이 말하자면 난 너희 둘 다 그냥 친구로만!”
“응, 그래.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는 준성이보단 내가 취향이라는 뜻이지?”
“그게 아니라! ……가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 나도 널 무지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네 취향의 친구라서 다행이지?”
“그만해. 곤란해하잖아.”
딱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 말을 잘라 내 준 준성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옆자리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더욱 초조해진 수진이 안타깝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 준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취향인데 뭐.”
글쎄,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