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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3화

그나마 순수함이 남아 있던 대학생들과는 달리, 날마다 똑같은 일상에 지치고 무료해진 현대 직장인들의 행태엔 말로 다 하지 못할 집요함이 묻어났다. 그의 하루 일과도 모자라 일거수일투족이 초 단위로 쪼개어 올라오는 지경이었으니, 이건 일을 하러 온 건지 사생팬질을 하러 온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내가 저 사람이랑 잘 알던 사이예요.’라고 한다면 무슨 좋은 꼴을 볼까.

자고로 지나치게 눈에 띄는 남자와는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그녀는 지나온 삶을 통해 뼈저리게 배워 왔다.

그리고 준성은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눈에 띄는 남자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조건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고, 올곧은 성품과 정의롭고 공정한 태도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자괴감마저 심어 줬다. 재벌 3세라는 배경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비하면 그저 사족이었다.

당연히 그의 주변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그렇게나 가진 게 많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다정한 그에게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호감을 내비쳤다.

특히나 여학생들 사이에서 송준성이란 공공재와 같았다.

모두가 함께 좋아해도 용서가 되는 사람.

당장에 누군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송준성 좋아하는 사람 접어!’를 외치면 서울 땅 전체가 반으로 접힐 거란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돌았으니까.

설령 그가 삼천 궁녀를 모집한대도 그녀들은 군말 없이 선착순으로 줄을 섰을 것이다.

그리고 저 역시 눈치를 보다 2981번쯤에 슬쩍 발을 들였겠지.

‘……미친. 아니라고 반박을 못 하겠네.’

제가 떠올린 생각에 스스로 좌절한 수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송준성에게 굳이, 흠이랄 것도 없는 흠을 잡아내 보자면 지나치게 좁은 인간관계 정도일까.

아마 그를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에겐 되게 의아한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친하다는 사람들 치고 아주 사적인 일로 그를 불러낼 수 있느냐, 물으면 가능하다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기가 많은 것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다소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남의 노력에 편승해 이득을 보려는 무리들조차 그를 이용하기는커녕, 간단한 부탁조차 섣불리 꺼내기 힘들어했으니까.

그는 태생이 지배자였다. 그가 가볍게 던지는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수긍하며 따르기 일쑤였다. 눈에 띄게 앞에 나서지도 않고, 딱히 그런 분위기를 주도한 적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쭉 함께였다는 수혁을 제외하면 그의 곁에 ‘진짜’ 친구로서 함께한 건 아마도 수진이 유일할 것이다.

그 덕분인지 그녀는 여러모로 귀찮은 일에 시달리곤 했다. 매일같이 준성과 함께―가끔은 수혁까지 함께―하는 그녀를 향한 질투심 어린 눈길 정도는 차라리 애교였다.

“진짜 친구였으면 상무님에 대해서 잘 알겠네요? 혹시 개인적으로 막 연락도 하고 그랬어요?”

“그럼 둘이 통화할 땐 서로 이름 부르는 거예요? 준성아, 수진아, 막 이렇게? 어머, 어머, 웬일이니, 미쳤다. 상상만 해도 내가 코피 터질 거 같아!”

“잠깐만, 그럼 수진 씨는 상무님이 여기 오신다는 거 먼저 알고 있었던 거야?”

“으음? 그랬어? 그런데 왜 커피 가져다준 날엔 그런 말 안 했어? 어째 그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반응이 없더라니, 익숙해서 그랬나?”

잔뜩 흥분해 짖어 대는 승냥이 떼 뒤로 웅성웅성, 반응을 시작한 사람들의 시선이 꽂혀 든다. 겁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상황에 벌써 두통이 인다.

이래서 가급적이면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러나 과한 것은 아니하는 것만 못하는 법.

그녀는 지나치게 반응이 없었던 게 문제였다.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 바빴다. 아니,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당시의 피로감이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것 같아 절로 발길이 돌려졌다. 눈치 빠른 나 과장은 바로 그 점을 꿰뚫었다.

‘수진이 혹시 상무님이 구남친이었어? 왜 그렇게 피해 다녀?’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걘 그냥……이 아니라.’

얌전히 밥을 먹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돌직구에 저도 모르게 대답해 놓고 입을 가리는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바래졌다.

아, 망했어요!

‘……어라? 수진이 방금 걔, 라고 한 거?’

나 과장의 얼굴엔 한결 음흉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시점에서 수진은 나 과장의 레이더망을 빠져나가는 걸 포기했다.

그러고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결국 이렇게 제대로 덜미가 잡혀 버렸다. 여기저기서 빛나는 눈동자들을 대하려니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여기서 삐끗했다간 끝장이다.

“음? 근데 이상한데? 수진 씨 K대학교 나왔잖아. 우리 별님은 미국에서 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미심쩍다는 투로 태클을 거는 민효은 주임의 태도야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니 그렇다 치자.

“별님이라뇨?”

“이름 한자가 별 성(星)이라며. 그러니까 별님이지. 벌써 다들 난리예요. 살아 있는 별님이라고.”

“그야말로 얼굴부터 자체 발광이시잖아요. 진정 빛나는 남자네요. 어떡해.”

사무실의 막내인 이유리 사원의 얼빠진 대꾸에 이어 영혼이 저만치 안드로메다쯤을 배회하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1년 차 오민영 사원까지.

정말 가지가지 한다. 저런 인간이 한둘이 아니니 그 며칠 사이에 이런 소름 돋는 별명까지 붙었겠지. 오그라드는 손가락을 열심히 펴고 있는데 나 과장이 묻는다.

“그래서 우리 별님은 학창 시절 때 어땠어?”

“그냥, 뭐. 멋지고…….”

“그래, 멋진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좀 더 디테일을 살려 보지 않으련?”

“그런 거 있잖아요. 햇살이 그 사람만 비추고 있고, 웃으면 막 반짝거리고 투명한 초록빛이 배경에 쫙 깔릴 거 같은 느낌? 100m 앞에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놓고 봐도 혼자만 4D로 보이는 그런 효과라고 해야 하나…….”

“캬, 묘사하는 것 좀 보게. 우리 수진이도 은근 숨은 팬이었네?”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나 과장의 말에 내심 움찔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주절주절 나오는 대로 주워섬기다 보니 꼭 팬밍아웃이라도 해 버린 기분이다.

“그땐 저도 소녀였던 시절이라서……. 어릴 때니까, 좀 더 풋풋하기도 했고……. 워낙에 눈에 띄는 분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인상이 강하게 남은 데다 추억 보정이란 것도 있고 그렇죠, 뭐.”

“어우, 풋풋했대. 어우야, 어떡해. 진짜 말만 들어도 느낌이 팍 오네요. 인기 엄청 많았겠죠? 혹시 여친은 있었어요?”

“당연히 있었겠지 없었겠어? 저만치 서서 눈빛만 쏴도 그냥 다 홀라당 넘어갈 거 같구만. 하, 내가 진짜 딱 10년만 젊었어도, 아니 딱 5년만이라도…….”

“어머, 과장님. 무슨 소리세요, 임자도 있으신 분이! 이젠 저희 차례죠!”

변명처럼 주절거린 소리에 괜히 반응만 거세졌다. 어색하게 웃어 보인 수진이 젓가락으로 식판 위의 음식을 뒤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소문만 무성했어요. 누가 좋아한다더라. 고백했다 차였다더라. 썸 타는 사람이 있다더라. 뭐 이렇게요. 근데 딱히 물어본 적은 없어서 진짜인 줄은 모르겠구요.”

“친구였다며? 별로 안 친했어?”

“과장님도 참. 동성 친구도 아니고 이성 친구끼리 그런 이야기를 왜 해요?”

“그런가? 요즘 애들은 거침없던데. 그 시절이면 그런 이야긴 안 하는 때야? 그럼 지금은 따로 연락은 안 하는 거고?”

“1학년 마치고 바로 유학 가 버리는 바람에 뭐, 거기서 끝이죠.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요. 절 기억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대답은 하는데 서글픈 이유는 뭘까.

“에이, 좋다 말았네.”

“왜요, 난 좋은데. 학창 시절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기분인데요.”

“난 그런 게 궁금한 게 아니라고. 최근 상황이 궁금한 거지.”

대놓고 김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효은과 여전히 설레어 죽겠다는 유리의 대화가 더 이어지는 동안 수진은 쓴 입맛을 다셨다.

내심 한 번쯤은 연락이라도 오지 않을까 했는데.

하지만 지난 2주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긴장했던 게 무색할 만큼, 아무 일도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고작 대학 시절 1년을 함께 보낸 사이가 아닌가.

게다가 친구니 뭐니 말만 좋았지, 정작 그의 유학 소식마저 남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고.

그렇게 유학을 떠난 그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제가 먼저 연락을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좀 더 있다가. 조금만 더 나중에.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덧 정말로 연락을 하기도 애매한 시기가 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과제다 시험이다, 성적을 유지하는 것만도 벅찬데 토익을 비롯한 외국어부터 온갖 자격증까지.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마냥 그 일만 생각하고 살 수도 없던 때였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멀리 가 버린 사람에게 미련을 가지고 질척대는 것처럼 느껴질까 지레 단호히 끊어 낸 것도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액션이 없었던 걸 보면 아마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전 그럼 이만 일어날게요.”

“음? 수진 씨 그게 다 먹은 거야?”

“오늘은 별로 입맛이 없네요. 일이 많아서 그런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왠지 식당 내의 웅성거림이 심해진 것 같다. 호기심 많은 나 과장이 빼꼼, 고개를 뺐다.

“무슨 일 있나?”

“그러게요?”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저만치서 한 떼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어머, 꺅, 세상에. 들뜬 속삭임이 이어져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걸 짐작한 그녀가 잽싸게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머! 상무님이네!”

“헐 진짜요? 시찰 나오신 건가? 웬일이야, 웬일!”

“잠깐만 수진 씨, 어디 가? 친구였다면서. 가서 인사라도 해야지.”

“그래요! 겸사겸사 우리도 인사 좀 나누게.”

“네?”

다 먹은 식판까지 들고서 인사는 무슨 인사야!

그러나 미처 피할 새도 없이 효은에게 붙들렸다. 덩달아 기대 가득한 눈으로 합세하는 유리 덕분에 도망치지도 못하고 떠밀리다시피 그에게 다가섰다. 때마침 몇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던 준성이 그녀를 바라본다.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이렇게 무방비로 마주치게 되다니.

“아…….”

어정쩡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려는데 그가 휙 하니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멀어 못 본 걸까? 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정확히 눈이 마주쳤었는데…….

“뭔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나?”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묘하게 표정도 좀 굳으신 거 같네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어떻게 사람이 날마다 기분 좋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친구한테까지 그럴까? 수진 씨, 진짜로 아는 사이 맞아요?”

“기억 못 할 거라고 했잖아요. 먼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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