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피
남자는 잠든 것처럼 보였다.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살아 있는 생물의 머리를 부수는 감각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괜찮다고, 어쩔 수 없지 않았냐고 말해 줄 이가 의식을 잃은 상태이니 살점이 너덜거리는 팔뚝의 고통을 되짚으며 혼자서 내 행동의 정당성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남자의 침묵에 겁이 났다. 나는 널브러진 남자의 몸을 똑바로 누이고 가슴 위에 조심스럽게 귀를 댔다.
정상적으로 호흡하는 가슴이 옅게 오르내리며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작은 접촉에 맞춰 심장이 느리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 걸 예상하고 벌인 짓이었다. 티끌만큼이라도 남자가 죽을 가능성을 걱정했다면 남자에게 잡아먹힐지언정 망치를 휘두르지는 못했을 테니.
물린 팔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듯해 확인해 보니 그때까지도 나는 망치를 힘껏 쥔 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희뿌연 점액질을 뒤집어쓴 흉기의 머리가 번들거렸다. 하얗고, 걸쭉하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체액이, 남자의 머리통에서부터 소리 없이 새어 나와 바닥에 고여 있었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세상의 비밀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작은 웅덩이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빼자 괴상한 액체가 찐득하게 늘어지며 달라붙어 왔다.
“이거 피……인가?”
상처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빼면 색깔도, 냄새도, 내가 아는 피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손가락 끝에 묻은 액체를 한참 바라보다가 날름 핥았다.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맛 또한, 묘한 단맛이다. 그러나 이건 남자의 ‘피’가 맞을 것이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정신을 잃은 남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비야. 미안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어서 나도 정말…… 슬퍼.”
망치를 내려 두고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축 늘어지는 거구를 침대 위로 끌어 올려놓은 뒤 옷장으로 갔다.
현관 너머에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마당에 남자까지 미쳐 날뛰면 곤란했다. 옷장을 열고 서랍에서 가죽 벨트를 꺼냈다. 반으로 접어 양 끝을 세게 잡아당기자 채찍처럼 매서운 소리가 났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고서 고심 끝에 가장 질긴 것으로 두 개를 골랐다. 긴 가죽끈의 가장자리가 꽤 날카로웠다.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한다면 문제없겠지만 어쩌면 남자의 하얀 피부에 보기 싫은 자국 정도는 남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지. 지금 그런 걱정 할 때야?”
세게 고개를 털어 무심코 든 염려를 지웠다. 주인을 문 개에게 필요한 건 벌이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남자가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커다란 손을 끌어왔다. 그리고 하얀 손목을 가죽 벨트로 침대 헤드에 단단히 고정했다. 막 구속한 쪽의 손가락이 까닥 움직인다. 나는 얼른 남자를 진정시켰다.
“쉬이.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아끼는 이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가며 얻은 평화가 그리 길진 않을 듯싶어 팔을 묶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망설임 없이 남자의 위에 올라타 반대편 팔도 끌어왔다. 서둘러서 나머지 팔마저 완전히 고정했다. 불안함을 느낀 건지 남자가 곧 깨어날 것처럼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고작 가죽 벨트 따위로 남자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선이었다.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자, 밟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끝내고 남자가 눈을 뜨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팔락이며 마침내 눈꺼풀이 열리고, 남자의 팔을 고정한 침대 프레임이 덜컹거렸다. 흐린 눈으로 남자가 고개를 틀어 묶인 팔을 올려다본다.
“이게…… 뭐예요?”
“기억 안 나? 네가 한 짓.”
잇자국을 따라 뻘건 속살이 드러난 팔뚝을 남자의 눈에 비추자 처참한 상처에 못 박힌 눈동자가 이내 거세게 흔들렸다. 맨 가슴 위에 떨어지는 피가 끓는 물이라도 되는 듯 남자는 몸을 흠칫거렸다. 적어도 이제 내게 식욕을 느끼고 있지 않음은 확실했다.
“정신이 좀 들어?”
겁에 질린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남자가 목을 움츠린다.
“왜 무서워해? 죽을 뻔한 건 난데.”
“난 당신을 먹으려던 게…….”
“괜찮아. 나 화 안 났어.”
키우는 개를 먹이는 건 주인의 의무고 제대로 길들이지 못한 건 주인의 책임이다.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건 내 탓이지 남자의 탓이 아니었다.
땀과 피로 축축해진 티셔츠를 벗어 맨살을 드러내자 남자의 두려움 위로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욕망이 번진다. 나는 그게 식욕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아야만 했다.
“나비야. 배 많이 고팠지.”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맨 가슴을 맞댔다.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내게 그대로 전해졌다. 숨이 떨렸다.
“이런 허접한 구속 같은 건 얼마든지 끊어 낼 수 있잖아. 내가 허락할게.”
눈을 질끈 감은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신음했다. 나도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날 먹어.”
“싫어요. 이거 풀어 줘요.”
남자의 저항이 점점 거세졌다. 침대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묶인 남자의 두 팔에 근육이 불끈거린다. 나는 내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남자를 힘껏 끌어안았다.
부디 머리부터 먹어 주어서 고통이 짧기를 바랐다. 날 먹고 나면 남자가 원하던 대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겠지. 남자를 만나기 전의 구질구질한 시간도, 남자에게 느꼈던 내 모든 감정도.
“정말 괜찮다니까? 먹어. 널 위해서 순순히 먹혀 주겠다고!”
우지직.
무언가 아슬아슬한 소리가 들렸다. 부러진 침대 프레임 조각이 허공을 날아갔다. 남자가 선을 넘은 것이다. 내 시야가 돌연 천장으로 뒤집히더니 다음에는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로 눈앞이 가득 채워졌다.
남자가 구속을 뜯어내고 나를 덮치기까지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이번에는 막을 수가 없었다. 곧장 달려드는 피 묻은 입술을 보며 나는 눈을 감고 몸에 힘을 풀었다.
그 짧은 찰나, 날 먹어 치우고 피로 물든 침대 위에 혼자 남은 남자가 후회하며 울 잠시 뒤의 모습을 그려 봤다. 마지막으로 바라건대, 남자가 내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 줬으면 했다. 이 아름답고 무자비한 괴물이 평생 날 위해 그래 준다면, 이런 끝도 그다지 나쁘진 않겠지.
“읍….”
그런데 남자의 입이 닿은 곳은 입술 위였다. 남자는 깨물거나 물어뜯지 않고 그저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우읍.”
입맞춤에 지나지 않은 달콤한 자극에 혼란스러웠다. 식사 전의 유희일까. 내게 마지막으로 주는 자비일까. 이유 따윈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결과였다.
나는 남자의 혀를 밀어내고 겁도 없이 괴물의 입안으로 내 혀를 쑤셔 넣었다. 내 살을 씹을 날카로운 이를 핥고 나를 삼킬 목구멍에까지 혀를 박으며 서슴없이 남자의 식욕을 자극했다. 몸을 떤 남자가 벗어나듯 물러나면서 한껏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며 올려다본 남자의 속눈썹에 죄책감이 방울방울 엉겨 빛나고 있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난 먹을 수 없어요. 당신만큼은.”
몇 번이나 선을 넘은 주제에 나 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저 새빨간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을 더는 믿을 수 없다. 믿어선 안 된다. 뜨거워진 눈에 힘을 주고 내 마음을 먹어 치운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입 닥쳐. 내가 또 너를 믿을 거 같아? 방금까지 날…….”
“그건.”
눈가를 찌푸린 남자가 고통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러나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네가 아니야?”
어이없는 변명을 듣고 한풀 꺾여 버린 내 목소리에 이리저리 불안하게 헤매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비웃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원해서 당신을 상처 입힌 게 아니에요. 그것만…… 그것만 믿어 줘요. 제발.”
남자의 까만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내 뺨 위로 떨어졌다.
“다신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그럼…… 내가 널 믿을 수 있게 확실히 말해 줘. 너한테 나는 뭐야…?”
남자는 부정하고 있지만, 한순간일지라도 내게 식욕을 느꼈다. 남자의 본능이 나를 다른 고기들과 똑같이 여긴다는 뜻이었다.
“당신은…….”
남자의 답이 처음으로 두려웠다. 긴장감으로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웃음기 없는 흰 얼굴에서는 낮고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아이를 낳아 줄 나의 짝이고.”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지는 얼굴이 가까워지고 열없는 입술이 닿았다. 눈을 감은 남자가 입술을 맞댄 그대로 맹세라도 하듯 읊조렸다.
“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예요.”
죽이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배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들끓었다.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쓸려 남자의 입술을 씹었다. 터진 점막에서 흐른 남자의 피가 혀를 적셨다. 달았다. 입 안에 고이는 침과 함께 삼켜 버리자마자 다시 맛보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나는 어느새 달게 혀를 적시는 괴물의 피를 쪽쪽거리며 게걸스럽게 빨아 마시고 있었다.
“하아…….”
혈관을 타고 남자의 피가 내 몸속으로 스며든다. 눈을 감자 검은 어둠이 빙글빙글 돌며 몸이 붕 떠오르는 듯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남자가 내 피를 마셨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너무 맛있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 더 줘. 나비야.”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먹어요.”
남자는 내가 빨기 쉽게 입술을 벌려 내어 줬다. 젖먹이처럼 남자의 목에 매달려 집착적으로 상처 난 아랫입술을 핥고 빨았다. 그리고 이내 거스를 수 없는 나른함에 온몸이 축 늘어졌다.
나에게서 풀려난 남자가 몸을 내려 살점이 으깨진 팔로 입술을 가져갔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 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빼내려고 하자 남자가 붙잡았다. 너무 아프지 않게, 그러나 놔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잡고는 뜯긴 속살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아…, 아파. 뭐 하는 거야?”
남자는 대답 없이 자신이 만든 상처를 개처럼 혀로 핥았다. 무거운 고개를 들어 욱신거리는 팔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불투명한 남자의 피와 내 붉은 피가 엉겨 붙은 상처가 어쩐지 조금 아문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움푹 파인 구멍에 확실히 분홍빛 새살이 차올라 있다.
“나비야. 이거 네가…… 나비야?”
어쩐지 남자의 상체가 조금씩 옆으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풀썩 쓰러졌다.
“나비야!”
내 부름에도 눈을 뜨지 못하는 남자의 얼굴이 창백했다. 남자가 아픈 이유도, 해결 방안도 알고 있지만 차갑게 식어 가는 몸에 매달리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눈 좀, 눈 좀 떠 봐. 응?”
식사를 못 한 남자가 이대로 죽어 버리면 혼자 남겨지는 쪽은 남자가 아닌 나다. 이렇게 또 혼자가 될 바에는 차라리 남자에게 먹히는 편이 더 나았다.
“아.”
불시에 떠오른 생각에 나는 남자가 물었던 팔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혹시, 내 팔 하나로 남자의 목숨을 조금이나마 연명할 수 있다면……. 다른 ‘고기’를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남자를 정자세로 눕히고 남자의 팔목에 걸려 있는 가죽 벨트를 빼 들어 급히 방 밖으로 나왔다. 주방 서랍을 뒤져 제일 날이 잘 드는 식칼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물린 팔로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가죽 벨트의 한쪽 끝을 이로 물고 남은 손으로 벨트를 팔뚝에 둘둘 감았다. 과다 출혈을 막으려면 최대한 꽉 매야 했다. 이성적 사고는 거기까지였다.
고작 식칼 따위로 스스로 팔뚝을 잘라 낼 수 있는가, 없는가는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나는 잘라 내야만 했으니까.
식칼로 손을 뻗으려는 때, 거실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한시가 바빴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진동은 집요하게 이어지며 집중력을 흔들어 댔다.
결국, 나는 이로 꽉 물고 있던 벨트 끝을 뱉어 내고 거실 테이블로 가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전원을 꺼 버릴 생각이었다. 연달아 온 문자의 발신자가 동생이 아니었다면.
[형 토요일 내 생일인데]
[정말로 시간 없어?]
[진짜 아주 잠깐이라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만나자는 동생의 문자를 뚫어지게 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의식을 잃은 남자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그래, 몸만 큰 아이 같은 남자를 키우려면 아무래도 두 팔은 꼭 필요했다.
“나만 믿어. 나비야. 내가 곧 배불리 먹여 줄게.”
다 잡은 고기를 놓칠까 봐 더 미루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눈을 감은 남자의 얼굴이 점점 핏기를 잃어 간다. 나는 파리해진 눈꺼풀 위에 입술을 내리고 속삭였다.
“절대로 널 포기하지 않을게. 절대로.”
남자는 절대 굶어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
연결 음이 몇 번 울리더니 “형!” 하는 동생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끔찍했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동생에게 좋은 형이었던 시절 내가 어떤 목소리와 말투를 썼는지 굳이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만날까? 우리 둘이서만.”
내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하고 애틋했다.
∞ ∞ ∞
식사 시기를 훌쩍 넘겨 버린 남자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매일 같이 부르고 흔들어 깨워 보아도 시체처럼 잠든 남자는 잠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운 남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해서 몇 번이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곤 했다.
남자가 정신을 잃은 동안 베란다를 치우고 사람을 불러 부서진 유리창을 갈았다. 작업자들이 돌아가고 베란다를 확인하던 중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괴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던져둔 그대로 베란다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둥글고 노르스름한 덩어리를 치우려 허리를 숙였으나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멈췄다. 하얀 타일 바닥 위에 덩어리에서 새어 나온 불투명하고 노란 액체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윽.”
덩어리의 한쪽 모서리에 생긴 균열에서 무언가 흘러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곤충이었다. 부화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그것은 말라비틀어져 이미 죽은 상태였다. 역삼각형의 머리며 날카로운 앞다리로 보아 사마귀 같았다. 아니, 비교적 커다란 크기를 제외하면 누가 보아도 사마귀였다.
아래층 남자라면 이런 징그러운 것을 들여 키우는 취미를 가졌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부러 내게 이런 식으로 테러를 한 의도는 이해할 수 없지만 내 기분을 망치고 싶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새끼.”
주방에서 고무장갑과 비닐봉지를 가져와 그 흉측한 사체를 처리하고 여러 번 비누 거품을 내서 손을 씻었다. 그런데도 찝찝함은 오래도록 가시질 않았다.
제시간에 출근하려면 집에서 나서야 할 시간이었으나 나는 남자의 곁에서 핸드폰을 꺼내 동생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확인했다. 이미 수십 번 들여다봐 외울 지경이 된 내용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럼 주말에 봐 나 형한테 줄 것도 있어]
[내 생일 선물은 준비 안 해도 돼]
드디어 내일이었다.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남자가 하루만 더 아무 탈 없이 버텨 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나비야. 갔다 올게. 얌전히 있어.”
평소처럼 인사하며 미동도 없는 이불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다가 차디찬 뺨 위에 입을 맞추고 방을 나왔다. 얼마 못 가 막다른 길을 마주한 막막한 심정이 걸음을 붙잡는다.
이번에 남자를 무사히 먹인다고 해도 다음은?
이런 식으로는 남자의 식욕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남자가 앓는 내내 고민해 봐도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저대로 남자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이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상황은 갈 데까지 갔어.”
남자를 키우기로 한 순간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이제 와서 망설이는 짓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집을 나서기 전, 미리 현관 앞에 챙겨 둔 종이봉투를 열어 망치가 들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야 했다. 무슨 짓이든…….
아파트 현관에 서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고서야 비가 오고 있단 걸 알았다. 빈손을 비에 씻으며 내일까지 이 비가 그치지 않기를, 우습게도 하늘에 기도했다.
∞ ∞ ∞
[형 나 출발했어]
도착했다는 연락은 아직이었다. 이른 오전인데도 하늘은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거센 장대비 때문에 최고 속도로 움직이는 와이퍼에도 앞 유리가 손쓸 도리 없이 계속 흐려졌다. 그나마 날이 덥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유리창에 끼는 습기를 방지하고자 틀어 둔 에어컨 바람이 얇은 바람막이 너머로도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온도를 높이지는 않았다.
비가 퍼부어 준 덕에 주말 도로는 한산했다. 나는 차를 몰며 틈틈이 룸미러로 비어 있는 뒷자리를 힐끔거렸다. 아무도 없는 좌석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떠들었다.
“날씨가 딱 좋네.”
내비게이션에 찍힌 도착 예상 시간이 약속보다 10분 빠르다. 동생과 만나기로 한 역은 이제 사거리 하나만 지나면 금방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때맞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왜 귀 따갑게 항상 이런 식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다. 전화로는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 편히 인상을 찌푸렸다. 곧 사거리였다. 좌회전을 하러 1차선으로 진입했다. 신호는 빨간불이었다.
―어디쯤이야?
“거의 다 왔어. 마지막 좌회전 신호 기다리고 있어.”
말하는 사이 좌회전 신호가 떨어졌다. 얼마 안 가 동생이 일러 준 역이 빗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도착한 거 같은데.”
―어디? 나 지금 역 앞 출구인데. 형 차 뭐였지?
서행하며 역 앞 갓길에 차를 세웠으나 비 때문에 바깥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기는 무리라고 판단해 동생에게 차종과 차 번호를 말해 주었다. 잠시 조용해진 전화기 너머로 빗소리가 줄기차게 들려왔다.
―아. 찾았다.
뿌연 차창 너머에서 물귀신같이 일렁이는 인영이 점점 다가왔다. 검은 우산을 쓴 이가 조수석으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문이 벌컥 열렸다. 비 비린내가 훅 끼쳤다. 약간 숨을 헐떡이며 거리낌 없는 태도로 젖은 몸을 조수석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는 몸짓에 차가 흔들렸다. 몸이 약해 소심하던 동생은 내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잘난 존재가 되곤 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 관계는 변함없이 견고한 모양이다.
“이런 날 캠핑은 좀 아니지 않나? 형.”
빗물에 젖은 얼굴이 날 보고 환히 웃었다. 뻔뻔하긴. 오래간만에 본다고 미운 놈이 반가울 리는 없었지만, 기꺼이 마주 웃어 주었다.
“오랜만이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축축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도 잊고 있던 오랜 습관이었다. 당연하다는 양 내 호의를 받던 예전과 달리 동생은 조금 어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쿵.
차 뒤쪽에서 둔탁한 소음이 넘어왔다. 밀폐된 차 안이라 울림이 제법 컸다. 빗소리에 묻히길 바랐으나 약아빠진 동생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캠핑용품. 트렁크에 실어 놨거든.”
“아……. 어, 저거 뭐야. 케이크도 샀어?”
뒷자리에 놓인 네모난 상자를 보고 동생이 물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어딘가 겸연쩍은 투다.
동생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오늘 같은 날 케이크를 빠뜨리긴 아쉬울 듯했다. 이왕이면 예쁜 케이크에 초도 붙이고 분위기를 내 보려 나오는 길에 제과점에 들렀다. 직원은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추천했다. 그러나 내가 고른 것은 붉은 레드벨벳 케이크였다.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응. 그냥 샀어.”
“싱겁긴……. 형 좀 변했네.”
“그런가.”
지그시 나를 살피는 동생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동생이 무슨 낌새라도 알아차릴까 봐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변경하고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차가 서는 일은 없어야 했다.
도착까지 약 세 시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도착하고 난 뒤의 깜짝 파티를 생각하면 도로 위에서 버텨야 할 소중한 동생과의 시간이 그리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서먹한 분위기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억울할 정도로 동생은 잘도 떠들어 댔다. 내 앞에서 속 편히 떠들 수 있는 동생의 뻔뻔함이 역겨운 속내와는 별개로 어색한 침묵보다는 나았다. 떠드는 동안은 동생도 괜한 생각을 할 수 없을 테니 나는 적당히 흘려들으며 이따금 호응했다.
장장 두 시간이 넘도록 별로 궁금하지 않은 부모님과 제 근황에 관해 얘기하는 동안 동생 몰래 룸미러를 힐끔거렸다. 그렇게 신경 쓰지 못한 새에 이야기의 주제가 묘한 곳으로 흘렀다.
“최근에 엄마랑 교회 봉사를 하러 갔거든.”
엄마와 동생, 그리고 봉사. 한 문장에 모인 단어들의 아귀가 영 맞지 않는다.
“딱 한 번 아버지 별장이 있는 지방으로 갔어. 완전 촌구석이야. 산에 둘러싸여서 무슨 섬 같아. 기운이 쎄한 게…… 사람들도 좀 이상해. 왜 그런 거 있잖아.”
봉사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름 모를 시골 마을의 험담으로 이어졌다.
“고립된 곳일수록 모여 사는 사람들끼리 좀 이상해지는 거.”
동생의 이야기에 문득 어릴 적 우리 집의 식사 풍경이 떠올랐다. 한 지붕 아래,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내가 먹을 음식은 따로 준비되었다. 푸짐하게 담긴 따뜻한 음식과 대비되는 초라한 반찬과 언제나 식어서 굳어 있던 밥. 그 비참한 자리가 싫었지만 피할 선택권조차 내겐 없었다.
그 모든 걸 두 눈으로 보고도 방관해 온 주제에 교회? 봉사?
비웃어 줄 가치도 없다. 걸러 내지 못한 조소가 섞이지 않게 조심히 동생의 말을 되풀이하며 대꾸했다.
“알지……. 다 같이 이상해지는 거.”
빗길에 핸들이 자꾸 미끄러졌다. 물에 젖은 도로를 주시하며 실수인 척 가드레일에 조수석을 처박아 버리는 상상을 했다.
아니야. 동생은 그렇게 죽어 버려서는 절대 안 됐다. 핸들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래도 거기 교회 수녀님이 진짜 좋으신 분이야. 사람을 차별하는 법이 없어. 지옥에 가서 악마라도 품어 주실 분이라고 다들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야기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 사람 보니까 나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막 들더라.”
하는 말 하나하나가 전부 위선이다. 속으로 치를 떨며 또 무슨 개소리를 하나 기다리는데 끊임없이 떠들던 입이 잠잠하다. 내가 뭐라고 반응해 주길 기다리는 건가.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할 타이밍인가 보다.
“그래서 하는 거야? 봉사 활동?”
“……어?”
“천국이라도 가려고?”
숨기지 못한 비죽거림이 기어코 말투에 묻어났다. 차 안의 공기가 서걱거리며 굳는다. 실수했단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동생은 멋쩍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뭐…… 비슷하지. 좋은 일 하면 용서받는 기분도 들고…….”
이어 걱정했던 침묵이 찾아왔다.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30분으로 줄어 있었다. 아직 시작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 몸이 결린다. 빗속을 쳐다보느라 눈도 뻑뻑했다. 무슨 말을 해야 분위기가 풀릴지 고민하는데 다행히도 동생이 먼저 침묵을 깼다.
“형.”
“응.”
최대한 담담히 대답했다.
“형은 어떻게 지냈어?”
다시 말문이 막혔다. 얼마든지 적당한 대답을 꾸며 낼 만한 질문이건만 머릿속이 텅 빈다.
동생은 내게서 어떤 말이 듣고 싶은 걸까. 다 잊고 잘 지냈다고? 10년을 한 문장에 압축할 수 있는 말이 존재하기나 할까.
그래서 전혀 다른 답을 했다.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으니까.
“뭘 좀 키우기 시작했어.”
“뭐? 진짜? 뭔데?”
동생이 진심으로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하기야 동생은 어릴 적부터 고양이니 강아지니 노래를 불렀더랬다. 하지만 동생의 천식 때문에 털 짐승은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한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그때는 제 몸을 돌보는 일조차 버거워하면서 뭔가를 키우고 싶어 안달하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름이 나비야.”
“작명 센스가…… 형답네. 사진 있어? 종이 뭔데?”
말없이 웃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을 텐데, 생각하며.
“보고 싶어? 나중에 보여 줄게.”
“…….”
잠시 말이 없던 동생이 이내 활짝 웃었다.
“진짜지? 약속한 거다.”
캠핑장은 산 중턱에 있었다. 캠핑장 부지에 마련된 주차 공간까지는 경사로가 어느 정도 닦여 있었다. 10분 거리의 울퉁불퉁한 흙길에 차체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뒤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러면 내 시선은 어김없이 룸미러로 향했다.
“아무도 없다! 전세 낸 것 같네!”
아웃도어용 우의를 입은 머리와 어깨 위로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쳤다. 동생이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리며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 소리쳤다.
“……그러게. 아무도 없네.”
뒤집어쓴 모자 안으로도 비가 들이쳐서 얼굴이 계속해서 젖었다. 빗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손으로 닦아 내며 넓게 트인 공터로 걸어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텐트를 칠 수 있는 빈 부지 몇 곳이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자체에서 만들어 두고 관리가 소홀한 곳이라 인터넷 예약 시스템만 갖춰져 있을 뿐, 관리자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물론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비까지 쏟아지니 여기서 잔치를 열든 굿판을 벌이든 아무도 모를 것이다.
“형!”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동생이 차 트렁크에 손바닥을 얹고 날 쳐다보고 있다. 몸이 약하단 이유로 청소년기를 집 안에서만 보내서인지 비현실적인 풍경과 비일상적인 상황에 동생은 어린애처럼 신이 나 보였다. 과하게 흥분한 눈이 형형했다.
“텐트부터 칠까?! 트렁크에 있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동생에게 바보처럼 똑같이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열어 봐.’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용케 내 입술을 읽은 동생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트렁크 손잡이를 더듬었다. 동생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덜컥.
차체가 얕게 출렁이며 트렁크 뚜껑이 벌컥 열렸다.
한 손으로 완전히 열린 뚜껑을 받쳐 든 채 동생은 트렁크 속을 내려다보았다.
동생은 나와 별로 닮은 구석이 없었다. 태어난 배가 달라서라고 한다면 같은 씨를 받았음을 증명할 만한 부분도 찾기 어려웠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태어나 처음으로 나와 동생의 닮은 부분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트렁크 속을 보고도 동생은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나자빠지지 않았다. 빗속에 서서 그저 묵묵히 안을 들여다볼 뿐. 가만히, 미동도 없이. 움직이는 건 오로지 빗줄기뿐이었다.
고립된 산속에서 이상해져 버린 두 사람, 그리고.
“……나비야.”
작게 남자를 불렀다. 동생의 등이 크게 움찔한다.
아. 아무래도 내가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나 보다.
∞ ∞ ∞
어릴 적 나는 미성숙한 몸으로 나를 뱄다는 여자의 존재도 모른 채 자랐다. 하지만 어렴풋이 동생과 그리고 가족들과 내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내 집이 아닌 그들의 집에 끼어 사는 듯한 이질감이 항상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내게 가족 흉내를 내던 사람들이 준 것은 고립감과 배척심이 다였다.
결국, 나조차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집을 나가려던 것이 열다섯 살 때였다. 그러나 거창하게 포장된 사춘기의 사소한 일탈이었을 뿐, 만약 그날 집을 나가는 데 성공했더라도 나는 해가 뜨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왔을 거였다. 나에겐 그들이 내뿜는 36도의 생리적 온기라도 필요했으니.
그 당시 내겐 한밤이었고 어른들에겐 남은 하루의 시작이던 시각, 나는 2층의 가장 구석진 감방에서 나와 조용히 1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더는 못 하겠어요. 내보내든가 해요.」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엄마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렸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그 자리에 섰다. 보이진 않지만 심상찮은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엄마가 내보내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막상 두 귀로 듣게 되자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로부터 답은 없다. 석상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원인 제공자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 집의 주인이자 방관자. 숨겨 온 추잡한 비밀이 누군가에게 들릴까 의식하듯 엄마는 조용히 외쳤다.
「커 갈수록 제 어미를 닮아서 소름 끼친다고요! 걜 볼 때마다 그 여자애가 당신에게 했던 짓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런데 나보고 그걸 어떻게 더 키우라는 거예요!」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히스테릭해졌다.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동생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저녁 내 앓다가 간신히 잠든 동생은 혼자 꿈나라에 가 있었다. 내게만 가혹한 현실이 다시금 나를 불렀다.
「그렇게 평생 입 다물고 당신 새끼랑 살아요. 나는 나가서 내 새끼랑 살 테니까.」
「그러면.」
낮고 딱딱한 아버지의 음성은 언제나 나를 죄지은 사람처럼 위축되게 만들었다.
「죽이면 되겠어요?」
아무런 온도도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내 무릎을 꺾고 날 바닥으로 짓눌렀다. 나는 숨을 참고 비틀거리며 난간을 붙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뭐라고요?」
「그놈도 내 손으로 죽이고 나면 그때는 당신 속이 좀 시원해지겠어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었다. 겁에 질려 발소리를 숨기는 것도 잊고 달려갔다. 숨을 곳이라곤 감옥 같은 내 방뿐이었다. 아버지나 엄마가 따라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단 상상에 덜덜 떨며 숨을 죽이고 문밖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들리는 거라고는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밤새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악몽 같은 진실에 깔려 허우적거렸다.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도 날 낳은 여자가 어떻게 됐는지, 듣지 못한 진실이 더 두려웠다.
정말로 아버지가 그 여자를 제 손으로 죽였을까? 나도 그들의 손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게 너무 두려웠다.
기절하듯 의식을 잃고 억지로 다음 날을 맞았을 때, 내 정신은 빈껍데기만 남은 채였다. 의지를 잃은 몸은 길들여진 대로 아침 식탁에 앉았다. 어젯밤 내 죽음을 이야기하던 아버지와 엄마는 평소와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간밤의 일을 끔찍한 악몽으로 치부해 덮어 두는 것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그러지 않고는 그 집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몇 년 뒤, 동생의 자작극에 엄마가 내 목을 조르지만 않았다면 그 일은 내게 영원히 악몽으로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엄마는 기어코 내게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그 후로는 가라앉지 않으려 소리 없이 발버둥을 치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에서 자란 이가 나만은 아니었다. 10년 만에 마주한 동생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잠시 동생의 등을 바라보던 내 시선은 얼마 못 가 다른 곳을 향했다. 트렁크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아. 맞다.”
뒤늦게 이유를 깨닫고 트렁크로 다가가 동생 옆에 섰다. 커다랗고 하얀 나신이 썩은 나무 밑동 속에서 동면 중인 굼벵이처럼 몸을 말고 누워 있다. 입술엔 넥타이를 여러 겹 겹쳐 만든 재갈이 물려 있고 두 손목과 발목은 오랜 시간 가죽 벨트로 칭칭 동여매 피부가 얼룩덜룩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혹시나 이성을 잃고 날뛰지 못하도록 해 놓은 조치를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남자는 차에 태울 때랑 별반 다를 것 없이 죽은 듯 늘어져 있다. 빗물에 젖어 가는 몸이 하얗다 못해 푸르렀다. 시체 같은 몰골이었으나 내게는 남자의 심장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형이 그런 거야……?”
동생이 물었다. 확연히 잦아든 목소리가 빗속에 묻힌다. 그러나 어깨를 맞댄 우리는 은밀한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 있었다.
“응.”
내가 줍고, 내가 가르치고, 내가 먹이고, 내가 굶기고, 내가 때리고, 내가 묶고, 내가.
여기까지 데려왔다.
“설마 여기 오자고 한 것도.”
동생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숲 가운데에 버려진 캠핑장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 시선을 그대로 내게 가져온다. 동생의 눈에서 의심이 빗물처럼 흘러넘쳤다.
“왜…… 날? 왜 나야?”
동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투였다. 반쪽만 같은 피가 남보다 못했음을 동생도 알고 있을 터다. 트렁크 속의 남자가 누군지,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그런 것보다도 우리의 비틀린 형제 관계를 지금의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더 궁금해했다. 동생은 트렁크 속을 볼 때보다 더 복잡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형…… 나 믿어?”
믿는다. 네가 나에게 죄책감이란 걸 가지고 있다면 여기서 내게 도움이 되어 줄 거란 걸.
“너한테 기회를 주려고.”
나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던 동생은 우의에 달린 모자를 거칠게 벗고 쏟아지는 빗물을 얼굴로 받았다. 그리고 가슴이 들썩이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이윽고 뭔가 결심한 듯 트렁크 속을 잠시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찮을까? 들키면…….”
“괜찮아. 들켜도 너한테는 피해 안 가.”
들킬 일을 걱정하는 건 오로지 살아남은 내 몫이 될 테니.
“어디, 어디에 묻어…? 삽은? 그냥 이대로 묻을 거야?”
묻을 게 없는데 삽을 가져왔을 리가.
단단히 착각한 동생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뒤로 돌아 미친놈처럼 빈 캠핑장을 두리번거렸다. 동생의 횡설수설한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손목에 감긴 벨트를 풀었다. 발목의 벨트까지 풀고 자국이 남은 피부를 주물렀다. 푸르스름하게 변한 살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나는 조심히 남자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나비야…….
“일어나.”
마지막으로 남자의 뒤통수에 묶인 매듭을 풀어내자 빗물을 잔뜩 머금은 넥타이가 남자의 입술에서 흘러내렸다. 뺨까지 길게 남은 눌린 자국을 살살 쓸어 주자 혈색을 잃고 푸르게 식은 입술이 달싹인다.
“얼른. 밥 먹을 시간이야.”
차가운 입술 안으로 내 숨을 불어넣자 빗속에서 피어오른 입김이 남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형.”
뒤에서 들리는 동생의 부름을 무시하고 서서히 뜨이는 눈꺼풀을 들여다봤다.
“지금 뭐 해…?”
불안함이 스민 목소리. 덜그럭덜그럭, 사태를 파악하느라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동생의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남자가 흐르는 빗물에 눈을 깜박거렸다. 며칠 만에 마주한 시선이 건조하다. 귀신같이 하얀 얼굴은 무표정했다. 잘 잤냐는 인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천천히 옆으로 비켜 서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다시 의문에 빠진 혼란스러운 얼굴을 향해 이번엔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가만히 있어!”
“뭐?”
빗속에서도 동생이 잘 들을 수 있게 외쳤다.
“그럼 금방 끝날 거야!”
내가 베풀 마지막 친절이었으나 동생은 더 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사색이 된 동생이 뒷걸음질 친다.
“형…… 뭐야 저거?”
남자가 마침내 알에서 깨어나듯 말고 있던 몸을 폈다. 트렁크 안에 질척하게 고인 빗물이 찰박인다. 모든 것이 어둡게 젖은 와중에 남자만이 하얗게 빛났다. 더러운 물에서만 피는 꽃에게 왜 사람들이 순결과 신성의 의미를 부여했는지 그 아이러니를 지금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꽃이 아니었다. 고개를 든 남자가 동생을 응시한다. 먹잇감을 발견한 남자는 순식간에 포식자로 돌변했다. 흙탕물을 튀기며 남자와 동생이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자신이 무엇에게, 뭐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는지 모르는 동생은 거세게 저항했다. 본능을 따라 머리를 노리던 남자의 이빨이 비껴 나 목덜미에 박혔다.
“크, 으아악!”
뿜어지는 핏줄기와 비명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 모든 건 비에 덮였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하여간 말로만 형이지 내 말 따윈 개무시하면서.
모처럼 해 준 진심 어린 조언이 다 허사가 됐다. 허기가 길었으므로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식사를 마친 남자에게 입힐 우의를 찾아 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
우의와 수건을 담아 둔 종이봉투를 뒤지는데 퍽, 하는 소리가 빗속을 뚫고 들려왔다. 남자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씨발. 좋지 않은 예감에 얼른 동생과 남자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헉헉거리며 팔꿈치를 바짝 세운 동생 옆에 남자가 젖은 흙바닥 위로 쓰러져 있었다.
저 한낱 도시락 새끼가 지금 나비를 때린 거야?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분노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차 문틀을 꽉 쥐고 빌어먹을 동생을 노려봤다. 목을 틀어쥔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치명상이다. 날 보는 동생의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내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너 날 믿었어?
드디어 내 속내를 알아챈 동생이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얼마 살지도 못할 텐데. 끈질긴 새끼란 건 알았지만 끝까지 이럴 줄이야.
종이봉투 가장 밑바닥까지 깊이 손을 넣었다. 쓸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묵직하게 손에 잡히는 흉기가 이제 제법 익숙했다.
빗물에 미끄러지지 않게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돌아보자 비틀거리며 올라왔던 길을 따라 도망치는 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포장이 안 된 흙길은 개펄처럼 미끄럽고 발이 푹푹 빠졌다. 저렇게 뛰면 피가 더 빨리 뿜어질 테니 발은 점점 더 느려질 터다. 따라잡는 건 문제가 아니었으나 동생이 가지고 있을 핸드폰이 변수였다. 일단 쓰러진 남자를 끌어다가 뒷좌석에 눕혔다.
“미안해, 나비야. 팔다리라도 먼저 잘랐어야 했는데. 내가 금방 잡아 올게.”
더러워진 몸 위에 목욕 수건을 꼼꼼히 덮어 주고 차 문을 닫고 나니 그사이 동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곧바로 동생이 도망친 방향으로 달려갔다.
운이 좋았다.
날씨가 날 돕고 있었다. 무른 땅 위에 선명하게 남은 동생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길을 따라 내려가던 발자국은 한 지점에서 크게 파인 흔적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 고인 빗물이 붉었다. 여기서 굴러 넘어진 모양이다. 그 아래로는 더 발자국이 없었다.
가느다란 시선으로 길옆에 우거진 나무숲을 보았다. 숲 안쪽에서 비 비린내에 감춰지지 않는 다른 냄새가 느껴진다. 망설임 없이 무성한 잡풀을 헤치고 어두컴컴한 나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땅은 수풀에 덮여 있었다. 큰 보폭으로 질퍽대는 땅을 뭉개며 걷다가 비에 잠긴 숲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나무가 빽빽이 에워싼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감이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는 사냥감을 감지했다. 그러나 비를 맞는 모든 나무가 잎을 떨고 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한 걸음 더 내디뎠을 때, 무언가 내 발을 붙잡았다. 신발 밑창 아래에 단단한 것이 밟혔다. 질척하게 녹은 땅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발을 떼 보니 진흙에 묻힌 납작한 형태가 보였다.
핸드폰이었다. 재빨리 건져 올려 화면을 터치하자 선명한 화면이 떠오른다. 액정 군데군데 비에 씻기지 않은 핏자국이 묻어 있다. 동생의 것이 확실했다. 여기서 전화를 하려다가 내 기척을 듣고 숨는 동생의 모습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 잡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기분이 좋아지자 말문이 터졌다.
“우리 나비 본 소감이 어때? 얘기 좀 해 봐. 보고 싶다며. 나 약속 지켰다?”
다시 확인한 핸드폰 화면에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 알림이 있었다. 잠금 때문에 내용까진 볼 수 없지만, 발신자는 엄마였다.
“나한테 용서받고 천국 가려던 거 아니었어? 오늘 다 이뤄. 우리 나비 배만 채워 주면 나도 그날 일 용서해 줄게. 그럼 네가 바라던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핸드폰 전원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동생을 향해 망치를 들어 올렸다.
“이거 보여? 너도 한 번쯤 누군가한테 휘두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지? 근데 해 보니까 아주 별로더라. 그래서 네가 얌전히만 있어 주면 나, 이거 쓸 생각 없어.”
치명상을 입은 놈이었다. 내 손에는 쉽게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흉기가 들려 있으니 무슨 말을 해도 동생은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 낸 후 망치를 든 손을 내리고 숲을 훑었다.
이 쥐새끼가 어디에 숨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널 진짜로 해치기 전에 나와.”
긴 날숨에 하얗게 입김이 흩어진다.
우르릉.
먼 곳에서 아득하게 천둥이 치고 철벅, 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으아아아혀어엉!”
내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동생의 발악이 빗속을 관통했다. 비의 장막을 뚫고 내게 박힌 건 동생의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무딘 도끼날 같은 무언가가 이마를 찍었다. 뇌가 울리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꺼지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물방울과 깨진 이마에서 흐르는 뜨거운 물줄기, 닮은 듯 다른 두 종류의 액체가 섞이며 눈 앞을 가렸다.
정신이 없는 중에도 손이 비어 버렸다는 걸 깨닫고 경련하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하얀 입김을 토하며 서 있는 동생의 위로 붉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동생이 늘어뜨린 두 손에 제 머리통만 한 돌이 들려 있었다. 악에 받친 얼굴이 꼭 제 엄마를 닮아서 우스웠다. 동생의 푸르게 질린 입술이 떨렸다.
“웃음이 나와? 지금?”
“그럼 울어 줄까?”
나는 입꼬리를 더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입술을 짓씹은 동생이 돌을 내던지자 피가 묻은 돌이 진흙을 튀기며 땅에 처박혔다. 얻어맞은 곳부터 한쪽 눈이 얼얼해져 온다. 나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기를 써서 고개를 비틀었다. 설령 눈알이 뭉개졌다고 해도 멈출 수 없었다.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떨어진 망치가 보였다. 간신히 몸을 뒤집어 진흙탕 위를 기었다. 사나운 빗방울이 무뎌진 몸을 할퀴었지만 내 집념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발치에 선 동생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나를 가만히 두었다. 뒤돌아 도망칠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생에게서 풍기는 짙은 피 냄새가 이 고립된 산속으로 죽음을 부르는 중이었다. 동생이 도망갈 생각이 없다면 나는 놈이 자멸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망치를 잡으려고 팔을 뻗자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없는지 동생이 내 팔을 무참히 짓밟았다. 남자에게 물어뜯긴 팔이었다. 칼로 저미는 격통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말았다.
“으윽.”
악문 잇새로 흙탕물이 밀려들었다.
“이게 형의 본 모습이야…? 잘도 날, 아니지 우리 가족 전부를 속였네.”
한쪽 귀가 물에 잠겨 동생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들었다. 내게서 반응이 없자 동생의 발이 내 어깨를 거세게 걷어찼다. 뼈가 엇갈리는 소리가 나며 몸이 진흙탕을 굴렀다. 걷어차인 곳이 으스러진 듯 고통스러웠다. 처벅처벅 물을 튀기며 다가온 동생이 흙탕물에 처박혀 신음하는 나를 차가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형.”
“무슨 말. 하아…… 아까부터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눈에 팔까지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도 겁이 나기는커녕 동생을 올려다보며 비죽거렸다. 왜일까. 동생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죽은 애인에게서 날 지켜 주었을 때처럼 남자가 나타날 거란 기대 때문일까? 아니면 동생은 날 죽일 만한 배포가 없다는 확신?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죽음은 더 이상 날 두렵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타인의 것이든, 내 것이든. 나비의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배 위에 올라앉은 동생이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골이 울리고 눈앞이 흔들렸다. 과다 출혈과 정신적 충격으로 이성을 잃은 동생은 제 목숨을 건지기보다 날 저승길의 길동무로 데려가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미웠어? 죽이고 싶을 만큼? 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나도 그땐 어렸다고…….”
나에게 동생은 굶주린 남자에게 먹일 한 끼 식사 거리에 불과했다. 그저 구하기 쉬운, 아무 의미도 없는 고깃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라리 남자의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면 자신이 죽는 이유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긋지긋한 과거에 갇혀 동생은 정말 억울한 사람처럼 울먹였다. 동생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내 감정은 식어 가기만 했다.
“나한테 사과할 기회도 안 주고 외면한 건 형이잖아. 나한테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줄 순 없었어?”
동생은 울고 있었다.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루한 한숨이 흘렀다.
“지금 그 기회를 주겠다고.”
“그게…… 어떻게 용서가 될 수 있어?”
동생이 내게 원하는 건 용서라는 형식의 면죄부임을 안다. 피를 나눠 받았다고 해서 제 마음의 부채감을 털어 내기에 급급한 이기심에 응해 줄 의무가 내겐 없다. 더는 시간만 아까웠다. 비가 내리는 숲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추웠고 혼자 있을 남자가 걱정되었다.
억지로 눈매를 늘어뜨려 연민과 후회의 낯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멱살을 붙든 동생의 손을 겹쳐 잡았다. 동생이 손을 흠칫 떨었다. 시린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동생의 눈을 속이고 틈을 노렸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동생의 두 눈이 내 입술에 쏠렸다. 나로서는 이유를 알기 어려운 간절한 눈빛에 하마터면 끝까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오늘 내가 널 죽이려 한 건 엄마한테 비밀로 해 줄래?”
내 조롱을 알아차린 동생의 얼굴에 금이 갔다.
“가끔 형을 보면 소름이 끼쳐서 견딜 수가 없었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형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어.”
“네가 날 사람 취급한 적은 있어?”
멱살을 쥔 손에서 미약하게나마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어서 얌전히 쓰러져 주기를 바라는데 익사자의 것처럼 온기라곤 없는 손이 내 목을 스멀스멀 감쌌다.
“근데 이제 알 것 같아. 형이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형 때문이야. 형 때문에 우리 가족 전부 불행했다고!”
죽음을 앞두고 동생이 드디어 제 본색을 드러냈다. 용서를 바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곧 마주할 지옥이 두려워서 불행의 씨앗은 나였노라고 감히 내 앞에서 그렇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나기는커녕 그저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남자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너…… 그냥 입 닥치고 빨리 뒈져 주면 안 되겠어?”
“…….”
“나비가 기다리거든.”
동생의 얼굴에 오물처럼 뒤엉켜 있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상실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하얗게 표백된 표정으로 동생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엄마 말이 맞았어. 형은 태어나선 안 됐어.”
콱 힘이 실린 손아귀가 숨통을 조였다. 좁아진 기도에서는 거친 쇳소리가 나고 귀에서는 찢어지는 이명이 파고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바닥의 진흙을 움켜쥐고 동생의 핏대 선 눈알에 흩뿌렸다. 동생이 비틀거리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맹수처럼 손톱을 세워 목덜미에 난 상처를 헤집었다. 무자비한 공격에 동생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크헉…!”
동생의 피가 얼굴 위로 쏟아지고 내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목을 조르던 두 손이 떨어지자마자 동생을 밀치고 일어났다. 동생은 좀처럼 몸에 힘을 싣지 못했다. 헉헉거리며 망치를 끌어와 쓰러진 몸뚱이 위에 올라탔다. 동생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늘어졌다.
잡은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꽤 괜찮아서 일말의 자비심이 샘솟았다. 흠뻑 젖은 동생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오늘의 일에 대해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딱히 네가 싫어서라기보단 그냥 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동공이 풀린 동생의 입술에서 말 대신 피가 흘러나왔다. 무기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동생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러나 핏물이 흐리게 번질 뿐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와 소용없었다.
“약속대로 이제 용서해 줄게.”
그렇다고 이대로 쉽게 끝내 줄 생각은 아니었다. 망치를 높이 들어 올리고 신중하게 내리칠 부분을 가늠했다. 잘못해서 머리를 부쉈다간 소중한 식량을 다 흘려 버릴지도 모르니.
아쉽게도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 이건 내 나비를 건드린 대가야.”
숨을 참고 힘껏 내려친 망치가 콰직 소리를 내며 동생의 눈알에 박혔다. 손끝의 감각이 무뎠고 터져 나온 숨 탓에 눈앞이 입김으로 부옇게 흐렸다. 확실히 두 번째는 처음보다 쉬웠다. 아니, 그보단 상대가 달라서겠지. 사랑의 매와 도축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숨이 꺼져 가면서도 동생은 내 우의를 움켜쥐었다. 망치가 박힌 왼쪽 눈에서 피가 눈물처럼 솟구쳤다.
“형은…….”
더 편하게 갈 수도 있었는데.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꼴이 이제 와 딱했다.
“……악마야.”
동생의 마지막 저주가 빗소리에 묻힌다. 세상이 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한쪽뿐인 눈에 대고 나는 과거에 그랬듯 좋은 형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일 축하해. 내 동생.”
내 첫 사냥감.
동생의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숨이 멎은 입술이 푸르게 굳어 빗줄기에도 가려지지 않는 피 냄새만이 진동했다. 끝까지 저 할 말만 하고 간 동생의 얼굴에서 망치를 뽑으며 난데없이 허기를 느꼈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아무리 빈속으로 진을 뺐다지만 이 상황에서 배가 고플 수가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망치로 땅을 디뎠다. 더 늦기 전에 동생을 남자에게 먹여야 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속옷까지 흠뻑 젖은 몸이 무거워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붉게 물들었던 세상이 돌연 컴컴하게 어두워진다. 빌어먹게도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모든 신경이 뒤엉키는 듯했다. 헛디딘 다리가 꼬이고 감각이 무뎌진 몸이 곧장 진흙탕 위로 곤두박질쳤다. 깜빡이는 시야로 차게 식어 가는 동생이 보였다. 시간이 없었다.
안 되는데…….
버텨 보려는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내 시야는 암전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빗소리가 내 의식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희미한 불씨처럼 아직 꺼지지 않은 청각이 차박차박 젖은 땅 위를 밟는 소리를 감지했다.
누구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몸으로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몸조심하라고 말했는데.”
가늘고 서늘한 목소리가 나를 나무란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허리를 휘감고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나비야.”
“그래. 아직은 네가 그놈 곁에 있어 줘야겠어.”
이어 허공에 뜬 몸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비 냄새와 피 냄새 사이에 또 다른 냄새가 섞여 있다. 익숙한 체취를 떠올리게 하지만 전혀 다른 낯선 향기였다.
“아.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니? 불량품이지만, 너처럼.”
불길한 키득거림이 의식과 함께 아득하게 멀어졌다.
∞ ∞ ∞
그치지 않는 빗소리가 막 하나를 두고 둔탁하게 들려왔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따뜻하고 물기가 마른 몸은 건조했다. 몸에 닿는 타인의 매끄러운 살결에서는 마음이 놓이는 체취가 풍겼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을 놓칠 때처럼 의식이 빠르게 돌아오고 아쉬움이 가득 남은 눈꺼풀을 마지못해 들어 올렸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하얀 가슴이었다. 그리고 곧 차 뒷좌석의 좁은 공간에서 남자가 나를 품에 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와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살을 꼭 붙인 채였다. 안도감에 목이 메었다. 그것도 잠시, 신경이 살아난 몸이 갈기갈기 찢긴 듯 아파져 왔다. 나는 남자의 몸에 기댄 채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먹었어?”
내가 깨어났음을 안 남자가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깨진 이마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닿고 물컹한 살덩이가 축축하게 상처를 적신다. 상처를 더듬는 아릿한 통증이 뿌듯하게 가슴을 채웠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다시 감았다. 무척이나 피곤했다.
“많이 다쳤어요.”
가까이 다가온 입술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다.
“먹었구나. 다행이다.”
마음이 놓여 비로소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혈색이 돌아온 남자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고 부서지고 찢긴 날 내려다보는 슬픈 눈빛에 고통이 씻겨 나가는 듯했다. 그리웠던 남자의 뺨을 더듬었다. 그러나 내 손길이 괴로운 듯 고개를 물린 남자가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물었다.
“왜 그랬어요?”
남자의 뒤로 굵은 빗방울이 검은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해가 져 어두워진 녹색 숲이 내게 잠시 잊었던 현실을 일깨웠다. 이제 이런 짓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남자에게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그러나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나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언제부터인지 말하긴 어려웠지만 나는 모든 걸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중에 날 원망하는 남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스러질 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몸속의 모든 장기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억지로 끌어 올린 입가가 경련했다. 손목을 비틀어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허둥지둥 남자를 부둥켜안았다. 이런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 개지랄을 떤 게 아니었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나밖에 없다고 울면서 말해 주길 바랐다. 아니, 그냥 잘 먹었다는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남자를 위해 얼어붙었던 마음이 남자에 의해 어쩔 도리 없이 녹아내렸다. 익사할 것만 같다.
“정말 몰라요? 당신 죽을 뻔했어요.”
“안 죽었잖아.”
항의하듯 곧바로 덧붙였다. 그러나 안기면 당연하게 등을 마주 안아 주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아 금방 서러워졌다.
“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두 번이나 당신을 죽일 뻔했어.”
“아니야.”
남자의 등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날 죽게 내버려 뒀다면… 읍.”
괘씸한 남자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 말은 견딜 수가 없었다. 동생을 먹인 게 후회됐다. 자꾸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남자가 처음으로 미워졌다. 무르게 열리는 입술을 짓누르고 이를 세워 깨물어 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끝내 볼품없이 터져 버린 흐느낌이 남자의 입안으로 넘쳐흘렀다. 그제야 커다란 손이 등을 감싸 안아 준다. 그 마지못한 손길에도 기쁜 나머지 거칠게 물어뜯던 입맞춤이 금세 뭉근해져 버렸다.
남자의 입속에서 온통 동생의 피 맛이 느껴졌다. 그게 싫어서 남자의 입천장과 볼 안쪽의 여린 살 그리고 나를 달래듯 부드럽게 얽히는 혀를 핥아 대며 내 타액을 덧씌웠다.
남자를 향한 증오와 애정이 뒤섞인다. 이미 뜨거운 온도를 가진 감정들이 섞여 끓는 듯한 흥분으로 바뀌기는 쉬웠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남자의 두 뺨을 붙잡아 입술을 뗐다. 열기를 띤 두 눈에 혼란스러움이 어지러이 뒤엉켜 있다. 나는 멍청한 괴물의 머릿속에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명령을 새겨 넣듯 한 글자 한 글자를 짓씹어 가며 말했다.
“나만 두고 혼자 죽으려고? 내가 내버려 둘 것 같아? 넌 절대 못 죽어. 알겠어?”
“…….”
“대답.”
“.......”
“대답해, 이 개새끼야!”
악을 쓰며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무딘 손톱에 살갗이 찢겨 피가 죽죽 맺혔다. 그런데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 해진 피부 위에 손톱을 더 깊게 박았다. 순식간에 가슴 위에 난도질한 자상들이 그물처럼 얽혔다. 제 살을 할퀴는 내 팔을 남자가 붙잡아 말렸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남자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죽고 싶어졌다.
“그만 해요.”
“놔! 이거 놔! 나도 죽어 버릴 거니까!”
이대로 가슴을 가르고 펄떡이는 심장을 꺼내 남자의 얼굴에 집어 던져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내 시체를 끌어안고 후회하는 얼굴을 봐야만 살 것 같았다!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뿌리치려 팔다리를 마구 휘젓자 차체가 요동쳤다. 우악스러운 힘이 차 시트로 내 몸을 찍어 눌렀다. 양팔은 남자의 손아귀에 하반신은 남자의 몸 아래에 깔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나는 피맺힌 가슴을 들썩이며 남자를 노려봤다.
차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내 숨소리와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정적을 밀어냈지만 날카로운 살기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날 제 밑에 깔아 놓고 남자는 내 몸에 남은 상처를 하나하나 제 것인 양 고통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그런 눈으로 볼 거면서 감히 죽겠다는 소리를 해?
비틀린 입술 사이로 원망을 씹어 뱉어 냈다.
“네가 나 이렇게 만들었잖아.”
크게 벌어지는 눈, 달싹이는 입술. 그러나 이내 흔들리는 시선이 나를 비껴 갔다. 내게서 도망치려는 남자를 더 몰아붙였다. 되돌아 나갈 길이 없음을 알려 주었다.
“너만 죽으면 다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해? 틀렸어. 이제 우린 이렇게라도 살아야 해.”
“난…… 나는 모르겠어요.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싫어요.”
“……이미 늦었어.”
그런 걱정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모르겠어? 너 없으면 나 죽어.”
“…….”
“너를 가져도 죽는다면 차라리 죽는 순간까지 절대로 안 놔줄 거야.”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젖어 간다. 현실을 보라는 거지 탓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쓸모없는 감정에 시달리는 남자를 위로했다.
“난 널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 정말로 뭐든지.”
남자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나비야.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너를 대신해 괴물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요?”
남자가 마치 마지막 기회를 주듯 물었다.
“있어.”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즉답에 내게 못 박힌 남자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동시에 묵직한 날숨이 내 뺨 위로 흐른다. 어김없이 몸 안쪽이 못 견디게 뜨거워졌다. 허리를 세운 남자가 내 무릎을 잡았다. 귀찮기만 한 죄책감 따위는 절절 끓는 맹렬한 욕망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기꺼이 다리를 벌리고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나비야.”
애정을 담아 부르는 내 목소리에 남자의 눈매가 몽롱하게 풀어진다. 나는 다리 사이로 손을 내리며 속삭였다.
“넌 그냥 내 생각만 하고.”
기대보다 더 뜨겁고 단단한 남자의 성기가 만져졌다.
금방 이렇게 될 거면서.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냥 나한테 미쳐 있으면 되는 거야.”
나처럼.
남자가 내 오금을 밀어 다리를 제 어깨 뒤로 넘겼다. 등허리가 공중에 떠올랐다. 무릎이 접히고 발가락이 차 천장에 닿는다.
“그 말도 후회하지 않길 바랄게요.”
“아…!”
구겨지듯 남자에게 짓눌린 몸이 우릿한 고통을 호소했다. 덜덜 떨리는 하반신이 치켜들리고 드러난 치부가 내게도 훤히 보였다. 그러나 흥분에 전 뇌는 고통과 수치심을 모두 살 떨리는 성감으로 받아들였다. 남자는 시선으로 상처에 얼룩진 몸을 훑다가 돌연 붉은 혀를 내어 사타구니 안쪽의 여린 살을 쓸었다. 노골적인 애무에 성기가 배꼽을 향해 움찔거렸다.
“내가 당신을 망가뜨려 버리면 어떡하죠?”
갸륵한 말에 코웃음이 났다. 날 잡아먹을 뻔했으면서 말은 잘한다. 갈고리처럼 굽힌 다리로 남자의 등을 내게 더 끌어당겼다. 민감해진 허벅지 안쪽에 뭉클한 입술이 짓눌리고 날카로운 코끝이 파묻힌다. 닿은 숨결이 데일 듯 뜨거워 빈 구멍이 제멋대로 조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말없이 눈을 감은 남자가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내 냄새를 각인하려는 듯 오래도록.
이윽고 숨을 멈추고 눈을 뜨자 몽롱한 두 눈이 약에 취한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너덜거리는 몸이 남자를 버텨 낼지 한발 늦은 걱정이 들었을 때, 활짝 벌어진 볼기 부위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엉덩이 살을 깨문 남자가 따끔한 통증에 바르작거리는 내 하반신을 단단히 잡아 고정했다.
“으, 흣.”
이어 통증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질척하고 간지러운 감각이 잔뜩 예민해진 구멍에 퍼부어졌다. 입술 안쪽의 축축한 점막으로 구멍 위를 덮고 주름을 빨아들이는 낯설고도 강렬한 느낌에 허리가 들썩였다.
“아, 아… 싫, 하앗…!”
그저 핥기만 할 때와는 너무도 다른 야릇한 감각에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무의식중에 고개가 꺾이고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하아…… 전부 맛보고 싶어요. 남김없이 다.”
흥분에 이지러진 시야로 혀끝을 뾰족하게 세우는 남자가 보였다. 기대감에 벌름거리는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역시 똑똑히 보였다. 아직은 단단한 내벽을 핥는 붉은 살덩이에 사정감과는 다른 쾌감이 배 속을 두드린다. 순식간에 아랫배가 단단히 뭉쳤다.
“아흐읏…!”
왈칵 무언가가 흐르는 듯한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쁜 입술로 추잡하리만치 구멍을 빠는 소리가 더 질척하게 변한다. 남자가 엉덩이에 파묻고 있던 입술을 떼자 묽은 점액이 붉은 입술에 묻어 길게 늘어졌다.
저게…… 뭐지?
남자의 혀가 제 입술을 흠뻑 적신 액체를 핥았다.
“젖었어요.”
“흐으, 하아…… 머, 뭐?”
젖었다고?
내 당혹스러운 물음에 남자는 검지와 중지로 미끈거리는 주름을 매만졌다. 마치 젤이라도 퍼부은 것처럼 벌써부터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는 남자가 단번에 구멍을 꿰뚫고 들어오진 않을지 걱정됐다.
“잠깐 하나씩, 아흑…!”
길고 두꺼운 손가락 두 개가 구멍을 벌리고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공중에 뜬 다리의 근육이 빳빳해지고 발가락이 안으로 말렸다. 그럴 수가 없는데 너무도 쉬웠다.
아무런 저항감 없이 파고든 손가락이 맘껏 내벽을 휘저어 댔다. 성급한 손길이었는데도 단단한 손끝이 안을 찌를 때마다 찌르르 울리는 쾌감은 선명했다. 그 탓에 공중으로 말려 올라간 허리는 연신 들썩거리기 바빴다. 하중을 전부 떠받친 어깨가 가뜩이나 얻어맞은 곳이라 점점 욱신거려 왔다.
“하읏, 하아…… 나비야, 나. 흐윽… 어깨, 어깨가.”
차 뒷좌석은 뒤엉킨 두 나신으로 이미 꽉 차 있어 몸을 펼 여유가 없었다. 나만큼이나 남자도 거대한 몸을 잔뜩 웅크린 자세였다. 비좁은 공간을 꽉 채운 나와 남자의 열기 탓에 산소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깨가…?”
“아, 아…!”
목소리만큼 다정하지 못한 세 번째 손가락이 침범했다. 불편한 자세와 통증 때문에 잔뜩 좁아진 내벽이 남자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 마음과 다른 몸 상태에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조금이라도 삽입을 앞당겨 보려 완전히 발기하지 않은 성기를 스스로 주물렀다. 그 와중에도 엉덩이골을 타고 꼬리뼈 아래로 흐르는 미지근한 체액이 느껴졌다. 뭔지 몰라도 내 구멍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분 좋아요…? 계속 젖고 있는데.”
남자가 물기의 정도를 가늠하듯 찌걱거리며 쑤셔 박은 손가락 마디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팟팟 튀는 쾌감에 허리가 비틀렸다.
“나비야아, 으으…….”
“안이 엄청 축축해요.”
손장난을 치던 남자가 손가락을 구멍에 걸쳐질 정도로 뺐다가 푹 찔러 넣었다.
“흐, 윽…!”
“핥아 주는 거랑 찔러 주는 거 중에 뭐가 더 좋아요?”
“흣…… 모, 몰라. 아아!”
손가락을 찔러넣은 그대로 남자가 구멍 주위를 진득하게 핥았다. 구멍이 연신 움찔거렸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남자가 안쪽에 길을 내듯 손가락을 꾹꾹 밀어 넣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액체는 울컥울컥 구멍 밖으로 넘쳤다. 그 덕에 내벽을 긁어 나가고 다시 미끄러져 들어오길 반복할수록 손가락은 점점 깊은 곳에 닿았다.
“하으… 후읏! 아, 아아…!”
삽입감과 비슷한 쾌감에 스스로 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선액에 젖어 질척였다. 구멍은 남자의 손가락이 오갈 때마다 찰박거리며 물방울이 튈 정도였다. 금방 사정할 것 같았다. 나는 성기를 꽉 감아쥐며 엄지로 귀두 끝을 틀어막았다.
“그만…… 하… 이제, 넣어. 넣어 줘.”
허리를 뒤틀어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오자 남자의 어깨 위에 걸쳐 있던 다리가 미끄러지고 겨우 허리가 시트 위에 떨어졌다. 다리 사이에 단단히 자리 잡은 남자 때문에 한껏 벌어진 허벅지 안쪽을 뜨거운 무언가가 쿡쿡 찔렀다. 축축하게 젖은 엉덩이 아래에 허벅지를 받친 남자가 발기한 성기로 부드러운 살을 짓뭉개고 있었다. 흉포할 정도로 붉고 거대한 기둥에 핏줄이 돋아 있어 흡사 마구잡이로 만든 몽둥이 같았다.
원래 저랬던가…?
흐릿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남자가 내 배 위로 몸을 겹쳤다. 다리를 넓게 벌려 남자의 허리에 감았다. 그러나 한껏 포개어도 다리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남자는 마치 삽입을 한 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내 사타구니에 성기를 문질러 댔다. 맞닿은 몸이 묵직하게 전신을 내리누르는 무게감이 환장할 만큼 좋았다. 딱딱한 남자의 좆이 잔뜩 달아오른 내 성기에 비벼졌다. 이따금 남자의 귀두가 회음을 찔러 올렸다. 남자로서는 본능에 겨워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지만 그 뭉근한 자극이 끔찍하게 흥분돼서 남자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함께 허리를 움직였다.
“아흐…… 하, 좋아, 나비야. 아…! 더, 더. 흐읏…!”
몸을 부비며 남자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부드럽고 포근한 체취에 가슴이 뛰고 또 뒤가 젖는다. 이어 사정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쿵, 뻗어진 발바닥이 차가운 차창 유리 표면을 쓸며 뿌드득, 미끄러졌다.
“후읏, 좋아, 좋아. 하윽…… 아, 나 쌀 거… 쌀 거 같아.”
“아직, 하…… 넣지도 않았는데요?”
사정 직전 모든 자극이 멎었다. 허망하게 쾌감을 놓쳐 버려 간절한 눈으로 갑자기 몸을 일으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미간을 좁힌 남자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거칠게 머리를 흩트리며 말했다.
“너무 좁아요. 밖으로 나가요, 우리.”
밖이라고?
나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부옇게 김이 서린 창밖엔 아까보단 약해졌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는 중이었고 푸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차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는 남자를 따라 내리자 나를 들어 보닛 위에 올려 두었다. 시동을 끄지 않은 보닛은 엔진 열기로 후끈했다. 강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얀 나신으로 빗속에 선 남자를 비췄다. 녹색의 빽빽한 숲을 등지고 남자는 어정쩡하게 보닛 위에 기대 있던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하체가 딸려 가자 상체가 보닛 위에 미끄러졌다. 그러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빗줄기가 맨살을 적시는 감각이, 가릴 것 없는 산속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상황이, 전부 한데 뭉쳐 기이한 흥분을 고조시켰다.
손발이 굳는 듯한 긴장감에 고개를 들자 남자가 내 종아리를 어깨에 걸쳤다. 나는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펴서 보닛 위를 단단히 짚었다. 모든 것이 생소해서 전신의 근육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연신 가쁜 숨을 내쉬는 입속으로 빗물이 사정없이 들이쳤고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숨이 찼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참았던 것을 터뜨리기라도 하듯 남자는 단번에 좆을 쑤셔 박았다.
“흐, 아…!”
내 짧은 비명은 메아리도 남기지 않고 빗속으로 흩어졌다. 아프기보단 충격이 컸다. 배 속을 가득 메우는 이물감이 전보다 거대했다. 벌어진 턱이 덜덜 떨렸다. 아니.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이물질을 짓씹듯 경련하는 내벽 탓에 틀어박힌 기둥의 낯선 굴곡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하아…….”
남자의 만족스러운 탄성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던 내게 어렴풋이 들렸다.
“넣기만 하면 가 버리고.”
모르는 사이에 사정해 버린 성기를 쓸어 올리는 무심한 손길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한껏 예민해진 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만으로도 자극이 지나쳤다.
“흐윽…… 만지지, 아, 아아…!”
고개를 저으며 보닛 위에 손톱을 세웠다. 남자가 허리를 숙이자 흐릿한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히 귓가에 다가왔다.
“당신이 제대로 아기를 낳을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순간 모든 감각이 멀어질 정도로 당혹감이 덮쳐들었다.
내 거짓말이 들킨 건가?
뭔가,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달싹였다. 어둠 속에 묻힌 남자는 내 말 따윈 들을 생각이 없는지 다시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주르륵 빠져나갔던 성기가 재차 강하게 내벽 안쪽에 박혔다.
“흣!”
잠시간의 절박함은 휘발되고 괴로운 건지 좋은 건지 구분하기 힘든 쾌감에 비명이 터졌다. 철퍽철퍽 젖은 소리를 내며 남자는 둔중한 둔기로 내벽을 찧는 듯한 공격적인 허리짓을 이어 갔다. 안쪽 깊숙한 곳을 세게 찍어 댈 때마다 온 신경이 타들어 가고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뿌리째 뒤흔들리는 감각에 손끝, 발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갔다. 남자를 붙잡으려 간신히 손을 뻗었지만, 위아래로 격하게 요동치던 팔은 이내 젖은 보닛 위로 추락했다.
“하으… 윽! 아! 나, 나 죽, 읏, 죽을 거, 아…… 아, 흐윽…!”
고립된 숲,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를 버려진 캠핑장이 내 추잡한 신음을 집어삼켰다.
쿵.
남자의 두 손이 머리 양옆에 내리꽂혔다.
“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나 지켜 준다며…….”
내 위로 몸을 드리운 남자의 얼굴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번쩍, 소리 없는 번개가 내리치며 비에 파묻힌 어둠을 걷어 낸다.
젖어 반짝이는 눈이, 웃고 있다.
“형.”
콰르릉.
이어 하늘이 무너졌다.
흔한 호칭이었다. 남자가 언제든 날 그렇게 불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을 먹은 직후만 아니었다면.
“……나비야.”
남자가 기억을 흡수하는 동안의 잔상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견디기 힘들었다. 빗물에 가려지는 시야를 깜박일 때마다 남자의 얼굴과 동생의 얼굴이 교차한다. 숲속에서 잃어버렸던 공포가 눈앞에 있었다. 동생의 환영이 나를 비웃는다.
“왜 그래. 무서워?”
무섭다고……?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동생을 죽인 건 벌레를 밟아 죽이는 일과 똑같았다. 그래야만 했다. 남자를 지키려면 더한 짓도 해야 할 테니까. 동생쯤이야 두 번, 세 번도 죽일 수 있었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웃으며 발작하듯 고개를 젓던 나는 끝내 발악하며 동생에게 달려들었다. 목을 꺾어 버릴 작정이었으나 돌연 바뀐 눈앞의 얼굴에 우뚝 멈췄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미쳤나?
동생은 사라지고 놀란 눈을 한 남자의 턱 아래, 하얀 목덜미를 움켜쥐기 직전인 내 손이 보였다. 남자와 손을 번갈아 보다가 못된 짓을 하다 들켜 버린 어린애처럼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씨발, 죽어서도 지껄이지 못하게 눈이 아니라 입을 박살 냈어야 했는데…!
“노, 놀랐잖아. 네가 갑자기 형이라고 하니까. 나 무서운 거 아니야.”
안 무서워, 진짜야. 중얼거릴수록 더 변명처럼 들렸다. 남자가 내 진심을 의심할까 걱정됐다. 지켜 주겠다고 장담한 나를 믿지 못하고 떠나면 어떡하나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남자는 말없이 날 보기만 했다. 그런데 문득 그 눈빛이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불편해졌다.
마치 불쌍하고 무지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 눈빛의 의미를 안다. 저건 나를 전부 알아 버린 시선이다. 죽은 애인도 한때 나를 저런 눈으로 보고는 했다. 그 동정심에 기대 내 결핍을 드러낼수록 나는 발에 치이는 돌멩이 취급을 당했다. 굴욕감이 날 삼킨다.
“왜…… 왜 그렇게 봐? 어…?”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뭔가 잘못됐다. 남자는…… 내게 순종하는 나비는 날 저런 식으로 봐서는 안 됐다. 동생을 먹이지 말 걸, 동생이 알고 있는 나의 과거가 어떨지 뻔한데! 남자의 침묵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딴 식으로 쳐다보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
남자가 느닷없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몸이 굳는다. 식은 어깨에 닿는 온기조차 받아선 안 될 것처럼 느껴졌으나 함부로 뿌리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긴 몸을 달래는 작은 두드림에 우리가, 아니 내가 위선으로 쌓아 올린 관계가 부스러진다. 나를 신처럼 바라보던 나비를 다신 볼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죠.”
귓가에 닿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평생 갈증에 시달려 온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든다. 비굴한 내 본성으로는 그가 흔드는 미끼를 거부할 수가 없다. 남자의 손가락이 금을 긋듯이 척추를 따라 젖은 피부 위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날카로운 칼날로 등껍질을 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비참하고 비루한, 진짜 나를 꺼내려는 것처럼.
“당신은 당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이유도,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남자와 나 사이에는 온통 모르는 것들만 쌓여 갔다. 갑자기 배가 아팠다. 몸이 아직 연결된 채였다. 완전히 식어 버린 나와 달리 내 안에 말뚝처럼 박힌 남자의 성기는 뿌리라도 내리려는 듯 여전히 단단했다. 배 속이 못 견디게 아파졌다. 싸한 고통에 몸을 웅크리자 내가 남자에게 하던 것처럼 남자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너무 불쌍해요.”
내가 바란 건 동정심 따위가 아니다.
“아니, 불쌍한 건 너야…… 내가 아니라.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너라고!”
악착같이 부정하는 나를 남자가 내리눌렀다. 쿵, 상체가 다시 보닛 위에 널브러지고 두 허벅지가 남자에게 잡혔다. 나는 꼼짝없이 남자의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로 감당할 수 없는 불안에 짓눌렸다.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나 나나, 그렇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심하다는 듯, 혹은 안타깝다는 듯 묻는 목소리가 기어코 날 무릎 꿇린다. 허망하게 벌어진 시야로 어느덧 비가 그친 하늘이 보였다. 아무것도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절망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툭하면 울고.”
“아…!”
박혀 있던 성기가 이것 보라는 양 몸 안쪽을 쿡 찔러 왔다.
“흣… 나비야, 제발.”
난 뭘 비는 걸까.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애원하는 거, 변하질 않네요.”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변한 게 없었다. ……변한 척했을 뿐.
열기를 머금은 기둥에 오랫동안 달라붙어 있던 점막이 애원하듯 딸려 나갔다. 마른 내벽이 쓸리는 고통에도 길들여진 대로 다리가 벌어졌다. 거의 끝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움찔거리는 구멍에 걸쳐졌다. 이어질 행위를 본능적으로 예감한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진 순간, 철썩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크… 흣!”
세워진 손톱이 끼기긱, 보닛 위를 긁으며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었다. 한번 길을 낸 배 속에 남자는 못질을 하듯 허리를 쳐올렸다. 흉기와 다를 바 없는 성기가 계속해서 깊숙하게만 찔러 들었다. 아무런 성적 자극 없는 맹목적인 좆질이 섹스라기엔 가혹했다. 달궈진 귀두가 막힌 곳을 찍어 댈 때마다 헛구역질이 났다. 더 들어올 곳이 없는데 남자의 성기는 더 깊이, 열리지 않는 곳까지 찢고 들어오려 했다. 한계였다. 끝내, 꼴사나운 울음이 터졌다.
“더, 흑, 더는 안…… 아, 하아, 흐윽…!”
“하…… 울지 말고 나 봐요.”
거친 음성에 다급히 흐린 시야로 남자와 눈을 마주하자, 숨이 멎었다. 소년티를 벗어 낸 남자의 견고한 시선에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내게 의존해 살아야 했던 나약한 괴물은 이제 없다. 남자는 계속해서 변해 간다. 좁은 고치에 갇힌 나와 다르게.
“들어가게 해 줘요. 더 깊이…… 나만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남자가 아직 나를 원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 기뻤다. 몸 따위 얼마든지 찢어발겨도 좋았다. 더 숨기지 못하고 꼭꼭 감춰 온 본심이 쏟아져 나온다.
“흑…… 나, 흐윽… 나 버리지, 버리지 마……. 나비야, 제발.”
남자의 짙은 체취가 습한 공기 중에 섞여든다. 의식이 아찔해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이성을 잃기 전에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남자를 눈에 담았다. 울고 있지 않은데도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하으…….”
푹, 의도적으로 비껴 들어온 성기가 자극점을 정확히 찔렀다. 어렵게 주어진 짜릿한 감각에 배꼽 아래쪽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다시 절절 끓어오른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몸이 터져 버리든, 녹아 버리든, 어떻게 될 것 같았으나 그래도 좋았다. 남자가 곁에만 있어 준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아…… 좋아, 좋아. 나비야, 좋아.”
배 속의 열기가 입술에까지 묻어난 순간, 남자가 강한 힘으로 내 허리를 끌어 내렸다. 두둑, 기어이 닫힌 곳을 찢고 들어온 성기가 느껴졌다.
“허억….”
몸 안쪽이 터지고 벌어지는 생경한 고통과 함께 복부를 얻어맞은 것처럼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벌어진 입에선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 으, 아, 아흐으…….”
“날, 하아…… 원망하지 않을 거죠?”
전신을 벌벌 떨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에 남자의 서늘한 뺨이 닿았다. 내 머리를 감싸 안고 몸을 맞붙인 남자가 작게 몸을 떤다. 억지로 벌어진 내장 안으로 무언가가 꿀럭이며 쏟아지는 감각이 선연하다. 정액이 배 속 깊은 어딘가를 채우고 있음을 느낀 몸이 반사적으로 구멍을 조였다.
“후…… 이젠 말하지 않아도 잘하네요.”
다정한 음성에 무엇을 칭찬받는지도 모르고 기뻤다. 긴 사정을 끝낸 성기가 마침내 빠져나갔으나 젖은 구멍은 벌어진 그대로였다. 몸 일부를 잃은 것처럼 배 속이 허전했다. 아니, 완전히 채워진 것도 같았다. 늘어진 내 가슴 위로 남자가 머리를 기대 온다.
“앞으로 전부 달라질 거예요.”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우울했다. 힘없는 손으로 남자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보답처럼 진한 키스가 주어진다. 흩어져 사라지는 말을 대신하는 듯 깊게 얽히는 입맞춤이 가져 본 적 없는 보석처럼 소중해서 의식이 꺼져 가는 중에도 흐릿하게 미소가 번졌다.
길을 벗어나 이곳에 고립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맞대고 서로의 존재를 끝없이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 ∞ ∞
낯선 새의 지저귐 소리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눈꺼풀이 욱신거리는 데다 내리쬐는 볕이 뜨거워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내 몸은 차 뒷좌석에 구겨진 채 눕혀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 남자가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혔는지 걸친 옷이 깨끗하다. 잠시 몸을 더듬거리던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남자부터 찾았다.
“나비, 큿.”
시멘트 바닥에 성대를 갈린 듯한 고통이 목구멍을 할퀴었다. 괴로워할 새도 없이 얼른 몸을 일으켜 보니 주변이 불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나비야?”
차 안에는 나 혼자였다. 서둘러 차창 밖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여전히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조난 당한 사람처럼 남자를 부르며 뒷좌석에서 뛰쳐나왔다.
“나, 나비야. 아.”
땅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말을 듣지 않는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도로 일어나려 해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엉금엉금 진흙 위를 기었다. 빗물을 머금고 반짝이는 풍경은 어제의 일이 거짓말인 양 평화로웠다. 오직 내 존재만 툭 튀어나온 가시처럼 불안정했다.
“나비야!”
내 외침에 나무 위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 기척을 놓치지 않고 황급히 새들이 흔들고 간 곳을 쳐다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처절한 메아리였다.
“어디…… 어디 있어.”
남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호흡이 점차 가빠지더니 이내 물 밖에 꺼내진 물고기라도 된 듯 숨을 쉴 수가 없어져 목을 감싸 쥐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이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지면, 그럼 난? 난 혼자서 어떻게 하라고? 곁에 있겠다고 말했으면서, 또 날 속이려는 수작이었나? 정말 이대로 날 떠난 걸까? 어제 내가 저를 위해 감수한 수모를 다 알고도? 내 비참한 과거를 속속들이 보고도 날 이렇게 배신해?
두서없는 의식의 흐름을 거스르며 불현듯 우울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원망하지 않을 거냐고 묻더니 그게 이 뜻이었어?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나한테서 쉽게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서, 그래서……!
하얗게 질린 주먹이 무른 땅에 퍽 처박혔다. 드글거리는 분노 아래에서 불쑥 최악의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죽어 버린 건 아니겠지…?”
주먹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숲에서 목숨을 끊을 방법을 당장 몇 가지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혼자 생각에만 빠져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혼잡한 머릿속을 비우려 심호흡을 했다. 뜨겁게 타오르던 분노가 차고 끈적해진다.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 되어 이성을 조금씩 삼킨다.
“하…… 내가 너 하나 못 찾아낼 것 같아?”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낼 거야. 그리고, 그리고 네가 바라던 대로…….
“왜 이러고 있어요.”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유령처럼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남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머리꼭지까지 치솟았던 분노를 순식간에 날려 버린다. 그리고 발밑부터 익숙한 절박함이 차올랐다.
“어, 어디 갔었어. 가 버린 줄 알고, 내가, 내가…….”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는 남자에게서 물 냄새가 났다. 입고 있는 새 옷에 젖은 구석이 없는데도 그랬다. 남자가 또 사라질세라 깨끗한 반소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부터 붙잡고 봤다.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서늘하고 단단한 탄력에 아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남자는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내 얼굴을 살폈다. 잠시 잊고 지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내게 퍽 익숙했다. 습관적으로 어떤 볼썽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고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없어지긴 왜 없어져요. 정말 날 못 믿네요.”
“네가 말도 없이 사라지니까…!”
울컥해서 커진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다.
“알았으니까 소리 지르지 말아요. 목 다쳐요.”
사과 한마디 안 하는 남자를 노려보면서도 순순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깐 남자의 표정이 미묘했다. 왜 그러는지 눈치를 살피며 버석하게 마르는 입술을 적시는데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요. 더러워졌잖아요.”
그제야 진흙투성이가 된 내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지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엄마 잃은 송아지처럼 남자를 불러 댔다. 그래도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와 줬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좋았다.
복잡한 심경으로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마자 땅이 쑥 꺼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지러워요?”
쓰러질 뻔한 나를 부축한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어지럽고…… 앞이 잘 안 보여.”
“……현기증인가 봐요. 급하게 일어나니까 그렇죠. 조금 쉬었다가 돌아가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남자가 뒷좌석 문을 타기 쉽도록 열어 주었다. 문틀을 잡은 하얀 손이 붉게 얼룩져 있다. 차에 타려다 말고 식겁해서 남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 어디 다쳤어? 손이 왜 이래.”
“진정해요.”
뭔가 탈이라도 난 건 아닐지 걱정돼 죽겠는데 정작 본인은 침착하기만 하니 분통이 터졌다. 묽은 피에 물든 남자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손끝에서 방금 남자에게서 느꼈던 물 냄새가 났다. 나는 손가락을 좀 더 코에 가까이 가져왔다. 물 냄새와 젖은 옷에서 나는 특유의 비린내, 그리고 동생의 피 냄새.
“내 피가 아니에요.”
동생의 피? 남자가 말해 주기 전에 나는 분명 냄새만으로 ‘동생의’ 피라고 단정 지었다.
아니지. 그런 건 불가능하다. 어제의 일이 있었으니 당연하게 동생의 피라고 생각했을 뿐일 거다.
“내 말이 맞죠?”
“……응.”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봤던 남자의 피는 하얀 점액질과 비슷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두고 남자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손을 제외하고는 전부 깨끗했다.
“어디서 뭐 하고 왔어?”
“뒤처리요.”
“뭐…?”
정확히 알아들었으나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남자가 말하는 ‘뒤처리’가 내가 알고 있는 뜻과 같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남자가 캠핑장 너머를 가리켰다.
“산 뒤에 저수지가 있어요.”
물 냄새의 이유는 저수지였던 모양이다.
“전부 가라앉혔어요.”
“……전부?”
“어제 입었던 옷들이랑, 핸드폰, 망치.”
놀랄 만한 말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새카만 눈동자는 고요했다. 무해한 얼굴로 동생의 죽음을 은폐하고 오는 길이라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에 왜인지 입이 말랐다.
“……확실하게?”
물으면서도 뭔가 어색한 기분에 휩싸였다. 남자와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좋은 변화인지도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남자는 태연하게 문이 열린 차 쪽으로 고갯짓했다.
“걱정하지 말고 타요.”
그런 걸 갑자기 네가 왜? 어떻게?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라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일단 차에 올랐다. 꼬치꼬치 캐묻는 내 모습이 남자의 눈에 겁먹은 것처럼 보일 듯싶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어제만으로 충분했다.
나를 따라 뒷좌석에 오르는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식사’를 하고 난 후면 늘 그렇기는 했지만, 지금의 남자는 어느 때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나를 떠날 기미가 없는 건 다행이었다.
“현기증 말고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 있어요?”
“잘 모르겠어.”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성의 없이 대답하자 남자가 차 문을 닫고 낮게 웃었다.
“자기 몸을 그렇게 몰라서 어떡해요.”
은근히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말투에 당황한 나머지 헛기침이 다 나왔다. 속 편히 홀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눈치 없는 심장이 두근거린다. 허리를 숙인 남자가 이번엔 좌석 아래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았다.
“지금 뭐 해?”
“보면 알아요.”
남자가 꺼낸 건 차에 있는지도 몰랐던 서류 봉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된 기분이다. 남자가 그것을 내 앞에 내밀었다. 언뜻 내게 줄 게 있다고 했던 동생의 말이 생각났다.
받아 든 봉투를 열자 몇 장의 A4 용지와 열쇠가 들어 있다. 검은 글씨가 질서 정연하게 인쇄된 문서의 가장 위에 <토지 대장>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다음 종이는 <건축물대장>이었고 명의자는 모두 나였다.
“이게 다 뭐야? 집문서 아니야?”
“선물이요. 당신한테 주는.”
동생이. 라는 주어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알았다. 다시 생뚱맞은 서류를 훑어보았다. 소재지 칸에 ‘낙단리’라는 생전 처음 듣는 지명이 적혀 있다.
“이걸 왜 나한테?”
“알고 싶어요?”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남자가 물어 왔다. 동생을 먹은 남자라면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을 테다. 죽은 동생에게 감사 인사를 할 것도 아니고 이제 와 이유 같은 걸 들어서 써먹을 데도 없다. 어제 내게 저주를 퍼붓던 거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꼴 보기 싫으니 촌구석에 처박혀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란 추측만으로 충분했다.
“됐어. 들으나 마나 좆같은 이유겠지.”
봉투가 찢어지든 말든 종이 뭉치를 대충 쑤셔 박았다. 이따위 쓰레기야 버리면 그만이다. 또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지독한 어지럼증에 남자에게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특별한 날을 보낸 몸이 쑤시고 아팠다.
“몸이 뜨거워요.”
서늘한 손바닥이 이마를 덮는다. 커다래서 이마를 전부 가리는 감촉에 몸이 노곤해진다. 할 수만 있다면 남자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내겐 더 미뤄 둘 수 없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는 안 됐다. 비가 그쳤으니 캠핑장 상태를 보러 관리자가 올 수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블랙박스 메모리부터 처리해야겠다. 그리고…….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는 통에 졸음이 몰려왔다. 정말 열이 나는지 햇볕 아래에 있는데도 한기가 들었다.
“자기 전에 배 좀 채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떠 보니 남자가 케이크 상자를 열고 있었다. 애초에 남자와 먹으려고 산 케이크였지만, 누군가와 케이크를 나눠 먹는 일이 내게는 생소했기에 허리를 바로 세워 앉는 몸짓이 영 어색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초 하나가 케이크 중앙에 꽂혔다. 화려한 색깔 덕에 그것만으로도 제법 분위기가 났다. 애 취급을 당해서일까, 그럴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기분이 들뜬다.
“뭘 축하할까?”
“기념일.”
“……무슨 기념일?”
설마 동생의 생일을 축하하자는 뜻은 아니겠지.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불안했다.
“당신의.”
안도감과 별개로 당황스러웠다. 내 생일은 오늘과 계절적으로 정반대인 한겨울이었다. 한 번도 챙겨 본 적이 없으니 동생이 내 생일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다.
아무렴 어떤가. 추워서 외로웠는지, 외로워서 추웠는지 모를 기억뿐인 날보다야 남자와 함께 케이크에 초를 꽂은 오늘이 더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그래, 그러자.”
그냥 웃으며 불도 붙이지 않은 초를 끄는 시늉을 했다.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해요.”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에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별다른 기색 없이 플라스틱 칼을 꺼내 원형의 케이크를 잘랐다. 레스토랑에서 서툴게 고기를 썰던 모습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케이크를 조각내는 손놀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잘하네…….”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간 감탄에 못마땅함이 묻어났다. 서투를 때는 잘하는 모습이 보고 싶더니 막상 잘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별로였다.
능숙하게 칼을 쥔 손과 예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다음 식사를 하고 나면 남자는 또 변할 것이다. 계속 변하고 변해서 언젠가 완벽해진 남자가 날 떠나게 될 일이 당연한 일처럼 다가온다. 나는 조각나는 케이크를 멀거니 바라봤다.
“먹어요.”
남자가 반듯하게 잘린 조각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내 수족까지 자처해서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알아서 먹을게.”
남자가 내민 케이크 한 조각에 온갖 생각이 다 드는 바람에 고개를 틀어 피해 버렸다. 남자는 끈질겼다.
“먹어 줘요.”
“…….”
“나도 먹여 주고 싶어요.”
독이 될 걸 알면서도 입을 벌려 케이크를 한 입, 두 입 먹어 치웠다. 달짝지근한 케이크는 부드럽게 부서져 금세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거두려는 남자의 빈손을 붙잡았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가락에 남은 크림과 붉은 가루까지 쪽쪽 빨았다. 남자는 가만히 내가 제 손가락을 빨게 두었다. 남자가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으니 오기가 들었다. 이를 세워 먹을 게 없어진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남자는 도리어 잔잔하게 웃기까지 했다.
“맛있어요?”
“아니.”
짜증이 나 물고 빨던 손을 팽개쳤다. 내가 알던 남자가 보고 싶었다. 내 말 하나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던 나비가 보고 싶었다.
정작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조금 뒤,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집는다. 난 반사적으로 입술에 힘을 주고 다물었다. 뜻밖에도 케이크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으로 향했다.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보던 나는 벌어지는 붉은 입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남자의 손을 쳐 냈다. 케이크가 파삭한 가루를 날리며 좌석 아래에 나뒹굴었다.
“뭐 해? 그걸 왜 먹어!”
“나 먹는 모습 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순진한 물음에 말문이 틀어 막혔다. 입가에 붉은 가루를 묻히고 날 보는 검은 눈동자가 순진하게 빛났다.
그만 인정해야 했다. 나는 남자를 이길 수 없음을. 속으로 패배를 선언하며 남자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 혀를 내어 남자에겐 독이나 다름없는 케이크 부스러기를 모두 핥았다. 깨끗이 핥고 난 뒤에도 애정을 담아 입술을 핥고, 핥았다. 가까이 닿은 속눈썹이 얽힌다.
“……이젠 아니야.”
의미 없는 발악은 그만두자.
“이제 먹기 싫은 건 안 먹어도 돼.”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날 떠나는 것만 빼고.”
고개를 기울이며 정성스레 입술을 겹치고 혀를 섞자 미미하게 남은 크림이 두 혀 사이에 녹아들었다. 잊혔던 허기가 급격하게 밀려온다. 입술을 떼고 입맛을 다시는데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 어디 안 가니까 천천히 먹어요.”
비가 갠 하늘처럼 웃는 남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서 다시 입을 맞출 수가 없었다.
∞ ∞ ∞
남자와 내가 캠핑장을 떠난 건 오후 두 시를 조금 넘어서였다. 다행히도 큰길로 나오는 동안 캠핑장으로 향하는 차는 없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바랐지만, 귀가는 예상보다 더 늦어졌다. 일요일이라 차가 막혔고 거의 다 와서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졌다. 가까스로 마지막 휴게소에 차를 세웠을 때는 전신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메스꺼워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 내기 직전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차에서 내려 운전석 문을 연 남자가 얇은 바람막이를 내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영문도 모르고 시야가 차단된 채 나는 남자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사람들의 틈을 헤치고 화장실로 갔다. 변기를 부여잡자마자 참았던 구토가 치밀었다. 뒤늦게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되는 것도 잠깐뿐이었다.
걸쭉한 액체가 위장에서 끝도 없이 역류했다. 액체는 입뿐만 아니라 코에서도 쏟아졌다. 비릿한 향이 비강을 역하게 채워 헛구역질이 반복됐다. 몸속에 장기들이 죄다 입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밖은 신경 쓰지 말아요.”
토악질이 잦아들 즈음에서야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남자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모자란 숨을 들이마시며 축축하게 젖은 입가를 훔치고 변기에 처박다시피 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광경이 시야를 점령했다.
휴게소 화장실의 어두컴컴한 조명과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져 몰랐다. 변기에 가득한 액체가 검붉다는 것을. 코와 입을 문질러 닦은 손등에도 흘러넘친 피가 진득하게 늘어졌다.
“흐, 흡…!”
입속에 갇힌 비명이 먹먹하게 울렸다. 내 입을 손바닥으로 덮은 남자가 귓가에 “쉿.” 하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으, 흐우, 웁.”
별거 아니라고? 그건 칼에 찔려도 멀쩡한 괴물한테나 해당하는 소리였다. 변기 물이 온통 내가 토해 낸 피로 걸쭉하게 변해 있었다. 평범한 각혈로 치부할 양을 한참 넘어섰다. 어디를 봐도 피가 낭자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죠?”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도 침착해서 또 나 혼자 환영을 보는 건가 싶었다. 얇은 칸막이 너머로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남자의 경고대로 여기서 시선을 끌게 되면 나중이 위험했다. 떨리는 몸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으나 쉽게 진정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남자뿐이었기에 나는 허겁지겁 뒤에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나비야. 나 왜 이러지? 피가, 피가 계속 나와.”
남자는 내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죽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런 와중에도 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입안까지 스며들었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또 속이 울렁거렸다.
“내 말 잘 들어요. 피는 금방 멈출 거예요.”
기가 찼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남자의 멱살을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붙들렸다. 피가 묻은 손이었다. 씨발.
“내가 더러워?”
“착각하지 마요. 갈아입을 옷이 하나뿐이라서 그래요.”
“너…….”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하면 안 돼요.”
“이대로 내가 죽어도 그렇게 지껄일 수 있어?”
“……안 죽어요.”
남자가 괴물이란 사실이 잔인하리만치 뼈를 후벼 판다.
설마 내가 여기서 죽기를 바라나? 나한테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니까? 아니, 어쩌면.
나는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지.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한 거야…!”
남자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지금 후회해요?”
“……그게 무슨.”
“날 원망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
“아니면 정말 내가 당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차게 식은 목소리에 점차 분노가 스몄다. 날 선 말투에 이성이 돌아왔다. 붙들린 손을 빼내 이미 엉망이 된 티셔츠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리곤 스스로 두 뺨을 내리쳤다.
내가 잠깐 미쳤나 보다. 나비가 그럴 리가 없는데. 어제 일의 후유증일 거다. 그래, 별거 아닐 거다. 진정하자.
“그런 거 아니야. 잠깐 놀라서 그랬어. 나비야. 화내지 마.”
당장이라도 남자에게 매달릴 것 같은 손으로 더러워진 티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두 번 다시 나 의심하지 말아요.”
남자의 손이 귓가를 스쳐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분명 부드러운 손길인데도 벼려진 칼날처럼 시렸다.
“응, 그럴게. 미안.”
“봐요. 피가 멈춘 것 같아요.”
정말이었다. 코에서 쏟아지던 피가 멎어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증상에 어안이 벙벙했다. 내 몸이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정상은 아니었다.
“티셔츠 벗고 이거 입어요.”
군말 없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맨몸 위에 남자가 건넨 바람막이를 걸쳤다. 스스로도 무슨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몰랐다. 오직 남자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남자는 변기 물을 내리고 휴지를 풀어 여기저기 튄 피를 닦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손가락이 떨려 지퍼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잠시 뒤, 잠자코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를 기다리게 하고 있단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자 손가락이 몽땅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엇나갔다.
“도와줄게요.”
내겐 바늘 같던 지퍼가 긴 손가락 끝에 너무도 간단히 잡힌다. 지퍼가 목 끝까지 잠겼다. 남자가 피 묻은 티셔츠로 “고마워.” 하고 중얼거리는 내 얼굴을 닦았다. 넋이 나가 그저 백치처럼 서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려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고마워, 그 한마디가 다였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바람막이에 달린 후드를 당겨 머리 위로 푹 눌러 씌워 주었다.
“모자, 잘 쓰고 있어요.”
시야의 절반이 가려지는 탓에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자 또다시 불안해졌다. 남자가 뒤돌아 문을 열려고 했다. 생각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급하게 뻗어진 손이 결국 남자의 티셔츠 자락을 붙들었다. 아차 싶었다. 그러나 이미 남자의 어깨가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 몸짓에서 왜 그러냐는 물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소, 손잡아 줘. 나비야.”
“…….”
“모자 때문에 넘어질 거 같아서.”
사실은 남자가 날 두고 가진 않을지 불안해서였지만 그렇게 말하면 또 화를 낼 것 같았다. 얄팍한 거짓말을 하는 내 속내를 가늠하는지 침묵이 길어진다. 고개가 한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한심하게 티셔츠 자락을 쥐고 있는 손을 이내 남자가 잡아 주었다.
“조심히 따라와요.”
지저분한 공중화장실이어서 다행이었다. 착한 나비가 적어도 날 이런 곳에 두고 가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 가는 중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니 땀에 미끄러져 손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깍지까지 꼈다.
휴게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이자 어디서나 눈에 띄는 남자의 외모가 마음에 걸렸다.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이었다. 내가 아니라 당장 남자의 얼굴을 가려야 했다.
“나비야.”
작게 남자를 부르며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살짝 후드를 젖혀 시선을 들었다. 그 짧은 순간, 하필이면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날 보고 있었나? 왜? 설마 날 수상하게 생각한 누군가에게 미행이라도 당한 걸까?
갑자기 걸음을 멈춘 나를 남자가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남자에게 붙어 몸을 숨겼다.
“왜 그래요? 또 토할 것 같아요?”
“누가 날 보고 있어.”
“……그냥 잠깐 눈이 마주친 걸 거예요.”
정말 그런 걸까? 천천히 고개를 들자 날 보고 있던 이와 다시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아도 되었다.
“……뭐야. 저게?”
내가 보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챈 남자가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보지 말아요. 안 보는 게 좋겠어요.”
“……비켜 봐.”
남자의 어깨를 밀어내 벽에 걸린 대형 거울로 다가갔다. 끔찍한 형상이 가까워진다. 깨진 이마에서 코까지 보랏빛으로 변한 피부와 시뻘겋게 물든 왼쪽 눈알 주변을 더듬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괴물이 나를 보고 있다.
“놀랄 것 같아서 말 안 했어요.”
“어떻게 된 거야?”
“머리…… 다쳤잖아요”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거지? 눈으로 보고도 망가진 얼굴이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벗겨진 후드를 씌워 내 눈을 가린다. 지나가는 사람 몇몇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징그러워.’
적나라한 혐오에 날 악마라고 부르던 동생의 저주가 되살아난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얼마나 길을 벗어났는지.
벗겨지지 않게 후드를 푹 눌러쓰고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무렇게나 내딛는 걸음에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지만 멈추지 않고 걸어 나갔다.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주차된 차 앞에 다다라서 조수석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타.”
“……조금 더 쉬었다가….”
“빨리 타라고!”
몸 상태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눈으로 확인한 내 몰골에 비하면 멀쩡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이던 남자는 주변에서 몰리는 시선을 느끼곤 조수석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남자가 핸들 위에 얹힌 내 손을 겹쳐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니까.”
정신이 없는 중에도 남자의 위로는 어딘가 이상했다. 서로 다른 의미를 품은 두 시선이 얽혔다. 새삼 남자의 존재가 멀어진다. 저 순진한 눈동자에 도대체 뭘 더 숨기고 있는 걸까.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과 곁에 앉은 남자. 겉보기엔 평화로운 주말 저녁과 다를 바 없었지만, 우리의 주말은 조금도 그렇지 못했다. 그 증거가 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집까지 운전하는 동안 내 뒤로 줄곧 찝찝함이 따라붙었다.
동생이 돌로 내 머리를 내리칠 때의 충격이 어땠는지 돌이켜 보았다.
어떻게 멀쩡한 걸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해는 빠르게 떨어져 짙은 어둠을 몰고 왔다. 캄캄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시동을 끄고 시트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았다. 몸도 머리도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입술을 스치며 나가는 숨이 비정상적으로 뜨겁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제대로 쉬어요.”
“……응.”
슬쩍 룸미러로 향했던 눈동자가 차마 보지 못하고 떨어진다. 곤죽이 된 얼굴이 언제쯤에야 정상으로 돌아올지 막연하다. 앞으로 일주일간 휴가이니 당장 집 밖에 나갈 걱정은 덜었지만, 마음 편히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처지였다.
“얼굴, 신경 쓰여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눈을 감은 채 짧게 고개를 젓자 남자가 실내등을 켰다. 환한 조명을 피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에게 이런 몰골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 나 좀 봐 줘요.”
“……싫어.”
“보고 싶어요.”
남자는 내 밑바닥을 모조리 긁어 봐 놓고도 더 보여 달라 고집을 부렸다. 거부도 저항도 다 소용없을 것 같아 자포자기 심정으로 천천히 남자를 마주했다. 노르스름한 실내등에 반사된 얼굴이 예쁘고 소중해서 우습게도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거무죽죽하게 변했을 내 눈가를 조심히 더듬었다.
“고마워요.”
“그 말은 됐고…….”
다른 말이 듣고 싶었다. 묵묵히 내 뒷말을 기다리는 남자를 보다가 이내 씁쓸함을 삼키고 애써 미소 지었다.
“아니야. 집에 가자.”
시켜서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기에 더 버티지 않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발밑이 휘청거렸다. 또 현기증인가 했는데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그리곤 전신에 고통이 들이닥쳤다. 몸 안쪽을 무언가에 뜯어 먹히는 고통이었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내 몸을 받친 남자가 내게 무어라 말을 했지만 찢어지는 이명에 가려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온몸의 근육과 뼈가 몸 안쪽에서 비명을 질러 대는 것 같았다. 구명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집중했다.
“이제 아프지 않을 거예요.”
조용히 웃고 있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꿈을 꿨다. 피 냄새가 나는 꿈이었다. 꿈에서 나는 남자를 먹고 있었다. 내게 먹히는 나비가 행복해 보여서 나도 행복했다.
∞ ∞ ∞
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무언가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았다. 곁에 잠든 남자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무언가가 머리에서 흘러내렸다. 젖은 수건이었다. 바닥에는 물컵과 죽이 말라붙은 그릇 따위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남자가 날 보살핀 모양이었다.
“나비야.”
남자를 불러 봤지만 깊이 잠이 든 건지 깨어날 기미가 없다. 시간은 새벽 세 시,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인데 날은 이틀이나 지나 있었다. 이틀이나 고군분투했을 남자를 생각하니 애틋함이 솟았다.
“고생했겠네.”
남자의 머리칼 위에 조심히 입을 맞추고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왔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둠 속에서도 시야가 밝았다. 욕실로 가 불도 켜지 않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걱정과 다르게 찢기고 터졌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남자에게 물어 뜯겼던 팔도 어느 쪽인지 모를 만큼 멀쩡하다.
단순히 상처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간 거울에 입김이 서렸다가 사라지자 더 확실히 보였다. 거울 속에 처음 보는 내가 있었다. 공허한 나도, 악마 같은 나도 아닌, 또 다른 나.
거짓말처럼 말갛게 빛나는 피부에 또렷한 눈동자, 붉게 혈색이 도는 입술. 정말 내가 맞는지 하나하나 더듬어 만져 보는 도중, 갑자기 욕실 형광등이 켜졌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거울에 비쳤다.
“왜 말도 없이 나가고 그래요.”
남자가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리듯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당신은 내가 없어지면 울고불고 난리면서.”
“그것보다…… 나 좀 봐 봐. 이상하지 않아?”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디가요?”
“상처가 다 없어졌어.”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이에요.”
남자는 내 상처가 전부 사라질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눈을 접으며 별거 아닌 일인 양 웃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내 몸은 변했다. 아니,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와 뛰다시피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식칼을 빼 들어 망설임 없이 팔뚝을 그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베이는 고통보다 가르는 감각이 더 선명했다. 조금 더 깊게 그어 보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뒤따라온 남자가 칼을 쥔 손을 무섭게 낚아챈 탓이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위협적인 목소리에도 내 시선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뚝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무슨 짓이냐고 묻잖아요.”
강한 악력에 강제로 턱을 붙들린 후에야 남자를 봤다. 남자가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았지만, 신이 나서 입꼬리가 치솟았다. 그도 그럴 게 길게 갈라진 피부가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아무는 생소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비야. 이거 보여?”
이걸 알면 남자도 분명 기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 줄 거라 확신했다. 잔뜩 상기 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벌써 피가 멎은 팔뚝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턱을 쥐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가 서로 닮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나도 기뻤다.
“나비야. 나도 이제…….”
“당신 이틀 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내 말을 끊은 남자가 칼을 빼앗아 갔다.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은, 예상과 완전히 다른 남자의 반응에 나는 당황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던 남자였다. 그리고 정말 남자의 말대로 됐다. 칼에 베여도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왜 상처받은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이 눈 뜨기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나는 그냥 좋아서…….”
너랑 같아졌으니까.
콱!
식탁 위에 내리꽂힌 식칼이 내 뒷말을 잘랐다. 칼날처럼 시린 얼굴의 남자가 낯설었다. 고조되었던 흥분은 팔뚝에 시큰한 통증만 남기고 사라졌다. 손끝이 차게 굳는다.
“이건 하나도 좋은 게 아니에요.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상처 내면…….”
남자의 입에서 이어 나올 말이 무서워서 다급히 입술을 맞대 남자의 입을 막았다. 꾹 눌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다행히 다물린 입술은 더 열리지 않았다.
“잘못했어. 나비야. 내가 잠이 덜 깼나 봐. 그러니까 화내지 마. 응?”
남자는 말없이 내 손을 잡더니 식탁 위에 놓인 티슈를 뽑았다. 그리고 상처는 말끔히 사라지고 피만 남은 팔뚝을 닦아 주었다. 그러는 동안 차가운 남자의 표정을 풀어 보려 미안하다 속삭이면서 열심히 남자의 귀와 목덜미에 입술을 찍어 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나한테 미안해하진 않아도 돼요. 화난 것도 아니구요. 당신이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알아. 이틀 동안 혼자서 힘들었지? 고마워, 나비야.”
슬그머니 두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고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남자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알면 얌전히 더 자요. 배고플 텐데 이따가 일어나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화를 누그러뜨린 남자의 태도가 다정하게 돌아왔다. 어쩐지 조금 지쳐 보이는 남자의 입술에 이번에야말로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키스했다.
“네가 해 주는 거.”
희미하게 웃는 남자를 따라 순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팔뚝을 힐끔거렸다. 흉터조차 남지 않은 팔뚝에 다시금 입꼬리가 근질거렸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비로소 눈을 뜬 기분이었다. 내 손으로 이룬 첫 사냥이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웠음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30분도 안 돼서 쌕쌕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이 든 남자 몰래 집을 나왔다. 각성 상태가 된 몸이 수면을 거부해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동생의 실종 신고가 들어가면 용의자가 나로 좁혀지는 건 시간문제였고 경찰 조사를 피할 만한 방법은 아마 없을 터였다.
오전 네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라 아파트 단지 안이 고요했다. 결정적 증거가 될 자동차 블랙박스의 SD카드를 교체하고 차 내부를 닦다가 뒷좌석 바닥에 구겨져 있는 노란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도무지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동생의 선물을 일단 운전석 시트 아래에 보이지 않게 숨겨 뒀다.
동생의 물건은 전부 남자가 저수지에 수장시켰고, 내 핸드폰에 있던 동생과의 연락 내용은 모두 지웠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끝낸 뒤, 운전석에 앉아 대시 보드에 올려 둔 핸드폰을 찝찝한 기분으로 주시했다.
“왜 잠잠하지.”
비정상적인 고열에 무력하게 시달리는 동안 동생을 찾는 연락이 없었다니 티끌만 한 운이라도 끌어모아야 할 판인 나에겐 천운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며 과잉보호하던 엄마가 동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기에 의아함을 넘어 의심이 들었다.
지난 10년간 엄마가 변했다거나, 동생이 날 만날 거라고 말하지 않았거나. 이유가 뭐든 지난 주말에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영원히 숨기긴 어려울 터이다. 동생을 그렇게 죽여 버린 걸 후회했다. 상황이 급했다지만 그래선 안 됐는데…….
분에 겨워 핸들을 내리쳤다. 좀 더 은밀히 불러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했어야 했다. 운 좋게 무사히 돌아왔다곤 하나 너무 무모했다. 통화 내역부터 동생을 태운 역의 CCTV까지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후우…….”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평범하게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미련도 없고. 죽음과 한 발짝 멀어진 육체적 변화 탓인지 묘하게 현실감이 떨어졌다. 어차피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내 일상이 아니라 남자였다. 남자만 있으면 다른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차에서 내려 SD카드를 바닥에 내던지고 뒤꿈치로 힘껏 밟았다. 와작. 박살 난 조각을 짓밟아 완전히 가루로 만들었다.
“어디 멀리 갔다 오셨나 봐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순찰 중으로 보이는 경비원이 웃으며 다가와서는 흙탕물이 튀어 더러운 차체에 손전등을 비췄다. 차를 여기저기 살펴보는 모양새가 거슬렸으나 나는 경계를 죽이고 웃으며 대꾸했다.
“네. 피곤해서 세차를 아직 못했네요.”
“좋은 차가 아주 엉망이네. 여기 큼직하게 기스도 나고.”
“기스요?”
경비가 손전등으로 비추는 차 옆면을 보니 정말 큰 흠집이 나 있었다. 중앙에서부터 뒷좌석의 손잡이까지 날카롭고 길게 파인 흔적.
블랙박스 메모리를 부숴 버렸으니 확인은 불가능했지만 캠핑장에서 차를 긁은 기억은 분명 없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패인 자국이 묘하게 낯이 익다.
“아이고, 누가 긁고 도망갔나 보네. 수리하려면 돈 좀 들겠는데, 어쩌나.”
기억났다. 날벼락처럼 베란다 유리창이 깨진 날, 아파트 외벽에서 본 자국과 비슷했다. 아래층 남자의 뱀 같은 눈이 떠오른다. 그 역겨운 면상을 씹어 먹고 싶어 이가 갈렸다.
기어이 나랑 끝을 보겠다. 이거지?
“괜찮아요. 누가 그랬는지 아니까.”
“그래요? 다행이네. 못된 놈. 잡아서 아주 혼쭐을 내줘요.”
경비가 두 손으로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리는 시늉을 했다. 썩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경비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날 이틀 동안 간호하느라 피곤했는지 깊이 잠들어 있긴 했지만, 혹시라도 깨서 내가 또 말도 없이 나간 걸 알면 진짜 혼이 날 테니 그러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전에는 영 잠을 자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따금 피곤해 보이기마저 했다. 나한테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도 그렇고, 남자는 말투나 행동만 변한 게 아니라 점점 인간의 기본적 욕구나 감정까지 갖춰 가고 있는 듯했다. 사람을 먹으면서 얻은 기억을 흉내 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점점 동화되기라도 하듯…….
“잠깐, 동화된다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무심코 한 생각을 되짚었다.
그럼 혹시 나도 남자에게 동화되고 있는 걸까……?
“가만 보면 형님도 참 야행성이야.”
익숙하고 비릿한 목소리가 생각을 툭 끊었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아파트 공동 현관 계단에 걸터앉은 거대한 덩치가 보였다. 손가락에 끼운 담배 연기 사이로 아래층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치민 강렬한 충동이 방금까지의 고민을 전부 잡아먹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 충동의 유일한 브레이크는 하나. 고개를 들어 꼭대기 층을 확인했다. 불은 꺼져 있었다.
여길 뜨기 전에 남자에게 먹일 고기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기회를 놓치긴 아까웠다. 게다가 내 변화를 실험하기에 딱 들어맞는 실험체였다. 잘 설명하면 남자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이해해 줄 거다.
“아. 그때 그…… 나비랬나?”
담배를 입에 문 아래층 남자가 두 손으로 핸드폰 액정을 두드린다. 잠시 뒤, 환한 액정을 내게로 돌렸다. 밤중에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별로였지만 나를 업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틀 전, 차 앞에서 쓰러진 나를 데리고 들어갈 때인 것 같았다.
“뭐, 대충 예상은 했지만. 진짜 사람이었네. 나비.”
남자가 액정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뱉었다.
“아, 진짜. 형님 그렇게 안 봤는데 외모로만 사람 판단하네.”
“…….”
“남자는 생긴 게 다가 아닌데. 얘 어려 보이는데 밤일은 잘해요?”
저게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로…….
단숨에 머리로 열이 올랐다. 눈 밑이 움찔거리고 손가락 관절이 우드득 안쪽으로 굽어들었다. 감히 나비를 운운하는 놈의 짓거리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사라졌다.
“근데…… 이 새낀 아나. 형님 전 애인 실종된 거. 내가 확 말해 버릴까 봐요.”
낄낄거리는 아래층 남자에게 다가가자 배꼽쯤에 있는 머리통이 내려다보였다. 머리털을 짧게 깎아 먹기 쉬울 것 같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래층 남자가 기분 나쁜 눈으로 올려다보며 내 허리를 쥔다. 문득 그 팔뚝을 휘감은 뱀을 동강 내면 뱀과 아래층 남자 중 누가 더 몸부림칠지 궁금해졌다.
“새 애인이랑 끝내줬나 봐. 못 본 사이에 좀…… 야해지셨네.”
“이건 뭐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아래층 남자가 내 변화를 눈치챈 건 뜻밖이었으나 헛다리를 아주 제대로 짚었다. 나는 막 인간으로 사는 삶을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으니까.
“그러는 형님은 왜 내 맘을 몰라줄까. 딱히 아끼는 것도 아니면서.”
“맞아. 나 몸 같은 거 안 아껴.”
내 몸 따위로 남자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다.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었다. 아래층 남자의 얼굴에서 빈정거리는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약만 바짝 올려놓고 튀어서 내가 지금 화가 많이 났거든요?”
“그건 나 기대하라고 하는 소린가?”
“하…… 씨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거구에 단숨에 눈높이가 뒤바뀐다. 그러나 내가 먹이사슬의 위에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세등등하게 이를 드러내는 놈의 꼴을 여유롭게 바라봤다.
“태도 똑바로 해요. 사람 간 보지 말고.”
“너야말로 한 번만 대 달라는 부탁을 참 어렵게 한다. 왜. 나한테 매달리긴 자존심 상해?”
“……매달리는 건 형님 전공이고.”
“내가 좀 가르쳐 줄까?”
비밀스러운 짜릿함에 등허리가 오싹해졌다. 내 얼굴을 핥듯이 쳐다보던 놈이 홱 몸을 돌려 현관으로 들어가더니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 비뚜름하게 날 돌아본다.
“이번엔 형님 집으로 안 가요. 아니 못 가는 거죠. 형님이 이런 걸레였다는 걸 나비가 알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안 들키는 게 좋을 거야. 아직 어려서 흥분하면 뒷일 생각 못 하거든.”
“오…… 스릴 넘치고 좋네. 원래 몰래 먹을 때가 더 맛있는 법이라.”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아래층 남자가 29층을 누른다. 놈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진다. 다가올 무언가를 기대하는 설렘과 비슷했다. 내 안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본능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저 머리통을 뽑아서 남자에게 먹이고 싶다고.
아래층 남자는 나를 먼저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퇴로를 막겠다는 심산이었겠지만 덕분에 적당한 도구를 등 뒤에 숨길 수 있었다. 장식장에서 잡히는 대로 쥔 트로피의 받침대 부분이 제법 묵직했다. 놈이 현관문을 닫자 주황색 센서 등만 남은 공간은 어두컴컴해졌다.
“내가 이래 보여도 상대에 대한 예의는 있는 놈이거든요. 억지로 눕히고 그러는 거 안 좋아해요.”
놈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은밀히 트로피를 거꾸로 고쳐 쥐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4시 15분.
“근데 왠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아. 내 촉이 그래.”
“……!”
예고도 없이 달려든 놈이 내 몸을 부둥켜안았다. 등이 장식장에 부딪히며 잡동사니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트로피를 쥔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두꺼운 팔이 밧줄처럼 상반신을 동여맨 탓에 할 수 있는 건 트로피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손아귀에 힘을 꽉 주는 게 다였다.
“하아…… 내가 너 따먹고 싶어서 얼마나 뒤질 뻔했는지 알아?”
헉헉거리는 숨과 축축한 살덩이가 목에 닿아 진저리가 났다.
“처음엔 좀 아플 거야. 힘 좀 빼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윽…… 대 준다는데 왜 겁먹고 그러지? 재미없게.”
“재미없을 걱정은 마요. 아래위로 질질 싸게 만들어 줄 테니까.”
놈은 킬킬거리면서도 결박을 풀지 않았다. 등 뒤로 놈의 팔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숨긴 걸 들키고 만다. 급하게 놈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고 팽팽하게 부푼 앞섶을 문지르자 놈은 허리를 떨며 곧바로 반응했다.
“이러기야? 같이 즐기자는데도?”
“하아…… 씨발.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대가리에 떡 칠 생각밖에 없는 주제에 눈치가 좋았다. 귓바퀴를 핥은 혀가 귓구멍으로 밀려들었다. 소리며 감촉이며 하나같이 역겨워 이를 악물고 몸을 뒤챘다.
“좀…! 놔 봐. 깔려서 주는 대로 먹기만 하는 거 안 맞으니까. 윽.”
놈이 강한 힘으로 내 뒤통수를 잡아채 강제로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눈이 마주치자 놈은 찢어진 눈을 부라리며 지껄였다.
“주둥이 작작 털어. 내가 두 번 속을 것 같아?”
놈이 내 머리채를 쥐느라 왼쪽 팔이 자유로워졌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트로피를 왼손으로 바꿔 쥐기까지는 찰나였다.
“뭐가 웃겨? 아악!”
머리통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고꾸라진 놈이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바르작거렸다. 동생 때도 느꼈지만 사람을 죽이지 않고 기절시키는 일은 의외로 어려웠다. 손에 든 금색 트로피를 휘휘 돌려 봤다. 아마추어 격투기 대회라고 적힌 받침대 모서리에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있다.
“하아…… 좀 가벼웠나.”
대충 던져두고 쓸 만한 걸 찾아 거실을 돌아보았다. 한쪽 바닥에 무게별로 늘어져 있는 덤벨이 눈에 들어왔다. 개중에 휘두르기 적당한 것을 골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이제부턴 정당방위다, 이 싸이코 새끼야!”
어깨가 돌려세워지고 놈의 주먹이 코뼈에 정확히 꽂혔다. 무지막지한 충격을 받은 몸이 휘청한 끝에 쓰러졌다. 뼈가 주저앉은 코에서 피가 왕창 기도로 넘어와 기침이 터졌다. 눈앞을 흐릴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예상대로 아픔은 무뎠다. 몸의 변화를 하나하나 실감할수록 희열이 끓어올랐다.
나를 때려눕혔다고 생각했는지 방심한 놈이 욕을 내뱉으며 어디론가 급히 갔다.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걸어서 못 나갈 줄 알아라. 하는 소리가 두서없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부러진 내 코가 끄드득거리며 원상 복구되고 있었다.
“하아…….”
코뼈가 재생되는 감각에 집중할수록 섹스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 전신을 쓸어내렸다. 고개를 틀어 현관 거울 앞에서 맞은 곳을 비춰 보는 놈의 뒷모습을 찾았다.
멍청한 새끼. 최대한 몸을 낮추고 조용히 바닥을 기었다.
“제정신 아닌 줄은 알았지만, 완전 생또라이 새끼였……!”
놈의 발밑까지 기어간 나와 놈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나를 걷어차려는 다리를 붙잡아 당겼다. 육중한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틈을 놓치지 않고 가져온 덤벨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놈의 정강이를 내리쳤다.
“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사이로 뚝 부러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두 동강 나 자리에서 이탈한 뼈가 두꺼운 종아리 옆쪽을 뚫고 삐져나왔다.
“이 씨발 개 같은 새끼가! 내 다리…… 다리가… 아아악!”
“입 안 다물어? 들키면 안 된다고 했잖아.”
핏대를 세우며 짖어 대는 주둥이를 막으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다리를 다시 한번 내리찍었다.
콰직.
아까와는 조금 다른 소리를 내며 함몰된 다리가 축 처졌다. 만족스러운 고요 속에서 시계를 확인했을 때가 4시 21분. 만져 본 코는 멀쩡했고 나는 두 번째 사냥에 성공했다. 단 6분 만이었다.
“후우.”
깊게 숨을 내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깼으면 큰일인데.”
서둘러 주변의 흔적을 지웠다. 어질러진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튄 피를 닦고, 기절한 놈의 다리를 수건으로 묶어 피가 바닥에 흐르지 않게 조치한 뒤, 우리 집 거실에 내려놓기까지 30분이 더 걸렸다.
육중한 거구를 계단으로 옮기느라 턱 밑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땀을 닦으며 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남자의 식사 시기에 맞춰 먹이려면 당분간 놈을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 죽여 버리면 놈을 냉동실에 보관해야 할 텐데 차마 사람의 사지를 토막 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남자가 죽은 지 오래된 고기를 먹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일단 정신을 잃은 놈의 멀쩡한 다리를 잡아 남자의 식사 공간으로 질질 끌어갔다. 좀 귀찮아지겠지만, 앞으로 삼사일 정도만 버티면 되었다.
방문을 닫고 나와 남자가 잠들어 있는 침실로 갔다.
바깥과 단절된 방 안은 평화로웠다.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남자를 영원히 이 평화 속에 가두고 싶었다. 내가 허락한 곳에서 자고, 먹고, 웃어 주기만을 바랐다. 나에게 남자를 지킨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먹을 거 준비해 줄 테니까 조금만 더 자고 있어.”
당장 남자를 깨워 이제 진짜로 너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노라고 당당히 보여 주고 싶은 걸 참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일단은 기절한 놈을 구속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고 안심하긴 일렀다. 죽음을 앞둔 인간이 어디까지 필사적으로 변하는지 동생을 보며 뼈저리게 느낀 후였으니.
다용도실을 뒤져서 노끈과 청테이프 따위를 있는 대로 챙겼다. 잡동사니가 든 상자를 뒤적이다가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가 질질 끄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달칵하는 미세한 소음이 들려왔다. 거실 쪽이었다.
불길한 소리에 급히 거실로 나온 나는 튀어나올 뻔한 욕을 삼켰다. 놈을 끌어다 놓은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안에 누워 있어야 할 놈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아까 들은 소리의 원인이 놈의 행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질질 끌린 핏자국이 현관으로 향하다가 이중 도어록 때문에 문턱을 넘지 못했다. 되돌아간 흔적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잠든 남자한테 간 건 아닐지 걱정했지만, 침실 앞은 깨끗했다. 핏자국은 욕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주방으로 갔다. 남자가 식탁에 꽂은 식칼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칼을 뽑아 들고 욕실 문 앞으로 다가가니 손잡이에 붉은 지문이 찍혀 있었다. 닫힌 문 너머로는 불안정한 호흡 소리가 들렸다.
놈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남자가 깨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어딜 찔러야 조용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난생처음 해 보는 고민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배는 찌르기는 편하지만, 치명상을 입고 금방 죽어 버릴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옆구리다. 최대한 내장이 있을 복부 중심을 피해서 옆구리를 찌르자. 피를 좀 흘리겠지만 제압한 뒤, 대충 지혈을 해 두면 쉽게 죽진 않을 것 같다.
결심을 마치고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내가 손잡이를 돌리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먼저 벌컥 열렸다.
예상치 못한 거센 힘이 멱살을 낚아채 속수무책으로 욕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놓쳐 버린 칼이 타일 바닥에 떨어지고 단단한 쇠줄이 목에 감겼다. 샤워기 호스였다. 어찌해 볼 겨를도 없이 콱 목이 졸렸다.
“링 위에도 가끔 있거든? 너같이 물불 안 가리는 싸이코 새끼들.”
이를 가는 음성에 살기가 넘쳤다. 샤워기 호스를 쥐어뜯으려 하자 놈이 끙, 힘을 주며 더욱 세게 잡아당겼고 피가 통하지 않는 머리로 터질 것 같은 압력이 더해졌다. 남은 산소마저 소모한 폐가 쪼그라들어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지만 좁아진 기도에선 끅끅거리는 쇳소리만 났다.
“네가 그놈들보다 더한 새끼인 건 인정해 줄게.”
간신히 호스와 목 사이를 손가락으로 비집었다. 손톱에 긁힌 목덜미 피부가 비누처럼 깎여 나갔다. 손가락에 걸린 호스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비틀자 놈의 팔뚝에서 몸을 잔뜩 부풀리고 씨근거리는 뱀과 눈이 마주쳤다. 저걸 두 동강 냈어야 했는데.
“아무리 미쳤어도 상대는 보고 덤벼야지. 나는 지는 게임은 시작도 안 해.”
“이거…….”
“뭐?”
“게임, 아니……야.”
사냥이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순 있어도 죽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허, 아직도 그딴 소리가 나와? 이 개싸이코 새끼야. 너 그 남자 죽인 거 맞지.”
등신 새끼.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에도 놈의 멍청함에 웃음이 났다.
“씨발. 이 미친 새끼. 뭐, 뭐야, 너.”
놈의 다급한 음성과 함께 목을 감고 있던 쇠줄이 느슨해지고 동시에 점점 어그러지는 시야로 남자가 어른거렸다.
“나, 비야.”
나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줄 것처럼 다가오던 남자의 손이 한순간에 칼날같이 변하더니 내 어깨를 스쳤다. 정말 찰나였다.
“크… 끄으악!”
목을 조이던 샤워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몸도 마찬가지였다. 타일 바닥에 엎드려 모자란 숨을 들이켜느라 정신이 없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내 옆에는 뱀이 휘감은 팔이 피를 철철 쏟아 내며 나뒹굴고 하얀 타일에 붉은 웅덩이가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멍한 시선을 들어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을 서서히 올려다보았다. 놈의 팔을 잘라 낸 남자의 조각같이 매끈한 손끝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말없이 나가지 말라고 부탁했던 것 같은데요.”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무서웠다.
“설명.”
짧게 말을 뱉은 남자가 그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호흡. 여러 번 겪어 잘 알고 있는, 인내하기 위한 숨.
느릿하게 다가오는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꼴사납게 사냥에 실패한 현장을 보여 준 것도 모자라 몰래 나간 짓에 대해 변명까지 해야 하는 처지였다. 차마 빳빳이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는 남자의 몸짓만 눈에 담았다. 남자는 참을성 있게 물어 왔다.
“설명해 볼래요?”
“……처리해야 할 게 있었어.”
“처리요.”
“블랙박스가…….”
말끝이 흐려졌다. 땀에 젖은 귀밑머리를 스치며 내려간 손가락이 내 턱을 들어 올린 탓이다. 유감스러운 표정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의 한심함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남자에게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저 눈으로 변한 내 존재 가치를 직접 봐 주길 바랐다. 그런데 전부 망쳐 버린 현실이 분하고 억울했다. 시선을 내리깔고 나오지 않는 변명 대신 입술만 짓씹었다.
“그게 다예요?”
남자는 무감하게 쓰러진 놈을 눈짓했다. 저놈에 관해 설명하란 뜻이었다. 팔이 뜯긴 놈은 욕조에 처박혀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꼴좋다. 이를 갈며 놈을 노려보았다. 저대로 뒈져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놈이지만 남자를 생각해서 필요해지는 순간이 올 때까지 살려 둘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계속 피를 쏟게 둬선 안 됐다.
“지혈부터 하자. 그냥 두면 죽겠어.”
일어서려다가 어깨를 누르는 힘에 도로 주저앉았다. 한시가 급한데 남자는 내 변명을 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지금 몰라서 이래?”
“당신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요.”
이번만큼은 떳떳했기에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새끼가 너랑 내가 찍힌 사진을 가지고 협박했어. 그래서 너 먹이려고 데려왔고. 됐어?”
“나 때문이란 거죠?”
되묻는 목소리가 한결 나긋해졌으나 표정은 여전히 가라앉은 채였다. 질문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이번엔 내가 되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렇게 묻고 나니 의문이 들었다.
설마 내가 다른 의도로 저 새끼를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흘겨봤다.
“설마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내가 딴생각으로…….”
“그럼 됐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말을 잘라먹는 남자의 건방진 태도에 나도 슬슬 열이 받았다.
“앞으로는 하지 말아요. 이런 위험한 짓.”
“내가 방심만 안 했어도 문제없었어. 위험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듯 대꾸하자 입을 꾹 다문 남자가 만신창이일 게 분명한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날 걱정하는 듯해서 뺨을 쓰다듬어 주려 했더니 내게서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리곤 더는 나와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일어섰다. 내게 비스듬히 등을 지기까지 한 남자가 성의 없는 투로 말했다.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
“뭐? 끼어들지 마?”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여태까지 내 손안에서 목숨을 부지해 놓고 이제 와서 알아서 하겠다는 건방진 소리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내 노력이 언제나 값싼 취급을 당하긴 했어도 너만은 알아줄 거라 믿었는데.
마침내 내 심사도 뒤틀렸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처음부터 제대로 할 것이지. 제 식욕 하나 감당 못 해서 주인도 몰라보고 날 잡아먹으려 한 주제에, 일을 다 꼬아 버린 주제에! 지금 뭐가 어쩌고 어째?
“나비야.”
짐짓 차분한 어조로 부르자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퍽 건방을 떠는 남자에게 핏물에 잠겨 있던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나한테 할 말이 그따위 것뿐이야?”
고맙다고, 역시 나밖에 없다고 해야 하지 않나?
“하나만 더 할게요. 지금부터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자신이 성자라도 되는 양 지껄이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났다.
“……누가 들으면 내가 사람 잡아먹는 괴물인 줄 알겠네.”
약속, 약속, 빌어먹을 약속!
나 역시 한낱 말랑한 약속 따위로 우리의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남자가 말하는 약속은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내 속이 뒤집히든지 말든지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을 무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람 행세를 하더니 저의 본질을 잊어버렸나 보다. 게다가 나는 더 이상 약해 빠진 인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진짜 괴물보다 지금의 내가 더…….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뺨을 쓸자 질척한 피 냄새가 이성을 마비시킨다.
“죽이지 마? 왜?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인간 따위가 다 뭐라고. 차고 넘치는 쓰레기들이다. 누군가 잡아 죽이지 않으면 연명을 거듭하며 오물이나 만들어 내는 바퀴벌레들.
남자의 식사는 게으르고 오만한 인간들을 자연의 먹이사슬에 합류시키는 공정한 심판에 가까웠다.
“그걸 내가 말해 줘야만 알아요?”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먹이를 구해다 주면 고맙게 받아먹으면 될 간단한 일이건만, 괴물 주제에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 그만둘 생각 없어. 방해되는 새끼들 다 죽일 거고, 죽여서 너 먹일 거야. 기억 안 나? 널 위해서 뭐든 한다고 했잖아.”
굳은 얼굴의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까처럼 내 앞에 앉아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정신 차려.”
뼈가 어긋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센 악력이었지만 난 웃음만 났다. 정신 차리라는 말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누가 누구보고 정신을 차리란 건지. 남자의 인간 흉내에 진절머리가 났다. 코웃음을 치며 너나 정신 차리라고 분명하게 일갈해 주려고 했다.
“당신은 나랑 달라.”
그 말에 정신이 멍해지지만 않았어도.
철저히 선을 긋는 태도가 너무도 당연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돌에 맞아 죽어 가는 개구리가 된 심정이었다.
“다르다고……?”
되묻는 내 목소리는 순간 희박해진 내 존재감처럼 조금도 무게가 실리지 못했다.
그럼 난 뭐지? 남자와도 다르다면, 인간이 아니게 된 나는 뭐란 말인가.
화를 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답을 주지 않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남자에게만큼은 인정받으리라 여겼는데…….
「형은 태어나선 안 됐어.」
「나 아니면 누가 너랑 살아 줄 것 같아?」
「쯧.」
머릿속에 파리 떼가 들끓는 것 같아 귀를 틀어막았다. 뻐근한 머리통을 열 손가락으로 주물러 댔지만 소용없었다. 기분이 정말 좆같았다.
“다르다고……. 내가, 너랑.”
남자의 말간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확신에 차 있었다.
보여 줘야겠다. 내가 남자와 다르지 않음이라도 당장 증명해 보여야겠다. 핏물을 헤치고 무릎걸음으로 다 죽어 가는 파리 새끼에게 다가갔다. 만류하는 남자의 손길은 쳐 냈다. 찰박거리는 피 웅덩이 속에서 잘린 팔을 집어 올렸다. 뱀이 휘감은 팔이었다. 내가 동강 내려던 팔을 남자가 잘랐다. 네가 인정하지 않는대도 우린 이미 많이 닮아 버렸다.
“오, 오지 마.”
풀린 눈으로 늘어져 있던 놈이 잘린 팔을 보고 경악하며 발버둥 친다.
“내 전 애인이 실종된 거 나비도 알고 있냐고 물어봤었나?”
그렇게 말하며 잘린 팔을 뒤로 내던졌다. 놈에게 진실을 말해 주자고 결심했다. 곧 죽을 놈에겐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나비가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 짓거리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말이다.
“당연히 알지. 쟤가 죽여 준 건데. 그것도 머리부터 잘근잘근 씹어서.”
“……그만 해요.”
흘끔 돌아보자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심해에서 건져 낸 검은 광물의 표면처럼 차가웠다. 그 얼굴이 참 볼만했다. 남자가 내보이는 이질감이 내겐 흥분제였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괴물이면 괴물답게 굴어야지.
가슴 설레게 하는 남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보란 듯이 두려움에 떠는 놈의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놈이 기특하게도, 돼지 같은 소리로 울며 흥을 돋웠다.
“저 예쁜 나비가 사실은 싱싱한 사람의 머리를 뜯어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괴물이란 거, 곧 너도 머리부터 뜯어 먹힐 거란 거! 죽기 전에 다 알려 줄게! 더 궁금한 거 없어?”
늘 기분 나쁘게 날 쳐다보던 놈이 도리질을 치며 찢어진 눈으로 질질 눈물을 짜냈다. 놈의 머리통을 꽉 붙잡아 나를 보게 했다.
“없어?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자. 네 눈엔 내가 뭐로 보여? 내가 너랑 같은 인간으로 보여?!”
괴물과 같은 길을 걷고자 내가 어디까지 인간성을 내다 버렸는지 똑똑히 봐 주길 바랐다. 오직 그 생각으로 혈안이 되어 놈의 부러진 다리를 쥐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한발 빨리 억센 손아귀가 내 팔목을 낚아챘다. 그리곤 시야가 한순간에 뒤집혔다.
무자비하게 내동댕이쳐진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부딪친 어깨에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욕실에 있던 내 몸은 어느샌가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남자가 날 욕실 밖으로 내던졌음을 알아챈 순간, 남자가 다가왔다.
이게 날 집어 던져……?
지지 않고 노려봐 주자 이번엔 턱이 쥐어 잡혔다.
“읏.”
“그만하라고 했어. 더는 못 봐 주겠으니까.”
남자는 부러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히 발음했다. 그 서늘한 목소리가 몸서리쳐지게 듣기 좋아서 비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갔다.
“나밖에 없다고 안길 때는 언제고. 이젠 못 봐 주겠어?”
내 빈정거림에 남자가 눈가를 좁혔다.
내게 이런 본능을 심어 준 건 남자였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송두리째 거세시키려 하다니 모순이고 위선이었다!
격발된 충동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내 인내심을 끊었다. 나는 무작정 남자의 뒷머리를 휘어잡고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어깨를 잡아 떨어뜨리려는 선명한 거부가 흉악한 본능에 기름을 뿌렸다. 찌푸려진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혀로 입술을 갈랐다. 그러자 남자의 혀가 침입을 거부하듯 내 혀를 밀어낸다. 건방진 태도를 응징하려 남자의 아랫입술을 짓씹어 배어 나오는 투명한 혈액을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 마셨다. 그리고 크게 벌어지는 남자의 동공을 구경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대체 왜 거부하는 거지? 찢어 죽이고 먹으면 그만인걸.
그런 감상을 전하려 눈을 휘어 웃어 주자 인상을 확 찌푸린 남자가 거칠게 날 잡아떼어 냈다. 남자가 할 말을 뻔히 예상한 나는 먼저 소리쳤다.
“그만하란 소리 지겨우니까 너나 그만해! 나까지 괴물로 만들어 놓고 끼어들지 말라고? 너랑 내가 다르다고?! 내가 변하길 너도 바랐잖아. 아니야?”
“나는……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에요.”
놀란 듯 크게 벌어진 눈 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더니 내 눈을 피한 끝에 슬픈 얼굴을 했다.
“단지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우울한 얼굴이 꼴 보기 싫어서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드세게 흔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 날 떠났을 거라, 기어코 그 소리가 하고 싶어?”
제 입술을 깨물던 남자가 나를 끌어안았다.
“이러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남자의 애원에 허탈해졌다.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변화한 몸을 통해 남자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혼자가 될까 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끝내는 혼자가 되는 것도 다 지긋지긋했다. 지금이라면 정말로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남자는 내가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쓰러지듯 남자에게 몸을 기댔다. 두근거리는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티셔츠를 그러쥐었다.
“진짜로 미쳐 버릴 것 같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널 잃을 것 같아서 매분 매초 진짜 돌아 버릴 것 같다고!”
차라리 남자가 잔인한 괴물이었으면 했다.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워서, 그래서 죽지 않고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나를 이 불안의 늪에서 건져 주기를 바랐다.
“네가 안 먹으면 내가 먹어 버릴 거야. 저 새끼 내가 먹을 거라고.”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돌연 밀도 높은 적막이 내려앉아,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예감이 스쳤을 뿐.
나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이 느슨해지더니 이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곤 적막이 차올랐다. 어느샌가 맞닿은 가슴에서 일정하게 전해지던 심장 소리가 멎어 있었고 남자의 몸은 마치 실시간으로 죽어 가듯 차갑게 식어 갔다.
“날…… 화나게 하려고 한 말이죠?”
멈춘 심장으로도 남자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천천히 눈을 들자 비스듬히 미소 지은 입술이 시야에 걸렸다.
“그게 만약 진심이라면…….”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이 꾸며 낸 미소만큼이나 건조했다. 나는 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남자의 가느다란 입꼬리가 차츰차츰 내려앉았다.
“두 번 다시 나한테 들키지 말아요.”
남자는 나를 남겨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욕조에서 끄집어낸 놈을 들고 나타났다. 남자는 놈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거구를 어렵지 않게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팔 한 짝을 잃은 놈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캑캑거리며 허공에 뜬 두 다리 중 성한 쪽을 미약하게 버둥대는 게 고작이었다. 화가 난 남자가 놈을 먹어 치우는 건 허무할 정도로 손쉬워 보였다.
그런데 분노한 남자는 놈의 목을 죌 뿐 먹을 생각이 없었다. 먹긴커녕 죽여 없애 버릴 작정 같았다. 놈의 얼굴이 점점 보라색으로 변해 갔다. 피 한 방울까지 아껴야 할 먹잇감을 이대로 잃을 수는 없었다.
“나비야, 먹을 거지? 설마 지금 그냥 죽여 버리려는 거 아니지?”
“잘 새겨 둬요. 당신이 먹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남자는 가차 없이 손에 힘을 주었고 놈의 목이 빈 생수병처럼 찌그러졌다.
“안 돼….”
놈을 먹지 않으면 다음 식사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여길 떠나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는데 다른 기회가 제때에 오리란 보장도 없었다.
“안 된다고….”
남자가 또 정신을 잃기라도 한다면 나 혼자서는……. 절망으로 물든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 멍청한 괴물 새끼!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남자의 팔에 득달같이 매달렸다. 일단 어떻게든 놈을 살려만 두면 남자가 굶주려 이성을 잃었을 때 먹일 수 있었다.
“내가 실수했어! 네 말대로 할 테니까 제발 죽이지만 마. 나비야. 내가 잘못했다고!”
“이제 당신 말 안 믿어.”
“놔! 이것…… 좀! 놓으라고!”
온 힘으로 남자의 팔을 떼어 내려 했으나 푸른 힘줄이 무섭게 돋아난 팔은 돌보다 단단했다.
안 돼. 안 돼. 어떻게든 막아야 해!
여기저기 방황하던 시야에 내가 떨어뜨렸던 식칼이 들어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걸 주워 들었다. 얼떨결에 칼을 쥐고 보자 눈을 뒤집어 깐 놈의 입에서 흰 거품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씨발!
이성이, 의식이, 모든 감각이 거기서 끊어졌다.
“하아, 하아……”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당기던 끈이 떨어진 것처럼 힘이 쭉 빠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쥐고 있는 칼이 어딘가에 박혀 움직이질 않았다.
뭐지……?
당황해 칼자루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칼이 깊이 박힌 곳은 정확히 옆구리였다. 칼에 찔린 몸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고통스러운 신음의 주인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은 환영이길 바라며 눈만 깜박였다. 검게 칠해진 기억의 끝에는 칼을 쥔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이것도…… 실수예요?”
내가 남자를 찔렀다는 것만은.
날붙이의 엇나간 용도가 내게 너무 익숙해졌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자가 마침내 놈을 놓았으나,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놈의 생사를 확인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찌른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 모든 게 부질없어졌다.
“……나비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과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호흡. 정신이 들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나, 나도 모르게 몸이…….”
그때까지도 내가 남자를 찔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발 늦게 죄책감이 목 끝까지 차올라 두 다리가 제멋대로 뒷걸음질 쳤으나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나비야.”
너를 찌르다니 방금은 제정신이 아니었노라고 그렇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입에선 공허한 사과만 되풀이됐다.
난 그저 남자가 내 곁에서 살아 주기만을 바랐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 자괴감이 들개처럼 나를 물어뜯었다.
남자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스스로 칼을 뽑아냈다. 투명한 피에 젖은 칼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화를 내거나 치를 떠는 대신 상처를 손바닥으로 덮고 가만히 고통을 삼키고만 있었다. 그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남자를 안아 줄 수 있는 손이 불행히도 그를 찌른 손뿐이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짓도 잊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나비야, 괜찮…… 큭.”
내 목을 틀어쥔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억세게 붙잡힌 목 따윈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남자의 적의 섞인 시선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분노한 남자가 내 몸 어딘가를 부러뜨려 응징하더라도 그걸로 분이 풀린다면 그래도 좋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그런데 화를 낼 줄 알았던 남자는 자신을 탓했다. 날카로웠던 시선은 금세 짙은 후회에 잠겼다.
“당신을 그대로 뒀어야 했는데.”
“그대로…? 그대로라고?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차라리 날 찔러. 나비야. 내가 미우면 그냥 날 찌르라고.”
나는 남자를 만나기 이전의 나로는 조금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타인의 기억만으로 나를 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내가 너를 만나기 전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알면 그런 말 못 해. 너는 하나도 몰라.”
“아니요. 잘 알아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짧게 목을 울린 남자의 표정은 흡사 유리 조각을 토해 내는 것처럼 괴로워 보였다.
“내가 당신을 망쳤어요.”
“아니. 넌 날 구했어.”
목줄기를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모든 걸 포기하고 힘없이 거둬졌다. 손목을 붙잡자 남자는 지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이 손으로 날 지옥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간다고 해도 남자의 손만이 내겐 유일한 구원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갈피를 잃고 흔들리는 남자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려 차가운 손바닥에 뺨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니까 망설일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없어.”
작게 움찔거린 손을 남자는 끝내 가져가 버렸다.
“그럴 수 없어요.”
“왜. 어째서…….”
“난 이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남자는 달콤한 말로 나를 분노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지금 내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남자의 뺨을 쓸었다. 닿은 피부가 차가웠다. 내가 쏟아부은 애정은 남자의 투명한 피를 덥히지 못하고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 네가 뭘 하면 되는지 알려 줘? 쉬워. 내 옆에만 있으면 돼.”
남자는 끝끝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요.”
“왜? 네가 사람을 먹으니까?”
“…….”
“네가 괴물이라서?”
“…….”
긍정의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이대로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칼에 찢긴 남자의 티셔츠 위를 더듬다가 찢긴 자국을 벌리자 역시나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드러났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남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인지. 그저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 알려 줘.”
모르는 채로는 나아갈 수가 없다. 우리 사이에 놓인 거울을 부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이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상처가 지워진 자리에 머무르던 시선을 떼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 줘.”
놀란 듯 커진 눈이 점차 알 수 없는 어둠을 머금는다.
“……고마워요. 먼저 말해 줘서.”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내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그러곤 내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불안정해 따라붙으려 하자 손을 들어 저지한다. 꽉 막힌 공간인데도 그 사이가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거리처럼 멀어지는 듯해 초조해졌다. 왜 내게 거리를 두는 건지, 지금이라도 내가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나비야, 왜 그러는…….”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까와 달리 무언가 결심한 듯한 남자의 시선은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날 응시하던 남자의 선명한 검은자가 퍽 터졌다. 새카만 잉크는 흰자위로 퍼져 나가 이내 남자의 눈알을 온통 검게 물들였다. 날 물었을 때의 그 눈.
모든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끝까지 당신한테 보여 줄 생각은 없었는데.”
남자가 고개를 비틀며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까득, 까득, 까드득.
기이한 소리와 함께 얼굴의 경계선부터 피부가 딱딱하게 굳어진다. 표면이 거친 시멘트처럼 변한 이마를 뚫고 가느다란 촉수 두 개가 비죽 뻗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온몸의 피가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역겨워요?”
무미건조한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백지보다 하얀 껍데기가 내가 아는 남자를 모조리 삼켜 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남자가 빠른 속도로 인간의 외형을 벗어나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혐오스럽도록 무정한 눈알, 동족을 잡아먹는 하얗고 커다란…… 사마귀.
“피하지 말고 잘 봐요.”
큰소리친 것이 무색하게 덜덜 떨고 있는 날 비웃듯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남자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지금까지 내가 외면해 온 진실이 드디어 고치를 찢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안다. 알아야 한다! 핏줄이 터져라 두 눈을 부릅떴다.
쩌저적.
하지만 진실은 더 가혹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술 끝의 뺨이 벌겋게 갈라지는 순간, 나는 그만 남자의 말을 어기고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둠 속에서 말간 남자의 얼굴과 괴물의 형상이 물과 기름처럼 떠돌았다.
감당하기 힘든 충격에 의식이 외부와 내부의 자극을 전부 차단했다. 아무것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참으려고 해도 감은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흘렀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숨이 막힐수록 힘주어 눌렀다. 이대로 질식해서 죽어 버렸으면 했다.
‘쯧.’
누군가 한심한 나에게 혀를 찬다.
꾸득, 꾸드득, 우적우적.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이 머리통을 부숴 먹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건만 기뻐할 수가 없다. 눈을 감아 버린 스스로가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다. 남자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을 때보다 더한 죄책감이 심장을 비틀었다.
“흐읍……. 나비야.”
이름을 부를 자격이 내게 남아 있을까?
“가.”
낮은 으르렁거림에 쓸모없는 두 다리가 움찔거렸다.
“나한테서 도망치려면 지금뿐이야.”
한심한 울음을 그치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 해 봐도 무엇 하나 마음처럼 되는 것이 없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경계심으로 곤두선 거친 음성이 심장을 할퀸다. 눈을 감은 채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방향을 잃지 않도록 신중히 디뎠다. 괴물은 비겁한 내가 도망치기를 기다려 주었다.
주춤거리는 불안정한 걸음 끝에 나처럼 떨고 있는 호흡이 가까워졌다. 망설임 없이 두 팔을 벌려 전부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거친 감촉. 낯선 괴물의 몸에서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남자는 도망가라고 했지만, 입구도 출구도 내겐 여기뿐이다.
“네가 이래도 소용없어. 나 너 사랑해.”
칼에 찔리고도 날 겁줘서 쫓아내기밖에 못 하는 이 가여운 괴물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나는 모르겠다. 남자가 끔찍한 괴물이라면 나는 더 끔찍한 존재가 될 것이다. 서로를 망쳐 버린다 해도 내겐 사랑이었다.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나도 멈추는 방법을 모르니까.
품 안의 몸이 녹아내리듯 부드럽게 변해 간다. 숨 막히는 고요를 걷어 내고 맞닿은 가슴에 드디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돌아왔다. 느리게 그리고 서서히 나와 속도를 맞춰서.
“……내가 괴물이라도?”
가만히 어깨를 잡는 손길을 느끼고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의 온통 새카만 미지의 눈과 마주쳤다. 여백이 없어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은, 가까이서 보니 무섭지 않았다. 저 눈을 한 괴물마저 가지고 싶은 욕망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네가 뭐라도 상관없어.”
나와 남자의 사이를 가리던 모든 것들이 허물이 되어 벗겨졌다. 오로지 내게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과 숨결을 보고, 듣고, 느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사랑해. 사랑해, 나비야.”
이 말이 이토록 쉬운 거였나. 내쉬는 숨마다 고백의 말이 섞였다.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짧은 입맞춤으로 흘러넘치는 내 고백을 가져갔다.
“……그만.”
가시를 삼키는 표정으로 남자가 거칠게 입술을 맞붙여 왔다. 아찔한 피 냄새가 나는 입술을 탐하며 목을 감싸자 단단한 팔이 엉덩이를 받쳐 든다. 그리고 몸이 들렸다. 자연스레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매달렸다. 남자는 질척한 입맞춤을 이어 가며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나를 내려놓은 곳은 침대 위였다. 급하게 피로 질척해진 옷을 벗고 알몸이 되자마자 다시 남자를 끌어당겼다. 흥분으로 젖어 가는 뒤가 느껴졌다. 열렬히 입술을 겹치며 다리를 벌렸다.
엉덩이 사이로 뜨거운 기둥이 문질러졌다. 남자와의 행위는 이제 섹스 이상의 의미였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불안한 관계가 맺을 수 있는 찰나의 결실이었다.
늘 몸 안에 길을 내듯 침범하던 남자는 여느 때와 달랐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전에 없이 부드럽게 파고드는 몸짓만 봐도 남자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