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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que 2 (12/12)

Epiloque 2

가족

[언니 오늘 뭐 해? 영화 콜?]

“아. 오늘은 안 되는데…….”

동생에게서 온 문자를 현관에서 발견한 정원은 신발을 신다 말고 오늘은 만나기 어렵다는 답장을 보냈다. 한창 학기 중이라 바쁠 텐데 금쪽같은 주말을 언니에게 할애하려는 동생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긴 했지만, 정원에게는 선약이 잡혀 있었다.

정원이 서울 근교에 있는 요양원으로 봉사를 다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계기는 ‘그 사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은 정원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 매주 정신과 상담을 받고,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계에 다다른 정원은 회사를 퇴사해야 했다. 옆자리를 볼 때마다 악몽 같은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후, 1년간 정원은 폐인처럼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보다 못한 동생이 정원의 멱살을 끌고 간 곳이 대학교 봉사 활동차 다녔다던 요양원이었다.

「봐. 언니. 언니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너무도 직설적인 일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곳에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도우며 정원의 정신도 서서히 나아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도우며 치유받다니.

“그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집을 나온 정원은 생각보다 찬 공기에 목도리를 입술까지 끌어 올렸다. 춥긴 하지만, 하늘이 높고 쾌청했다. 유독 길게 느껴졌던 겨울이 지나고, 새롭게 맞이한 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건’을 뉴스에서 본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요양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다양한 도움을 필요로 했다. 전쟁 같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짬이 난 틈에 정원은 요양원의 자랑인 뒤뜰 벤치에 앉았다. 제법 큰 분수대가 자리한 뒤뜰은 야외 행사를 할 수 있게 꾸며져 있어 나름대로 이 근방의 핫플레이스였다. 날씨가 좋아 정원처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볕을 쬐고 있었다.

“어머~ 임 여사님. 그거 뭐야? 진짜 모피야?”

막 새싹이 움트려 하는 등나무 정자에 서너 명의 환자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을 정원은 흐뭇한 눈으로 바라봤다. 각자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르지만 비슷한 나이대인 중년 여성들의 중심 화젯거리는 휠체어에 앉은 임 여사가 어깨에 걸친 두툼하고 화려한 모피 코트였다. 정원이 멀리서 보기에도 수백만 원을 호가할 고급 모피 같았다. 같은 환자복을 입어도 귀티가 느껴지는 임 여사는 이곳에서 꽤 유명했다. 담당 보호사가 따로 있었고, 병실도 VIP룸을 썼다.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 있는데 원체 돈이 많은 집안이라고 들었다.

“임 여사가 맨날 노래를 부르는 그 아들이 사서 보냈다잖아. 아주 효자야! 부러워 죽겠어.”

다른 환자가 윤기 흐르는 모피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얼굴도 한번 안 비추는 게 효자는 무슨.”

“요샌 돈이나 때맞춰 잘 보내는 게 효도지, 뭐. 그리고 임 여사 아들이 한동안 몸이 아팠다고 그랬어. 맞지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어투로 묻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닫고 있던 임 여사가 모피를 매만지며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임 여사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환자였다. 이따금 아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면 언제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저처럼 나쁜 일을 겪었다는 사연은 건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또다시 고개를 드는 우울한 기분에 정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부러 기지개를 켰다. 저나 임 여사나 걱정하며 기다리는 가족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나아져야 했다.

“그만 들어가서 일이나 하자.”

건물 안으로 들어선 정원의 눈에 로비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를 워낙에 좋아하는 정원이기도 했지만 아이가 그녀의 눈에 띈 연유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혼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까맣게 반짝이는 머릿결과 새하얀 피부,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 아이답지 않게 오뚝한 콧날, 하트 모양의 빨간 입술. 감탄이 나올 만큼 또렷하고 예쁜 아이의 외모가 정원을 비롯한 주변 모두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어디 영국 사립 학교에 당장 데려다 놓아도 위화감이 없을 법한 차림이었다. 아이의 전신에서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가 광채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런 곳에서 그럴 리야 없겠지만 누군가 나쁜 마음에 데려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정원은 두리번거리며 아이의 부모일 법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염려가 된 정원은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왜 혼자 있어? 누구 보러 왔어?”

정원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까만 눈동자는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누나는 여기서 선생님들 도와주는 사람이야. 옆에 앉아도 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하고 점잖은 아이의 태도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 정원은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볼이라도 꼬집어 주고 싶은데 함부로 건드리기가 무서웠다. 이 정도의 아이라면 부모가 극성맞더라도 이해가 갔으니까 말이다.

시선으로만 아이를 쓰다듬던 정원은 아이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은 뭐야? 누나가 읽어 줄까?”

말수가 없는 데에 비해 낯을 가리지는 않는 듯 아이는 순순히 책을 정원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두 손으로 건넨 책의 제목은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좋아하는 책이야?”

아이가 끄덕끄덕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좋아하나 보다.”

못 참고 정원은 냅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이 차 많은 동생을 돌본 경험을 살려 실감 나게 동화책을 읽어 나갔다. 정말로 좋아하는 책인지 아이는 정원에게 몸까지 기울여 가며 책 속에 푹 빠졌다. 익숙한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막힘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은 마녀를…… 그러니까 마녀를…….”

몇 장 남지 않은 페이지를 넘기자 펄펄 끓는 솥에 마녀를 밀어 넣는 그림이 나왔다.

‘이렇게 잔인했던가?’

정원은 차마 이 예쁘고 맑은 아이에게 잔혹한 동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읽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조금 바꿔 주기로 했다. 이왕이면 동화 속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쪽으로.

“나아쁜 마녀를 따뜻한 물에 넣어 주고 마녀가 목욕하는 틈에 무사히 도망쳤습니다.”

“틀렸어요.”

“어?”

아이의 발음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또박또박했다.

“나쁜 마녀라고 안 쓰여 있어요.”

아이의 손가락이 정확히 정원이 바꿔 읽은 구절을 짚었다.

“마녀는 나쁘지 않아요. 아빠가 그랬어요. 마녀의 과자 집을 먹은 아이들도 똑같이 잘못한 거라고.”

‘세상 어떤 부모가 그런 식으로 가르쳐?’

오지랖이 발동한 정원은 아이 부모의 실수를 수습해 보고자 했다.

“물론 남에 걸 허락도 없이 함부로 먹으면 안 되지. 하지만 마녀는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한 거잖아.”

“마녀는 원래 사람을 먹어요.”

아이는 곧바로 반박했다.

‘그, 그런가…?’

웃음기 하나 없는 아이의 투명한 표정에 소름이 돋았다. 순진한 아이이기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왠지 정원은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정원 씨~ 여기 좀 도와줘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뒤뜰에서 누군가가 정원을 불렀다.

“아, 네! 미안. 어떡하지? 선생님들 도와주러 가 봐야 하는데. 어디 가지 말고 부모님 오실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야 된다?”

정원은 찬바람이 들지 않도록 아이의 목도리를 올려 주고 두툼한 코트 깃도 정리해 주었다. 정원의 얼굴을 빤히 보던 아이가 예쁘게 웃으며 정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좋은 사람.”

“……고마워.”

어색하게 웃은 정원은 아이에게서 느낀 찝찝함을 털어 내고 서둘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면 하루가 짧았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정원이 요양원을 나섰다. 쏜살같이 지나간 하루에 어느덧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요양원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러 뒤뜰로 나가던 중, 정원은 반가운 얼굴을 마주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종종 요양원에서 마주치던 젊은 남자 의사였는데 친절하고 살가운 태도로 환자들한테도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 선생님. 사복 차림이라 몰라볼 뻔했어요.”

“오래간만이에요. 정원 씨, 요샌 잠 잘 자요?”

하얀 가운 대신 잿빛의 두꺼운 코트를 걸친 의사가 싱긋 웃으며 대꾸해 왔다. 자기 환자도 아닌데 마주칠 때마다 신경을 써 줘서, 그 의사에게 상담도 받았던 정원은 고맙기도 하고 몸 둘 바를 몰랐다. 정원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고 잘생기고 자상한 의사를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어……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훨씬 좋아 보여요. 추운데, 마셔요.”

큼직하면서도 모양새 좋은 손이 정원에게 캔 커피를 건넸다. 문득 노을 볕을 받은 무언가가 작은 불꽃처럼 빛을 반사하며 정원의 눈을 찔렀다. 의사의 왼손 약지에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원은 따뜻한 커피를 건네받으며 반지를 유심히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가운데에 사슬 모양의 가는 띠가 새겨진 남성용 결혼반지였다.

‘결혼, 하셨었구나.’

실망감을 느끼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 정원은 부러 웃는 얼굴로 의사를 마주했다.

“주말인데, 진료 보러 오신 거예요?”

“아뇨. 가족들이랑 병문안이요.”

“아…….”

의사가 어딘가를 눈짓했다. 맥락상 ‘가족’을 가리키고 있음을 눈치채고 정원은 그 시선을 따라갔다. 의사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닿은 곳은 분수대 앞이었다.

웬일인지 휠체어를 탄 임 여사가 담당 보호사 없이 혼자 있었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선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임 여사의 한쪽 어깨에서 두꺼운 모피가 흘러내렸다. 정원은 임 여사가 그토록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아까까진 보지 못했던 검은 롱코트를 입은 남자가 그 앞에 서서 복잡한 표정으로 임 여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임 여사의 코트를 추어올려 주었다.

“어…?”

불안한 음성이 정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금 길게 정리한 머리카락 때문인지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정원이 그를 몰라보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왜 여기에…….’

정원의 눈은 그의 뒤에 숨어 있던 아이를 발견하고 더 커졌다.

그가 아이의 등을 조심히 임 여사에게로 밀었다.

“괜찮아.”

익숙하게 아이를 달래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넘기는 그의 왼손 약지에서 낯익은 은빛이 반짝였다. 그가 더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말했다.

“제가 좀 늦었죠. 엄마.”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충격에 정원은 캔을 떨어뜨렸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숨을 참았다.

온 세상이 타는 듯한 시뻘건 하늘. 빨갛게 흘러내린 노을 속에 잠겨 아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은 그가 처음 보는 얼굴로 환히 웃는다. 늘 그에게 드리웠던 그늘이라곤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무결점의 미소가 붉게 물들었다.

“인사해요. 제 아들이에요.”

완전하디완전한.

<식충 完_먐먐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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