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2)

위장
Camouflage

어디선가 희미하게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나는 남자와 처음 만난 아파트 공동 현관에 서 있었다. 홀로 우두커니 서서 바람조차 불지 않는 적막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빼곡히 주차된 차들과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한여름의 나무들이 어둠에 파묻혀 어른어른한 실루엣만을 드러냈다.

‘어두워…….’

이 시간쯤이면 침침하게 빛나야 할 단지 내 가로등이 모두 죽은 듯 꺼져 있었다. 건너편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켜진 집이 하나도 없다. 다른 동도 마찬가지였다. 다닥다닥 뚫린 수많은 창문이 하나같이 시커멓다. 오싹한 기분을 털어 내려 천장의 센서 등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반응이 없다.

그때 칭얼거림을 닮은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까보다 가깝다. 허공에 흔들던 손을 멈추고 홱 화단을 돌아보았다. 어둠에 젖은 나무들은 마치 사진처럼 이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시간이 멈춘 듯한 사방을 살폈다.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듯 울음소리가 커진다. 소리는 왼쪽, 오른쪽, 위, 아래 할 것 없이 중구난방으로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날 둘러싼 풍경은 그대로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고양이가 아니야.’

아기의 울음소리라는 걸 인정하자 ‘그것’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섬뜩함에 피부가 따가웠다. 당장 도망쳐야 했다. 황급히 돌아서서 닫혀 있는 아파트 현관문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어느새 가까워진 무형의 공포가 내 귓전에 대고 울어 댔다.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날 죽일 것 같아 무서웠다.

땀이 찬 손바닥이 미끄러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유리문에 바짝 붙어 섰다.

돌아보면 안 돼. 절대 돌아보면 안 돼…!

내 생각을 읽은 그것이 저를 봐 달라며 떼를 쓰고 악을 질렀다. 귀를 틀어막은 나는 미동도 없는 문에 대고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무도, 아무도 없어요?! 누가 무, 문 좀……!’

띵.

캄캄한 유리문 너머로 작은 숫자 두 개가 붉게 빛났다. <30> 엘리베이터였다. 유일하게 생명력을 지닌 붉은 숫자가 기적처럼 모양을 바꿨다.

<29>

.

.

.

<28>

나비다. 나비가 내 소리를 듣고 내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비야!’

내 외침과 동시에 그것이 뚝 울음을 그쳤다. 불길한 적막이 섬뜩하게 나를 덮쳤다. 무언가,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에 짓눌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겁에 질려 느리게 줄어드는 숫자에 온 신경을 다해 매달렸다.

<20>

.

.

.

<19>

‘빨리…… 제발 빨리 와 줘.’

남자가 문을 열고 나타나 나를 그것으로부터 구해 주기만을 기다리는데 별안간 미지근한 액체가 다리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줌을 지린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가는 하반신을 확인하려 숙인 고개가 삐걱거렸다. 바지 안쪽이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바지 밑단에 맺힌 액체가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신발 안쪽에 떨어진 얼룩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한쪽 발을 끌어 간격을 벌렸다. 농도 짙은 액체가 붉다.

‘……피?’

까르륵. 자지러지는 아기의 웃음소리에 맞춰 후드득 봇물이 터지듯 피가 쏟아졌다.

‘아… 아…….’

낯선 하혈에 배를 부여잡고 어쩔 줄 몰랐다. 바지가 흠뻑 젖고, 고인 피가 금세 발아래 시뻘건 카펫처럼 깔렸다. 이러다 내장까지 쏟아 낼 것만 같았다. 남자가 필요했다. 남자라면 날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

‘나비야……. 나비야! 나비야!’

쾅쾅쾅. 공포에 반쯤 미쳐 두 주먹으로 부서져라 유리문을 두드렸다. 거의 발악에 가까웠다.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주변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어느 순간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전한 적막.

‘마마.’

어눌한 옹알이가 누군가를 부른다. 속이 울렁거려 토악질하며 배를 감싸 쥐었다.

‘마, 어마.’

배를 부여잡은 손바닥 안쪽이 울컥 요동친다.

‘말도 안 돼.’

천천히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옷 아래 가려졌던 납작하고 평평한 복부가 드러났다.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꺄륵.’

숨바꼭질하듯 배꼽 옆이 불룩 솟아났다가 꺼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입에서 꺽꺽 막힌 비명이 연거푸 튀어나왔다. 그것이 당장이라도 배를 찢고 나올 것처럼 아무렇게나 뱃가죽을 들쑤신다. 도망칠 수 없다. 배 속에 그것이 있다. 내 배 속에……!

띵.

드디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가 나지막이 웃었다. 이어 “쓰읍.” 어린아이를 혼내는 입바람 소리를 냈다.

“엄마를 놀리면 못써.”

다정한 목소리에 비로소 숨이 터졌다. 시야로 환한 빛이 찔러 들었다. 절로 찌푸려지는 눈을 억지로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주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혼탁했다.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온 듯한 기분…….

복부에서 느껴지는 묘한 무게감에 시선을 내려 보니 내 배 위에 한쪽 귀를 대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묵직하게 배를 누르는 느낌이 어쩐지 거북했다.

“……뭐 해?”

내 물음에 남자는 허리를 세워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요.”

남자의 선명한 이목구비와 깨끗한 피부가 햇살을 받아 말갛게 빛났다. 왜인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팔꿈치를 대고 무거운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지금 몇 시야? 나 자는 동안 전화 온 건 없어? 아니면 누가 찾아오거나…….”

“우리뿐이었어요. 계속.”

남자는 가만히 웃었다. 태평하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으나 그 얼굴을 보니 왠지 다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잠깐 미뤄 두고 남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 주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남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랑 산, 어디가 좋아?”

지금부터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 도시와 다르게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을 곳.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피난처는 그 정도였다. 그러나 남자는 내가 준 선택지를 고르는 대신 내 몸 위에 반쯤 덮여 있던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드러난 어깨에 쪽 하고 낯간지럽게 키스했다.

“일단 씻을래요?”

침대 위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어젯밤 죽은 놈의 흔적으로 여기저기 갈색 피가 말라붙어 있어 살인 사건 현장처럼 보였고 누구 것인지 모를 체액도 눈에 띄었다. 내 몸이라고 별반 다르진 않았다. 씻을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들었다. 남자가 대답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씻겨 줄게요. 물 받아 놨어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눈을 휘어 웃었다.

“네?”

“……그래.”

바다도 산도 싫은가. 남자의 순수한 얼굴에 의심은 속수무책으로 꺼져 버렸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니 정신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욕조에 걸터앉은 남자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기분 좋은 압력으로 두피를 문지르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손놀림이 썩 흡족했다. 남자가 먹은 누군가의 재능이겠지만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남자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욕실을 말끔히 정리해 둔 모양이었다. 거구의 몸이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졌을지는 묻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배불리 먹인 남자가 곁에 있고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딱 지금만 같았으면 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잠깐 반짝이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지금 내가 있는 욕실은 어제까지만 해도 피비린내 넘치는 살육의 현장이었으며 그것이 내가, 우리가 속한 현실이었다.

“기분 좋아요?”

부옇게 공간을 채운 온기 탓인지 몰라도 남자의 목소리가 유독 다정하게 들렸다. 눈을 뜨고 내 머리에 거품을 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손이 멈췄다.

“왜요?”

나는 물에 젖은 손으로 괜히 얼굴을 닦으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

“씻고 나면 나 혼자 은행에 갔다 올게.”

신용카드는 추적당할 수 있으니 현금이 필요했다. 계좌에 있는 걸 전부 인출하면 못해도 일이 년은 버틸 만한 금액이었다.

“간단히 짐 챙겨서 오늘 내로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최대한 멀리 가자. 당분간만 숨어 지내면서, 아니 여행하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면 돼. 만약에 경찰이 날 용의자로 지목한다고 해도 시체는 없으니까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야.”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규칙적인 소리가 조용해진 욕실을 채웠다. 나는 욕조에 걸터앉은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걱정과 달리 돌아본 남자는 의외로 무던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또 제 탓을 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남자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려 작게 다독거렸다.

“새로운 곳에서 우리 다시 시작하자.”

처음과는 다를 것이다. 어설픈 실수도 하지 않을 거고 서로를 의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주 잠깐만 불편을 감수하고 나면 남들 같은 일상을, 지금 같은 순간들을 남자와 나도 누릴 수 있게 될 터이다.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부피만큼 밀려난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쳐흘렀다. 옷을 입은 채 푹 젖은 남자의 얼굴이 내게로 가까워졌다.

“있죠. 우리 그러지 말고…….”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남자의 입술이 닿았다. 맞닿은 입술이 눌리고 벌어졌다. 입술을 겹쳐 물고 남자는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제법 능숙하게 빨았다.

“하아…….”

찰박거리는 욕조의 물소리와 젖은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였다. 입술이 빨릴 때마다 따듯하게 데워진 몸이 바르르 떨려서 남자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야릇한 입맞춤에 몸이 붕 떠올라 현실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딱 한 번만 하고…….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야릇하게 느껴지던 남자의 키스가 감질나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먼저 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탄탄한 가슴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나비야…….”

사람을 도륙 내는 손으로 날 쓰다듬고, 뇌를 씹어 먹는 입으로 내게 키스하고, 끝내는 자신으로부터 날 지키려 하는 사랑스러운 나의 괴물.

거추장스러운 천 쪼가리를 와락 그러쥐었다. 남자가 내 손을 잡아 막았다. 입술마저 떨어지자 갈 곳을 잃은 열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예상을 벗어난 흐름 속에서 어리둥절한 나를 보며 남자가 싱긋 웃었다.

“영화라도 보러 가는 건 어때요?”

영화? 혼몽한 의식이 너무도 평범한 단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겨 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랑 데이트 해 줘요.”

몸을 낮춘 남자가 애교스럽게 눈을 올려 뜨자 촉촉하게 젖은 긴 속눈썹이 서로 엉겨 붙어 반짝거렸다. 현실로 돌아가기 전에 조금만 더 그 신기루 같은 빛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바로 동생 만나러 간다고?”

짧은 휴가를 함께한 친구가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나서며 정원에게 물었다. 피곤하지 않겠냐는 친구의 걱정에 정원은 품에 안고 있던 봉투 두 개를 작게 흔들었다.

정원의 두 눈은 처음 여름휴가를 떠난 날처럼 설렘으로 반짝였다. 유명 디저트 가게의 케이크가 든 봉투는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넣어 둔 아이스팩 덕에 아직도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상태였다. 하나는 동생에게, 다른 하나는 그 사람에게, 정원은 되도록 그것들을 오늘 안에 전해 주고 싶었다. 속셈이 빤한 핑계였다.

“빨리 먹어야 맛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캐리어는 나 줘. 너희 집에 가져다 놓고 갈게.”

“정말? 괜찮겠어?”

반가운 제안이었으나 정원은 안 그래도 녹초가 된 사람에게 번거로운 심부름을 시키는 건 아닌지 머뭇거렸다. 친구는 망설이는 정원의 손에서 캐리어 손잡이를 가져갔다.

“차까지만 끌고 가면 되는데, 뭐. 예정원 가이드님의 완벽한 계획 덕분에 편하게 여행했습니다. 다음 휴가 때도 부탁할게요.”

“고마워. 조심해서 가.”

친구의 능청에 정원은 멋쩍게 웃었다. 정원은 게이트에 서서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친구를 확인하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메신저 앱을 켰다. 잠시 고심하며 액정을 들여다보던 정원은 이내 톡톡 화면을 두드렸다.

[대리님 오늘 잠깐 시간 되세요?]

“아냐…… 너무 뜬금없으려나.”

정원은 메시지 입력 창을 도로 지웠다. 3년을 직장 동료로 알고 지냈건만 그 사람은 아직도 대하기 어려웠다. 아니,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대하기 어려워졌다는 쪽이 맞았다. 문제는 그와 상관없이 정원의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거였다.

처음엔 선망의 대상에 가까웠다. 정원의 입사 동기들 대부분은 그 사람을 그렇게 여겼다. 근사한 외모에 친절했고 회사에서 인상 한번 찌푸린 적 없을 정도로 여러 의미에서 철저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이따금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는 것을 정원만이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텅 빈 눈으로 핸드폰을 보거나 그보다 더 드물게는 복도 끝에서 간절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알겠어, 내가 미안해.’ 정원이 들은 내용은 대부분 그런 내용이었다.

그 사람이 환하게 빛나서라기보단 속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늘 같아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정원은 할 수 있다면 그의 그늘에 빛을 쬐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주변을 맴돌며 지켜보기만을 3년째, 어째선지 최근 들어서는 부쩍 더 알 수가 없어졌다.

머리 위 볕이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정원이 아랫입술을 자근거리던 때, 이따 만나기로 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원은 곧바로 통화를 연결하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언니! 도착했어?

한여름 볕과 닮은 목소리가 정원의 귓가에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너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 내가 언니한테 이 정도도 못 사 줄 거 같아?”

정원은 단품 메뉴마다 몇만 원은 가뿐히 넘는 일식당의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해외여행 후라 한식이 그립긴 했지만, 나이 차이가 제법 있는 동생이 모처럼 한턱내겠다는데 김치찌개나 먹으러 가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싶어 잠자코 따라온 참이었다.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런치 타임에 걸렸다. 정원은 가장 적당해 보이는 가격대의 런치 세트를 골랐다. 물 잔을 채우고 수저까지 깔아 놓은 동생이 정원의 옆자리에 놓인 봉투들을 힐끔거렸다.

“근데 나 뭐 줄 거 없어?”

“으이구. 네 목적은 오로지 그거지?”

정원은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을 밉지 않게 흘기며 면세점에 들러 사 온 화장품과 향수를 건네줬다. 봉투를 받아 든 동생은 한껏 광대를 끌어 올리고 정원을 향해 눈을 빛냈다.

“내가 언니 사랑한다고 말했나?”

“됐거든.”

마지막으로 정원은 디저트가 든 봉투를 건넸다. 아이스팩이 녹기 시작한 것인지 봉투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건 뭐야?”

“케이크, 맛있더라구. 집에 가서 오늘 바로 먹어.”

“당연한 소리 하지 마. 이 케이크에게 내일은 없어. 근데 저건?”

동생은 정원의 옆자리에 하나 남은 봉투를 가리켰다.

“아, 이건 다른 사람 줄 거. 녹으면 안 되는데…….”

정원은 대충 얼버무리며 손바닥으로 봉투 표면의 온도를 확인했다.

“오늘 또 누구 만나?”

아직 만나기로 약속하지는 못했지만, 정원은 수긍했다. 여행 중에 불현듯 결심이 섰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에게 확실히 마음을 전하자고.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 이유를 정원 자신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럼, 여기 냉장고에 잠깐 보관해 달라고 할까?”

손을 들고 점원을 부르는 동생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든 정원은 그대로 한곳을 응시한 채 굳었다. 본의 아니게 이제 막 가게에 들어서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검은 볼캡과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가린 데다 보기 드물게 키가 커서 눈길이 절로 갔다.

‘190은 되겠다.’

그런데 그 역시 정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은 의문스러운 시선에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하기엔 끈질긴 시선이었다. 그러나 정원이 아는 사람 중 저 정도로 키가 큰 남자는 없었다. 게다가 얼굴을 전부 가렸음에도 남자는 일반인과는 남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머쓱해진 정원이 손등으로 뺨을 쓸자 남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의 일행인 듯한 다른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의미 모를 눈 맞춤은 끝났지만, 정원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원을 볼 때는 건조하던 시선이 단숨에 녹진하게 녹아내리고, 남자는 언제 다른 곳을 보았냐는 양 그의 팔을 잡고 이야기 중인 일행을 빤히도 내려다보았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고갯짓에서마저 다정함이 묻어났다.

정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남자가 열정적으로 바라보는 일행에게로 옮겨 갔다. 뒤통수만 보이는 남자의 일행도 키가 큰 편이었으나 남자에 비해 한 뼘은 차이가 났다. 갑자기 일행이 남자의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올려 정돈했다.

……남자끼리라서일까? 조금 어색해 보일 정도로 살가운 손길이었다. 일행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기쁜 듯 휘어졌다. 둘을 지켜보던 정원은 그때야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보면 안 될 장면을 훔쳐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언니 이거 냉장 보관이야, 냉동 보관이야?”

“어? 냉장…….”

정원은 다가온 점원에게 얼떨결에 케이크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지는 점원을 따라 정원은 다시 가게 안을 둘러봤으나 남자와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 두리번거리는 정원의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었다.

“피곤해? 갑자기 멍을 때려.”

“……으응. 그럼 피곤하지 쌩쌩하겠어?”

“실컷 놀다 온 사람이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입을 삐죽이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정원은 팔짱을 끼고 허탈하게 웃었다.

“선물 약발 벌써 끝났지. 예소희.”

“나온 김에 나랑 좀 놀아 줘. 방학해서 심심해 죽겠어. 영화 보러 가자. 언니.”

“알았어. 근데 너무 늦게까진 안 돼.”

“뭐 볼까? 지금 마블 시리즈 하던데 그거 보자!”

핸드폰으로 영화를 예매하는 동생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원은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정원이 가진 핑곗거리의 유통 기한은 오늘까지였으므로.

휴가 시즌과 방학 기간이 겹쳐 영화관이 위치한 복합 쇼핑몰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정원과 동생은 지하 주차장에서 이미 만원에 가까워진 엘리베이터에 겨우 끼어 탔다. 정원은 사람들과 닿지 않으려 문에 코를 박고 섰다.

영화관 전용이라 8층까지 직행하는 엘리베이터 내부는 공공장소 특유의 정적이 흘렀다. 어색하지만 당연한 그 정적을 깬 건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형. 형도 헐크 보러 가요?”

“뭐?”

정원은 하마터면 고개를 돌릴 뻔했다. 뒤쪽에서 들려온 짧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누군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보고 싶어도 만원인 엘리베이터에선 그러기가 어려웠다.

“헐크 몰라요?”

순진한 목소리에 마땅히 따라붙기 마련인 대꾸가 이어지지 않았다.

“쉿. 조용히 하자, 아들.”

“나는 헐크 보러 가지, 엄마.”

“응.” 하는 아이 엄마의 목소리 이후, 돌아온 정적은 오래가지 못했다.

“형. 형도 도영이랑 같이 헐크 봐요.”

“어, 도영아. 막 잡으면 안 돼. 죄송해요. 얘가 형들을 좋아해서…….”

뒤쪽의 사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원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이 엄마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역력했다. 아이가 말을 걸고 있는 이는 묵묵부답이었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남자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과 함께 자란 정원에게는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냥 그렇다 맞장구쳐 주는 게 어려울까, 생각하면서도 아이를 대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음을 알았다. 당연히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아이의 칭얼거림은 점차 생떼로 변해 갔다.

날이 더웠다. 더구나 빽빽하게 선 사람들의 간격만큼 좁아진 인내심 탓에 불편한 한숨 소리와 혀를 차는 소리가 섞일 때쯤이었다. 뒤에서 자리를 옮기는 것처럼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그거 말고 다른 거 볼 거야.”

이윽고 누군가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로 아이를 달랬다. 아이가 말을 건 이와는 다른 사람임을 정원은 목소리로 바로 알아차렸다.

“……왜요? 헐크 진짜 멋있는데. 나쁜 괴물들 다 혼내 줘요.”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맨 앞에 서 있던 정원은 물살에 떠밀리듯이 내려졌다. 잠깐의 소동을 뒤로하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원의 신경은 온통 뒤쪽에 쏠려 있었다.

“왜냐면 내가 그 나쁜 괴물이거든.”

조금씩 느려지던 정원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원에겐 아이에게 속삭이는 남자의 말이 분명하게 들렸다. 정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묘하게 굳은 얼굴의 여자가 다섯 살 남짓한 아이의 손을 잡고 정원을 지나쳤고 모두가 내린 엘리베이터에 아까 식당에서 마주친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혼자 남은 남자의 검은 시선이 정원을 스쳤다. 그리고 남자는 누군가를 감싸듯 뒤로 돌아섰다.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남자가 숨겨 놓은 또 다른 사람이 드러났다. 아픈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남자에게 기대는 그 사람은 정원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대리님……?”

짧은 목소리만으로 그 사람임을 알아챈 정원이었으나 두 눈으로 본 사람이 그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사람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언니! 안 오고 뭐 해?”

“어…… 미안.”

그대로 닫혀 버린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잘못 본 거야. 내가 아는 대리님일 리 없어.’

동생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정원은 방금 본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 애썼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정원은 오늘 본 장면들을 다시 돌려 보느라 바빴다. 장르는 누가 보아도 로맨스. 주인공은 잘생긴 의문의 남자와 정원이 종일 애지중지한 케이크의 주인인 사람이었다. 오늘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케이크 같은 걸 핑계로 그를 만나려 했던 자신은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그간 눈치 없이 굴었던 저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곤란하고 피곤한 존재였을지를 생각하면 정원은 그간의 제 행동들이 창피해서 잠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주제넘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주인공들에 의해 쾅쾅 터지고 부서지는 스크린 속 엑스트라들을 보며 정원은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영화가 끝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 동생이 문득 고개를 돌려 한 칸 위에 선 정원을 올려다보았다.

“언니 이 영화 팬이야?”

“음, 딱히?”

“중간에 울었잖아. 아니 무슨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우냐?”

정원은 먹다 남은 팝콘을 씹으며 킥킥 웃는 동생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디가 그렇게 감동이었어? 그 감동, 같이 좀 받자.”

“앞이나 봐. 그러다 넘어져.”

남은 한 칸을 폴짝 뛰어내리는 동생을 향해 “뛰지 마.”라고 야단치며 정원은 동생이 진짜 이유를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장장 세 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정원은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마음을 고백하려던 결심은 집으로 돌아가면 주인을 잃은 디저트를 전부 먹어 버리자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당장은 그뿐이겠지만 휴가가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마음을 접으리라. 정원은 제 감정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참아도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기분이다. 내가 오늘 언니한테 술까지 풀코스로 쏜다.”

“수울?”

“내가 마셔 보니까 피곤하고 꿀꿀한 거 술 마시면 다 낫던데?”

아무렇지 않게 말한 동생이 빈 팝콘 통을 버리려고 두리번거리다 종종걸음으로 쓰레기통을 향해 뛰어갔다. 정곡을 찔린 정원은 동생의 뒷모습이 제 생각보다 커 버렸음을 실감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정원은 이제 정말 쉬고 싶었다. 뜻하지 않게 알게 된 진실 때문에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쳐 버린 상태였다.

멍하니 서서 동생을 지켜보던 정원은 쓰레기를 버리는 동생 옆으로 툭, 떨어진 물체에 깜짝 놀랐다. 다행히 동생의 위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놀란 정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예소희! 괜찮아?”

“어, 안 맞았어.”

동생도 놀라는가 싶더니 별거 아님을 알고 허리를 숙여 떨어진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초록색의 조그마한 물체를 정원에게 보여 주었다. 거리가 있어 뭔지는 몰라도 언뜻 영화관에서 홍보용으로 파는 작은 장난감 인형 같았다.

“헐크네? 이게 어디서 떨어진 거지?”

어쩐지 낯익은 단어에 정원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작은 소란을 떠올렸다.

“도영아!”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인파의 소음을 찢고 영화관을 울렸다. 동생이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불길함을 느낀 정원의 시선 역시 반사적으로 동생이 보는 곳을 따라갔다.

한 층 위의 유리 난간에 바짝 붙은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떨어진 장난감을 주우려고 몸을 수그린 아이는 난간 밑의 틈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정원의 불안한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배회했다. 아이는 혼자였다. 이어 아이를 잡으러 뛰어오는 아이의 엄마를 발견했지만 여의찮은 거리였다.

‘저대로 떨어지면 내 동생이 다친다.’

섬뜩한 상상에 심장이 쿵쿵 뛰고 솜털이 곤두섰다.

“소희야! 이리 와!”

소리치며 뛰어가는 순간 정원의 머릿속에는 제 동생 생각뿐이었다. 아이를 본 동생이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필사적으로 동생에게 손을 뻗었을 때, 정원은 정말 순식간에 동생의 뒤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어떤 힘에 떠밀리듯 자리에서 튕겨 나온 동생이 정원의 품 안에 들어왔다. 난간 아래로 추락하는 아이를 발견한 정원은 동생을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원의 캄캄한 머릿속에 곧 펼쳐질 비극적인 사고 현장이 강렬하게 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정원은 자신의 동생이 가까스로 사고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아이의 여린 머리뼈가 바닥에 부딪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나 아이 엄마의 울부짖음은 정원의 상상 속에서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들리는 거라곤 제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품 안의 동생이 감탄하는 소리만이 유일했다.

“언니……. 지금 봤어?”

동생의 목소리에 눈을 뜬 정원이 본 것은 둥글게 말린 넓은 등이었다. 탄탄한 팔뚝 옆으로 튀어나온 두 개의 작은 발을 보고도 정원이 아직 상황을 파악 중일 때, 얇은 티셔츠 아래로 단단하게 짜인 근육과 굵은 척추가 천천히 꿈틀거리며 몸을 부풀렸다. 등의 주인이 누군지 눈치챈 정원의 눈이 커졌다.

족히 5m는 넘을 높이에서 별안간 떨어진 아이를, 어디선가 튀어나와 맨몸으로 받아 낸 남자. 아이를 구한 건 바로 내내 정원의 시야에 걸리던 의문의 남자였다.

떨어지는 아이를 받으면서 한쪽 끈이 끊어진 마스크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기적 같은 확률의 우연보다 더 할 말을 잃게 했다. 깨끗하고 선해 보이는 예쁜 얼굴에서 정원은 모순되게도 불길함을 느꼈다.

그 남자는 이 상황에 놀란 것 같지도 않았고 아이가 무사하다는 데에 안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겁에 질린 아이를 품에서 내려 주는 남자의 표정이 소름 끼치도록 아무런 동요도 없다는 점이 기이했다.

“뭐지? 촬영 중인가?”

“애가 떨어진 거 같은데?”

어느덧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정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인파 속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정원은 좀 떨어진 곳에서 사색이 되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했다.

“도영아!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응?”

급하게 뛰어온 아이 엄마가 울먹이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얼이 빠져 있던 아이는 엄마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우는 아이와 거듭 머리를 숙이는 아이 엄마를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원의 눈에는 마치 남자가 눈앞의 모자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남자가 아이와 동생을 구해 주는 장면을 보았는데도 정원은 이유 모를 섬뜩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감탄 어린 표정을 한 사람들에겐 남자의 무감한 시선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인파 중엔 핸드폰을 꺼내 든 사람들도 있었다. 정원의 팔에서 빠져나온 동생이 남자에게 다가가려 했다. 정원은 기겁하며 동생을 붙잡아 세웠다.

“어디 가?”

“저 사람 아니었으면 나도 다칠 뻔했어. 감사 인사는 해야지.”

정원은 불안한 시선으로 동생 뒤에 있는 하얀 얼굴을 힐끔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정원은 저 남자에게 동생이 가까이 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때였다. 사람들 틈을 헤치고 그 사람이 나타난 건.

남자의 어깨를 돌려세우는 손길이 거칠었다. 지난 3년간 정원은 본 적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얼굴을 하고 그 사람은 오직 남자만을 노려보았다.

“나비야…….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 사람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잠깐 못 본 짧은 기간 동안 부쩍 살이 내려 날카로워진 얼굴은 오히려 전보다 생기가 감돌았다. 늘 건조한 미소만 그리던 얼굴엔 초조함, 불안함, 분노, 그가 느끼고 있는 모든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어느 것 하나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뿐이었다. 그 사람이 내뱉은 말조차도 이상했다. 지금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대리님…….”

맹목적으로 한곳을 향하던 시선이 정원의 부름에 크게 동요했다. 기이하리만치 새카만 두 눈을 마주한 순간, 5일 만에 만난 얼굴이 너무도 낯설어서 정원은 처음으로 그 사람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 사람의 어두운 그늘은 못 본 사이 깊은 동굴이 되어 있었다.

∞ ∞ ∞

“대리님…….”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였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예 주임이 있었다. 나를 보는 경악한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모두가 남자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릴 것 같아서 남자의 손목을 끌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길을 내려고 휘저은 손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부딪히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끝에 떨어진 것은 누군가의 핸드폰이었다. 동영상이 녹화 중인 화면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에서 도망쳤다.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을 밀치고 막무가내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다 발이 엉켜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남자가 뒤에서 받쳐 세웠다. 코와 입으로 숨이 역류했다.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뛰는 심장을 커다란 손이 안심하라는 듯 지그시 눌러 왔다.

“아무도 안 쫓아와요.”

남자의 말대로 창문도 없는 비상계단에는 헉헉대는 내 숨소리만 메아리쳤다. 아무것도 쫓아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쫓기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남자의 멱살을 그러쥐고 벽으로 밀쳤다. 끈이 떨어진 마스크 밖으로 훤히 드러난 낯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내가, 내가 눈에 띄는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기어코 일을 벌이고 말았다. 그것도, 사람을 구해서 날 엿 먹였다. 경찰에게 붙잡힌 뒤 받을 재판에서 정상 참작이라도 바란 걸까? 이제 와 영웅이라도 되고 싶었나?

사람들이 많아 가뜩이나 불안한데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웬 남자애 하나가 발치에 돌부리처럼 걸리적거렸다. 허벅지쯤 오는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는 것이 내겐 고문처럼 힘겨웠다. 그게 날 ‘형’이라 부르고 묘하게 뜨겁고 끈적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쥔 것도 없는데, 손끝까지 힘이 바짝 들어가고 눈앞이 흐려졌다. 비 냄새와 구분하기 어려운 피 냄새가 축축한 기억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남자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깟 애 하나쯤 죽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인데? 이 일 때문에 우리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어?”

말을 할수록 괴로웠다. 남자를 향한 수많은 시선과 카메라 렌즈들, 그리고 날 아는 사람까지. 상황은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괴물이었다. 고작 아이 목숨 하나를 살렸다고 해서 인간들이 남자의 존재를 용납해 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도망칠 걸. 당장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도 모자랐는데…!

“당신은 왜 날 구했어요?”

자책하는 내게 남자가 물었다.

“……뭐?”

“죽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가늘어진 시선이 교차했다. 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냐는 원망인 줄 알았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겐…….

“나비야… 너…….”

긴장한 입술에 경련이 나서 좀처럼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한테 나는 뭐야…?”

언젠가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고깃덩이들과는 다르다는 답으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었다.

왜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아?

차마 묻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남자가 나와 오늘 구한 아이가 다르지 않다고 말할까 봐 무서웠다. 남자가 덜덜 떨리는 내 손을 잡아 하얗게 질린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만약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내일도, 그다음 날도 당신과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겠죠.”

좀처럼 온기가 스미지 않는 메마르고 차가운 피부이지만 남자의 손이란 이유로 거짓말처럼 떨림이 멎는다.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언젠가는 남자와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신기루 같은 삶을 왜 탐냈을까 하는 후회만 들었다. 눈앞에 남자만 있다면 그런 것들은 어찌 돼도 좋았는데.

“지금처럼 당신이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런 소리 할 거면…… 차라리 입 다물어.”

불행한 미래를 예감하는 남자의 말이 듣기 싫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두 눈이 그런 나를 바라본다.

“나도 당신을 닮고 싶었어요. 당신이랑 있으면 전부 느낄 수 있었거든. 내가 먹은 것들에게서 느낀 감정들.”

어울리지 않는 조소를 머금은 남자는 길고 매끄러운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차츰차츰 하얀 얼굴에서 비에 씻겨 나가듯이 감정들이 지워져 갔다.

“왜 그랬냐고 물었죠. 궁금했어요. 내가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머리가 아니라, 여기로.”

머리를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런데 방금 깨달았어요. 다른 사람들한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완전한 무표정을 한 남자의 눈이 아까의 일을 떠올리듯 허공을 더듬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래서! 네가 징그러운 괴물이든, 무자비한 괴물이든 내 거라는 건 변함없어.”

빈 종이 같던 남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난 당신이 이럴 때 좋더라.”

붙잡혀 있던 내 손끝에 남자는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근데 그래서 걱정이야.”

남자의 말에는 본론이 없었다. 빙빙 주변만 맴도는 대화에 답답해져 손을 뿌리치고 벽을 짚어 남자를 두 팔 안에 가뒀다.

“다른 사람에겐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싸이코 괴물이니까 도망쳐라. 아직도 그 소리야? 싫어! 싫다고 했지. 나비야. ……내가, 너 사랑한다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수긍도 부정도 않는 남자의 태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꽉 막힌 공간 위쪽에서부터 계단을 밟는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떨어지려는 나를 남자가 와락 끌어안았다.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죽인 누군가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내게도 들리는 소리를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의 팔은 나를 더 단단히 옭아맸다.

“이거 놔…! 누가 오고 있잖아.”

“도망칠 필요 없어,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쫓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날 보내 줬으면 좋겠어요.”

보내 달라니? 어디로?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남자가 한 말은 나에겐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것이 남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남자가 날 버리려 하고 있음을 직감한 두 손이 본능적으로 남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안 돼. 나비야. 너, 지금 무슨 생각이야? 응?”

나는 방금까지 벗어나려던 품으로 도로 파고들었다.

“그러지 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난 이제 너 없으면 안 돼.”

차가운 몸을 필사적으로 부둥켜안고 있자니 난데없이 싸하게 배가 아파졌다. 아랫배에서 내장이 밑으로 빠질 것 같은 묵직하고 기묘한 통증이 덮쳐들어 점차 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당신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에요. 나는 당신에게서 빼앗기만 할 테니까.”

다정히 내 이마를 쓸어 주는 남자의 모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남자의 말은 틀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복통에 반박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되찾아 줄게요. 원래 당신이 가졌어야 했던 것들 전부.”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윽…….”

부정의 말 대신 고통스러운 신음이 샜다. 남자는 그런 나를 바로 세워 시선을 맞췄다.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속에서 어떻게든 남자를 붙잡으려 했다. 가까스로 남자의 가슴팍을 그러쥐자 남자의 손이 내 손등을 겹쳐 잡았다. 꽉, 으스러질 정도로 아프게 쥐어 오는 커다란 손이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 파장은 삽시간에 나를 물들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남자의 눈이 훅, 검게 변했다.

“그러고 나서도 내가 생각난다면, 이 순간을 떠올려.”

푹.

물컹한 무언가를 꿰뚫는 소리. 강한 힘이 복부를 강타했음을 한발 늦게 알아챘다. 숨통이 막히고 허리가 접혔다. 바닥으로 떨어진 시야가 흐려 처음에는 배를 얻어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이 빠진 손을 간신히 들어 아랫배에 닿아 있는 남자의 팔을 더듬어 보고 알았다. 남자의 손이 내 뱃가죽을 뚫고 박혀 있었다.

“큭…… 커흑.”

붉고 진득한 피가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푸른 핏줄이 돋아난 팔뚝을 적시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손에 배가 뚫렸다는 충격이 고통을 밀어냈는지, 단지 내가 고통에 무뎌진 건지, 아픔은 현실감과 함께 동떨어져 있었다.

즈걱, 쯔걱.

갈라진 배 속에서 남자의 손이 무언가를 찾는 듯 꿈틀거렸다. 속이 뒤집히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남자의 팔을 할퀴며 숨을 들이켰다.

“으윽, 헉…!”

내장이 밀려나며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끈질기게 내장을 휘저었다. 침이 섞인 묽은 피가 쉴 새 없이 턱을 적시고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배 속에서 무언가를 콱 움켜쥔 순간, 전신의 근육이 수축하며 의식이 아득해졌다.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잊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인 괴물이란 걸.”

붉게 물든 주먹이 배 속에서 주르륵 빠져나가고 후들거리던 무릎이 꺾였다. 산 채로 내장을 헤집어진 몸뚱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 손으로 꿰뚫은 몸을 바닥에 눕히는 남자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도대체 왜……?

제대로 사고가 불가능한 머리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면서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흐려진 시야로도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끝까지 내 손을 잡아 주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으지직.

피에 젖은 남자의 주먹 안에서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인간으로 살아 줘. 선우야.”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오랜 시간 그렇게 불러 온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남자가 돌아선다. 뒤늦게 극심한 고통이 들이닥쳤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악문 잇새로 빠드득 이가 깨졌다.

“나……비야.”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가지 마.’라는 애원은 각혈에 삼켜지고 발걸음은 다시 멀어져 갔다. 아파하는 나를 차가운 바닥에 버려둔 채로, 나비가 떠났다.

∞ ∞ ∞

“……님…! 대리님…!”

미약한 힘이 내 몸을 흔든다. 낮게 뱉어진 숨에서 풍기는 피 냄새에 의식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짙은 피로감이 몸을 점령하고 있었다.

내가 왜 누워 있지……?

끊어진 기억을 더듬는 중에도 누군가의 울음소리는 바로 곁에서 그치지 않고 윙윙거렸다. 무력감을 떨치고 겨우 눈을 떠 보니 겁에 질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바라던 이는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나비를 찾는 시선에 문득 눈앞의 이가 뺨에 붙인 핸드폰이 들어왔다.

“여기… 여기요……. 사람이 다쳤어요. 지금 피, 피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핸드폰을 쥔 예 주임의 팔을 잡았다.

―여보세요? 신고자분?

핸드폰에서 넘어오는 목소리를 듣자 주마등처럼 기억이 되살아났다.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날 보는 예 주임은 척 보기에도 공황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렵사리 목소리를 냈다.

“말……하지 마. 말하면…… 안 돼요.”

“네? 하, 하지만…….”

예 주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목격했는지는 몰라도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는 나비가 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이 일이 경찰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정말 끝장이었다.

“절대…… 절대로. 안 돼요.”

예 주임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덜덜 떠는 손으로 전화를 끊었다. 검게 변한 액정을 보고 나서야 참았던 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뒤늦게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바로 뒤쫓아 간다면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망설이다가 멀리 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싫어서 떠나려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느껴졌다. 성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바닥을 짚자 예 주임이 비명 섞인 울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잡았다.

“일, 일어나지 마세요! 상처가……!”

예 주임의 두 손이 피가 스민 내 티셔츠 밑 부분을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았다. 나는 찢긴 내 뱃가죽 따위보다 내 곁 외에 갈 곳이 있을 리 만무한 나비가 더 걱정되었다. 누군가에게 붙잡혀 잘못되기라도 했다간…….

설사 내장이 죄다 쏟아진다고 해도 나비를 찾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대로 나비를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여기서 배가 터져 죽는 쪽이 차라리 나을 테니까.

만류하는 예 주임을 무시하고 억지로 일으킨 몸뚱이를 계단 난간에 기대었다. 뒤엉킨 장기가 쑤셨으나 밖으로 흘러나오는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피에 젖은 티셔츠를 들쳐 봤다.

“뭐, 이게…… 뭐예요? 어, 어떻게 된 거예요?”

길게 찢긴 상처 부위가 꿈틀거리며 자가 회복하는 광경을 목격한 예 주임이 물었다. 하지만 나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날카로운 것에 예리하게 갈라진 흔적은 이제 요철만 남아 있을 뿐, 현재 진행형으로 아물어 가는 중이었다. 무자비하게 들쑤셔진 상처가 왜 다정하게 느껴지는 건지 복잡한 감정이 솟았다.

……도망칠 거였다면 다신 걸을 수 없게 날 반으로 갈라 놨어야지.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거면 그냥 그렇게 죽여 버리지.

나비가 찢어 놓은 것은 뱃가죽인데 가슴 안쪽이 뻐근해졌다.

너를 잊고 인간으로 살라고? 난 이미 몇 번이고 너를 선택했다. 끝내 인정받지 못한 마음이 서러워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정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따라가 말해 줄 작정이었다. 그것 외엔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난간을 꽉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한 걸음, 나비가 밟았던 계단을 내려갔다. 내 배의 기괴한 상처를 보고도 예 주임은 꿋꿋이 앞을 가로막았다. 자기 배가 뚫린 양 괴로운 표정이었다.

“어디, 어딜 가시려고요?”

“상관 말고 비켜요.”

“그렇겐 못 해요. 그 몸으론 아무 데도 못 보내 드려요! 저 다 봤단 말이에요. 그 남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오늘 뭘 봤든…!”

절절 끓어 터져 버릴 것 같은 눈을 감고 침음을 삼켰다.

진정하자. 진정해야 해.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나비의 뒷모습이 어른거리며 정신을 뒤흔들었다. 절벽 끝에 선 듯 발밑이 위태롭다. 숨 쉬는 법을 잊은 불안한 호흡이 불규칙하게 튄다. 나는 벌써 무너지고 있었다.

“그냥 전부 다 잊어버려요.”

“어떻게…… 어떻게 그래요? 이러지 말고 당장 병원부터 가요.”

“비키라고!”

폭발처럼 튀어 나간 고성이 비상계단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머리가 울리고 기력이 바닥난 다리가 멋대로 주저앉았다.

나비를, 내 나비를 되찾아와야 하는데…….

거친 호흡이 조금씩 절망으로 젖어 갔다. 예 주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한 예 주임이 내 눈치를 살핀다.

안 돼. 설사 내가 여기서 죽었더라도 아무도 오늘 일을 알아서는 안 되었다. 나비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받지 말아요.”

작은 손이 놓치지 않으려 징징 울리는 핸드폰을 꽉 쥔다. 그러나 예 주임의 걱정과 달리 나는 한참이나 작은 그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을 여력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떨궜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닿은 이마가 시릴 때까지, 머리를 숙였다. 내게는 가장 쉽고도 빠른 방법으로 매달렸다.

“제발…… 부탁할게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줘요. 제발.”

건조하게 멀어지던 나비의 발소리가 비참해진 가슴을 재차 짓밟는다. 이렇게 차가운 바닥에 날 혼자 두고 갔구나. 눈꼬리를 비집고 나와 거꾸로 흐르는 미지근한 물기가 닦이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 ∞ ∞

끈질긴 진동 소리에 정신이 들자 어젯밤 반쯤 열어 둔 현관문이 보였다. 몸을 웅크리고 앉은 썰렁한 현관엔 내 신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등 뒤로 느껴지는 공허한 공기. 집 안을 메운 적막. 어제와 그대로인 모든 것이 무섭도록 낯설어 그저 문밖만 지켜봤다.

날이 새도록 문을 열어 두고 기다렸지만, 나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내게 그 잔인한 현실을 강요했다.

잠을 잤는지 깨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무너진 정신으로 아까부터 버석한 눈을 감았다 떴다. 나비가 열린 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 의미 없는 짓거리를 수십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은 그대로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핸드폰이 또다시 진동했다.

혹시 나비일까……? 돌아오는 길을 모르는 곳까지 가 버려서 데리러 와 달라고 하는 연락인 건 아닐까?

나는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일어나셨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답장 기다릴게요]

예 주임이었다. 실낱같은 기대가 배의 절망을 가져왔다. 어제 머리를 숙인 나를 보고 예 주임은 다시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내 차를 몰아 걸레짝이 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비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산소 호흡기를 제거당한 병자처럼 나는 조금씩 죽어 갔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대신 제 연락에 답장만 해 주세요.」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예 주임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답장을 하지 않으면 제삼자를 이 일에 끌어들일 거란 거추장스러운 협박, 내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

단지 생존 신고를 위한 빈 메시지를 보내고 웅크린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결국,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날 먹어 버리지 그랬어.”

…….

“아니, 날 떠나지 못하게 내가 먼저 널 먹어 버릴걸.”

네가 내게 되찾아 주고 싶어 한 것이 무얼까. 정말로 내가 이 끔찍한 외로움을 견디며 인간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면 그렇게 해 줄게. 최대한 비참하고 처절하게, 너에게 보란 듯이 인간으로 죽어 줄게.

지독한 상실감 속으로, 물에 던져진 돌처럼 그저 끝없이 가라앉았다.

“나비야.”

나를 여기서 건져 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돌아와.”

내가 정말로 죽어 버리기 전에.

손등이 축축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두 손을 들어 보니 무딘 손톱 아래에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손등의 피부를 긁어내린 것이다. 피가 비칠 정도로 벌겋게 벗겨진 피부가 잠깐 사이에 본래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빈 웃음이 흩어졌다.

이제는 쉽게 죽을 수도 없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찬장을 열어젖혀 쓸모없는 것들을 전부 쓸어 내고 처박아 두었던 죽은 애인의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가득 든 액체를 입안으로 쏟아부었다. 식도를 태우며 스며드는 독한 알코올이 내장을 모조리 불사르는 듯 뜨거웠다. 빈 술병을 내던졌다. 삽시간에 몸이 끓었다.

“흐읍. 하아…….”

입에서 뿜어지는 숨이 달궈진 증기처럼 뜨거웠다. 무심코 손등으로 젖은 턱을 닦다가 말고 손등을 들어 보았다. 긁어 댄 자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멍하니 다시 피가 흐르는 상처를 들여다보는데 발밑이 물 위처럼 일렁거렸다. 식탁 모서리를 간신히 잡고 섰다. 자학적으로 들이켠 술이 착실하게 모든 감각을 한데 뭉개 놓기 시작했다.

터질 듯이 뛰는 심장 소리만 전신을 두드려 댔다. 바닥이 멋대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어지러워 무거운 고개를 끌어 올렸다.

아. 눈앞에 하얀 냉장고가 있었다. 웅웅, 모터 소리가 질척해진 뇌를 휘젓는다. 냉장고를 보니 허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다. 아까부터 배 속이 텅 비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허했다. 냉장고로 다가가다가 발밑이 축축해 내려다보니 굳게 닫힌 냉장고 밑이 붉다. 줄줄 붉은 액체가 냉장고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다. 느슨한 의문이 들었다. ……뭐지?

똑똑.

냉장고 안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가 들렸다. 핏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발등까지 축축하게 적셨다. 미지근한 액체는 냄새가 좋았다. 안에 뭐가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기왕이면 맛있는 게 들어 있으면 좋겠다. 나비는 늘 배가 고프니까.

혀 밑에 고이는 침을 삼키고 냉장고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벌어지는 틈새로 시린 냉기가 하얀빛과 함께 새어 나온다.

“아. 잘됐다.”

텅 빈 냉장고의 가장 위 칸에 머리가 있었다. 피가 그 머리에서부터 냉장고 속을 빨갛게 물들이며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신이 나서 머리를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누구 것인지 모를 까맣고 동그란 뒤통수. 왜인지 오한이 들어서 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어느덧 발목까지 찬 핏물이 잘게 물결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웅덩이 밑에서 스윽 무언가가 떠오른다. 손가락이다. 택배 기사의 손가락이었다.

“저게 왜…….”

비틀거리며 액체처럼 흐물대는 머리를 짚었다. 전부 술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라고 되뇌었으나 불어난 핏물은 금세 집 안을 가득 뒤덮었다.

바스락.

소리가 난 작은 방에서 퉁퉁한 몸뚱이가 둥실둥실 떠내려왔다. 머리가 없는 몸은 주름진 피부로 덮여 있었다.

“할머니…?”

여태 거기 숨어 계셨나. 경찰이 찾고 있다고 말해 주려는데 무언가 발목에 닿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흰 구체가 도르륵 구른다.

“……너 왜 내 집에 있어?”

동생의 눈알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울컥.

이번엔 욕실 앞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부서져 뼈가 튀어나온 정강이의 시뻘건 근육이 거세게 꿈틀거린다. 아래층 남자의 다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나둘, 잘린 사지가 핏물 아래에서 계속해서 떠올랐다. 전부 나비가 남긴 건가? 조각난 시체가 즐비한 거대한 피 웅덩이 위로 햇살이 비쳐 들었다. 그건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핏물이 꿀렁거리며 또 하나를 뱉어 냈다. 정수리부터 튀어 올라온 머리통이 날 보고 씨익 웃는다. 죽은 애인이다.

‘야. 그거 꺼내 봐.’

냉장고 속 머리는 여전히 내게 뒤통수를 보이며 거기에 있었다. 또다시 몸이 으슬으슬해진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누구일 것 같아?’

“몰라.”

죽은 애인의 머리가 킥킥거렸다.

‘모른 척하지 마. 다 네가 죽인 거잖아?’

귀를 틀어막아 봤자 머릿속에서부터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무릎까지 차오른 핏물을 첨벙첨벙 가르며 죽은 애인의 머리통으로 다가갔다. 두 눈에 핏발을 세운 머리통이 신이 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악을 썼다.

‘괴물은 너야. 네가 다 죽인 거야! 전부 너 때문에 죽었어! 오죽하면 그 괴물도 너한테 질려서 도망을 쳤겠…!’

콱!

개소리를 지껄이는 머리통을 짓밟았다.

끄르륵…… 머리통이 가라앉은 자리에 피거품이 일었다.

“그럴 리 없어. 나비는 너랑 달라.”

다시 냉장고로 돌아가 두 손을 집어넣었다. 망설임 없이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 두 손이 차가운 냉기에 닿자 바들바들 떨렸다. 결 좋은 까만 머리카락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천천히 가까워졌다.

‘역겨워.’

싸늘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급히 손을 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아 버렸다. 내가 역겨워…? 나비는, 나비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돌아본 집 안은 핏자국조차 말라붙어 있지 않았다. 죽은 애인의 머리통을 끄집어내려고 바닥에 주저앉아 득득 긁어 대 봐도 햇살에 데워진 마루의 감촉은 딱딱하고 건조하기만 할 뿐이었다.

“난…… 최선을 다했어. 다 나비를 위해서였다고!”

정말?

아니. 사실은 전부 날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나비가 괴로워하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다. 어린 동생을 보살필 때도, 죽은 애인의 뒷바라지를 할 때도, 난 언제나 나만 생각했다. 그들이 내 옆에서 썩어 가도 모르는 척했다.

망친 건 나비가 아니라 나다. 예쁘고 순진한 괴물을 가지려고 속여서 가둬 두고는 망가뜨리려고까지 했다. 나비가 떠난 건 내가 그런 역겨운 인간임을 결국 들켜 버렸기 때문이다. 나비가 내게 돌려주고자 했던 건 어쩌면 복수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변명을 하며 발악하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 끝났다. 180도 돌아간 삭막한 거실 풍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토사물로 범벅이 된 바닥이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해가 비스듬히 걸쳐진 천장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천장이었다.

“흑…….”

이번엔 눈을 오래도록 꽉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부옇게 흐린 천장이 보일 뿐 죽음도 나비도 어느 것 하나 나타나 주지 않았다. 내 곁을 지키는 건 끔찍한 적막뿐이었고 그것은 내가 스스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엔 아까 찬장에서 쓸어 버린 것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중에서 커터 칼을 끌어왔다. 뽑아낸 칼날을 맥박치는 목덜미 위에 수직으로 세웠다. 한 번으로 죽지 못해도 괜찮았다. 죽을 때까지 찌르고 쑤시면 되었다. 고통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역겨운 몸뚱이가 죽지 못할까 봐 걱정될 뿐. 빗나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칼을 잡았다. 적막이 내 결정을 응원하듯 나를 오롯이 감싼다.

문득 마지막 선물처럼 이름을 불러 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생각났다. 날 안아 주던 서늘하고 부드러운 품을 일깨운 나는 끝내 어둠 속에서 말간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괴로워서 꽉 감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나와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뻔뻔스럽게도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매달려야 했다. 도저히 나비를 혼자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나비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겪어 보지 않아 모른다. 죽을 거라면 나비를 찾아내 그 곁에서 죽어도 늦지 않았다. 칼을 집어 던지고 구멍 난 정신을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똑똑.

정신이 들었는데도 또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드르륵.

아까부터 무슨 소리지?

돌연 어디선가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든다.

“……여기 없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자 베란다에 누군가 있었다. 여러 겹으로 갈라지는 시야를 따라 검은 인영이 흔들거린다. 환영과는 달랐다. 거기 있는 게 분명했다.

“나비야…?”

나는 비틀거리며 베란다로 다가갔다. 달려가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놀란 나비가 도망칠까 봐 발소리를 죽였다. 언젠가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커튼이 데자뷔 같은 불길함을 불러일으켰다. 안 좋은 기억이 번뜩 뇌리를 스친다. 마침내 성급한 손끝에 커튼이 걸렸다.

“없네.”

실망한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

“나 여기, 여기 있어!”

커튼을 걷는 순간, 검은 인영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린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나비야!”

피가 차게 식으며 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허겁지겁 난간에 매달렸다. 불어닥치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뒤흔들며 시야를 방해했다. 까마득히 먼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상체가 휘청거렸으나 나비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몸은 서슴없이 난간 아래로 기울었다. 머리로 피가 몰려 터질 것 같았다.

기어코 내 눈앞에서 죽어 버리다니…!

그런데 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렸다.

드극드극.

날카롭고 단단한 무언가가 시멘트 외벽을 긁는 소리에 급히 고개를 비틀어 위를 보았다. 길게 패인 외벽에서 시멘트 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옥상…….”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열어 둔 현관문을 밀고 나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30층과 달리 하나뿐인 문이 나타났다. 그러나 차가운 철문은 굳게 잠긴 채였다.

“나야. 문 열어! 나비야!”

문을 두드리고 발로 걷어찼으나 소용없었다. 전신의 혈관이 미친 듯이 팽창했다.

“열쇠… 열쇠가…….”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걸음이 늪에 빠진 듯 무거워지고 시야가 느리게 점멸했다. 30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고 했지만, 지독히 끓어오르는 몸은 한계였다. 발밑이 무너지듯 꺼지며 전신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제발. 조금만 더…….

검게 좁아지는 시야에서 기적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그 안에 타고 있었다. 나는 간절히 손을 뻗었다.

“옥상에 나비가…….”

낯선 신발이 쿵쿵 바닥을 울리며 다가오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꺼졌다.

“어어, 이봐요!”

누군가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닿은 몸이 서늘하게 열을 식힌다. 나비다. 나비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잡히는 몸을 꽉 움켰다.

“잡았다….”

@먐먐공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