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번 주 토요일로 예약했어. 아버지도 오신대.]
동생의 메시지를 받고 내심 놀랐다. 아버지까지 설득할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그 작자가 무슨 생각으로 ‘가족 여행’ 따위에 동참할 마음을 먹었는지 몰라도 어쨌든 나비가 올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 이제 곧…… 만날 수 있다.
일회용 컵에 든 커피가 불쑥 시야를 침범했다. 고개를 드니 양손에 커피를 든 예 주임이 하나를 내게 내밀고 있었다.
“……고 부장님이 쏘신 거예요.”
묻지도 않았는데 예 주임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생전 얻어 마실 궁리만 하던 고 부장이? 아무튼 사실이라면 옆자리인 예 주임이 내 것까지 받아 온 듯했다. 거절해도 됐었을 텐데, 뭐 하러.
“아…… 예.”
대충 받아 들자 부드러운 갈색 액체에서 비린내가 훅 끼쳤다. 콧잔등이 찌푸려질 정도로 역겨운 냄새였다.
“아, 그건 제 거……. 이게 대리님 거예요.”
예 주임이 당황하며 다른 손에 든 커피를 내밀었다.
“예 주임 거라고요?”
“네. 바닐라 라테요. 남자 직원들은 아메리카노, 여자 직원들은 바닐라 라테라고…….”
점심을 먹고 돌아온 직원들의 손에 죄다 똑같은 브랜드의 커피가 들려 있었다. 개중엔 거의 비어 가는 컵도 보였다.
미친 새끼. 형용하기 힘든 혐오가 치밀었다.
“제가 마시겠습니다. 이거.”
“네……? 아, 네. 그러세요. 전 상관없어요.”
입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는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부장의 자리가 빈 걸 확인하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 끝에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고 부장을 발견한 나는 주저 없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부장님.”
소변기 앞에 서 있던 고 부장이 지퍼를 내리려다 말고 주춤거렸다. 그 면상 앞에 커피를 들이밀자 당황한 고 부장이 목을 뒤로 쭉 빼며 큰소리를 쳤다.
“이 대리 지금 뭐 하나?!”
“마셔 보세요.”
“뭐? 이, 이게 뭔가.”
“커피요. 부장님이 쏘신 바닐라 라테.”
거뭇한 낯이 삽시간에 붉어지고 목에 핏발을 세운 고 부장이 꽥 소리를 질렀다.
“저리 안 치워?! 자네 미쳤나?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뭐 하는 거야, 지금!”
“마셔 보라고요. 못 마시겠어? 왜요?”
“이, 이!”
눈알을 부라리며 고 부장이 아무렇게나 팔을 후렸다. 팔꿈치가 일회용 컵의 밑바닥을 쳐올렸고 넘친 액체가 가슴 위로 쏟아졌다. 갈색으로 젖은 셔츠에서 우유와 시럽 냄새에 섞여 썩은 정액 냄새가 진동했다.
“이 씨발…… 좆같은 새끼가.”
몸 안에서 뭔가가 터졌다. 심장에서 끓어오른 피가 눈앞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살이 짓이겨지는 파열음 사이로 끅끅거리는 신음이 뒤엉키고 익숙한 액체가 연신 얼굴에 튀었다.
“대리님! 이선우 대리님!”
예 주임의 날카로운 외침이 한발 뒤로 물러나 있던 이성을 불러들였다. 어느새 나는 가슴을 들썩일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바닥에 쓰러진 고 부장의 멱살이 움켜쥐어 있었고 다른 손은 뭉개진 고 부장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피로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그만 하세요. 왜 이러세요. 대리님. 이러지 마세요. 제발…….”
예 주임이 흐느꼈다. 고작 이런 놈을 위해서.
“예 주임. 이건 인간 아니에요. 그냥 고깃덩어리지.”
일그러진 얼굴을 향해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수많은 손이 상체에 달라붙어 고 부장과 나를 떼어 냈다. 나는 끌려 나가는 고 부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죽어 마땅한 놈인데, 진작 먹어 없앴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정말이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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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의 찜통더위가 기승이었다. 현욱은 땀에 젖어 달라붙는 티셔츠를 펄럭이며 복합 쇼핑몰 옆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성인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좁은 틈이 현욱에게는 어깨가 건물 벽에 스칠 정도로 비좁았다.
막다른 길 끝에서 인상을 찡그린 후배가 현욱을 향해 손짓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 순전히 더위 탓만은 아니었단 걸, 현욱은 골목 끝에 다다라서 알았다. 괴상한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뭔 냄새야.”
눈썹을 구기면서도 현욱은 코를 킁킁거렸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썩은 내였다. 후배가 코앞에 손부채질을 해 대며 대답했다.
“악취 민원 처리하려던 공무원이 신고했어요. 시체인 줄 알았대요.”
“비켜 봐.”
후배가 벽에 바짝 붙어 섰다. 현욱은 게걸음으로 후배를 지나쳐 냄새의 원인을 찾았다. 누렇게 녹은 비닐봉지 같은 것이 켜켜이 겹쳐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현욱은 괴물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뒤로 손을 내밀었다. 후배가 라텍스 장갑 하나를 현욱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현욱은 파란 장갑에 손을 끼워 넣고 누런 괴물체를 망설이지도 않고 집어 올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후배는 속으로 질색했다.
주르륵.
흐물흐물하고 미끈거리는 표면으로 고름 같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현욱은 그것을 손에 든 채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걸쭉한 그것은 현욱이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려도 끝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우욱.”
참지 못하고 후배가 헛구역질했다.
“어후…… 뭘까요? 특수 분장용 인형 탈, 뭐 그런 건가?”
후배의 말처럼 그것은 얼핏 사람의 형태였다. 현욱이 손으로 잡은 부위는 실리콘 가면처럼 이목구비 자리에 구멍이 나 있었고, 녹아서 서로 들러붙었지만 머리 아래로 몸통과 사지도 달려 있었다. 껍데기뿐이었으나 꽤 그럴듯해 시체로 착각할 만했다.
“그런 거겠지.”
영화관이 근처였다. 이벤트로 쓰인 특수 분장 용품을 불법 투기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옆 골목에?
현욱이 영화관이 있는 옆 건물을 올려다보는 중에 후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니, 표창장이고 나발이고 나타나야 주지! 잘생긴 게 인상착의냐? 어?!”
전화를 받은 후배는 씩씩대며 골목을 되돌아 나갔다. 후배의 뒷모습을 힐끔 본 현욱은 들고 있던 쓰레기를 땅바닥에 던져뒀다. 하도 요란을 떨어서 부리나케 왔더니만 별일도 아니었다. 뭐, 그편이 다행이겠지만.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쯧.”
그렇게 말하면서도 현욱은 습관대로 신고 현장을 훑었다. 담배꽁초와 일회용품 쓰레기가 널린 골목 바닥 여기저기 시멘트가 깨져 벗겨진 곳이 많았다. 그중 손바닥 두 개 면적의 흙이 드러난 곳에 흙더미가 인위적으로 봉긋 솟아 있었다. 현욱의 눈길을 끈 건 그 작은 둔덕 위에 누군가 일부러 올려놓은 듯 보이는 말라 빠진 민들레 한 송이였다.
현욱은 눈매를 좁혔다.
‘……무덤, 인가?’
“선배, 장 선배!”
골목 밖에서 후배가 얼른 나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쓰레기나 버려지는 이런 곳에 무덤이라니. 곧 저가 떠올린 어이없는 생각을 접은 현욱은 장갑을 벗어 쓰레기 위에 던져두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근처의 야외 흡연 구역에서 현욱은 담배를 꺼내 물며 지시했다.
“폐기 처리해.”
“옙.”
현욱은 폐 속까지 깊이 연기를 집어넣었다가 뱉어 냈다. 코를 찌르던 악취가 매캐한 담배 연기로 덧씌워졌다.
“선배 어머님은 잘 계세요?”
현욱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 후배는 종종 현욱의 어머니에 관한 안부를 물어 왔다. 현욱은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었다.
“혼자 계실 때보다는 훨씬 낫지.”
3년 전 아버지가 자살한 이후로 어머니의 정신이 급격히 약해졌다. 직업상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긴 현욱은 고심 끝에 어머니를 외가 친척들이 사는 시골에 모셨다. 환경적 변화가 효과가 있었는지 약물 치료도 짧게 끝이 났고 외가 식구들과 부대끼며 어머니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다행이네요. 어디서 외로움도 병이라던데 맞는 말인가 봐요.”
현욱으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말이지만 확실히 외로움에 취약한 사람들이 있음은 인정했다. 그 정도가 죽음으로 내몰릴 만큼 끔찍하다는 것도.
“아, 외롭다. 결혼하고 싶다! 선배는 만나는 사람 없어요?”
“헛소리할 시간에 나한테서 독립부터 해. 사사건건 불러서 징징대지 말고.”
현욱은 빨리 서로 돌아가 땀에 젖은 옷부터 갈아입고 이틀 전, 이선우가 찾아 달라던 남자와 ‘그 개새끼’가 누군지 사건 파일을 다시 뒤져 볼 계획이었다.
“쓰읍, 그러고 보니 장 선배 본 지가 몇 년인데, 선배가 제대로 연애하는 걸 못 본 것 같아요, 나. 아! 전에 서로 찾아왔던 여자 있잖아요. 그 왜…… 선배가 그 여자 괴롭히던 변태 새끼 현행범으로 잡아 줘서, 고맙다고 막 커피랑 이것저것 사서 온 여자요. 개뿔 모르는 내가 봐도 선배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그 후로 연락해요? 예?”
현욱은 담배를 재떨이에 뭉개고 제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대는 후배의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은근슬쩍 농땡이 부릴 생각 마라.”
“아, 숨은 돌려야죠. 배고픈데 근처에서 뭐 좀 먹구 가요.”
“그럴 시간 없어.”
“뭐 하는데요? 또 그 아파트 실종 사건?”
현욱이 대답이 없자 후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덜댔다.
“아주 대한민국에서 자기 혼자 형사시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후배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가로수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어, 이게 아직도 있네.”
후배가 가로수 밑동을 톡 찼다. 도르르 소리도 없이 굴러떨어진 건 매미 허물이었다. 얇고 텅 빈, 노르스름한 껍데기가 와작 소리를 내며 후배의 발밑에서 으깨졌다.
서로 복귀한 현욱은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인물을 보고 당황했다. 이선우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노발대발하는 중년의 얼굴은 어찌나 구석구석 골고루 맞았는지 완전히 피떡이었는데, 그 얼굴로 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중이었다.
현욱은 근처에서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 모습을 관망하는 동료 형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사내 폭력 사건. 부하 직원이 상사를 팼다는데 뭐 놀랄 일도 아니지. 딱 봐도 진상인데.”
“아-니! 이 미친놈이 나를 폭행했다니까! 화장실까지 쫓아와서?! 아무 이유도 없이!”
곁에 앉은 이선우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쏟아진 앞머리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현욱은 습관적으로 혀를 차려다가 멈칫했다. 대신 뒷머리를 거칠게 털며 이선우에게 다가갔다.
“이선우 씨. 따라와요.”
“어어. 어딜 데려가는 거요! 깜빵에 집어넣어야지!”
현욱은 묵묵히 앉아 있는 이선우를 힘으로 일으켜 세워 일전에 그와 대면한 조사실에 밀어 넣었다. 녹슨 철문이 쿵 닫혔다. 정면에서 본 이선우는 엉망이었다. 하얀 셔츠에 아마도 커피 같은 갈색 얼룩이 큼직하게 묻어 있었고 그 위에 핏자국이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현욱의 뿌리 깊은 죄책감이 다시금 머리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갈아입을 옷 좀 주세요.”
이선우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버석한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조사실을 나온 현욱은 제 캐비닛에서 여벌 티셔츠와 마른 수건을 꺼냈다. 수건은 물에 흠뻑 적신 다음 꽉 비틀어 물기를 짜냈다. 양손에 하나씩 쥐고 조사실로 돌아가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새 건 아니지만 깨끗한 겁니다.”
잠시 멀거니 테이블 위를 보던 이선우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평소 사람들 몸수색을 밥 먹듯이 하는 현욱이었다. 게다가 여름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실에서 반강제적으로 동료들의 맨살을 마주쳐 이젠 타인의 알몸에 대한 불쾌감마저 무뎌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겨우 단추를 푸는 모습에 현욱의 눈동자가 산만하게 흔들렸다. 빳빳한 셔츠를 거리낌 없이 벗어젖혀 드러난 상반신이 곁눈으로도 하얗게 눈을 찔렀다. 현욱은 고개를 아예 모로 돌리고 이선우의 탈의를 의식하는 저 자신에 당황했다.
‘제정신인가?’
현욱은 급히 이선우가 남자치고 몸이 하얗고 깨끗해서 조금 놀랐을 뿐이라고 합리화했다. 제 주변엔 온통 땀 냄새 나는 덩치들뿐이라 낯설어서라고 굳이 변명까지 덧붙이면서.
이선우가 반소매 티셔츠에 목을 꿰어 넣고 나서야 현욱은 제대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뭐든, 말해 줘야 도와줄 수 있습니다.”
“……도와줘요?”
이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현욱은 이틀 전, 이선우의 부탁을 거절한 날을 떠올렸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찾아 달란 부탁이 너무 절실해서 화가 났다.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현욱은 아직도 짚어 내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게 짜증이 나서 일부러 잠깐이나마 이선우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랬더니 바로 이 사달이다.
“저 역겨운 놈이 정액을 탔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현욱의 눈이 커졌다. 이선우는 제 입으로 말하는 것조차 더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여사원들 커피에.”
“셔츠에 묻은 게 그 커피입니까?”
이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액인 건 확실하고? 봤습니까?”
내내 45도 아래로 내리깔려 있던 시선이 현욱을 직시했다.
“확실해요.”
거칠고 사나운 음성이 등허리를 훑는 듯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현욱은 뒤늦게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구겨진 이선우의 셔츠를 집어 들었다.
“알겠어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물수건도 집어 이선우에게 직접 건넸다. 그러면서 제 왼쪽 뺨을 가리켰다. 이선우의 얼굴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얼굴 닦아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 생기면 나한테 전화해요. 내가…… 그쪽 상황 제일 잘 아니까. 그게 나아.”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현욱은 조사실을 나와 아직도 떵떵거리고 있는 중년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 뭐야?!”
눈을 부라리는 남자의 앞에 이선우의 셔츠를 내려놨다.
“입 다물고 합의하실래요. 아니면 국과수 보낼까요.”
이 늙은 쓰레기의 변태 짓거리와 별개로 폭행은 폭행이었다. 이선우와 합의를 시키고 신고야 당사자인 피해자가 하면 되었다. 찔리는 게 있는지 얻어터진 입술을 푸르르 떨어 대기만 할 뿐 찍소리도 못한다. 화를 참으며 현욱은 쐐기를 박았다.
“요즘 기술 얕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10년 전 개새끼들 좆물도 다 찾아내니까.”
현욱의 거친 언사에 상대는 눈에 띄게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흠, 크흠. 나 원 참. 뭔 소린지. 내가 그간 정이 있어서 봐주는 거야. 저놈 언젠가 사고 칠 줄 진작 알아봤다고.”
훤히 빈 정수리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다가 현욱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곧바로 이선우에게 돌아가려는 현욱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처음 보는 여자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당황한 현욱이 미간을 구겼다. 여자는 굳은 결심을 내린 표정으로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형사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대리님, 이선우 씨에 대해서.”
이선우를 언급하는 여자의 말에 현욱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누구시죠?”
“예정원이라고 해요. 이선우 씨 직장 동료예요.”
현욱은 닫힌 조사실 문을 확인했다. 이선우가 또 언제 돌발 행동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어 초조했다.
“중요한 얘깁니까?”
“네.”
결연한 표정을 한 정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현욱은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현욱은 자신의 자리로 정원을 데려간 다음 보조 의자를 끌어와 앉혔다. 정원이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보여 현욱은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뽑아 건넸고 두 손으로 종이컵을 받은 정원이 입술을 겨우 축였다. 혼자 있는 이선우가 신경 쓰여 현욱은 자리에 앉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폭행 사건 때문이라면…….”
현욱의 말을 끊으며 정원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현욱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정원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
“제가…….”
거기까지 운을 떼고 정원이 무언가를 떨치려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때 현욱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후배가 현욱의 책상에 핸드폰을 탁 내려놓았다.
“선배. 바빠요?”
“바빠. 이따가.”
그런데 공포에 질린 정원의 시선이 책상에 놓인 핸드폰에 꽂혔다. 정원이 검지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이 사람……. 이 남자예요.”
“이 남자요?”
“이 남자가 대리님을 죽이려고 했어요.”
충격적인 증언에 현욱이 후배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누군가가 핸드폰으로 촬영한 듯 보이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쁘장한 남자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동영상을 가져온 후배가 끼어들었다.
“예? 설마요. 잘못 본 거겠죠. 이 남자, 영화관에서 떨어지는 애 구해서 지금 인터넷에서 표창 안 주고 뭐 하냐고 난리도 아닌데.”
집중해서 화면을 보던 현욱이 갑자기 책상 서랍을 열어 2901호 남자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지난번 이선우에게 보여 준 사진을 띄워 동영상과 대조했다. 사진 속에서 이선우를 업고 있는 남자와 동영상 속 남자는 동일 인물이었다.
“어? 같은 사람 아니에요? 선배, 이 남자 알아요?”
『나비야.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동영상 속에 나타난 이선우가 남자를 나비라고 불렀다. 현욱의 형형한 눈빛이 정원을 향했고 커다란 손이 정원의 팔목을 세게 쥐었다.
“자세히 말해 봐요. 아는 거 싹 다.”
심각하게 변하는 현욱의 표정을 본 정원은 안도했다. 저는 하지 못한 일을 현욱이 해 줄 거라 믿어서였다. 그날 이후 밤마다 그녀를 괴롭히던 악몽을, 절대 말하지 않겠다 한 저주 같은 약속을, 정원은 깨기로 다시금 결심했다. 그 사람을 위해서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날, 거기서 대리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뭔가……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대리님 뒤를 따라갔는데 비상계단에서 둘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싸웠다고요? 뭣 때문에요.”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분명, 다투는 소리였어요.”
“그리고요. 그리고 또 뭘 봤습니까.”
답답해진 현욱이 재촉했다.
“이 남자가 뭔가로 대리님 배를 찌르더니 가 버렸어요. 피가…… 피가 분명히 많이 났는데…….”
기어코 정원의 일그러진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나 현욱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까 옷을 갈아입을 때 이선우의 몸에서 그렇게 큰 상처는 보지 못했다. 새하얀 피부에는 눈에 띄는 흉터랄 게 전혀 없었다.
“확실합니까? 찌른 거.”
“소리가 들렸어요. 대리님이 아파하는 신음이랑 칼 같은 거로 찌르는 것 같은 소리요.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아마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다.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거리였다면 충격으로 단순히 치고받고 하다가 흘린 피를 보고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 영상이 찍힌 게 언제죠?”
“일주일 전이요.”
일주일 전. 이선우의 입으로 들은 남자의 실종 시점과 일치했다. 이선우가 찾는 사람, 동영상 속 남자, 그리고 잃어버렸다던 고양이 나비. 모두가 같은 사람이었다.
“형사님. 그 뒤로 대리님이 이상해지셨어요. 저러다 정말 잘못되실 것…….”
돌연 정원이 무언갈 깨달은 듯 입을 가리며 말을 멈췄다.
“아니. 그 전부터 그랬어요.”
“언제부터 이상해졌습니까.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6월쯤.”
정원이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요. 처음엔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았어요. 코피도 흘리시고, 꼭 뭐에 쫓기는 불안한 사람처럼.”
“하…….”
현욱은 탄식 같은 숨을 토해 냈다. 정원이 말한 이선우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실종 사건이 처음 일어난 시점과 겹쳤다.
이선우는 최소 두 달 전부터 지속적인 위협에 노출됐고 그 위협의 실체는 실종 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정원의 증언을 듣고부터 현욱의 감은 2901호 남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이선우가 찾는 나비란 남자, 그 남자가 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고.
현욱은 재빨리 사건 파일을 뒤졌다. 6월부터 이선우의 동네에서 연달아 일어난 실종 사건을 모두 모아 둔 파일이었다.
처음 실종자는 주거 침입 및 절도 전과가 있는 택배 기사였다. 그다음엔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던 남편을 살해한 칠십 대 노인.
‘잠깐.’
서류를 넘기던 현욱의 손이 일순 멈췄다.
택배 기사와 노인의 사이에 또 다른 실종자가 있었다. 현욱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실종자의 사진을 정원에게 보여 줬다.
“혹시 이 사람 압니까?”
눈물을 닦은 정원이 작은 증명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눈썹을 찌푸리며 한참 사진을 뜯어보던 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얼굴로 현욱을 보았다.
“몇 번 본 적 있어요. 대리님 친구분이라고……. 이 사람은 왜…….”
“친구라고요?”
이선우가 말한 ‘그 개새끼’가 이 남자라면.
현욱의 시선이 이선우가 있는 조사실 문에 번개처럼 꽂혔다. 이 남자도 그 아파트에서 이선우와 살았던 게 분명했다.
현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처음 탐문 수사를 나갔을 때 이 사진을 보고도 모른 척했는지, 그 이유를 이선우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만 했다.
∞ ∞ ∞
장 형사가 나간 뒤, 고 부장의 멱따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됐든 관심 없다. 장 형사가 주고 간 젖은 수건으로 피가 말라붙은 손등을 닦았다. 그렇게 내리쳤는데 손등은 멍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여기서 체포되면 감옥에 가기 전에 신체검사를 받게 되겠지. 그러면 내 몸의 이상을 들킬 테고 어딘가의 지하실로 끌려가 비윤리적인 실험의 실험체가 될지도 모르겠다.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비를 가두려고 했던 협박이 내게 되돌아온 상황이 우스웠다. 철제 테이블에 쿵 무거운 머리가 떨어졌다. 후회는 없었다. 고 부장을 죽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울 뿐.
누가 알겠는가. 감옥에서 썩는 내가 불쌍해서 나비가 구하러 올지도. 아니, 비웃으려고 올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자기가 없어지자마자 이런 꼴이냐며.
끼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고개를 들진 않았다. 보나 마나 장 형사일 게 뻔했으니까.
“포기하려고?”
장 형사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가느다란 미성에 고개를 번쩍 들자 웬 여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삼십 대쯤 돼 보이는, 짧은 머리에 긴 남색 남방을 걸친 여자가 다가와 두 손으로 테이블 위를 짚었다. 얼굴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재밌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한 장난기가 가득했다.
“내가 너를 너무 믿었나 봐.”
모르는 여자가 나를 아는 듯이 굴었다. 여긴 경찰서였고 여자는 경찰처럼 보이지 않았으니 길거리에서 붙잡혀 온 미친 여잔가 싶어 나는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그러자 여자의 검지가 내 시선을 끌려는 것처럼 톡, 톡 철제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꽤 괜찮은 미끼라고 생각했거든. 키워 주고, 먹여 주고.”
“……미끼?”
미끼란 단어에서 불길함이 번득 솟구쳐 여자를 노려봤다.
“이제 쓸 만해졌나 싶은 참이었는데. 어디 갔는지 정말 몰라?”
잘 보니 이 여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내 강요에 익힌 고기를 먹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비를 부축해 집으로 들어가던 길, 가로등 아래 서서 나와 나비를 지켜보던 여자…….
그 여자가 지금 여기 어떻게?
내 혼란함을 알아챘는지 마주친 여자의 눈이 스르르 휘어진다.
“당신, 나랑 만난 적 있지.”
내가 묻자 여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불길한 웃음소리가 왜인지 익숙했다. 이따금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처럼…….
꿈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의 주인은 전부 이 여자였던 거다.
“우릴…… 지켜보고 있었어?”
“지켜보고, 지켜 줬지. 나비가 잘 클 수 있도록.”
여자가 내뿜는 위화감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두 번째였기에 더 확실하게 보였다. 눈앞의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나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여자가 내 편이 아님을 직감한 전신의 근육이 바싹 수축했다.
“당신도, 괴물이야?”
“괴물? 그렇게 부르니까 나비가 널 떠났지.”
훅, 나비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의 눈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느새 덜덜 떨고 있는 나를 향해 몸을 숙이며 여자가 속삭였다.
“뭘 그렇게 놀라. 처음도 아니면서.”
“당신이…… 당신이 데려갔어? 어디 있어! 어디다 숨겼, 큭!”
“쉿.”
여자의 손이 엄청난 힘으로 턱을 틀어쥐었다. 턱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잘 들어. 한때 나한테도 너처럼 날 괴롭히던 인간이 있었어. 매일 같이 지겹게 날 사랑한다면서 울고 매달렸지. 그러더니 언젠가부터는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기 시작하더라고. 제발! 대답해 줘! 라면서. 그런데 나는…… 그냥 배가 고팠어. 그래서 대답해 줬지. 콱! 깨물어서 말이야.”
붉은 혀가 맛을 음미하듯 입술을 핥았다.
“넌 그 인간을 많이 닮았어.”
칼날처럼 변한 여자의 손가락이 뺨을 그었다. 스윽 옅게 갈라진 살이 금세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자의 손을 떼어 내려고 발악을 했다. 여자는 재밌다는 양 눈썹을 들 뿐 여유가 넘쳤다.
“그만 포기해, 아가. 넌 나비의 짝이 될 수 없어. 우리에게 먹히는 게 너희가 타고난 운명이야.”
“나비……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둬.”
아랫입술을 깨문 여자가 씩 웃자 스르르 눈에 흰자가 돌아왔다. 턱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여자는 내 멱살을 틀어쥐고 날 집어 던졌다. 의자와 함께 날아간 몸이 벽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윽!”
뼈까지 전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자 혀 위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등이 부러진 듯한 고통이 여자는 나비와 다름을 새겨 줬다. 바닥에 기어가는 개미를 밟듯 나를 내던지는 여자의 손길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사실 나도 찾는 중이야. 너랑 나, 누가 먼저 찾는지 내기할까?”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나는 여전히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여자를 노려봤다. 마치 즐거운 게임을 제안하듯 가볍기 그지없는 투였다.
“먼저 찾는 사람이 갖는 거야. 시작.”
빙글 돌아선 여자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놓치면 안 된단 생각에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몸을 성급히 일으킨 나는 땅을 박차며 소리쳤다.
“기다려. 나비는 내 거야. 걘 내 거라고!”
저 여자를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나비를 뺏길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여자의 손에 머리가 뜯겨 죽어 가는 나비의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저 괴물을 여기서 죽여야 해. 내가 죽여야 해.
문밖을 나서는 여자를 죽여 버릴 작정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손이 여자에게 닿기 직전, 두껍고 단단한 것이 가슴을 턱 가로막았다.
“진정해! 왜 이러는 거야, 이선우!”
장 형사였다. 내 몸을 끌어안은 장 형사가 나를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나는 내 위에 올라타 사지를 결박한 장 형사에게 호소했다.
“저 여자! 저 여자 잡아야 해.”
“뭐?”
갑작스러운 소란에 장 형사를 따라 모여들던 경찰들이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래, 얼른 잡아. 그 괴물이 도망치기 전에 당장 잡으라고……!
“서 과장님, 괜찮으세요?”
그들이, 경찰서 내의 수많은 인간이, 하나같이 괴물을 서 과장이라 부르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저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 여자가 아닌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전신에 힘이 빠졌다.
“응.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봐. 별일 아니니까.”
짓밟힌 벌레를 보듯 나를 힐끗 내려다본 괴물은 유유히 자리를 떴다. 붙잡힌 건 나뿐이었다. 아무도 모른다. 저 여자가 괴물이란 사실은 나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폭우처럼 내리붓는 절망감에 몸이 무겁게 잠겼다.
“진정 좀 됐어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경찰서 뒤편 공터로 데리고 나온 장 형사가 차가운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물기 어린 표면을 뺨에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밤바람이 스치자 젖은 뺨이 서서히 식었다. 장 형사는 내가 걸터앉아 있는 화단에 기대고 서더니 바스락거리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피울래요?”
생수에 이어 담배 한 개비를 내민다. 가로등 아래서 하얗게 빛나는 유혹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향수 냄새에도 희게 질리던 나비였다.
“서 과장님한테 왜 그런 겁니까.”
거둬 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장 형사가 물었다.
“……형사예요? 그 여자.”
“여기 실세죠. 실종 사건 무마하려는 것도 그 여자고.”
아파트 CCTV며 캠핑장에서 날 도와준 것도 전부 그 여자 짓이었다니. 내가 나비를 먹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리고 다 자란 나비를 잡아먹기 위해서였다니.
완전히 놀아났다. 손에 쥔 생수병이 우그러들었다.
“이선우 씨. 혹시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들어 봤습니까?”
장 형사가 평소와 다름없음을 가장해 꺼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으나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가정은 틀렸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 형사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찾는 나비란 남자. 그 남자가, 진범이죠.”
나는 따지 않은 생수병을 장 형사의 가슴에 던지듯 되돌려 주었다.
“장 형사님. 도와 달란 말 취소할게요. 이제 내 일에 상관 말아요.”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 형사가 끼어들어 봤자 개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까. 나와 그 여자의 싸움으로 족했다.
장현욱은 그렇게 죽기엔 아까운 사람이었기에 나는 돌아섰다.
“잠깐만요. 내 말 오해하지 말고 조금 더 들어 봐요. 나는 어디까지나 이선우 당신을…….”
나를 앞지른 장 형사의 거대한 몸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내게 속은 줄도 모르는 멍청한 남자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코앞에 놓인 삼백안이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걘 범인 아니야. 됐어요?”
“이선우…….”
장 형사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뒤로 쏟아지는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순간 하얗게 머는 시야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달칵.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포장되지 않은 땅 위를 걷는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선우 형.”
흰 빛줄기를 등진 검은 인영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왜인지 목이 탔다. 나는 장 형사를 지나쳐 역광에 가려진 이에게 홀린 듯 다가갔다. 거리를 좁힐수록 차츰차츰 얼굴이 드러났다. 동생이었다. 매번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날 찾아내는 동생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데리러 왔어.”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날 이후 처음으로 동생의 손을 잡았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손이었다.
“형. 일 잠깐 쉬는 건 어때?”
내 집 앞에 차를 세운 동생이 조수석에 앉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
선선히 대답해 주니 기쁜 듯 웃는다. 그러나 이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담배 냄새 나. 형한테서.”
그러곤 운전석 창문을 조금 내렸다.
“몸에 안 좋아. 안 피우던 걸 뭐 하러 피웠어.”
“……내가 담배를 피우는지 안 피우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동생은 별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담배 냄새가 안 났으니까 알지.”
아니. 보통은 그런 거론 몰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장 형사님이 알려 주셨어.”
태연한 대답에 나는 보란 듯 핸드폰을 꺼내 들어 장 형사의 번호를 찾았다. 탁, 동생의 손이 핸드폰을 쳐 냈다. 놓쳐 버린 핸드폰이 조수석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굳이 전화를 걸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 말이 거짓말이란 건 바로 알아챘다. 동생이 나타났을 때 장 형사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으니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동생과 마주 보았다.
“형, 근데…….”
미세하게 어두워진 얼굴에서 가면 같은 웃음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 누구 거야?”
그간 동생에게서 느낀 의혹들이 폭풍처럼 한데 몰아쳤다. 그리고 그 태풍의 눈 속에 고요하고 분명한 한 가지 질문이 자리했다.
“너 설마…….”
나비야?
찌릿해진 뇌가 불현듯 어느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본가에서 식사 후, 화장실에서 급히 나오던 동생의 얼굴. 붉어진 입가, 젖은 턱……. 내가 혼자서 돌아갈까 봐 다급해져 구토한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그 얼굴.
심장이 점차 느리게 뛰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낮고 은밀한 숨을 뱉었다. 수면 아래로 몸을 숨기듯이. 호흡이 점점 더 느려진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안전벨트를 풀고 은근히 물었다. 덫을 놓는 사냥꾼처럼.
“자고 갈래?”
반면, 대답은 쉬웠다.
“응.”
한껏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의 표정과 목소리는 순진하기만 했다.
한밤중에 침대를 벗어나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숨조차 허투루 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보일러를 최대로 높여 두어 시간이 지나 컴컴한 집 안은 지금 열기로 절절 끓었다. 그 열기 속에서 땀에 흠뻑 젖은 채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던 나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 위에 얇은 담요를 덮은 동생이 누워 있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천천히 오르내리는 동생의 가슴과 쌕쌕거리는 숨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다가갔다.
깊은 잠에 빠진 동생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동생의 뺨으로 손바닥을 가져가며 눈을 감았다. 다른 감각을 모두 차단하고 손바닥에 닿은 살결에 집중했다. 뜨거운 방 안의 열기에도 그 뺨은 건조하고 서늘했다. 그리운 감촉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흑…….”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고 잠든 이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드디어.
나의 나비를 찾았다.
∞ ∞ ∞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간질간질한 감각이 선잠을 자던 나를 깨웠다. 미지근하게 데워진 가죽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는 내 머리를 누군가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 깬 걸 눈치채지 못한 듯 손길이 조심스럽다.
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에 잠든 척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온전히 쓰다듬어 주지 않고 손끝으로만 머리카락을 흘려보내길 반복하는 가느다란 접촉은 쌓인 갈증을 해소하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나는 팔 안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최대한 느리게 들어 올렸다. 손길이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를 바라며.
“왜 여기서 자고 있어.”
기민하게 손을 거둔 동생이 나를 나무랐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진실을 알아 버린 내가 밤새 어떤 심정으로 자기 곁을 지켰는지 까맣게 모르는 얼굴이다. 일어나 앉아 있는 동생의 옆에 회색 담요가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
어젯밤, 저 담요를 걷어 나란히 놓인 흰 발목을 꺼내 놓고 수백 번을 고민했다.
잘라 버릴까.
내가 허락한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도록.
“땀도 많이 났네. 어디 아파?”
아무것도 모르는 나비가 젖은 이마에 붙은 내 앞머리를 살며시 떼어 줬다. 동생이라면 절대 허락할 리 없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아침이 오기 전, 나는 걷었던 담요를 발끝까지 덮어 주었고 경계심 없이 잠든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래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맹세했다.
너를 상처 입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너 스스로 내 곁에 돌아오게 만들겠다고.
“나…….”
혀끝에서 날아갈 뻔한 ‘나비’를 도로 삼켰다. 꿀꺽, 감정의 크기만큼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입에 단 애칭 대신 쓰기만 한 껍데기의 이름을 올렸다.
“선호, 너랑 같이 자고 싶어서.”
다정히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나조차도 놀라울 만큼 비참함 따윈 들지 않았는데, 오히려 날 내려다보는 무른 눈동자가 흠칫 굳어졌다.
“……그랬어?”
뒤늦게 웃는 얼굴이 어색했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내가 저를 동생의 이름으로 부르기만 해도 이렇게나 거부감을 숨기지 못하는 나비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알아봐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티가 나는데. 겉모습 따위에 또 속아서는…….
어떤 모습을 해도 나비는 언제나 나의 나비였다. 약속대로 나를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 주는.
처음부터 답을 알려 준 문제를 틀리고 만 것처럼 부끄러워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 너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무슨 말?”
생각 없이 튀어 나간 말에 동생은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받은 것처럼 되물었다. 소파 위에 떨어져 있는 손을 모아 잡았다. 내 두 손 안에 갇힌 연약한 나비가 파르르 떨었다.
들킬까 봐 긴장한 걸까. 내가 또 저를 상처 줄까 봐 겁을 먹은 걸까.
가슴이 아팠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곁에서만큼은 나비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이 순간 내 진심을 형체로 보여 줄 방법이 없음이 안타까워서 말밖에 해 줄 수 없는 혀가 무거워졌다.
“내가 너한테 했던 말들, 행동들, 너한테 가졌던 생각들도. 다 틀렸었어. 그러니까…….”
용서를 구하고자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다짐이 무색하게도 막상 빤히 지켜보는 검은 눈동자 아래에 놓이자 긴장이 됐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해 봐도 해야 할 말은 너무도 단순했다. 진부하고 평범해서 이게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어도, 그건 그 말을 대체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입을 열기 전, 코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미안해. 진심으로.”
“형…….”
“그러니까 이제…….”
“잠깐만, 형.”
머리를 내밀기도 전에 뚝 목이 잘려 버린 숨이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왜 그래. 형은 사과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잘못한 거라고 했잖아.”
동생이 된 나비가 그렇게 말하며 자기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붙잡을 틈도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나는 혀가 잘린 사람처럼 말을 잃고 빈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씻고 와, 형. 아침 해 줄게.”
끝끝내 나를 형이라 부르며 나비는 무정하게 뒷모습마저 보여 주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비를 놓친 두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당장 뒤따라가고 싶었다. 끌어안고 싶었다. 다 알고 있으니 그만하고 돌아오라 다그치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곧 이 방법은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손톱을 세워 허벅지에 박았다. 나비인 줄 알면서 모른 척해야 한다니, 그건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짓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몰아세워 봤자 나비가 도망갈 틈을 내줄 뿐이다. 확실하게 나비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 줘 제 발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오래도록 비어 있던 집 안에 음식 냄새가 났다. 날 위해 손수 음식을 만들었을 나비는 식탁이 아니라 현관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가면처럼 웃고 있는 동생의 얼굴에 숨이 턱 막힌다.
“가려고?”
벌써? 모르는 척만 하면 당연히 옆에 있을 줄 알았던 나는 당황했다.
“응. 아침은 차려 뒀으니까 꼭 먹어.”
“왜, 같이…….”
같이 먹을 수가 없지, 참.
무신경하게 내뱉을 뻔한 말에 옅은 자책을 느끼는 사이, 동생이 현관 아래로 내려섰다.
“그럼 주말에 봐. 형.”
그러고는 정말로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허리를 숙여 신발을 신었다. 자고 가겠다고 집요하게 굴 때와는 딴판이었다.
내가 제 자리를 비워 둔 채 홀로 있다는 걸 확인해서일까? 그런 거라면 더 같이 있어 줘도 되지 않나. 아무리 내가 못된 놈이어도 그 정도 보상은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켜켜이 쌓여 있던 원망이 쏟아졌으나 말로 할 수 없어 입술만 깨물었다.
툭, 신발 앞코를 타일 위에 두드리는 몸짓이 간신히 다잡은 마음에 금을 냈다. 조급증이 일었다.
어떻게 찾아냈는데, 이렇게 다시 널 보내라고?
나는 참지 못하고 달려가 동생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말았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몸은 부딪히는 힘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도록 허리에 두른 손을 깍지 끼고 어깨에 뺨을 푹 묻었다. 나비가 여기 있다. 단단한 실체를 몸에 새기며 힘주어 끌어안자 닿기만 했을 뿐인데 즉효 약처럼 조급증이 가셨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형.”
나비는 난처한 듯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만 이대로 있자.”
몸 안에 엉겨 있던 불만이 긴 날숨으로 몽땅 빠져나왔다. 막상 품 안에 안고 나니 바닥까지 메말라 있던 안도와 만족감이 동시에 몸 안 가득 차올랐다. 다리를 잘라서라도 붙들어 놓으려던 더러운 욕심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래, 어차피 내가 묶어 둔 실을 끊지 못하고 내 주변만 파닥거리며 맴돌 불쌍한 나비이지 않은가.
언제든 끌어안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안도감이 충만했다. 이제야 차츰 이성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내 곁은 더 이상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 형사도, 서 과장도 나비를 찾고 있다. 나는 그들이 나비를 잡기 위해 쳐 둔 덫 그 자체였다.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어쩌면 나비가 동생으로 위장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나비를 유인하려고 구상한 가족 여행이 코앞이었고 내 계획대로라면 나비는 그곳에서 본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다. 동쪽 끄트머리의 외진 곳이라 서울과 비교하면 CCTV나 목격자에 대한 걱정도 덜했다. 그래, 거기서 도망치는 거다.
혹시 모를 의심을 피하려면 그때까지 거리를 두는 편이 안전했다. 순식간에 세운 계획이지만 당장 이보다 나은 계획은 없을 듯싶다. 머리로는 그렇게 결론 내렸으나 마침내 잡은 나비를 놔주기는 어려웠다.
“형, 그만 놔줘.”
나비가 허리를 묶다시피 두르고 있는 내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그 기색을 느낀 나는 먼저 손을 풀어냈다. 기댄 몸을 세우자 맞닿았던 등과 가슴 사이에 잘라 낼 수 없는 미련이 끈질기게 늘어졌다. 자칫 일을 망칠 수도 있는 미련을 끊으려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내뱉었다.
“당분간 나한테 연락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마.”
“……형, 오늘 좀 이상하다. 무슨 일 있었어?”
그들이 널 찾고 있다고 말한다면, 나비는 그 위험을 끌어안고 영영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나는 돌아서려는 나비의 어깨를 재빨리 잡아 세우고 결심을 다잡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한순간에 무너져 있었다.
“이유는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줘. ……부탁이야.”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는 착한 나비의 등을 슬며시 밀었다.
지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할 수 있다면 눈을 맞추고 안심할 때까지 달래 주고 싶었지만 내 감정을 묶어 두기도 녹록지 않았다.
“아무 일 없어.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냥…….”
나는 겨우 말을 뱉었다.
“주말에 거기서 보자. 꼭.”
오늘이 마지막이다. 널 혼자 보내는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더 붙어 있다간 부질없이 내 마음을 다 들켜 버릴 것 같았으므로 나는 먼저 돌아섰다. 현관문이 말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다시 혼자 남았지만 괜찮았다. 견딜 만했다.
조금 식은 국에서 나비가 해 주던 맛이 났다. 맛있었다. 이 순간은 그걸로 족했다.
∞ ∞ ∞
혼자서 주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아니, 작동했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잠을 자고 씻고 식사를 하며 최소한의 생활을 반복했으나 거기에 내 의지는 희박했다. 의무적으로 숨을 쉬면서 주변을 정리하고 짐을 쌌다. 챙겨야 할 물건은 많지 않았다. 챙겨 놓고 보니 그다지 필요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회사는 그만두었다. 사직서를 내고 온 날, 예 주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고 부장이 저번 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됐으며 회사에서 잘렸다는 내용이었다.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소식이 담긴 메시지의 끝은 이랬다.
[고마워요. 대리님. 그리고 약속 못 지켰어요. 죄송해요.]
배신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예 주임과 나 사이에 지켜야 할 신뢰 따윈 애초에 없었으니.
예 주임이 경찰에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고 한들 쉽게 믿어 주지도 않을 테고, 만일 믿는다고 하더라도 경찰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할 거였다. 서 과장 그 여자가 나비를 노리고 있는 한은.
여자는 나비가 동생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일단 안전한 곳에 나비를 데려다 놓은 뒤, 여자를 처리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여자의 추적보다 당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나비에게 여자의 존재를 알리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비가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특별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했다. 하지만 나비의 강렬한 본능이 동족의 암컷을 거부할 수 있을까? 먹잇감에 불과한 인간, 하물며 같은 수컷인 나를 마지막까지 선택해 줄까? 내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슴 언저리가 심해에 가라앉은 돌처럼 차가워졌다. 나비가 인간이 아님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아직도 버려질까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에 대한 비참함이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의 찌꺼기를 털어 냈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나는 나비를 누구에게도 결코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장 형사든, 그 여자든. 설령 나비가 원한다고 해도.
나비를 시험에 들게 할 만한 가능성이라면 애초에 싹을 잘라 내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그 여자와 만나지 못하게 하면 된다. 그러니 지금은 최대한 멀리 떠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비, 아니 동생은 내가 당부한 대로 부모님과 함께 하루 먼저인 어제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수신한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조심히 와. 기다릴게.]
발신자는 동생.
나비는 정말 언제까지고 동생의 모습을 한 채로 나를 기다릴 작정일까? 왜 이렇게 된 걸까.
가슴 한가운데에 묵직하고 답답한 통증이 번졌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캐리어를 세워 손잡이를 쭉 뽑아냈다.
지금은 혼자서 청승을 떨 시간도 아까웠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여자보다 빨리 나비를 찾아냈다는 점이고, 더 늦기 전에 나비를 숨기는 일이 먼저였다.
시계를 보니 마침 출발할 시각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현관으로 갔다. 간단한 여행 짐을 꾸려 넣은 캐리어의 반쪽은 은행에서 있는 대로 찾아온 현금으로 채워져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빈집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곳곳에 숨어 있던 기생충 같은 공허함이 눈치채고 아우성을 친다. 내 눈에만 보이는 그것들이 스멀스멀 개미 떼처럼 기어 나와 따라붙으려 했다.
탁, 나는 배전반의 차단기를 내렸다. 텅 비어 웅웅거리던 냉장고가 마침내 울음을 그친다. 그것을 끝으로 이곳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었다.
여행이 끝나고 내가 돌아갈 곳은 나비의 곁밖에 없었으므로.
공동 현관을 나오자 늦장마가 시작되려는 하늘이 우중충했고 이따금 드세게 부는 바람은 습했다. 캐리어를 끌며 차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실은 한 가지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나비가 나를 떠난 지 벌써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나비의 ‘식사’가 미친 듯이 걱정됐다.
∞ ∞ ∞
차는 곁에 바다를 두고도 한참을 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다. 바다 특유의 비린내가 섞인 공기가 점차 꿉꿉해져 갔다. 길을 따라 늘어서 있던 가게와 펜션들이 점점 줄어들고 이윽고 인적 드문 투박한 산과 바다만이 도로 양옆을 차지했다.
철썩, 아득하던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릴 만큼 강해질 무렵이었다.
산과 바다가 맞물리는 경계선. 그 끝에 홀로 지어진 2층짜리 주택의 끄트머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파도에 거칠게 깎인 절벽 위에 위태로이 놓인 주사위 같은 회색 건물, 그 아래서 그곳을 삼켜 버릴 것처럼 어두운 바다가 거친 파도를 연신 절벽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난폭한 풍경에 불현듯 가슴이 술렁여 핸들을 고쳐 쥐었다. 룸미러와 사이드미러에 차례로 시선을 주며 주위를 살폈다. 눈에 보이는 곳까지 건물이라곤 이것 하나였다. 익숙한 고립감을 재차 확인하며 나는 긴장을 가라앉혔다.
“다 왔어.”
듣는 이도 없는 조급한 혼잣말이 차바퀴에 밟히는 자갈 소리에 묻혔다. 이미 주차된 동생의 SUV 옆에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했다. 소리를 듣고 1층의 발코니에 누군가 나왔다. 동생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허둥지둥 안전벨트를 풀고 시동도 끄지 않은 채 운전석에서 내렸다. 허리쯤 오는 철제 난간을 잡고 선 동생이 나를 발견하곤 웃었다.
저 얼굴을 보고 이토록 절박해질 날이 올 줄이야.
“뭐 좀 먹었어?”
대뜸 묻는 말에 동생의 눈이 조금 커진다. 운전석 문짝을 붙잡고 동생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모양을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동생은 혈색이 좋았다. 꼿꼿이 선 몸을 비틀거리지도 않았고 온통 잿빛인 배경에서 유독 두드러진 입술은 피 냄새가 나는 듯 붉었다. 그 붉은 입술이 옅은 호를 그리며 벌어졌다.
“먹었지.”
언제? 누구를? 어떻게?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물음을 눌러 삼키고 애써 미소 지으며 발코니로 다가갔다.
“잘했네.”
이제 정말 혼자서도 잘하네. 괜찮아. 잘했어.
머리를 쓰다듬고 입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다정히 동생을 바라봤다.
내 위로와 칭찬 없이 혼자서 식사를 했을 나비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싸해졌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괴로웠던 게 나 하나만은 아니었다는 이기적인 만족감 정도는 그냥 두기로 했다. 서로가 없는 시간이 고통스러운 만큼 나비도 날 그리워했을 테니까.
걱정을 덜어 낸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남은 건 내 나비를 다시 만나는 것뿐.
“보고 싶었어.”
참지 못하고 내가 말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무심코 나비야, 하고 불러 버릴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동생의 새카만 눈이 보기 좋게 휘어진다.
“나도. ……형.”
전과 달리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동생의 얼굴, 동생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살갗이 타들어 가듯 간지러웠다.
“오는 데 길은 안 막혔니?”
문을 열어 준 엄마는 쌀쌀한 바닷가 날씨 탓에 아이보리색 긴 카디건을 걸친 차림이었다. 엄마의 온화한 미소를 못 본 척 스쳐 지나가며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주말치고는 괜찮았어요.”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천장이 높은 거실과 연결된 테라스에 시선을 빼앗겼다. 입구 쪽에선 볼 수 없던 풍경이 거기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테라스 끝에 잿빛 하늘과 검은 바다가 소리 없이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덜그럭.
동생은 내가 가져온 검은 캐리어를 현관에서 집 안으로 옮겼다.
“선호야.”
나비를 부를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다정한 억양에 동생은 익숙하다는 듯 순종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거 내가 쓸 방에 가져다 놔 줄래?”
“응.”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 동생이 캐리어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곁에 서 있던 엄마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걸 왜 선호한테 시키니? 그렇게 말하는 갈색 눈동자 안에 선명한 꺼림칙함이 담겨 있다.
정작 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짜 동생’은 엄마를 닮아 홍채 색이 옅었다. 그러나 지금 동생의 눈동자는 새카맸다.
엄마는 아직도 그 차이를 모르는 걸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하나뿐인 아들인데?
묘한 우월감에 나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선호가 제 말을 잘 들어요. 아무래도 어릴 적 그 일이 미안한가 본데. 음…….”
괜히 목을 울리며 뜸을 들였다. 금기나 다름없는 ‘그 일’을 언급하자 엄마는 실내인데도 한기가 드는 것처럼 얇은 외투를 여몄다. 쇄골 가운데 작은 십자가 모양의 펜던트가 동생이 일부러 삼켰던 작은 칼날처럼 반짝인다. 나는 이제 와서 별일이냐는 양 일부러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저러다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것 같아서 좀 부담되긴 해요.”
엄마의 얼굴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푸르게 질린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딱딱하고 차가운 음성, 이제야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어릴 때와 달리 내가 웃는 낯을 지우지 않고 있으니 엄마가 먼저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피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나비의 달콤하고 무른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긴 어려워 보인다.
“점심은 먹고 왔니?”
주방에 모습을 숨긴 엄마가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제 아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나 때문에 엄마의 기분이 언짢으리란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주방 쪽에서 삑, 버튼이 눌리고 무언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커피 향이 퍼졌다. 따스한 향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없는 엄마와 나 사이에는 차곡차곡 냉기가 쌓여 갔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아무도 없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요?”
“방에 계셔.”
주방에서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온 건가? 내가 온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닫힌 방문은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나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테라스 쪽으로 가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밀리는 두꺼운 유리문의 사이가 벌어지기 무섭게 쉭쉭 거센 바람이 들이쳤다. 내 몸이 넉넉히 들어갈 만큼 열어젖히자 그야말로 광풍이 전신을 흔들었다.
절벽 쪽으로 탁 트인 데크 테라스의 끝에는 보기 드문 풍경을 가리지 않도록 투명한 유리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것처럼 보여 아슬아슬했다.
나는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실로 거칠 것 없이 불어 대는 바람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어 짐승처럼 울어 댔다. 휘몰아쳐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를 넘겨 잡고 테라스의 끝에 섰다. 절벽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먼바다에서부터, 물결치는 검푸른 파도가 우레처럼 울며 이곳을 향해 줄지어 달려든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게 두 팔을 벌려 나를 환영하듯이.
“멋지지 않니?”
하얀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엄마가 겁도 없이 난간에 몸을 기댔다. 나풀거리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잠시 지켜보다가 검게 요동치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는 날씨가 좋아서 잔잔하고 예뻤어.”
철썩, 때마침 드센 파도가 절벽에 부서졌다. 어제까진 잠잠히 내가 오길 기다리면서 착하게 굴었던 모양이지. 나를 보자 당장 먹이를 달라고 성을 내는 물살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예쁘네요.”
나와 나비를 제외한 모든 걸 죄다 쓸어 넣기에 더없이 적합한 검고 깊은 소각로가 꺼지지 않는 차가운 불꽃을 뿜어 댄다. 뺨까지 불똥이 튀어 올랐다. 검푸른 물살은 내가 던져 준 먹이를 불평 없이 말끔히 집어삼킬 것이다. 이왕이면 나비에게 주고 싶지만 더는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선우야. 사실 선호한테 다 들었어.”
내가 고른 장소에 만족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엄마의 고백이 이어졌다. 비스듬히 선 엄마는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일렁이는 흰 연기가 입술에 닿지 못하고 바람에 쓸려 사라진다.
“네가 선호를 살려 줬다고.”
“……네?”
두 번이나 죽일 생각을 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모르는 척 안 해도 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 네가 집에서 나가고 나서부터 선호가 우울증이 심했다는 거.”
동생이 우울증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엄마는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그 모습이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 안 구석에서 슬쩍 머리를 내미는 해충처럼 혐오스럽다.
“선호가 너를 많이 의지했다며. 네가 아니었으면 자기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거기까지 말하고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나도 그랬다. 물론 엄마처럼 동생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해선 아니었다. 내겐 악을 쓰며 직접 죽이려 들기까지 한 엄마의 이중성이 끔찍해서였지.
“선호는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나는 선호가 너랑 연락하는지 꿈에도 몰랐어. 알았다면 좀 더 빨리 너한테…….”
이제야 나비가 어떻게 엄마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알 것 같았다. 동생이 엄마도 알고 있을 만큼 오래도록 우울증을 앓았다는 점을 이용해 엄마에게 나라는 존재를 다시금 ‘의지할 수 있는 형’으로 되돌리려고 한 모양이었다.
내 생각보다 치밀한 계획임은 인정하나 나비의 계획 따윈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 철썩, 와중에도 파도는 쉬지 않고 발밑에서 달려들었다.
“제 동생이잖아요. 하나밖에 없는.”
뻔한 대사를 읊었을 뿐인데 엄마는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머그잔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기 무섭게 흩어졌다.
“이런 부탁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네가 선호를 잘 돌봐 줬으면 좋겠어. ……형으로서.”
득달같이 불어닥친 바람이 나와 엄마 사이에 윙윙 엉켜 들었다. 형으로서. 엄마가 유독 거기에 힘주어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가 겪은 수모는 다 잊고 전처럼 몸으로도 모자라 정신까지 아픈 동생의 형 노릇을 하라는 소리였다. 엄마가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인 셈이다.
하여튼 뻔뻔하긴.
나는 강풍 속에서 대충 웃어 보였다. 지금이라면 형 노릇 이상의 것도 내겐 가능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말을 맺기 전에 느닷없이 어깨 위에 무언가가 덮였다. 도톰한 남색 니트 카디건이었다. 흠칫 놀라 움츠러든 어깨에서 카디건이 떨어질까 다독이는 손을 엄마의 시선이 집요하게 좇았다. 손의 주인을 나보다 먼저 알아챈 엄마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는다.
“추워, 형.”
다정한 목소리가 귓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면 어떡해.”
어깨를 스치듯 한 가벼운 접촉이 이 순간 지독히 유의미하단 사실을 나비는 알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그잔을 쥔 엄마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점점 하얗게 물들어 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선호는, 제가 잘 돌볼게요.”
어렵사리 말을 마친 나에게 그 이상 엄마의 반응을 살필 여유는 부족했다. 동생을 끌어안지 않으려 애써야 했고 도망치는 냄새를 따라 옷깃을 당겨 코를 묻기도 바빴다.
동생이 덮어 준 카디건에서 섬유 유연제 냄새와 동생의 냄새, 그리고 아주 흐리게 그리운 냄새가 났다. 금세 바람에 흩어지는 냄새를 사로잡으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 미미하게 꼬리가 잡힌 냄새는 분명 나비의 냄새였다. 오래간만에 맡는 향에 반사적으로 혀 밑에 미지근한 침이 고였다.
“추운데 이만 들어가세요.”
동생이 엄마를 안으로 유도했다. 머그잔 속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커피가 넘칠 듯 찰랑거린다.
“……그래. 얘기 나누다 들어와.”
동생의 권유에 못 이긴 엄마가 거실로 돌아갔다. 빈자리를 동생이 말없이 대신했다. 바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낮은 파도가 절벽에 두어 번 부딪혔다. 등 뒤로 고개를 돌려 아무도 없는 거실을 확인하고 동생의 곁에 한 발 붙어 섰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싶은 욕구를 자근자근 밟아 눌렀다. 그러나 본심이 튀어 나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잠시간 떨어져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한 평화를 가져왔다. 서로만을 마주하고 있을 땐 맛보지 못한 평화. 덕분에 나비와 나란히 바다도 볼 수 있게 됐고.
힐끔 본 동생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마저도 평화로운 침묵이었다. 긴장했던 허리를 숙이고 팔꿈치를 난간에 기댔다. 단둘이었다면 손을 잡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근데 형.”
동생이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응.”
“가방에 돈은 뭐야?”
그새 열어 본 건가.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곤 농담하듯 가볍게 웃었다.
“누가 열어 봐도 된댔어.”
정말이지 나비는 내게 방심할 틈을 안 준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지긋한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다. 고개를 돌리자 나비가 아닌 심각한 표정을 한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좀 불공평하네. 너만 보고.”
나도 네가 보고 싶은데.
“전에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는 거면 나한테 말해 줘. 내가 도와줄게.”
“돈다발 정도로 뭐 이렇게 심각해. 시체도 아닌데.”
“……형.”
저에게 의지하란 말이 기특했다. 그 말을 동생이 아니라 애인으로서 해 줬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선호야. 너는.”
작은 불만을 담아 일부러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나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흰 눈가가 움찔한다.
“내 가방까지 열어 봤으면.”
어쩔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웃음까지 숨기고 싶진 않았다. 상황이 썩 유쾌했다.
“내 옷을 가져오지 굳이 네 옷을 가져왔어?”
은근슬쩍 묻혀 놓은 냄새를 정말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내가 너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잘 알면서.
동생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답을 다 들은 것 같았다. 그때까지 어깨에 걸쳐만 있던 카디건에 보란 듯 팔을 꿰어 넣어 주었다. 바람에 흩어져 나비의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아도 남색 카디건에는 다른 것들이 덕지덕지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장 형사의 옷을 입고 버젓이 나타난 나에 대한 원망이라든가, 아니면 아직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 없는 나비의 비밀스러운 마음 같은 게.
“고마워. 따뜻하다.”
조심스럽게 난간 위에 올려놓은 동생의 손끝에 내 손끝을 맞췄다. 계절에 맞지 않는 정전기가 튀었다. 건드리면 오므라드는 잎사귀처럼 손가락을 말아 쥔 동생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손, 대지 말라며.”
“……네가 언제 내 말을 들었다고.”
내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헷갈리기라도 한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혼란스럽다. 살살 바람에 흔들리는 정수리가 쓰다듬기 좋게 앞으로 기울어 있어서 손을 댈까 고민하는 사이, 테라스 문이 열리고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슬며시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니. 비가 올 것 같은데.”
엄마의 말대로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검은 먹구름이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축 처진 게 정말 금방이라도 비를 뿌려 댈 기세였다.
“그만 들어가자.”
동생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순순히 잡혀 오는 서늘한 무게감에 별안간 끔찍이 목이 메었다. 벌써 나비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거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엄마는 동생에게 달라붙었다.
“몸이 왜 이렇게 차니.”
소파 위에 있던 두툼한 담요를 펼쳐 살뜰하게 동생의 무릎에 올려 준다. 맞은편 일 인용 소파에 앉은 나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엄마가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살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동생과 엄마의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자세히 본 동생에게서 새삼스럽게 나와 두 살 터울인 나이가 느껴졌다. 이십 대 후반에도 병색을 다 털어 내지 못했는지 다 자란 덩치에 비해 어딘가 연약함이 묻어나는 인상. 거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르는 새에 처지고 마는 내 입꼬리와 다르게 늘 치켜 올라간 입매는 가만히 있어도 웃는 낯을 만들어 냈다. 동생에 대한 묵은 감정이 사라진 탓일까,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그 간극이 불현듯이 확 다가왔다.
그러자 문득 동생에 대한 엄마의 집착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사람의 피가 흐르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냉정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정체 모를 여자에게서 낳아 온 나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닮은 어리고 나약한 아이를 지키려고 했던 엄마. 엄마는 그런 본능적인 이유로 날을 세우고 발버둥을 친 것이다.
지키고자 하는 존재가 생긴 지금, 엄마가 내게 했던 행동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더한 짓을 하지 않았나. 끝내 엄마는 나비를 지키려는 내 손에 아끼는 자식을 잃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 내가 혐오하고 나를 혐오하던 그것을 나비는 내게 필요한 것이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라고 분노했지만, 지금은 왠지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엄마와 동생처럼 가족이라는 질기고 맹목적인 관계가 그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네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해도,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어 바로 앉았다. 동생은 내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나를 주시했다.
“엄마. 드릴 말이 있어요.”
긴장한 시선들이 내게 집중되었다. 동생의 무릎 위에 놓인 엄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작은 보석이 박힌 은색 링은 사랑하지 않는 이들까지도 묶어 버리는 공공연한 맹세이자 암묵적 구속의 증거였으며, 나비가 모르는 ‘둘’이었다. 피로 이어진 관계에 기댈 수 없는 내가 그만한 관계를 얻을 차선책.
내게 가족을 만들어 줄 또 다른 방법을 나비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저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생겼어요.”
갑작스러운 선언에 엄마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대며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찾아든 정적 속에서 나는 동생을 마주 보았다. 동생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나비와 같은 까만 눈동자가 딱딱히 굳어 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이 들은 말을 되감아 보는 듯하던 동생이 마지막 숨을 내뱉듯 힘겹게 되물었다.
“결혼……?”
그 목소리가 짜릿하리만치 선명하게 귓속에 박혔다. 자신을 향한 프러포즈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비의 표정이 온통 동요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정말 잘됐다, 선우야. 엄마한테도 소개해 줄 거지?”
한 박자 늦게 반색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내 시야는 버려졌다는 착각에 빠진 상대에게로 좁혀졌다.
“네. 당연하죠. 너한테도 꼭 말해 주고 싶었어.”
뻔뻔스럽게 미소 짓던 나비의 가면이 마침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드러난 민낯은 가슴이 뿌듯해질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축하한단 인사치레조차 건네지 못하는 동생의 얼굴 위로 쉬이 가여운 나비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헤집어졌던 아랫배가 들끓으며 코로 떨리는 숨이 빠져나간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기라도 하는지 나비의 눈가가 조금씩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파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선우 덕분에 벌써 며느리가 생기는 건가?”
안도감 어린 미소를 띤 엄마가 동생의 무릎을 부드럽게 쥐었다.
“아, 선호한테는 형수겠네.”
동생은 명백히 상처받은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축하한다고 하려나. 아니면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보려나. 결혼하지 말라며 매달리는 모습도 보기 좋을 것 같았다. 과연 저 얼굴로 무슨 말을 할지 기대감이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다.
그런데 물기 어린 눈매는 점점 모서리가 깎여 나가더니 날붙이처럼 단단해졌다.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완전한 무표정을 마주하고 있었다.
“왜 거짓말을 해. ……형.”
낮은 목소리. 뒤에 덧붙인 호칭은 무의미했다. 뒷덜미에 솜털이 곤두섰다.
“그런 거 없으면서.”
검은 눈이 내 반응을 관찰하다가 무언갈 확신한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비껴 내고 말았다. 동생의 무릎 위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엄마의 손이 흠칫 물러섰다.
“선호야……. 얘가 무슨 그런 말을.”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자세한 얘기는 천천히 드릴게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선뜩한 시선으로부터 도망쳤다. 급하게 방문을 닫고 잠깐 사이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억지로 침을 넘겼다.
씨발. 그런 눈으로 얌전히 동생 행세를 하며 살겠다고?
기가 찼다. 뒷덜미를 문질러 남은 소름을 털어 낸 나는 문 옆에 놓인 캐리어를 열어 돈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열을 식힐 겸 방에 딸린 발코니로 나갔다. 난간에 기대 바닷바람을 쐬었지만, 열이 식기는커녕 마음만 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해가 지길 바랐다. 해만 떨어지면 가로등도 없는 이 근방은 그야말로 암흑에 파묻힐 것이다. 절벽 아래로 시체 한두 구 정도 내던지는 짓쯤은 충분히 가려지고도 남을 만큼.
오래 묵은 피로함에 눈을 감고 남색 카디건 소매에 입술을 묻었다.
“……나비야.”
바로 곁에 있는데 볼 수도, 부를 수도 없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전원을 꺼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켰다. 한참 전 장 형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는 방금 온 것이었다. 나는 다급히 전원을 껐다.
장 형사가 나를 찾고 있다.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마찬가지겠지. 잊고 있던 현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어디선가 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곧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형체가 없음에도 선명히 느껴지는 불길함이 어느덧 주변을 포위한 채 시간이 많지 않음을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누구야?”
인기척에 놀라서 돌아보니 동생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무표정한 동생이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연달아 물었다.
“전화 중이었어?”
동생은 내가 손에 든 핸드폰을 눈짓했다. 나는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피해 방 안으로 들어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결혼이라니 누구랑?”
그 질문에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엄청…… 궁금했나 봐. 이렇게 바로 쫓아와서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동생과의 거리는 고작 여섯 걸음쯤이었다. 그 거리를 의식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들어올 땐 언제고 동생은 문턱을 넘어온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 그런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2층엔 우리 둘뿐이었고 나와 나비는 각자의 이유로 초조했다. 길이를 모르는 도화선 끝에 불을 붙인 것처럼 손바닥에 땀이 났다. 긴장을 감추고 구석에 놓인 싱글 침대에 걸터앉았다.
“거짓말이라니. 형이 결혼한다는데, 그게 싫어?”
“그만해. 거짓말인 거 다 안다고 했잖아.”
동생은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홱 찌푸렸다.
지금, 지금일까?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인내심이 활활 타오르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거짓말이면 좋겠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자 질 나쁜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며 동생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얇은 침묵을 긁었다.
“누군지 알려 줄까?”
아마도 이 유혹을 거절하긴 어려울 것이다. 고집스레 꾹 다문 턱 근육이 불거진다. 서서히 참담함에 젖어 가는 얼굴을 유쾌한 기분으로 올려다보며 나는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가까이 와 봐.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 줄게.”
소리 없는 발걸음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두 걸음을 남기고 멈췄다.
“뭐 해. 더 와. 비밀이니까.”
이제 한 걸음. 예리한 칼날이 턱 끝을 노리는 것만 같은 숨 막히는 교착 상태가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
말없이 바라만 보자 알아서 무릎이 스칠 만큼 거리를 좁힌다. 날 내려다보던 동생의 혀가 마른 입술을 가볍게 적신다. 붉게 젖은 틈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말….”
나는 예고 없이 동생의 뒷덜미를 감아 당겼다. 놀라 허둥대는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고 동시에 다른 손은 매트리스에 꽂혔다. 두 사람분의 무게에 눌린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솜털이 바짝 일어난 귓가에 거침없이 입술을 댔다. 그리고 몸서리치지 않곤 못 배기게끔 달게 속삭였다.
“나비야.”
쫙 펴져 있던 손바닥이 와락 시트를 그러쥔다. 다독이듯 푸른 핏줄이 돋아난 손등을 가만히 쓸었다. 극명한 반응에 입꼬리가 치솟았다.
“나비라고. 알겠어?”
그렇게 말하곤 헛숨을 삼켰다. 팽팽히 당겨진 목덜미에서 익숙한 체취가 풍긴 탓이다. 나도 모르게 쓰다듬던 손목을 강하게 감아쥐자 나비는 절제하지 못하고 냄새를 흘려 댔다.
너라니까 좋아? 만족해? 그럼 그만 버티고 나한테 돌아와, 나비야.
간신히 버티던 인내심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동생의 몸이라도 상관없었다. 이대로 목덜미를 비틀어 입술을 부딪치려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파열음을 내며 깨진 무언가가 도르륵 굴러와 발끝에 닿았다. 잔뜩 열이 올라 터질 것 같은 눈을 들자,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사색이 된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곧바로 벌떡 몸을 일으킨 동생에게 시야가 가려졌다.
“안 다치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동생이 비켜섰을 때, 다시 나타난 엄마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깨진 접시 파편과 조각난 사과를 줍고 있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 것으로 폭발 직전이던 열기를 억눌렀다.
“으응. 괜찮아. 손이, 미끄러졌네.”
가는 손가락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떨렸다. 엄마는 바닥에서 고개조차 들지 않고 횡설수설했다.
“엄마 때문에 놀랐지. 미안해.”
“아니에요. 안 다치셔서 다행이에요.”
상황을 알고는 있는 건지 슬쩍 올려다본 나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시 시선을 옮기던 나는 날 곁눈질하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경기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새파랗게 질린 엄마를 보니 불현듯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나비가 보는 앞에서 예전처럼 내 목을 조르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계획이 조금 바뀌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을 테니 나쁘진 않을지도.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굴러온 파편을 주우려는데 가벼운 힘이 어깨를 잡아 제지한다.
“내가 치울게.”
허리를 숙인 동생이 재빠르게 내 발 앞에 깨진 조각을 주워 갔다.
“그냥 있어. 형은.”
형, 형. 꼬박꼬박 부르기만 하면 뭐 해? 끝까지 내 눈도 못 마주치면서.
엄마에게 가려는 동생의 손목을 낚아채 날 보게 만들었다. 난감함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
“고마워. 선호야.”
동생의 팔을 느릿하게 쓸었다. 입술을 깨문 동생이 내 팔을 떼어 내려 하며 귀엽게 속삭였다.
“이러지 마.”
나도 똑같이 속삭여 주었다.
“싫어?”
“…….”
동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달게 삼키며 동생을 놔주었다.
동생이 가리고 선 너머로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육감으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의 껍데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시뻘건 눈을 한 채 속으로 악을 지르고 있을 엄마가.
∞ ∞ ∞
동생이 엄마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간 뒤 방에서 도주 계획을 세우던 내 귀에 돌연 텅, 하는 충격음이 울렸다. 놀라 눈을 뜬 나는 왜인지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깊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시간을 확인하자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소스라쳐 일어나 보니 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사방이 캄캄했다. 급히 방에 불을 켜고 갑자기 들려온 소리의 정체를 더듬어 봤다.
“아. 설마.”
날 깨운 소음은 차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누가 왔나? 아니…… 누가 떠났나?
계획이 틀어질지도 모른단 걱정에 급히 방을 나가 1층으로 내려갔다. 낯선 공간은 온통 축축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자 고요한 거실은 빗소리만 가득했고 통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물 그림자가 온 사방에 흩뿌려져 줄줄 흘러내렸다.
“……엄마.”
내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검은 물살 위를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나비야……?”
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
밖에 주차된 차를 확인하려고 더듬더듬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붙잡은 건 어디선가 들려온 두런거리는 말소리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정면에 깊은 동굴 같은 복도가 뻗어 있었다. 소리는 거기서부터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기시감의 늪에 빠졌다. 푹, 푹 먹히는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확실히 해요.”
엄마의 목소리가 복도 안쪽의 문 너머에서 새어 나왔다. 거긴 낮부터 닫혀 있던 아버지의 방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 부부의 방이었으니 아버지와 엄마가 한방에 있는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임에도 불길함이 엄습했다. 나는 암살자처럼 조용히 문 옆 벽에 붙어 섰다.
“당신도 동의하는 거죠?”
엄마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무엇을?
빗소리마저도 멀어진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 뭔진 몰라도 본능적으로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의 침묵이 달가웠다. 그러나 아버지의 침묵이 한 번이라도 내 편이었던 적이 있었나.
“……그래요.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처럼 감정이 죄다 말라붙은 건조한 음성에 번뜩 아버지의 서재에서 보았던 사진이 머리를 스쳤다.
퀭한 눈으로 자신을 찍는 아버지를 응시하던 마른 여자. 카메라를 내던진 아버지가 그 여자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광경이 난폭하게 눈앞을 덮친다. 기분 나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생면부지인 생모의 죽음, 그건 내 안에 심어진 최초의 공포였다.
아니다. 그건 공포가 아니라 혐오다. 모든 게 어릴 때와는 달랐다. 지금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모의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들이 죽어 사라져 줘야만 나비가 내게 돌아올 테니까.
나비를 위해 기꺼이 피를 보기로 결심하며 돌아서는 순간.
끼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선우니?”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경련이 이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꾸역꾸역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부디 어둠이 내 살의를 숨겨 주길 바라며 뒤로 돌아 방에서 나온 엄마를 마주했다. 어둑한 시야를 대신 해 가장 먼저 느낀 건 비 냄새였다. 뒤늦게 어깨까지 내려오는 엄마의 머리가 젖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나갔던 건 엄마인가. 혼자서? 아버지와? 아니면 나비랑?
“응. 잠깐 마실 것 좀 사 왔어.”
엄마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손에 든 검은 봉지를 흔들었다. 액체가 담긴 병이 찰랑찰랑 소리를 낸다. 봉지 위로 와인 병의 길쭉한 입구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 날씨에 혼자서요?”
“나갈 땐 이렇게까지 쏟아지지 않았거든. 오래간만에 가족이 모였는데 축하주가 빠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지 뭐니.”
“정 그럼 저라도 부르시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처럼 빈틈없이 대답하던 엄마의 말이 끊어졌다. 눈을 깜빡인 엄마가 이내 푸스스 웃으며 나를 지나쳐 주방으로 가 불을 켰다. 그리고 비에 젖어 눅눅해진 카디건을 벗었다.
“너도 선호도 너무 곤히 자던걸. 선호는 아직 자니?”
“……잔다고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엄마가 큼직한 와인을 검은 봉지째로 하부 장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그래. 어젯밤에는 한숨도 못 자는 것 같더니 오늘은…….”
냉장고를 열어 저녁거리를 꺼내다가 갑자기 태엽이 다 풀려 버린 인형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오늘은 참 이상하게 잘 자네. 선우, 네 덕분인가 봐.”
거짓말처럼 들리진 않았으나 두 눈으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성싶었다.
“어디 가니?”
“좀 보려고요. 선호.”
젖은 머리카락을 흰 뺨에 가닥가닥 붙인 엄마가 싱긋 웃었다.
“애도 아니고 잘 자고 있겠지. 내가 너한테 너무 부담을 준 것 같네. 그러지 말고 엄마 좀 도와줄래?”
엄마가 냉장고에서 꺼낸 건 얄궂게도 새빨간 고깃덩어리였다. 엄마는 식구 머릿수대로 꺼낸 고기를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줄지어 늘어놓았다.
“스테이크네요.”
“고기 구울 줄 알지?”
잠시 조용한 2층을 올려다보다가 마지못해 아일랜드 테이블 옆에 섰다. 나비보다도 아버지와 엄마가 돌발 행동을 벌일 확률이 높았다.
생고기가 든 팩을 뜯자 주방은 금세 연한 피비린내로 채워졌다. 등 뒤에서 곁들일 채소를 다듬는 엄마의 칼질 소리가 정적을 뚝뚝 끊었다. 나는 2층과 이어진 계단을 힐끔거렸다.
“선호는 언제부터 자는 거예요? 깨워야 하지 않을까요.”
칼질이 멎었다.
“참…… 신기해.”
갑자기 딴소리였다.
“뭐가요?”
“어떻게 너랑 만나는 걸 그렇게 완벽히 숨길 수 있었을까? 선호는 거짓말을 잘 못 하는데.”
“거짓말을 못 해요?”
동생이 한 거짓말의 최대 피해자가 바로 나였다. 내가 대놓고 빈정거리자 엄마의 대답 대신 서걱거리는 칼질 소리가 이어졌다.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접시에 옮겨 담은 생고기를 가지고 가스레인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칼을 쥔 엄마의 바로 옆자리였다.
엄마. 아까 말하려던 제 결혼 상대, 동생이에요. 그게 사실 진짜 동생은 제가 죽였어요. 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나비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달리 방법이 없었거든요. 엄마도 이해하죠? 그래서 말인데 지금 동생은 엄마 아들이 아니라 내 나비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뺏겼다고 그렇게 화낼 거 없어요.
몇 마디만 하면 엄마의 칼질을 내게로 향하게 할 수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엄마는 기다렸다는 양 나를 저주하고 난도질하겠지. 주방은 금방 피바다가 될 테고. 나비가 그 광경을 본다면……. 이 여자를 가만두지 않을 텐데.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그때였다. 돌연 어깨를 미는 부드러운 힘에 몸이 밀려났다.
“이리 줘. 내가 할게.”
엄마와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동생이 납작한 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밸브를 돌려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고 달궈진 팬에 내 손에서 뺏어 간 고기를 능숙하게 구웠다.
치익.
짐승의 살점이 익는 소리에 나는 피비린내 가득한 망상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조곤조곤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냥 있으라니까. 모처럼인데 여기서라도 내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돼?”
어느샌가 칼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넋을 놓고 동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치켜든 눈썹과 강박적으로 끝이 올라간 입꼬리가 석고로 만든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엄마가 선우한테 도와 달라고 했어.”
동사한 시체 같은 얼굴에서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모습이 가히 호러에 가까웠는데 스테이크를 뒤집는 동생은 그런 엄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형은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절 깨우셨어야죠.”
“……그러게, 엄마가 미처 생각 못 했네. 근데, 아들. ……요리는 언제 배웠어?”
엄마의 질문에 동생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나를 보았다.
“형이 가르쳐 줬어요.”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눈을 마주치고 설핏 눈웃음까지 치는 걸 보니 아까 내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듯도 하고.
“그래?”
뻣뻣이 고개를 돌린 엄마는 다시 채소를 썰었다. 탁, 탁, 탁.
“그렇구나. 형이…… 가르쳐 줬구나.”
허공을 보며 엄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봐요. 엄마. 동생 때문에 나비가 이제 거짓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나는 뒤로 물러나며 조용히 조소를 머금었다.
“선우야. 가서 아버지 좀 모셔 올래?”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나 갈 즈음 잔에 와인을 따르던 엄마가 굳이 나를 집어 부탁했다. 설거지를 마친 동생이 수건에 손을 닦으며 끼어들었다.
“제가 갈게요.”
“형도 아버지랑 친해질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니? 안 그래?”
뻔히 보이는 속셈을 모른 척하고 나비에게 가만히 있으라 눈짓을 보냈다.
“가서 모셔 올게요.”
복도 끝, 아버지가 있는 방문 앞에 서자 긴장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나는 노크 소리가 빗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신경 써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날 뿐,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울컥 솟구치는 불만과 여기까지 온 이상 눈치 볼 필요 없다는 생각에 나는 문고리를 잡아 비틀 듯 돌렸다. 힘껏 연 문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밀렸고 내 상체 절반이 방 안으로 기울었다.
기세 좋게 문을 연 나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무방비한 모습에 당황했다. 아버지는 방금 씻고 나왔는지 내게 등을 돌린 채 셔츠를 갈아입는 중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벌어진 어깨와 평생 구부러질 줄 모르던 굵직한 허리는 아버지의 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형상화한 모양새였다.
그런데 옆구리 한쪽에 기묘한 흉터가 강렬하게 눈길을 끌었다. 커다란 약점처럼 보이는 그것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내 시선이 닿기 무섭게 아버지가 셔츠를 끌어 올렸다.
“아직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는데요.”
아버지는 나를 엄마로 오인했는지 묘하게 기분 나쁘게 들리곤 하는 높임말을 썼다.
“죄송해요. 식사하시라고 왔어요.”
그제야 날 알아챈 아버지가 조금 놀란 얼굴로 돌아본다. 당황한 기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가마.”
문을 닫으려고 걸음을 물릴 때였다.
“너.”
도저히 아들을 부르는 소리라고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부름에도 나는 반응했다.
“네.”
“여기까지 불러낼 필요는 없지 않으냐.”
“……네?”
“……됐다. 나가 봐.”
셔츠 단추를 채우던 아버지는 이내 성의 없이 손을 내저어 나를 쫓아냈다. 문을 닫고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가면서 닫힌 문을 힐끔거렸다. 아버지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더 꺼림칙했다.
아버지는 모진 말 한마디 없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알려 준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아까 확인할 게 있다고 했던가. 그건 나와 관련된 걸까? 아니면 동생과?
무엇보다도 옆구리의 상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엄마도, 동생도 내게 말해 준 적 없는 것이었다. 반원 형태로 옆구리 전체를 집어삼킨 듯한 기괴한 흉터는 지금껏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하기에 너무도 큰 상처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가 그토록 크게 다친 적은 없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생긴 것이거나, 혹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생긴 상처라면 몰라도…….
식탁으로 돌아오니 늘 동생의 옆이었던 내 자리를 엄마가 차지하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동생의 맞은편에 앉았고 이어 나타난 아버지가 상석에 앉았다. 가뜩이나 넓은 6인용 식탁의 균형이 맞질 않았다.
그렇게 기울어진 채로 마침내 가족이 아닌 가족이 모두 한 공간에 모였다. 꺼내 보면 썩은 내가 날 게 분명한 각자의 본심을 깊은 곳에 감추고서.
식사 분위기는 동반 자살을 앞둔 가족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냉랭했다. 숨을 쉴 때마다 산소가 아니라 미세한 긴장감이 빨려 들어와 폐를 채웠다. 나는 미동도 없이 앉아 제사상 같은 식탁 위를 묵묵히 바라봤다.
각자의 앞에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와 와인이 든 잔이 똑같이 놓여 있었다. 시선이 하얀 접시 옆에 누워 있는 날붙이로 이끌렸다. 작은 톱니가 난 나이프의 칼날은 뭉뚝했고 둥근 손잡이는 미끄러워 보였다.
머릿속에는 그것을 실수 없이 손에 쥐는 장면만이 되풀이되었다. 선뜻 잡아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손에 쥐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커지고 있었다. 조급함이 망설임을 집어삼키기 직전, 엄마의 정돈된 목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갈랐다.
“주님. 오늘 이 자리에 제 가족이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기도를 시작한 엄마는 눈을 감고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으로 목걸이에 달린 십자가를 쥐었다.
“주님의 축복이 저희에게 닿게 해 주시고.”
달그락,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아버지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나눠 들었다. 느슨히 식기를 든 손이며 무감하게 고기를 향한 시선에 누군가를 찌를 의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죄악을 두려워할 줄 알게 해 주시고.”
기도에 빠진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날 찔러 죽일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내 앞에서 태평히 눈을 감는 짓은 못 할 테니. 긴장을 늦추고 나도 식기를 들었지만, 이 상황에 식욕이 날 리 만무했다.
“악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킬 힘과 용기를 주시길 믿습니다.”
의미 모를 기도가 길어졌다. 동생은 골몰한 표정으로 제 몫의 고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끝으로 툭 맞은편에 앉은 동생의 발목을 건드렸다. 놀란 동생이 고개를 치켜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먹지 마.’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아멘.”
기도가 끝나자 남은 것은 주님의 은총 따위가 아니라 끼긱거리며 고기를 써는 아버지의 칼질 소리뿐이었다.
“미안. 기다렸니?”
엄마는 먼저 식사를 시작한 아버지를 전혀 개의치 않고 날 보며 웃었다.
“선우야.”
붉은 와인이 든 잔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엄마랑 짠 할까? 네 결혼 소식도 축하할 겸.”
더없이 살가운 투였다. 아까 본 일을 추궁하지 않은 건 아무래도 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탓인가 싶었다. 하기야 벗고 뒹구는 장면을 보지 않고서야 상식적으로 쉽게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엄마의 등장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니었지만.
힐끔 본 동생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눈을 내리깐다. 생각이 빤히 보였다. 결혼 얘기에 아까 일을 생각하고 있겠지.
“좋아요.”
기분 좋게 웃으며 쥐고만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두고 잔을 들었다. 유리잔을 맞붙이자 어울리지도 않게 경쾌하고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도주를 앞두고 술은 위험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내가 벌일 짓은 조금 달랐다. 피 냄새며 비명을 견뎌야 할 테니 약간의 취기가 일을 좀 더 쉽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진저리나도록 단내를 풍기는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미지근한 줄 알았던 액체가 의외로 목구멍을 후끈하게 덥히며 지나갔다. 생각보다 도수가 있었는지 시야가 부옇게 일그러졌다. 초점을 맞추려고 미간을 좁혔다. 상석에 기둥처럼 박혀 있는 아버지와 잔을 기울이는 엄마를 차례로 훑었다.
“형. 괜찮아?”
그리고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동생이 온전해진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라 “응.” 하고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렴한 거라 그런지 독하다. 그치?”
잔을 내려놓은 엄마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조금.”
“선호는 마시면 안 되겠다.”
그러고는 동생의 잔을 식탁 끝으로 치웠다. 그 말엔 동의하는 바였다. 더불어 저 익힌 고깃덩이도 치워 줬으면 했다. 저걸 먹고 몰래 숨어서 토악질할 걸 알면서 나비가 태연히 먹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은 도저히 못 할 짓이었다.
마땅한 핑곗거리를 찾으려 머리를 굴리는데 별안간 엄마가 “아.” 하고 신음하며 이마를 짚었다. 미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주름이 잡혔다.
“왜 그러세요?”
내가 물었다.
“두통약을 깜박했네. 아까 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사 온다는 걸 잊어버렸어.”
엄마의 어깨 너머로 부엌 쪽 창문이 보였다. 검은 유리창에 곧은 물줄기들이 줄기차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지붕에서 폭포라도 쏟아지는 기세였다. 엄마가 동생의 어깨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선호야. 미안한데 엄마 두통약 좀 사다 줄래? 차로 조금만 나가면 돼.”
“지금요?”
되물은 건 동생이 아니라 나였다. 못마땅해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밖의 날씨를 모르지 않을 텐데 엄마는 고집스러웠다.
“비가 오면 심해져서 그래. 더 아프기 전에 먹어야 효과가 있거든.”
“그래도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굳이 나가야겠어요? 여기 비치된 비상약 같은 건 찾아보셨어요?”
곧 죽을 사람에게 두통약 따위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런 헛수고를 나비에게 시키기도 싫었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엄마는 퉁명스러운 내 대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은 도리어 평온했다.
“선호 비 맞는 게 그렇게 싫으면……. 네가 나갔다가 올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이상 말이 오가지는 않았으나 겉으론 보이지 않는 불편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거리가 얼마나 돼요?”
팽팽한 침묵을 깨며 동생이 일어섰다. 나는 동생을 따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엄마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음… 한 10분?”
“어디 가. 앉아.”
내 명령조에 멈칫한 동생이 눈을 접어 웃으며 살살거렸다.
“괜찮아, 형. 그렇게 멀지도 않잖아.”
“그래. 여기 차 키. 고마워, 아들.”
마치 기다렸다는 양 차 키를 꺼내는 엄마에게서 키를 건네받은 동생이 식탁을 돌아 내 등 뒤를 지나갔다.
“금방 갔다 올게.”
손바닥이 날개 뼈 사이를 가볍게 스쳤다. 화내지 말고 있어 달라는 무언의 표시를 몸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척추를 따라 내려가는 간지러운 감각에 등허리가 꼿꼿해졌다.
씨발. 분하지만 효과가 없을 수 없는 맞춤 처방이었다.
나비는 기어코 집 밖으로 나갔다. 세찬 빗소리에 섞여 시동을 건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비로선 괜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애교까지 떨어 가며 나갔다 하더라도 귀중한 아들을 고작 두통약 때문에 빗속으로 내보내는 엄마의 행동은 영 미심쩍었다.
설마 나와 동생 사이를 의심해 시험하려는 건가?
고민하는 사이 동생이 나간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걱거리는 적막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어색함과는 달랐다.
탁,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 아버지의 행동에 적막이 깨지고, 순간적으로 나는 거기까지가 전부 그들이 의도한 일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아버지의 두 눈이 오래간만에 나를 향했다. 그렇다면 저 질문 역시 나를 향한 것이겠으나 애석하게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방 안에서 속닥거리며 작당한 일이 뭔지, 동생을 이 빗속에 내보내 가면서까지 내게서 얻으려는 게 뭔지.
날 무릎 꿇리던 목소리가 더는 두렵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게 아버지는 조각낸 접시 위 고깃덩이와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존재였으니까.
“원하는 거라뇨. 저희 다 같은 마음으로 모인 거 아니었나요.”
포크로 고깃덩이를 들쑤시며 한껏 미소 짓자 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히 말을 이었다.
“네가 진심이 아니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뭐 때문에 갑자기 이런 짓거릴 하는지 말해 봐.”
나처럼 아버지도 처음부터 날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엄마는?
엄마를 쳐다봤다. 거기엔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지금껏 엄마인 척하던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지독히 싸늘했다.
“이 얘기 하시려고 비가 쏟아지는데 선호를 굳이 내보냈어요? 왜 그러셨어요. 가족 중대사인데 같이 들어야지.”
독기 어린 눈이 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본다. 젖어 구불거리는 머리가 흰 뺨에 가닥가닥 엉겨 꼭 누구라도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혈안이 된 물귀신 같았다.
“넌 우리 가족이 아니야.”
이때다 싶은 엄마의 태도 전환에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원하는 게 돈이냐? 뭐든 들어줄 테니 지금 말해.”
돈……. 겨우 그 정도의 이유를 내게 갖다 붙이는 아버지의 말에 생각보다 입이 썼다.
그깟 걸로 당신들과의 관계를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겨우 돈 몇 푼으로.
모든 소리가 사라진 공간에 어디선가 틈을 비집고 비바람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웅웅. 귀에 익은 소리다. 기껏 떼어 놓고 온 것들이 나를 찾는 소리였다. 고막에 달라붙는 기분 나쁜 소음을 떼어 내려 귓바퀴를 문질러 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아버지야말로 저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
환청을 떨치려 침묵을 깼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나비가 들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아무리 순진해 빠진 나비라도 깨달았을 거다. 네가 암만 노력해 봤자 이들은 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한번 비틀린 인간은 네 생각만큼 쉽게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양 마세요. 제 얼굴 보고 말씀하실 마지막 기횐데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떤 전조도 없이 모든 빛이 꺼졌다. 갑작스러운 정전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암흑이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다. 예민해진 청각이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엄마가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 아버지의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 비바람이 거세게 유리창을 뒤흔드는 소리. 그리고 내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들렸다.
빛 한 점 없이도 나는 어렵지 않게 은색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아버지 옆구리에 있는 그 상처.”
언제부턴가 괴물을 닮아 가는 내 시야는 어둠에 빠르게 적응했다. 곧 푸르스름한 형체들이 칠흑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날 낳은 여자가 만든 거죠.”
“뭐……?”
그건 직감일 뿐이었으나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죽였어요? 아니면…… 죽이려다가 생긴 거예요?”
나는 끝내 깊은 곳에 잠겨 있던 공포의 실체를 끄집어내 마주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본 공포는 기억과 달리 볼품없었다. 날 위협할 만한 구석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하찮은 기생충에 불과했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둠 속에서 덫이라도 밟은 초식 동물처럼 엄마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숨겨 놓은 급소를 찔린 아버지의 얼굴은 생전 처음 경악에 질려 있었다. 비겁한 그들의 본성은 모든 허물을 내게 뒤집어씌우려 들 것이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죽여 묻어 버리고 싶은 죄의 부산물이었으니까.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하셨죠. 뭐든 들어주신다고.”
손안에서 둥근 손잡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세게 쥐었다. 그런데 문득 목 안쪽으로 수십 개의 다리를 가진 벌레가 기어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곤 참을 수 없이 잔기침이 터졌다.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서 명치 안쪽이 화르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크흑.”
배 속이 진창이 된 것 같았다. 끔찍한 작열감이 위장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울컥 무언가를 쏟아 냈다. 피 냄새가 끼치고 접시 위로 상한 노른자 같은 핏덩이가 퍼져 나갔다.
고꾸라진 시야에 빈 와인 잔이 비스듬히 걸쳐졌다. 네 개의 잔 중에 오직 내 것만 비어 있었다. 엄마 앞에 놓인 잔 역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걸쭉한 피를 토하며 나는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씨발. 어쩐지…… 맛이 더럽게 좋더라니.”
정전에도 훤하던 눈앞이 꺼졌다. 나이프마저 놓친 몸뚱이가 의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숨을 내쉴 때마다 식도와 기도가 지글지글 끓었다. 엄마가 빗속을 뚫고 구해 왔을 절절한 애정이 야금야금 내장을 좀먹는 중이었다.
끼기긱.
누군가의 의자가 밀렸다. 부산하게 접시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앉아서 뭐 해요? 선호 오기 전에 치워야죠!”
“본다고 어쩌겠어요. 그 녀석한테 제 부모를 신고할 만한 배포가 있을 것 같아요?”
“이미 다 얘기 끝났잖아요. 이 일은 우리 둘만의 일이에요. 선호랑은 상관없어요! 선호는 아무것도 몰라야 해요. 절대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고요!”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발이 뱀처럼 쉭쉭거리며 다가왔다. 바닥에 붙어 의지와 상관없이 잘게 경련하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끙끙 용을 썼다. 오로지 희미한 의식만이 몸속이 불타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뿐, 내 몸은 이미 죽어 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빨리 와서 도와요!”
가느다란 팔이 내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와 나를 반쯤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몸이 세워지자 울컥 위장에 고여 있던 피가 역류했다. 입속에 물컹한 덩어리가 고였다. 녹아내린 내장 같았다. 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엄마의 걸음은 느리고 힘겨웠다. 기어코 내 몸은 다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왜 보고만 있는 거예요! 왜!”
처참한 절규가 고막을 때리며 꺼져 가던 감각을 깨웠다.
“우욱.”
배 속에서 위장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요동치자 입에서 묽은 액체가 한 차례 쏟아졌다. 피 냄새에 섞여 단내가 났다. 의심 없이 삼킨 와인이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원인을 뱉어 낸 몸이 차츰 복구될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닫혔던 시야가 침침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둥글게 퍼진 엄마의 흰 옷자락에 내 피가 번져 가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팔에 힘을 주고 바닥을 짚었다. 까드득. 꽉 문 잇새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어, 어떻게…….”
솜털에 맺힌 공포가 하나하나 전부 느껴질 만큼 엄마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벌떡 일어난 엄마가 멀어졌다. 벗겨진 실내화 한 짝이 내 앞에 나뒹굴었다.
“너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을 수 있어……?”
일어나려고 용을 썼으나 연약한 내장에 상처를 입은 몸은 평소에 비해 회복이 더뎠다. 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뺨을 대고 쓰러졌다. 만취한 때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정당방위라고 누군가 그랬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흐려지려는 의식 사이로 노이즈가 꼈다. 거센 빗소리였다. 차고 습한 공기가 등으로 밀려들었다. 소리가 들리는 뒤쪽을 돌아보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었다. 피에 젖은 옷자락을 뒤로 숨기는 엄마의 모습만 보였다. 하얗게 뜬 엄마의 얼굴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기괴한 표정이었다.
“서, 선호야. 왜 벌써…….”
철컥.
문이 닫히고 짓쳐들어오던 빗소리도 그쳤다.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추적추적했다. 마룻바닥에 찌걱찌걱 물을 찍으며 다가오던 질퍽한 소리가 등 뒤에서 멈췄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위해 고통받고 있는지, 그 모든 이유가 떠올랐다.
“엄마가, 엄마가 다 설명해 줄게. 네가 이해할 수 있게. 응?”
느릿하게 돌려진 몸이 흠뻑 젖은 품에 안겼다. 차가운 손이 턱에 흐른 액체를 쓸어 입가로 가져간다. 안 돼. 갈라져 제 역할을 못 하는 성대를 포기하고 기를 써 고개를 저었다. 남은 손이 괜찮다는 듯 어깨를 감싸 안는다.
“엄마는…… 이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당신이 인간이라면.”
“선호 너도 알고 있잖니. 걔가 내 아들이 아니란 거. 나한테 자식은 너 하나뿐이야.”
“다시는 이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겠다고 당신 입으로 말한 건 잊었어?”
나와 엄마를 부르는 호칭이 변했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확실히 들었다. 나를 감싼 손에 힘이 실린다. 눈앞의 인간들에게서 나를 지키려는 듯이.
“왜…… 너 왜 그래! 정신 차려. 선호야, 이선호! 더는! 더는 못 참아! 그 여자의 더러운 피가 남편도 모자라서 내 아들까지 망치게 둘 것 같아?! 선호야……. 엄마가 말하고 또 말했잖아. 쟨 악마의 자식이라고! 엮이면 안 된다고!”
왈칵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나를 보고도 숨소리 한번 변하지 않던 엄마가 새된 비명을 터뜨렸다. 내 귀를 덮는 손바닥에 가로막혀 끝에 절규는 먹먹하게 튕겨 나갔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아. 넌 아무 죄도 없어. 그 더러운 악마가 순진한 널 유혹한 거야. 그렇지?”
괴물이든 악마든, 설명하기 힘든 끈질긴 생명력이 죽음의 문턱까지 간 내 뒷덜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헐어 버린 내벽의 통증이 가라앉자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은 엄마가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어둠에 묻혀 흰옷을 입고 봉두난발을 한 엄마는 뭐에 쓰이기라도 한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몸을 굽실거렸다.
“선호야. 우리 아들. 엄마한테 와. 제발…… 제발 그놈한테서 떨어져!”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장면에 눈을 감아 버렸다. 귀와 뺨을 넓게 덮어 주는 손이 비에 젖은 탓에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다 잊고 마비된 것 같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만 집중했다. 간신히 팔을 들어 올려 차가운 손등을 겹쳐 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내 손을 억센 힘이 꽉 쥐어 잡는다.
“미안해요.”
내 손을 그러쥔 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괜찮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을 뜨려 하자 내 손을 놓은 손바닥이 이번엔 두 눈을 가렸다.
“내가 또 틀렸나 봐요.”
꾸득, 꾸지직. 우드득, 드득.
뼈와 근육이 모조리 부러지고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것이 몸을 해체하고 재정립하는 소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을 가린 손이 천천히 거둬진다. 드디어 나비의 방황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떠 내 품으로 돌아온 나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