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2)

불완전 변태 2

투명한 진열장 안에 올리브 빛 액체가 담긴 네모난 병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코가 찡할 정도로 난무하는 온갖 향기들 사이에서 익숙한 브랜드 로고가 눈길을 끌었다. 백화점 1층 중앙에 제법 크게 자리한 매장은 죽은 애인이 애용하던 향수 브랜드였다. 열등감을 덮으려 허세처럼 두르고 다니던 짙은 냄새가 떠오른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향기지만 지금 내게는 그 지독함이 더할 나위 없이 필요했다.

인위적인 냄새가 괴로운지 남자의 얼굴이 유독 희게 뜨고 호흡은 쌕쌕거렸다. 이유를 뻔히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 남자에게 물었다.

“어디 안 좋아?”

“……아뇨. 괜찮아요.”

“그래?”

며칠 전이라면 덩달아 안절부절못했겠지만 괜찮다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다른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과 눈을 맞췄다. 잠시 기다려 달란 눈짓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칼에 찔려도 멀쩡한 남자가 고작 향수 냄새에 죽을 리는 없으니.

“향수…….”

“응. 필요할 것 같아서.”

나지막한 중얼거림 역시 대수롭지 않게 흘렸다. 남자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였으나 귀엽게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진열장 너머에서 직원이 말을 걸어 왔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가까이 온 직원에게서 명품 매장 직원들 특유의 번지르르한 광이 흘렀다. 직원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남자에게로 향한다.

이것 봐라?

그대로 두면 종일 보고 있을 기세라 검지 끝으로 유리장을 두드려 시선을 내게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필요하신 게…….”

직원은 시선을 내리깔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시선이 그 와중에도 나와 남자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기분이 더러웠다.

“제일 진하고 독한 거요.”

흡사 바에서나 들을 법한 주문에 직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예의 그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진열장을 열었다.

“우디 계열이 진하고 잔향도 오래가는 편입니다. 젊은 남성분들이 가장 선호하는 향이기도 하고요.”

직원이 건넨 시향지를 공중에 흔들었다. 진한 향이 코를 찔렀다. 은근하고 부드러운 남자의 냄새에 비하면 흔하고 무식하기만 한 냄새였지만 남자의 냄새를 덮기엔 충분할 듯싶었다. 내 표정이 별로였는지 직원이 몇 번 더 시향을 권했으나 거기서 거기였다.

“고객님이 직접 쓰실 건가요?”

내가 긍정하자 코로 짧게 숨을 몇 번 들이마신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향수는 고객님이 지금 쓰시는 향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향수를 뿌린 적이 없으니 직원이 말하는 향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만지작대던 시향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열장에 비스듬히 기대 코로 남자의 체취를 쫓느라 바쁜 직원을 향해 가볍게 웃었다.

“내가 지금 쓰는 향이 어떤데요?”

“네? 아, 그게…….”

직원은 내 말을 일종의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 아예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냄새 맡는 데에 열중했다. 작게 숨을 들이켜던 소리가 어쩐지 점점 게걸스러워진다. 순간 불쾌해 인상을 쓰다가 문득 남자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의도적으로, 그러나 티 나지 않게 유리 진열장에 팔을 기대고 몸을 내밀었다. 그에 더해 목덜미가 잘 드러나도록 턱을 모로 비틀어 주기까지 했다. 노골적으로 살결을 드러내자 직원은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도 더 거리를 좁힌다. 짙어진 냄새에 직원이 황홀한 탄식을 흘렸다. 밀쳐 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눈길만 돌려 남자를 보았다.

옅은 전율이 일었다. 먹잇감을 보는 번질거리는 눈동자. 남자는 진작부터 직원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남자가 당장이라도 머리를 뜯어 먹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만약 남자의 인내심이 바닥난다면 아주 쉽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오로지 순수한 기쁨에 취했다. 좀 더 남자가 발산하는 날 것의 감정들을 낱낱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남자의 코끝에서 긴 날숨이 샌다. 일전의 경험으로 그 행위가 인내하기 위함임을 바로 알아챘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안전장치도 없이 공중 곡예를 하는 나와 남자 사이에 ‘한 끼’에 불과한 직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목을 가다듬는 얼굴이 붉었다.

“코오롱 같은데…… 비슷한 제품으로 보여 드릴까요?”

숙인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미소도 잊지 않았다.

“아뇨. 매일 똑같으면 질릴 것 같아서요.”

그물에 걸리듯 내게로 끌려온 남자의 눈동자에 파삭 금이 갔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으나 나는 그치지 않고 직원이 처음에 추천한 시향지를 집어 남자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틀었다. 내 행동에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거부감에 가까워 보였다.

“이걸로 할까? 어떤 거 같아?”

“……마음대로 해요.”

이번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다. 나는 얇은 시향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난 네 의견이 듣고 싶은데.”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아요.”

사선으로 비켜 낸 얼굴이 퍽 울적해진다. 내 말과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남자가 너무도 사랑스러웠지만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울릴 수야 없었다.

“주세요. 이걸로.”

대충 아무거나 가리키고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등을 돌려 멀어지는 직원을 확인하고 상처받은 어린 짐승, 아니 괴물에게 작게 속삭였다.

“네 냄새가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말이 없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명백히 토라진 얼굴이 내 시선을 피한다. 검지로 남자의 턱을 당겨 눈을 맞추었다.

“나도 다른 사람이 네 냄새를 맡는 게 싫어.”

“그래도 향수는…….”

“차라리 향수가 낫지 않아? 나한테서 다른 사람 냄새가 나는 것보단.”

남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가 가슴께를 간지럽힌다. 근질거리는 심장 대신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세게 깨물었다. 안 그러면 당장 남자의 뒤통수를 붙잡고 입술을 비벼 댈 것만 같았다. 다행히 최근 들어 부쩍 얄팍해진 이성을 끊어 먹기 전에 직원이 돌아왔다. 카드와 영수증, 향수가 든 쇼핑백을 들고 온 직원은 지나치게 환히 웃고 있었다.

“잘 어울리실 거예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이 내미는 쇼핑백을 건네받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고객님. 실례지만 지금 뿌리신 향수…… 어떤 제품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약쟁이처럼 직원이 허공에 코를 킁킁거린다.

그래,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당장에 향수를 들이부을 이유가 생겼다. 이 이상 남자의 냄새를 한 톨도 넘겨주기 싫어서 나는 곁에 선 남자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고 쇼핑백과 카드를 낚아챘다.

“아뇨. 이건 제 맞춤이라.”

씨발. 속이 비틀렸다.

원래라면 8층의 가구 코너에 가서 소파를 살 계획이었다. 빌어먹을 남자의 냄새가 또 다른 사람을 홀리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다 제쳐 두고 남자를 화장실로 끌고 가 칸 안으로 밀어 넣고 무작정 입술을 부딪쳤다.

갑작스레 밀어붙였음에도 남자는 기다렸다는 양 입술을 열고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시도 때도 없이 꾸역꾸역 역류하는 불안감을 지우려 남자의 목에 팔을 둘러 몸을 바짝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고개를 비틀어 가며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닿으려고 안달했다. 목마른 갈증은 남자의 타액으로 해소했다. 남자의 질투와 순종이 분에 넘치게 달았다.

“음, 하아…….”

남자와 단둘이 되는 순간마다 현실은 멀어지고 나조차도 몰랐던 욕망이 껍데기를 벗고 나타났다. 서로를 집어삼킬 듯이 구는 입술에서는 젖은 소리가 끊임없이 질척였다. 목구멍까지 넘실거리는 희열을 참기 힘들어 거친 숨소리가 여과 없이 뿜어졌다. 아득해진 감각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마비된 이성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거 공공장소에서 뭐 하는 짓들입니까!”

사납게 문을 두드린 불청객이 발을 쿵쿵대며 사라졌다. 상대의 여린 살덩이를 경쟁적으로 뭉개던 입술이 떨어지고 헉헉거리며 나와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작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거리가 아쉬워서 애가 탔다.

저 예쁜 얼굴에 내 것이라는 낙인을 찍으면 이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나비야.”

너만 보면 불안한데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내보여 봤자 질 게 뻔한, 나약한 패일 뿐인 적나라한 진심을 입에 고인 침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내게 남은 먼지만큼의 의지를 쥐어짜 남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나가자.”

“하아… 잠깐만요.”

겨우 떨어졌건만 남자가 내 팔목을 붙들었다. 그리곤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따라 내려간 끝에는 터질 것처럼 부푼 남자의 중심이 있었다.

“섰어?”

“하고 싶어요.”

나는 경악했다. 지금 여기서?

“안 돼.”

단호한 말투에 남자가 파드득 내 손목을 놓았다. 개였다면 아마 깨갱 하는 소리를 냈을 듯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봐도 갯과인데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한숨에 흘려보내며 뜨끈한 입술을 쓸었다.

이대로 나가 돌아다녔다간 공연 음란죄로 백화점 보안 팀에 끌려 나간대도 할 말이 없었다. 고민하며 흐트러진 머리를 넘겼다. 버릇이 나빠질 것 같지만 별수 없다.

“이대로는 못 나가겠다. 바지 벗어.”

내 말이 떨어지자 남자는 곧장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일련의 동작에서 망설임이나 수치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가 제 성기를 꺼내는 동안 반대편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관망했다.

체모 한 올 나지 않은 깨끗한 성기는 언제 봐도 비현실적이었다. 내 몸에 들어갔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크기도 크기지만 곧게 뻗은 기둥과 핥고 싶어지게 볼록한 귀두 하며 흥분하면 약간 짙은 선홍색을 띠는 색깔까지 노골적으로 음란했다.

뚫어져라 남자의 성기를 보고 있다가 거친 숨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가쁘게 숨을 내쉬는 남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열렬한 시선에 나까지 숨이 찼다. 그러나 나를 잡아먹을 듯 보면서도 남자는 전처럼 나를 덮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불현듯 팽팽하게 당겨진 목줄이 느껴졌다.

……당겨 봐도 될까?

내가 채운 목줄이 얼마나 튼튼한지 확인할 기회였다.

손으로 해결해 주려던 계획을 접고 나는 느긋하게 화장실 칸막이에 등을 기댔다. 그러나 심장은 아까부터 줄곧 두근거리고 있었다.

“왜 날 봐? 혼자 못 해?”

이런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남자는 당혹스러운 듯 눈을 굴렸다. 종일 마주 보고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조금 도와주려 다가가자 남자가 곧장 손을 뻗어 왔다. 내게 닿기 전에 손날로 남자의 손목을 내리누르며 조곤조곤 지시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말고.”

“읏.”

티셔츠 밑단을 끌어 올려 안달 난 남자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옷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입에 물어.”

얇은 천이 남자의 이 사이에서 살짝 젖어 들었다.

“옳지.”

잠긴 내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어정쩡하게 놓인 남자의 손을 끌어 달아오른 성기에 가져다 대었다. 내 손을 겹쳐 기둥을 감싸 쥐자 내리뜬 남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자, 여기 이렇게 쥐고 흔들면 돼.”

“흐읏……!”

“봐, 기분 좋지? 어렵지 않아. 끝까지 해 볼래?”

한 발 뒤로 물러나 다시 문에 등을 기댔다. 혼자 남은 남자는 풀 수 없는 문제를 떠안은 아이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성욕이나 쾌감이 오직 번식이라는 목적으로만 직결되는 남자에게 자위라는 개념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듯했다.

“나비야.”

먼저 애가 타 결국 마지막 수를 꺼냈다. 두 손을 배꼽 아래에 대자 남자의 눈동자가 곧바로 따라붙는다. 나는 쓰게 웃었다.

사람이었다면 내 아버지와 달리 가정적인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쓸모없는 생각을 지우고 남자에게 가장 절대적인 단어를 골랐다.

“우리 아기가 아빠가 혼자서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데?”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으로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이윽고 젖은 마찰음이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에 부딪혀 내 고막에 닿았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공중화장실에서 남자에게 수음을 시키고 있다는 자각보다도 내 미친 소리가 남자에게 먹혔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어진 적나라한 광경을 좇느라 나는 사고를 놓쳤다.

하얗고 섬세한 손가락들이 제 좆을 감아쥐고 느릿하게 기둥을 훑기 시작했다. 선액에 젖은 표피를 문지를 때마다 츠륵츠륵, 젖은 마찰음이 얕게 퍼졌다. 뿌리에서부터 쓸어 올려 귀두 밑 부근, 가장 예민한 곳을 자극할 때면 불끈 힘이 들어간 손등에 퍼렇게 핏줄이 돋아났다. 체모가 없어 훤히 드러난 하복부 근육이 꿈틀거린다. 옷 아래 감춰진 탄탄한 육체가 움찔대는 모습이 선명히 그려질 정도로 남자의 흥분이 여실히 전해졌다.

“후으…… 가까이 와 줘요.”

입에서 떨어진 티셔츠 자락에 성난 복근이 가려졌다. 남자의 손장난에 온 정신을 사로잡혔던 나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나를 보고 있던 사나운 눈길과 맞닥뜨렸다. 시선만으로도 범해지는 것 같아 배 속이 뜨거워진다.

“……씨발.”

내 감정은 그걸로밖에 표현이 안 됐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목줄을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짐승처럼 붙어먹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 했다.

“밖에서 기다릴게.”

서둘러 몸을 돌리고 문을 당겼으나 야속하게도 문은 커다란 손아귀에 쿵 소리를 내며 도로 닫혀 버렸다. 문에 조악하게 연결된 사방의 벽이 덜컹거리며 진동했다. 등 뒤에 바짝 붙은 남자의 숨소리가 가지 말라는 듯 목덜미에 엉겨 붙는다.

“그냥, 하아…… 여기 있어만 줘요.”

쏟아지는 숨결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휩쓸리면 안 돼. 머리로 아무리 채찍질해 봐야 남자에게 익숙해진 몸은 쉽게 통제를 벗어났다. 문고리를 쥔 손은 다시 당기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내 목에 코를 박은 남자가 숨을 들이켠다. 또다. 내 냄새를 맡은 남자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에 흥분이 됐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고개가 꺾였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솜털이 곤두선 피부 위를 간질이며 귓불에 닿았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지.”

미지근하게 달아오른 숨결에 숨은 날카로운 말투가 풀어진 의식 중에 꽂혔다.

“다른 놈한테 꼬리치는 걸 봐준다곤 안 했어요.”

……뭐? 꼬리를 쳐?

휩쓸리던 정신이 바로 서기가 무섭게 여느 때보다 짙고 우월한 향기가 내 위로 쏟아졌다. 남자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냄새를 내게 퍼부었다. 잡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뿜어진 향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침범했다. 발밑이 푹 꺼지고 시야가 빙글 도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다가 겨우 버텼다.

“너……!”

남자가 나를 문 쪽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문을 당길 수가 없었다. 거기에 뭐 때문인지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의미 없는 저항을 그만두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내가 남자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니 그걸 빌미로 그만두라고만 하면 될 터였다. ……아마도.

내가 고민하는 틈에 남자가 내 셔츠 깃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추가 뜯기고 옷깃이 활짝 벌어졌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가 어제처럼 옷을 찢어발기지 못하도록 얼른 셔츠 앞자락을 움켜쥐었다.

“지금 뭐 하는, 악!”

살갗을 뚫는 묵직한 통증이 어깨에 번졌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더듬더듬 이어지던 생각이 끊어졌다.

“쯥.”

지금…… 지금 날 먹은 거야?

믿기지 않았으나 곧 남자는 피부가 땅기도록 내 피를 빨아 마시기 시작했다.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내 미미한 노력은 강풍 앞의 촛불처럼 나약해졌다.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 내 이성과 인내를 함부로 다루는 건 남자였다.

“하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숨소리를 듣자 손끝부터 다리까지 전신의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보잘것없이 떠는 몸을 달래듯 축축한 혀가 부드럽게 상처 위를 핥는다. 아니, 그저 다시 맛을 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완전히 정신 나가 중얼거렸다.

“너. 어, 어떻게.”

“쉬이… 겁내지 말아요.”

남자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린 것이 아니라 미칠 듯이 화가 난 상태였다.

네가 어떻게 날 물어……?

살면서 느껴 본 어떤 감정보다도 강렬한 배신감이 휘몰아쳤다.

나는 네가 먹어 치우는 고깃덩이랑 다른 존재 아니었어?

함부로 나를 범하던 날의 기억이 겹치며 남자의 행동에 치가 떨려 왔다.

“나한테서 당장 떨어, 우읍.”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넣진 않을게요. 당신이 안 된다고 했으니까요.”

방금 내 말을 뭉개 버린 주제에 말 잘 듣는 어린애라도 된 양 지껄인다.

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따르겠다는 건가?

어떻게든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분노를 넘어 망연해진 내 기분은 여전히 남자의 고려 대상이 아닌 듯 남자는 결박을 풀지 않았다. 남자는 더 몸을 붙여 왔다. 귓가에 남자의 입술이 닿는다. 귀까지 물어 뜯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거 알아요? 지금까지 뭘 먹어도 전부 똑같았어요. 비리고, 냄새나고.”

남자는 끝내지 못한 행위를 계속 이어 갔다. 거친 숨소리와 수음하는 소리가 난잡하게 엉켰다. 내가 시킨 일이었지만 주도권은 어느새 남자의 손아귀에 있었다.

“우, 으읍.”

“그런데 당신은, 하필 당신은…….”

바쁜 두 손을 대신하기로 했는지 남자는 입술로 내 목덜미와 귓가를 쓸어 대며 미지근한 숨을 마구 흩뿌렸다. 그 묘한 자극에 아래가 지끈지끈해져 왔다.

“모든 게 너무 맛있어요.”

맛있다고?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달아오르는 내 몸이 싫어 벌어져 있던 허벅지를 조이며 이를 악물었다.

탁탁탁.

빠르게 성기를 쳐 대는 손짓이 내 꼬리뼈 근처를 두드리더니 그걸로는 부족한지 아예 딱딱한 끄트머리로 엉덩이 사이를 찔러 댔다.

“읏.”

화가 나는데도 머리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몸을 이어 붙인 것처럼 다르게 반응했다. 짧은 숨소리가 “흣, 흣.” 하고 막힌 입으로 연신 튀어나왔다.

……이게 아닌데.

분에 겨워 헐떡이다가 틀어 막힌 입술을 억지로 비집어 벌렸다. 남자의 손가락 하나가 입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길쭉한 손가락을 씹어 먹을 생각으로 깨물었다.

“아…….”

우득, 소리가 날 정도로 손가락을 물어뜯기고도 남자의 신음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라곤 없었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손가락이 오히려 씹어 삼키라는 듯이 내 혀를 짓누르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젖은 살갗을 문지르던 소리가 멎고 내 등에 머리를 기댄 남자가 낮게 목을 울렸다. 놀랍게도 내게 손을 물리고 남자는 사정했다.

여운을 머금은 호흡을 길게 늘어뜨리며 남자는 내 입을 구속하고 있던 손을 거뒀다. 화를 내고 싶은데 말을 듣지 않는 몸이 흐느적거렸다. 온 신경이 말로 하기 힘든 느낌에 절여져 저릿저릿했다.

강제적으로 끌어올려진 흥분이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만진 적도 없는 다리 사이며 구멍까지도 움찔거렸다. 자꾸만 희미해지는 이성을 붙잡으며 겨우 돌아서 남자를 보았다.

“하아…… 정말 되네요.”

남자는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바닥과 손가락에 희게 엉긴 정액을 신기하게 보며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남자가 엉망이 된 손바닥을 내게 보여 주었다.

“나 잘했어요?”

순진하게 묻는 말이 이제 만족하냐는 비아냥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이상했다. 저릿하던 감각이 이젠 점점 예민해지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옷감이며 정체된 공기마저 자극으로 느껴졌다. 어떻게든 해 보려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짙게 퍼지는 묘한 감각을 떨치기엔 모자랐다. 남자의 손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나 좀 봐요.”

“흐읏…….”

그 작은 접촉이 소스라칠 정도로 크게 몸을 울렸다. 남자는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좀 조절이 되는 것 같아요.”

조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저 내 변화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꺼림칙했다. 그 와중에도 피부가 죄다 벗겨진 것 같은 몸 안에는 착실하게 열기가 쌓였다. 이대로 가다간 바닥으로 녹아내릴 것 같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원인은 남자였다. 나는 하릴없이 남자를 붙잡고 매달렸다.

“이게 대체, 하아… 뭐야? 나 지금 너무…… 어, 어떻게 좀 해 줘…!”

남자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허리를 숙이더니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내가 떨어뜨려 한쪽 모서리가 구겨진 쇼핑백을 뒤집어 향수 상자를 꺼낸다. 금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정액 범벅인 손바닥으로 감아쥐고 남자는 유리병을 찰랑찰랑 흔들며 말했다.

“아마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나 봐요.”

빠직, 빠지직.

갈라진 유리병 틈으로 짙고 독한 액체가 남자의 손바닥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무른 과일처럼 으깨진 유리 파편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부서져 내렸다. 삽시간에 독한 향수 냄새가 퍼지자 남자는 콧잔등을 짧게 찌푸렸다.

“나도 내 흔적 때문에 역효과가 날 줄은 몰랐어요. 그건 미안해요.”

“아… 알았으니까. 이제 이, 이것 좀…….”

조악한 향기가 서서히 남자의 냄새를 밀어낸다. 아니, 아니다. 남자의 냄새가 물러가고 향수 입자가 남자가 허락한 자리를 간신히 메우며 퍼져 나갔다. 동시에 내 몸을 잠식하던 정체 모를 감각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남자의 체취 때문이었던 건가. 남자가 체온이 낮은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감싸는 바람에 의문은 금세 희미하게 흩어졌다. 향수와 정액으로 범벅인 손바닥에 뺨을 대고 헐떡거렸다.

“나 대신이라고 하기는 좀 지독하지만.”

화하게 휘발돼 버리는 향수와 달리 질척한 정액은 남자의 손바닥을 따라 목덜미까지 발렸다.

“오늘만이니까 괜찮겠죠.”

상냥하지 못한 손길에 몸이 휘청거렸다. 내키는 대로 손안의 것을 마구잡이로 펴 바른 남자는 비로소 만족한 듯 손을 뗐다. 어느덧 남자의 냄새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내게 묻은 거라곤 독한 향수 냄새와 미미한 정액 냄새뿐이었다.

“됐죠, 이제.”

남자의 미소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나는 미간을 좁혀 시야를 맞추며 입가를 가볍게 핥았다. 불순물이 섞여서인지 남자가 묻혀 놓은 정액에서 유난히 씁쓸한 맛이 났다.

……그러니까.

내게 벌어진 사태를 파악하고자 녹진해진 머리로 애썼다.

이렇게 간단히 거둘 수 있었으면서 그 이상한 향기로 날 절여 놓고 맛까지 보셨다, 이거야?

나를 내려다보는 말간 얼굴이 아주…… 건방졌다.

이건 까불지 말란 경고라고 해석하면 되는 건가? 아무래도 내숭을 떨고 있는 게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이미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우친 후인 걸.

남자의 멱살을 잡아 확 끌어당겼다.

“그래…… 우리 나비.”

나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어?

절여진 뇌 어딘가가 고장이라도 난 듯 온 세상이 빙글거렸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날 이겨 먹었다고 기세등등할 남자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모르지만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잘했으니 상이라도 줘야겠네.”

나비야.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야.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에 홀로 떨어진 순진한 괴물이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른다. 게다가 나는…….

그냥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잖아. 안 그래?

어느덧 비웃음은 남자를 향한 연민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술을 겹치고 혀끝에 남은 비릿한 정액을 남자의 혀에 문질렀다. 이번에는 끔찍하게 달았다.

세면대 물을 틀어 더러워진 얼굴을 씻었다. 손끝이 여전히 저리긴 했지만 취한 것처럼 들뜨던 정신은 온전해졌다. 그제야 물린 어깨가 아팠다. 거울을 보자 어깨 쪽 셔츠가 배어 나온 피로 점점이 붉어져 있다. 단추가 뜯어진 옷깃을 살짝 젖혀 보니 잇자국 모양으로 찢긴 상처가 선명하다. 상처 난 피부를 손끝으로 더듬다가 따끔한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식사의 흔적이라기엔 로맨틱하고 키스 마크라기엔 지나치게 난폭하지 않나.

길게 이어진 직사각형의 거울 속에 한 칸 떨어져 손을 씻는 남자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 속 남자를 노려보았다. 누구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나와 달리 멀쩡한 상태로 손을 닦는 모습이 아주 고상하기까지 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화났어요?”

남자에게 어깨를 물렸을 때는 예쁜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한데 지금은 남자가 때리라고 얼굴을 내어 줘도 내키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까지 이를 드러내는 남자의 본능을 어떻게 해야 완전히 잘라 낼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이를 뽑아 버릴 수도 없고.

나는 천천히 남자와의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음…… 아무래도 우리 나비가.”

물에 젖은 손을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문질러 물기를 닦았다.

“먹어도 되는 거랑.”

욱신거리는 어깨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려 가리켰다.

“먹으면 안 되는 거랑 구분을 못 하는 것 같아.”

남자는 묵묵히 한쪽 손을 물줄기에 적시고는 수전을 잠갔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어디선가 나지막한 클래식이 들려왔다. 아마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흐르고 있었을 소리가 이제야 내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남자에게 미쳐 있는 걸까. 두개골을 갈라 열면 온통 끈적하게 녹아 버린 뇌가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남자는? 처음부터 듣고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져 올려다보자 내 속을 읽은 듯이 붉은 입술이 열린다.

“난 그냥.”

혼잣말처럼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작은 음성으로 기껏 운을 띄워 놓고 남자는 젖은 손으로 내 귀밑머리를 훑어 내렸다. 미처 닦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할 일을 마친 손을 내려놓고도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 남자는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대충 남자가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느니, 잘못했다느니, 하는 뻔한 소리. 그러나 나는 이미 심사가 단단히 꼬여 버려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남자가 어떤 얼굴로, 어떤 냄새로, 내 이성을 마비시키려고 해도 말이다. 이 관계에서 누가 주인인지를 이번만큼은 명확히 짚고 넘어갈 작정이었다.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고.

“당신을 알고 싶었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과도, 협박도 아닌 낯간지러운 바람이 내 다짐을 허물어뜨렸다.

날 먹어서라도 날 알고 싶었다……. 그 말인가, 지금?

왠지 간질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꿈지럭댔다. 식인을 하는 괴물에게서 이렇게나 다정한 말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지금, 이 타이밍에.

“아…….”

준비된 말로는 대답할 수가 없어서 빈 머릿속만 뒤적거렸다. 어쩔 줄 몰라 눈을 굴리며 목덜미를 쓸어내리다가 손에 잡히는 흔적에 돌연 뻣뻣이 굳었다. 나는 절벽 앞에서 계시를 받은 장님처럼 어깨 위의 상처를 꾹 쥐었다. 전혀 달콤하지 않은 통증이 의심에 불을 지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날 홀리려 드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유혹적인 붉은 입술과 모순되는 순수하게 빛나는 맑은 눈동자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날 알고 싶었다고?”

방금까지의 그 버릇없는 태도는 어디에 숨겼을까. 내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겠다더니 입을 아예 틀어막은 게 누구더라. 이해하고 싶단 어쭙잖은 핑계로 감히 날 물어? 이렇게 넘어가 주면 다음엔 또 무슨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씹어 댈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하마터면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나는 옷깃을 확 젖혀 피가 맺힌 잇자국을 드러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나비야.”

자기가 남긴 상처를 발견한 남자가 아랫입술을 잘게 씹었다. 얼핏 보면 잘못을 반성하는 것 같지만 또 물고 싶어 이가 근질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남자의 뺨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타일렀다.

“내 말 잘 듣겠다며. 네 입으로 말했잖아. 우리 서로 그렇게 약속했던 거, 맞지?”

‘약속’이란 단어에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선으로 힘없이 떨어진 눈동자와 꾹 다물린 입술을 보니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린다.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짓이겨 비릿한 통증으로 가슴의 통증을 밀어냈다.

하여간 저 얼굴이 문제다. 알고도 넘어갈 정도로 기가 막히는 남자의 수작에 손뼉을 쳐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잊지 말자. 내게 순종하는 척 굴지만 남자는 사람을 먹는 괴물이다.

∞ ∞ ∞

날이 흐렸다. 레스토랑의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그러나 창밖의 세상과 랜드마크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반비례했다. 발아래 깔린 세상이 우중충할수록 사치스럽게 꾸며진 공간은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내가 집을 살 때 꼭대기 층인 30층을 고집한 이유도 비슷했다. 바깥세상이 어떻든 언제나 아늑한 집을 바랐다. 죽은 애인은 꼴값이라고 못마땅해했는데 내 집을 망친 건 순전히 그 자식이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은은히 밝힌 실내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같은 색채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남자에게선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분위기가 흘렀다. 저 얼굴이 사람을 유혹해 잡아먹기 위한 수단이라면 남자는 다른 건 몰라도 인간의 본성만큼은 제대로 파악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면서부터 여기저기서 벌 떼처럼 꼬이는 시선들이 그 증거였다.

남자의 시선은 줄곧 나만 따라다녔다. 남자에게 그들은 천지에 널린 먹잇감에 불과했으니까. 홀 안쪽 창가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느긋하게 남자를 쳐다봐 주었다. 마주친 눈이 기쁜 듯 반짝였다.

“나오니까 좋아?”

“네. 좋아요.”

“여긴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들어요.”

내게 고정한 시선 그대로, 남자는 내가 말을 걸어 주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열렬하게 대꾸했다.

“좀 둘러보는 척이라도 해. 너한테 보여 주려고 일부러 예약한 자린데.”

“당신이랑 있으면 뭐든 좋아요.”

조금 더 혼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강아지같이 구는 남자의 태도에 어쩐지 김이 샜다. 턱을 괴고 나를 위해 준비된 남자를 마음껏 감상하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근데 아까 그건 어떻게 한 거야?”

“그거요?”

“그 이상한 냄새 같은 거.”

정체를 알아야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을 대비를 하지.

“아, 그거…….”

재촉하지 않고 답을 기다리는데 남자의 표정이 내 말에 실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라앉았다.

“이상했어요?”

“그걸 말이라고……. 다신 하지 마. 누구한테든. 알겠지?”

어떤 원리로 영향을 미치는지 몰라도 신경계를 자극하는 것 같은 남자의 체취는 단순히 좋은 냄새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래도 남자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다행이었다. 내게는 통제가 가능한 범위라는 뜻이었으니까.

웨이터가 주문한 와인을 가져오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와인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웨이터가 먼저 남자의 잔을 채웠다. 새삼 턱받이를 해 주려던 때에 비하면 남자가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남자가 나와 같은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음식만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남자의 앞에는 나와 똑같은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남자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겉보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전혀 손색없는 모습이었다.

“나비야.”

테이블 중앙에 손바닥을 펼쳐 올렸다. 그걸 본 남자가 곧바로 내 손바닥 위로 손을 겹친다. 그리고는 위아래를 뒤집어 제 손을 아래에 두었다. 부드러운 압력이 손을 감싼다. 방금 남자에게 목을 물리고도 여전히 이런 남자의 애교에 마음이 풀리는 걸 보면 나도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하다. 제법 깊어진 감정은 처음 같은 연애 감정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그것보단 내 손을 타서 나밖에 모르는 남자에 대한 애착에 가까웠다.

……그래. 뭔가를 키워 본 적이 없어 내성이 없을 뿐 이 정도 집착은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웨이터가 내 잔에 와인을 따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내 신경은 퍽 우울해진 남자의 표정에 쏠렸다. 좀 물렸다고 너무 몰아세웠나, 축 처진 모습을 보니 또 금세 마음이 약해진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나한테 혼날 일도 없어. 알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즐거운 시간 보내시라며 황급히 자리를 뜨던 웨이터가 손을 삐끗하면서 내 잔을 쓰러뜨렸다. 테이블 위로 콸콸 쏟아진 와인이 셔츠의 앞자락에 붉게 번져 갔고 당황한 웨이터는 허리를 굽혀 연신 사과하면서 냅킨을 건넸다. 받아 든 냅킨을 손안에서 구겼다. 왜인지 입안이 썼다. 그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잡고 있던 손을 당겼다.

“가요. 닦아야죠.”

“아니야.”

남자의 손을 놓고 냅킨으로 대충 물기를 털고서 일어났다.

“같이…….”

“됐어. 뭐 별일이라고. 여기서 기다려.”

남자의 말을 끊고 도와주겠다며 따라오려는 웨이터마저 거절했다. 화장실에 들어설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으나 끝내 뒤를 돌아봐 주진 않았다.

남자가 우악스럽게 벌린 탓에 떨어진 단추며, 어깨의 핏자국이며, 향수가 흐른 얼룩으로 지저분한 셔츠는 꼭 와인 때문이 아니더라도 엉망이었다. 비루한 사생활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보이는 것만큼은 되도록 철저히 신경 쓰곤 했다.

그랬는데 남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주위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머릿속에는 온통 남자뿐이다. 이 지경 되도록 모를 정도로…….

내 썩어 가는 속내나 다름없는 모습에 기가 찼다. 닦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왜 이러지. 오늘.”

찬물을 틀어 붉게 변한 셔츠 앞자락을 벅벅 문질렀다. 세면대에 붉은 물이 소용돌이쳤다.

그 웨이터 새끼, 남자와 있는 내가 눈에 거슬려서 일부러 그랬나? 향수 매장의 그놈도 그렇고……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맞아.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이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날 어떻게 취급했던가. 내가 만만하게 구니까 다들 남자를 노리는 거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순진한 남자를 추잡한 인간들이 득시글대는 곳에 혼자 남겨 두고 와 버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셔츠 그대로 화장실에서 뛰쳐나왔다. 밖에서 웨이터가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무시하고 남자가 있을 테이블부터 다급히 살폈다.

“저건 또 뭐야.”

아니나 다를까 내가 사라진 틈을 노리고 누군가 혼자 남은 남자 옆에 바짝 붙어 치근거리고 있었다. 슈트를 차려입은 놈은 은근한 미소로 남자에게 추파를 던졌다. 오도카니 앉은 남자가 반응이 없자 놈이 재킷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하얗고 네모난 종이를 남자에게 내밀더니 받지 않자 테이블 위에 올려 남자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관심 있으면 연락 줘요.”

개수작을 부리는 놈과 남자 사이에 끼어들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낚아챘다.

“왔어요?”

남자가 반색하며 나를 반겼다. 놈이 내민 것은 명함이었다.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사. 몇 가지 단어로 놈의 목적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다 하다 별것이 다 꼬이는구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명함을 도로 놈의 재킷 주머니에 넣어 주며 꼬리라도 흔들 기세로 날 올려다보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은 제안을 하려는 거니 들어 보시고…….”

놈이 입을 열어 헛소리를 나불댔다.

“미안하지만 얘는 유명해지면 곤란해서요.”

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 행색을 살핀 눈살이 점점 찌푸려진다.

그렇게 인상 안 써도 알아. 내 꼴이 거지 같은 거. 이 장소든 남자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사실 얘가 생긴 거랑 다르게…… 인육을 먹거든요.”

“뭐요?”

놈은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크게 비웃어 주고 싶은 걸 참고 말을 이었다.

“얘 얼굴 좀 팔아먹고 싶은가 본데. 그 전에 그쪽부터 썰어 먹힐지도 모른다고.”

“미친놈.” 하고 중얼거린 놈은 인상을 쓰며 홱 돌아섰다. 비록 내 말을 안 믿는 눈치였지만 바로 떨어져 나가는 꼴을 보니 통쾌했다.

진작 이렇게 할걸. 믿거나 말거나 돈만 있다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역시나 남자의 본성을 알고도 예뻐해 줄 사람은 나뿐이다.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남자가 내 손을 붙잡았다. 꼭 힘을 줘 잡는 손아귀에서 간절함이 전해졌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내가 미쳤어? 널 두고 가게.”

“나한테 화났잖아요.”

너 때문에 열 받아서 미칠지언정 딴 인간한테 뺏기는 건 죽어도 못 본다.

“아무리 화가 나도 너 두고 절대 안 가.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하면 얌전히 기다려. 다른 사람 쫓아가지 말고.”

“다른 사람 안 쫓아가요. ……고마워요.”

당연히 그래야지.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두 사람분의 스테이크가 남자와 내 앞에 각각 놓였다. 나는 스테이크를 잘라 육즙 가득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남자는 제 앞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고기를 씹으며 남자 앞에 놓인 스테이크와 포크, 나이프를 차례로 보다가 다시 남자를 보았다.

이만큼 변했으니 식성도 변한 건 아닐까.

“먹어 봐. 맛있어.”

“…….”

“썰어 줄까?”

“……괜찮아요.”

“그럼. 먹기 싫어?”

“……아니요.”

먹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해도 될 텐데. 아닌 척, 모른 척 잘만 하더니 이럴 때는 또 순진하게 굴었다. 어쩐지 괘씸하기도 하고 아까의 벌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는 고기는 무슨 맛인지 궁금하지 않아?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며.”

남자가 시선을 접시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두 손은 테이블 밑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일부러 설핏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빈말이었어? 뭐…, 억지로 안 먹어도 돼.”

내 말에 망설이던 남자가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고기를 뜯는 대신 스테이크를 썰었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한 덩어리를 잘라 낸 뒤, 익힌 고기를 포크로 찌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붉은 입술을 열어 고기를 밀어 넣었다.

포크를 쥔 남자의 긴 손가락이며 더럽히지 않고 고기를 씹는 입술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붉은 와인 잔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내게도 남자처럼 증명이 필요했나 보다. 인간처럼 변한 남자가 여전히 내가 보살펴야 할 괴물이라는 증거.

꿀꺽. 남자의 목울대가 돌을 삼키듯 크게 일렁였다. 나는 이상한 기대감에 차서 물었다.

“어때…?”

“……맛, 있어요.”

사색이 된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포크질만큼이나 서툰 거짓말이 가여우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정도의 반응으론 부족했다.

“잘됐네. 안 그래도 혼자 먹어서 미안했는데.”

“…….”

“많이 먹어. 나비야.”

고단한 저녁 식사는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흐린 하늘이 가시고 화려한 야경이 펼쳐지자 주변에 앉은 모두가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내 눈에는 남자의 고문 같은 식사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끝끝내 남자가 질린 얼굴로도 나처럼 접시를 깨끗이 비워 냈을 때, 나는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

레스토랑을 나와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남자가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갑자기 새하얗게 질리더니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차가 신호에 걸린 틈에 시트에 기댄 남자의 이마를 쓸어 보았다. 가뜩이나 체온이 낮은 피부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비야. 괜찮아?”

남자를 시험해 본 대가였다. 칼에 찔렸을 때도 멀쩡했던지라 설마하니 이 정도로 탈이 날 줄은 몰랐다.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이 불규칙했다.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갈 곳을 잃고 남자의 탓으로 돌아갔다.

“못 먹겠으면 그렇다고 말하지. 미련하게 그걸 다 먹었어.”

남자가 못 먹겠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억지로 먹이지 않았을 거다.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는데 시시각각 나빠지는 안색에 마음만 급해졌다. 사거리의 신호가 아슬아슬했다. 속도를 높여 무리하게 핸들을 꺾었더니 차체가 기울어지며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얼른 팔을 뻗어 축 늘어진 남자가 쓰러지지 않도록 가슴을 받쳤다.

“우윽.”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헛구역질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토할 것 같아?”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보다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받친 팔을 타고 남자의 가슴이 급격히 들썩거리는 진동이 전해졌다. 글러브박스를 열어 봉투 같은 걸 찾아 뒤적거렸으나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았다.

“……욱.”

그사이 남자는 다시 신음했다.

“토하고 싶으면 해. 해도 돼. 아니면 차 세울까?”

남자는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남자의 말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 무게에 모순되게도 드디어 바닥을 딛고 선 듯한 낯선 안정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 안정감이라니. 하지만 누군가가 놓아 버린 풍선처럼 정처 없이 떠돌던 내 가느다란 줄이 꽉 잡힌 느낌이었다.

“걱정하지 마. 금방 집에 데려가 줄게.”

남자를 책임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 욕심이 지나쳤다. 액셀을 콱 밟았다. 아슬아슬하게 차선을 오가며 경적을 울리는 차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마음 같아선 앞차들을 전부 들이박고 달리고 싶었다.

정신없이 아파트에 도착해 차를 대고 서둘러 남자의 안전벨트부터 풀어 주었다.

“나비야. 집에 다 왔어. 눈 좀 떠 봐. 응?”

뺨을 살살 두드리자 얇은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인다. 안 되겠다 싶어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밀어 넣었다. 무거운 줄도 모르고 부축해 걸었다.

“조금만 참아.”

습해진 밤공기가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전신은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내 행동에 대한 후회와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쭉날쭉 곤두선 신경을 들쑤셨다. 겨우 아파트 현관 근처에 다다랐을 때, 느릿하게나마 걷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췄다.

“하아…… 왜. 못 걷겠어?”

턱 밑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남자를 보았다. 상태가 나빠져 걸음을 멈춘 게 아닌 듯싶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남자는 정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남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돌연 남자의 어깨에 코를 박았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남자의 팔이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가요.”

내게 다른 사람 냄새가 난다며 화를 냈을 때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한테 화가 난 건가?

목을 안은 팔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나비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남자는 무반응이다. 가로등 불빛을 흡수하는 검은 동공이 평소보다 커서 이질적이었다.

“도와 드릴까요.”

뒤에서 들려온 미성이 누군가 말을 걸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내 주의를 단번에 끌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남자가 줄곧 바라보던 곳에 서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 웬 여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한 여자는 계절과 동떨어진 긴 소매에 긴 바지 차림이었다.

왜 저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 거지? 설마 먹고 싶은 걸까?

여자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한 걸음 다가왔다.

“오지 말아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이가 갈리는 소리에 쳐다보니 남자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먹고 싶은 게 아니라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몸이 약해진 탓에 경계심이 커지기라도 한 걸까. 이대로 남자가 이성을 잃기라도 한다면 그땐 되돌릴 수 없는 대형 사고였다. 서둘러 남자의 몸을 고쳐 잡고 여자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도와주지 않으셔도.”

여자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 서서 웃는 얼굴로 우리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기분 나쁜 시선은 여자를 지나치는 순간까지 따라붙었다.

“몸조심해요. 밖은 아직 위험하니까요.”

미친 여잔가.

의미 모를 소리를 하는 여자의 미성이 땀에 젖은 뒷덜미를 스산하게 식혔다.

꺼림칙함에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걸었다. 겨우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여자가 서 있던 곳을 확인했으나 환한 불빛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문이 닫힐 때까지 버튼을 눌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기어코 남자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왈칵 먹은 것을 토해 냈다. 소화되지 못한 고깃덩어리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 차라리 모두 토해 내라고 남자의 곁에 쪼그려 앉아 등을 두드렸다.

“숨을 못 쉬겠어요.”

삼키는 것에 익숙한 남자는 토사물이 식도를 역류하는 감각이 무서운지 울먹이며 내 팔에 매달렸다. 떨리는 손끝이 안쓰러워 들썩거리는 남자의 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달랬다.

“괜찮아. 원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다 토해 내.”

위장을 짜내느라 일그러진 눈가와 벌어져 침을 뚝뚝 흘리는 붉은 입술이 불쌍하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바라보자 남자는 고개를 비틀며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보지 말아요. 더러우니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더러워.”

남자의 말대로 모처럼 차려 입힌 비싼 옷에 누런 토사물이 아무렇게나 튀어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아랑곳하지 않고 헝클어진 남자의 머리를 한 가닥, 한 가닥 넘겨 주었다. 고작 익힌 고기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는, 이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걸 남자는 이해할 수 없을 터다.

“나비야. 봐, 나도 더러워.”

웃으며 다시 남자에게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눈물과 타액으로 지저분해진 남자가 잠자코 내 어깨에 기댔다. 속을 비워 내 한기가 드는지 품에 안은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말로 표현 못 할 만족감이 차올랐다.

“내 앞에서는 사람인 척할 필요 없어.”

부디 영원히 나만의 멍청한 괴물로 남아 주기를 바라며 남자에게 말했다.

“……거짓말.”

“뭐?”

남자가 내 허리를 깊이 끌어안더니 아예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까만 정수리를 황당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런 말, 해 주지 않아도 돼요. 그러지 않아도 나한테는 당신뿐이니까.”

저를 아프게 한 나를 원망할 줄도 모르는 남자를 꽉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더 말해 줘. 계속 듣고 싶어.”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뿐이에요.”

그렇게 되뇌는 목소리가 가는 빗줄기가 되어 오래된 갈증을 해소한다. 이걸로 충분했다. 다른 증명은 필요치 않았다.

∞ ∞ ∞

이불 아래에서 남자의 팔이 스르륵 허리를 감아 왔다. 기분 좋게 잠에서 깨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나 먼저 일어나 있었는지 두 눈이 또렷했다. 기다렸다가 출근 시간에 맞춰 나를 깨운 모양이다.

“몸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요.”

“그래도 좀 더 자. 매일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

일어나려고 했으나 허리를 감은 팔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지 말아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럼 5분만 더…….”

“아니요. 나랑 계속 이러고 있어요.”

자장가 같은 낮은 속삭임에 잠이 몰려왔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지만 계속 꿈을 꾸려면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나비야. 이제 놔줘.”

그러나 달라붙은 팔은 떨어질 줄 몰랐다.

“싫어요. 가지 말아요.”

어제 아팠던 일로 어리광이 늘어 버렸는지 남자는 전에 없던 고집을 부렸다.

“하아…… 나비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얼른 놔.”

단호하게 말하자 마지못해 허리를 놔주는가 싶더니 출근 준비를 마친 내 앞을 기어코 막아섰다.

“나랑 같이 집에 있으면 안 돼요?”

현관문 앞에서 벌어진 대치 상황에 미미하게 짜증이 났다. 남자의 존재가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내 현실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남자를 보호하려면 의심받지 않을 만한 신분과 돈이 필요했다.

이렇게 설명해 봤자 현실 감각이라곤 쥐뿔도 없는 남자 앞에서 내 입만 아플 게 뻔했다. 내가 좋아서 이런다는 건 알지만 낑낑거리는 강아지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주인은 없다.

“금방 올게. 그동안 잘 기다렸잖아.”

짧은 입맞춤으로 남자를 달랬다. 맞붙었던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아쉽게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을 보니 작게 한숨이 나왔다.

“그럼 나도 데려가요.”

“…….”

데려가? 어디를? 밖에? 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좋게 달래려던 마음이 뚝 부러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울상을 짓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나가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예쁜 짓을 하나 했더니 또 수작질이었다.

“난 당신이 걱정돼서…….”

“또 내 핑계지.”

손을 휘저어 남자의 말을 끊었다. 더 들었다간 참지 못하고 화를 낼 것 같았다.

“나비야. 나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

진심이었다. 화를 눌러 참느라 입가가 잘게 떨렸다. 다행히도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딴생각 말고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그대로 남자를 지나쳤다. 화가 나서 쌩하니 나왔지만 홀로 남겨진 남자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 너머는 고요할 뿐이다. 도무지 방심할 틈을 안 준다.

갑자기 왜 나가겠다는 거지? 나가서 뭘 하려고?

문득 어젯밤에 만난 여자가 생각났다. 설마 그 여자 때문인가.

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무래도 남자와의 외출은 그만둬야 할 것 같다.

“대리님. 휴가 때 뭐 하실 거예요?”

예 주임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침에 겪은 남자와의 작은 신경전에 온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미안해요. 다시 한번 말해 줄래요?”

10분 남짓 남은 점심시간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는지 예 주임을 비롯한 몇몇 사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필이면 옆자리인지라 이야기는 자연스레 전혀 관심이 없던 나에게까지 흘러왔다. 파티션에 팔을 기댄 남자 사원이 “풋.” 하고 작게 웃었다.

“요즘 대리님 좀 이상해. 복권이라도 당첨됐어요?”

“그러니까. 며칠 앓는 것 같더니 갑자기 얼굴이 확 피질 않나, 이젠 정신이 딴 데 가 있고.”

복권이란 표현이 썩 틀린 말도 아닌 듯싶어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비슷해요.”

“진짜? 얼만데요? 그런 돈은 한턱내야 부정 안 타는 거 알죠?”

“돈은 아니라서요.”

“그럼 경품? 뭐, 차라도 받았어요?”

그런 종류의 부정이라면 이미 탈 만큼 탄 것 같기도 하고 더는 이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아 나를 끌어들인 예 주임에게 시선을 주었다. 예 주임도 내가 당첨된 것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모른 척하며 화제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것보다 아까 뭐라고 했어요?”

“아, 그…… 여름휴가 때 뭐 하실 건지 궁금해서요.”

“……휴가요.”

최근 남자와의 생활이 일상적이지 못한 탓에 휴가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달력을 보니 날짜는 벌써 여름의 3분의 1 즈음에 걸쳐 있다.

“계획 없으세요?”

“고민 중입니다.”

남자와 바닷가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다. 선뜻 떠올리기가 힘들다. 당장 집 앞에만 나가도 온갖 파리 떼가 꼬이는데 그런 곳에 데려갔다간 남자가 아니라 내 손에 피를 묻힐지도 모를 일이 벌어지고도 남았다.

게다가 잦은 외출은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오늘 아침에 집 밖을 나가려고 수작을 부리는 남자만 해도 그랬다. 갑자기 날 따라 나오겠다는 이유를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다.

분리 불안, 뭐 그런 건가?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예 주임은 해외로 간대요. 남들 다 가는 휴가철에 집 나가 봐야 고생이죠. 이 더위에는 그냥 집콕이 최고지. 안 그래요?”

누군가 투덜거렸다. 그 말대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몇 날 며칠 남자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단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돌아가서 시무룩해져 있을 남자에게 휴가 동안은 반드시 곁에 있겠다고 달래 주자 마음먹으며 맞장구쳤다.

“최고네요.”

“역시 뭘 좀 아시네.”

점심시간이 끝나 가자 다들 자리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내 의식은 다시 아까의 고민으로 돌아갔다. 밖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남자의 관심을 돌릴 만한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했다. 임신 얘기를 꺼내면 내게 집중할 터였다. 하지만 마지막 관계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생각해 보면 먼저 남자의 난폭한 침대 매너를 뜯어고쳐야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럼 휴가까지 좀만 더 힘내세요.”

내 뒤를 지나치던 사원 한 명이 방심하고 있던 내 어깨를 두드렸다. 닿은 곳이 뜨끔했다. 하필이면 남자에게 물린 곳이었다. 튀어나올 뻔한 신음을 가까스로 참는데 그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어? 이제 그 향수 안 뿌리시나 보네?”

“향수 아니라고 하셨어요.”

나 대신 예 주임이 허둥거리며 나섰다. 여사원들끼리 나눈 이야기가 그새 더 퍼진 모양이었다.

“에이. 그렇게 냄새가 진한데. 알려 주기 싫어서 그랬죠? 뭐 페로몬 향수 그런 것 같다고 했었지 않나?”

“……페로몬이요?”

낯선 단어가 화살처럼 날아와 귀에 박혔다.

“왜, 이성을 유혹하는 향기라면서 인터넷에 광고 많이 하는 거. 다 상술은 아닌가 봐. 냄새 진짜 좋던데요?”

예 주임이 어쩔 줄 모르며 내 눈치를 봤다.

“향수 아니라고 하셨는데 마음대로 얘기하고 다녀서 죄송해요.”

지금 예 주임의 사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영양가 없는 대화에서 뜻밖에도 의문점 하나가 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페로몬은 이성을 유혹하는 향수 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잠시 들뜨던 기분이 점차 불길하게 바뀌는 바람에 몸까지 돌려 예 주임을 보았다.

“예 주임. 페로몬이 정확히 뭐였죠?”

∞ ∞ ∞

온종일 남자가 풍기는 냄새의 정체가 정말 페로몬인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내가 페로몬에 대해 아는 거라곤 곤충들이 주로 뿌리는 어떤 흔적이라는 정도의 얄팍한 상식뿐이었다.

“곤충이라…….”

집 앞에 도착해 시동을 끈 차 안에서 핸들을 두드리며 찝찝한 기분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전에 남자에게서 본 더듬이 같은 촉수가 흐릿하게 떠올랐지만, 그날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이제 와 헷갈렸다. 그때는 나도 너무 정신이 없었으니 또 환영을 본 걸지도 모른다.

“하아.”

손에 잡히지 않는 불안이 연기처럼 퍼져 남자를 가리고 있는 것만 같다. 눈을 감고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남자가 숨기고 있는 본모습이 무엇이든 들춰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건만 자꾸만 하나둘 벗겨지는 껍데기에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떤 모습이라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자가 지금의 젊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의문 끝에 불현듯이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거짓말.」

사람인 척할 필요 없다는 내 말에 남자가 했던 투정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더듬이를 처음 본 날엔 죽을 때까지 사람으로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상처받은 걸까. 그때.”

가슴으로 파고들던 까만 머리통이 생각나 기분이 한껏 착잡해졌다.

멍하니 앞 유리창 너머로 보내던 빈 시선에 익숙한 사람이 지나갔다. 헐렁한 민소매 티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울퉁불퉁했다. 팔뚝 위를 휘감은 뱀을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츠려 몸을 숨겼다. 아래층 남자였다.

아래층 남자가 건들거리며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목에 편의점 봉투가 덜렁거렸다.

맞아. 저 새끼가 있었지.

먼저 접근해 오면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잠잠해 어째 더 불안했다. 하긴 저도 가진 건 심증뿐이니 나를 협박할 만한 건수가 없어 포기한 걸지도. 지금으로선 저 새끼가 남자에게 먹일 1순위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먼저 마주쳐서 좋을 건 없었다.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놈이 사라진 뒤에서야 차에서 내렸다.

저녁 식사 후, 남자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침대 헤드에 기대 누워 있던 나는 충동적으로 태블릿을 들어 신경 쓰이던 단어를 검색했다. 포털 사이트가 보여 준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요컨대, 성적 유인과 교미를 유도하는 성적 페로몬이라는 게 곤충뿐 아니라 꽤 많은 포유동물에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는 같은 종끼리만 통한다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남자는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앞뒤가 안 맞는 가정임에도 실낱같은 기대감이 피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긴 본문 중간에 여러 종류의 곤충 사진이 가득 나열됐다. 적나라하게 클로즈업된 혐오스러운 형태에 눈살을 찌푸리며 스크롤을 빠르게 넘겨 버렸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을 띄엄띄엄 읽어 내려가던 중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 눈에 띄었다.

[성적 페로몬은 다른 페로몬보다 오래 지속되고 더 멀리 확산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성적 발달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다시 읽었다.

“성적 발달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적 발달이란 게 뭐지…?

눈이 바쁘게 다음 문단을 찾아 내려갔다.

“뭐 보고 있어요?”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남자가 소리도 없이 내 옆에 섰다. 바지만 입은 허술한 차림이었다.

“그냥, 일.”

왜인지 하면 안 될 짓을 하다 걸린 기분에 화면을 끈 태블릿을 협탁에 올려 두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남자는 힐끔 태블릿을 보는 듯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아침에 내 기분을 거스른 일이 신경 쓰이는지 남자는 저녁을 먹는 내내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도 내 눈치를 보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남자와 나 사이에 처음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남자는 내가 화가 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느끼는 긴장감은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던 물기가 남자의 벗은 상반신 위에 똑똑 떨어졌다. 하얀 피부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이 선명한 근육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린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물방울이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핥아 마시고 싶은 욕구에 목이 탔다. 더 이상 가만히 있기가 힘들어져 몸을 세워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아침에 화내서 미안해. 혼자 있는 거 지루했을 텐데…….”

“지루한 적 없어요. 사과하지 말아요.”

남자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 준 게 고마운 듯했다. 그러나 남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그랬구나.”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며 남자의 벗은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성이 생기고부터 남자는 몸가짐에 유독 공을 들였다.

백치일 적이 아쉬울 정도로 잘 챙겨 입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들이대지? 혹시 몸으로 내 기분을 풀어 보겠다는 수작인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흑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풀이 죽은 표정에 안도감이 옅게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옷, 안 입어?”

“아…… 깜박했어요.”

방심하지 말자. 다시금 되새기던 그때, 봉긋하게 솟은 가슴 근육 위를 천천히 구르던 물방울이 급격한 경사에 톡 남자의 배로 미끄러졌다. 남자의 속내고 뭐고 티셔츠를 찾으러 가는 남자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남자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화해하는 의미로 우리 좋은 거 할까?”

허리를 살짝 당겨 갈비뼈 부근에 맺힌 조그만 물방울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혀를 가져다 댔다. 금세 스며든 물방울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혀끝에 닿은 피부는 부드러웠다. 미미한 자극일 텐데 남자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진다.

“……좋은 거요?”

“전에 나한테 먹혀도 좋다고 했던 말…… 기억나?”

바로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남자가 천천히 내 위로 몸을 기울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좋아요.”

남자에게 밀려 침대에 누웠다. 내 위에 엎드린 남자는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얌전히 허락을 기다렸다. 조심히 남자의 가슴을 쥐었다. 탄력 있는 살결이 손안에 뿌듯하게 찬다.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이제 보니 남자야말로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식욕과 닮은 남자의 성욕을 이해할 것도 같다.

“근데 있잖아. 나는 네 머리 말고 다른 게 먹고 싶은데.”

부드러운 가슴 근육을 주무르며 무릎을 세워 남자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부풀어 오르는 성기가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 거긴…….”

“안 돼?”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듯 난처한 얼굴을 한 남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그 순진한 반응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이 완벽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괴물의 본모습이 어떻든 남자는 나비였다. 내 말은 전부 진짜라고 믿는 멍청한 나비……!

남자를 향한 애정이 벅차도록 샘솟았다. 흥분한 나는 남자의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굵은 성기를 쥐었다. 몇 번 쓸어 주지도 않았는데 금세 선액으로 젖어 미끌미끌해졌다. 즉각적인 반응이 만족스러워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당기고 동그란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었다.

“왜 벌써 이렇게 됐어? 나랑 하고 싶어서?”

“읏… 네.”

“하… 진짜…….”

손안에서 남자의 기둥이 불끈거리며 크기를 더 키웠다. 빨리 내 안에 넣고 휘저어 줬으면 했다. 흥분으로 머리가 팽글팽글 도는 와중에도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남자가 내 몸을 뒤집지 못하게 하반신을 맞붙였다.

“나비야. 오늘은 얼굴 보고 하는 거야.”

남자가 줄 쾌감을 기대하는 몸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내 마음도 모르고 남자는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뜨거운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기만 했다.

“하…… 얼른. 나 임신시켜 준다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줘요.”

“……뭐를?”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고…… 기분 좋게 해 줄 방법이요.”

잠시 넋이 나갔다. 스스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특하게도 남자는 지금 나와 교미가 아니라 섹스를 하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

“그럼…… 먼저 입으로 해 볼래?”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있는 남자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내 손길을 따라서 순순히 몸을 내린 남자의 머리가 무릎을 세운 내 허벅지 사이에서 멈췄다.

“전에 내가 해 준 거 기억나지. 그대로 하면 돼.”

머리를 쓰다듬어 응원해 주자 남자가 내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반쯤 선 기둥을 쥐고 입을 벌린다. 붉은 입술 사이로 사라지는 좆을 바라보다가 아찔한 쾌감을 버티지 못하고 베개에 머리를 떨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예민한 살갗을 간지럽게 스칠 때마다 허벅지 안쪽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려 주자 눈치 빠른 남자가 고개를 깊이 묻으며 뿌리 끝까지 전부 입 안에 머금었다. 예민해진 기둥을 감싸는 축축한 감촉에 턱을 치켜들고 신음했다.

“흐, 읏!”

별다른 기술 없이 물고 위아래로 움직일 뿐인 서툰 혀 놀림에도 하반신이 주르륵 녹는 기분이었다. 서툴러서 더 좋다는 패배자다운 만족감이 하릴없이 차올랐다. 의식은 금방 흐트러졌다. 달아오른 기둥 표면을 긁어 올리는 날카로운 감각이 하반신을 후려쳤다. 눈물이 찔끔 나는 뾰족한 자극에 남자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 경고했다.

“이 세우지 마…….”

실수를 사과하듯 남자가 넓게 편 혓바닥으로 귀두를 살살 핥다가 입술을 모아 쪽 빨아 당겼다. 가장 예민한 끝부분을 조이며 얕게 빠는 자극에 사정 욕구가 급격히 치밀었다. 알려 달라더니 남자는 어디가 기분 좋은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 그거 좋아…… 하으.”

허리가 뜨고 발가락이 안쪽으로 굽어든다. 남자는 젖은 기둥을 끝까지 삼켰다가 뱉는 움직임에 금방 익숙해졌다. “츄읍.” 소리를 내며 남자가 미끈한 입천장에 귀두를 미끄러뜨리더니 목구멍 바로 앞까지 깊이 삼켰다.

“흐아……!”

멋대로 오므라드는 허벅지가 남자의 손에 단단히 부여잡혔다. 하반신의 자유를 빼앗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쾌감이 점점 가파르게 치솟았다.

“하아…… 하, 나, 나비야. 아, 아…!”

질척이는 소리가 빨라질수록 내 호흡도 가빠졌다. 찌르르 퍼지는 쾌감을 버티려 전신의 근육이 발씬거렸다. 곧 한계였다. 몸이 쑥 꺼지는 듯한 착각과 동시에 기둥 끝에서 정액이 울컥 터졌다.

“흐아윽…!”

뿜어진 정액이 남자의 촉촉한 입속에 쏟아졌다. 여전히 내 성기를 물고 있는 탓에 꿀꺽, 꿀꺽, 정액을 마시는 목구멍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러고도 남자는 정액을 짜내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성기를 빨아 댔다. 사정 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표피에 지나친 자극은 고통이었다.

“아, 흐… 그, 그만!”

성기를 집어삼킬 듯 구는 남자의 입에서 벗어나려 덜덜 떨리는 허리를 뒤챘다. “쭙.” 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먹어 치운 남자의 입에서 빠져나온 성기는 새빨갛게 익어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고 있던 손이 사라지자 힘이 풀린 다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겨우 오럴섹스를 했을 뿐인데 끈적한 여운에 몸 둘 바를 모르며 바르작거렸다.

“기분 좋았어요?”

내 위로 몸을 겹쳐 오며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입술이 살짝 부어 있다.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쓸어 주며 말했다.

“하아…… 어때 보이는데?”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해 줘요.”

남자가 내 손바닥에 뺨을 대고 입술을 부볐다. 이전의 관계와 달리 지극히 평범하고 완벽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기분 좋았어……. 더 기분 좋게 해 줘.”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남자의 목을 끌어안으려 팔을 뻗었다. 그런데 남자가 내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잠깐.”

열이 식은 건조한 목소리. 방에 고인 열기가 어색하게 식어 갔다. 허리를 세운 남자가 기민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뒤로 반쯤 열려 있는 방문이 보였다. 어두컴컴한 거실은 고요했다. 남자의 기이한 행동에 나는 덩달아 어정쩡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러는데……?”

남자는 대답 없이 조용한 문밖을 응시했다. 나로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뭔가를 감지한 짐승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고 다음 순간, 무언가가 와장창 깨지는 굉음이 이어졌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소리는 집 안에서 들려온 게 분명했다.

도둑이라도 든 건가? 여긴 30층인데?

몸집을 불리는 불안감에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방금?”

“나오지 말아요.”

남자는 이불을 끌어와 내 몸 위에 덮어 주고는 말릴 새도 없이 거실로 나가 방문을 닫아 버렸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도둑이라면 먼저 걱정해야 할 건 남자와 마주칠 도둑의 신변이겠지만 내겐 오직 남자 걱정뿐이었다.

급히 거실로 나오니 어둠과 적막이 더운 공기에 눅눅하게 녹아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어 보였다.

“나비야…?”

남자가 보이질 않았다. 휑한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미지근한 바람이 느껴졌다. 습한 공기가 베란다 쪽에서 흘러들어 왔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베란다 문이 열려 있는 탓이었다. 그 위로 엷은 커튼이 소리 없이 펄럭거렸다.

베란다로 나간 건가?

희끄무레한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다가 이상한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바작, 바자작.

무언가 잘게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나비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유령처럼 펄럭거리는 흰 커튼을 걷었다. 다행히 남자는 그곳에 있었다. 베란다 창가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을 보고 안심하려는 찰나, 내 쪽으로 다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불안정하게 남자의 몸을 지탱하는 난간 너머의 밤공기가 거리낌 없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랬다. 창이 모두 열려 있었다.

활짝 열린 창밖의 광활한 밤하늘로 몸을 내던질 것처럼 남자는 위태롭게 서 있었다.

“……!”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남자에게 달려들어 거실 안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거실 바닥에 남자와 함께 나동그라져 남자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버럭 소리쳤다.

“미쳤어?! 떨어지면 어쩌려고!”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높이였다. 만약 남자가 눈앞에서 그대로 추락했다면…….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멎는 것 같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심장이 뛰는 나와 달리 품에 안긴 남자는 조용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검은 눈동자가 초점 없이 비어 있다.

“나비야, 나비야!”

어깨를 흔들어 봐도 반응이 없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뺨을 두드리자 비로소 남자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잘 있다가 갑자기 왜 또 이 사달을 낸 건지 답답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거긴 왜 나갔어! 죽으려고 환장했어?!”

“그냥…… 확인하려고 한 거예요.”

“뭘 확인해?”

“창밖에 그게 와 있어서…….”

“그거? 그게 뭔데…?”

“아. 당신 발이…….”

다시 보니 활짝 열려 있다고 생각한 베란다 창문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타일 바닥에 온통 유리 조각이 널렸다. 그것도 모르고 맨발로 바닥을 디딘 바람에 상처가 났는지 발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다친 줄도 몰랐는데 피를 보니 베인 곳이 시큰했다. 상처가 꽤 길긴 했으나 깊진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기력이 달렸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다신 베란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

“대답.”

“……그럴게요.”

절뚝이며 일어나 난장판이 된 베란다를 확인했다. 슬리퍼를 신고 남자가 기대 있던 창틀 앞에 섰다. 고층이라 여름에도 꽤 거세게 바람이 불어닥쳤다. 방충망까지 떨어져 뻥 뚫린 창틀 밖을 조심히 내려다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단지는 어두웠고 여기서는 모든 게 개미처럼 보여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식별이 불가능했다. 갑자기 멀쩡하던 유리창이 깨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남자가 말한 ‘그게’ 뭔지 찾아보려고 조심스레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살펴봤다. 새가 와서 부딪히기라도 했다면 핏자국이나 깃털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내가 흘린 핏방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베란다 한구석에 떨어진 길쭉한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유리 파편 속에서 손바닥만 한 그 덩어리를 집어 올렸다.

“뭐야…… 이게?”

타원형 모양의 노르스름한 덩어리는 묘하게 미끈거렸고 표면에 묻은 점액질이 손가락에 쩍쩍 달라붙었다. 힘주어 누르면 으깨질 듯 무른 게 비곗덩어리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역겨웠다.

이게 날아와 창문이 깨진 건가?

정체불명의 괴물체가 어디서 날아온 건지 창밖으로 다시금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자 아파트 외벽에 움푹 파인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톱 자국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무언가에 찍힌 자국이 듬성듬성 아래층까지 이어져 있다.

설마 아래층 남자 짓인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미친 새끼라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목적도 확실했다. 나를 자극해서 내가 먼저 접근하길 바라거나 홧김에 경찰에 신고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날벼락을 맞고도 참아야 하는 상황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음 같아선 쳐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뒤탈을 만들지 않으려면 적당한 때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기분 나쁜 덩어리를 베란다 구석에 던져두었다. 난장판은 일단 제쳐 두고 거실로 돌아왔다. 남자는 아까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딘가 넋이 빠진 표정이 그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화를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한 뒤 남자의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 눈을 맞췄다. 날 심장마비로 죽일 뻔했지만 따져 보면 남자가 잘못한 건 없었다.

“나비야. 내가 소리 질러서 많이 놀랐어? 네가 떨어지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내 발목을 감싸 쥐었다. 남자의 손이 닿은 곳은 상처 난 발이었다. 내가 디딘 거실 바닥에 붉은 발자국이 연달아 찍혀 있다.

“다친 데 보여 줘요.”

“괜찮아. 별로 깊지도 않고, 어어.”

불쑥 나를 안아 드는 남자 때문에 허둥지둥하며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남자만큼은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의 체격이라 누군가에게 이런 자세로 안겨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색해하는 나를 가뿐히 들고 남자는 방으로 가 조심스레 침대에 앉혔다. 가늘다고 하기는 어려운 발목을 남자는 한 손으로 완전히 감아쥐었다. 내 발을 들어 올린 남자가 발바닥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 부위가 부위인지라 어쩐지 민망함이 몰려왔다.

“괜찮다니까, 읏…….”

남자의 엄지가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을 스치며 길게 베인 상처를 눌렀다. 날 선 통증 탓에 잡힌 발목이 움찔했다.

꿀꺽.

조용한 방 안을 울리는 소리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는 그 소리의 근원이 내 예상과 다르기를, 붙잡힌 발목이 뻥 뚫린 난간 앞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이유는 다 내 기분 탓이길 바랐다.

“나비야……?”

미지근한 숨이 발바닥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남자가 혀를 내어 상처를 길게 핥았다.

“너 지금, 아읏…!”

발바닥의 피부는 생각보다 예민했다. 남자는 혀로 얕게 베인 틈을 벌리고 흘러나온 피로 제 입술을 적셨다. 아릿한 통증과 간지러움이 섞여 뭐라 말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허리에 힘이 빠졌다.

“그만해. 나비야, 그만…….”

다리를 비틀어 남자의 손에서 발목을 빼내려고 했으나 바위틈에 끼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목을 쥔 남자의 손은 내 발목을 꺾어 버릴 기세였다. 고통에 찬 신음이 들리지 않는지 남자는 아예 입술을 붙이고 단단한 이로 상처를 눌러 대며 피가 뿜어지게 하고는 볼이 움푹 파이도록 내 상처를 헤집는 데 열중했다.

이게 또……!

아픔은 뒷전이었다. 두려움에는 면역이 됐다. 단지 말 안 듣는 개에게 화가 날 뿐이었다.

“윽! 그만… 하라고!”

멀쩡한 다리로 온 힘을 다해 남자의 상반신을 걷어찼다. 그것만으론 풀리지 못한 분노가 거친 숨에 뒤엉켜 나왔다. 발길질에 쓰러진 남자의 입술에 내 피가 번졌다.

“나비야.”

튀어나오려는 욕을 삼켰다.

이럴 줄 알았지. 뭐? 날 알고 싶어?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너 진짜 이럴 거야?”

대답은커녕 미동도 없다.

그래.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어디 맘껏 해 봐.

남자의 배를 깔고 앉았다.

“네가 내 생각보다 더 멍청한 건가? 아니면 날 바보로 아는 거야?”

이를 악물고 멍하니 날 올려다보는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전처럼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남자에게 먹혀 죽든 아니면 남자가 나를 똑바로 인정하든 둘 중 하나였다.

“나 없으면 어떻게 살 건데. 너.”

돌아간 고개를 반대로 밀어 다시 나를 보게 했다. 아직도 얼이 빠진 멍청한 얼굴이다. 빨갛게 터진 살갗 위를 한 번 더 세게 내리쳤다.

“나까지 먹어 버리고 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할 건데. 응?”

“…….”

“말해 봐, 나비야. 말해 보라고!”

“……잘못했어요.”

드디어 남자가 작게 빌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남자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남자의 두 눈이 흠뻑 젖어 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나 배고파요.”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남자의 얼굴이 겁에 질린다.

“왜 말 안 했어?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먹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먹으면 당신이 슬퍼지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남자는 자신의 식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피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허기졌으면서 지금껏 참고 있었던 거다. 나 때문에. 나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어떡해요?”

난 남자의 머리카락을 놔주고 일어났다.

“……뭘 어떡해.”

먹어야지.

절뚝거리며 다용도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공구함을 찾았다. 그리고 망치를 꺼냈다. 묵직한 그립감이 낯설어 몇 번 고쳐 쥐자 이내 손안에 착 감긴다. 방에서는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참지 말고 진작 말을 하지. 바보 같긴.

남자를 남겨 두고 아파트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터덜터덜 맞은편 문 앞에 섰다. 망할 도어록을 뜯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지금 당장 뒤탈 없이 남자에게 먹일 만한 건 노인뿐이었다. 반송장이던 노인이었으니 이미 죽었을 확률이 더 높았지만, 시체라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망치의 노루발 부분을 도어록 모서리에 가져다 대는 순간까지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아당기기 전에 잠깐 고민이 들긴 했으나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이걸 뜯으면 흔적이 남는다. 아직까지는 운 좋게 아무도 죽은 노인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노부부를 찾을 것이 당연했다. 지금의 선택으로 인생이 전부 끝날 수도 있다.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는지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손잡이를 쥔 손에 땀이 고였다. 눈을 꽉 감았다. 실은 다 알면서 여기 서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앓다가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 것이다.

일단은, 남자를 먹이고 방법을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떴다. 때마침 센서 등이 꺼지고 어둠이 망치를 쥔 내 손에 힘을 실어 준다.

끼긱.

쇠가 어긋나는 소리에,

띠릭-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겹쳐졌다.

황급히 현관문에서 멀어지려다가 놓친 망치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헛숨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막고 온 신경을 아래층에 집중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진짜 멈추길 바랐다.

아래층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아래층에 사는 누군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나왔을 거다. 눈을 들어 엘리베이터를 주시했다. 곧 아래층에서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테고 그러면 조용히 망치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더 늦은 새벽에 나와 하던 일을 끝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혹시라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아래에 들릴까 봐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러나 내 기대를 부수고 저벅저벅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계단 쪽 센서 등이 켜졌다. 겨우 한 층,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였다. 누구에게든 망치를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급하게 바닥에 떨어진 망치부터 주워 들었다. 하지만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씨발! 집으로 돌아가기도 이미 늦었다.

“뭐 해요? 오밤중에.”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계단 쪽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민 머리통과 눈이 마주쳤다. 망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몸은 여차하면 내리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아래층 남자의 뱀 같은 눈이 망치를 발견하고 샐쭉 가늘어졌다.

“잠결에 뭐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나서 잘못 들었나 했는데. 맞나 보네.”

아래층 남자가 씨익 웃는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남의 집 유리창을 다 박살 내 놓은 건 저면서 나를 떠본다.

“때려 부순 건 너겠지.”

“이 형님이 생사람 잡으시네? 난 딸 치고 곯아떨어진 죄밖에 없어요.”

“…….”

“못 믿겠으면 뭐, 보던 야동이라도 인증할까요? 아, 그러고 보니 거기 나오는 남자가 형님이랑 좀 닮았더라고요.”

“네 미친 소리 들어 줄 기분 아니니까 꺼져.”

내가 옆집에 들어가려 했다는 사실을 멍청한 놈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최악은 면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내 집 도어록을 열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안에 남겨 둔 남자를 생각하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기분, 기분이라……. 형님이 그런 거 따져 가며 튕기실 처지가 아니지 않나? 입 다물고 따라와요. 할 얘기가 좀 있어요.”

“할 얘기라고?”

“네. 궁금하지 않아도 듣는 게 좋을걸요. 아, 망치는 두고 와요. 무서우니까.”

아래층 남자는 낄낄대며 부르르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날 쳐다보는 꼴이 내가 따라오는 걸 확인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내가 고를 선택지 따윈 없었다. 망치를 현관문 앞에 내려놓고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자 발바닥에 묵직한 통증이 뒤따랐다.

“에헤이, 표정 풀어요.”

아래층 남자는 112가 찍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며 키득거렸다.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 네 생각과 달리 이건 내게 위기가 아니라 천금 같은 기회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노인으로 모험을 하는 것보다야 이 새끼를 먹이는 게 백번 나았다. 노인보다 젊고 먹을 것도 많으니 남자도 금방 허기가 지진 않을 테고, 덤으로 눈엣가시도 제거하고 일거양득이다.

아래층에 도착하자 놈이 먼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나를 돌아봤다. 호랑이 소굴, 아니 뱀 소굴 앞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놈을 남자 앞에 데려다 놓는 그 순간까지 놈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들어와요.”

아래층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잡아먹히는 건 너야.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아래층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맥주 마실래요?”

“그래.”

거실 소파에 앉으며 선선히 대답해 주니 의외라는 양 아래층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아래층 남자가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동안 빠르게 눈만 굴려 집 안을 살폈다. 특별하다고 할 만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운동 기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조금 너저분한 집이었다.

“혼자 살아?”

“왜 갑자기 나한테 관심이 생겼어요?”

예고도 없이 차가운 맥주 캔이 뺨에 닿았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터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친 새끼. 치미는 짜증을 꾸역꾸역 삼키며 맥주를 받아 들었다. 아래층 남자가 소파 등받이를 넘어와 내 옆에 털썩 앉는다. 한 손에는 맥주, 다른 쪽 손에는 불이 붙은 담배가 들려 있다.

“친구 집인데 다음 달까지 외국에 가 있어서 잠깐 얹혀사는 거죠. 아쉽게도 그 새끼처럼 금수저는 아니라.”

“그래?”

결론은 혼자 지낸단 이야기에 짐짓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래층 남자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위아래로 연신 꿈틀거리는 목울대를 쳐다보며 맥주 캔에 입을 대는 척만 했다. 많이 마시고 되도록 많이 취해 주면 나야 좋았다. “크.” 소리를 내며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입술을 문질러 닦은 놈이 정색하며 물었다.

“왜요. 아무도 없으면 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려고?”

“……눈치가 빠르네.”

멍청한 얼굴이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본다.

“겁나?”

농담하듯 웃어 주자 잠시 굳어 있던 아래층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렇게 생겨서 사람 웃기는 재주도 있었어요?”

나를 살인범이라 의심하고 있는 것치곤 지나치게 경계심이 없었다. 빈 캔을 와그작 우그러뜨리는 팔에 칭칭 감긴 뱀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뭐, 진짜 그렇게 마음먹었어도 쉽지는 않겠지만요.”

경계심이 없는 게 아니라 경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건가.

날 만만하게 본 건 열 받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유리했다. 이미 시간이 꽤 지체된 상태라 이제 슬슬 그 할 이야기라는 게 뭔지 듣고 싶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아까 하려던 말이나 해.”

“아, 딱딱하게 그러지 말아요. 난 형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단 말이에요.”

아래층 남자가 은근슬쩍 내게 몸을 붙여 왔다. 팔에 닿은 가무잡잡한 피부에서 후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내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볼이 홀쭉해지도록 연기를 빨아들인 놈이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죽은, 아니지 실종된 애인이요.”

그런데 이야기란 게 하필 죽은 애인에 대한 것이었다.

“겉보기엔 번지르르한 놈이었잖아요. 나중에 백수인 거 알고 좀 깼지만. 어쨌든 와꾸는 뭐 사장님 소리 듣게 생겨서 대낮에도 맨날 쓰레빠 질질 끌고 다니는 게…… 뭐 하는 금수저 새낀지 궁금하더라고요.”

두꺼운 팔 하나가 구렁이처럼 내 등 뒤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숨기려 눈을 내리깔았다. 아래층 남자가 멋대로 지껄이는 죽은 애인 이야기 따위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잠자코 듣는 척했다.

“……그래서?”

“그래서 담배 피우면서 친해져 보려고 접근했죠. 빨대 좀 꽂아 볼까 하고. 형님, 형님 하니까 기분 좋아서 이것저것 술술 불데요. 나중엔 그러더라고요. 애인 하나 잘 만나서 먹고 노는데, 얼굴만 보면 기죽어서 이젠 고추도 안 선다고.”

애인답지 않게 그런 소리까지 늘어놓았다니 쓰레기끼리 통하는 게 있었던가 보다. 혼자 킥킥거리며 놈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턱 밑을 받친 손에 끼워진 담배가 계속해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연기에 눈이 따가워져 미간을 찌푸리자 뭐가 재밌는지 실실 쪼갠다.

“그 얼굴 하나 보고 만났는데…… 라면서.”

“그 얘긴…… 처음이네.”

“어, 상처받은 거 아니죠? 괜히 얘기했나?”

맞장구를 쳐 주려 대충 한 말일 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아래층 남자 역시 말만 그렇게 했지 미안한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애인은 살아 있을 적에 내 면전에 대고 더한 말도 해 댔었다. 이제 와서 죽어 없어진 놈의 말 따위 내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아래층 남자가 내 손에 장식처럼 들려 있던 맥주 캔을 가져갔다. 전혀 줄어들지 않은 내용물을 알아채고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기에 입꼬리만 당겨 웃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취하지 말자는 주의라.”

“뭐…… 맨정신이면 난 더 좋고.”

테이블 위에 맥주 캔을 내려놓고 놈이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종알종알 말이 많았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멱살을 쥐고 싶어 손이 움찔거렸다.

“아무튼, 그 얘기 듣고부터 얼마나 대단한 여자일까 궁금해서 밤에 잠도 안 오더라니까요. 그러다가 우연히 봤죠. 새벽에 담배가 떨어져서 요 앞 편의점에 갔다가 오는데 그 새끼 다리에 매달려서 울고불고하는 형님을.”

잊고 있던 수많은 밤 중 언제인지 골라내기도 힘들다. 아래층 남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질수록 독한 화장품 냄새와 땀 냄새, 술 냄새, 담배 냄새…… 그 몸에서 풍기는 온갖 불쾌한 냄새가 하나하나 코를 찔렀다.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니 숨을 참아야 했다.

“근데 그 개새끼 매몰차게 길바닥에 두고 가데요? 바닥에 앉아서 흑흑 대는데 귀여워서 그대로 주워 올 뻔했잖아.”

저항하지 않고 남자에게 떠밀려 누웠다. 길게 찢어진 눈이 내 얼굴을 기분 나쁘게 훑는다. 짧아진 담배를 길게 빨아들인 아래층 남자가 연기를 허공에 뱉고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에 비벼 껐다.

“후우…… 암튼 형님 출근하고 낮에 층간 소음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아요? 매번 여자던데……. 이런 형님을 두고 최악이다, 정말. 죽어도 싼 쓰레기인 거 인정.”

인정이니 뭐니 지껄이는 게 아주 같잖았다.

“근데 진짜 죽였어요?”

“어떨 거 같아?”

부정하지 않자 놈이 “허…….”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뭐, 죽였어도 상관없어요. 솔직히 죽였다고 생각하면 더 꼴리는 거 알아요?”

아래층 남자가 내 다리를 벌리고 들어왔다.

“이 얼굴로 도대체 어떻게 죽였을까.”

설마 이 새끼…….

역겨운 가정을 애써 떨치며 또박또박 씹어 뱉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난 안 죽였어.”

“네네. 그 얘긴 됐고. 나 그 고자 새끼보다 좆질은 잘할 자신 있는데.”

놈이 팽팽하게 부푼 중심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결국은 이거였나. 구역질이 치밀었다. 한심한 쓰레기 새끼의 성욕 풀이 장난감이 된 상황이 정말로 좆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볼 안쪽을 꽉 물었다. 아래층 남자가 씨익 웃으며 내 볼을 툭툭 건드렸다.

“이게 내 본론. 아니면 지금 바로 경찰 아저씨들한테 형님의 쓰레기 같은 애인, 혼 좀 내 달라고 대신 일러 줄 수도 있고. 아아, 그랬다간 형님이 혼나려나? 어떻게 할까요?”

이 짜증 나는 새끼를 어떻게든 집으로 데려갈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여기선 싫어.”

아래층 남자가 음흉하게 웃는다.

“생긴 대로 까탈스럽네. 그럼 어디가 좋은데? 폭신한 침대? 아님 따끈한 욕조?”

“우리 집으로 가.”

“형님네 집? 왜요?”

팔을 들어 내키지 않아 하는 놈의 목덜미를 감았다. 땀이 배어 나온 목덜미가 끈적했다. 개의치 않고 끌어당겨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은 거 있거든. 우리 집에.”

“쫓아갔단 못 나올 것 같은데.”

“왜, 내가 죽일까 봐? 쉽지 않을 거라며, 네가.”

아래층 남자의 가슴을 쓸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유두를 살짝 쥐었다. 움찔하는 가슴 근육이 느껴졌다.

“집에 남자 끌어들이는 게 익숙한가 봐. 나 지금 기대돼서 자지 터질 것 같아.”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고막을 긁었다. 씨발……. 혀를 깨물고 싶었으나 어떻게든 마음속으로 최면을 걸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이건 전부 내 예쁜 나비를 위해서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그거…… 내 침대에서 내가 빨아 줄게.”

“하-… 씨발. 빨리 일어나요.”

거센 손이 몸을 잡아 일으켰다.

걸렸다…!

허겁지겁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는 아래층 남자의 손에 순순히 끌려 나가며 나는 입술을 비틀어 소리 없이 웃었다.

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와 아래층 남자의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런데 29층에서 반 층 올라오자 아까까지만 해도 적막하던 좁은 공간이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집까지 계단을 몇 개 남겨 두고 멈춰 섰다. 앞장서던 아래층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 댁 집주인 되십니까?”

내 집 앞을 막아서고 다짜고짜 묻는 이는 경찰이었다.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뭔데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나를 대신해 아래층 남자가 날 선 말투로 대꾸했다.

“앞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3001호 집주인 맞으세요?”

“제가…… 집주인입니다.”

경찰이 아래층 남자를 비켜서 나를 쳐다보았다. 얼결에 대답하고 뒤늦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맞은편 댁에 사시는 할머니 어디 가셨는지 아세요?”

활짝 열린 옆집 현관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경찰과 구급대원들을 보니 식은땀이 흘렀다.

“왜요. 무슨 일이냐니까요.”

아래층 남자가 항의하듯 끼어들었다. 거대한 덩치가 들이대자 경찰이 진정하라는 투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연락이 안 된다는 요양 보호사 신고로 왔는데 할머니는 안 계시고 할아버지는 이미…….”

역시 이미 죽은 뒤였나 보다. 만약 저 도어록을 뜯고 들어갔다면 현행범으로 경찰에게 걸려 빼도 박도 못할 뻔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양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튼, 할머니 행방은 모르신다는 거죠?”

“네.”

저번에 찾아왔던 형사는 아닌 것 같은데 경찰의 가느다란 시선이 유독 내게 꽂혀 있는 기분이다. 혹시 내가 용의선상에 오른 건 아니겠지.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씨발. 진짜 급해 죽겠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래층 남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거 욕은 하지 맙시다. 젊은 청년이. 요새 근처에 실종 사건이 많으니까 조심들 하시구요.”

아래층 남자의 횡포에 경찰이 가로막고 있던 길을 비켜 줬다. 경찰이 옆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계단을 올라가려는 아래층 남자를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둘 외엔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

“예? 뭔 개소리예요.”

“경찰 온 거 안 보여? 오늘은 그냥 가라고.”

“씨발! 그게 지금 우리랑 무슨…!”

“시간이 늦었는데 조용히 좀 해 주시죠.”

다시 나타난 경찰의 경고에 아래층 남자가 입을 꾹 다물고 찢어 죽일 것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완강히 고개를 젓자 눈을 부라리던 아래층 남자는 결국 포기하고 나를 지나쳐 내려갔다. 쿵쿵 발을 구르며 계단을 내려간 놈이 현관문이 부서져라 거세게 닫는다.

못마땅한 표정을 한 경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문 앞에 섰다. 마침 3002호의 상황을 파악한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착잡한 말투로 보고했다.

“할아버지 호흡기도 벗겨져 있고 생명 유지 장치도 꺼져 있었대요. 요양 보호사 말로는 아무래도 할머니가 나쁜 선택을 하신 것 같다고…….”

“에효… 일단 호흡기에 남은 지문 감식해.”

나쁜 선택?

그날 유난히 희번덕거리던 노인의 눈을, 부산스럽던 몸짓을 기억해 내자 허탈한 숨이 터졌다. 노인의 선택을 비난할 생각도 자격도 나에겐 없었다. 단지, 이로써 노인의 죽음에 대한 무게가 아주 약간 덜어졌을 뿐.

도어록을 열려는데 문득 발끝에 묵직한 것이 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가 두고 간 망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미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들키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워낙에 정신이 없던 탓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듯싶다. 만약 아래층에서의 실랑이가 조금이라도 더 길어져 누군가 이걸 봤다면…….

내 불길한 상상을 실현하듯 뒤에서 경찰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어? 이게 왜 이러지?”

덜컥덜컥 소음을 내며 경찰이 뭔가를 흔들어 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마른 금속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은밀히 발끝으로 망치를 밀어내며 태연하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뭐가.”

“여기 도어록이 좀 이상한데요. 약간 뜯어져 있는 것 같아요.”

빠르게 허리를 숙여 망치를 주워 들고 열린 문 사이로 도망치듯 들어섰다. 문을 닫고 나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주르륵 바닥으로 무너져 내려 망치를 꼭 붙들고 등을 기댄 문 너머에 온 신경을 쏟았다. 잠잠한 거로 보아 경찰들의 의심을 사진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안심하긴 일렀다. 아래층 남자가 내게 두 번이나 속아 주진 않을 터였다. 오늘 일로 벼르고 있을 테니 앞으로는 정말 피해 다녀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이제 이 근방은 본격적인 경찰의 수사 범위 안에 포함될 터임이 자명했다. 당장에 수갑 찰 일을 피했을 뿐 모든 것이 최악으로 꼬여 버렸다. 내가 처한 상황만큼 내 머리도 뒤죽박죽이었다.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조용해진 방을 쳐다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 빈집을 점령한 적막에 숨이 막혔다. 불안하게 기울어진 괴물과의 동거 중에는 생각을 정리할 틈마저도 사치였다. 너덜너덜하게 해진 이성은 쓸모가 없어졌다. 나는 본능에 몸을 내맡긴 채 망치를 한 손에 고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그런데 방 안에 있을 줄 알았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비야.”

숨어 버린 고양이를 찾는 사람처럼 방 안 곳곳을 뒤지며 나비를 불렀다.

어디 갔지…? 설마 또 베란다에 나간 건가?

급하게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급한 시야에 방문 뒤쪽 구석에서 몸을 말고 앉아 있는 남자의 굽은 등이 들어왔다. 남자의 존재를 확인하자 막혀 있던 피가 흐르며 안도의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하…… 나비야, 찾았잖아. 왜 대답을 안 해.”

타박보다는 한탄에 가까운 투였음에도 움츠린 등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설마 날 피해 숨어 있던 건가.

누군가 심장을 꽉 쥐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나비야. 때려서 미안해. 배 많이 고파?”

까만 뒤통수가 작게나마 고개를 젓는다. 안쓰러운 뒷모습을 보니 딴에는 내가 곤란하다고 생각해 배고픔을 숨겼을 텐데 그까짓 피 좀 빨았다고 너무 몰아세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너른 등이 보듬어 주어야 할 작고 초라한 존재처럼 보였다.

안아 주려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릴 듯 말 듯 하던 속삭임은 점차 소름 끼치는 중얼거림이 되었다. 더 다가가지 못하고 서서 남자의 희미한 목소리에 집중했다.

“……안 돼. 먹으면 안 돼. 먹으면 안 돼. 안 돼. 먹으면 안 돼.”

남자는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중간중간 발작적으로 고개를 흔들기까지 했다. 절망이 물밀듯이 나를 덮쳤다. 안 그래도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버텨 보려 했지만 결국 눈이 뒤집혀서 소리쳤다.

“제발 그만, 그만 좀 해!”

“…….”

중얼거림이 뚝 멎었다.

“나비야…. 제발 이러지 마……. 나 포기하게 만들지 마.”

내 애원에도 남자는 답이 없었다. 벽처럼 등을 돌리고 웅크린 남자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돌렸다. 눈물 자국이 아직 선명하건만 남자의 눈은 물 한 방울 맺힌 적 없는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너무나 건조해서 이질적인 그 눈과 마주치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전신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비야… 너…… 눈이 왜 그래?”

남자의 눈이 온통 검었다. 흰자위 없이 새카만 그 눈을 언젠가 본 기억이 있다. 하얗고 커다랗고 아름다웠던 곤충의 눈.

“……배고파.”

또 시작이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이 남자에게서 멀어지라 전신에 경고했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어딜 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코로 짧게 공기를 들이마신 남자의 얼굴에 돌연 해사한 웃음이 떠올랐다.

“고기 냄새.”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남자가 무서운 기세로 내게 달려들었다. 바닥에 부딪힌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날카로운 이빨이 눈앞에서 번뜩였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나를 먹으려 드는 남자를 간신히 막았다.

“크윽…!”

이가 박혀 찢긴 팔뚝에서 줄줄 흘러내린 피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남자는 정확히 목표 지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남자의 입속에 있는 건 팔이 아니라 내 머리였을 것이다.

“너…… 나중에 얼마나, 윽… 후회하려고 이래?”

으득.

허기에 인간의 이성을 잃은 남자의 이빨이 괴물의 본능에 따라 더 깊게 살을 파고들었다.

“아악! 씨발…!”

고통에 바르작거리던 손가락 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걸렸다. 놓친 망치의 손잡이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그것을 끌어와 간신히 잡았다.

“똑바로 봐. 나비야. 나 누군지 모르겠어? 어…?”

얼굴 위에 흐르는 축축한 액체가 피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단지 생살을 뚫고 근육에 박힌 남자의 이빨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흑……. 나밖에 없다고 그랬잖아……. 정말 나까지 먹어 버릴 거야?”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잃고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살점을 뜯어내려고 악을 쓰던 남자의 턱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서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비야. 정신 차려. 제발.”

흐린 눈을 감았다가 뜨자 먹물을 부어 넣은 것처럼 새카맣게 물들었던 남자의 눈동자가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턱이 벌어지며 으스러지게 물고 있던 팔을 뱉어 냈다. 이윽고 검은 눈에 이채가 스몄다.

“아…….”

내 피를 묻힌 입술이 추위에 시달리듯 덜덜 떨린다.

“나 냄새가 달라서…… 그래서…… 내가……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성을 되찾자 남자는 저가 벌인 짓을 보고 패닉에 빠졌다. 떨림은 남자의 전신으로 퍼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안의 것을 단단히 쥐었다. 기회는 아마도 한 번.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진심이었다.

“내가 너에 대해 너무 몰랐을 뿐이야……!”

마침내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무섭게 허공을 가른 망치가 퍽! 하는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남자의 머리를 부쉈다. 걸쭉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확히 머리를 얻어맞은 남자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았다. 나는 다시 망치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내가 무자비하게 두 번씩이나 남자의 머리를 부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점점 느려지던 눈꺼풀이 이내 완전히 감기고 남자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방에 성공해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치는 건 고역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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