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2화

살다 보면 언젠가 이렇게 그를 직접 만나게 될 날이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다만, 이렇게 익숙한 배경의 사무실에, 그 많고 많은 HJ그룹의 계열사를 다 제치고 하필 호텔 라비타의 백 오피스에 떡하니 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뿐이지.

더군다나 준성의 태도는 상상했던 것과 아주 달랐다. 예전처럼 친근한 태도를 보일 거란 기대는 당연히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차가워도 너무 차갑고 사무적인 태도라 살짝 마음에 상처를 입은 기분이었다.

“기억 못 하는 건가?”

그렇다면야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긴 한데 속상한 건 마찬가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심장 박동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던 수진이 문득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곧장 근처의 비상계단을 향해 뛰듯이 걸으며 익숙한 번호를 호출하는 손끝이 달달 떨렸다.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을 떠올린 참이다.

비상구의 문을 박차고 나서자마자 통화가 연결됐다.

“야, 차수혁!”

― 나 귀 안 먹었다.

느긋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울컥했지만, 우선은 눌러 담았다.

“나 방금 준성이 봤는데 설명이 필요할 거 같지 않아?”

― 오, 준성이가 꿈에 나왔다고? 축하한다. 그럼 오빤 더 자야 하니 끊자.

“장난치는 거 아니니까 똑바로 대답해! 너 준성이 돌아오는 거 알고 있었지? 왜 말 안 했어?”

― 그걸 내가 말해 줘야 하는 이유를 100자 이내로 설명해 봐.

“지금 농담해?”

― 풋, 네 이런 반응을 봐야 내가 즐겁지 않겠냐?

천연덕스럽게 본심을 드러낸 수혁이 키득거리며 웃어 댔다. 그녀의 대학 동창이자, 10년을 함께하며 원수 혹은 의지가 되는 베스트 프렌드의 어느 중간쯤에 걸쳐 있는 친구였다.

그리고 준성의 오랜 죽마고우인 수혁은 현재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매우 안타깝게도.

“진지하게 못 들어? 나 지금 엄청 심각하거든?”

― 새삼스럽게 왜 그래? 너 그렇게 마주칠 상황 노리고 그 호텔로 입사한 거 아니었어?

“그거 아니라고 했지!”

― 농담이야. 정색하기는. 그걸 내가 알지, 누가 알아주겠냐. 우리 학교에서 준성이가 재벌 3세라는 거 몰랐던 사람도 너뿐이었는데.

그래. 그래서 차라리 잘된 거라 생각했었다.

고백 못 해서 다행이고, 이대로 멀어져서 다행이라고.

못 오를 나무 따윈 그냥 쳐다도 안 보는 게 현명한 법이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봤자 내려올 땐 그야말로 날개 없는 추락뿐이니까.

그렇게 긴 세월을 애써 눌러 삼켜 온 마음이었다. 이제 어디서든 그를 만나더라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만큼 안정이 되…….

“윽…….”

기는 개뿔!

방금 전 그와 맞닥뜨린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과도하게 피를 뿜어 댄다. 뒷골이 띵해지는 걸 간신히 추스르며 숨을 돌리는데 웃음기 가득한 물음이 이어졌다.

― 그래서 준성이 반응은? 인사는 했어?

“인사는 무슨 인사! 느닷없이 마주쳤는데 눈앞이 깜깜해서 뭘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구만!”

― 푸하하핫……!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여기서 마주칠 수가 있는 건데? 하, 차라리 날 몰랐으면 좋겠……. 아니다, 진짜 날 몰라보는 거 같긴 했어.”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하아, 그래.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되겠지? 맞아. 그냥 회사 상사잖아. 후우, 침착하자. 그래.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게. 혹시 알은척이라도 하면 ‘어머, 기억하시는구나!’ 하고 막, 응? 그냥 옛날에 좀 알던 사이처럼 인사하고 그럼 되는 거고. 그치? 그럼 되겠지?”

― 얼씨구?

수화기 너머로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수진은 못 들은 척 숨을 고르며 다짐했다.

그래. 이렇게 정신 승리라도 해야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돼야 일도 손에 잡히고, 일을 해서 돈이 들어와야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도 평화가…….

― 하긴 뭐. 네 안부도 안 묻고 그동안 연락도 없었던 거 보면 그쪽에서도 독하게 마음먹고 연 끊자고 덤빈 건데, 지금은 기억 못 할지도 모르지.

……와야 하는데, 왜 정작 그걸 확인당하니 가슴이 쿡쿡 쑤시는 거지?

“어, 뭐. 그렇지. 그러니까.”

― 문제는 굳이 친구 사이에 그럴 필요가 있었느냐는 거지. 너야 사적인 감정으로 불편했을지 모르겠다만, 준성이 쪽에서는 굳이 왜 그랬을까아?

묘하게 끝을 늘인 말투가 굉장히 얄밉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이니?

“그, 그거야 뭐 기껏 공부하러 유학 갔는데 멀리 있는 사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잖아. 당연히…….”

― 에이, 겨우 그런 이유로? 그리고 내가 아는 준성이는 겨우 그런 거로 친구를 멀리할 놈이 아닌데.

“…….”

― 솔직히 같은 남자인 입장에서 보면 굳이 잘 지내던 친구랑, 그것도 여자인 친구랑 연을 끊다시피 할 만한 일이라곤 한 가지뿐이거든. 남녀로 불편하게 엮였을 때.

“…….”

― 예를 들면 고백하고 차였다거나, 본인은 썸이라 생각했는데 어떤 둔팅이가 죽어도 눈치를 못 채서 헛발질만 했다거나.

“허! 썸 같은 소리 하네. 너 지금 뭔가 착각하나 본데, 걔 준성이야. 송준성이라고.”

― 아니 뭐, 일반적인 남자의 의견으론 그렇단 소리지. 근데 만약에 말이야. 그 독하고 집요한 놈이 그 오랜 시간 동안 가슴속에 꽁하니 묵혀 놓은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와우, 야. 나 방금 좀 소름 돋은…….

뚝.

저도 모르게 종료 버튼을 눌러 버린 수진이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바라봤다.

방금 뭔가 굉장히 섬뜩한 느낌이었는데…… 기분 탓이겠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짜. 차라리 날 기억 못 해서 그런 태도였다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아무렴 그 송준성이 뭐가 아쉬워서.

손꼽히는 대기업인 HJ그룹 회장님의 셋째 아들로 집안과 능력, 외모까지 모두 갖춘 완벽남이자, 최고의 사윗감으로 현재 정재계에서 가장 핫하게 이름이 오르내리고 계신 분이 아닌가.

심지어 그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철저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해 HJ그룹의 차기 오너로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받는 그 송준성이, 누굴요?

“단단히 미쳤구나, 네가.”

대충 판단해 봐도 천상계와 지옥 밑바닥 끝의 차이가 느껴지는데 무슨 개소리냐고.

“아니다, 미친 건 나지. 에휴……. 내가 어쩌다 얘한테 그걸 말한 거야.”

할 수만 있다면 저 원수 같은 친구의 머리통을 마구 후려쳐서라도 술에 떡이 된 채 준성이 보고 싶다며 징징댔던 날의 기억을 지워 주고 싶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랴.

비록 평생의 놀림감이 되긴 했지만,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벌써 7년이 넘도록 잘 지켜 주는 친구였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진즉에 두 사람의 우정은 박살 났을 것이다. 더불어 이 회사도 더는 다니지 못했을 거고.

그리고 오늘처럼 준성을 다시 보게 되는 날은 꿈도 꾸지 못했겠지.

“그래, 저런 놈이라도 평생 친구는 얻었잖아. 내 인생이 이만하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라겠니.”

픽 웃어 버린 수진이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단 한 번도 욕심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열병처럼 지독하게 앓았던 감정도 지금은 다 가라앉았고, 이젠 좋은 추억이 되었다고 믿는다. 너무도 긴 시간을 혼자 잘 지내 오지 않았던가. 아쉽긴 해도 그가 없어서 죽을 만큼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단 소리다.

어차피 연애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다. 멀쩡한 사람이 연애 한번 못 하고 있냐는 주변의 등쌀에 밀려 시도는 해 봤지만, 그조차 흥미가 나지 않아 두어 번 소개를 받아 본 것으로 끝이었다.

대신에 그녀의 삶을 차지한 건 지금의 일이었다. 별다른 목표 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던 그녀의 삶에 호텔리어라는 직업은 처음으로 생긴 이정표였다.

왜 굳이 호텔리어인지. 왜 굳이 준성의 집안과 관련이 있는 호텔 라비타를 선택했는지.

그 선택에 송준성이라는 존재가 전혀 상관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현재의 일에 완벽하게 적응한 상태고, 더불어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라 생각했는데…….

문득 고개를 저어 버린 수진이 사무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쉽기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리고 일이나 하자.”

겨우 그 얼굴 한번 봤다고 벌써 설레서는.

잡념을 떨쳐 내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일에 집중하기 힘든 날이 될 것 같지만, 현실에 묶인 직장인에겐 이런 감상도 사치일 뿐이었다.

* * *

“뭬야? 상무님이랑 같은 학교였다고? 게다가 친구?”

“쉬, 쉬잇! 과장님 조금만 목소리 좀……!”

기함한 수진이 허겁지겁 나 과장의 입에 손을 올려 봤지만 이미 늦었다. 하필 점심시간일 때 직원 식당에서 이 무슨 망언을 터뜨렸단 말이냐.

“헐, 진짜요? 수진 씨랑 상무님이 동창이라고?”

“잠깐만, 잠깐만요. 어느 시절 동창이라는 거예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라는 건 진짜로 친한 친구라는 소리죠? 그냥 ‘지나가던 같은 반 친구1’ 이런 게 아니고?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역시나,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승냥이 떼처럼 몰려든 팀원들이 한마디씩 해 댔다. 그것도 모자라 반경 10m 내의 사람들에게서 귀를 쫑긋이 세우며 집중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별로 큰 목소리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상무님’이라는 호칭이 주는 위력은 막강했다.

소문만 무성했던 낙하산의 실체가 등장한 지도 어언 2주째였다.

HJ그룹 역사상 최연소 상무 이사 송준성.

그가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것만도 놀라운데, 떡하니 등장한 실물은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대박! 대박! 대박! 이것은 그야말로 대박! 저 미친 미모 어쩔 거예요!]

[사진으로만 뵙다가 오늘 코앞에서 뵙고 진심 눈멀어 버리는 줄. 레알 실물 미쳤음. 아직 인류의 과학 기술로는 이분의 실물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음요.]

[아니 와, 저 방금 상무님 배경으로 셀카 찍었다가 제 얼굴 보고 폰 뿌실 뻔. 아니 어떻게 제 얼굴이 이렇게 보이죠? 근데 실물보다 못 나온 게 이거라고요? 너무하심. 진짜 세상 혼자 사시는 분. ㅠㅠ]

[전 오늘부터 상무님 사진 보면서 태교하기로 했어요. 안구 정화, 자연 라식. 심신 안정에 효과 만점입니다. 부작용이 있다면 남편이 오징어로 보이는 효과가…….]

[진정 얼굴이 복지다. 안구 복지까지 책임져 주시는 우리 상무님!]

등장한 당일부터 사내 메신저와 인트라넷 게시판은 그를 실물로 접한 사람들의 간증을 빙자한 주접과 인증 샷으로 시끌시끌했다. 지각 직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는데 먼저 가라며 양보해 주시더라. 늘 먼저 인사를 해 주시더라. 몰래 사진을 찍다 눈이 마주쳤는데 웃어 주시더라, 등등.

상황 자체야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워낙에 주목받는 존재라서인지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의미 부여를 하며 추앙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