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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4화

쿨하게 대꾸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수진은 커피 한 잔을 든 채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도착한 메일에 답신하고 오전 내내 복잡했던 책상을 대강 정리하니 시간이 남는다. 서랍 어딘가에 박혀 있던 파우치에서 립스틱과 거울을 빼 들었다.

“역시 남아 있질 않네.”

신상이라 리뷰도 없는 걸 냉큼 구입한 게 패착이었나.

지속력이 영 꽝이라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모처럼 너무 마음에 드는 색상을 발견해 차마 버리지도 못한다. 이렇게 미련을 가져 봐야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쌩하게 굴건 또 뭐야.”

어디에서나 주목을 받는 탓에 주변은 늘 사람으로 붐볐고, 그것이 귀찮을 법도 한데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태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았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말 몇 마디, 손짓 하나에도 좋은 집안에서 잘 배우고 바르게 자란 존재임이 묻어났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냉정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긴. 꽤나 긴 세월이 지났는데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제아무리 신사적이고 친절한 사람이라도 그 많은 직원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해 주길 바라는 것도 무리일 테고.

“나도 그 시절 친구들 다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입 밖으로 꺼낸 현실이 매우 씁쓸하다.

그래. 그렇게 하찮은 존재였구나, 내가.

‘왠지 옛날 생각도 나는 거 같고……. 안 그런가요, 김수진 씨?’

그런데 이 말은 또 뭐였지?

“그런 말 한 걸 보면 날 기억하는 거 같기도 한데…….”

다른 건 몰라도 그날 전해 준 그 커피의 맛은 기억할지도 몰랐다. 매일같이 그녀가 내린 커피를 마셨던 때도 있었으니까. 지금 탕비실에 비치된 원두 역시 당시 그가 좋아했던 블렌드를 재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냐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알은척이라도 할까 조마조마했으면서, 정작 이런 상황이 되니 상처는 저가 더 많이 받고 있다. 바보같이.

“자, 일하자. 일.”

불편한 마음을 더 키울 새도 없이 오후의 일과가 시작됐다.

화려한 호텔의 로비를 가로지르며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후 2시 40분. 다행히 시간은 늦지 않았다. 저만치서 멀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린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나 봐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빨리 온 겁니다.”

“어머, 그러셨구나. 반갑습니다. 지난번에 따로 인사는 드렸죠?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수진의 입가에 가지런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텔 영업직 3년 차에 걸맞도록 단련된 영업용 스마일이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판매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웃는 얼굴과 최고의 상태로 유지 중인 복장은 필수였다.

업무적 특성상, 미팅이나 접대로 외근이 잦은 편인 데다 수시로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밀려 있는 사무 업무까지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이다. 귀빈이라도 납시는 날에는 즉각 공항이며 호텔 입구에서 대기해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와중에도 회의 때 꼬박꼬박 소집해 대는 신 부장 덕에 뻑하면 사무실과 약속 장소를 왕복하고, 시장 조사를 비롯해 영업해야 할 기업에 대한 공부와 경쟁사 염탐까지 해치운다.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늘 오후에도 미팅이 세 건이나 잡혀 있었다. 지금 만난 남자는 언젠가 그녀가 홍보차 찾아간 적이 있었던 모 외국계 회사의 담당자였다. 갑작스럽게 홍콩 본사의 임원들이 한국에 들를 예정이라고 했다.

“원체 평판이 좋은 곳이니 시설이야 그렇다 치고, 전 이 맛집 정보가 제일 마음에 드네요. 따로 찾아봐야겠는데요?”

“그렇죠? 전부 다 최근 2주 안에 제가 직접 가서 먹어 보고 온 곳이니까 믿고 가 보셔도 돼요. 적어도 그사이에 망한 집은 없을 테니까요.”

“하하하, 재미있네요.”

로비의 커피숍에 남자와 마주 앉은 지도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객실과 레스토랑, 피트니스 시설을 비롯해 주변 시설과 경관까지 꼼꼼히 돌며 소개하고 미리 준비해 둔 사은품과 비장의 맛집 리스트까지 건넨 다음이었다.

“와우, 그런데 이런 곳을 혼자 다니십니까? 혼자선 좀 어색하지 싶은데…….”

“전혀요. 전 혼자 삼겹살도 잘 먹거든요. 그리고 요샌 혼자 먹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어디든 편하게 대해 주시더라구요.”

“혼자서 삼겹살이요? 하핫……. 이야, 대단하시네요.”

온갖 감언이설을 동원해서라도 계약을 따내야 하는 게 그녀의 일이지만, 오늘따라 조금 힘들다. 이미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남자는 좀처럼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힐끗거렸나 보다.

“바쁘신 모양이네요.”

“네? 아, 죄송해요. 아무래도 일하던 중이다 보니.”

“아, 참. 그러시겠군요. 제가 눈치도 없이 계속 잡아 두고 있었네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 드려야 할 일인데요. 오히려 이렇게 기억하고 찾아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하죠.”

“하도 미인이시라 그런지 기억을 못 할 수가 없던데요?”

남자의 시선이 문득 그녀의 목 아래 언저리를 훑었다. 내내 신사적이던 태도에도 살짝 금이 갔다. 그 눈빛의 의미 따위야 알고도 남는다.

약간 헐렁한 블라우스조차 가리지 못하는 굴곡. 그것을 주저 없이 훑어 내리는 시선.

안타깝지만, 그녀가 지금껏 만나 본 남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사적인 대화가 이 정도면 진심으로 감사한 수준이다. 을의 입장으로 영업을 하다 보면 은근한 유혹은 물론, 대놓고 하는 성희롱까지 별별 일을 다 겪지만, 이젠 대부분 한 귀로 넘길 정도로 단련이 됐다.

“어머, 미인이라니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데요? 그 김에 차도 제가 사야겠네요.”

태연하게 받아넘긴 수진이 소지품을 들고 일어서자 남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뒤따랐다. 계산을 마치고 로비로 나서는 순간에도 남자는 할 말이 더 남은 눈치다.

“저기, 제가 방금…….”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그럼 제가 내일 계약서 들고 귀사로 찾아뵙겠습니다.”

“아, 네. 당연히 계약하러 오셔야죠. 그런데 저기…….”

“엄맛!”

갑자기 무언가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춤을 직격했다.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니 네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그녀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다.

“어머 얘,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서둘러 몸을 낮춘 수진이 아이를 붙잡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이 없다.

“엄마는 어디 계시니?”

『그거 내 건데. 엄마가 준 건데.』

“응?”

난데없이 들려온 중국어에 당황할 새도 없이 깨달음이 밀려든다.

그렇구나. 딱 두 번 입어 본 내 신상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를 찍어 누른 게 바로 네 손에 들린 다 녹아 가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콘이었구나. 지금 내 허리가 차가운 것도 그 때문이구나.

『여기 혼자 왔어? 엄마는 어디 계시니?』

『몰라. 이거 내 건데 작아졌어. 엄마가 흘리지 말라고 했어.』

『그래, 알았어. 일단 엄마부터 찾고 아이스크림도 먹자.』

아이를 달래며 손을 잡고 일어서자 남자가 왠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바라본다.

“북경어까지 이렇게 유창하게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대단하십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죄송한데 여기서 이만 인사드려야 할 거 같아요.”

“옷에 많이 묻은 거 같은데…….”

“아,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뭐.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지금은 먼저 처리할 일이 생긴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생긋 웃으며 말을 마치자 더 잡을 구실이 없어진 남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부르짖는 아이를 데리고 일단 컨시어지 데스크로 향했다. 마침 자리에 앉아 있던 윤지혜 매니저가 그녀를 보며 반갑게 웃는다.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로 함께 프런트 데스크에서 근무했던 인연이 있다.

“어머, 수진 씨. 웬 아이예요?”

“아, 요 앞에서 마주쳤는데 엄마를 놓친 모양이에요. 중국어를 쓰네요.”

“중국이요? 가만있자, 어제 체크인하신 팀 중에……. 어? 옷은 또 왜 그렇게 됐어요?”

“이쪽은 액땜 좀 했고요.”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수진은 피식 웃음으로 답했다.

다행히 아이는 새로 산 아이스크림이 다 없어지기 전에 엄마를 찾았다. 고작 네 살인 주제에 혼자 호텔 방문을 열고 엘리베이터까지 타고 나온 똑똑한 아이였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컨시어지 데스크로 달려온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했다.

“그나저나 이건 어쩐다?”

이 순간이 뿌듯한 건 둘째 치고, 망쳐 버린 옷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난다. 남은 미팅도 있는데 이런 꼴을 하고 나가야 하나. 안타깝게도 재킷으로 가린다고 도움이 될 거 같지도 않다.

그래도 어쩌겠니. 대강 얼룩진 부분을 손끝으로 붙잡으며 화장실에라도 가 보려 하는데 저만치서 윤 매니저가 저를 향해 손짓했다.

“수진 씨, 잠시만요.”

“네?”

“올라가서 샤워라도 해요. 이대로는 힘들 거 같은데.”

후다닥 다가선 매니저가 그녀의 손에 쥐여 준 건 오늘의 휴게실인 객실 키였다. 고맙게도 그새 프런트 데스크까지 다녀온 모양이었다.

“아,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끈적거려서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갈아입을 옷 없으면 제가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에요. 바쁘신데 그러실 것까지야. 도와주신 것만도 고마운데요. 나머진 제가 해결할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황급히 손을 내저은 수진이 재빨리 키를 받고서 로비로 나섰다.

“갈아입을 게 필요한데…….”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휴대폰을 꺼낸 수진은 수혁의 번호를 호출해 메시지를 작성했다.

[미안한데 나 정장 한 벌만 구해 줘. 한 시간 안으로. 꼭 좀 부탁할게.]

룸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같이 휴게실을 쓰는 직원들이 있을 걸 알기에 저만치 보이는 침대 위의 인영에도 별로 놀라진 않았다.

‘자는 건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동해 들고 온 재킷과 소지품을 테이블에 놓아두곤 조용히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리고 있었다. 서둘러 테이블로 다가간 수진은 재킷 위에서 맹렬히 몸을 떨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 수혁아.”

― 나 늦잠 자면 어쩌려고 문자만 보내 놨어? 전화를 하지.

“미안, 자는데 깨워서.”

― 어허, 우리 쌍수 남매 사이에 섭섭하게. 그보다 뭔 일이야? 혹시 진상 손님한테 물벼락이라도 맞았어?

“아니. 귀여운 남자분이 날 꼬시려고 했어. 아이스크림으로 내 허리를 그냥 제대로 찍어 버리셨네?”

피식거리며 대꾸하자 나직하게 따라 웃던 수혁이 말을 이었다.

― 안 늦었어? 시간은 어때?

“급해서 일단 샤워는 끝냈어. 미안한데 좀만 서둘러 줘. 누구 마주치면 좀 보기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참, 여기 위치는…….”

통화를 마친 수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부스럭.

등 뒤에서 잠이 들어 있던 누군가가 몸을 뒤척이더니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시끄러웠…….”

무심히 사과하며 돌아보던 수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느덧 블라인드 사이로 누렇게 물든 햇살이 비쳐 드는 곳에서.

왜.

왜, 남자가!

“엄마아아아!”

그것도 송준성이!

기겁한 수진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아니, 뛰쳐나가려 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뻗어 온 손이 그대로 문손잡이를 잡아당기기 전까진!

쾅―!

묵직하게 문이 닫힘과 동시에 수진은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너 제정신이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온몸이 굳는다.

이건 꿈이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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