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나비의 얼굴을 보자 내가 얼마나 소중한 걸 잃어버릴 뻔했는지 실감이 났다. 다시 만난 나비의 긴 속눈썹을 적신 눈물이 내 뺨으로 떨어졌다.
“나예요.”
감각이 무뎌진 내 손을 매만지며 나비가 애달프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나비예요.”
내 대답을 바라듯 나비가 재차 말했다.
“……알아.”
너는 다른 무엇도 아닌 나의 나비야.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어.”
속수무책으로 목이 잠겼다. 눈꺼풀을 깜빡여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얼른 흘려 냈다. 놓치고 싶지 않아 힘없는 손을 뻗으려 하자 와락 몸이 안겼다. 반듯한 콧대와 부드러운 입술을 내 목덜미에 파묻은 나비에게서 어떤 말보다 애타는 숨이 전해졌다.
“선호야.”
사라진 아들을 찾는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금 피 냄새 나는 현실로 불러들였다. 고개를 든 나비의 젖은 눈꺼풀이 긴 꿈에서 깨듯이 천천히 열렸다. 드러난 눈은 어둠을 흡수한 것처럼 모조리 검었다.
“선, 호…… 아, 아악!”
엄마가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나비의 시선이 비틀거리는 엄마를 따라 움직였다.
“당신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차가운 목소리는 죄를 물을 뿐 변명을 바라지 않았다.
꾸드득.
어깻죽지에 닿아 있는 나비의 팔 근육이 뒤틀렸다.
“먹을 필요도 없으면서 왜 죽이려는 건지.”
주저 없이 목표를 향해 뻗어 나가는 나비의 팔을 간발의 차로 붙잡았다. 볼품없는 내 힘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을 멈춘 팔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두텁게 드리운 어둠도 기괴한 형태를 가리지 못했다. 피부를 찢고 드러난 흰 외골격은 인간을 도륙 낼 준비를 마친 상태로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조금만 늦었더라면 엄마의 가느다란 목을 뼈째 절단하고도 남을 만큼 길고 날카로웠다. 그 팔의 주인인 나비가 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왜요?”
날 선 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약하고 기댈 곳 없는 나를 짓밟고 깔아뭉개던 그들이 감히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사람의 몸에서 뻗어 나온 하얀 곤충의 다리가 이미 그들의 정신을 섬뜩하게 찢어발긴 후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신들이 버린 내가 손에 넣은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또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그들에게 뼈저리게 새겨지기를 바랐다.
“왜 죽이지 않아요?”
나를 위해서만 젖는 검은 눈이 무정하게 물었다. 전율이 끼쳤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씻긴 듯 망설임이라곤 없는 표정. 정녕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얼굴.
스스럼없이 살의를 드러내는 나비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기다려.”
내가 상체를 세워 앉으려 하자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나비의 손이 등을 받쳐 왔다. 놓쳤던 목줄이 다시 내게 쥐어졌다. 자진하여 그 끝에 제 목을 묶은 것은 한낱 괴물 따위가 아니었다. 먹이 사슬의 절대적 우위를 점한 포식자이면서 오로지 내게만 복종하는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선호, 우리 선호는 어디 있어? 우리, 내 아들 선호는…….”
이제야 모든 걸 깨달은 엄마의 낯이 눈물조차 짜낼 수 없는 절망에 질려 갔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엄마의 두 눈이 텅 비어 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엄마가 부르짖던 신이나 악마의 존재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였다. 엄마에 대한 복수는 동생의 죽음으로 끝났다.
“죽인 거냐?”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숨죽이고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충격에 빠진 표정과는 반대로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투였다. 입 안에 남은 핏덩이를 모아 뱉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독극물로 허물어진 속이 타는 듯 쓰렸지만, 저 인간과 제대로 끝을 내고 싶었다.
“네. 제가 죽였어요.”
아버지의 방관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이복형제를 죽인 나에게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거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버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아버지다웠다. 그런 인간이었다. 인간의 잣대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버지야말로 나를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아, 안 돼. 안 돼……. 그럴 수는…….”
유일하게 엄마만이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식탁 모서리를 짚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그극. 뒤로 밀린 의자가 바닥을 긁는다.
“걔가 가족이니 뭐니 하며 네 얘기를 꺼낼 때부터 이상했지. 걘 어렸을 때부터 널 무서워했으니까. 아니. 집안 모두가 널 꺼림칙해했다. 그런데도 내가 널 키운 이유가 뭔지 아니?”
“날…… 키운 이유라고요?”
짝, 짝, 짝.
간격이 벌어진 우렁찬 박수 소리가 아득한 빗소리를 밀어내고 메아리쳤다. 아버지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대단해! 모습을 바꿀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내 예상은 역시 틀리지 않은 거야.”
아버지는 입이 찢어지게 미소 지었다. 처음 본 아버지의 미소는 소름 끼치도록 광적이었다. 흰자위가 드러난 눈이 나비를 향해 희번덕거렸다.
나도 모르게 곁에 있는 나비를 움켜잡았다. 아버지가 나비에게 쉽사리 해를 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계심이 솟구쳤다. 미친 걸까? 이 상황에 웃을 수 있다니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말한 ‘확인할 것’은 단순히 내 진의가 아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아버지가 내가 원하는 것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내가 아니라면, 정말 애초부터 나비를 바라고 이곳에 왔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비를 위해 나를 키웠다니 앞뒤가 엉망인 개소리였다.
그냥 이대로 죽여 버리고 떠나자. 지금의 나비라면 눈짓만 해도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아버지를 내 인생에서 영원히 제거해 줄 터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긴장으로 마른 입술만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입으로 딱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내 생모를 죽였는지. 아니……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래서 어디 있느냐? 그 애는.”
그러나 나는 또 아버지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말했잖아요. 동생이라면 이미 죽었다고.”
“아니지. 아니야. 내가 묻는 건 네 동생의 죽음 같은 게 아니야.”
아버지는 내 말이 우습다는 듯 히죽였다. 식탁 앞으로 걸어 나오는 걸음걸이가 미친 사람답지 않게 올곧았다.
“가까이 오지 마.”
나비가 으르렁거렸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으나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허리를 굽혀 몸을 낮추더니 우리를 향해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이해하기 힘든 괴상한 행동이었다.
“걱정하지 말렴.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다.”
부드럽게 타이르는 목소리에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끼쳐 올랐다. 아버지가 나비를 달랬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비의 동태를 살피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딱딱하게 굳어 버린 나를 본다. 한껏 무해함을 꾸며 낸 얼굴에 씨익 주름이 깊어졌다.
저건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다. 대체 저 인간은 누구지? 가야 해. 여기서 벗어나야 해.
나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려는 때,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네 동생, 네 옆에 있는 그 아이에게 먹인 거지? 아닌 척할 필요 없다.”
“그걸 어떻게…….”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역시 너 아직 거기에 가 보지 않은 거구나.”
거기?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한 톨의 단서라도 얻고자 급히 기억들을 들췄다.
“동생이 너한테 아무것도 전해 주지 않던?”
순간 기억 하나가 의식의 흐름을 거슬렀다. 캠핑장에서 동생이 내게 주려고 한 노란 서류 봉투, 생소한 동네의 주소가 적힌 서류와 열쇠 꾸러미가 불쑥 떠올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는 여전히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필시 나비와 관련된 것만은 분명했다. 불안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평정심을 잃은 내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뭔데요. 거기 뭐가 있는데요. 내가 거길 왜 가야 하는데요!”
“……됐다. 지금 그런 과거 따위로 널 설득할 필요는 없겠지. 네가 직접 그 아이를 겪어 봤으니 너도 내 마음을 알 거 아니냐.”
아버지와 나 사이에 왜 나비가 언급되는 건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괜찮다. 네가 동생한테 한 짓은 전부 모른 척해 주마. 그 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만, 그것만 알려 주면 돼.”
“그 애라뇨, 대체 누굴…….”
문득 어깨가 묵직해졌다. 나비가 아프도록 내 어깨를 쥐어 왔다. 하얀 손등 위로 도드라진 핏줄이 불안정하게 불끈거리고 있었다.
“나비야…….”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나비는 새카만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전신의 근육이 바짝 긴장한 채였다.
“너까지 왜 그래……?”
불안감이 목을 죄어 왔다.
“아들아. 제발.”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날 아들이라 부르며 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엄마처럼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이 아닌 나를 향해 빌고 있었다.
“널, 널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네가 태어나고 그 애를 잃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날 이해하지? 지금의 너라면. 응? 안 그러냐?”
내가 당한 불행 앞에선 수년간 다물고 있던 비겁한 주둥이가 변명을 늘어놓는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헛소리에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해한다는 거야……?”
뒤엉킨 사고는 의문만 내놓을 뿐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끝없이 부풀었다.
“아들아.”
납작 엎드린 버러지 같은 꼴로 아버지가 어기적어기적 기어 왔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당장 나비에게 저걸 내 눈앞에서 치워 달라고 소리치려 했다.
드드득, 드드득.
분명 꺼 놓았는데 언제 켜졌는지 내 핸드폰이 바닥에서 진동해 댔다. ‘장 형사’란 글씨가 뜬 액정의 푸른빛이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을 거꾸로 비췄다.
“이런 날이 오기만을 지난 30년 동안 기다렸어!”
쿵! 아버지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아들아, 이 아비의 평생 마지막 부탁이다!”
상체를 바짝 쳐든 아버지가 갑자기 셔츠를 까뒤집어 흉측한 상처를 드러냈다. 깨진 이마에서 붉은 핏줄기가 아버지의 얼굴을 반으로 가르며 흘러내렸다. 나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처를 피할 수 없었다.
거무죽죽하게 죽어 버린 피부. 찢어졌던 피부를 기운 울퉁불퉁한 가장자리. 한쪽 옆구리를 꽉 채운 반원형의 상처는 원인을 가늠케 하는 형태였다. 그것은 커다란 무언가에 처참히 물어뜯긴 흔적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 애한테 날 먹으려 했던 일 같은 건 다 용서했다고 전해 줘야 해. 그러니까 제발…… 말해 다오. 어디에 있는지.”
먹어……?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가정이 순식간에 심장을 옭아맨 바로 그때.
스걱.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피를 뿜는 제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셔츠를 잡아 올렸던 투박한 손이 아버지의 무릎 앞에 굴러떨어졌다. 뺨이 붙잡혀 고개가 돌아갔다. 내 시야를 완전히 차지한 나비가 이마를 맞댔다.
“들을 필요 없어요.”
모르는 사이 막혔던 숨이 탁 터졌다. 방황하던 의식이 유일하게 안정감을 주는 상대에게 낙하했다. 날 어르는 나비의 손에서 피 냄새가 났다. 아버지란 작자는 나비로 하여금 살의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비가 아버지의 입을 막으려 했다는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랐다.
“당신한테 나 말고 다른 건 아무 의미도 없잖아요.”
물꼬를 튼 내 의심을 막으려는 것처럼 나비가 달게 속삭였다. 그래서 확신했다. 아버지가 해선 안 될 말을 해 버릴까 봐 나비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서는 안 될, 동시에 더는 감출 수 없는 어떤 진실을 애써 감추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죠? 그렇다고 대답해 줘요. 나만 있으면 된다고 그랬잖아요.”
울상을 한 예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나비를 잠시 바라보다가 차가운 손을 꽉 잡아 내렸다.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는 알아야겠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는지 반드시 알아야겠다.
나비의 품에서 벗어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고통에 일그러져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집요한 시선만은 그대로였다. 감정이라곤 없던 아버지를 저토록 필사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정말 내 생모라면 어째서…….
“혹시 지금 아버지가 말하는 사람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피가 스민 아버지의 흰자위가 괴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지독한 놈. 끝까지, 정말 끝까지 이럴 거냐?!”
핏줄과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한 얼굴이 파들파들 떨며 경련한다. 그런 아버지의 몸에서 째깍대는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널 낳은 네 생모 말이다!”
아버지가 폭발했다. 피를 토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침묵과 방관 속에서 참아야만 했던 억울함을 나도 마주 터뜨렸다.
“그 여잔 당신이 죽였잖아! 자기 손으로 죽인 여자마저 내 탓으로 돌리려는 거예요? 소용없어요! 다 봤다고! 어딘가에 가둬 둔 그 여자 사진을……!”
매캐한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차 들썩이는 내 손을 나비가 세게 붙잡았다. 왜일까. 곁에 있는데도 간절한 힘이 느껴졌다. 내가 어딘가로 휩쓸려 버릴까 불안해하는 것처럼.
“흐…….”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였다. 흐느낌을 닮은 기묘한 웃음소리가 아버지에게서 새어 나왔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팔이 느릿하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를 향해 똑바로 뻗어진 아버지의 손가락 끝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맞잡고 있던 손이 지목당한 걸 알아차리고 움찔했다. 덩달아 내 손에도 힘이 실렸다. 손안에 땀이 찼다.
“네 어미가 죽어……?”
어느샌가 나비를 노려보는 아버지의 음산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 옆에 있는 그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사고가 뚝 끊어진다.
“지금 나를 낳은 여자가…… 괴물이라는 거예요?”
“정말 몰랐던 거냐.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정말 없어?”
아버지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이 나비처럼 변해 간 이유, 그리고 나 자신을 수백 수천 개로 쪼개 탓해야 했던 공허함의 이유가 간단한 진실 하나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내가 도태된 인간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살아남은 괴물이었다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짚으며 더듬더듬 나비를 찾았다. 날 지켜보고 있는 나비의 얼굴은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정신이 아찔했다.
“너…… 알고 있었어?”
「아마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나 봐요.」
그때.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해요.」
그때도.
「당신은 나랑 달라.」
다 알면서.
「인간으로 살아 줘. 선우야.」
그렇게 말했던 거야?
나비가 내게 했던 말들이 이제야 진짜 의미를 드러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도 알게 되는 순간, 다시는 그 전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진실이 있다. 나비는 나를 그 진실로부터 지키고자 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 가면서까지 날 밀어낸 그 마음에 감히 뭐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그저 눈시울이, 온몸이 뜨거워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나비가 젖어 드는 내 눈가를 조심히 닦아 주었다.
“……처음부터.”
나비의 고백에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지금껏 내가 나비를 발견했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불쌍한 괴물을 구해 낸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전부 내 착각이었다.
“내가 널 찾아낸 게 아니라, 네가 날 찾아낸 거였어……?”
“너는 달랐으니까.”
왜 나는 이제야 알았을까. 실체 없는 진실에 침몰하던 날 발견한 건 너였음을, 내가 처음부터 너에게 특별했음을, 아무도 채워 주지 않던 내 빈 곳을 너는 제 피와 살로 채워 주려 했음을.
네가 이미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널 이렇게 만든 날 용서하지 마.”
나비가 자신을 탓했다.
“네 말이 맞아.”
“…….”
“듣지 말 걸 그랬어.”
바보같이. 너는 네가 나의 불행이 될 거라 했지만 틀렸다. 너는 나의 불행을 슬퍼해 줄 유일한 존재였다. 네가 흘린 단 몇 방울의 눈물이 나를 살아 있게 했다.
“어차피 너 말고는 다 의미 없는 건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비로소 같은 출발선에 서게 된 것뿐이다. 나비가 고개를 저으며 내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흰 뺨에 떨어졌다.
“나는 네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다 먹어 치우게 될 거야. 멍청해서 너를 또 상처 입힐 거고, 뻔뻔하게 매번 미안하다고 말하겠지. ……지금처럼. 네가 결국은 날 용서해 줄 걸 아니까.”
나비의 말은 우습게도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도망칠 곳을 찾으려 드는 나비가 괘씸해서 멱살을 휘감아 당겼다.
“용서? 그딴 거 해 줄 생각 없어.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인 울지도 마. 나한테 그렇게 미안하면 울지 말고 네가 끝까지 책임져. 내가 너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죽는지 끝까지 지켜보라고. 알겠어?”
내 비루한 삶의 이유가 담긴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나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다다르기 위해 비탈을 굴러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 눈물까지, 나비의 모든 것이 다 이제야 내 손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 내 고통은 가치를 얻었다.
“아, 아들아.”
비척대는 발소리가 슬금슬금 가까워졌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나비를 숨겼다.
“알 게 뭐예요. 날 낳은 괴물 같은 거.”
“저, 저걸 찾아냈지 않니. 이제 네 엄마를 찾아서 진짜 가족이 되는 거다.”
“내가 왜요? 당신이 망친 가족인데. 그러게 버려지기 전에 잘하셨어야죠.”
아버지가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너도 그것들이 어떤지 알잖니.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 그걸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랑 당신을 똑같이 취급하지 마.”
나와 아버진 달랐다. 나는 나약한 고깃덩이도 아니고, 성욕과 식욕을 구분하지 못하는 괴물도 아니었다. 내 사나운 일갈에 아버지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그 아이와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게 내가, 내가 도와주마.”
아직도 제 분수를 깨닫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헛웃음이 샜다.
“제가 무슨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뭐든 말만 해라.”
“머리나 내놓고 뒈지세요.”
비굴하던 안색에 서서히 광기가 번져 갔다.
“이, 이런…… 건방진 새끼가.”
아버지가 몸을 던지듯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재빠르게 뭔가를 품에 숨겼다. 떨어져 있던 내 핸드폰이었다. 그새 112로 통화가 걸려 있었다.
“내가 순순히 죽어 줄 줄 알고? 빨리 말해! 그 애는 지금 어디 있어!”
궁지에 몰린 아버지가 마지막 발악을 했다. 하찮기만 했다. 등 뒤에 얌전히 있던 나비가 귓가에 입술을 붙여 왔다. 언제 울었냐는 양 속삭이는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말해 봐요. 어디가 좋겠어요?”
다리? 허리? 머리? 무심히 자를 부분을 가늠하는 나비를 가볍게 밀어냈다.
“내가 할게.”
저런 버러지를 처리하는 일에 나비의 도움까진 낭비였다. 전화가 연결되기 전에 무지근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똑똑.
들려선 안 될 소리가 공간을 얼렸다. 악을 쓰던 아버지가 입을 합 다물었다. 소리를 따라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 곳은 현관이 아닌 어두운 거실 너머. 폭우가 쏟아지는 테라스에 누군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화가 연결됐다.
―……찰서 …니다. ……세요?
폭우 때문인지 연결 상태가 나빴다.
그런데 검게 젖은 유리창 앞에 바짝 붙어 선 인영이 그 소리를 들은 듯 다시 노크하려 팔을 치켜들었다.
도대체 누구지? 생각하는 순간, 와장창하는 파열음과 우레 같은 빗소리가 청각을 마비시켰다. 작은 입자들이 진눈깨비처럼 쏟아져 들이쳤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차가운 빗물이 뒤섞여 튀는 와중에 나를 감싸 안는 나비의 품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았다.”
타임아웃. 머릿속에 시뻘건 경고문이 떴다. 나비의 몸 아래에 깔린 채 번쩍 눈을 치뜨자 빗속에 서 있던 소름 끼치는 목소리의 주인이 와작와작 유리 조각을 밟으며 걸어 들어왔다.
검은 우비에 가려진 얼굴은 서 과장, 그 여자였다.
“아주 오랜만에.”
후드 아래 서 과장의 얼굴이 끓는 액체처럼 솟아오르고 꺼졌다.
빠득, 빠드득.
우비 속에 감춰진 몸에서 ‘그 소리’가 났다. 나비가 내게 보여 주지 않았던 변태의 소리. 번개가 꽂히는 듯한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가족 상봉이네요.”
처음 듣는 목소리로 말하며 서 과장이 후드를 벗었다. 마침내 드러난 여자의 정체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간직해 온 사진 속의 여자가 나비를 보며 싱긋 웃었다.
“데리러 왔어. 나비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 ∞ ∞
영화관이 있는 복합 쇼핑몰을 나온 현욱이 남색 장우산을 펼쳤다. 평일 오후, 한산한 번화가 거리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어딘가 을씨년스러웠다. 담배가 당겼지만, 근방에는 눅눅하게 젖은 야외 흡연 구역뿐이어서 현욱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다 말고 도로 집어넣었다.
“후.”
답답한 숨을 내쉬고 몇 시간 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뻐근해진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선우의 직장 동료라던 여자의 말에 따르면 이선우가 나비라고 부르는 남자가 사라진 곳은 이곳, 도심 한복판의 쇼핑몰이었다. 그 남자의 행방을 추적하고자 건물 내 CCTV를 샅샅이 뒤져 봤으나 건물 특성상 대부분의 CCTV가 가게를 위주로 설치되어 있어 쓸 만한 게 없었다. 더구나 이선우가 공격당했다는 비상계단은 아예 CCTV가 존재하지 않았다.
절차가 좀 복잡해지더라도 구청에서 설치한 CCTV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고개를 젖히고 대로변 CCTV의 각도를 훑으며 걷던 현욱이 일순 멈칫했다.
현욱이 멈춰 선 곳은 일전에 한 번 와 봤던 건물과 건물 틈에 난 좁고 긴 골목의 입구였다. 쓰레기 무단 투기를 금하는 프린트물에서 촬영 중이라는 문구를 확인한 현욱이 고개를 치켜들고 모처럼 씩 웃었다.
“빙고.”
경고문 위에 CCTV가 엉성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쇼핑몰 옆 상가 건물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사설 CCTV였다.
“확인하실 날짜가 언제라고요?”
모니터 앞에 앉은 관리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현욱은 예정원이라는 여자의 증언을 상기하면서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허리를 숙여 모니터 가까이 다가섰다.
“8일 전이요. 시간은 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
“8일 전이라……. 아슬아슬하게 오셨네. 열흘이면 다 삭제되거든요. 이거네요.”
화면의 화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나 위치와 각도가 별로라 골목 안쪽까지 볼 수는 없었다. 재생 바를 옮기자 화면이 뚝뚝 끊기며 바뀌었다.
“여기서부터 보시겠어요?”
“예.”
관리인은 의자를 현욱에게 내주고 비켜섰다.
“다 보시면 말씀하세요.”
뒤쪽 소파에 앉은 관리인의 관심은 곧 핸드폰으로 쏠렸다. 현욱은 그의 무관심을 확인하고 일시 중지 상태의 영상을 재생했다.
방향키를 눌러 가며 영상을 확인하던 중 얼마 안 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화면 속에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큰 키에 매끈한 콧날이 도드라지는 인물이었고 인상착의도 동영상 속 나비란 남자와 같았다.
‘골목으로는 왜 들어가는 거지?’
현욱의 기억대로라면 분명 골목의 끝은 막다른 길이었다.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도주 중처럼 보이지 않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남자는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영상을 빨리 감자 20여 분 뒤, 남자가 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뭐지?’
현욱의 손가락이 바삐 영상을 되감았다.
“……이게 무슨.”
세 번째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남자가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나오는 모습을 비교하던 현욱이 어느 순간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벙하니 입을 벌렸다. 일시 정지된 화면에는 골목을 나가는 남자의 옆모습이 정확히 찍혀 있었다.
“이선호.”
이선우의 동생이 나비라는 남자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다.
현욱은 방향키를 두드려 영상의 뒷부분을 확인했다. 영상이 끝날 때까지 골목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더 없었다.
‘나비란 놈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USB에 영상을 담은 현욱은 재빨리 CCTV 원본 파일을 영구 삭제했다.
“영상 좀 복사해 가겠습니다.”
“예에. 그러세요.”
머리가 복잡했다. 자신이 무엇을 본 건지 모르겠지만 알려지게 둬선 안 될 듯싶었다. 급히 건물을 빠져나온 현욱은 우산도 잊은 채 비를 맞으며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축축하게 젖은 골목 끝에선 역한 비린내만 풍겼다.
“여기서 대체 뭘 한 거냐.”
전에 봤던 누런 껍데기는 시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 특수 분장이라도 한 건가?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사건을 파면 팔수록 누군가 쳐 놓은 함정인 양 오리무중에 빠졌다.
현욱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우둘투둘 시멘트가 벗겨진 곳에 시선이 닿자 불현듯이 전에 자신이 했던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무덤.”
일부러 올려 둔 듯 놓여 있던 풀떼기는 없었지만, 여전히 도톰하게 솟아올라 있는 흙더미를 발견하고 현욱은 망설임 없이 그곳을 파헤쳤다. 질척한 흙을 마구 퍼내던 손끝에 문득 물컹한 무언가가 닿았다. 후각을 찌르는 악취에 현욱은 팔을 들어 코를 막았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 악취가 구덩이에서 훅 퍼져 나왔다.
“이게 뭐야.”
누렇고 둥근, 손바닥만 한 덩어리가 썩어 가고 있었다. 개미 떼며 구더기가 바글바글했다.
“장 선배. 여기 있었어요?”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혼자 노트북을 펼쳐 놓고 골몰해 있던 현욱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후배의 등장에 흠칫 놀랐다.
“왜?”
현욱은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닫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후배를 올려다봤다.
“실종 사건 아파트 3001호 남자 말이에요.”
“이선우? 이선우가 왜?”
현욱의 예민한 반응을 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선 후배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만간 조사 들어갈 것 같은데요.”
“뭐? 뭐 때문에. 똑바로 얘기해.”
현욱이 정색하자 후배의 표정이 홱 일그러졌다. 성큼성큼 거리를 좁힌 후배의 사나운 분위기를 감지한 현욱의 미간도 좁아졌다.
“뭐 하자는 거냐?”
“장 선배. 선배야말로 똑바로 해요. 선배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난 선배가 다른 사건 때처럼 경찰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나쁜 놈 잡아들이는 게 경찰이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서 과장님 지시도 무시하고 그 사건에 매달리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던 거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후배가 “아이 씨!” 하며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허리에 두 팔을 얹고 천장을 향해 한숨인지 심호흡인지 모를 숨을 푹 내쉬곤 결심한 듯 다시 현욱을 본다. 눈빛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 사건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설마…… 개인적 감정, 그런 거 있는 거 아니죠? 내가 모자란 놈이라 착각하는 거죠?”
현욱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모호한 단어들을 골라 에둘러 말한 후배가 저에게 뭘 묻고자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기실 현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후배의 말대로 자신은 나비란 남자가 찍힌 CCTV를 지우고, 2901호 남자의 핸드폰에서 발견된 이선우의 사진마저도 지웠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한 증거였으므로 따지고 들 것도 없이 자신이 한 행동은 불법이었다.
‘왜 그랬지?’
현욱은 새삼 자문했다.
‘이선우는 범인이 아니라 피해자니까.’
현욱에게는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밖에 이선우에게 느끼는 감정이 있다면 그건 부수적 문제였다. 현욱은 후배의 불쾌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네 착각이야. 그러니까 아까 하던 말이나 다시 해 봐. 이선우가 뭐로 조사받아야 하는지.”
무덤덤한 현욱의 태도에 민망해졌는지 후배가 뺨을 긁적이며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얼마 전에 이선우가 폭행했던 회사 상사. 실종됐대요.”
“뭐?”
흉터 진 현욱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가슴이 철렁한 현욱과 다르게 말을 잇는 후배는 속이 시원한 표정이었다.
“이선우는 실종 예상일 바로 다음 날 퇴사했고요. 영장 나오는 건 시간문제일 거예요. 그러면 그 아파트에 관련된 실종 사건도 일사천리로…….”
“서 과장이 그렇게 하래?”
“네?”
“서 과장이 덮으라고 한 사건이잖아. 그러라고 뒀냐고.”
입을 헤 벌리고 멍하던 후배가 쾅! 철제 테이블을 내리쳤다.
“선배. 지금 장난해요? 덮으라는데 아득바득 범인 찾으려던 건 선배잖아요! 설마…… 진짜로 이선우, 그 남자 감싸려는 거 아니죠? 그죠?”
“…….”
“그래요? 아니, 선배가 왜요?”
“…….”
“아이 씨, 장현욱! 지금 누가 봐도 이선우가 우리가 잡으려는 범인이잖아!”
현욱은 대답 없이 노트북에 꽂힌 USB를 뽑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붙잡는 후배의 외침을 무시하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자신의 개인실 의자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무료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여자의 시선이 무심히 현욱에게로 향했다. 묵례 따윈 생략하고 현욱은 다짜고짜 여자를 불렀다.
“서 과장님.”
“장 형사.”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양해를 구하는 말과 다르게 이미 방 안에 발을 들인 현욱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여자는 불쾌한 내색 없이 웃으며 자신이 앉은 사무용 책상 건너편 의자를 눈짓했다.
“앉아.”
현욱은 한시도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엉덩이가 닿기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일전에 이선우랑 무슨 이야기를 하셨던 겁니까.”
여자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현욱이 그 이름을 언급하리라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곧 그날의 일을 떠올리듯 눈을 굴리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별 건 아니었는데. 그게 장 형사가 신경 쓸 일이던가?”
“신경 쓰면 안 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현욱을 말없이 응시하던 여자가 순순히 답했다.
“잃어버린 건 찾았냐고 물었어.”
“…….”
“잃어버린 게 아니라 도망간 건 아니냐고 했더니 아주 눈이 돌아 버리던데.”
여자는 킥킥 웃었다. 여자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현욱은 몇 가지를 확신했다. 서 과장은 나비라는 남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현욱으로서는 짐작만 할 뿐인 나비란 남자와 이선우의 관계까지도.
“당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이 상황이 아주 재밌다는 양 빙긋 웃으며 여자가 고개를 기울이고 손등 위에 턱을 괬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걸. 내가 이 사건에서 손 떼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현욱의 턱 근육이 불거졌다.
“다시 묻죠. 이 사건에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습니까.”
낮게 성대를 울리는 목소리가 흡사 짐승의 것과 비슷했다.
“…….”
웃음을 지운 여자가 혀로 입술을 훔쳤다.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손목과 손가락을 이리저리 꺾어 대자 비틀린 연골에서 뚜둑 소리가 났다. 단숨에 살벌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현욱은 자신이 서 과장의 공간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했다. 지시에 불복종하는 저에게 주먹이든 명패든 무언가 날아올 거라 예상하고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여자는 가느스름한 시선을 보내며 웃을 뿐이었다.
“재밌네. 장 형사, 혹시 이선우한테 다른 마음이라도 생겼어?”
“……말 돌리지 마시죠.”
“그럼 이렇게 말해 주는 편이 빠를까? 네가 파고들수록 다치는 건 이선우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동요하지 않으려 했지만, 무릎 위에 올린 현욱의 주먹이 모르는 사이 하얗게 질렸다.
“공정한 수사를 위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놔야 하지 않겠어?”
사실 모든 정황이 이선우를 향해 있음을 현욱도 알고 있었다.
‘정말로 이선우가 날 속인 걸까.’
하지만 현욱은, 현욱만은 그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지친 낯으로 제게 비밀을 고백하던 이선우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때의 이선우는 분명 한계에 달해 있었다. 자조적인 웃음과 바싹 메마른 눈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가 봐. 장 형사 때문에 배고파졌어.”
끝까지 빌어먹을 농담 질에 팩 인상을 쓴 현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단하긴 일렀다. 서 과장이 뭔가를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비란 남자의 정체는 물론 이선우의 동생에 대한 새로운 의문도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정면 돌파였다.
현욱은 이선우에게 자신이 본 것들을 다 말할 작정이었다. 현욱이 도와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선우도 더는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으리라.
“가 보겠습니다.”
짧게 묵례한 현욱이 돌아서며 핸드폰을 꺼냈다. 마음이 급해 문고리를 잡음과 동시에 이선우에게 연락하려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검은 화면에 제 얼굴이 비친 순간, 현욱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바로 등 뒤에서 저를 노리는 듯한 두 개의 커다랗고 시커먼 눈깔에 놀란 현욱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안 가?”
싱긋 웃는 서 과장이 눈 깜짝할 새 현욱의 바로 뒤에 와 있었다.
‘잘못…… 본 건가?’
몇 차례 눈을 끔뻑였으나 눈앞에 있는 건 괴상한 눈깔이 아니라 서 과장이었다.
“어디 있는 거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현욱은 쥐고 있던 핸드폰을 조수석에 집어 던졌다. 이선우와 연락이 안 된 지 벌써 3일째였다. 어제저녁 집에 찾아가 봤으나 집은 비어 있었고 밤을 꼴딱 새워 가며 기다려 봐도 이선우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현욱은 눈에 불을 켜고 보초를 서느라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출근했다. 그랬더니 평소에는 시키지도 않던 내근 업무가 쌓여 있었다. 욕을 참으며 온종일 서류와 씨름하다 보니 눈알이 빠질 때쯤에야 퇴근 시간이 됐다.
어제오늘 틀어박혀 있느라 좀이 쑤셔 오는 몸으로 차에 타자마자 이선우에게 전화를 건 참이었으나 역시나 불통이었다. 한 차례 고함을 내지른 현욱은 이선우의 집으로 차를 출발시키려다 말고 핸들을 쥔 채 정면을 노려봤다.
“진짜 도망쳤나.”
현욱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털었다. 마지막으로 이선우를 데리고 간 사람이 그의 동생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만일 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기분 나쁜 불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 누군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닫힌 창문 건너편에서 후배의 목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얘기 좀 해요.”
현욱은 팽개친 핸드폰을 주워 들고 불길한 상상을 한숨과 함께 삼키며 차에서 내렸다. 후배는 따라오라며 자리를 옮겼고 현욱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후배가 고른 장소는 경찰서 뒤 공터, 이선우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장소였다. 아무 성과도 없이 허비해 버린 하루가 어둑어둑 지고 있어 한껏 착잡해진 현욱이 담배를 꺼내 물자 흘끔흘끔 현욱의 눈치를 살피던 후배가 툭 던지듯 말했다.
“서 과장님이 이선우 소재지 파악하라고 지시 내렸어요.”
현욱의 입술에 걸쳐졌던 담배가 떨어졌다.
“뭐? 그럼…….”
수사가 진행된다면 이선우의 비밀이 드러나는 걸 막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결백을 밝히는 편이 이선우에게 더 나았다. 진범을 잡아야만 이선우도 추가 범죄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차라리 잘된 거야.’
현욱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찾았어?”
“뭐야. 왜 이렇게 아까랑 반응이 달라요?”
“어딨는지 찾았냐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듯 두리번거린 후배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이상해요. 나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서 과장님이 그쪽 부서에 조용히 지시하는 걸 우연히 봤거든요. 그리고 사실…… 오늘 선배 내근 업무 지시 내린 것도 서 과장님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붙잡아 놓으라고…… 윽!”
“이 새끼야. 그걸 왜 지금 말해?!”
우악스럽게 달려든 현욱이 후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시멘트 벽에 뒤통수를 박은 후배가 악 소리를 질렀다.
“씨발.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는데 어떡하라고요! 선배가 자꾸 이상하게 구니까……!”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
“…….”
“어디 있냐고!”
현욱의 두꺼운 팔뚝이 후배의 목을 위협적으로 짓눌렀다. 후배가 항복의 표시로 현욱의 팔을 툭툭 치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큭. 속초요. 거기까지밖에 몰라요.”
속초라니, 못해도 세 시간은 걸렸다. 현욱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후배가 새빨개진 얼굴로 허리를 접고 캑캑거렸다. 현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이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로 돌아가는 걸음이 거의 뛰다시피 했다. 서 과장이 몰래 이선우를 찾아내려는 목적이 뭔지 몰라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정말 좋지 않았다.
「저 여자! 저 여자 잡아야 해.」
필사적으로 외치던 이선우의 목소리가 현욱의 머리를 헤집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통화 연결 음만 이어지는 핸드폰을 던져두고 시동을 걸었다.
“선배 같이 가요!”
뒤쫓아 온 후배가 차 문을 두드렸지만 기다려 줄 시간조차 아까웠다. 현욱은 액셀을 밟고 무작정 차를 출발시켰다.
∞ ∞ ∞
뻥 뚫린 창으로 태풍이 몰아쳤다. 거센 파도가 집 안까지 들이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비바람을 등진 여자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여자의 뒤로 번개가 하늘을 쪼개며 검은 바다에 내리꽂혔고 일순 주위가 환해지며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비를 향해 웃는 두 눈이 나비의 것과 같이 새카맸으나 완전히 달랐다. 온기와 애정이 담긴 나비의 눈과 다르게 여자의 눈은 깊고 메마른 구멍처럼 비어 있었다.
좆 됐다. 저 미친 여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어 섣불리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너, 돌아온 거니……?”
충격적인 여자의 등장에 존재를 잊고 있던 또 한 명의 미친놈이 중얼거렸다. 주제 파악에 분위기 파악까지도 안 되는 아버지가 잘린 손모가지를 틀어쥔 채 비틀거리며 폭풍 쪽으로 겁 없는 걸음을 떼었다.
우르릉.
대답 없는 여자를 대신해 하늘이 경고했으나 정신줄을 놓아 버린 아버지에겐 무용지물이었다.
“나를, 나를 찾아와 준 거니?”
아버지와 내 생모란 여자의 감동적인 재회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가라, 가. 제발.
완전히 맛이 가 버린 아버지가 나비에게 쏠린 여자의 관심을 잠시라도 가져가 주길 바라며 어둠 속에서 몰래 나비의 허리를 쓸어 신호를 보냈다.
여자가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린 찰나를 노려 벗어날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비척비척 내 옆을 지나쳤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얘야.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었어.”
숨을 참았다. 온 감각을 곤두세워 여자가 틈을 보이길 기다렸다.
“너도 날 잊지 못한 거야! 그렇지! 그랬구나!”
내 앞을 가로막은 아버지가 여자를 향해 두 팔을 쫙 펼쳤다. 지금이다.
“윽!”
박차고 일어나려던 나는 도리어 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말았다. 느닷없이 내 뒤통수를 눌러 내리는 나비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주위가 조용해진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피 묻은 뒤꿈치가 보였다. 여자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은 아버지의 몸이 무너지듯 앞으로 기울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바닥에 쿵 쓰러진 몸뚱이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나비가 뒷덜미를 놔주지 않아 눈동자만 겨우 치켜들어 앞을 봤다. 뜻밖에도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
쓰러진 몸통과 분리되어 데구루루 내 어깨 옆을 굴러가는 머리통은 죽어서도 감격에 젖은 표정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틀어 나비를 돌아봤다. 하얀 나비의 얼굴을 길게 가로질러 피가 튀어 있었다. 까맣게 물들어 감정을 알 수 없는 시선은 눈 깜짝할 새에 아버지의 머리를 잘라 낸 여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싸늘한 정적이 어떤 의미인지 나로서는 읽어 낼 수 없어 불안해졌다.
“너도 들리지.”
여자의 말에 화답하듯 천둥이 쳤다. 여자는 손에 묻은 피를 건성으로 털어 내고 아버지의 몸뚱이를 발끝으로 찼다. 증오도 혐오도 담겨 있지 않았다. 거슬리는 돌멩이를 걷어찰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성의 없는 발길질이었다.
“네 본능의 소리 말이야. 인간을 다 먹어 치우고 종족을 번식시켜라! 저 빌어먹게 시끄러운 소리.”
여자는 짜증 난단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 한가운데를 두드렸다. 검지에 묻어 있던 아버지의 피가 여자의 이마에 찍혔다.
위험하다. 저 여자는 진짜 위험했다. 죽여 버리고자 했던 내 안일한 생각은 어리석었다. 무조건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고 해 봐도 상체를 짓누르고 있는 나비에게서는 도무지 움직일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어 대면 나비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도리어 더 단단히 나를 억눌렀다.
“나비야. 놔. 좀……! 왜 이러는데!”
버둥거리며 애원했다. 이대로 있다간 저 여자에게 나비를 빼앗기고 말 테니.
“이제 너에게 대용품은 필요 없어. 그건 버리고 나한테 오렴, 나비야.”
“씨발, 입 닥쳐! 그렇게 부르지 마!”
“시끄러워. 너도 네 아빠를 닮아 멍청하구나.”
무릎을 구부린 여자가 내게 손을 뻗었다. 머리가 잘려 나가는 끔찍한 상상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때 나비가 일어섰다. 멈칫한 여자가 도로 무릎을 펴고 내게 보내던 손의 방향을 나비에게로 틀었다.
“안 돼. 절대 가면 안 돼. 저 여자는 널 죽일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나비를 붙잡았다.
“나비야, 나비……!”
나비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고 나는 입을 다물고 왈칵 굳어 버렸다. 뒷덜미를 단단히 누르고 있던 손이 부드럽게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까 내가 보낸 신호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얼떨떨한 상태로 나비가 여자에게 다가가는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어쩌라는 거지?
묻지 못할 물음과 함께 피 맛이 도는 침을 삼켰다.
작게 감탄한 여자가 제 앞에 선 나비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비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온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걱정하던 일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벌어지고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게 자랐어. 내 손에선 완벽히 자라기 전에 벌써 먹혀 버렸겠지. 난 정말 오래 굶주렸거든.”
씨발.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러웠던 적이 있었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볼 바에야 두 눈을 도려내고 싶었다.
“내가 네 알을 낳아 줄게. 그럼 넌 내 허기를 채워 주는 거야.”
여자의 얼굴이 나비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정말 여자와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미동도 없는 나비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나는 바닥을 짚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목이 잘려 죽을지언정 여자를 나비에게서 떼어 놓고 죽어야겠다.
“알은 이제 필요 없어.”
나비가 그렇게 말한 건 내가 일어섬과 거의 동시였다.
“그러니까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하하, 하하하……. 저거랑 지내다 보니 네가 정말 귀여운 나비라도 된 것 같아?”
조소하며 여자가 나비의 뒤에 멍청히 서 있는 내게 고갯짓했다.
“저런 반쪽짜리는 우리의 본능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어. 내가 잘 알아. 넌 결국 저 인간을 네 손으로 죽이게 될 거야. 내가 너를 만나기까지 수없이 그래 왔던 것처럼……. 슬프지만 우린 그렇게 태어났어.”
여자가 나비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가여운 것. 너도 괴로웠지. 내가 널 편하게 해 줄게. 얌전히 본능에 따라.”
“내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나비가 여자를 팔을 쳐 냈다. 어정쩡하게 허공에 팔을 올리고 있던 여자가 웃음을 지우고 텅 빈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저 인간을 죽이고 너와 강제로 교미할 거야. 난 더 기다릴 수 없거든.”
푸욱.
무언가를 꿰뚫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불길한 상상에 발밑이 휘청했으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건 나를 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벌어진 여자의 입에서 불투명한 액체가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여자의 배를 뚫고 등 뒤로 나온 나비의 손도 같은 액체에 젖어 있다.
희멀건 피를 토하면서도 여자는 여유가 넘쳤다.
“수컷들이란 정말 멍청하지.”
그건 곧 배가 뚫린 정도의 부상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를 않아. 내가 너희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난 너한테 죽을 생각이 없을 뿐이야.”
여자의 배를 꿰뚫은 나비의 팔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날로 변했다. 여자는 몸부림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나비의 팔 안에 완전히 갇혀 버린 후였다. 뼈와 근육을 무참히 갈라내며 나비의 손이 여자의 옆구리를 찢고 나왔다.
촤악!
투명한 피와 찢긴 살점이 비에 섞여 흩뿌려졌다. 나비는 곧장 여자에게서 떨어져 내 앞을 막아섰다. 허리를 구부려 복부를 감싼 여자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선우야.”
나는 나를 부르는 나비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은 나비와 함께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나비는 앞만 볼 뿐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이, 젖비린내도 안 가신 애송이가…….”
그사이 거친 숨을 내뱉던 여자의 등이 울컥 꼽추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서서히 우비에 덮인 전신이 터질 듯 팽창했다.
“피해.”
“뭐?”
강한 힘에 가슴팍이 밀쳐졌다. 몸이 붕 떠오르며 나비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등과 엉덩이를 후려치는 둔중한 통증에 정신을 차리자 내 몸은 식탁까지 미끄러져 있었다. 나를 밀쳐 낸 나비의 앞에 풍선처럼 늘어나던 질긴 우비를 갈기갈기 찢으며 거대한 암녹색 곤충의 다리 한 쌍이 튀어나왔다.
“예쁘다고 봐주는 건 끝났어. 우리 제대로 한번 해 볼까? 나비야.”
날카로운 톱니가 돋아난 낫 모양의 앞다리가 높은 천장을 가르며 무자비하게 나비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나비야!”
“오지 마!”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나비의 어깨에서 투명한 피가 솟구쳤다. 그 광경에 정신이 나간 내게 나비의 경고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무작정 몸을 일으켜 나비에게 달려가 손을 뻗었으나 잡힌 건 핏방울인지 빗방울인지가 섞인 축축한 공기뿐이었다.
나비가 내 손에 닿기 직전, 두 팔을 전부 거대하게 변화시킨 여자가 나비를 테라스 밖으로 끌고 갔다. 그리곤 나비를 꿰지 않은 다리를 뻗어 지붕 위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그극, 그극, 그그그극.
무언가가 지붕을 긁어 대며 기어 다녔다. 그게 여자의, 괴물의 다리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펜던트 조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불길하게 흔들렸다. 연달아 일어난 충격적인 장면에 머릿속이 곤죽이었다.
어떡해야 하지? 저런 걸 무슨 수로 없애? 나비는, 나비를 구해야 하는데…….
피로 범벅이 된 바닥에서 아버지가 떨어뜨린 내 핸드폰을 발견한 나는 허겁지겁 주워 들어 통화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 찍힌 112를 누르려다 주저했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경찰이 과연 우리 편이 되어 줄까…?
우리의 적은 저 여자만이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잡혀간 나비가 걱정돼서 제대로 된 판단이 불가능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면서 얼떨결에 통화 버튼이 눌렸다.
―이선우 지금 어디야!
귀에 대기도 전에 고함을 치는 장 형사의 음성이 들렸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생기거든 저를 부르라던 장 형사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핸드폰을 무전기처럼 쥐고 다급히 대답했다. 혀가 마비된 것처럼 엉켰다.
“나 속초…… 속초에 있는 힐비치 펜션이에요. 빨리. 최대한 빨리 와 줘요. 그 여자가…….”
쿵쿵거리며 천장이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핸드폰을 꽉 쥔 채 먼지가 날리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여자? 서 과장 말하는 거야? 지금 당신이랑 있어?
“그래! 씨발, 지금 그 여자가 나비를……!”
끼에에에엑!
기괴한 비명에 이어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났다. 내 시선은 소리를 따라 다급히 테라스 쪽으로 이동했다.
―방금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겠다. 짐승의 비명 같기도 하고 여자의 비명 같기도 했다. 바로 그때, 여자가 기어 올라간 지붕 아래로 무언가가 굴러떨어졌다. 나비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테라스에 나비가 쓰러져 있었다.
―이선우 무슨 소리냐고!
“나비야!”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테라스로 달려 나가자 매서운 빗줄기가 전신을 때렸다. 빗속으로 몸을 내던진 나는 신음을 흘리는 나비의 상체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거야? 어?”
피부에 척 달라붙은 티셔츠가 엉망이었다. 찢긴 틈을 벌려 그 안의 몸을 살핀 내 입에서 끊어질 듯한 숨이 흩어졌다. 나비의 하얀 복부에 좁고 깊게 팬 상처로 시뻘건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희뿌연 점액 같은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곳을 급하게 손바닥으로 막아 지혈했다. 손바닥 아래로 벌어진 살이 오므라드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렇다고 고통까지 피할 수는 없음을 겪어 알고 있었다.
나비가 제 상처를 부여잡고 있는 내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일그러진 두 눈은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차게 식은 눈가에 연달아 입술을 붙였다.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죽으면 안 돼. 나비야. 나 혼자 두고 죽지 마.”
“여기 있으면, 위험해……. 빨리 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나보고 가긴 어딜 가라고! 죽어도 너랑 같이 죽을 거야.”
그극, 그그극.
지척에서 또다시 들려온 그 소리가 내 의식을 긁어 댔다. 나비를 힘껏 끌어안으며 소리가 나는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외벽이 온통 난도질 된 회색 건물의 평평한 지붕 위에, 여자가 아닌 그것이 있었다.
“저게…… 저게 뭐야?”
몸통 길이만 3m는 족히 넘을 듯한 암녹색의 거대한 사마귀가 폭우 속에서 앞다리를 야금야금 핥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더듬이로 기이하게 빗속을 휘젓고 역삼각형의 머리를 조류처럼 까딱까딱 부자연스럽게 움직여 대면서.
“괴물.”
나비의 명확한 대답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것이 그동안 막연히 상상만 해 온 진짜 괴물의 본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비도 저렇게 변하는 걸까?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주먹만 한 괴물의 검은 눈알이 이쪽을 향해 번뜩이는가 싶더니 여러 겹의 얇은 날개를 위협적으로 펼쳤다. 뾰족한 입을 쩍 벌린 괴물이 지붕을 박차고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황급히 몸을 숙여 어떻게든 나비를 감쌌다. 곧 끌어안은 나비의 몸을 타고 쾅, 하는 무지막지한 충격이 전해졌다.
“큭……. 선우야.”
나비의 가슴에 코를 박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다가 흠칫했다. 양옆으로 거대한 사마귀의 두 다리가 데크 바닥에 박혀 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들어.”
목덜미 쪽으로 끈적하고 미지근한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내 어깨 위로 뻗어진 나비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선지 줄기차게 내리꽂히던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 들지 말고 그대로 나한테서 떨어져.”
그제야 내 뒤통수에 드리워진 괴물의 그림자를 알아챘다.
“그리고 여기서 최대한 멀리 도망쳐.”
나비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가려 노력했지만 보이지 않는 긴박한 상황이 떨리는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도망치면…… 너는?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최악을 향해 내달리는 참혹한 미래를 부정하고 싶어 고개를 저으며 나비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제발……. 내가, 한 번이라도 너를 지킬 수 있게 해 줘.”
우적, 우적.
머리 위에서 생살을 뜯어 먹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비의 상체가 크게 들썩였다.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는 나비의 거친 숨소리가 공포에 압도되었던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대로 멍청하게 있어 봤자 저 괴물에게 둘 다 먹혀 버릴 뿐이다. 지금의 내 존재는 나비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비는 결코 내 앞에서 본모습으로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인간의 모습으로 저 괴물과 맞서는 건 자살 행위였다. 목이 아프도록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고 조심히 나비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어어디가니.』
성대가 아닌 기관을 억지로 진동시켜 만들어 낸 괴물의 음성에 또다시 몸이 굳었다.
“뛰어!”
나비의 외침이 전신의 근육을 갈겼다. 나는 전력을 다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테라스는 절벽으로 나 있었다. 내가 도망칠 유일한 탈출구는 차가 주차된 현관밖에 없었다. 컴컴한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뛰던 다리가 어딘가에 걸리며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리없이 바닥에 엎어져 발에 걸린 묵직한 물체를 확인했다.
“씨발. 끝까지……!”
목이 잘린 아버지의 시체였다.
타다다다닷.
기이한 소리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나비를 따돌린 괴물이 여러 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무서운 속도로 나를 향해 기어 오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빠르게 주변을 살피던 내 시야에 무언가 잡힌 순간, 주위가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한 괴물이 천장을 향해 앞다리를 치켜들었다.
콰직!
내 다리에서 뭔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고,
“아악!”
오른쪽 다리로 끓는 물이 쏟아진 것 같은 후끈한 고통이 퍼졌다. 멋대로 경련하는 근육을 쥐어짜 두 팔로 바닥을 밀어내며, 봐 두었던 단단하고 둥근 그것의 터럭을 손가락에 휘감아 쥐었다.
『너만없어어지면 저저건내거야.』
커다란 사마귀의 주둥이가 사방으로 쩍쩍 갈라졌다. 침을 질질 흘리는 역겹기 짝이 없는 이런 더러운 괴물이 나의 예쁜 나비와 같을 리 없다.
“나비가 너 같은 건 싫다잖아. 이거나 처먹고 꺼져.”
손에 움켜쥔 것을 괴물의 주둥이에 힘껏 처넣었다.
우두둑, 우두둑.
아버지의 머리통이 괴물의 주둥이 속에서 삶은 감자처럼 으깨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워 버린 괴물이 내 정강이에 박혀 있던 앞다리를 뽑아냈다.
“크흑!”
격통에 흐려진 시야로 붉게 젖은 괴물의 앞다리가 다가왔다. 낫처럼 휘어진 다리 가장자리를 빼곡히 채운 가시에 내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현실감이 없었으나 죽음을 예감한 심장은 엉망진창으로 뛰어 댔다.
진짜 이렇게 끝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날카로운 괴물의 다리가 툭 내 뺨을 건드렸다. 그뿐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접촉, 그게 다였다. 거대한 사마귀의 무정한 눈깔이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아들아』
“방금 뭐라고…….”
『내아아들』
피를 질질 흘리는 주둥이가 다시 한번 나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아. 괴물의 기이한 행동의 정체는 이미 내가 여러 번 겪어 알고 있는 과정이었다. 식사 후의 나비가 그랬듯, 아버지의 기억이 괴물의 뇌에 흡수되는 중이었다.
사람의 말을 더듬더듬 흉내 내던 괴물이 부지불식간에 아래로 끌려갔다. 버티려는 두 앞다리에 마룻바닥이 길게 긁혔다. 테라스까지 괴물을 낚아채 간 나비가 괴물의 앞다리를 거침없이 잡아 뜯었다.
키이이익.
양쪽 다리를 모두 뜯긴 괴물은 울부짖으며 균형을 잃고 머리부터 고꾸라졌다. 버둥거리는 괴물의 머리가 나비의 발 아래 밟혔다. 그러자 거대한 곤충의 몸뚱이가 부피를 줄이며 점차 인간의 형태로 변모했다. 두 팔이 없는 하얀 여자의 나신으로 완전히 돌아온 괴물은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뺨 위를 느릿하게 흐르는 괴물의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날 죽이려고? 내가 너의 유일한 암컷일지도 모르는데?”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정말 먹잇감을 짝으로 선택하려는 거구나.”
“……선우는 달라.”
“그래. 그럼 너는? 너는 나랑 달라?”
여자의 웃음소리가 깰 수 없는 악몽처럼 늘어졌다. 한참을 웃던 여자가 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나는 이제 지쳤어. 그냥 빨리 다 끝내고 싶어.”
“나와 선우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도 네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관여하지 않을 거야.”
여자는 아주 웃긴다는 듯 코웃음 쳤다.
뿌드득.
처참하게 뜯긴 어깨 아래로 뱀처럼 새로운 팔이 기어 나왔다.
“건방지긴. 너한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는 건 나야. 나와 정해진 끝을 맞이하면 저 실패작은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지. 싫다면 지금 날 죽여야만 너희 둘 다 살 수 있어. 자, 모처럼 즐거웠으니 선택은 네 몫으로 해 줄게.”
나는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초조하게 나비의 선택을 지켜봐야만 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기다림 끝에 나비가 발에 힘을 실었다.
두둑.
여자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소리가 빗속을 갈랐다.
“멍청하고 불쌍한 나비…….”
여자의 키득거림은 머리가 완전히 으깨지며 허무하게 그쳤다. 여자의 몸이 누런 액체만 남기고 눈처럼 녹아내린다. 빗속에 우두커니 서서 나비는 괴물이, 자신의 동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서 뒷골이 선뜩해졌다. 급한 마음에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가다가 테라스 근처에서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나비가 도망친다면 절대 따라갈 수 없을 상태였다.
“나비야.”
나비를 부르는 목소리에 참아 보려 해도 울음이 섞여 나왔다. 나비가 젖은 얼굴을 들었다.
“다…… 끝난 거지? 이제 이리 와.”
엄습하는 두려움을 숨기고 애써 웃었다. 멍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던 나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벽에 부딪친 양 우뚝 멈춰 섰다. 죄책감에 일그러진 시선이 너덜거리는 내 오른쪽 다리에 꽂혔다. 나는 얼른 피가 솟는 상처를 꾹 움켜쥐고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괜찮아. 네 탓 아니야. 다, 다 내 탓이야. 내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나비는 더 다가오지 못했다. 발이 묶인 듯, 그곳에 갇혀 버린 듯 무력하게 서 있기만 했다.
“내가 나빴어. 널 못 믿었어. 내 멋대로 널 오해했어. 근데 이젠 다 알아. 네가 왜 그랬는지. 날 지켜 주려고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거지? 난……. 근데 난 이제 정말 너밖에 없어. 네가 필요해.”
빗속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힘껏 내민 손이 차디찬 빗방울에 젖자 뼛속에 바람이 든 듯 오한이 들었다.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고작 다섯 걸음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춥다. 나 좀 그냥, 잠깐만 안아 주면 안 될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안아 주기만 하면…….
두께를 알 수 없던 망설임을 단숨에 걱정 어린 절박함으로 부순 나비가 막 한 발을 뗐을 때였다.
“이선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외쳤다. 다시 멈춰 선 나비의 시선이 내 뒤를 향했고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느닷없는 방문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는 낭패감에 휩싸였다. 장 형사였다. 이미 현관에 들어선 장 형사가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하고 거침없이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선우.”
형형한 시선이 어두운 거실을 차례차례 탐색한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엄마를, 목이 잘린 아버지의 시체를, 피에 젖은 내 다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라스에 서 있는 나비를, 장 형사는 낱낱이 목격했다. 거실 한가운데에 선 장 형사가 허리춤으로 천천히 손을 보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위협적인 경고가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불분명했으나 장 형사의 총구는 정확히 나비를 노리며 검게 빛났다.
“쏘지 마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장 형사를 위한 경고였다. 장 형사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뜻을 알 리 없는 장 형사는 적의를 불태우며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노려보았다.
“곧 경찰들이 올 거야.”
두 손으로 총신을 단단히 감싸 쥔 장 형사가 고개를 까닥였다.
“이쪽으로 와. 당신은 이제 안전해.”
이를 물고 신음했다.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촉즉발의 상황에 무엇을 자극할지 몰랐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장 형사의 쓸데없는 말이 나비의 귀에 들리지 않았길 바랐다.
“천천히 이쪽으로 와. 어서.”
한 걸음 내게 다가오는 장 형사를 보고 다급히 테라스로 고개를 돌렸다. 나비는 마치 장 형사에게 밀려나기라도 하듯이 한 발, 빗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이 단단히 꼬였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나비를 빽빽한 빗줄기가 삼켜 갔다. 나비가 향하는 방향으로는 낭떠러지와 검은 바다가 전부였다. 나비를 제외한 내 모든 것을 묻어 버리려고 한 곳으로 나비가 도망치려 했다.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다.
움푹 파인 오른쪽 정강이에서 손을 적시며 피가 계속 새어 나왔다. 무릎 아래로는 완전히 감각이 사라진 다리를 움직여 보려 했지만, 발가락만 겨우 꿈지럭대는 것이 한계였다. 그마저도 신음이 절로 터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이대로는 나비에게 닿기도 전에 장 형사에게 먼저 붙잡힐 게 불 보듯 뻔했다.
지금은 충분히 설득할 만한 시간도, 말을 번복할 기회도 부족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거센 빗소리가 어느새 또 한 걸음 멀어진 나비의 숨소리를 앗아 갔다. 생각할 시간조차 이젠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무거운 입술을 움직여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쪽으로 가고 싶은데. 사실, 나 지금 움직이질 못하겠어.”
“기다려. 내가…….”
즉각 대답한 장 형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당연했다. 내가 말을 건네는 이는 나비였으니까.
나를 버리려고 하는 쪽은 매번 자기면서, 그때마다 버려진 개 같은 표정으로 날 보는 저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내 연인.
“나 데려가 줄 거지?”
퍼붓는 빗줄기 속에 꼿꼿이 선 나비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언제고 매달리는 방법밖에 모르는 멍청한 나는 필사적으로 애원해야 했다.
“또 나만 혼자 두고 가지 않을 거지?”
서러워서 기어코 뜨거운 눈물이 북받쳤다. 처음부터 내가 너에게 바란 건 그저 내 곁에 있는 거, 그거 하나였는데.
“나비야. 너도 나랑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잖아……!”
장 형사가 소리쳤다.
“이선우! 너 미쳤어?! 저 새낀…… 큭.”
탕!
벼락같은 총성이 고막을 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발포된 총알이 귀에 박힌 것처럼 머리를 찡 울렸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건가. 참담함을 애써 떨치고 감았던 눈을 뜨자 검은 권총이 핑그르르 돌며 유리 파편이 깔린 바닥으로 미끄러져 왔다.
“지, 지금…… 어떻게…….”
장 형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를 겨누던 총만 날려 버린 나비의 팔이 서서히 인간의 형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총성을 들었는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겹의 사이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무엇의 제재도 받지 않고 내게 걸어오는 나비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문득 겁이 났다.
왜 장 형사를 살려 두는 거지?
나비가 내게 또 작별 인사를 할지도 모른단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빗물을 뚝뚝 흘리며 내 앞에 선 나비가 무릎을 굽히고 날 떠나던 그때처럼 다정하게 눈을 맞춰 주었다.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절박했다. 추웠다. 또다시 혼자 남겨진다면 이번에야말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나비가 손을 들어 굳어 있는 내 뺨을 감쌌다.
“가자. ……같이.”
하얀 입김과 함께 흩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울면서 웃었다. 벅차오르는 울음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손 쓸 도리 없이 눈물이 흘러넘쳤다. 내 눈물을 혹여 나비가 오해할까 싶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자는 그 말이 어떤 고백보다 고맙고 기뻤다.
차갑고 단단한 품이 나를 안아 올렸다. 비에 젖은 목덜미를 끌어안자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이 아파질 만큼 뻐근하게 차올랐다.
“거기 서.”
장 형사의 목소리에 빗속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비가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너 정체가 뭐야. 이선우를…… 어떻게 하려는 거지?”
활짝 열려 있는 현관 밖에서 경찰차의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어둠을 밝히며 침범했다. 여러 명의 다급한 외침과 소란스러운 기척들이 금방이라도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가야 돼.”
우두커니 장 형사를 보고 있는 나비를 재촉했다.
“이미 늦었어.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포기해.”
장 형사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포기하라고. 그런데 우습게도 날 보는 장 형사의 얼굴이야말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장 형사에게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았다. 장 형사가 나에게 바란 것이 무엇이었든 처음부터 나에게는 거짓된 결백 외에 그에게 내줄 것이 없었다. 내 시선을 읽은 장 형사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형사님.”
우드득.
나비가 다시 몸을 변화시켰다.
“제가 당신을 봐주는 건 여기까지예요.”
동생의 얼굴, 동생의 목소리로 나비가 말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에 질린 장 형사의 뒤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처참한 집 안을 보고 기겁을 했다.
“꼬, 꼼짝 마!”
허둥지둥 꺼낸 총구는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장 형사가 쏘지 말라고 소리쳤다. 다른 경찰에 의해 깨어난 엄마가 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쪽을 쳐다봤다.
나비는 잠시 집 안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바다를 향해 뛰쳐나갔다. 한쪽 무릎을 굽혀 서슴없이 난간 위에 다리 하나를 올린 나비가 내 허리를 단단히 고쳐 안았다.
날 기다리고 있던 파도가 때를 알고 철썩, 아우성을 쳤다. 나비가 차가운 입술을 내 눈썹 위에 대고 물었다.
“추울 거야. 버틸 수 있겠어?”
고작 추위 따윈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지옥이라도 나는 버틸 수 있었다. 너만 있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다 알면서.”
나비가 낮은 숨을 뱉었다. 여운을 남기고 흩어지는 그것이 웃음소리란 걸 깨닫자 모르는 사이 맺혔던 긴장이 사라졌다.
“숨, 참아.”
시키는 대로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나비의 목덜미를 꽉 부둥켜안았다.
제 아들을 찾아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엄마를 경찰들이 붙잡는다. 내 이름을 외치며 뒤따라오는 장 형사의 모습이 훅 위로 사라지고, 내 몸은 중력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에 별처럼 수놓인 빗방울들이 우리를 따라 바다로 추락했다.
와르르 부서지는 물거품은 찰나였다. 피부를 짓누르는 묵직한 고요와 살을 에는 추위에 곧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보글보글 공기 방울을 만들며 내 입에 불어 넣어지던 따스한 숨 외에는.
∞ ∞ ∞
바다는 조용하고 추웠다. 열아홉 살의 나처럼.
‘눈 온다.’
신호탄처럼 쏘아진 누군가의 작은 외침에 자습 중이던 교실은 단숨에 소란스러워졌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내가 고개를 들자 교실 바닥이 창가로 기울기라도 한 듯 반 애들이 우르르 한쪽으로 쏠렸다.
창밖이 온통 하얬다. 눈을 처음 본 개처럼 왁왁대며 창문까지 활짝 열고, 그 앞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검은 머리통들 위로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함박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겉옷을 집어 들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몇몇 애들을 보며 어젯밤부터 기침이 심했던 동생이 오늘 등교하지 못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이 눈발을 헤치고 하교한 동생이 다시 열이라도 올랐다간 ‘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내 하루가, 혹은 며칠이, 혹은 남은 평생이 몇 배는 더 피곤해질 테니.
유전적 천식. 동생이 아프지 않으면 내 사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해서 그 병의 치료법을 밤새워 가며 찾아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열아홉 살이 되고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아픈 동생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뭘 하려고 할수록 나는 그리도 되고 싶었던 좋은 형, 좋은 아들에서 멀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자 최선의 방법은 그저 지금보다 더 밀려나지 않으려 그들의 눈치를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앞으론 그럴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수능을 마치고 가게 될 대학이 정해지자 엄마는 후련한 얼굴로 내게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독립 자금, 19년간의 내 구걸에 대한 엄마의 마지막 적선인 셈이었다.
나는 망연히 통장에 찍힌 금액을 헤아렸다. 적지 않은 액수라는 건 알았지만 스무 살짜리가 혼자 사회에 나가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마침내 암 덩어리 같았을 나를 떼어 낸 엄마에게 물어볼 일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동생이 자주 아픈 겨울이 싫었는데, 올겨울은 추워도 좋으니 천천히 가기를 바랐다.
‘쟤 좀 봐. 아주 자기 집 안방이네.’
아까 밖으로 나간 무리 중 한 명이 하얀 운동장 정중앙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광경이 애들 틈으로 얼핏 보였다.
‘어, 걸렸다. 걸렸다. 야! 튀어!’
누군가 운동장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엉성한 천사 자국을 새기던 애가 밖으로 나온 선생님을 피해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쫓기는 애도 구경하는 애들도 즐거워 보였다.
밖에서 들어온 커다란 눈송이가 샤프를 쥔 오른손에 내려앉았다. 많은 빈자리 중 하필이면. 길을 잘못 든 눈송이는 억울한지 한 방울만큼의 내 체온을 빼앗으며 녹았고, 창문에 달라붙은 애들의 웃음소리는 나와 성큼 거리를 벌리며 커졌다. 나는 자습이라고 적힌 칠판과 빈자리들을 보며 물기가 남은 손등을 교복에 문질러 닦았다.
찬 공기가 바람 없이도 교실 안으로 퍼졌다. 이제 막 시작된 추위는 물웅덩이를 얼리지는 못했지만, 내 교복 재킷 안을 파고들기는 충분할 만큼 날카로웠다.
춥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이었다.
곧 등장한 담임에 의해 잠깐의 소란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애들 사이에서 옆자리에 앉은 건 내 짝이 아닌 다른 애였다. 차갑고 건조한 겨울 냄새를 잔뜩 묻히고도 더운지 교복 재킷을 벗으며 그 애는 앞문으로 나가는 담임을 힐끔거렸다.
빨개진 귓바퀴, 뒷머리에 묻은 하얀 눈, 약간 거친 숨. 조금 전까지 스스럼없이 차가운 눈 속을 뒹굴던 애였다. 제대로 말 한번 섞어 본 기억은 없었지만, 이 애의 자리가 여기서 멀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너 내일 생일이지?’
담임이 나가자 기다린 듯 불쑥 말을 걸어 왔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무언가를 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책상 모서리에 삐딱하게 선 두 개의 작은 눈 뭉치. 눈구멍도 없는 그것과 시선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착각한 이유는 단순했다. 얇게 쌓인 눈을 뭉치느라 흙으로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했지만, 그건 분명 희고 둥글고 눈코입이 달린 것과 같이 온기에 닿으면 녹아 버리는 눈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애의 말과 조악한 눈사람에 대해 한참 고민한 끝에 그것이 생일 선물이라는 걸 알았다. 얘는 나조차도 잊고 있던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왜 나한테 선물을 주는 걸까. 이걸 녹지 않게 가져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응 뭐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핸드메이드인데, 싫음 말고.’
툴툴거리며 다시 가져가려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덜 생긴 눈사람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 애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귀엽지.’
‘아니.’
‘왜, 못생긴 게 귀엽잖아. 내가 만들어서 그런가?’
그 애가 지저분하고 못난 눈덩이의 머리를 부서지지 않게 살살 쓰다듬었다. 잠깐이지만 그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혼자 눈밭에 서 있어도 춥지 않을 테고, 미완성이라도 괜찮을 텐데.
‘야. 너 대학 가면 나랑 같이 살래?’
‘……같이?’
너무도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어. 아니, 그…… 어, 엄마가 나 혼자 나와 산다고 하면 절대 허락 안 할 텐데 S대생이랑 산다고 하면 허락해 줄 거 같거든.’
그런 이유라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후보는 많았다. 그런데도 나한테 묻는다는 건…….
‘……너 나랑 살고 싶어?’
그렇게 묻자 시선을 피한 그 애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응……. 잘 맞을 것 같은데. 이선우, 너랑.’
그 애가 내 겨울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야아…… 왜 울어. 그렇게 싫냐?’
그 애가 당황한 목소리로 허둥댔다. 그런 게 아닌데.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새, 생각해 보고 알려 줘. 큼. 그리고 사실, 진짜 선물 따로 준비했는데. 이따가 끝나고 줄게.’
이걸로도 괜찮은데. 이것만으로 충분한데. 진짜를 받는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줄게, 받아.’
손목이 붙잡혔다. 아프도록 세게. 돌아본 그 애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풍덩.
몸이 밑으로 쑥 꺼지며 물보라가 일었다. 바닥은 아래로 천장은 위로 멀어지고 교실은 단숨에 깊고 검푸른 바닷속에 잠겼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앉아 있던 의자와 책상만 끝없이 검은 심해로 가라앉았다. 멀쩡히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애들은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목구멍을 메운 바다는 살려 달란 외침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태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 애가 나를 끌어 올려 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 애는 구해 달라 애원하는 날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른 쪽 손을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저기서 나올 ‘진짜’가 내 예상과 전혀 다를 거란 불길한 예감에 그 애한테서 멀어지려고 미친 듯이 팔다리를 휘저었다. 벌어진 입에서 꼬르륵 피어오른 물거품이 하찮은 비명을 울컥울컥 삼켰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시야를 방해하는 공기 방울 너머로 그 애가 책상 서랍에서 손을 빼냈다.
‘자, 내 진짜 선물이야.’
아까와 다르게 일말의 조심성도 없는 손짓으로 그 애가 내 가슴 중앙에 시퍼런 식칼을 꽂았다. 어느 순간, 그 칼도 그 애의 얼굴도 미치도록 낯익었다. 죽은 애인은 칼을 뽑아내 다시 한번 내리찍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조악한 나는 봄이 오기 전에 부서져 버렸다.
∞ ∞ ∞
가슴뼈 중앙을 쪼개는 압박감에 코와 입으로 짠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나를 도우려는 듯 누군가 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바닷물을 토하는 와중에도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나야, 선우야.”
다정한 목소리에 일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곁에 있는 존재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비였다. 무사히 빠져나왔음을 깨달은 나는 나비를 끌어안았다.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던 몸이 드디어 땅 위에 붙어 있었다.
살아 있다. 나비와 함께 살아남았다.
“어디, 너 어디 다친 데 없어?”
녹고 있는 얼음처럼 차고 축축한 몸을 더듬었다.
“난 괜찮아. 움직이지 마. 상처가 깊어.”
오른쪽 정강이에서 찌릿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기어올랐다. 무릎 아래가 케이크 한 조각을 썰어 낸 모양으로 움푹 팼으나 다행히 발가락에 감각은 있었다. 아주 못쓰게 된 건 아닌 모양이다.
“경찰은?”
제대로 따돌린 건가?
급하게 두리번거리며 막연한 정보를 주워 담았다. 해가 뜨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야산이 짙은 안개에 잠겨 있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많이 멀어지진 못했어.”
물기가 줄줄 흐르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비가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시린 새벽빛이 바닷물에 쫄딱 젖은 나비를 창백하게 비췄다. 드디어 마음 편히 볼 수 있게 된 나비의 모습이 꼭 날 바다에서 구해 준 인어 같았다.
“춥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비가 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를 닥닥 부딪치고 있었다.
“응. 추워.”
춥고 어지러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머리 위에서 나뭇잎에 고여 있던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어 대는 내 어깨를 나비가 끌어안아 줄 것처럼 다가오다가 자신의 낮은 체온을 의식했는지 도로 몸을 떨어뜨렸다.
“힘들겠지만 당장 움직여야 돼. 여기 있으면 금방 따라잡힐 거야.”
하지만 말과 다르게 나비는 나를 근처 나무에 기대 앉히고는 저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추위에 굳은 입술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급한 대로 나비의 팔을 붙잡았다.
“어, 어디 가는데…….”
“금방 올게. 잠깐만 기다려 줘.”
“싫어. 나도 같이…… 윽!”
아무리 잠깐이라 해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무릎을 굽혀 일어나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나비가 재빨리 내 다리를 잡아 내리긴 했지만, 그땐 이미 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격통이 치밀어 전신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선우야.”
나비가 초조해하는 날 진정시키려는 듯이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나비를 노려보았다.
“알아. 나도 알고 있어……!”
나도 안다. 내가 지금 걸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나비가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내 집착이 또 일을 망치리란 것도 분명 아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못 하면서 나비를 믿어 주지도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뜨거워진 눈시울로 분한 숨을 내쉬며 나비를 노려봤다.
나비는 못난 내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운을 뗐다.
“네가 왜 그랬는지 나도 알 것 같아.”
씁쓸하고도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나 선우 네가 없는 동안 너무 외로웠어.”
“나비야…….”
“너를 놔주려고 했는데 너한테서 그놈 냄새가 날 때마다…… 여기가 아팠어.”
눈가를 찌푸린 나비가 내 손목을 감아쥐고 심장이 뛰고 있는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그런 건 처음이라 무서웠어. 너도 그랬어? 내가 없는 동안.”
“나는 죽을 것 같았어…… 멍청아.”
눈가에 맺히는 물기를 모른 척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으로 나비의 가슴을 쳤다. 나비가 나를 끌어당겨 차가운 품에 안았다.
“미안해, 선우야. 이젠 네가 싫다고 해도 절대로 놔주지 않을게. 계속 네 옆에 있을게.”
고집스럽게 나비를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빨리 와야 돼. 늦으면 혼날 줄 알아.”
“응, 고마워.”
나비는 살짝 웃고는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등 뒤로 풀숲을 헤치고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마저도 들리지 않게 되자 주위엔 스산한 고요함만이 남았다.
혼자가 되면 집요하게 나를 노리곤 하는 감각이 찾아오기 전에 나비의 입술이 닿았던 손바닥을 꽉 그러쥐었다.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건 더 이상 나비를 쥐고 휘두를 목줄 같은 게 아니라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나비의 진심이다.
나비가 준 고백이 내가 부서지지 않도록 단단한 껍질을 둘러 준다. 추위와 불안이 가시고 생생한 의지가 솟았다. 뭐라도 해 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무성한 잡풀과 자욱한 안개 때문에 가시거리가 짧았다. 바깥쪽에서도 보이지 않긴 마찬가지일 듯해 적어도 누군가에게 들킬 걱정은 없어 보였다.
“날 여기 숨겨 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활동을 시작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잔잔한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인 산 중턱은 인적이 드문 곳인 듯했다. 이런 곳에서 나비가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하고 걱정도 됐지만 짐만 될 뿐인 지금으로선 그저 나비를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또다시 시큰거리는 다리의 통증에 나무둥치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경찰은 지금쯤 바다를 수색하고 있을까?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해 사건을 종결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마냥 그렇게 마음을 놓기에는 나비가 동생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장 형사가 걸렸다. 서 과장으로 위장해 뒤를 봐주던 그 괴물마저 죽어 버렸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드디어 나비를 되찾았건만 상황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하다.
그때 문득 오른쪽 귓등에서부터 고요를 직선으로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나비가 향한 방향은 제법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두텁게 낀 안개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산비탈 아래에 도로가 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안개를 노랗게 물들이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안개 속에서도 꽤 속도를 내며 달려오던 차가 내가 있는 지점에 다다라서 돌연 급정거했다.
끼이이익!
찢어지는 소음과 고무 타이어 타는 냄새가 일렁이는 안개 사이로 스며든다. 나는 별안간 차가 선 이유를 곧바로 알아챘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으며 누군가의 실루엣이 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걸걸한 호통에 이어 차 문이 벌컥 열리고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울림이 새벽녘에 고인 대기를 연달아 뒤흔들었다. 어디선가 소란을 듣고 잠에서 깬 개가 컹컹 짖어 댔다.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이지?
눈매를 좁혀 가며 안개 속을 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얀 장막은 속을 내보이지 않았다. 마주 보는 두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헤드라이트 불빛이 이리저리 갈라지기만 했다.
“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어? 왜 길을 처막고 지랄이야! 뭐, 뭐야.”
그리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으악! 으아아……!”
폭발하듯 거대해진 그림자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다른 그림자를 낚아채 풀숲으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눈을 감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축축한 흙을 움켰다.
“방금, 뭐지? 뭐가 어떻게…….”
단말마의 메아리가 사라진 공허한 고요가 답을 대신 했다. 얼마 안 있어서 바스락, 젖은 낙엽을 밟으며 누군가 비탈을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안개를 걷으며 나비가 나타났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분명 식사 뒤일 텐데 바닷물에 축축하게 젖은 몸은 아까 모습 그대로였다.
“가자.”
나비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멀끔한 모습으로 상황 파악을 끝내지 못한 나를 들어 올렸다.
비탈을 내려가 보니 텅 빈 아스팔트 도로에 주인을 잃은 흰색 봉고가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엔 식사의 흔적 같은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본 적 없는 깔끔하고 완벽한 식사였다.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 외롭고 무서웠다던 나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태연하기만 한 말간 얼굴을 넋 놓고 쳐다봤다.
나비는 자연스럽게 봉고의 조수석에 나를 앉히고 딱딱한 시트를 뒤로 눕혔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나긋하게 말하는 입에서 피 냄새가 났다.
“잠깐만.”
운전석으로 가려는 나비를 불러 세웠다.
“왜?”
가까이 붙어 선 나비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엄지로 눌렀다. 스르르 벌어진 입술 안쪽이 붉게 젖어 반짝였다. 그 안에 고인 피를, 유일한 식사의 흔적을 유심히 확인하는데 입술이 앙다물렸다.
“선우야. 난 널 절대 먹지 않을 거야.”
“뭐……?”
결연한 표정으로 한다는 말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 괴물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의식하는 거라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내가 지금 널 겁내는 것 같아?”
어이없이 웃으며 뒷덜미를 끌어당기자 가만히 딸려 오던 나비가 문득 내가 하려는 걸 눈치채고 좌석 등받이를 붙잡아 버텼다. 코앞에서 애를 태우는 입술을 노려봤다.
“이럴래? 날 일주일이 넘게 버려두고?”
“안 돼……. 지금은.”
“숨기지 마. 칭찬해 주려는 거니까.”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던 나비가 이내 포기한 듯 눈을 감으며 팔에서 힘을 뺐다. 차갑고 부드러운 입술 표면을 약하게 빨아들였다. 그리웠던 감촉을 입술로 맘껏 느끼고 저항 없이 벌어지는 입안으로 혀를 넣어 촉촉한 점막을 핥았다. 실로 오랜만의 입맞춤이건만 그 사이에 끼어든 다른 사람의 피는 비리고 맛이 없었다. 내가 떫은 기색을 영 감추지 못하자 나비가 먼저 입술을 뗐다.
“거봐.”
엄지로 내 입술을 훔친 나비는 내게 안전벨트를 채우고 조수석 문을 닫은 뒤, 운전석에 올랐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뒷좌석을 뒤지더니 어디서 얇은 담요 하나를 찾아내 내 몸 위에 덮는다.
그새 수평선 위쪽으로 해가 떠올라 어느덧 사위가 환했다. 지저분한 차창 너머로 안개가 걷히고, 모래사장과 바다를 낀 해안 도로가 시원하게 뻗었다. 하지만 차는 여전히 도로 한복판에 멈춰 있다. 길은 있는데 목적지가 없었다.
“……이제 우리 어디로 가지?”
사선으로 비쳐 드는 아침 해에 시야가 자꾸만 가물거리고 몸이 늘어져 나도 모르게 무책임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속으로 자책하며 운전석을 보았다. 거기엔 막 떠오르는 햇살을 듬뿍 받으며 나비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비가 옅게 웃었다.
“어디로 가든 옆에 있을 테니까 안심하고 눈 감아.”
잊고 있었다. 나는 이미 목적지에 와 있다는 걸.
어깨까지 덮인 담요 밑에서 몸을 웅크리며 미지근한 안도감에 휩싸였다.
낡은 봉고는 시동이 걸리자 털털거리는 엔진의 떨림을 차체에 그대로 전달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달리던 차가 점차 속도를 줄이더니 이윽고 멈춰 섰다. 시동까지 끈 나비가 말없이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나는 돌을 매단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평범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일상의 한복판, 모르는 동네의 도로변에 차를 세운 나비가 상가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이 어른어른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오로지 나비의 모습만이 살아 숨 쉬는 현실로 느껴졌다.
나는 까슬까슬한 담요 속으로 몸을 더 옹송그리며 나비를 기다렸다. 비가 그친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했고, 선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볕은 따가울 지경이었는데 내 몸은 언제부턴가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말라 침을 삼키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한 손에 하얀 비닐봉지를 든 나비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나는 담요에서 손을 빼내 검지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나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 내 이마로 손을 뻗었다.
“뜨거워.”
상처 때문일 거야. 그러나 대답할 여력이 없어 차가운 손바닥에 가만히 이마를 비볐다. 나비는 비닐봉지에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마셔.”
물을 삼키려고 하자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한 방울도 넘기지 못하고 뱉어 내야 했다. 날카로운 잔기침을 삼키는 동안, 비닐봉지를 뒤지던 나비가 돌연 물과 함께 손톱만 한 무언가를 삼켰다.
“뭘…, 먹은 거야?”
나비는 놀란 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 지그시 당겼다. 몸이 앞으로 끌려가며 턱이 들리고 물에 젖은 입술이 맞물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비는 물과 씁쓸하게 녹은 알약을 능숙하게 내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으응…….”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무르는 힘에 꿀꺽, 가까스로 약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아쉬운 건 나뿐인지 목적을 이룬 입술은 곧바로 떨어져 나갔다. 도무지 말할 힘도 붙잡을 힘도 없어 열띤 눈으로 바라만 보자 나비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일단…… 네 상처부터 보자. 계속 피 냄새가 나.”
외진 공터로 차를 이동시킨 나비는 나를 봉고 뒷좌석으로 옮겨 태웠다. 맨 뒷줄 좌석이 제거된 자리에 본래 차주의 물건으로 보이는 쓰고 남은 건설용 자재들과 각종 공구가 마구 뒤엉켜 있었다. 그것들을 한편으로 밀어 두고 나를 길게 가로로 눕힌 나비가 무작정 내 바지 버클을 풀었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얕게 튀었다. 이러다 서 버리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아무리 나비라도 이런 상황에 발정하는 나한테 질릴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아랫배에 닿는 차가운 손을 잡았다. 나비가 의문스러운 시선을 내게 보냈다.
“왜?”
“내가, 내가 할게.”
손을 뗀 나비는 바닥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렸다. 나는 꾸물거리며 혼자 바지를 벗으려고 해 봤으나 실패했다. 얇은 면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들러붙어 조금만 당겨도 상처 부위가 통째로 뜯겨 나갈 것 같은 고통이 들이닥쳤다.
“잘라야겠어.”
내가 고통스러운 숨을 고르자 나비가 치워 둔 공구 무더기를 뒤적거렸다. 대형 망치, 톱, 전동 드릴 따위의 험한 물건들 사이에서 나비는 큼직한 가위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히 다친 다리를 들어 제 허벅지에 올리고 가위 날이 상처에 닿지 않게 바깥쪽 복사뼈 방향에서 날을 집어넣었다.
“자를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걱서걱 옷감을 자르며 날이 허벅지까지 올라와 멈췄다. 조심히 잘린 쪽을 벌려 다리를 빼내고 왼쪽 다리에서도 바지를 빼낸 나비가 문제의 상처를 살폈다. 나는 차마 공기에 노출돼 시큰거리는 상처를 볼 용기가 없었다.
“왜지. 전혀 낫지 않았어.”
살짝 내려 본 눈으로도 상처는 끔찍했다. 죽어서 쩍 벌어진 개구리의 입 같았다. 푹 패인 안쪽에는 응고된 피가 젤리처럼 굳어 엉겨 있었고 하얗게 뼈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처참한 모습에 잊고 있던 고통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 고개를 들다가 가라앉은 표정의 나비가 눈에 걸렸다. 무언가 안 좋은 생각에 잠긴 눈, 상심으로 축 처진 입가.
손을 뻗어 나비의 손목을 잡았다. 나는 애써 웃었다.
“상처가 깊어서 오래 걸리는 거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긴 했지만, 나비조차 원인을 모른다면 나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그러길 바랄 수밖에…….
나비가 비닐봉지를 탈탈 털자 약상자 외에도 소독약과 붕대가 쏟아졌다.
“무슨 돈으로 샀어?”
통장 잔액을 몽땅 털어 넣은 캐리어를 두고 와 버렸으니 나비와 나는 완전한 무일푼 신세였다. 내 물음에 나비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반지갑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지갑을 펼치자 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신분증이 꽂혀 있었다. 아마도 아까 나비가 먹은 이 봉고차의 주인이리라. 지갑에는 쓸모없는 카드 몇 개와 남은 현금 이천 원이 전부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왔어.”
소독약의 포장 상자를 까던 나비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약사한테 물어봤어?”
나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씹어 먹는 대신,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약사의 설명을 유심히 듣고 있었을 나비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다 컸네.”
기운 없는 손을 뻗어 하얀 뺨을 건드렸다. 소독약을 손에 든 나비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플 거래. 많이.”
나비의 경고에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여 준비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어 소독액이 벌어진 속살을 헤집었다.
“흐윽.”
이가 악물리고 전신이 덜덜 떨렸다. 차라리 다리를 잘라 내고 싶은 고통이 들이닥칠 때쯤, 나비가 자신의 냄새를 풀었다. 부드러운 체취가 파도처럼 통증을 덮어 버리며 감각을 둔하게 만들었다. 얼얼함만 남은 상처 위에 붕대가 두껍게 감겼다.
“고생했어, 선우야. 조금 더 쉬어.”
나비가 나를 안았다. 이마에 닿은 입술에서 조곤조곤한 울림이 전해졌다.
“이제 나한테 맡겨. 내가 지켜 줄게.”
마음이 놓였다.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 ∞ ∞
눈을 뜨자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침대 위였다. 낯선 방의 풍경에 어리둥절하던 중 소금기 하나 없도록 씻겨진 몸에 못 보던 옷이 입혀져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면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오른쪽 정강이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구급상자가 뚜껑이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나비야.”
아무도 없는지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의탁할 만한 인맥도 없는 처지였기에 도피 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 예상했었다. 얼마 동안이 되든 기꺼이 감수할 각오도 하고 있는데 번듯한 집 안이라니.
상황을 파악해 보려던 나는 포기하고 일단 어질러진 구급상자의 내용물을 대충 갈무리해서 뚜껑을 닫았다. 하얀 플라스틱 상자 중앙에 <행복 교회>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교회?”
교회처럼 보이진 않는데.
문득 공기에 섞인 어렴풋한 나비의 냄새를 맡았다. 무심코 냄새를 따라 콧숨을 들이켰다가 실내를 밀도 높게 채운 먼지 탓에 목구멍이 칼칼해져 기침이 터졌다. 환기가 불가능할 만큼 꽉 닫힌 창문은 두꺼운 커튼이 가리고 있어 간신히 밤이 아니란 정도만 식별할 수 있었다.
“빈집인가.”
자세히 보니 곳곳에서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티가 났다. 구색만 갖췄을 뿐 생활감이 없어 어딘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불안해져서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나비를 불렀다.
“나비야.”
끼익.
나긋한 대답 대신 활짝 열린 방문 밖에서 아주 작은 소음이 기척을 냈다.
“나비야? 윽.”
성급히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린 나는 찌르는 듯한 통증에 무릎을 쥐었다. 최소 반나절은 지났을 텐데 통증이 여전히 거셌다. 심지어 붕대 아래로 피가 비쳤다.
“하아…… 왜 이러지?”
해결 안 될 의문은 제쳐 두고 절뚝거리며 겨우 문틀을 잡고 섰다. 거실도 방과 마찬가지로 잘 꾸며져 있을 뿐 생활감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비는 집 안에 없는 듯 보였다.
“어디 간 거야. 또 말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강제로 문이나 창문을 부순 흔적이 없는 걸 보면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는 건데…….
그렇다면 나비가 아는 집이라는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나비가 먹은 누군가의 집이겠지만. 필요한 옷이나 구급상자만 깔끔하게 찾아 놓은 상황도 그렇고.
나는 가장 큰 창으로 가서 블라인드 틈을 벌려 밖을 확인했다. 강렬한 주홍빛 노을에 눈이 찌푸려졌다. 가느스름하게 좁힌 시야로 키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작은 마당이 보였다. 아치형의 검은 철제 대문 너머로는 해가 져 가는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것처럼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좁은 마당을 이리저리 살피던 시선이 한구석에 주차된 흰색 봉고를 찾아냈다. 나비와 함께 타고 온 차였다. 여기가 어디든 나비와 함께 온 것임은 분명했다.
일단은 침착하자. 뭔가 쓸 만한 정보를 찾아보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탁한 주황색으로 물든 집 안을 돌아보았다. 아픈 다리 때문에 서른 평쯤 돼 보이는 실내가 까마득히 넓게 느껴졌다.
“후…….”
오른쪽 다리를 끌며 주방으로 갔다. 먼지 쌓인 찬장에 그래도 그릇이나 식기 따위의 살림살이가 제법 구비되어 있었다. 싱크대에선 물도 나왔다. 살던 사람들만 증발하고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집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불이 켜지며 냉기가 흘러나왔다. 적어도 수도세와 전기세를 내는 주인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냉장고의 내용물은 2리터짜리 생수 몇 병이 다였다.
“설마 먹을 걸 사러 갔나? 돈이 없을 텐데.”
사람을 단 몇 초 만에 흔적도 없이 잡아먹을 수 있게 된 나비라지만, 아직 여러모로 나에게는 몸만 큰 애나 다름없었다.
걱정에 입술을 잘근거리던 나는 마당에 나가 볼 생각으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러자 그 작은 충격에 무언가가 끼익, 하고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까도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 무심코 냉장고 뒤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집에서 느껴지던 꺼림칙함은 더 이상 기분 탓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뭐야……?”
냉장고 뒤의 벽이 빠끔히 벌어져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틈을 내보이고 있었다. 오래되어 갈라진 틈이라고 하기엔 네모반듯한 절단면이 인위적이었다. 천천히 벽을 밀자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오래도록 어둠에 묻혀 있었을 안쪽을 드러냈다.
벽 뒤에는 아래로 향하는 좁고 깊은 계단이 나 있었다. 안에 갇혀 있던 습하고 서늘한 공포가 밑바닥에서부터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듯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붉게 불타는 노을이 그런 내 그림자를 저 지하 밑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이건…….”
손잡이 따윈 없었지만 그건 문이었다. 이 집의 지하실로 향하는 숨겨진 문.
낯선 시골 동네, 낯선 집. 미치지 않고서야 그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희미하지만 분명한 나비의 냄새가 그 아래에서 느껴졌다. 설마…….
“나비야. 너 거기 있어……?”
좁은 통로에 떨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안한 상상에 등을 떠밀려 나는 결국 벽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 아래에 또 다른 문이 존재했다. 양쪽 벽을 짚고 가까스로 가파른 계단을 중간쯤 내려갔을 때, 돌연 통로를 밝히던 노을빛이 점점 범위를 좁혔다. 위에서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있었다. 아픈 다리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어둠 속에 갇혔다. 식은땀에 등이 축축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와중에 길을 안내하듯 나비의 냄새가 아래쪽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미치겠네.”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비의 냄새를 무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신중히 발을 디뎌 가며 냄새를 따라 내려갔다. 어렵게 다다른 차가운 철문이 섬뜩하리만치 묵직했다. 그런데 꽉 닫혀 있어야 할 철문이 살짝 열린 채였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을 주먹만 한 자물쇠와 끊어진 쇠사슬이 발끝에 걸렸다. 출입 금지 표시나 다름없는 그것들을 보자 피가 식고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선우야.’
살랑살랑 코를 간질이던 냄새가 나쁜 일을 당한 나비의 도와 달란 목소리로 변했다. 나는 주저 없이 철문에 달린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나타난 어두운 복도.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복도의 끝 방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와 복도를 밝혔다. 그 빛에 의지해 다가갈수록 나비의 냄새가 진해졌다. 아픔을 잊은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문을 열어젖혔다.
나비는 거기 있었다. 바닥과 벽이 전부 새하얀 타일로 도배된 기묘한 방 한가운데에. 철제 테이블 위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나비의 뒷모습은 멀쩡했다.
“하아…….”
나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맥이 풀려 화를 낼 기운도 안 났다.
“왔어?”
그 자세 그대로 나비가 말했다. 뒤로 돌아 굳이 나를 확인하지 않는 모습에서 나비가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을 부르는 대신 유인하듯 자신의 냄새를 푸는, 지극히 ‘그것’다운 방법으로…….
기가 막혔다. 제 정체를 숨길 생각 따윈 없어진 모양이었다.
“말도 없이 이런 데서 뭐 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막 들어와.”
사락, 사락.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맞춰 나비의 팔이 움직였다. 꽤 골똘히 뭘 보고 있는 듯하다. 내 쪽으로 몸을 튼 나비가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리 와 볼래?”
천천히 다가가던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춰 섰다. 나비가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것은 테이블이 아니라 키가 높은 일 인용의 침대 같았다. 이불도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뼈대뿐이었지만 분명 침대 형태였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은색의 날카로운 도구들과 녹색 천 따위가 놓인 스테인리스 카트, 천장에 달린 거대하고 둥근 조명까지. 서서히 이 방의 전체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비야……. 여기 대체 뭐야……?”
병원에서나 볼 법한 수술실이었다. 원인 모를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속이 메스꺼워졌다.
“네가 꼭 봐야 할 게 있어.”
나비가 손을 내밀었다. 반으로 접힌 종이가 하얀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다. 노트 한 장을 북 찢어 접은 종잇조각이 불길해서 도무지 받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뭔데……?”
“이 집의 식탁 위에 있었어. 네 아버지가 남긴 거야.”
“그럼, 여긴…….”
“동생이 줬던 선물. 기억나?”
낚아채듯 종이를 가져와 펼쳤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쓴 듯 굵은 필체로 적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부디 네가 믿어주길 바라며 이 편지를 쓴다.
내 모든 수단은 실패했다.
사라진 네 친모를 찾을 방법은 이제 그 애의 피붙이인 너밖에 없다.
지하실에 네 친모에 대한 진실을 남겨두었다.
그간 너에게 말해주지 못한 이유도 함께 있다.
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날 찾아오너라.
부탁한다. 내 아들 선우야.]
동생을 시켜 나에게 이 집의 주소를 알려 주려 한 이유가 여기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소름 끼치는 수술실과 아버지가 말하려 한 진실을 선뜻 연결 짓기엔 설명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게 무슨 뜻이야? 넌 알지. 알고 여기로 온 거지.”
“아니. 지하실의 존재는 아무도 몰랐어. 네 아버지가 가끔 쉬러 오시던 곳이라고만 말해 줬거든. 그래서 나도 그런 줄 알았고, 그 편지를 보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봐 줄래?”
나비는 쉬지 않고 수술대 위에 놓인 두툼한 서류철을 가리켰다. 나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래, 사실은 무서웠다.
“괜찮으니까 와서 봐.”
내 마음을 읽은 듯 나비의 차가운 손이 내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더는 날 놓지 않겠다던 손. 나는 그 손을 꽉 쥐고 나비의 곁에 섰다.
내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비가 보고 있던 그것은 수기로 빼곡히 작성된 일종의 장부 같았다. 빠르게 눈으로 훑어 내린 내용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딘가 이상했다.
여 / 42세(사망) / 안구 ……
남 / 52세 / 안구 신장 간 ……
남 / 28세 / 안구 심장 신장 폐장 ……
남 / 34(사망) / 안구 ……
여 / 61세 / 안구 간 ……
남 / 18세 / 안구 심장 신장 폐장 췌장 ……
서류에는 간단한 인적 사항, 사인, 신체 일부의 명칭, 그리고 암호 같은 알파벳과 가격처럼 보이는 숫자들이 알 수 없는 규칙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구, 신장……?”
지하에 숨겨 둔 수술실과 정체불명의 장부, 떠오르는 답은 하나뿐이다.
“이거 설마…….”
섬뜩한 기록은 한눈에 봐도 양이 많았다. 누렇게 바랜 첫 장의 날짜는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끝도 없이 넘어가는 페이지마다 이름조차 없는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충격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의미하게 페이지를 넘기던 중, 나비가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그리고 한 장을 넘겨 또 “여기.”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뭐가 빠졌는지 알겠어?”
“빠져……?”
나비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 오래되어 뻣뻣해진 종이를 연신 팔락거리며 사람을 고기처럼 사고판 기록을 재차 들여다봤다. 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구……. 이다음 장부터 장기 목록에 안구가 없어.”
“그래. 그 암컷에게 먹이기 시작한 거야. 이때부터.”
“……뭐라고?”
차분히 설명을 덧붙이는 나비의 말을 멈추고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나비는 고요한 눈으로 내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여긴 아버지가 몰래 장기를 적출하던 장소고 불법으로 들여 온 시신의 머리를 그 여자에게 먹여 왔다……?”
“응.”
“하…….”
장기 목록에서 안구가 없어진 시기는 내가 태어나기 대략 2년 전. 그렇다면 2년 동안이나 아버지가 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말인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나비가 장부의 가장 뒷장을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 날짜가 XX년 12월 24일이야.”
“그날은…….”
“선우, 네가 태어난 날.”
단 한 명의 기록뿐인 마지막 장은 잔뜩 구겨졌고 갈색 손자국으로 지저분했다. 버석버석한 핏자국을 쓸자 부서진 가루가 번진다.
나 때문에 그 여자를 잃어버렸다던 아버지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출산한 직후 모종의 사고가 벌어져 그 여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일어날 법한 시나리오였다.
갑자기 속이 갑갑해졌다. 이토록 철저한 방법으로 여자에게 인간을 제공해 온 아버지도 결국은 실패했다. 끝내는 그 여자의 손에 하찮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친히 내 앞으로 남겨 준 유산이 내가 걷게 될 미래를 보여 주고 있었다.
구역질이 나서 두 손으로 수술대를 짚고 참담한 신음을 억눌렀다. 우리는 아직 바닷속이었다. 아무리 손을 휘젓고 발을 차도 가라앉고 마는 차고 검은 심해.
“선우야.”
나비가 뒤에서 허리를 감아 왔다. 작은 짐승이 주인을 위로하듯 목덜미에 볼을 부빈다. 손을 들어 귓바퀴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뭐라도 대답해 주고 싶은데 좌절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비가 계속 살아가려면 사람을 먹어야 한다. 이름조차 생소한 촌구석이라지만 일주일에 사람이 하나씩 사라진다면 모를 수 없을 터이다. 이건 처음부터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맞이할 끝은 자멸뿐이었다.
“내 생각에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길은 여기 있는 것 같아.”
나비가 여전히 허리를 감은 채 한쪽 팔만 뻗어 또 다른 장부를 끌어왔다. 내 어깨에 턱을 기대고 유유히 종이를 넘기더니 비교적 최근 기록을 펼쳤다. 그리고 그 옆에 아버지의 편지를 내려 둔다. 나는 나비가 뭘 말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뭐……?”
“보여? 글씨체가 달라. 네 아버지를 돕던 공범이 있었어.”
“공범이라고?”
나비가 펼친 장부의 글자는 선이 길고 폭이 좁았다. 아버지의 글씨보다 확연히 섬세했다.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이만큼 체계적이고 오래도록 자행된 범죄를 아버지 혼자서 유지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나비의 길고 하얀 검지가 글씨 위를 톡톡 두드렸다.
“난 이 사람을 찾아낼 생각이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에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나비를 돌아보려다가 시큰한 통증을 느끼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비는 끙끙대는 나를 가뿐히 들어 수술대 위에 앉혔다. 무심히 범죄의 증거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반바지를 슬쩍 걷어 맨 무릎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허벅지가 움찔했다. 걱정 어린 눈동자가 내 얼굴을 살핀다.
“피 났네. 아직도 아파?”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아팠으나 무릎을 간질이는 손가락을 치워 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 하고 나비가 다시는 허튼 생각을 못 하도록 강하게 쏘아붙였다.
“이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찾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찾아내서 뭘 어쩌려고.”
이 작자에게 아버지와의 지난 정을 들먹이며 구원의 손길이라도 요청할 생각인가? 범죄자를 상대로?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안일하고 순진한 발상이었다.
“이 사람이 미쳤다고 우릴 도와줄 것 같아? 그리고 이제 와서 우리한테 뭘 해 줄 수 있겠…….”
만약…… 아버지를 돕던 방법으로 우리를 돕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보다 나은 길이 없긴 했다. 내 손에는 아버지가 남긴 무엇보다도 명백한 범죄의 증거가 있었다. 상대가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나비는 얌전히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너…… 이 장부로 협박이라도 하려고?”
자문자답으로 뜻하지 않게 나비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나비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
“찾아서 다시 받아 낼 거야. 이 지하실로 배달되던 것들.”
아버지가 숨겨 둔 비밀을 보면서 혼자 거기까지 계획을 세운 눈앞의 나비가 전과는 다른 의미로 섬뜩했다. 하지만 나비가 간과한 게 있었다.
아버지가 하던 짓은 단순 범죄를 넘어 하나의 사업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공범은 한 사람이 아니라 조직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큰 세력일지도 몰랐다. 그쪽이 경찰보다 더 위험하다는 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내장이 녹고 다리가 찢어지는 고통은 몇 번이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나비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돼, 너무 위험해. 괜히 건드렸다가 우리가 다칠 수도 있어.”
나와 나비는 이미 경찰에 얼굴이 알려진 상태였다. 당장 낫지 않는 내 다리도 걸림돌이었다. 상대에 대한 정보도, 돈도 없고 시간마저 부족했다. 우리는 약점이 너무 많았다. 불리했다. 모든 게 최악이었다.
“선우야.”
부르는 소리에 사고 회로가 타 버린 로봇처럼 멍하니 눈을 맞췄다. 어떤 예고나 징조도 없이 나비가 툭 검은 자를 터뜨렸다. ‘그 눈’과 마주하자 지하실의 눅눅한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비가 새카맣게 물든 눈을 휘며 웃었다.
“꼭 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길은 많아. 없으면 내가 만들어 줄게. 널 위해서.”
전처럼 순진무구한 미소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는, 오만한 악마 같은 얼굴로 나비가 내 허벅지를 꽉 쥐었다. 커다란 손아귀의 악력에 전신이 쥐어 잡힌 듯 저릿했다.
“우리는 달라.”
우리는 다르다. 그 여자와도, 내 아버지와도, 이 더러운 인간들과도.
그 말을 듣자 깨끗해진 머리에 한 가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떠올랐다.
적응에 실패한 열등 인자는 죽고 살아남은 것들만이 처절한 진화를 통해 생존을 거머쥔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그 과정에 오른 것이다.
괴물의 눈을 한 나비가 이마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겨 주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말했잖아. 나 이제 너 안 놓는다고. 내 말, 무슨 뜻인지 몰라?”
“알아.”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