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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님, 방 잡을까요?

1화

매일 똑같은 출근길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발걸음이 가볍다.

단순한 컨디션의 문제가 아닌 기분부터 들뜨는 느낌.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런 날.

그러나 서른 해 동안 세상을 살아온 여자에겐 촉이라는 게 있다.

오늘은 뭔가 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금요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이 전해 주는 경고였다.

“안녕하……!”

“어, 수진이! 마침 잘 왔다!”

사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명인 과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덮쳐 왔다. 질질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곳은 복도 건너편의 탕비실. 왜 하필 이리로 데려오나, 싶은 것도 잠시.

“네? 누가 왔다고요?”

“이번에 새로 오신 상무님! 엄청 젊던데? 캬, 산 사람 얼굴에서 형광등 켜진다는 게 뭔지 내가 오늘 제대로 깨달았지 뭐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나 과장이 소녀처럼 방방 뛰어 댔다. 그녀의 주책을 물끄러미 감상하던 수진은 문득 덮쳐 오는 불길한 상상에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요샌 다들 관리 잘하고 사는 시대잖아요. 거기다 우리 호텔은 워낙에 연예인들도 많이 오는 곳이고. 별다를 거 있나요, 뭐.”

“무슨 소리야. 연예인들이야 어차피 얼굴도 익숙하고 각오를 하고 보는 건데 그게 같아?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딱 맞닥뜨리는 그게 진정한 비주얼 쇼크지. 어우야 말도 마라. 30년 전에 삭아 버린 내 연애 세포에 광명이 화악 찾아드는데…….”

아니. 그건 네 살 딸내미를 두신 어머니가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러나 그런 말을 면전에 대놓고 할 만큼 무모하지 않은 수진은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올해 초, 기획실 담당 상무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퇴직을 하셨다. 꽤나 중요한 위치의 중역이었던 데다, 미처 끝내지 못한 프로젝트가 제법 남아 있어 당장 새로운 인물을 채워 넣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후 두 달이 지나도록 해당 인사에 대한 소식이 없었다. 체계가 꽉 잡힌 대기업 계열사에서 벌어지기엔 상당히 괴이한 일인지라, 항간엔 그 자리의 업무량이 지나치게 과도해 상무님이 탈주를 했다는 둥, 덕분에 온갖 인재들이 그 자리를 고사하고 있다는 둥, 실은 어떤 거대한 낙하산을 떨어뜨리기 위해 기존 인재를 치워 버린 거라는 둥의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쨌거나 소문의 끝은 당연히 어떤 낙하산이 떨어지느냐로 좁혀졌다. 실제로 HJ그룹의 계열사에는 오너 일가의 형제들과 그 자식들이 대거 포진해 있기도 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 일가친척 중 누군가가 등장하겠거니, 한 게 대다수 사람의 예상이었다.

그렇다 해도 설마 그런 일이 생길까 싶었다.

그녀가 호텔 라비타에 입사를 한 지도 어언 6년째.

그동안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면 충분히 회사의 일대기를 쓰고도 남았다. 슬슬 경영 일선에 등장하기 시작한 HJ그룹 회장님 댁의 3세들 소식 정도야 꿰차고 있단 소리다.

가령 일은 뒷전이고 학업에 미쳐 두문불출한다는 첫째 아들이라든가, 약간 음지의 사업에서 활약 중이라는 방탕한 둘째 아들이라든가, 본사의 기획실에서 근무하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MBA를 수료하고 현지 지사에 근무 중이라는 성실한 막내아들에 대한 소문 정도는.

음, 딱히 걸릴 건 없는데?

“그나저나 귀국하자마자 여기로 보내는 거 보면 제대로 키워 볼 생각이신 거 같지 않아? 회장님이 우리 호텔에 유난히 애착이 강하신 건 사실이다만, 다른 자리 다 두고 굳이 여기다 집어넣는다는 건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이란 뜻이겠지?”

근데 점점 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에 가까워지는 듯한 이 기분은 뭐지?

“우리 딸이 조금만 컸어도 그냥 사윗감으로 노려보는 건데 말이야. 인물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좋다더니 이 집안도 어쩜 딱 그래. 너도 가서 보면 바로 이해할……. 어―이, 수진이? 지금 어디 가니?”

슬그머니 나 과장의 앞을 벗어나려다 딱 걸린 수진이 태연히 대답했다.

“네? 일해야죠. 곧 업무 시간인데.”

“그냥 가면 어떡해? 준비해야지.”

나 과장의 손가락이 정확히 커피 머신을 가리켰다. 의도는 알고도 남았지만, 굳이 확인해 보고 싶은 게 또 사람의 마음이다.

“과장님이 가지고 들어가실 거죠?”

“뭔 소리야. 커피는 네가 만드는데 나만 그 은혜로운 얼굴을 또 영접하라고? 그런 짓 하면 벌받지, 이것아. 그리고 내가 누구냐? 의리 하면 나 과장. 알지?”

아니요. 그런 의리 따윈 없어도 되는데요.

“얼른 준비해서 들어가.”

결국 핑곗거릴 찾지 못하고 떠밀리듯 머신 앞에 섰다. 뭔가 굉장히 찝찝한 기분이다. 하필이면 커피라니. 더욱 불길하다.

‘아니겠지. 설마 그런 일이 생기겠어?’

생각해 보라고.

아무렴 회장 일가의 친척, 사돈의 팔촌 중에 미국 유학에 본사 근무를 거치고 MBA까지 수료하고 온 겁나게 잘생긴 남자가 설마 그 사람 한 명일까.

“실례합…….”

쾅!

반쯤 열리던 문이 그대로 닫혔다. 머리로 인식하기 전에 손이 먼저 저질러 버렸다.

오 마이 갓.

나 방금 뭘 본 거야.

잠시 제 눈을 의심하며 멍하니 서 있던 수진은 뒤늦게 이곳이 회의실이란 사실을 떠올리곤 후다닥 문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 그만…….”

“아, 깜짝 놀랐네. 김 주임, 아침부터 왜 이래? 잠이 덜 깼어?”

신 부장의 가벼운 타박이 뇌리 바깥으로 흩어진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이미 머릿속은 정지했다.

“암튼 뭐, 자주 볼 일은 없겠지만 인사라도 하고. 이분은 이번에 전략기획실로 부임하신 송준성 상무님. 그리고 여긴 우리 영업부 객실판촉팀의 예쁜이 김수진 주임입니다.”

“송준성입니다.”

세상에. 정말 송준성이었다.

두 번이나 그 이름을 듣고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려 10년 만에 만난 그는 변하지 않은 듯,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곧게 뻗어 나간 짙은 눈썹 아래 감정을 읽기 힘든 깊은 눈동자와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콧대. 균형이 잘 잡혀 신뢰감을 주는 입술은 같은 이목구비임이 확실한데도, 그 시절에 비해 한결 성숙해진 느낌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였다. 차분히 정돈된 머리카락과 넓은 어깨에 딱 맞아떨어지는 짙은 블랙의 슈트. 그 안의 새하얀 드레스 셔츠와 짙은 네이비 계열의 타이. 소매 끝에 살짝 드러난 더블 커프스까지.

너무도 완벽히 갖춘 차림에서 기억하던 모습과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표정 없이 사람을 직시하는 눈빛에는 서늘함마저 감돌아서 더더욱 그러했다.

반듯한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금욕적인 분위기나, 주변의 공기마저 가라앉히는 듯한 차분함은 여전했지만, 이십 대의 치기와 풋풋함이 사라진 남자에게선 더 완연한 수컷의 냄새가 났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냥을 나선 육식 동물과 같은 냄새가.

“뭐 하고 있어? 빨리 커피나 주지 않고.”

으악,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놀라서 잠시 선 채로 기절을 했나 보다. 기겁하며 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달달 떨린다. 달그락 소리에 제 심장이 덩달아 바닥까지 추락했다.

“김 주임 어째 이상하네. 이거 이거, 혹시 우리 상무님이 너무 멋져서 긴장하는 거야? 거 요샛말로 심쾅? 심쾅이라 하나?”

아니, 그건 심쿵이고요!

가뜩이나 긴장해 있는데 한다는 소리에 속에선 천불이 난다. 만만한 사람 하나 붙잡고 난도질해 가며 분위기를 주도하려 드는 신 부장의 못된 버릇이 발동하려는 순간이다.

“우리 김 주임이 야― 이―래서 유니폼 차림이 끝내주는데 말이죠. 하필 사무직으로 들어앉아 버리는 바람에 그걸 못 보여 주네요.”

역시나, 입버릇처럼 시작된 외모 평가와 동시에 양손으로 친히 에스 라인까지 그려 주시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하지만 별수 있나. 힘없는 월급쟁이는 서서히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떠올리며 한 귀로 흘리는 수밖에.

“그래도 보실 기회는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우리 호텔 홍보 모델로도 활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커피, 누가 뽑은 겁니까?”

딱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 들려온 말이었다.

얼결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려다 눈이 마주쳤다. 기분 탓인가. 왠지 신 부장의 말을 끊어 내려 한 느낌이었는데.

“직접 내리신 건가요?”

“허허, 눈치도 빠르십니다. 우리 김 주임이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이래저래 재주가 많죠. 뭘 해도 먹고살 팔자라고 해야 하나.”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절 그렇게 눈여겨보신 겁니까? 주절주절 이어지는 말이 기막혀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사실 여자가 일만 잘하는 것보다 저렇게 외모도 그럴싸해야 상사로서 좀 키워 줄까 하는 마음도 드는…….”

그때였다. 묵묵히 앉아 있던 준성이 툭 쳐 내듯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신 부장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평생을 눈칫밥으로만 먹고살았던 신 부장이 그 손짓에 어린 불쾌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군요.”

그러나 이어진 건 나직한 대꾸였다. 이내 잊고 있었다는 듯이 커피 잔을 집어 드는 남자를 보는데 묘한 긴장감에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맛있네요.”

아, 제발. 그런 얼굴로 웃지 마. 심장에 무리가 가잖아.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진 입술 선과 가만히 내리깐 속눈썹.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무슨 커피 광고라도 찍는 양 한결 그윽하다. 무표정일 때는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 미소와 함께 누그러진 순간엔 눈앞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심쾅이고 심쿵이고, 당장 청심환부터 사다 먹어야 할 기세다.

“왠지 옛날 생각도 나는 거 같고……. 안 그런가요, 김수진 씨?”

게다가 이건 무슨 의미일까.

‘혹시 나 기억해?’

차마 물을 수 없는 질문을 삼키며 바라보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신 부장에게로 눈을 돌렸다.

“되도록 잡담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이야기나 듣자고 바쁜 시간 쪼개 앉은 자리는 아니니까요. 더군다나 당사자가 옆에서 듣기엔 불쾌한 내용 아닙니까?”

“아, 죄송, 죄송합니다. 크흠, 제가 상무님을 뵙느라 들떠서 그만 실수를…….”

“저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죠.”

툭하니 신 부장의 말을 잘라 낸 준성이 다시 우아한 태도로 커피 잔을 입에 댔다. 그러자 그대로 튕겨 나온 신 부장의 시선이 쭈뼛쭈뼛 수진을 향했다. 시뻘게진 채로 입술만 벙긋대는 신 부장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속도 착잡해졌다.

“어어, 김 주임. 미안해. 내가 오늘 좀 실수를 했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알지? 허허……. 내가 김 주임을 워낙에 딸처럼 생각해서…….”

그런 사람 확실하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집어삼키며 애써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더욱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럼 이만 나가 봐요.”

“네? 아, 네. 그럼…….”

“그보다 신 부장님. 방금 이야기하셨던 건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아, 그, 그렇죠. 그 이야길 하다 말았었군요. 흠흠, 지금은 이런 자리라 확실하게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가차 없이 주제를 돌려 버리는 준성의 서슬에 인사도 채 끝내지 못하고 떠밀리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진땀을 흘리며 주절거리는 신 부장과 그런 신 부장을 차갑게 바라보는 준성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뒤늦게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후아…….”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제 눈으로 확인한 현실임에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한 손으로 제 뺨을 토도독, 때리던 자세 그대로 멈칫한 그녀가 다시 문을 바라봤다.

“진짜 와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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