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벌레
Praying Mantis
먹고 싶다. 먹히고 싶다.
막 눈을 뜬 미개한 상태일 때에도 내 안에는 그 두 개의 욕구가 생생하게 존재했다. 하나는 생존, 또 하나는 번식을 위한 본능이었다.
가장 먼저 나를 지배한 것은 생존 본능이었다. 역겨운 고기를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다가 맛있는 냄새를 따라온 곳에서 선우를 발견했다. 혼란스러웠다. 먹이의 피와 동족의 피를 모두 가진 선우의 육체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되는 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경계에 있는 존재였으니까.
내 본능은 번식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록 불완전하나 처음 만난 동족을 암컷으로 인식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본능에 지배됐다. 인간은 맛이 없었고 끝없는 식욕을 채우는 일은 끔찍했다. 그리고 내 암컷의 몸에서는 그보다 더 끔찍할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나는 내가 실수로 선우를 먹어 치우기 전에 교미에 성공해 그가 나를 먹어 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선우의 안에 숨어 있는 동족을 꺼내 주었다. 눈을 뜬 선우는 새로운 자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나처럼 변해 가는 선우의 모습이 기쁘지가 않았다.
내가 아직 미성숙했을 때, 선우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본능에 지배당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는 법을. 먹고 먹히는 행위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나는 그런 선우를 나와 같은 본능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서 괴물이라 배척당하는 존재로.
그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선우를 집어삼키려는 내 본능으로부터 그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선우를 떠났다. 그가 나 따윈 잊고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그의 몸속에 생긴 알도 내 손으로 없애 버렸다. 하지만 내 멍청하고 오만한 계획은 실패했다. 내가 선우를 떠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 선우는 번식을 위한 암컷이 아닌, 나의 주인이자, 하나뿐인 짝이었으므로.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잠깐 잊고 있었어.”
수술대 위에 앉아 고민하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하얀 지하실을 둘러보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선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아버지처럼 너를 이런 데 숨기려고 했다니.”
날 보는 동공이 활짝 열려 있다. 그 속에 나를 향해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반짝거렸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부시다.
“찾자. 어차피 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겠지. 전부 찾아내서 우릴 도울 한 놈만 살려 두고 깨끗이 없애 버리는 거야. 너랑 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고, 겸사겸사 장 형사가 할 일도 덜어 주는 거지.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 안 그래?”
내 계획에 선우가 만족해해서 기뻤다. 한 가지, 거슬리는 이름만 뺀다면.
“네 입에서 나오는 장 형사 얘긴, 듣기 싫어.”
선우 주변을 얼쩡거리던 장 형사를 먹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선우가 그러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직도 선우에게서 나던 그 남자의 냄새를 떠올리면 본능이 날뛰어 등이 쑤셨다. 선우는 놀란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화를 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웃었다.
“알았어. 안 할게.”
내 허리를 잡아당겨 자신의 다리 사이에 나를 가둔 선우가 내 품으로 파고든다. 선우는 늘 이런 식이다. 서슴없이 날 자신의 육체에 닿게 했다. 언제부턴가 매번 시험당하는 기분이다. 처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선우의 하얀 목덜미를 가렸다. 그 머리카락을 치우려다가 그냥 두었다. 그리고 집요하게 선우의 피와 살을 노리는 내 안의 괴물을 향해 다짐했다.
“이번엔 내가 널 지켜 줄 차례야.”
그 말에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댄 선우가 눈을 감은 채 꿈을 꾸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나 너 믿어.”
하나뿐인 짝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속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단내나는 피가 느껴진다. 교미를 원하는 교활한 본능이 내가 식욕과 싸우는 동안 짝의 몸을 적시려 멋대로 페로몬을 뿜어낸다. 역겨운 냄새를 감지한 선우가 눈을 들었다. 방금까지 반짝이던 눈이 흐려져 있다.
스스로 아픈 몸을 수술대 위로 눕히는 선우를 보며 내가 어떤 괴물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그러나 죄의식 없는 내 눈은 선우의 몸을 낱낱이 해체할 뿐이다. 원치 않아도 따뜻한 피가 선우의 어디를 어떻게 흐르는지 훤히 보인다. 침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꿀렁였다.
“왜 그래. 오랜만이라 긴장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선우가 웃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목을 한 손으로 감았다. 여긴 피가 얕게 흐르는 곳.
“하아…….”
손을 내려 세차게 뛰는 가슴을 덮었다. 여긴 피가 깊게 흐르는 곳.
“흣.”
의심 없이 몸을 내주는 선우는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결코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물을 수가 없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본능마저 혐오하게 만드는 이건 어떤 감정일까.
“거기 말고. 여기잖아…….”
낮은 숨을 내쉰 선우가 내 손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혈류가 가장 뜨겁게 뭉치는 곳을 만지게 했다. 이건,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신호다.
“나비야…….”
나를 부르는 선우 위로 몸을 겹치고 인간들의 기억을 더듬어 혀를 섞으며 옷을 벗겼다. 맞닿은 가슴으로 두근두근, 선우의 혈관이 뛰는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무의식중에 푸른 혈관이 불거진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 대는 나를 혼내듯 등에 손톱이 박혔다. 참지 못하고 흐른 침이 선우의 목에 더러운 자국을 남기기 전에 혀로 핥아 올렸다. 앓는 소리를 낸 선우가 나를 재촉한다.
“하아…… 얼른, 너 말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해 줘.”
지하실에 짙게 밴 수많은 인간의 비린내에도 선우의 피 냄새가 가려지지 않는다. 명령에 따라 다리 사이를 벌리며, 피로 물든 붕대는 무시했다. 선우도 그러길 바랄 테니.
엉덩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이미 젖어 있는 구멍을 더듬었다. 손끝이 미끄러질 정도로 축축했다. 당장 쑤셔 박으라고 명령하는 본능을 무시하며 나를 위해 젖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한 번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육벽이 요동친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점점 숨이 찼다.
“아……!”
눈을 질끈 감은 선우에게서 탄성이 터졌다. 배꼽을 향해 선 선우의 성기가 빨갛게 익어 못 견디겠단 듯 크게 경련했다. 나는 두 손가락 사이를 활짝 벌려 성급하게 안쪽을 가늠했다. 벌어진 틈으로 붉은 속살이 보일 만큼 선우의 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뜨겁고 무른 속살을 비비자 구멍이 빠끔거리며 묽은 액체를 줄줄 흘렸다.
“응, 으읏……!”
“하아…….”
시야가 좁아진다. 본능이 눈을 가리기 시작한다. 몸 어딘가에서 내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
“장난 그만하고 그냥, 빨리…….”
왼쪽 무릎을 구부린 선우가 발등으로 내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짧은 쾌감이 척추를 타고 뒤통수를 찌릿하게 만들었다. 순간, 놓칠 뻔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언제나 이토록 필사적인데 장난이라니.
“너한테 한 번도 장난인 적 없어.”
팽팽하게 바지를 들어 올리는 성기를 꺼냈다. 구멍 안으로 서서히 파고들자 선우가 목을 젖히며 길게 울었다.
“아아…… 나비야… 좋아, 너무 좋아…….”
뜨거운 내벽이 게걸스레 나를 안으로 빨아당겼다. 지금 나를 움직이는 건 선우를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선우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내 욕망도 더 강해지고 빨라졌다. 선우의 몸 안이 녹아내릴까 무서울 정도로 질척하고 뜨거워진다. 내 움직임에 바닥에 박힌 수술대가 쇳소리를 내며 들썩거렸다. 나는 흔들리지 않게 모서리를 붙잡아 고정했다.
인간의 교미는 치열하고 격렬하다. 쾌락에 취해 서로의 바닥을 보고 싶어 했다. 선우가 주는 쾌락에 나는 정신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아! 아아…… 거기, 흐, 이상해, 흐읏.”
성기를 전부 밀어 넣었을 때, 선우가 허리를 비틀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파르르 떠는 성기에서 정액이 울컥이는 것으로 보아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깊은 곳을 찔러 올리자 매끈한 배꼽 바로 아래가 불룩 솟는다. 그런데 성기 끝에 닿는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단단해야 할 육벽에 좁은 틈이 나 있었다.
“아…… 이건.”
선우의 몸 중심에 인간의 몸에는 존재할 수 없는 기관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로 인해 만들어지고 내 손으로 없애려던 것.
어째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으…… 나, 흑.”
선우는 목울대가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헐떡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목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선우의 배 속이 날 원망하는 듯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윽!”
허리 아래가 녹아내릴 것 같은 쾌락 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어깨를 타고 번졌다. 내 어깨를 문 선우가 찢어진 살갗에 입술을 대고 솟는 피를 빨아 마셨다. 내 피를 빠는 소리에 등이 쑤신다. 당장이라도 등을 가르고 그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큭, 선우야.”
내 목에 매달린 선우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본능이 선우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하아……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하으…… 끝까지… 아, 끝까지 넣어 줘.”
“정말…… 그래도 돼?”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고 땀에 젖은 채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좁은 틈을 비집고 연약한 속살을 끝까지 단번에 꿰뚫었다.
“허억. 큿…….”
선우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몸을 굳혔다. 그러나 무자비한 본능은 기다렸다는 듯 상처 입은 선우의 배 속에 다시 한번 씨를 뿌렸다. 척추를 따라 등을 가르던 그것이 목적을 이루고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아… 하…….”
가쁜 숨을 쏟아 내며 천천히 선우를 놔주었다. 수술대 위로 축 늘어진 선우의 입술이 찢어져 있다. 나는 몸을 숙여 새빨간 피를 몰래 핥았다. 배어 나오는 피가 멎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참으며 촉촉하고 뜨거운 선우의 몸 위를 입술로 쓰다듬었다. 배꼽에 고인 선우의 정액을 핥았다. 그리고 언젠가처럼 선우의 아랫배에 귀를 댔다.
분명히 느껴졌다. 선우에게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나와 같은 번식 본능이 훼손된 생식 기관을 복구하고 있었다. 선우의 회복력이 약해진 것도 이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우리의 알이 다시 생길 수 있을까?
몸을 세워 정신을 잃은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반짝거리는 따뜻한 볼 위에 입술을 붙여 칭찬했다.
불완전한 몸으로도 내 아이를 품으려고 노력하는 기특하고,
“예쁜 선우.”
이젠 안다. 나는 선우를 지키고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선우가, 그리고 내가 원하는 나의 역할이다. 바보 같은 나 때문에 고단했을 선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안아 들었다.
“어서 나아서 나와 진정한 가족이 되자.”
선우, 너도 그러길 원하지?
∞ ∞ ∞
나는 선우를 떠나고 처음으로 다시 ‘잠’을 청했다. 나의 ‘잠’은 인간들의 것과 달랐다. 눈을 감고 의식이 가라앉으면 내가 먹은 기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꿈을 꾸듯 빼앗은 기억들을 내 것처럼 회상했다.
하나의 시간선 위에 거미줄처럼 겹쳐 있는 주인이 다른 기억들. 그들이 보고, 들었던 정보와 그들이 느꼈던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날카로운 두통에 시달렸기 때문에 인간의 습성을 파악하고부터는 거의 ‘잠’에 들지 않았다.
기절하듯 잠든 선우 옆에서 나는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필요한 건 이선호의 기억.
이선호가 엄마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은 선우와 만나기 한 달 전쯤. 선우에게 말했던 것처럼 봉사 활동을 목적으로가 아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베로니카 수녀님이 널 위해 기도해 주실 거야.>
이선호는 이미 오래전에 정신으로 옮겨 간 자신의 병세를 눈치챈 듯한 엄마의 간절한 제안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집의 정체를 모르는 선우의 가족은 이곳을 아버지의 오래된 별장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닐 거라고, 이번에 방문하고서 이선호는 막연히 의심했다. 그의 눈에는 마을의 모든 게 아마추어가 만든 영화처럼 어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이상한 장소는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만든 거대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 이상 이선호에게 내막을 파헤쳐 볼 여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닫아 둔 커튼 사이로 침범한 해가 길게 금빛 선을 그으며 눈꺼풀 위를 환히 비췄다. 꿈에서 나오자 벌써 아침이 오고 있었다.
“으으.”
앓는 소리에 선우를 보았다. 감은 눈을 찌푸린 선우가 연이어 신음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을 잡아 주자 다시 평온한 잠에 빠진다. 핏기 없는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 다리를 덮은 이불을 들쳐 보니 피와 진물로 더러워진 붕대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났다.
어제 본능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한 대가였다. 입안이 썼다. 당분간은 선우의 회복에 집중해야만 했다.
“미안. 조금만 더 버텨 줘.”
나는 매끈한 종아리에 입을 맞추고 더러워진 붕대를 풀어 하나 남은 새 붕대로 상처 부위를 다시 감았다. 그리고서 침실 한쪽 면을 차지한 옷장으로 갔다.
밤새 확인한 이선호의 기억이 맞는다면 가장 끝 칸에 있을 터였다. 옷장 문을 열자 가지런히 걸린 옷들 아래로 검은 금고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가 별장에 숨겨 둔 금고를 우연히 발견한 이선호가 열어 보려고 시도했지만 끝내 비밀번호를 알아내지 못했다.
금고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선우가 깊이 잠들어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손을 본래 형태로 바꿨다. 딱딱한 외골격을 두른 앞다리 끝을 금고의 문틈에 끼워 넣어 비틀자 문짝이 쇳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훤히 드러난 내부는 무언가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특유의 냄새가 나는 누런 종이 다발이었다.
“지금 나보고, 너 혼자 밖에 내보내라고?”
침대에서 막 눈을 뜬 선우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잠깐만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한 참이었다. 선우는 콜록거리며 잔기침을 하고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상태가 나빠 보였다.
“어디 가려는 건데.”
선우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이불 밖으로 드러난 상체가 내가 떠나기 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어 있다.
오늘 아침, 둘러본 이 별장은 선우와 내가 생활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다만 당장 선우에게 먹일 만한 음식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선우는 나를 쉽게 집 밖으로 내보내 줄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자는 사이, 혼자서 나갈 준비를 마친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미처 생각지 못한 실수였다. 나는 침대맡에 걸터앉으며 순수한 외출 의도를 설명했다.
“여기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어제 먹지 않았어? 봉고차 주인.”
“……너는 정말, 나 먹일 생각밖에 없구나.”
선우는 거의 이틀간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허기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아…… 나 말이야?”
“배 안 고파?”
날카로웠던 얼굴이 점차 잠이 덜 깬 얼굴로 돌아간다. 한기가 드는지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와 다시 몸을 덮는다. 침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적당히 방 안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인간인 선우에게도 충분히 따뜻하게 느껴질 만한 온도였지만, 자가 회복 중인 선우의 몸에선 살짝 열이 나고 있었다.
“잘 먹어야 빨리 나아. 선우, 너도 알지?”
이불을 어깨 위까지 덮어 주자 몸을 움츠리며 고개만 끄덕인다. 잠깐 멍하던 선우가 뭔가 생각난 듯 마른 코를 훌쩍이면서 물었다.
“근데 돈은. 설마 훔칠 생각이야?”
“내가 찾아 둔 게 있어.”
나는 옷장 가장 끝 칸을 열어 이미 뜯겨 너덜거리는 금고 문짝을 젖히고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다발 하나를 자신 있게 꺼내 선우에게 보여 주었다.
“…….”
“…….”
눈매를 좁혀 내가 손에 든 것을 포착한 선우의 표정이 조금씩 심각해졌다. 이상하다. 보여 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나는 돈다발을 다시 금고 안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만지지 않은 척 손바닥에 묻은 냄새를 바지에 닦았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은 선우가 노란 지폐 다발을 식탁 위에 던지듯 올려 두었다. 움직일 때마다 도톰한 티셔츠에서 미리 뿌려 둔 내 페로몬이 공기를 타고 넘실거렸다.
완전히 내 냄새로 절여 놓고 싶지만, 그랬다간 다리가 낫기도 전에 알이 먼저 생겨 버릴 수도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참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다리가 나을 때까진 선우를 무리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은 돈이긴 하지만…….”
선우가 피곤한지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팔뚝에서 손등으로 이어지는 푸른 정맥에 충동적으로 시선이 끌렸다. 깨물면 달고 따뜻한 피가 끝없이 흘러나올…….
아,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 선우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며 식탁 위 지폐 다발로 시선을 돌렸다.
“쓰고 싶지 않은 돈……?”
“바로 어제 그런 걸 봤는데, 출처가 찝찝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우는 종이띠로 묶인 다발에서 지폐 몇 장을 뽑아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받으려고 빳빳한 종이에 손을 대자 도로 휙 가져가 버렸다.
날 놀리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선우를 쳐다봤다. 선우도 날 빤히 쳐다봤다.
“그 전에 너. 어제는 나도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의심 많은 선우가 또 날 시험하려는 낌새였다.
“네가 알고 있는 거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그럼 나가게 해 줄게.”
“……알고 있는 거?”
아무것도 모르던 때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러나 그때처럼 되진 않았다. 선우가 눈에 힘을 줬다.
“순진한 척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이제 진짜 그거 안 통해.”
몸이 나을 때까진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슬며시 웃자, 선우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헛숨을 뱉었다.
“하, 너 진짜…….”
“알았어. 다 말할 테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
힘이 잔뜩 들어간 눈썹을 엄지로 살살 펴 주자 선우가 내 손을 쳐 냈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또 적응 안 된다.”
“적응?”
“……아니야. 하던 얘기나 해.”
손바닥으로 선우의 뺨을 들어 올려 보니 역시나 뜨끈했다. 이번엔 쳐 내지 않고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포갠 선우가 그대로 머리를 기댔다. 동그란 귓바퀴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뭐가 궁금해.”
내가 물었다.
“……당연히 우리가 같이 살아남을 방법이지.”
선우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독오독 씹히는 말랑한 뼈를 만지작거리자 간지러운지 소리 없이 웃는다. 나는 선우의 평화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가 밤새 본 기억을 꺼냈다.
“여긴 네 아버지의 별장이야.”
“……어렸을 때, 들어 본 것 같기도 해.”
“여기서 ‘그 일’ 말고 다른 사업도 한 것 같아.”
“다른 사업?”
심각해진 선우가 내 손을 떼어 냈다. 나는 선우의 손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마을 초입에 큰 교회가 있어.”
선우 아버지가 자금을 대 지어진 교회. 뾰족한 지붕에 십자가가 꽂힌 하얀 건물은 마을 형편과 비교하면 비정상적으로 규모가 컸다. 단순히 마을 교회를 넘어 노숙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쉼터를 함께 운영했기 때문인데, 그것 역시 선우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 인간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을 거야. 일종의 눈속임이었을까…….”
“모를 일이지, 아직은. 하지만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여기 지하실에서 벌어진 일과 관련 있을 거야.”
아버지의 별장 지하실에 대해 알았더라면, 이선호도 그렇게 짐작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이선호의 기억만 봐도 그 교회는 선우의 부모와 긴밀한 관계였다.
단지 이 별장에 오갈 명목으로 만들어진 교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허울이 필요했다면, 왜 하필 교회일까. 아내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고기를 썰던 남자의 어디에도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 보였는데.
“그게 다야?”
이선호의 기억으로 본 것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내가 본 전부야.”
“봤다고……?”
선우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 기억을, 정말 볼 수 있어?”
먹은 인간이 기억하는 과거는 전부 볼 수 있었다.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일수록 그때의 감정까지 생생하게.
이선호에게 가장 선명한 기억은, 모순되게도 이선호가 약에까지 의존해 가며 잊으려고 노력한 기억이었다. 열다섯 살, 같잖은 질투로 그의 형이 되고자 노력하던 선우를 가족이란 틀에서 완전히 밀어낸 날.
완벽한 형이 가진 단 하나의 오점이 이선호에게는 얼마 없는 유희거리였다. 그러나 엄마 밑에서 파랗게 죽어 가는 형을 보는 건 전혀 즐겁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형의 목을 조르는 엄마를 경찰에 신고했으나 이선호의 실수는 전혀 수습되지 못했다.
만신창이가 된 형에게 빌려던 사과는 형을 악마라 부르는 엄마에 의해 영영 저지당했다.
비록 아버지의 부탁에 의해서였지만 선우에게 연락하면서 이선호는 족쇄를 벗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10년이 넘게 미뤄 온 사과와 함께 단 한 번도 형을 미워해 본 적 없다고 고백할 기회.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형의 손에 쥐어진 망치를 올려다보며 이선호는 생각했다.
<……차라리 잘된 거야. 이제 형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죽기 직전 이선호가 느낀 감정은 증오도 원망도 아닌, 후련함이었다.
“나비야?”
기억의 잔상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선우에게 그런 사소한 것들을 하나하나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
“그래. 볼 수 있어.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구나.”
“마을 사람들 전부가 네 가족의 얼굴을 알아. 그중에 누군가가 널 알아볼 수도 있어.”
깊은 한숨을 내쉰 선우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앞으로 너 혼자 나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지.”
“맞아. 경찰에서도 나보단 널 찾고 있을 거고.”
“…….”
그날, 날 본 건 장 형사뿐이었다. 불행히도 선우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된 다리를 조심히 살폈다. 새로 간 붕대에서 또다시 피 냄새가 났다.
“네 몸이 다 나을 때까지만 그렇게 하자.”
선우는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내가 멍청하게 구는 바람에 선우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잘려 나갔다. 나 때문에 선우가 평생 이런 곳에서 숨어 지내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알았어. 근데 지금 진짜 문제가 뭔지 알아?”
갑자기 선우가 내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뭔데?”
“너 너무 눈에 띄어.”
“그건 괜찮아.”
“……뭐가 괜찮아?”
선우가 턱을 까닥했다. 내 말이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저건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이다.
“여기 사람들이 아는 건 네 동생 얼굴이지, 내 얼굴이 아니니까.”
선우는 내 대답에 답답하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또 뭔가를 틀린 모양이다.
“나비야. 네 얼굴은 그냥 눈에 띄어. 어딜 가도.”
“……왜?”
“왜냐고?”
어딜 봐도 선우와 같은 완전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입술만 달싹일 뿐, 선우는 어쩐지 말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 인간들한테는 미적 기준이란 게 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인간에 대한 강의가 시작됐다.
“여기부터 설명해 줘야 하는 거 맞아?”
나한테 묻는 건가? 혼잣말인 것 같기도 해서 대답하기 어려웠다. 나는 멍청히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선우가 내 양 볼을 따뜻한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간 말 안 해 준 내가 잘못이지. 그러니까 네 얼굴이…….”
다시 정적이다. 선우의 표정이 시시각각 묘하게 변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골똘히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뭔가 포기한 듯한 한숨을 뱉었다.
“예쁘다고, 지나치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쳐다보고도 남아. 남녀노소 아주 호불호 없이 좋아할 얼굴이야. 됐지. 이해했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투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었다. 선우의 두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상체가 조금 딸려 내려와 얼굴이 가까워졌다.
“너한테도 그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선우에게 얼굴을 더 가까이 했다.
“뭐, 뭐가.”
“너도 날 볼 때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선우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내며 엉덩이를 밀어 몸을 뒤로 뺐다. 사실 선우가 내 인간일 때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쯤이야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예쁘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어려운 질문 아니잖아. 네 생각이 궁금해서 그래.”
“……그렇게 궁금하면 또 깨물어 보든가.”
선우가 정색을 하고 가느다란 눈초리로 노려봤다. 어쩐지 선우의 반응이 재밌어서 이번만큼은 순순히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대답해 줘. 난 선우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읏, 뭐?”
마른 턱밑을 입술로 간지럽히듯 쓸어 주자 몸을 바르르 떨던 선우가 내 어깨를 잡아 힘껏 밀어냈다.
“너……! 근데 어제부터 왜 은근슬쩍 반말이야?”
대답이 아닌 다시 질문이다.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선우는 한번 마음먹은 것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코로 작은 한숨이 나왔다.
“선우 넌 고집이 너무 세.”
내 말에 선우는 웃었다.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너한테 배운 거니까 다 네 탓이지.”
“……진짜 못 이기겠네.”
어느 틈엔가 날 내려다보는 선우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웃는 얼굴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선우의 허리를 두 팔 가득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선우의 몸속에 내 냄새가 만족스러울 만큼 배어 있었다.
“나비야,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그럼.”
“난 안 괜찮을 것 같아. 여기서 너 기다리다가 걱정돼서 말라 죽을지도 몰라.”
길어 봐야 한 시간도 안 걸릴 외출이었다. 선우의 엄살 섞인 투정에 몰래 웃었다. 내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텐데 어떻게 알았는지 선우가 웃지 말라며 짜증 냈다.
“부탁이니까 제발 사고 치지 말고 돌아와.”
“응. 그럴게.”
어떻게 얻은 둘만의 시간인데. 한시도 낭비하지 않을게.
∞ ∞ ∞
차를 타고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려고 박아 둔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그 앞에서 차를 세웠다. 바위 표면에 움푹 새겨진 검은 글귀가 눈에 익다.
낙단리(樂斷里)
눈을 감고 다시금 꿈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낙단리? 마을 이름이 뭐 이래요. 여기가 행복의 끝이란 뜻인가?>
이선호의 비아냥에도 거뭇한 얼굴의 늙은 남자는 속 없이 웃었다.
<아이고~ 행복한 끝이랍니다, 도련님. 죽을 때까지 살기 좋은 마을이다~ 그런 뜻이죠.>
‘웬 도련님.’ 고개를 굽실거리는 이장을 따라 개울 위에 지어진 좁은 다리를 건너면서 이선호는 속으로 질색했다. ‘아버지의 발바닥에 붙어서 피나 빨아먹는 빈대 새끼들.’
위장에 쌓이는 끈적한 혐오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이선호가 기억 속에서 건너던 다리와 똑같은 다리가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폭의 이 다리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동시에 마을을 폐쇄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왜 아버지는 이딴 시골 교회에 돈을 쏟아부으시면서 다리는 확장하지 않으실까?>
“……그러게.”
나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 버린 이선호의 의문에 동조하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마을의 중심부로 핸들을 꺾었다. 룸미러에 비친 별장이 점점 멀어졌다.
내가 없는 사이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별장 대문에 달린 걸쇠를 구부려 열 수 없게 해 놓았다. 일차적으로는 누군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으나, 인내심이 부족한 선우가 뛰쳐나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마을은 개미 한 마리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마른 흙이 섞인 공기를 살짝 들이마셨다.
“냄새는 나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악취가 마을 곳곳에 스며 있었다. 차는 금방 냄새의 근원지에 다다랐다. 죽은 인간들과 산 인간들이 뒤엉킨 냄새가 나는 새하얀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교회 입구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차 뒤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아유, 다들 고생들 하셨습니다.”
성경책을 품에 안은 채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늙은 남자는 이선호의 기억 속 이장이었다. 인사를 받은 몇몇이 손을 내저었다. 성경책 말고도 저마다 하얀 봉투를 들고 있었다. 터질 듯이 부푼 봉투에서 금고에서 맡았던 돈 냄새가 났다.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나 다 이장님 덕분이지.”
“그럼요. 저는 뭐 우리 마을에 대한 걱정이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예에, 믿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기쁨은 우리 마을의 발전, 딱 그거 하나뿐입니다. 다음 예배 때까지 오늘 수녀님께서 해 주신 좋은 말씀 잊지 마시고들.”
기름진 얼굴들이 저희끼리 살갑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조용해진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드문드문 비추는 어두운 실내는 천장이 높고 가운데 길 양옆으로 길쭉한 나무 의자가 늘어선 평범한 구조였으나 어딘가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단상이 놓인 맨 앞으로 걸어가던 나는 문득 이상한 기운의 원인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원인은 바닥. 나무 바닥에서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위화감이 도는 바닥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냉기가 만져질 듯 선명했다.
“차가워……. 뭐지.”
방심한 채로 고개를 들다가 대못같이 내리꽂히는 위압감에 굳었다. 거대한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남자가 머리 위에 있었다. 여기가 그를 섬기는 곳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마주한 순간 당혹스러웠다.
“…….”
나는 그의 섭리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그런데도 내가 인간의 껍데기 속에 숨기고 있는 비밀을 세포 하나까지 그에게 속속들이 들켜 버린 기분이었다.
“누구시죠?”
기적처럼 몸이 움직였다. 떨쳐 내듯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짙은 회색의 수녀복을 걸친 사람이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못 보던 분인데, 기도 중이셨나요?”
베로니카 수녀였다.
“아뇨. 가까운 마트랑 약국을 찾고 있어요.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아, 가까운 시내는 마을 입구에 있는 다리를 건너서 위로 난 길을 따라가시다 보면…….”
방향을 가리키려 사선으로 치켜든 수녀의 손끝이 시야에 걸렸다. 나는 수녀의 말을 끊었다.
“적어 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나를 지나쳐 단상으로 향한 수녀는 단상 뒤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 내게 가져왔다. 나는 간단한 설명과 약도가 그려진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만드실 때 저마다의 계획을 세우고 만드셨지요. 제 역할은 하느님이 그들을 통해 이루려는 바를 돕는 일인걸요.”
당연하다는 듯 읊는 설교가 인간이 아닌 나를 포함한 이야기인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잠자코 미소로 화답하며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던 중이었길래 이런 작은 마을까지 오게 되셨을까요.”
수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몄다.
“요양차 이 교수님 별장을 잠시 빌렸어요.”
이 마을에서 선우 아버지는 이 교수님이라 불렸다. 그 호칭을 들은 수녀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이방인에게도 한없이 자애롭던 미소가 식는다.
“이 교수님 댁에서 지내신다고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무언갈 의식하듯 수녀는 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뇨. 사모님께서 봉사하러 오실 땐 항상 미리 전화를 주셨었거든요. 이렇게 연락도 없이 손님이 오신 적은 처음이라 미처 신경을 못 써 드렸네요.”
“봉사 온 게 아니라서 아마 모르고 계실 거예요.”
“이 교수님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먼 친척이에요. 아픈 가족이 있어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조용히 쉬기에 좋은 곳이라고 선뜻 내주시더라고요. 감사하게도.”
“같이 오신 가족분은 지금…….”
수녀가 교회 문밖으로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교수님 댁에 있어요. 다리를 다쳐서 당분간은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아요.”
“……그러시군요. 간단한 치료라면 언제든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여기선 병원이 멀기도 하고, 이 교수님과는 예전에 의사와 간호사로 만난 인연이거든요.”
……간호사? 베로니카 수녀가 지하실에서 자행된 불법 수술과 관련되어 있을까?
무시하긴 어려운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앞으로 선우의 몸을 회복하는 데 수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도 몰랐다.
“듣던 대로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
내 말에 수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저, 저는 그냥, 이 교수님께 받은 은혜를 갚고 있는 것뿐입니다.”
“은혜요?”
수녀의 입가가 잘게 떨리고 안색은 하얗게 질려 갔다. 더는 말할 생각이 없대도 충분한 반응이었다. 그때 불편한 분위기를 끊고 허름한 모자를 쓴 남자가 허둥거리며 교회로 들어왔다.
“수녀님! 김 씨는 아직두 연락 없습니까?”
나는 한 발 물러서며 수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당분간 신세를 질 것 같아요. 그럼.”
교회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뒤이어 들려온 남자의 호소에 수녀와 남자를 돌아보았다.
“읍내에 나간다고 하고 간 것이 벌써 삼 일쨉니다. 경찰은 관심도 없고 사고라도 난 거면 어떡합니까.”
언제부턴가 해가 반대편으로 기울어 빛이 들지 않는 내부가 어두컴컴했다. 수녀의 시선이 문밖에 선 나를 잠시 스쳤다. 그리곤 저를 찾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족분들이 계신 고향으로 급히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오늘 아침에 받았습니다. 참 잘된 일이지요?”
그림자에 묻힌 수녀가 보란 듯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선호가 느꼈던 불쾌한 위화감이 수녀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 ∞ ∞
첫 외출부터 귀가가 늦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 중에서 선우에게 필요한 걸 고르는 일도 처음이라 어려웠던 데다가 아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고기를 파는 점원이 내 팔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나중에는 내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제 딸의 사진까지 보여 줬다. 딸은 선우에게 먹일 수도 없는데 말이다.
선우의 인내심이 아직 남아 있길 바라며 서둘러 별장으로 돌아갔다. 살짝 긴장한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걱정했던 싸늘한 선우의 목소리 대신 가벼운 침묵이 날 반겼다. 다행히 고른 숨을 내쉬며 선우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마저 조심히 내쉬며 이것저것 담긴 종이 상자를 식탁에 올려 두었다. 방에서 이불을 가져와 덮어 주려 하자 기척을 느낀 선우가 부스스 눈을 떴다. 나는 선우가 시계를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리며 선수를 쳤다.
“나 다녀왔어.”
“……별일 없었어?”
그간 자지 못한 시간을 만회하려는지 선우는 온통 몽롱한 잠기운에 취해 있었다.
“응. 식사 준비될 때까지 좀 더 잘래?”
“……이리 와 봐.”
선우가 이불 밖으로 두 팔을 빼내 활짝 벌렸다. 나는 흔쾌히 몸을 숙여 선우의 따뜻한 두 팔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가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어깨에 코를 묻은 선우가 숨을 크게 들이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선 조금씩 고개를 움직여 내 몸 여기저기를 확인하듯 몇 번 더 냄새를 맡았다.
잘했다고 안아 주려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응.”
검사를 마친 선우가 이제 됐다는 식으로 내 볼에 성의 없이 입술을 찍어 누르고 꾸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선우가 잊은 칭찬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번데기처럼 이불을 돌돌 만 선우는 야속하게도 그대로 잠들었다. 칭찬은커녕 의심만 받았다.
“좀 서운한데.”
뭐…… 칭찬받을 날은 앞으로도 많으니까.
나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 지하실로 내려갔다. 복도 끝 방에서 장부를 찾아 그 옆에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지를 펼쳤다.
“역시.”
두 개의 필체가 똑같았다. 남은 건 선우의 말대로 내가 처리해야 할 것이 ‘공범’인지 ‘공범들’인지 알아볼 차례였다.
내 부축을 받아 식탁에 앉은 선우는 의외라는 시선으로 내가 만든 음식을 한참 동안 뜯어봤다. 그러고 보니 선우가 좋아하는 고기가 뭔지 물어본 적이 없다. 인간은 정말 다양한 것을 먹었다. 나와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면 선우가 좋아하는 것만 먹이고 싶었다. 그걸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닭고기 싫어해……? 아플 땐 삼계탕이 좋다고 거기 직원이…….”
내 변명에 선우가 젓가락을 들며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좋아해. 설마 삼계탕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해서……. 오랜만에 먹는다. 잘 먹을게.”
젓가락으로 떼어 낸 하얀 살점이 선우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오물오물 소리 내지 않고 씹다가 꿀꺽 넘긴다. 한입 맛을 본 선우는 손가락을 동원해 살을 발라 먹었다. 뼈 무덤이 쌓일 즈음, 휴지를 뜯어 손가락을 닦은 선우가 투덜댔다.
“먹는 걸 뭘 그렇게 쳐다봐.”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선우가 왜 그렇게 내 식사에 연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아.”
“까불지 마.”
선우가 픽 웃으며 손등으로 내 볼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어. 사 먹는 거랑은 다르네. 요리는 내가 너한테 배워야 할 정도야.”
바라던 칭찬인데 선우의 웃음이 쓸쓸해 보여서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뭐 하러. 내가 해 줄게.”
“정말? 매일, 평생?”
선우는 장난스레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 날 믿겠다 했지만 그렇게라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불안이 조금은 가시는 거겠지. 의심과 불신은 식욕보다도 강한 본능으로 선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응. 매일, 평생. 책임지고.”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선우가 잠시 멈췄던 젓가락을 움직였다. 내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막 전해 주려는 때, 별장 밖에서 들려온 낯선 소음에 선우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춰 버렸다.
“무슨 소리지?”
선우가 불안해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탁, 탁, 막대기로 벽을 두드리는 듯한 어수선한 소리가 계속해서 식탁으로 날아들어 선우의 식사를 방해했다. 화가 났다.
“밖에 누가 온 거 아니야?”
“내가 보고 올게. 먹고 있어.”
나는 소음의 장본인이 숨소리도 낼 수 없게 만들 작정으로 별장을 나왔다. 소음의 발원지는 별장과 담장 사이의 좁은 틈이었다. 그곳에서 소음의 주인이 용을 쓰며 몸을 털어 대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를 검은 개가 목을 옥죈 가는 철삿줄을 빼내려고 앞발로 목을 긁어 댔다. 그럴 때마다 줄에 달린 막대기가 담장과 건물 외벽에 탁, 탁 부딪혔다. 낑낑거리며 발버둥을 치던 개는 나를 발견하고 귀와 꼬리를 바짝 내렸다.
으르르.
나는 위협 태세를 갖춘 개에게 다가갔다. 개는 기다렸다는 듯 이빨을 드러냈다. 형태를 바꾼 손을 단숨에 뻗자 개가 깨갱거리며 내 손을 물었다.
철사가 잘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것은 누군가가 개를 잡으려고 일부러 건 듯 보이는 올가미였다. 담장 아래에 작은 크기의 땅굴이 나 있는 거로 보아 이 공간이 개의 비밀 피난처인 모양이었다.
끼잉, 낑.
겁을 먹고 꼬리를 만 개를 자세히 살폈다. 검은 털은 윤기 없이 푸석했고 갈비뼈가 드러난 몸 곳곳에는 흉터가 나 있었다.
“나비야!”
어느새 따라 나온 선우가 등 뒤에서 다급히 나를 불렀다. 나와 개를 번갈아 보는 표정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른침을 삼킨 선우가 내게 물었다.
“그거 먹으려는 거 아니지……?”
닭고기 살을 발라내 담은 그릇에 코를 박은 개의 꼬리가 쉼 없이 돌아갔다. 나와 선우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개의 식사를 지켜보았다.
“시골에선 흔해. 키우던 개도 잡아먹는데, 떠돌이 개야 뭐 공짜 고기로 보이겠지.”
선우가 무심히 이야기하며 삼각형의 귀 사이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 안쪽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개는 경계하듯 축축한 코로 선우의 손을 툭툭 밀어 올리며 냄새를 맡고는 나에게 이를 드러낼 때랑은 딴판으로 헥헥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왜 이 개한테서 장 형사가 겹쳐 보이는 거지?
검은 개는 기세가 등등해져선 아예 대놓고 선우의 손을 핥아 댔다. 손가락이 끈적한 침으로 지저분해지는데도 선우는 싫은 내색 없이 가만히 놔두었다. 개는 충성심이 높은 동물이었다. 그리고 선우는 내게 그러길 바랐고…….
불현듯 아까 개에게 물렸던 손이 생각났다.
“선우야.”
선우가 나를 쳐다봤다. 상처를 보여 주려고 했는데 이미 아물어 흔적도 없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왜 불러.”
“……키울 거야?”
선우를 위해 사는 건 내가 내 의지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인 선우의 애정도 나만의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심정으로 선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 그럴 여유가 어딨어. 너 하나도 벅차.”
아, 처음으로 내가 선우에게 벅찬 존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들어가자. 다리 아파.”
선우가 내 어깨를 짚으며 일어났다. 이 부드러운 털북숭이 짐승의 몸은 선우가 잡고 기댈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나는 절뚝거리는 선우를 안아 들었다.
“노, 놀랐잖아.”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선우는 내 목에 팔을 감았다. 나는 검은 개를 내려다봤다. 앞발 하나를 든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미안하지만, 그 수법은 이제 선우에게 안 통한다. 개가 멍! 짖었다. 해석해 보나 마나 패배 선언이었다.
∞ ∞ ∞
“안 오네.”
선우가 검은 개의 몫으로 주라며 삶은 당근과 달걀을 으깨 넣은 그릇을 마당에 내려놓은 지 십여 분째였다. 이틀 동안, 귀신같이 선우가 점심을 먹는 시간에 맞춰 오던 개가 오늘은 좀 늦었다.
점심을 먹고 같이 기다리던 선우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먼저 들어가 자는 중이었다. 선우는 하루 대부분을 잠을 자는 데 썼다. 먹고 자는 단순한 생활 덕인지 다리의 상처도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나는 조용한 별장에서 시시때때로 자는 선우를 돌보며, 하루 한 끼 검은 개의 식사를 챙겼다.
그동안 몰랐던 시간의 흐름이란 게 느껴질 만큼 시간은 물처럼 흘렀다. 잡을 수도 도로 담을 수도 없다. 선우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행복할까? 꽤 많은 인간을 먹었지만, 아직도 선우를 이해하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내가 선우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수녀를 협박하는 짓은 위험했다. 수녀 외의 공범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고, 수녀가 내 말을 따르게 할 만한 확실한 약점도 필요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신중해야 했다.
파삭파삭.
담장 밑 땅굴을 통과하며 개가 흙을 파내는 소리가 들렸다. 곧 별장 뒤편에서 검은 개가 겅중겅중 뛰어나왔다. 선우를 찾듯 두리번대더니 선우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내 눈치를 살핀다. 인간과 다른 냄새가 나는 나에게 개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다. 개가 조심스레 그릇에 코를 댔다. 잘은 모르지만 먹어도 되냐고 묻는 듯했다.
“먹어.”
그릇을 조금 밀어 주자 개는 긴 주둥이를 벌려 헙, 헙 음식물을 입에 넣었다. 공중으로 치켜든 꼬리가 살랑거린다.
……식사란 건 왜 내게만 고통스러운 걸까.
갑자기 그릇에서 고개를 든 개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나도 개를 따라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희미한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그릇에 아직 음식이 남아 있었다.
“크흠.”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상대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불청객의 정체는 뜻밖에도 이장이었다. 대문 너머에서 이장이 가슴을 부여잡고 너스레를 떨었다. 일어나 대문 앞에 서자 이장이 거북이처럼 구부정한 목을 쭉 빼며 날 올려다봤다.
“이 교수님 친척분이라더니 뭐가 달라도 다르네, 그래!”
“무슨 일이시죠.”
이장이 헛기침을 하며 마당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보냈다.
“거 가족분이랑 같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수녀님이 그러던가요.”
교회와 수녀, 이장, 그리고 이 마을 모두에게서 같은 냄새가 났다.
“도시랑 달라서 이런 작은 마을엔 서로 모르기가 더 힘들어. 옆집 숟가락 개수도 세어 가며 사는 게, 다아 한국 사람들 정이지, 정.”
선우 가족에게 이장이 말한 정이 없어서 별장의 비밀을 몰랐던 거라면 이들은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정 때문에 숨겨 줬을까.
“이 교수님 친척이면 우리한테도 귀한 손님인데 인사는 해야지. 이건 그 환영 선물.”
이장이 대문 틈으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나는 봉투 안에서 역겨운 비린내가 풍겼다.
“아파서 요양차 왔다며? 이게 진짜 귀한 건데 어떤 병도 싹 다 고치는 만병통치약이야.”
나는 이장의 손에서 봉투 손잡이를 건네받았다. 갈색 액체로 채워진 네모난 비닐 팩들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그…… 안 바쁘면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나?”
턱을 긁적이며 이장이 본론을 꺼냈다.
“우리 마을에서 새로 시작한 째만한 사업이 하나 있는데, 이 교수님이 요새 통 연락이 안 되네. 아이 뭐, 거창한 건 아니라 친척분이 대신 보고 그냥 말이나 좀 자알 전해 주면 좋겠는데…….”
그런 종류의 거래가 자주 오간 것처럼 이장은 자연스럽게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사업이요.”
“으응. 그게 말로는 설명이 어려워서 직접 가서 봐줘야겠어.”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안정을 찾은 선우를 다시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평화로운 날들을 흉내 내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선우에게 주고 싶은 건 현실이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어, 그래. 준비하고 천천히 나와.”
이장이 눈에 띄게 좋아했다. 나는 잠에서 깬 선우가 바로 볼 수 있도록 침대 위에 금방 돌아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이장을 따라나섰다. 부디 이 마을의 정이란 게 이 교수의 사업을 위해 쓰이지 않았길 바라면서.
이장은 산을 올랐다. 언뜻 보기엔 길이 없는 것 같았지만 희미하게 사람이 다닌 흔적이 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장은 쉼 없이 떠들어 댔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으리으리한 교회도 지어 주시고, 때마다 마을 발전 기금도 턱턱 기부해 주시고, 요즘 세상에 그렇게 따뜻한 분들 없어, 암.”
이장은 자신이 얼마나 선우의 부모에게 충성하고 있는지 내게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이장이 말하는 사람과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다른 인물에 가까웠다. 선우의 부모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짐승보다 비정했다. 아들인 선우를 죽이려 한 인간들에 대한 칭송을 더는 듣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
“수녀님은 이 교수님과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아아, 베로니카 수녀님은 특히 더하지. 예전에 딸처럼 보살피던 애가 이 교수님한테 장기 이식 수술을 받았거든. 간호사였던 여자가 그 애 때문에 수녀가 될 정도니 얼마나 아꼈는지 말 다 했지, 안 그런가?”
선우 아버지는 타인을 조건 없이 도와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이고, 거의 다 왔네.”
이장이 땀에 젖은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산 중턱, 나무와 풀이 우거진 비탈길 끝에 숨어 있던 평지가 펼쳐졌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는 줄지어 늘어선 크고 시커먼 우리가 있었다. 일렬로 세워진 다섯 개의 강철 우리 안에서 거친 울음소리가 철창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장이 땀을 닦으며 우리로 다가갔다. 바닥에서 두꺼운 나무 막대기를 주워 철창을 땅땅 내리치자 좁은 우리 안을 빙글빙글 돌던 곰이 놀라 뒷발로 서서 울부짖었다.
“이게 위험해 보여도 특수 제작한 거라 끄떡없어. 여 곰 배때기에 구멍 낸 거 보이지? 저기서 나오는 쓸개즙이 암도 고치는 명약이라고 사려는 사람들이 아주 줄을 섰어. 아까 내가 준 보약 있지? 입 아프게 백번 말해 뭐 해, 먹어 보면 알아. 이 교수님이 허락만 해 주시면 교회도 발전하고, 저기, 저 노숙자들을 위해서도 좋고, 자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가?”
다섯 마리의 곰은 구멍을 낸 배에 수도꼭지 같은 밸브를 단 채 살아 있었다. 갇힌 곰들 앞에서 유세를 부리는 늙은 인간이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이건 사냥이라고 할 수도, 사육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문이었다.
왜 인간들의 피와 고기에서 그토록 끔찍한 맛이 났는지, 왜 선우가 이들이 아닌 나를 선택했는지, 그에 대한 답이 눈앞에 있었다.
“여기 내가 이 교수님 몫도 넉넉히 챙겨 놨으니까 갈 때 가져가.”
이장은 아까의 갈색 액체와 돈다발이 든 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신은 모든 생명마다 계획을 가지고 있다던 수녀의 설교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내가 인간을 먹어 치우도록 만들어진 건 사라져야 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의 실수와 같은 저런 인간들을 없애기 위해서.
“다 마을을 위해서지 내가 뭐 크게 욕심부리는 거 아니라고 말 좀 잘해 줘, 나 자네만 믿을게.”
그렇지 않고선 지금 내가 느끼는 강렬한 식욕을 설명할 수 없다. 뜨겁고 끈적한 피 냄새로 이곳을 뒤덮어 버리고 싶었다. 이 역겨운 인간의 머리는 삼키고 사지는 찢어 곰에게 내주고 싶었다. 끓어 넘치는 충동을 현실에 옮기려는 순간.
“검둥아. 검둥아.”
무언가를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장이 내 뒤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성아야. 너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니.”
무더운 날씨에도 후드를 뒤집어쓴 채 산을 오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선호의 기억에도 없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화들짝 놀란 여자는 우리를 못 본 체하고 뭔가를 찾듯 주위를 두리번댔다.
“저, 저, 저년…….”
이장이 내 눈치를 봤다.
“쯧. 아, 저기 박성아라고.”
팔짱을 낀 이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쉼터에 잠깐 있던 여자 딸내미인데, 열다섯 된 애를 교회에 두고 가서는 3년째 애 엄마가 소식이 없어. 어린 게 딱하기도 하고 요즘 세상에 부모도 없이 좀 위험한가. 우리 아들이 마흔이 넘었는데 애가 순진해서 아직 장가를 못 갔거든. 우리 아들이랑 맺어 줘서 내 식구로 품으려고. 내가 이 교수님처럼 큰 사람은 못 돼도 본은 받아야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먹인 건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함인 듯싶었다.
“이장님~ 계세요?”
손님이 많았다. 나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이 순경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뭐 문제는 없나 보러 왔죠.”
이번에 나타난 남자는 경찰이었다. 나는 경찰 쪽으로 등을 돌리며 이장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어어, 그래?”
최대한 경찰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빠르게 그 옆을 지나쳤다. 산을 오르느라 지친 경찰은 무릎을 짚고 헉헉거리느라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경찰이 이장에게 따지듯 투덜댔다.
“이장님. 제 위험 부담이 엄청난 건 아시죠? 이거 혹시라도 잘못되면 저 연금도 못 받고, 모가지예요.”
“알지, 알지 그럼. 그래서 내가 매번 챙겨 주잖아. 저, 성아야. 서울 손님 산 아래까지 모셔다드려라.”
이장의 말에 빠르게 뒤따라오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까워지는 여자의 냄새를 읽었다. 의외였다. 이제 막 성체가 된 듯한 여자에겐 마을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았다. 이장이 있는 곳에서 적당히 멀어졌을 즘 나는 성아라는 여자와 대화를 해 보려고 멈춰 섰다.
“악.”
여자가 내 등에 머리를 박았다. 뒤를 돌아보자 따라올 땐 언제고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팔뚝을 붙들었다.
“악! 이거 놔요!”
“성아 씨.”
발버둥 치던 여자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휙 날 올려다봤다. 여자는 기름기가 돌던 마을 사람들과 다르게 살집이 전혀 없고 피부는 까칠했다. 눈 밑은 푹 꺼져 얼굴 중앙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았다. 편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인간이 아니었다. 꼭 그 검은 개처럼.
나는 부드럽게 입술을 휘어 웃었다.
“이 마을에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내가 알려 주면 나한테 뭘 해 줄 건데요?”
그냥 먹을까. 그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당신이 나 구해 줄 수 있어요? 구해 줄 거예요? 씨팔!”
마치 내 속내를 본 듯 격분한 여자가 발을 구르고 욕설을 내뱉었다. 인간의 감정에 서툰 나에게도 누군가를 향한 선명한 분노가 읽혔다.
“내가 뭐로부터 당신을 구해 주길 바라는데요?”
살기를 내뿜는 시선이 산 아래를 향한다.
“좆같은 지옥이요.”
“그 얘기, 자세히 해 줄래요? 내가 나쁜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거든요.”
잠시 멍해 있던 여자가 조소를 띄웠다.
“그런 사람이 경찰은 왜 피해요?”
“…….”
여자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여자의 비웃음이 더 짙어졌다.
“그쪽도 나한테 말 못 하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눈 아래를 검게 물들인 건, 꽤 오래되어 보이는 좌절이었다. 다칠 것을 알지만 이 마을을 벗어날 줄 모르는 개처럼 학습된 절망. 그건 내가 선우에게서 숱하게 봐 온 감정 중 하나였다. 여자는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고 성큼성큼 산에서 내려갔다. 나는 그 뒤를 쫓아 덮치는 대신 여자의 뒤통수에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당신한테 달렸어요.”
여자가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나 위쪽에서부터 이장과 경찰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오자 여자는 남은 길을 혼자서 뛰어 내려가 버렸다.
별장으로 돌아갔을 때 선우는 깨어 있었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티브이를 보던 선우가 건조한 시선으로 막 현관으로 들어선 나를 돌아봤다.
“어디 갔다 와? 달랑 쪽지 하나 남기고.”
잠결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에서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소파로 가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무릎을 끌어안은 선우의 팔뚝에 선명하고 붉은 생채기가 마구 그어져 있었다. 선우의 손끝이 그 위를 계속해서 긁어 댔다.
선우의 손을 잡아떼어 냈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선우의 모든 손톱 밑에 옅은 피가 스며 있다. 선우는 팔에 난 상처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왜 그랬어.”
이렇게밖에 물을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그냥 네가 없으니까…….”
울음을 참는 것처럼 선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 내 잘못이었다. 나는 선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선우의 행동, 선우의 말, 선우의 감정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선우에게만큼은 모든 감각이 기능을 상실해 버린 기분이었다.
“잠깐.”
내 어깨에 기대던 선우가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아주 작은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 검지와 엄지를 맞댄 모양새로 불쑥 내 눈앞에 손을 들어 보이며 선우가 물었다.
“이거 뭐야?”
언뜻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선우의 손가락 사이에 가늘고 긴, 검은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그건…….”
아까 산에서 부딪힐 때 붙은 게 분명한 여자의 머리카락이었다. 성아라는 여자의 존재를 적절히 설명할 말을 고르는 동안의 침묵을 기다리지 못한 선우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선우의 힘에 밀려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내 위에 올라탄 선우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당장 벗어.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까.”
거칠게 명령한 선우가 내 티셔츠를 막무가내로 끌어 올려 벗겼다. 무릎을 구부려 앉은 자세라 조금씩 나아가던 선우의 상처 부위가 바닥에 짓눌려 있었다.
“선우야, 상처가…….”
“입 다물어. 지금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 마.”
선우는 내 맨살에 코를 대고 본격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귀 뒤에서부터 빗장뼈까지 길게 선우의 콧대가 피부를 누르며 내려간다.
“산에 갔었네.”
중얼거린 선우의 움직임이 어깨에서 멈췄다. 이장의 손이 닿았던 곳이었다.
“역겨운 땀 냄새.”
이어 선우는 내 가슴으로 머리를 내렸다. 기어코 상처가 터졌는지 아래쪽에서 피 냄새가 피어오르는데도 선우는 모르는 듯했다. 설명할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져서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뭐지. 비린내…… 동물인가?”
제 몸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배로 내려가던 코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선우의 무릎을 잡고 있던 내 손으로 향했다. 허리를 세워 앉은 선우는 내 손바닥에 코를 박고 개처럼 킁킁거렸다. 그쪽은 성아의 팔뚝을 붙들었던 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선우가 툭 내 손을 떨어뜨렸다. 날 내려다보는 선우의 얼굴이 차가웠다.
“이장이 여자애는 아닐 테고. 설명해 봐.”
“……내 생각엔 이 마을 전체가 네 아버지의 ‘사업’을 도운 것 같아. 근데 성아라는 여자 혼자만 마을에 적대적이야.”
“……그래서.”
무심히 답하며 선우가 자기 티셔츠를 벗어 소파 아래로 내던졌다. 맨살에서 풍기는 살냄새에 저항할 여지도 없이 침이 고였다. 나는 희고 매끈한 살갗에 닿는 시선만이라도 비껴 냈다.
“……잘하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얘기를…….”
선우가 코웃음 치며 내 턱을 꽉 움켜쥐어 꼼짝없이 자신을 보게 했다.
“어떻게? 꼬시기라도 하게?”
몸과 머리가 온통 선우가 주는 자극에 휩쓸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중에도 나는 선우의 의심에 발끈했다. 그런 일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나에겐 불가능했다.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아직 날 안 믿어. 도망가려고 해서 잡은 거야.”
고해 성사가 끝났다. 선우는 여전히 가라앉은 얼굴로 날 내려다봤다.
“선우야. 나한텐 너밖에 없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알아…….”
한숨을 내쉰 선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자포자기하듯 허리를 숙인 선우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평소보다 뜨거운 혀가 밀려 들어온다. 허리를 쓸며 내려간 선우의 손가락이 바지 허릿단에 걸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바지를 벗기려는 선우의 손목을 잡았다.
“안 돼. 아직 네 몸이…… 읍.”
턱이 붙잡히고 다시 입이 막혔다. 선우가 하반신을 붙여 뭉근하게 문질렀다. 눈앞이 까매졌다. 본능이 또 억제하지 못할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선우를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선우의 등 뒤로 손을 보내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단단한 살집을 손바닥 가득 쥐자 맞붙은 입안으로 우는 소리가 진동했다.
필사적으로 페로몬 분출을 참았다. 삽입은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의 바지 속이 젖어 갔다. 촉촉한 골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벌름대는 구멍 위를 둥글게 문지르자 도돌도돌한 주름에서 금세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흐읏…….”
입술이 떨어지고 선우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엉덩이 근육을 바짝 조였다.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할 속셈으로 선우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일부러 놀리듯 속삭였다.
“넣어 달란 거 아니었어? 힘주면 어떡해.”
그러나 내 얄팍한 수에 넘어가기는커녕 선우는 내 머리채를 한 움큼 움켜쥐어 당겼다.
“하아…… 여자 냄새 같은 거, 묻혀 오지 마. 이유가 뭐든, 싫어. 죽여 버리고 싶어.”
형형히 빛나는 안광이, 거친 목소리가 나를 씹어 삼키는 듯하다. 나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유일한 나의 짝에게 나는 나를 전부 내어 줄 수밖에 없다.
“……그럴게.”
맹세의 의미로 입을 맞추며 검지와 중지를 구멍 안으로 예고 없이 미끄러뜨렸다.
“아……!”
명치 끝에 딱딱하게 발기한 선우의 성기가 닿았다. 바로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선우의 뜨거운 속살이 무르게 젖어 손가락에 감겼다.
“아흐…… 나비야.”
선우가 내 목을 부둥켜안으며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손가락을 잘게 넣어다 뺐다 하며 내벽에 마찰시키자 금방 손바닥 안으로 물이 고였다. 찔꺽이던 소리는 물이 넘치며 처벅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아, 아, 아……! 이, 이제 빼. 빼 줘.”
선우가 허리를 뒤로 빼며 보챘다. 이대로 빼내면 선우는 기어이 삽입하려 들 것이었다. 그렇게 둘 수 없었다. 나는 선우의 허리를 팔 안에 가두고 속도를 높였다. 뜨겁고 미끈거리는 내벽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손가락을 간헐적으로 빨아 댔다.
“흐앗, 아! 아아! 싫어. 싫어!”
“갈 것 같아? 괜찮아. 가.”
선우가 목소리를 높이며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오므린 네 개의 손가락을 힘주어 박아 넣자 안쪽으로 조이는 힘에 손바닥까지 밀려들어 갔다. 절정에 이른 내벽이 경련한다. 나는 손가락을 구부려 연약한 속살을 꽉 움켜쥐었다. 구멍 밖으로 쭉 물이 넘쳤다.
“흐, 아윽!”
안쪽의 경련은 빠르게 선우의 몸 전체로 퍼졌다. 파들파들 떨던 선우는 내게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구멍이 완전히 풀어지고 나서 손가락을 빼냈다. 흥건한 물기가 손목까지 흘러내렸다. 동시에 신선한 피 냄새가 났다. 나는 뒤늦게 덫에 걸린 짐승처럼 벗어나듯 선우의 밑에서 빠져나왔다. 기력이 다한 선우의 등을 감싸 안고 조심스레 바로 눕혔다.
“아…….”
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하반신에 더해 풀어 헤쳐진 붕대에서 피와 고름이 터져 소파에 점점이 묻어나 있었다. 서둘러 닦을 수건을 가지러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선우가 나를 잡았다.
“옆에…… 있어 줘.”
눈이 감기며 힘이 빠진 손이 툭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선우가 깊이 잠이 들 때까지 옆을 지켰다. 하찮지만 그것이 선우가 내게 바라는 유일한 일이었다.
∞ ∞ ∞
그 후로 3일간, 선우의 상태는 나날이 나빠졌다. 깨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 잠깐마저도 환각에 시달리거나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몸에 상처를 냈다. 아물어 가던 다리의 상처에도 다시 고름이 차올랐다.
“나비야. 커튼 좀 쳐. 그것들이 우릴 찾고 있어.”
이불을 뒤집어쓴 선우가 괴로워했다. 나는 차에서 나무판자와 연장 따위를 가져와 방의 창문을 아예 봉쇄했다. 그리고 한시도 선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선우의 불안을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우가 잠든 사이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나을 새도 없이 선우의 몸에는 매일 새로운 상처가 늘었다. 피가 말라붙은 손톱도 잘라 주었다. 손톱 조각들이 뚝, 뚝, 잘려 나갈 때마다 내 몸 어딘가도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나비야.”
“깼어? 뭐 좀 먹을래?”
어느덧 눈 아래까지 자란 앞머리를 넘겨 주자 풀린 눈을 한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선우의 시간은 불행 속으로 무서울 정도로 착실히 버려지고 있었다. 반면 내 식욕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언제까지 억누를 수 있을지 몰라 두렵다.
“그것들은? 갔어?”
선우를 괴롭히는 ‘그것’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물어봤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선우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 갔어. 이제 안 와.”
“다행이다.”
‘그것’들은 누굴까. 우릴 쫓고 있는 경찰일까. 내가 먹은 인간들일까. 아니면, 나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내 식욕일까. 나는 다시 기약 없는 잠에 빠진 선우를 지켜보았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지켜 주겠다고 해 놓고 다치게 해 버렸다. 잃어버린 현실을 찾아 주겠다 하곤 이 좁은 방 안에 선우를 가두고 말았다. 진작 먹혀 버렸어야 할 머리를 두 손안에 파묻었다.
이래선 정말로 같이 죽는 길뿐이다. 선우의 몸을 추스르고 며칠 만에 별장 밖으로 나왔다. 베로니카 수녀를 만나야만 했다. 지금 이 상황을 끝낼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선우의 몸을 낫게 할 수 있는 사람도 그 수녀밖에 없었다.
무작정 교회를 향해 달렸다. 정확한 시간은 몰랐으나 그림자도 없는 깊은 어둠과 고요한 대기가 내게 한밤중임을 알려 주었다. 교회 앞에 도착한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교회의 육중한 나무 문이 들어오라는 듯이 열려 있었다.
나는 깜깜한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십자가 바로 아래, 가장 믿음 깊은 인간이 서는 단상 뒤에서 성경책과 함께 욕지거리가 날아들었다.
“씨발. 가족한테 돌아가긴 개뿔. 내가 다른 병신들처럼 그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누군가 그곳에 있었다. 다가갈수록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경찰이란 놈도 똑같아. 우리 같은 건 무슨 짓을 당해도 관심 없어!”
단상 뒤에서 나타난 남자는 십자가에 대고 고함을 쳤다. 일전에 수녀를 찾아왔던 그 남자였다. 남자는 교회를 뒤엎으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씨발. 도대체 어디에다 둔 거야!”
흥분한 남자가 비틀거리다 나를 발견했다.
“뭐, 뭐야. 어, 언제, 누구야, 너.”
두근두근. 남자의 심장에서 세차게 피를 뿜는 소리가 내 본능을 자극했다. 급격히 밀려드는 허기에 시야가 빙글 돌며 의식이 아득해졌다. 타이밍이 좋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식사 시간이었다. 억압되어 있던 식욕이 무자비하게 날뛰기 직전이었다.
“……신입이야? 이봐, 잘 들어. 김 씨가 마을 현금은 다 교회에 있다고 했어. 너도 빨리 찾아봐. 한 몫 챙겨서 이 개 같은 마을을 뜨자고. 여기 어딘가 분명 있을 거야.”
삼키지 못한 침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뭘 멍청히 있어! 너도 김 씨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팔려 가고 싶어?”
내 한 끼를 채워 줄 고기가 내 어깨를 흔든다. 어느 순간부터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영역에 조금씩 금이 갔다. 부서진 이성 뒤에서 본능이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내민다.
아, 선우가 날 보고 웃는다.
‘먹어.’
나는 그 달콤한 명령을 따랐다.
“으, 으아아악…! 끅, 끄윽…….”
부드러운 살점, 질긴 근육, 물컹한 내장과 골수가 찬 뼈를 전부 씹어 삼켰다. 따뜻한 피가 차가운 몸속에 퍼진다. 손끝, 발끝의 말초 신경까지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나며 좁혀졌던 의식이 또렷하게 밝아졌다. 시끄럽게 굴던 남자는 사라졌다. 입안에 맴도는 비린 맛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새로운 기억만이 내가 먹어 치운 남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감각이 날카로워지자 위화감이 드는 냉기가 선명하게 발바닥을 간질였다. 나는 냉기가 짙어지는 곳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냉기가 고인 곳은 단상 아래였다. 발밑에서 마룻바닥이 끼익, 끽 울었다. 단상을 치우자 바닥에 정사각형의 틈이 드러났다. 손잡이도 없는 문틈에 손가락을 넣어 들어 올리자 시린 냉기와 죽은 사람들의 냄새가 퍼져 나왔다.
나는 더 미루지 않고 냄새의 진짜 근원지로 뛰어내렸다. 시멘트로 발린 지하의 한쪽 벽에 긴 손잡이가 가로로 달린 은색의 정사각형 문들이 2층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중 하나의 손잡이를 당겼다. 약간의 장력이 느껴지는 문이 덜컥 아래로 떨어지듯 열리고 그 안에서 한때는 사람이었던 것이 나왔다. 은색의 차가운 트레이 위에 가족에게 돌아갔다던 김 씨가 회색으로 변해 누워 있었다. 두 눈꺼풀과 배 한가운데가 길게 꿰매진 채였다.
“지하실이 두 개였어.”
별장의 지하실이 요리를 위한 공간이었다면, 교회의 지하실은 남은 껍데기를 보관하는 냉동고였다.
노숙자들에게 과분한 시설을 제공하는 작은 마을의 교회. 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노숙자들. 자신이 쌓아 올린 죄 위에서 웃고 떠들던 인간들의 기름 낀 낯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다 죽여야 했네.”
지체한 시간만 아깝게 됐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닫았다. 그때 머리에 둔탁한 충격이 울렸다. 부러진 각목 조각이 텅텅, 소리를 내며 교회 가운데로 날아갔다. 축축하게 체액이 스며 나오는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더듬으며 눈을 들자 부러진 각목을 두 손으로 감아쥔 수녀가 악에 받친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주, 죽어…!”
수녀는 눈을 부릅뜨고 반쪽짜리 각목을 다시 치켜들었다. 머리를 노리고 온 힘을 다해 떨어지는 각목을 팔뚝으로 막으며 일어섰다. 반동으로 넘어진 수녀는 엉덩이를 밀며 뒤로 물러났다. 겁에 질린 본인은 모르겠지만 수녀는 운이 좋았다. 나는 방금 식사를 마쳐 배가 부른 상태였으니까.
“죄송해요, 수녀님. 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거든요.”
수녀 옆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각목을 주웠다. 너무도 가벼웠다. 수녀의 힘에 이런 둔기론 평범한 사람을 죽이는 일도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수녀가 몰랐을까. 나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냉동고에서 나오는 날 본 순간, 수녀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조차 없던 것이다.
“사, 살려 주세요. 나도 어, 어쩔 수가, 어쩔 수가 없었어요.”
수녀가 자기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필사적인 이유가 궁금했다.
“왜 그러셨어요?”
수녀의 떨리는 시선이 내 머리 위의 신을 올려다보았다가 내게로 추락했다. 내게서 무언가를 겹쳐 보듯 한순간에 독기가 빠져나간 얼굴에 체념과 후회의 빛이 스몄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에요. 처음엔 기증된 시신들이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교수가 산 사람들까지……. 나는 그만두고 싶었어요. 정말이에요. 이 아래에 묻힌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고 매일 밤 후회했습니다. 제발, 제발 용서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수녀는 내 다리에 매달려 용서해 달라며 울었다.
왜 내게 용서를 비는 걸까.
“딸이…… 딸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아픈 애였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딸을 살리려면 이 교수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 나는 수녀를 이해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수녀님도 저처럼 멈출 수가 없던 거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누군가는 자신을 위해 다른 생명을 착취하고 누군가는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또 누군가는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 누군가는 자식을 위해 타인을 죽인다. 인간은 모두 살기 위해 무언갈 죽이며 발버둥 친다.
나도 그들처럼 살기 위해 죽일 뿐이다. 내가 인간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나만 용서를 받지 못하는 건 억울하지 않은가.
나는 수녀의 곁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그리고 내 진짜 눈을 개안했다. 어둠 속에서도 변화를 똑똑히 목격한 수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저는 인간이 아니에요.”
공포에 흐려졌던 수녀의 눈동자가 내 고백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빛을 띠었다. 내가 말하지 않은 사실까지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느님이 저를 위한 계획도 가지고 계실까요? 신이 날 만들었다면 내가 이렇게 태어난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저는 믿고 싶어요.”
십자가를 올려다볼 때처럼 수녀가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자신의 손을 부러뜨릴 듯 깍지를 꼈다. 주름진 손등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며 천천히 부들부들 떨리는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그러니까 절 위해서도 기도해 주실 거죠?”
수녀는 무언가에 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구원받은 사람처럼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참 가소로웠다.
수녀에게서 당장 필요한 신경 안정제와 소독약 따위를 받아 왔다. 수녀는 달라는 건 뭐든지 내어 줄 기세였다.
막 별장에 돌아왔을 때, 마당에서부터 시큼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불길함을 느끼고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거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로 가득했다. 냄새에 묻혀 한발 늦게 선우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거실을 가로지르던 발바닥에 물컹한 무언가가 밟혔다. 바닥과 발바닥 사이에 노랗고 둥그런 물주머니 같은 물체가 터져 끈적한 액체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머리가 하얘져서 터져 버린 그것을 조심히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내가 선우의 배에 상처를 내 가며 없애야 했던 것…….
그건 알이었다. 선우가 알을 낳은 것이다.
찢어진 피막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미성숙한 알이거나 애초에 수정되지 못한 알일 것이다. 선우를 떠날 때, 내가 상처 낸 생식 기관에 알이 남아 있었던 건가?
“흐읏…… 나비야…!”
내가 돌아온 걸 안 선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알을 들고 선우가 있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반신을 드러낸 선우가 침대 아래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이불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감싼 채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모습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선우야.”
“……그거, 그거 뭐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헉헉대며 선우가 힘겨운 시선으로 내 손에 들린 알을 더듬었다.
“죽, 죽었어…? 우윽.”
선우의 입에서 묽은 위액이 쏟아졌다. 나는 알을 던져두고 선우에게 달려가 덜덜 떠는 몸을 끌어안았다. 바닥이 질척했다. 헐벗은 선우의 하반신이 시큼한 냄새가 나는 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죽은 거 아니야. 내가 네 몸에 상처 입혀서 그런 거야. 네 잘못 아니야.”
“이게 뭔데…? 내 몸에서 뭐가 나오는 거야? 응? 나 못 해, 못 해, 못 하겠어. 미안해, 미안해. 나비야. 나 좀 도와줘. 제발, 나 너무 무서워.”
내 어깨에 매달린 선우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하지만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선우가 다시 배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아, 아…… 또, 또 나와. 또 나올 것 같아. 나비야, 도와줘. 도와줘.”
선우의 몸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절절 끓었다. 선우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내 목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들었다. 나는 선우의 다리 사이로 조심히 떨리는 손을 넣어 확인했다. 구멍을 비집어 벌리며 주먹만 한 덩어리가 밀려 나오고 있었다. 어쨌든 이걸 꺼내야 선우가 고통스럽지 않을 거였다.
“내가 있잖아. 이제 다 괜찮을 거야. 천천히 숨 쉬어 봐.”
“흑, 흐읏… 후으, 후…….”
선우는 제멋대로 튀는 호흡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선우의 등을 쓸었다. 조금 밀려 나오나 싶던 알은 선우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도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한계까지 팽팽히 늘어난 구멍이 찢어져 피가 맺혔다. 선우가 내 옷자락을 움켜쥐고 울먹였다.
“아, 아파… 아파아…… 나비야. 못 하겠어. 나 못 하겠어.”
“쉬…… 잘하고 있어. 나 봐 봐.”
속이 타들어 갔다. 눈물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선우의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식혀 주었다.
“전에 나한테 산이나 바다 중에 어디가 좋냐고 물었지?”
약하게 페로몬을 풀고 선우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산도 바다도 다시 데려가 줘. 둘이서만 보고 오자. 그러고서 어디가 더 좋았는지 말해 줄게.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하아…… 흐으…….”
선우가 흐린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움푹 패어 있던 선우의 엉덩이에서 힘이 빠진 순간,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선우의 아랫배를 강하게 압박했다.
“흐앗!”
선우의 성기에서 뿜어진 소변 줄기가 허벅지를 적셨다. 그와 동시에 왈칵 빠져나온 알이 손바닥 안에 떨어졌다. 두 번째로 낳은 알 또한 불량이었다. 망연한 얼굴로 자신의 소변으로 젖은 내 바지를 보던 선우가 텅 빈 알을 발견하고 내 가슴에 허겁지겁 매달렸다.
“나, 잘못했어.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나비야. 나 잘할게. 내가 더 잘할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면서 선우는 무작정 버리지 말아 달라 매달렸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쇳덩어리가 치미는 듯했다. 자꾸만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선우를 추켜 안았다. 가슴뼈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잘했어. 잘했어, 선우야.”
그러나 내 말은 선우에게 닿지 않았다. 울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진 선우를 따듯한 물에 씻기고 깨끗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두 개의 알을 마당에 묻었다.
알을 잃었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았다.
내가 어떤 존재라도 상관없다던 선우처럼 내게도 선우가 제대로 된 알을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관없었으니까.
나는 선우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제발, 더 이상 망가지지 말아 줘. 선우야.”
눈시울이 뜨거워져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며 처음으로, 염치도 없이 기도했다.
∞ ∞ ∞
밖에서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대문이 흔들렸다.
“크, 큰일 났어요!”
침대맡에 앉아 며칠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선우가 알을 낳고 몇 번째인지 모를 또 다른 밤이 지나고 있었다.
“큰일 났다고요!”
나를 부르는 건가.
“아 진짜! 베로니카 수녀님이 찾고 있어요!”
수녀란 소리에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 끔찍한 침묵으로 뒤덮인 별장을 나왔다. 대문 철장을 잡아 흔들고 있던 성아가 나를 보곤 흠칫했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 성아가 비켜섰다.
“수녀님이 날 찾는다고?”
“그, 급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급한 일?”
아랫입술을 잘근대며 답을 망설이는 성아를 채근했다.
“급한 일이라니?”
울상을 한 성아가 무어라 입을 우물거렸다. 소리 없이 입안으로만 웅얼거려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날 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성아 씨. 무슨 일인데요.”
눈을 질끈 감은 성아가 한 걸음 물러나며 소리쳤다.
“미안해요!”
어깨 뒤에서 튀어나온 젖은 천이 내 코와 입을 막았다. 떼어 내려 했으나 천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를 인지한 순간 팔다리에 신경이 끊기는 생소한 감각이 찾아왔다. 나는 정신을 잃기 전에 본능적으로 별장을 보았다. 선우가 잠들어 있는 별장이 완전한 어둠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안에 있는 놈도 적당히 붙들어 놔. 이따가 가지러 올 거니까.”
정신을 잃은 이방인을 차 뒷좌석에 실은 한 선생이 운전석 창을 내리고 성아에게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성아를 본 한 선생이 창을 올리고 곧 차가 출발했다. 성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제대로 숨을 쉬었다.
한 선생은 마을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 젊었고 잘생겼고 서울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와 반대되는 인간들만 버글대는 이곳에 몇 년째 버려진 성아에겐 그것만으로도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한 선생은 이장이나 마을 사람들처럼 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지 않았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성아처럼 갈 곳이 없는 처지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그 점이 가장 소름 끼쳤다.
대문 앞에 선 성아는 교회를 향해 가는 차를 지켜보며 다 늘어난 후드 밑자락을 정신 사납게 쥐었다 놨다 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지난 3년간 수없이 해 온 짓인데 이번만큼은 왠지 실수한 듯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살얼음판 같은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성아는 낡은 운동화를 직직 끌며 대문 앞을 서성였다. 엄지손톱을 씹어 대던 성아는 무언가 결심하고 별안간 대문을 넘었다. 한순간 스치듯 본 남자가, 아까 티브이 뉴스에 나온 남자인지 제대로 확인해야만 이 기분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성아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고 어두운 집 안에서 꼴깍, 침을 삼켰다.
몇 시간 전, 이장이 노발대발하며 성아와 베로니카 수녀의 집에 찾아왔다. 금이야 옥이야 하는 모자란 아들까지 대동했다. 성아는 돼지 같은 이장의 아들이 씩씩거리며 거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방으로 숨었다.
「거 당장 아홉 시 뉴스 틀어 봐라.」
「아니,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수녀는 불쾌함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심각한 기류를 느낀 성아가 빼꼼히 방문을 열어 보았다. 이장의 아들이 리모컨을 들고 티브이를 켰다. 뉴스 진행자의 긴박한 목소리가 속보를 알렸다.
『속초 펜션에서 발생한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추적하는 데 난항을 겪은 경찰이 열흘 만에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유력 용의자인 이 씨 부부의 두 아들, 이선우와 이선호를 공개 수배하기로 했는데요. 피해자인 이 씨는 현장에서 끔찍한…….』
「이 교수님 둘째 아드님이잖아요…! 그럼 설마 이 교수님이 살해당했단 거예요?!」
이선호를 알아본 수녀가 경악했다.
수녀님의 비명에 성아는 문을 조금 더 열어 머리를 내밀었다. 티브이 화면에 흉악범치곤 단정해 보이는 두 명의 상반신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성아는 헛숨을 삼켰다. 최근 그중 한 명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야!」
이장이 성아를 발견하고 빽 소리를 쳤다. 이장은 단단히 벼른 표정으로 소매를 걷어붙이며 다가왔다. 문을 잠그기엔 너무 늦었다. 이장이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벌렸다.
「너 지난번에 산에서 그놈이랑 있었잖아. 그놈이 이상한 얘기한 거 없어? 그놈한테 뭐 들은 거 없냐고!」
며칠 전, 검둥이를 찾아 마을을 헤매던 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검둥이는 성아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날, 성아는 모처럼 구한 소시지를 가지고 다니다가 이 교수의 별장에서 검둥이를 찾았다. 그리고 지금 티브이에 나오는 이선우란 남자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검둥이가 짖는 소리를 듣고 까치발로 담장을 넘어다봤다. 이선우란 남자와 이 교수의 친척이라는 남자가 나란히 앉아 검둥이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애정 따윈 모르고 자란 성아의 눈에도 둘 사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해 보였다.
「이 쌍년이. 버려진 년을 곱게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도 모르고! 제대로 말 못 해?!」
이장이 성아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수녀가 놀라 소리쳤다.
「그만두세요! 무슨 짓이에요!」
「지금 아버지가 다 마을을 위해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이장 아들이 수녀를 가로막았다. 포댓자루처럼 속수무책으로 거실까지 끌려 나온 성아는 살기 위해 실토했다. 비참했지만 성아에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봤어요! 그 집에서 이 교수 아들을 봤어요!」
「그 씨부럴 놈. 하는 짓거리가 영 구리다 했어.」
「아버지, 어쩔까요. 그놈들 확 신고할까요?」
이장이 저를 닮아 벗겨지기 시작한 아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자빠져 돈만 쓰더니 네 대가리엔 똥만 찼니?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사건이야. 우리까지 줄줄이 엮이면! 이 마을서 죽어 나간 인간이 어디 한둘이야?! 우리 싹 다 종신형이라고!」
이장의 핏발 선 눈이 성아를 향했다.
「박성아. 네가 그놈 좀 꾀어 와라. 여기 빌붙어 밥 빌어 먹고살려면 행동 똑바로 해. 수녀님도 괜한 짓 말고 가만히 계세요. 마을 사람들한텐 내가 말할 테니까. 한 선생이랑 통화 좀 해야겠다.」
이장은 분을 삭이고 한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선생은 이 마을이 푼 미끼에 이끌려 온 인간들을 도축하는 사람이었다. 한 선생이 이장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한 선생은 성아가 해야 할 일도 정해 주었다.
그렇게 성아는 자신 몫의 일을 해냈다. 사냥감을 덫으로 끌어들이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한 짓거리.
이제 성아는 파수꾼이 사라진 집을 지키다가 그 안에서 나오려는 사람에게 똑같이 거짓말을 해 한 선생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두기만 하면 되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짓은 허락된 영역 밖의 일이었다. 해선 안 될 일이었지만, 성아는 확인하고픈 욕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집 안에서 나는 묘한 향기에 코를 킁킁거리며 홀린 듯 닫힌 방문 앞에 섰다.
정말 그 남자였을까? 왠지 뇌리에 각인되는 인상의 남자였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경찰을 피하고,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태도로 보아 이들은 이 교수를 살해한 범죄자가 확실할 것이다. 한마디로 저를 포함한 이 마을 사람들만큼이나 나쁜 놈들이었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찝찝한 거지?’
성아는 알 수 없는 망설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였다. 마당에서 컹컹! 검둥이가 짖어 댔다. 성아는 깜짝 놀라 문에서 멀어졌다. 컹컹! 검둥이는 성아의 행동을 꾸짖듯 사납게 짖어 댔다. 성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언제나처럼 시키는 대로!”
산에서 내려온 후로 계속 성아의 뇌리에서 맴돌던 나지막한 유혹이 다시금 성아의 머릿속에 울렸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당신한테 달렸어요.」
“하…… 이 멍청이!”
숨을 터뜨리며 성아가 제 머리통을 두들겨 댔다. 잘못 생각했다. 어차피 똑같이 나쁜 놈들이라면, 저를 ‘성아 씨’라고 불러 주는 쪽에 서는 게 맞았다. 성아는 같은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었다.
“다시 데려, 데려오자. 어떻게든 될 거야.”
그렇게 결심한 성아가 현관문을 향해 힘껏 돌아섰다.
“니 여기서 뭐 하냐.”
이장의 아들이 캄캄한 거실에 우뚝 서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낡은 작업화를 벗지도 않고 선 그는 마을에서 개를 잡을 때 쓰는 시퍼런 회칼을 들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검둥이가 사납게 짖어 댄 이유는 성아에게 경고를 해 주려던 거였다.
“이 씨발년이. 니 여기서 뭐 하냐고.”
“왜, 왜 여기…….”
한 선생은 성아에게 이 집을 지키라고 시켰다. 철저하고 똑똑한 한 선생이 지시할 일을 헷갈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장 아들은 한 선생의 지시 없이 이곳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시켜서 왔다, 왜. 이 마을 사람도 아닌 한 선생, 그 여우 같은 놈만 믿고 손 놓고 있다가 뒤통수라도 맞으면? 우리 손으로 확실히 처리해야 안심이지.”
자신이 맞서야 하는 무기가 내뿜는 살벌함에 성아는 오금이 저려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성아의 눈빛을 본 이장 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오냐오냐 봐줬더니 어디 남자 집을 벌컥벌컥 쑤시고 다녀. 어? 너 여기 뭐 하러 왔어. 예전부터 슬금슬금 눈치 보며 내빼려드만, 저 서울 놈 꼬셔서 튈려고 왔어?!”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성아의 뺨을 내리쳤다. 입안 살이 터지며 성아는 나가떨어졌다.
“니 여 딱 기다려라. 저놈부터 손보고 다음은 너 차례다. 네가 누구 소유인지 내 오늘, 가르쳐 줄란다.”
순간 성아는 방으로 향하는 이장 아들의 다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오늘이 결판을 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 저질러야 했다. 나무줄기 같은 다리에 성아는 사정없이 걷어차였다.
“놔! 놔!”
“못 놔! 씨발놈아! 이 돼지 새끼야!”
성난 손아귀에 후드가 덥석 붙잡혀 몸이 일으켜졌다. 성아를 떼어 낸 이장 아들은 작은 몸뚱이를 바닥에 패대기치더니 달려들었다.
“그렇게 못 기다리겠으면 너부터 조용히 시켜야겠다.”
드센 손짓으로 이장 아들이 성아의 옷가지를 잡아 뜯었다. 성아는 몸을 웅크리고 안간힘을 써 버텼다. 길고 두툼한 옷이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이장 아들이 칼을 내팽개치고 두 손으로 달려들었다. 성아는 그 손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이장 아들이 돼지 같은 비명을 질러 댔다.
난장판 속에서 달칵, 잠잠하던 방문이 열렸다.
마당에서 본 남자, 티브이에 나왔던 이선우가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성아와 이장 아들을 보고 놀라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조금 피곤한 몽유병 환자 같은 얼굴로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이, 씨, 씨발!”
당황한 이장 아들이 허겁지겁 칼을 쥐고 그에게 달려갔다.
“안 돼! 피해요!”
성아의 경고에도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자길 향해 달려드는 칼날을 기다리듯이.
푹, 칼날이 살을 가르고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발가락부터 머리꼭지까지 번졌다. 피부가 죄다 일어난 것 같았다. 사람의 배에 칼을 꽂고도 이장 아들은 킬킬거렸다.
“그러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숨어들어 왔어?”
칼을 맞은 그가 반 발자국 밀려났다. 그는 제 배에 꽂힌 칼을 지루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칼의 손잡이 부분을 쥔 그가 돌연 거꾸로 칼을 뽑아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신음 한 톨 흘리지 않고 제 손으로 완전히 칼날을 빼냈다.
카강!
피에 젖은 칼날이 바닥에 떨어졌다.
“뭐, 뭐야. 어, 어떻게…….”
그가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배에 난 자상이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며 점점 작아졌다. 성아의 부릅뜬 눈에 그 이상 현상이 똑똑히 새겨졌다.
별안간 그의 주먹이 아연실색한 이장 아들의 얼굴에 꽂혔다. 투실한 몸이 뒤로 고꾸라졌다. 그는 집요하게 머리통만을 노려 주먹으로 내리쳤다. 퍽, 퍽, 살이 으깨지는 소리가 멈춘 건 이장 아들의 기이한 신음이 그쳤을 즈음이었다.
“아. 죽이면 안 되지.”
그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피에 젖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바닥에 널브러져 얼어붙은 성아에게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 떨어져 있던 회칼을 손에 들었다.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성아는 당장 떠오르는 빈약한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성아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그가 풀어 헤쳐진 긴 머리카락을 피 묻은 손으로 몇 가닥 건져 올렸다.
“너구나.”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성아는 기절할 만큼 무서웠다.
“내가 하나 알려 줄까.”
그의 시선이 처음으로 성아를 마주 봤다. 헝클어진 머리, 경계 없이 풀려 버린 동공, 거기에 어울리지 않게 퍽 개운한 기색이었다.
“나쁜 짓을 할 땐 그만큼 각오가 있어야 돼. 누굴 죽이려면 너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거야.”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회칼을 치켜들었다. 꽉 막혀 있던 성아의 목구멍에서 마지막 비명이 굳은 성대를 찢으며 터져 나왔다.
콱!
칼끝이 바닥에 박혔다.
“나비, 어딨어.”
그가 뜬금없이 성아에게서 나비를 찾았다. 나비. 그 한없이 나약하고 부드러운 단어에서 성아는 저도 모르게 한 남자를 떠올렸다.
“교, 교회. 교회로 갔어요.”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 성아의 가쁜 숨소리만이 외로이 남겨졌다. 서슬 퍼런 칼날이 빛을 내며 제 존재를 알렸다. 성아의 고양된 시선이 날카로운 칼날에서 저 앞에 널브러진 몸뚱이로 향했다. 이장 아들에게 맨손으로 맞설 때보다 더 심장이 뛰었다.
“씨이팔….”
죽을 각오라면 이미 했다. 성아는 그가 자신의 몫으로 남기고 간 칼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건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성아의 선택이었다.
∞ ∞ ∞
의식이 들었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두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눈을 가린 천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의자에 앉혀진 몸의 허리와 두 발목도 끈 따위로 단단히 고정된 채였다.
성아가 나를 속였고 누군가가 나를 납치했다. 그렇다면 선우는?
주변에선 선우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만 데려온 거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청각과 후각에 의지해 주변을 파악했다. 지하실, 냉기, 시체 냄새.
교회의 냉동고다. 거기에 전에 왔을 때는 나지 않았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살아 있는 남자였고 마을 사람은 아니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달그락하고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정면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어 가려진 시야로 그곳을 응시했다.
“침착하네. 놀라지도 않고.”
누군가의 손길이 눈을 가린 천의 매듭을 풀어냈다. 침침한 조명이 켜진 지하 냉동고에는 나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차가운 인상의 젊은 남자 둘뿐이었다.
“너 때문에 오밤중에 세 시간을 운전해서 왔어. 어떻게 알았지? 이 교수가 말했나?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은색 테이블에 걸터앉은 남자가 손끝으로 안경을 추어올리고 메스를 만지작거렸다. 테이블 위에 그와 비슷한 물건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비스듬히 웃음을 걸친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내 대답도 달라질 거야.”
“……재밌네? 난 여기 사람들한텐 한 선생, 너한텐 이 교수님의 제자, 비슷한 거지.”
자신을 한 선생이라 소개한 남자는 메스에 제 얼굴을 비춰 보며 깨끗하게 정리된 머리를 매만졌다.
“한때 이 교수님을 꽤나 존경했는데 말이야. 웬 여자한테 빠져서는 사업을 다 망칠 뻔했다더군. 그래서 내가 이어받았지. 이런 기회는 그렇게 흔치 않거든. 덕분에 의사까지 되었어.”
기대 있던 몸을 세운 한 선생이 뒤로 돌아 두 팔로 테이블을 짚었다. 그리고 작고 예리한 도구를 하나하나 들어 올리며 신중히 골랐다.
“아직 나한테도 행운이 남아 있던 모양이야. 이렇게 귀한 재료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네가 누군지, 뭘 알고 왔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재료?”
내 질문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내뱉은 한 선생은 골라낸 몇 가지 도구를 따로 트레이에 올려 두고 무언가를 조작했다. 테이블 위에 내 쪽으로 각도를 맞춰 올려 둔 것은 삼각대에 고정된 카메라였다.
“내 정식 작업실이 아닌 게 아쉽긴 하지만…….”
정장 차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질긴 비닐 앞치마에 양팔을 끼워 넣고 허리끈을 묶으며 한 선생이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차가운 메스 끝으로 내 턱을 치켜들었다.
“너를 당장 해체하지 않고는 못 참겠거든.”
한 선생이 얇은 입술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아무래도 선우 아버지가 선우를 낳고 사라진 그 여자의 뒤를 쫓는 동안 방치되어 있던 마을은 이 남자를 새로운 이 교수로 세운 모양이었다. 나는 확인차 남자에게 물었다.
“날 죽여서 팔 생각이야?”
한 선생은 재미있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큭큭 웃었다.
“이 마을 인간들은 말이야. 돈 때문에 이 일을 해. 고작 돈 때문에.”
남자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검은 라텍스 장갑을 꺼냈다. 밑단을 쭉 잡아당겨 다섯 손가락에 끼우는 동작이 노련했다.
“눈뜬장님이지. 이 일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뭔지를 전혀 몰라. 그래서야 시체나 파먹고 사는 구더기들과 다를 게 없잖아? 사실 인간 대부분이 그렇지만.”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한 선생이 내 어깨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시선으로 나를 살피며 내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한 선생의 구둣발 소리에 맞춰 그림자가 거친 콘크리트 바닥과 벽을 타고 오르내렸다.
“당신은 뭐가 다른데?”
내 질문에 한 선생이 걸음을 멈췄다. 칼등에 뺨이 깊게 짓눌렸다.
“난 전혀 다르지.”
진심으로 한 선생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라면 새로운 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허리를 숙인 한 선생이 비밀을 이야기하듯 내 귀에 속삭였다.
“내가 하는 일은 인간을 해체하는 예술이고 난 생명으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야. 그리고 넌 내 인생의 걸작이 될 거고.”
한 선생은 자기가 한 말에 혼자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그 대답에 깊이 실망했다. 손목에 살짝 힘을 가하는 것만으로 케이블 타이는 허무하게 끊어졌다. 내 뺨에 칼을 대고 있는 한 선생의 손목을 감아쥐고 영문을 몰라 눈을 굴리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결국 당신도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는 그저 그런 인간이란 말이네.”
“뭐? 커헉…!”
손짓 한 번에 뜨거운 피가 퍽 쏟아져 내렸다. 거창하게 헛소리를 지껄이던 한 선생은 목이 잘린 채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피를 뿜어내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식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배가 불렀다.
과식은 내키지 않았으나 남은 결박을 풀고 새빨간 피 웅덩이에서 한 선생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두개골을 부숴 필요한 부위만 꺼내 먹었다. 입천장에 물컹한 뇌가 쩍쩍 달라붙어 기분이 나빴다.
한 선생의 기억이 머릿속에 스며든다. 뉴스에서 본 것을 전화로 떠들어 대는 이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공개 수배되었다는 사실에 잠시 동요한 나는 불안한 의식을 애써 잠재웠다.
이어 한 선생이 시체를 수급하는 모든 과정을 머릿속에 새겼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이제 끝이다. 길은 열렸다. 선우와 함께할 수 있는 길이.
“그때까지 선우가 버틸 수 있을까.”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와 보니 교회 안이 온통 기름 범벅이었다. 기름통을 든 수녀가 정신없이 교회 곳곳에 기름을 뿌리고 있었다.
“내가 끝내야 해. 어떻게든 내가…! 이제 이런 짓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수녀의 회색 치마가 기름에 흠뻑 젖어 얼룩덜룩했다.
“수녀님.”
깜짝 놀라 기름통을 놓친 수녀가 단상 위에 선 나를 돌아보았다. 피에 젖은 나를 보고 무언갈 짐작한 듯 차분하게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끝내게 해 주세요. 속죄할 기회를 주세요.”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죽음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정체를 밝히는 대신 수녀의 믿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거부하면 여기서 죽어요. 실수해도 죽어요. 선택하세요. 당신이 속죄할 마지막 기회니까.”
나는 기꺼이 죄를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만의 신이 나를 위해 그랬듯이.
수녀의 부름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교회로 모여들었다. 나는 한 선생의 모습으로 그들이 전부 모이기를 기다렸다. 마지막 사람까지 교회에 들어오자 그들은 일제히 한목소리를 냈다.
“씹어 먹을 새끼들. 어디 아버지를 죽여? 그런 놈들은 죽어도 싸지!”
“그래요. 이러다 우리 마을까지 큰일 나게 생겼잖아요! 우리끼리 조용히 처리하죠.”
비틀린 정의감에 도취된 그들은 밖에서 교회 입구가 닫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수녀가 내가 시킨 대로 했다면 저 육중한 나무 문은 무슨 수를 써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한 선생! 어떻게 할 거야? 아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혼자만 쏙 빠져나갈 생각하는 건 아니지? 왜 사람들 다 불러 놓고 꿀 먹은 벙어… 컥!”
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처리해 나갔다. 잡히는 대로 족족 목을 꺾었다. 아직 목이 떨어지지 않은 이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교회 천장에 메아리쳤다.
“죽여! 누가 아무나 저것 좀 죽여 버리라고!”
누군가가 나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으나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의자를 넘어 다니며 중구난방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성가시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목을 내 본체의 앞다리로 잘라 냈다. 숨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나와 함께 다 여기서 죽을 테니까.
바닥을 기어 다니는 머리통을 하나하나 밟아 박살 내다 보니 발을 딛는 곳마다 금세 피바다가 만들어졌다. 붉은 파장이 넓게 퍼져 남은 한 사람에게 닿았다. 제일 먼저 내게서 멀어져 출입문을 긁어 대고 있던 이장이 헛숨을 들이켜며 나를 쳐다보았다. 문에 등을 기댄 몸뚱이가 핏물 위로 첨벙 내려앉았다.
“우리, 우리 말로 하자고? 응? 인간적으로다가.”
“난 인간 아닌데. 너도 아닌 것 같고.”
웃긴 소리를 하는 이장을 향해 눈을 열고 입꼬리를 귀밑까지 찢었다. 공포에 질린 이장이 비명을 지르며 피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렸다. 그 꼴이 이성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거 알아? 당신들을 보면서 사실 안심했어.”
이런 나도 살아가도 되겠구나, 하고.
나는 이장을 그냥 두고 단상으로 돌아갔다. 주머니에서 수녀에게 받은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켠 라이터를 바닥으로 던지자 핏물 위로 불꽃이 춤을 추며 번졌다.
교회는 순식간에 제 모습을 찾았다. 무더기로 쌓인 시체가 불타는 생지옥. 이장의 비명은 지옥 불에 삼켜졌다. 뜨거운 불길이 내 발밑을 타고 올랐다. 나는 피하지 않고 늦기 전에 이선호의 모습으로 외형을 바꿨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옷가지와 피부를 녹이며 불이 무릎까지 타고 올랐을 때, 교회의 육중한 나무 문이 열렸다. 내부로 유입된 산소로 불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수녀의 신고를 받고 왔을 경찰들이 거센 불길에 가로막혀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단상에서 내려가 교회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봐요! 얼른 나와요!”
나를 본 경찰이 손짓했다. 또 다른 경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소방차는?! 씨발, 일 커지면 안 되는데! 웬 정신병자 새끼들 때문에…!”
나는 실소하며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뭐야.”
그는 애초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허탈했다. 나는 열기에 우그러드는 그의 얼굴을 보며 갸우뚱했다. 괴로운 건지, 포기한 건지, 벽까지 번진 화염에 가려져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피부가 녹으며 점점 감각이 무뎌졌다. 세상이 온통 붉고 뜨거웠다.
“나비야!”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한줄기 물처럼 녹아내린 감각 위로 쏟아졌다. 선우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려는 선우를 경찰들이 붙잡았다. 경찰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선우는 다리를 절고 있지 않았다.
다 나았구나.
불량 알을 뽑아내 회복력이 본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가 무사함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와 선우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것처럼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신경이 망가졌는지 더는 선우가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마저 희미해져 갔다. 대답해 주고 싶었다. 내가 없어도 선우가 버틸 수 있도록. 나는 열기에 타들어 가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사랑해.’
한참 전에 들러붙은 성대로는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빨리 말해 줄걸. 그러나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질주를 시작한 짐승은 멈추지 못한다. 한 번의 사냥이 생존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선우를 향한 매 순간이 그랬다. 언제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끼이익.
거대한 십자가가 내 머리 위로 기울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부디 날 기다릴 선우에게 닿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모든 죄는 처음부터 내 거였으니 내가 가져갈게.
쿵.
속죄의 무게가 나를 가차 없이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