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5화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시간이 느려진다고 했던가.
닫혀 버린 문의 손잡이를 커다란 남자의 손이 붙잡고 있다.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걷어 올린 셔츠와 쭉 뻗어 있는 팔. 등으로 밀착된 남자의 단단한 몸과 제 팔을 휘어잡은 억센 힘.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 숨을 못 쉬겠는 걸 보면 이미 죽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꼴로 어딜 나가려고 그래!”
“헉!”
우주 너머를 유영하던 혼백이 후루룩 돌아왔다. 그제야 제 몰골을 확인하고 또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황급히 집어삼켰다. 맨몸에 가운만 걸친 상태라는 걸 깜빡했다. 재빨리 앞자락을 여미며 그 자리에 웅크려 앉은 수진이 절망의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죽고 싶다. 일백 번이라도 고쳐 죽고 싶다.
멘탈이 진토 되는 느낌이 너무나 신선해.
가능하다면 이대로 우주를 방황하는 쓰레기가 되어 버리고 싶어.
“하아…….”
기나긴 침묵 끝에 등 뒤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레 움찔하며 더 몸을 웅크리려는 그녀의 머리 위로 스윽, 뭔가가 덮쳐 왔다. 눈을 조금 들어 올리자 주변이 온통 새하얀 색이었다.
“덮고 있어.”
새하얀 시트를 확인한 수진이 주섬주섬 끝자락을 당겨 붙잡았다. 심장이 벌렁거려 딱 죽을 지경이다. 이런 방엔 누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배정을 잘못 받으면 남자랑 마주칠 수도 있다는 나 과장의 말에 그저 깔깔거리며 웃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줄이야!
“감사합, 아니, 죄송합니다. 아, 안에 계실 줄은…….”
“지금 네가 그런 말 할 때야?”
화가 난 듯 약간 날카로워진 말투에 수진은 흠칫하며 몸을 웅크렸다. 뭐가 그의 기분을 거스르게 한 건지 알 수가 없……진 않구나. 그의 잠을 깨우고 그의 휴식 시간을 작살냈다. 그냥 이 장소에 이 몸이 있는 것 자체가 충분히 불쾌할 상황이다.
“죄송합…….”
“아니, 미안합니다. 방금 그 말은…… 실수했어요.”
“아, 아닙니다. 놀라셨을 텐데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저야말로 확인도 안 하고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해요. 제대로 누가 있는지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과 때문인지 대화는 도무지 진전될 기미가 없다. 수진은 초조하게 시트를 붙잡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어떡하나. 여기서 뭘 더 해야 하지?
그냥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맞다! 수혁이!’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 꼴을 보였다간 앞으로 또 30년은 우려먹고도 남는데!
제발 오지 마라. 지금 오면 안 돼.
속으로 수없이 반복하는 와중에 문득, 등 뒤로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뭘 하는 걸까. 호기심이 동한 수진이 천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슈트 재킷을 팔에 걸친 그가 현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란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이는 것이 그야말로 런웨이에 선 모델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먼저 나갈 테니 천천히 일 봐요.”
“네? 아, 아니에요. 좀 더 쉬셔야죠. 제가 나갈게요. 저 때문에 잠에서 깨셨는데.”
쭈그려 앉은 채로 넋이 나가 있던 수진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다시 문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앞을 가로지른 손길에 제지당했다.
“충분합니다. 아직 적응이 안 된 건지 좀 피곤해서. 잠깐 눈만 붙인 거니까.”
아, 그랬구나.
왠지 모르게 치켜 올라가려는 입가에 힘을 줬다. 저 멀끔한 외모의 상태로는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는 상황이다. 이 사실을 오직 저만 알고 있다는 게 나쁘지 않다.
혹시 그래서 연락을 하지 않은 거였나? 벌써부터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니 주변을 챙길 여력이 없었던 거고.
지금도 피곤한 듯 조금 찌푸린 눈매는 왜 이리 멋진 건지.
저 상태라면 옛 친구고 뭐고, 조금 냉정하게 쳐다볼 수도 있지, 뭐.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며 흘깃 그를 바라보는데 묘한 게 시야에 들어왔다.
‘어?’
조금 헝클어진 그의 머리 한쪽으로 삐죽이 뻗어 나온 머리카락이라니.
‘귀여워, 귀여워. 섹시해. 어떡해. 너무 귀여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대학 시절 MT 때조차 술로 떡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한 마리의 학처럼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던 모습만 기억하던 그녀에게 이 상황은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자다 일어났는데도 기묘하게 말끔한 얼굴과 저렇게 살짝 흐트러진 모습만으로 이런 금단의 섹시함이 완성될 줄이야!
그러니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래. 이건 저 남자의 품위를 지켜 주기 위해서지, 저 모습을 나만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저기, 잠시만……요.”
의아한 듯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버렸다. 순간 그가 놀란 눈으로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흠칫한 수진이 얼른 거둬들인 손으로 제 옆머리를 가리켜 보였다.
“아니, 여기 머리카락이 조금.”
“아.”
무심하던 얼굴 위로 약간 당황한 표정이 슬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그런데 그런 모습까지 너무 귀엽고 완벽해서 혼자 보는 게 세상 사람들에게 다 미안할 지경이다.
그사이 적당히 옷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준성이 문득 뭔가 생각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 너무 빤히 쳐다봤나.
“그것 좀 빌립시다.”
“네?”
정확히 그의 손가락이 그녀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가리켰다. 얼결에 내밀었더니 잠시 후,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났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휘둥그레 눈을 뜨자 다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상황은 좀 이상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건데 따로 할 말은 없습니까?”
“네?”
“대답은 ‘네?’ 뿐이고?”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알 것 같은데 그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게…….”
어떻게 입은 열었는데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그런 그녀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인 준성은 짧게 웃음을 흘리곤 휴대폰을 건넸다. 아주 약간, 주저하듯 낮게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 조금 낯익었다.
“시간 괜찮으면 저녁이라도 같이할래요?”
깍듯한 높임말은 낯설지만 알 거 같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 그게, 제가 저녁엔 미팅이 잡혀 있어서.”
남은 스케줄을 떠올리며 무심코 대답하는데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 물론 그런 뜻의 미팅이 아니라 업무 연장선입니다. 업체분들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요.”
이 와중에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
심지어 준성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근데 이렇게 쿨하게 돌아서는 거니?
“저기, 잠깐…….”
저도 모르게 휭하니 돌아서려는 남자를 붙들었다. 그대로 멈칫한 남자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여전히 매서움이 남은 눈초리에 잠시 움찔했지만, 이미 제 번호까지 바친 상황이었다. 새삼 모르는 척, 격식을 차리기도 애매해진 수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게 난 네가……. 아, 아니, 상무님이 절 잊은 줄 알았거든요. 계속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보시길래, 그래서 혹시 뭔가 제가 기분이라도 상하게 했나…….”
“맞는데. 기분 상한 거.”
“……하고.”
말허리를 뚝 자르며 치고 들어온 단어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잘못 들은 건가.
“네?”
“기분 많이 상했다고요. 그쪽 때문에.”
뭐라는 거야, 얘가.
도무지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 다정하게 웃을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정색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 게 뭘 잘못하긴 한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어 그저 눈만 끔뻑였다. 묵묵히 굳은 얼굴을 유지한 채 그녀를 주시하던 그가 이내 몸을 휙 돌렸다.
“다시 연락하죠.”
그렇게 그가 방을 나간 후에도 수진은 한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몰아치는 파도에 쓸려 나간 것처럼 눈에 비치는 주변이 온통 하얗다. 멍한 눈을 끔뻑이던 수진은 문득 휴대폰을 쥐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서 조심스럽게 통화 목록을 열었다. 낯설기 짝이 없는 번호를 바라보는데 가슴이 뛰다 못해 저려 온다.
[송준성]
떨리는 손으로 이름을 적자마자 왠지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어쨌거나…… 날 기억하는 건 맞네.”
그렇게 멍하니 넋을 놓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수혁이 왔음을 짐작한 수진이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 주자마자 제 몰골을 발견한 수혁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아 놀래라. 뭐냐, 이 꼴은? 무슨 코스프레야? 뭐, 가오나시 그런 거?”
“몰라. 묻지 마.”
“어이구, 얼굴은 새빨개 가지고 대체 무슨 일이야?”
어르듯 묻던 수혁이 시선을 회피하는 그녀를 향해 슬쩍 몸을 기울여 보였다. 잘생긴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하다.
연한 갈색 머리에 남들보다 확연히 밝은 빛깔의 회갈색 눈동자. 이런 그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푸른 눈동자를 가진 준성과 함께 있으면 엄청나게 눈에 띄긴 했었다. 보는 눈이 호강이라 제법 인기도 많았고.
그렇다 해도 지금 그 패션은 너무 눈에 띄지 않니?
회색 슈트 안에 입은 광택이 도는 검은 셔츠와 페이즐리 무늬가 새겨진 짙푸른 색 넥타이를 슥 훑어보고 난 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나 지금 머리 복잡하니까 건드리지 말아 줄래?”
“머리까지 복잡할 일이 뭐가 있을까? 꼭 나 몰래 누구 만나기라도 한 것 같네.”
그 와중에 수혁은 강아지 다루듯 수진의 머리까지 쓰다듬으며 피식 웃는다. 마치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 영 거슬린다. 가만 보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속을 알기 힘든 인간들인 건 똑같았지. 힐끗 노려보던 수진이 그 손을 툭 쳐 냈다.
“자꾸 동생 다루듯이 할래?”
“어허, 이 오라버니가 자다 깨서 옷까지 사 왔는데 그럼 안 되지. 나 그냥 간다?”
“어차피 돈 받아 갈 거잖아. 내놔.”
발끈한 수진이 그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뺏어 들었다. 하필 비싼 것도 사 왔다. 이번 달 지출이 너무 크구나. 쓰려 오는 위장을 문지르며 투덜대다 욕실로 걸음을 옮기는데 등 뒤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평소엔 이런 일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잖아.”
“어, 평소엔 아무렇지 않지. 오늘은 평소가 아니라서 문제지.”
“흐음……. 그래?”
때마침 수혁에게서 벨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업무를 앞둔 시간이니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욕실 문을 붙든 순간,
“가만있자, 송씨 성을 가진 준성이라는 이름이 엄청 낯이 익는데 여기다 물어보면 뭐 좀 나오려나?”
보란 듯 액정을 내보인 수혁이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