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드드드득.
진동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발신자를 확인하는 그 짧은 순간에 식은땀이 다 흘렀다. 어제의 기억에서 가지를 뻗친 불안한 상상이 머리를 뒤덮다가 수신된 문자 메시지 앞머리에 붙은 [광고]를 보고 사그라졌다.
“하아…….”
마른세수를 하며 아침 해에 데워진 공기가 고요히 흐르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뜻밖에 맞닥뜨린 까만 눈동자에 놀란 어깨가 튀어 올랐다. 언제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남자의 얼굴은 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어나…… 있었어?”
반면 내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졌다.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남자는 나를 따라 상체를 일으켰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제 일이 더더욱 희미해진다. 그러나 어제 애인에게 두들겨 맞은 몸은 선명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꿈일 리는 없겠지.”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남자의 볼을 만져 보았다. 따뜻한 온기는 없어도 부드럽고 말랑한 뺨의 감촉은 영락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남자가 애인을 산 채로 잡아먹은 어제의 일이 현실임을 모르지 않았다. 부정할 생각도 없다.
“……잘 잤어?”
묻자 남자가 나를 보고 웃었다.
간밤으로부터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주말 아침을 맞은 거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평화로웠다. 남자가 말없이 들어간 욕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 안을 확인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제 혼자서도 잘 씻고 나온 모습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대신 주방으로 가 잔뜩 쌓인 소고기를 구웠다.
어제부로 남자는 변했다. 키우기로 한 내 결심은 그대로지만 이성이 생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남자가 나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칼에 찔렸던 상처는 괜찮은 걸까?
걱정에 정신이 팔린 채로 다 구워진 고기를 식탁에 올려 두는데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놀라서 홱 뒤를 돌아보자 날렵한 턱 선과 붉은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본능적으로 벗어나려는 찰나, 눈이 마주친 남자가 씨익 웃는다. 공포심에 펄떡대던 심장이 처음 보는 남자의 웃는 얼굴에 일순 멈췄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싫어요?”
웃던 얼굴이 시무룩해지며 허리를 감싼 팔이 허무하게 풀어졌다.
“아, 아니. 놀라서. 갑자기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남자의 변화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 튀어 나갔다.
“뭐, 뭐 좀 먹을래?”
어제 남자가 무얼 먹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놓고 ‘뭐 좀 먹을래’라니. 바보 같은 질문에도 눈을 휘며 소리 없이 웃은 남자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배 안 고파요.”
“……그래. 그렇겠지.”
180도 변한 남자의 지나치게 호의적인 태도에 도리어 머리가 복잡해진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처음 본 것을 어미라고 따르는 본능일지, 나를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일지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완전히 뒤로 돌아 제 나이대의 사람다워진 남자를 마주했다. 아까의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으나 남자의 무표정은 더 이상 멍하게 보이지 않았다. 남자도 말없이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시선이 노골적으로 내 얼굴을 낱낱이 뜯어본다. 마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다.
“나도…… 먹을 거야?”
담담히 물었으나 마른침이 넘어갔다. 조금 커진 눈으로 남자는 평소보다 강하게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요.”
“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난데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하니까.”
“내가……?”
모호한 답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니 나는 저를 구해 준 데다 먹이 사냥까지 도와준 사람이었다. 길러 준 사육사를 공격하지 않는 동물원 맹수처럼 보호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 답을 찾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남자가 내 말을 따라 준다면 나로서도 천만다행이었다.
“다친 데는 괜찮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남자는 멀건 시선만 보내왔다.
“배. 칼에 찔렸었잖아.”
칼이 박혔던 자리를 조심히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봐도 돼?”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남자의 티셔츠 밑자락을 살짝 들쳤다. 반쯤 드러난 잘 짜인 복근 어디에도 칼에 찔린 상처 같은 건 안 보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흠집 하나 없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생리적 반응과는 별개로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인간이 아닌 남자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괴물이건 뭐건 간에 남자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날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남자의 티셔츠를 내려 주며 말했다.
“어제 일은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아, 남자에게 이름을 지어 줘야겠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남자와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날 남자는 고양이와 영역 다툼을 한 것이 아니라 사냥 중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비.”
“나비?”
남자가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하며 내 말을 따라 했다. 내 집에서 먹고, 자고,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으면서 오직 나만 보는 그런 존재. 내 이기적인 욕망이 담긴 이름.
“이제부터 너는 나비야.”
어차피 나 아니면 불러 줄 사람도 없는 이름이니 내 마음에만 들면 그만이다.
“앞으로 나만 보고 내 말만 들어야 해.”
잠자코 듣고 있는가 싶더니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식탁에 가로막혔다. 집요한 시선이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이제 남자에게 내 욕망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양팔로 식탁을 짚어 나를 사이에 가둔 남자가 몸을 숙였다. 이 순간 나는 남자의 앞에 차려진 고깃덩이처럼 무력했다. 그러나 두려움은커녕 남자가 해 줄 대답이 궁금하기만 했다.
“좋아요. 당신만 보고.”
서늘하고 건조한 손바닥이 천천히 식탁을 붙잡고 있던 내 손 위로 겹쳐진다.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몸에서 다디단 맹세가 흘러나온다.
“당신이 하는 말만 들을게요.”
그것이 독인 줄 알면서도 마실 수밖에 없는 기분…….
“당신도 그렇게 해 줄 거죠?”
달콤하게 웃는 남자를 보며 직감했다. 나는 이 정체 모를 괴물을 절대 거부할 수 없으리란 걸.
홀린 듯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하려는 순간, 식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남자가 먼저 몸을 비켰다. 묘한 아쉬움에 마른 입술을 축이며 발신자를 확인한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발신자는 동생이었다. 내가 집을 나오고 지난 10년간, 서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지내 온 이복동생.
평소의 나라면 무시했겠지만, 남자의 눈치를 살핀 나는 왜인지 고민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입을 다문 채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형!
부족함 없이 자란 티가 나는 끔찍한 목소리, 날 빨아먹으며 자란 거머리가 뻔뻔하게도 아직까지 날 형이라고 불러 댄다.
―잘 지냈어? 어떻게 연락 한번 없어. 형제끼리 뭐 하고 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형제를 운운하는 동생의 말에 이가 갈렸다.
―형? 여보세요?
“용건만 말해.”
―어? 바빠? 다른 게 아니고…… 곧 내 생일이잖아. 오랜만에 형 보고 싶어서.
보고 싶다고? 누구 때문에 내가 그런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는데.
떨리는 숨소리를 숨기려 목소리를 억눌렀다.
“바빠.”
―……언제인지는 알아?
“내가 알아야 해?”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진다. 그러나 기분은 더 진탕을 구른다. 자기가 피해자라도 되는 양 우는소리가 이어졌다.
―형…… 아직도 그 일 때문에 나한테 화나 있는 거야?
동생은 참 쉽게도 그 일을 꺼냈다. 내게는 꿈에 나올까 두려운 기억인데도. 가해자에 의해 끄집어내진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동생은 열다섯 살이었다.
천식 때문에 동생은 자주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자진해서 지극정성으로 동생을 돌봤다. 내가 이만큼 동생을 사랑하는 이 집의 구성원 중 하나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 빠지는 날이 많으니 동생의 성적은 언제나 하위권이었다. 아버지도 엄마도 누구 하나 그런 동생을 나무라지 않았고 엄마는 오히려 시험을 치르느라 고생했다고 맛있는 음식이며 값비싼 선물을 해 주곤 했다.
「형, 이번 시험 잘 봤어?」
내 성적 따위 전교 1등을 하든 꼴찌를 하든, 이 집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건 아픈 동생에게 자랑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하지 마. 애들이 형 전교 1등이라던데…… 또.」
투덜거리는 동생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다 가진 주제에 내가 가진 의미도 없는 것들마저 탐내는 모습이 미웠다. 그러나 좋은 형을 연기하려면 웃어야 했다.
「너도 몸이 나으면 할 수 있어. 빨리 나으려면 잘 먹어야지.」
그래도 반쯤은 진심이었다. 불퉁한 얼굴로 동생이 물었다.
「……이 죽 형이 만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방을 나와 나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는 넓은 집에서 죽을 끓인 냄비를 닦았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차라리 동생이 죽으면 내가 그 자리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동생이 사라진대도 내 위치는 변하지 않으리란 걸 잘 알았다.
내가 방을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동생이 울며 소리를 질러 댔다. 놀란 엄마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두 손에 거품을 묻힌 채로 방에서 들리는 동생의 울음소리와 엄마의 고함을 불안에 떨며 듣고만 있었다.
동생이 울거나 아프면 나는 늘 난처해졌다. 쿵쿵 발을 구르며 주방으로 들어온 엄마의 표정이 무서웠다. 붉다 못해 파랗게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다가온 엄마는 다짜고짜 뺨을 때렸다. 그리고 얼이 빠진 내 앞에 손바닥을 펼쳤다.
엄마의 손바닥에는 작은 칼날이 있었다. 커터 칼을 조금 잘라 낸 조각은 흰죽과 피에 엉겨 있었다. 엄마는 칼날을 쥔 손으로 내 목을 졸라 댔다. 내겐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너 미쳤니? 내 새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이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악마 같은 놈! 넌 태어나선 안 됐어!」
엄마와 아버지가 날 냉대하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다. 내 죄는 아니지만 내 존재는 죄와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동생은 그러면 안 됐다. 나는 동생에게 어떠한 빚도 죄도 없었다.
―그땐 너무 어려서 일이 그렇게 될 줄 몰랐어, 형.
무책임한 변명에 눈앞이 신호가 끊어진 티브이처럼 변한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나도 후회하고 있어. 당장 용서하기 힘든 거 알아. 그래도 형, 기회라도 주면 안 돼? 내 생일에 꼭…….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한테서 가족이란 허울마저 빼앗아 놓고.
“미안하면 다신 나한테 연락하지 마.”
분을 못 이겨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어김없이 환영과 환청이 찾아온다. 못마땅한 엄마의 표정과 혀를 차는 소리.
‘…….’
그러나 이번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두 손이 내 귀를 막아 주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내 머리를 품에 끌어당겼다.
“울지 말아요.”
울고 있지 않았지만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남자의 몸에 머리를 기댔다. 부족하다. 내겐 조금 더 짙은 위로가 필요했다.
“이런 거 말고…….”
남자의 몸에서 얼굴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시선에는 옅은 온기가 스며 있다. 남자에게서 처음 보는 눈빛임에도 아주 조금,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든다.
“키스해 줘.”
내 말에 복종하기로 약속한 남자는 말없이 입술을 내렸다. 내 멋대로 훔치려고 했을 때와 달리 남자는 능숙하게 입술을 열고 혀를 얽었다. 남자에게 매달리며 문득 깨달았다.
남자의 키스가 죽은 애인의 키스와 비슷하다는 걸.
∞ ∞ ∞
세탁기와 연결된 호스에서 녹물 같은 붉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세탁기 안에 집어넣은 게 피 묻은 수건인지 애인의 시체인지 모르겠다. 세 번이나 세탁했음에도 옅게 갈색 얼룩이 남은 수건들을 쓰레기봉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남자와 살아가기 위해선 규칙이 필요했다. 소파가 없어 휑해진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 남자의 곁에 앉아 몇 가지 당부를 했다.
혼자선 외출하지 말 것.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 것. 그리고.
“내가 허락한 거 말고는 먹으면 안 돼.”
왜 안 되냐고 이유 정도는 물을 줄 알았는데 남자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다가 이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보인 잠깐의 망설임이 불안해서 단호한 어조로 재차 강조했다.
“절대로 안 돼. 사람을 먹는 건 범죄야. 그러니까…… 나쁜 짓이라고. 진짜 알아들은 거지?”
“안 먹을게요.”
이번엔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나왔다. 또 뭘 가르쳐야 할까 고민하는 동안, 남자의 시선은 틀어 놓은 티브이로 돌아갔다. 익숙한 내레이션 소리에 내 시선도 티브이를 향했다.
『일부 곤충들은 동족을 포식하는 포식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사마귀와 거미는 짝짓기를 마친 뒤뿐만 아니라 짝짓기 도중에도 종종 상대를 잡아먹습니다.』
티브이 화면에 커다랗게 잡힌 암컷 사마귀가 짝짓기 중인 수컷의 머리를 먹고 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날카로운 주둥이에 먹히는 와중에도 수컷의 짝짓기는 계속되었다. 암컷은 가는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착실히 수컷을 번식의 양분으로 삼는다. 역삼각형 머리에 달린 초점 없는 눈동자가 지독하게 무정하다.
죽는 줄도 모르고 번식에 미친 수컷이나 짝짓기 상대를 잡아먹는 암컷이나 하나같이 혐오스러운 장면을 남자는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인간의 모습을 한 이상 남자가 살아야 할 곳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였다. 여러모로 남자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 같아 얼른 남자를 불렀다.
“나비야.”
처음 부르는 건데도 용케 한 번에 알아듣고 약속대로 나를 본다. 불만이나 열등감 같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종적인 눈을 보자 등허리가 찌릿해졌다.
“나랑 얘기 중이었잖아. 나 봐야지.”
내 입으로 말해 놓고서 흠칫 놀랐다. 부드러운 어조로 포장했으나 그건 명령이었다. 나는 이 남자를 길들이고 싶은 걸까?
아니지.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남자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길들여야만 한다고.
“티브이는 그만 보고 밖에 나가 볼래? 그동안 집 안에만 있기 답답했지.”
충동적인 결심이 섰다. 남자가 내 말을 따라 평범하게 사람들 속에 섞일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도 남자는 어떤 고민이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 남자에게 입혔다. 잘 맞는 옷을 걸친 남자는 몇 가지 흠이 있대도 눈감아 주고 싶을 만큼 예뻤다. 부디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길 바랐다.
간단히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다가 현관 귀퉁이에 나뒹구는 택배 상자를 발견했다. 이젠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유아용 순면 턱받이’라고 적힌 송장을 갈기갈기 찢어 아파트 단지 바깥에 버렸다.
남자와의 첫 외출이었다. 무작정 계획 없이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얌전히 나를 따라 걷는 남자를 데리고 아파트 근처를 돌며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주었다. 내내 가만히 듣기만 하던 남자가 마트에 들르자는 말에 자연스럽게 마트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걸 보고 설명하기를 그만두었다.
당장 필요한 건 새 수건과 남자가 입을 속옷 정도여서 카트 대신 비치된 장바구니를 들었다. 남자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요. 내가 들게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해 머뭇거렸더니 커다란 손이 빨간 장바구니를 가져갔다. 가벼워진 손을 어색하게 쥐었다 폈다. 배 속 어딘가 긁을 수 없는 곳이 간지러웠다.
제법 익숙하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동안 지나가는 시선들이 한 번씩 남자에게 머물렀다. 대개는 지그시 이어졌고 떨어졌다가도 다시 달라붙었다.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평범하지 않은 남자의 외모에 감탄하거나 호기심을 보이는 눈빛들. 그중 어디에도 경계와 공포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비로소 안심했다. 남자도 자신을 향한 빤한 시선들에 관심이 없었다.
남자는 조용히 나를 따라다니다가 내가 물건을 고르면 기다렸다는 양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고마워.” 하고 말해 주면 순한 얼굴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누가 이런 남자를 의심하겠는가. 내가 잘만 가르친다면 충분히 평범한 사람처럼 생활하게 만들 수 있겠단 자신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정육 코너를 지나며 남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고기는?
남자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필요 없어요.”
선선한 대답에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고기가 필요 없다는 말이 먹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럼 다른 게 필요하겠네.”
내 뒤를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남자를 매달고 계획에 없던 잡화 코너에 들어섰다. 매대 가장 끝에 찾는 물건이 켜켜이 쌓여 있다. 네임택에 ‘다용도 대형 PE 비닐’이라고 적힌 투명하고 질긴 비닐 뭉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가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두 개는 필요할 듯싶다. 양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돌아보자 남자가 어린애 같은 순진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게 뭐예요?”
다 아는 것처럼 보여도 아직 남자에게 가르칠 게 많을 듯하다. 웃음으로 대답을 때우며 남자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집에 가자.”
무심결에 튀어 나간 ‘집에 가자’에 담긴 어감이 상상 이상으로 포근해서,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어서 다 잘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슬슬 물리는 소고기구이로 저녁을 먹은 뒤, 맥주를 한 캔 급히 비웠다. 변한 남자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며 혼자서 씻으러 간 남자를 기다리길 몇 분째,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도둑처럼 깜짝 놀라 열린 문을 돌아봤다. 그런데 남자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흐른 물기가 티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머리가…….”
남자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물기를 말리는 일엔 아직 서투른 모양이었다. 나는 멀거니 선 남자를 끌어다 침대에 걸터앉혔다.
“감기 걸려. 잘 말려야지.”
인간도 아닌 남자가 감기에 걸리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딴죽을 걸 만한 사람이 없으니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드라이기를 가져와 남자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얌전히 나한테 머리를 맡기는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빼면 이전과 딱히 달라진 게 없음을 문득 깨달았다. 어쩐지 긴장한 내가 우스워졌다.
“됐다.”
다 마른 머리카락에서 내가 쓰는 샴푸 냄새에 섞여 조금 다른 냄새가 났다. 향긋하고 기분 좋은 냄새에 긴장이 풀려 취기가 기분 좋게 올랐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좋아 몇 번 손 빗질을 해 주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머리 좀 말려 준 것 가지고 뭘…….”
남자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날 받아 줘서.”
남자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눈웃음 짓는 예쁜 얼굴에 충동을 참지 못한 나는 남자의 양 볼을 붙잡고 입술을 부딪쳤다. 소리 없이 입술과 입술이 꾹 눌렸다가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변한 남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남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아까와 같은 얼굴로 날 올려다볼 뿐이었다.
씻고 나면 물기를 닦아야 한다는 상식을 모르는 것처럼 아직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걸까.
안타까운 탄식을 삼키고 남자의 하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조심히 쓸어내리며 반응을 살폈다.
“이러면…… 기분 나빠?”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면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쇄골 주위를 더듬다가 슬그머니 탄탄한 가슴으로 손을 내렸다.
“지금은…… 어때?”
“괜찮아요.”
그 말이 더 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들렸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천천히 밀자 잠시 버티던 남자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남자의 허리를 더듬으며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그리곤 비스듬히 뒤로 기댄 남자에게 물었다.
“나비야. 키스할까?”
내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손가락 한 마디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던 입술을 먼저 겹쳐 왔다. 혀와 숨이 자연스레 엉켰다. 나는 남자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매끄러운 살결을 만끽했다.
어디를 쥐어도 탄력 있는 근육으로 덮인 완연한 남자의 몸이 손아귀에 뿌듯하게 차오른다. 그러나 남자는 키스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위화감에 입술을 떼자 마치 다음을 모르는 어린애 같은 얼굴로 가만히 숨을 내쉬고만 있다. 힐끗 내려다본 남자의 면바지 앞섶이 섰나 싶을 정도로 불룩하나 내가 알기로 그건 순전히 발기 전 크기에 불과했다.
“하아….”
허무한 한숨조차 뜨거운데 남자는 불능인지 전혀 흥분할 줄을 몰랐다. 허탈하게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이 몸을 고작 쿠션 용도로밖에 쓰지 못하는 가혹한 현실이 눈물 날 만큼 아쉬웠다. 뭐가 문제일까.
“나한테 고맙다면서.”
“……고마워요.”
은혜를 갚을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 있건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 줘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건 알려 주지 않아도 스스로 척척 배우더니 왜 가장 중요한 걸 모르느냔 말이다. 남자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얼굴이다. 자괴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맛보며 머리를 식혔다.
이래선 내가 수컷 사마귀를 욕할 형편이긴 한가?
“그만 자자.”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마음을 추스른 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사부작거리며 내 쪽으로 돌아눕는 남자의 작은 인기척이 유독 크게 들렸다.
“잘 자요.”
어둠 속에서 남자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기분 좋은 체취가 감각을 간질였다. 거짓말처럼 잠기운이 몰려왔다. 가라앉는 의식 사이로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의 끝자락을 놓치며 잠이 들었다.
∞ ∞ ∞
날이 갈수록 남자는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힘들어했다. 가뜩이나 표정이 많은 편도 아니면서 출근 전 현관 앞에서는 항상 울상을 했다. 혼자 사는 사람이 개를 키우면 아침마다 죄책감에 시달린다던데 지금 내가 딱 그 심정이다.
“일찍 돌아올 거죠?”
“일곱 시, 아니 여섯 시 반까지 올게.”
“빨리 와요. 기다릴게요.”
사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힘든 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빨리 올 테니까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시무룩한 남자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그제야 조금 밝아지는 얼굴을 확인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집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던가 싶다. 느릿하게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옆집 현관문이 열렸다.
“옆집 총각, 출근하나 봐요?”
“네. 안녕하세요.”
“으응.”
내 밝은 인사를 받은 노인이 어색하게 웃는다. 노인과 나는 차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도망갈 곳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노인은 내 얼굴을 노골적으로 힐끔거렸다. 모른 체하며 묵묵히 줄어드는 숫자를 보았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그래 보이나요?”
머쓱하게 뺨을 쓸었다. 내가 날을 세우지 않으니 노인은 내 쪽으로 몸까지 돌려 가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슬쩍 숫자를 확인했다. 25층. 문이 열리려면 아직 멀었다.
“저번에 봤을 땐 잘생긴 얼굴이 영 상해서 무슨 일 난 줄 알고 걱정했어요.”
“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어두워진 내 기색을 알아차린 노인의 목소리가 더 높아진다.
“아이고, 내가 너무 참견했네. 우리 아들이 딱 옆집 총각만 할 때 하늘나라로 가서. 꼭 우리 아들 같아서 그래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노인이 주름진 눈가를 훔쳤다. 누군가 엘리베이터 내부의 공기를 모두 빼내기라도 한 듯이 숨이 막혔다.
“여자도 없이 남자 둘이 먹는 건 잘 먹어요? 우리 집은 노인네 둘뿐이라 먹을 사람도 없는데 내가 손이 커서 항상 남거든. 반찬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사양할 것 없어. 내가 총각한테 긴히 할 얘기도 있어서 그래.”
내 진심을 예의 치레인 줄 착각한 노인이 한사코 반찬을 가져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굳이 없는 여자를 찾는 걸 보니 그 핑계로 아예 집에 와서 선 자리 이야기를 꺼낼 속셈이 뻔히 보였다.
다행히 웃는 얼굴에 경련이 나기 전에 문이 열렸고 대충 먼저 가 보겠단 인사를 한 뒤, 차에 올랐다. 끈질긴 노인이 혹시라도 내가 없는 사이 집에 찾아와 남자와 마주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슬슬 남자가 배고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차에 시동도 걸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계속 사람을 먹이는 건 불가능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까.
일단은 살아 있는 동물을 줘 봐야겠다. 개나 고양이는 좀 그렇고 닭 정도면 적당할 듯했다.
그래, 닭이라면 죄책감도 없고 뒷일도 깔끔하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시동을 걸었다.
“대리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예 주임이었다.
“네. 저번에는 안 좋은 모습 보여서 미안했어요.”
아침부터 옆집 노인에게 시달린 터라 짧게 웃고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예 주임이 두 손을 흔들어 대는 것이 시야 구석에 걸렸다.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지셔서 다행이에요. 이거 드세요.”
내 책상 위로 노란 액체가 든 유리병 하나가 놓인다. 생강 유자라 적힌 병이 거슬렸다. 원치 않는 호의는 내게 부담이었고 예 주임에게는 의미 없는 감정 소모가 되리라. 적당히 선을 그으면 떨어져 나갈 줄 알았는데 예 주임은 생각보다 눈치가 없었다. 이제는 거절해야겠다, 마음먹고 예 주임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놀란 듯 예 주임이 눈을 크게 떴다.
“예 주임…….”
“아침부터 둘이 딱 붙어서 뭐 하는 거야?”
매일 외근이랍시고 느지막이 점심이나 먹으러 출근하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부터 고 부장이 끼어들었다. 예 주임이 어색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둘이 뭐 있네, 있어. 어쩐지 저번부터 예 주임 하는 짓이 심상치 않더라니! 둘이 언제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그런 거 아닙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푹 숙인 예 주임을 보고 고 부장은 아주 잘 걸렸다는 듯이 신나서 떠들어 댔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다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회사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연애질이나 하고 말이야.”
손끝이 차가워지며 점차 심장이 두근거렸다. 침까지 튀어 가며 히죽거리는 고 부장을 보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인간쓰레기라면 죄책감이 없지 않을까?
대충 입에 발린 아부를 하며 대접하고 싶다고 고 부장을 집으로 초대하면, 실은 지독하게 외로운 인간이니 덥석 우리 집까지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집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자에게 고 부장을 소개하는 대신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먹어.’
그럼 이 끔찍한 인간은 비명 한번 못 지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텐데.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어?”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차가운 손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끔찍한 상상이었다. 머릿속에 남은 잔상을 지우려 손바닥을 허벅지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고 부장은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모르고 대가리가 굵어졌다, 투덜거리며 자리를 떴다.
심장이 요동쳤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버린 나에 대한 충격과 함께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그걸 실현할 수 있다는 설렘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 ∞ ∞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여느 때보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안겨 드는 덩치에 신발도 벗지 못한 채 휘청했다. 놀라 빨라졌던 심장 박동이 이내 강아지처럼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남자의 인간적인 무게에 잦아들었다.
“얌전히 있었지?”
“네. 얌전히 기다렸어요.”
마치 칭찬을 바라듯 ‘얌전히’를 따라 하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짧게 입도 맞춰 주었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이 부쩍 창백하다. 무심결에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나, 둘, 셋, 넷……. 남자의 마지막 식사를 헤아려 보려는 때, 초인종이 울렸다. 딱히 방문할 사람도 없었고 누군가 방문하기에도 늦은 시간이었다. 문득 옆집 노인과 나눈 대화가 생각나서 남자를 떼어 내 거실로 들여보냈다.
“조용히 있어.”
남자는 거실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현관문을 아주 조금만 열었다.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마주한 이는 노인이 아닌 낯선 남자였다. 척 보기에도 정체가 예상이 가는 거친 인상이었다. 나는 최대한 불안감을 감추고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시죠?”
“경찰입니다.”
불청객이 무성의하게 경찰 배지를 꺼내 보였다. ……드디어 올 게 오고야 말았다. 예고 없이 들이닥쳐 조금 당황했을 뿐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내 뒤에 있는 남자를 의식해 티 나지 않게 현관문 틈을 조금 좁혔다.
“저희 집에는 어떻게…….”
“실종 사건 때문에 그런데 잠시 협조 좀 해 주시겠습니까?”
살인 사건이 아닌 실종 사건.
누구의 시체도 발견할 수 없을 테니 사건은 거기서 미결로 끝날 것이다.
“아…, 네.”
한쪽 눈썹 위에 흉터를 단 커다란 남자는 경찰복 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아마도 형사겠지. 몸에 밴 버릇처럼 자연스럽게 나를 훑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늦은 시간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사십니까?”
“네…, 그런데요.”
너무 태연해서도 안 된다. 내가 보이는 불안감은 형사에겐 오히려 당연한 감정일 거다. 역시나 형사는 대수롭지 않게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혹시 이 사람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가 내민 것은 사진이었다. 작은 증명사진 안에 딱딱한 표정의 죽은 애인이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건다.
‘알잖아, 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못 봤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해 놓고 사고가 뒤따랐다. 안다고 말해서 좋을 건 없다. 수상하게 여길 만한 여지를 남겨서도 안 된다. 결백한 표정으로 형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이번 달에 백운택배 이용하신 적은?”
이번엔 예상한 질문이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둔 대사를 읊었다.
“택배를 시키긴 했는데…… 여기저기서 받아서 어느 택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대답에서 아무런 단서도 얻어내지 못한 형사는 “쯧.” 혀를 찼다. 신경을 긁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흠칫 굳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는 형사의 표정을 관찰했다. 당연하지만 수사가 지지부진한 모양이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정말로 궁금해서라기보단 무고한 시민의 흉내를 내려는 질문이었다.
“실종 신고가 있었습니다. 이 남자랑 이 아파트를 담당하던 택배 기사요.”
“저희 아파트에서 실종된 건가요?”
“그게…… CCTV가 고장 나서 확실하진 않습니다.”
CCTV가 고장 났다고?
하마터면 놀라 되물을 뻔했다. 택배 기사의 행방마저 짐작하지 못한다는 건 벌써 몇 주 전부터 CCTV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의심스러울 정도로 운이 좋았다. 어쨌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임은 분명했다.
콧숨을 길게 내쉰 형사가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건들거렸다. 집을 살펴보자고 나오면 어쩌나 했는데 내가 관련되어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다.
“나중에라도 기억나시는 게 있으면 경찰서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그럴게요.”
그대로 돌아갈 줄 알았던 형사가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이곤 돌연 옆집으로 몸을 돌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각자의 이유로 주변 관계가 일찍이 끊어진 나와 애인이 동거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5년간 맞은편에 산 옆집의 노부부만은 달랐다. 특히 오지랖 넓은 옆집 할머니가 애인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저기! 잠시만요.”
“예?”
경찰이 뒤돌아섰다. 어정쩡하게 뻗어진 손이 초인종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뒷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그, 거긴 어르신 두 분이 사시는데 이 시간이면 모두 주무세요. 귀가 어두워서 잘 깨시지도 않으실 거라, 다음에 다시 찾아오시는 게…….”
“아…. 그럼 그래야겠네요.”
습관처럼 고개를 까닥거리는 형사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문을 닫는 척하며 경찰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숨죽여 지켜보았다. 센서 등이 꺼진 어둠 속에 남아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나서야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나는 한동안 현관에 서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추측해 봤다. 경찰은 조만간 옆집을 방문할 것이다. 노인이 애인의 사진을 보면 나와 함께 살았던 남자라며 줄줄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늘어놓을 테고, 그러면…….
“씨발.”
택배 기사는 불운한 사고였다지만, 애인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설령 그날 내가 애인을 찔러 죽였다고 해도 그건 정당방위였다. 그렇지만 전후 사정이 뭐든 간에 남자의 존재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거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무해한 표정으로 날 본다. 그 검은 눈동자가 내게 최면을 거는 듯했다.
그래, 우리는 무해하다.
‘쯧.’
또 지긋지긋한 소리가 나를 타박한다. 고개를 흔들어 환청을 쫓아내고 남자의 앞에 서서 애써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배고프지?”
남자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남자는 이렇게 태어났을 뿐이지 죄가 없다. 내가 단지 엄마의 몸이 아닌 몸에서 태어났을 뿐이듯.
“괜찮아. 그냥 배가 고픈 것뿐이잖아. 그건 누구한테나 당연한 거야.”
“……배고파요.”
아아, 불쌍한 나비.
당장 다용도실에 처박아 두었던 질긴 비닐을 꺼냈다. 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맑은 새소리가 좁은 복도에 메아리쳤다. 단조로운 전자음인 내 집과 다른 초인종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이윽고 소리가 멎을 때까지 옆집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정말로 이미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곧장 다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충동이 가시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 이 방법뿐인가? 내가 너무 성급한 건…….
―누구세요?
인터폰이 아닌 문 안쪽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아…… 저 옆집이에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얼결에 대답이 나갔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노인이 나타났다. 어딘가 바쁜 사람처럼 허둥지둥하는 노인의 두 눈이 형형했다. 그 눈을 보니 경찰이 이 집을 먼저 들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역시 이 방법뿐이다. 나를 보고 노인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꾸며 낸 듯 과장된 음성이었다.
“아이고, 총각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괜찮아. 늙은이라고 다 일찍 자는 건 아니야.”
“다른 게 아니고…… 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요.”
노인이 눈을 껌뻑이더니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기를 쓰고 내게 오지랖을 부릴 땐 언제고 기억도 못 하는 걸 보니 역시나 빈말이었나 보았다.
“으응. 그래, 들어와요. 안 그래도 내가 조만간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떨떠름한 태도로 노인이 문을 벌렸다. 노부부의 집은 살아온 긴 세월을 증명하듯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식물이니 도자기니 거의 잡다한 것들이었다. 세월이 묻어나는 갈색 가죽 소파 중앙은 자리가 움푹 꺼져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낼 노인의 외로운 시간이 눈에 선했다.
노인은 냉장고에서 반찬통들을 꺼냈다. 덜어 낸 반찬을 봉투에 담는 손길이 분주했다. 노인의 곁에 서서 집 안을 마저 둘러보았다. 거실 소파 뒤에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젊었을 적의 노부부와 죽었다던 외동아들이 함께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몇 장 없는 사진에서조차 어색함이 묻어나는 내 가족사진과 달리 잘난 피로 이어진 그들은 참으로 화목해 보였다.
“총각, 뭘 그렇게 봐. 노인네들만 사는 집이라 볼 것두 없어.”
“그…… 바깥 어르신은 안 계세요? 인사드리고 싶은데.”
“아이구! 괜찮아, 괜찮아! 그 양반은 움직이지도 못해.”
노인이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어딘가를 곁눈질했다. 눈짓 끝에 반쯤 열린 방문이 있었다.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의 비쩍 마른 발과 줄줄이 연결된 의료 장치가 눈에 띄었다. 생명유지 장치라는 걸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걱정거리가 하나 줄었다.
“자, 여기. 남자 둘이라도 며칠은 먹을 거야. 다 먹고 필요하면 또 말해요.”
기분 탓인지 봉투를 쥐여 주는 손길에서 날 빨리 내보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노인은 쫓기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눈치챈 걸까? 속이 타들어 가는 초조함을 숨기고 나는 여상히 물었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그저 순수한 호의인 양.
“감사해서 차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잠깐 들르세요.”
그러자 노인은 또 힐끔 방 안을 보았다. 아파 누워 있는 남편을 걱정하는 안색과는 묘하게 달랐다. 마치 비쩍 마른 발의 주인이 쫓아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눈치를 보던 노인은 입가 주름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럼 그럴까?”
노인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내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선 노인은 휑한 거실을 보고 멈칫했다. 나는 등 뒤로 현관문을 닫으며 나잇살이 붙어 굽은 등을 집 안으로 은근히 밀었다. 불안해서 마음이 급했다.
“소파를 바꾸려고 주문했는데 배송이 늦어서 좀…… 썰렁하죠?”
“아유 남자끼리 사는 집 같지 않게 깨끗한데, 뭘. 우리 아들은 어찌나 더럽히고 살았는지 내가 잔소리를 하느라 입이 다 아팠어.”
식탁 의자에 앉자 노인은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노인의 수다에 간간이 미소를 지으며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한참을 혼자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어 가던 노인이 내게 질문했다.
“그런데 총각은 이름이 어떻게 돼요?”
“이름이요?”
“언제까지 옆집 총각, 할 수도 없잖아요. 곧 저 양반까지 가고 나면 나도 외로워서 어쩌나 싶어.”
아무리 산송장이라도 남편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치고 노인의 태도는 퍽 가벼웠다. 게다가 꼭 남편의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듯한 뉘앙스이지 않은가.
“많이 힘드셨나 봐요. 아픈 사람 돌보는 일이 쉽진 않죠. 저도 해 봐서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외롭지 않게 해 드릴게요.”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내 진심이 전해진 건지 노인이 손가락으로 젖은 눈가를 찍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아들에 남편까지 저렇게 되고 나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싶고. 가끔은 나도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거든. 끝까지 나 고생시키는 영감도 어쩔 땐…….”
식탁 언저리를 쳐다보던 노인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나쁜 기억을 더듬는지 주름진 눈가를 파르르 떨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빈 찻잔을 매만졌다. 이해 못 할 감정은 아니었다. 외로움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세울 수 있는지 지금 내가 겪고 있었으니까.
“내가 살아 보니 결혼은 남자한테 무조건 이득이야. 총각도 너무 늦기 전에 가야지. 내가 아들이라 생각하고 참한 아가씨로 소개해 줄게.”
탁.
한계까지 가열된 커피포트의 전원이 저절로 꺼졌다.
“……그 얘기 말인데요. 사실 같이 살던 남자. 제 애인이었어요.”
나는 집히는 대로 아무 티백이나 집어넣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며 노인을 마주 봤다.
“애, 애인?”
나도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곧 죽을 노인에게라도 억울함을 털어놓고 싶은 걸까. 차를 마시려다가 도로 내려놓은 노인의 찌푸린 얼굴에 당혹감이 짙었다.
자기 얘기는 일방적으로 떠들어 대더니 내 이야기는 겨우 한마디 들어 놓고 벌써 싫은 내색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반면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묘한 통쾌함에 떠드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10년 정도 만났어요. 아시다시피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수는 없었지만, 완벽한 애인이었어요. 성별을 떠나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서 좋았어요. 전 혼외 자식이라 집에서도 그냥.”
잠시 말을 쉬고 단어를 골랐다. 내 존재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고심했다.
“그냥 식충이었거든요.”
“총각. 지금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노인은 질색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마도 내가 내어 준 차를 마실 생각은 이제 없어 보였다. 모처럼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탔다.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그런데 여기 이사 오고부터 애인이 점점 변하더라고요. 나 같은 놈한테 얹혀사는 게 끔찍했나 봐요. 마음도, 돈도 다 주면서 난 진짜 잘해 보려고 했는데.”
눈이 마주치자 노인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예상한 바였다. 정작 나에 대해 말하면 이해는커녕 더 알고 싶지도 않아 할 거란 걸. 타인과의 관계는 한 꺼풀만 벗겨 보면 냄새나는 위선 덩어리에 불과했다.
“나, 난 이만 가 봐야겠어. 집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일어나려는 노인의 팔을 붙들었다.
“벌써요? 전 할머니가 떠들어 댈 때마다 군말 없이 끝까지 들어 줬는데요.”
“총각! 지금 늙은이라고 나 놀리는 거야?”
“놀리긴요. 더 들어 보세요. 지금부터가 진짜 중요하니까. 몇 주 전에 시끄러웠던 날 기억하시죠? 사실 그날 애인이랑 헤어졌어요. 근데 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 거예요. 오직 나만 아는 남자.”
“이거 놔, 총각!”
노인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떨렸다. 일그러진 주름 사이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그렇게까지 슬픈 얘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난 제법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지만, 전 괜찮아요. 다들 단점 하나씩은 숨기고 살잖아요. 안 그래요?”
“듣기 싫다니까…!”
노인은 꼭 내가 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뿌리쳤다. 겁먹은 노인에게 굳이 남자의 유일한 단점을 털어놓지 않아도 곧 알게 될 거였다. 나는 노인에게 보여 준 적 없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사람이에요. 아마 할머니도 보시면 그렇게 생각하실걸요. 보실래요?”
“아, 아냐. 나, 나는…….”
픽 웃음이 샜다.
“왜 사양하세요? 평소에는 그렇게 저에 대해 궁금해하시더니.”
그러니까 진작 나한테서 관심을 껐어야지. 그럼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덜덜 떨기만 하는 노인을 부축해 준비를 끝낸 방 앞에 섰다. 드레스룸이었다가 죽은 애인의 방이었다가 지금은 또 다른 용도가 된 방.
닫힌 문 너머는 조용했다. 내가 조용히 기다리라고 하면 남자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인의 공포가 불길처럼 내게 옮겨붙은 듯 문고리를 잡는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스락.
남자가 바닥에 깔린 비닐을 밟는 소리가 났다.
“아, 아악!”
방 안을 본 노인은 까무러치며 쓰러졌다. 빈틈없이 투명한 비닐로 덮인 방 한가운데에 전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실신한 노인을 끌어 남자의 앞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할머니. 좋은 이웃이 못 돼 드려서 죄송해요. 그래도, 그렇게 알고 싶어 하셨던 저에 대해 다 아셨잖아요.”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자꾸만 떨리는 두 손을 꽉 말아 뒷짐을 지었다. 노인은 외로운 삶을 끝내고 나는 남자를 먹인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 되뇌었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 주어도 남자는 멀뚱히 노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뭐 해?”
순진한 얼굴이 물끄러미 나를 향한다. 의뭉스러운 남자의 태도에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아닌가…?
고민도 잠시, 순종적인 남자가 다름 아닌 내 허락을 기다리는 중임을 깨달았다.
“먹어도 되는, 사람이야……. 먹어.”
입술 사이에 풀을 붙인 듯 잘 떨어지지 않았으나 나는 기어이 이웃을,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먹으라 허락했다.
그제야 남자는 내게 등을 보이며 몸을 낮췄다. 내게 식사 중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한 자세였다. 그것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람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흔적 없이 먹어 치우는 남자의 식사가 어떤 건지 궁금해졌다. 보지 말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경고와 위험한 호기심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선은 이미 남자의 뒤통수에 꽂혔다.
쩌저적.
그건 살과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기괴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나는 끝내 봐서는 안 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남자의 머리 위로 가느다란 두 개의 촉수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식사에 몰두한 남자에게서 멀어지려 뒷걸음질 치는 발밑으로 바스락바스락 비닐이 구겨졌다. 행여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볼까 두려웠다. 상상도 못 한 끔찍한 것과 마주치게 될까 봐 급히 뒤돌아 달렸다.
화장실에 쓰러지듯 엎어지며 구토를 했다. 내가 본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피부색처럼 희고 가는 한 쌍의 그것은 각각 다른 방향의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마치 곤충의 더듬이처럼.
남자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막상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우윽, 흑.”
‘쯧. 그러게 내가 목을 졸랐을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니.’
화장실 문 앞에 선 엄마가 변기를 부여잡은 날 비웃었다. 입이 찢어져라 웃는 얼굴이 악마 같다. 멍하니 엄마의 환영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듬이가 뭐?
저런 여자도 사람인 척 살고 있지 않나. 그뿐인가. 엄마와 결혼하자마자 한참이나 어린 여자를 겁탈해 임신시킨 아버지나, 순전히 질투로 날 모함한 동생이나, 10년간 헌신한 나를 죽이려고 한 애인이나! 다들 추악함을 숨기고 겉으로는 사람인 척 산다. 사람인 척만 하면 내면의 추악함 따윈 아무런 죄도 되지 않는 세상이다.
“엄마, 나를 탓한다고 바뀌는 건 없어요.”
난 처음으로 엄마에게 대꾸했다. 시큼하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대충 훔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 손을 닦고 입안을 헹구며 오래 묵혀 둬 썩어 버린 말을 꺼내 뱉었다.
“적어도 저건 나를 배신하진 않아요. 아버지처럼.”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어느덧 엄마의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나와 남자만이 남았다.
“잘 먹었습니다.”
벌거벗은 남자의 몸은 피로 목욕한 것처럼 온통 붉었다. 들어오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자 순순히 내 손을 잡고 욕실로 들어선다.
“남기지 않았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조심스럽게 앞머리를 걷어 남자의 이마를 확인했다. 징그러운 더듬이 같은 건 없었다. 피에 젖은 얼굴은 여전히 예쁘고 무해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사람다웠다.
“나랑 한 가지만 더 약속해 줘. 내 앞에서는 이 모습으로 있어. 죽을 때까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가 붉게 빛나는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사람인 척만 하면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사람이다.
남자가 내 손을 끌어가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질척하게 젖은 입술이 손바닥에 핏자국을 남겼다. 그 채로 남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당신도 변하지 않을 거죠?”
나는 나를 저버린 배신자들과 다르다.
“응, 그럴게.”
너만 변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항상 내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급하게 방을 나왔다. 집 안은 피 냄새 대신 고소한 밥 냄새로 가득했다. 주방에서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앞치마를 찾아 두른 남자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톡톡 경쾌한 리듬에 맞춰 남자의 팔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침 준비요. 씻고 나와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뚝배기에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반듯하게 깍둑썰기한 두부를 갈색 국물에 쏟아 넣는 손길이 능숙했다. 남자가 젖은 손을 앞치마 위에 두드리며 넋이 나간 나를 돌아보곤 웃었다.
“배고프면 식사부터 할래요?”
특별할 것 없는 흔한 물음에 갑자기 목이 메었다. 온전히 나를 향한 다정이 버거울 정도로 가슴에 차올라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서랍 속에 묵혀 있던 거친 무명천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지만, 그것마저 사랑스러웠다.
남자의 행동이 먹어 치운 뇌에서 엿본 기억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이 남자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아니야. 그냥 좋아서…….”
남자는 한심하게 울먹이는 나를 비웃거나 타박하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엇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남자에게서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만큼은 애정을 빌미로 날 아프게 하지 않을 거다.
나는 단지 한 방울의 물로도 메마르지 않을 수 있었는데 아무도 내게 그 한 방울을 허락하지 않았다. 눈앞의 사랑스러운 괴물을 빼고는.
∞ ∞ ∞
아침저녁으로 남자가 해 주는 밥을 먹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 보답 겸 온종일 집에 있는 남자가 가엽기도 해서 금요일, 저녁을 먹고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남자를 데리고 조금 멀리 나가 볼 생각이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좋은 곳.”
그렇게 답해 주며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훑어보았다. 어딘가 어색하고 맹하던 모습이 사라진 남자는 집 안에 가둬 놓고 나만 보기에 참 아까울 정도였다. 시동을 걸고 운전석 창문을 살짝 내리자 후끈해진 여름 공기가 불어닥쳤다.
“데이트네요.”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온 남자의 낯간지러운 말에 막 출발하려던 차가 울컥 멈췄다.
“데이트?”
“아니에요?”
부끄러움이나 꿍꿍이 따윈 없는 곧은 시선. 투명하게 비춰 보이는 남자의 진심을 확인하고 액셀을 밟았다. 어쩐지 간질거리는 목덜미를 쓸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맞아.”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던 애인은 누군가에게 나와의 관계를 들키는 것에 아주 예민했다.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으나 사이가 서서히 틀어지면서 5년간 데이트라 부를 만한 추억 하나 없는 건 너무했다.
잘 죽었지, 정말로.
“나비야.”
이름을 부르자 조수석 창문으로 시내의 풍경을 바라보던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가 신호에 걸린 틈을 타 급하게 남자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예쁜 말만 하는 입술을 그냥 내버려 두기 미안했다. 내 주도로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키스를 남자는 한 번도 밀어내지 않았다. 서로의 입속을 오가던 혀가 언제부턴가 남자의 입속에서만 얽혔다. 몸이 조수석 쪽으로 계속해서 기울어졌다. 남자의 뒤통수가 유리창에 쿵 닿을 때까지.
빵!
뒤차의 경적에 입술이 떨어졌다. 느닷없이 몰아붙인 주제에 나 혼자만 헐떡였다. 너무 달려들었단 생각에 뒤늦게 민망해져 젖은 입술을 훔쳐 주지도 못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깜짝 놀랐냐고,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랬다고 능청을 떨기엔 나도 여유가 부족했다. 남자와 있으면 두 발이 허공에 뜬 것처럼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서먹한 침묵 속에서 문득 기어에 의미 없이 올려 두었던 손이 잡혔다. 손가락 사이로 남자가 깍지를 꼈다. 딱 들어맞는 조각처럼 얽히는 열 개의 손가락에 갈증이 났다.
“운전할 땐 앞을 봐야죠.”
픽 웃는 남자의 얼굴이 낯설다.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꼭 다른 남자와 있는 것만 같다.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한산한 도로 위를 빠르게 내달렸다.
오래간만에 와 본 한여름 밤의 한강은 퍽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그 속에 나와 남자가 있다는 게 어쩐지 어색했지만 걷는 중에 남자와 어깨가 스칠 때면 말하기 부끄럽게도 설렜다.
괜히 강으로 던져두었던 시선을 우연인 척 남자에게 돌렸다. 습한 강바람에 내 목뒤는 이미 끈적끈적해진 지 오래인데 남자는 혼자 다른 계절에 있는 듯 보송했다.
“진짜로 땀이 안 나네.”
“더워요?”
불쑥 남자가 내 이마를 쓸었다. 평균보다 온도가 낮은 손을 피해 목을 뒤로 뺐다. 그대로 허공에 멈춰 있는 손을 멋쩍게 잡아 내려 주며 변명했다.
“더러워. 만지지 마.”
“좋은 냄새만 나요.”
남자가 코를 킁킁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는 남자야말로 묘한 체취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전에는 이렇게 노골적이지 않았다. 피부 위에 코를 대야만 겨우 맡을 수 있을 정도의 체취에 불과하던 향기가 지금은 향수를 뿌린 것처럼 진하다.
사실 변한 건 냄새뿐만이 아니다. 표정, 말투, 몸짓, 모든 게 달라졌다. 남자는 어디까지 변하는 걸까. 남자의 머리 위에서 꿈틀대던 더듬이 같은 건 뭐였을까.
“여기 기억나요.”
돌연 걸음을 멈춘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기억이라니. 나를 만나기 전에 와 본 적이 있다는 말인가?
두리번거리며 남자가 기억한다는 장소를 둘러보았다. 강을 낀 넓은 공원 근처에 편의점이 하나 있을 뿐 별다를 건 없었다. 무드 없이 환하게 밝혀진 편의점 간판에 케케묵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남자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우리가 처음 키스했던 날.”
“뭐?”
그건 나와 죽은 애인의 기억이지 남자의 기억이 아니었다. 검은 강물을 타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기억 안 나?”
갑자기 남자의 말투가 바뀌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무뚝뚝한 표정에 죽은 애인이 겹쳐졌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뭐지…?
“괜찮아요?”
눈을 감았다가 뜬 잠깐 사이에 남자는 다시 본래의 무해한 존재로 돌아와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헛것을 본 건가?
“나 잠깐, 마실 것 좀 사 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빨리 올 거죠?”
“으, 응.”
나는 황급히 편의점으로 도망쳤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전신을 덮친다. 하지만 팔뚝에 돋은 소름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엄마의 환영으로도 모자라 죽은 애인의 망령이라도 쓰인 걸까. 그래, 그런 거다. 괜히 죽은 애인과의 기억이 있는 장소에 와서 그놈이 잠시 떠오른 것뿐이다.
불안한 망상으로 남자와의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단정 지었다. 차가운 생수를 사서 곧바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편의점 유리문 너머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날 기다리는 남자가 보였다. 그런데 내가 자리를 비운 그 잠깐 사이에 남자 곁에 웬 여자가 다가서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핸드폰을 내밀다가 자연스럽게 가까이 붙어 섰다.
그 꼴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달라붙어 오는 여자를 뿌리치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편의점을 박차고 나왔다. 남자에게로 뛰어가다시피 하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가만 보니 그 여자만이 아니었다. 남자에겐 자신이 한 끼 식사 거리인 줄도 모르고 주변을 서성이는 모든 이들이 남자를 힐끔거렸다.
내가 안일했다. 남자가 나만 본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남자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너무나 아슬아슬했다.
무엇이? 저들의 목숨이? 아니면 남자의 존재가?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중에도 여자는 남자의 팔뚝을 슬며시 더듬어 대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물병을 내동댕이쳤다.
남자에게 다가갈수록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가만히 있는 남자도, 그런 남자를 탐내는 이들도 못 견디게 거슬렸다. 남자의 바로 등 뒤에서 나는 가까스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죽였다.
“좀 떨어지죠.”
“네?”
“걔한테서 손 떼고 떨어지라고.”
잔뜩 날을 세운 내 목소리에 겁먹은 여자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씨발. 이 남자는 사람을 먹는 괴물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쳐다보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아랫입술만 짓씹으며 남자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이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내가 정말이지 너무 안일했다.
집에 돌아가면 이 위험한 남자를 가둘 것이다.
∞ ∞ ∞
“밖에서 들어올 때는 기존 도어록이랑 작동 방법이 똑같습니다. 근데 안에서는 여는 버튼이 따로 없고 열쇠가 있어야만 열 수 있어요.”
설치 기사가 작은 막대 끝을 집 안쪽 도어록에 가져다 대자 잠금장치가 풀린다. 열쇠를 떼자 잠시 뒤 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지금처럼 문이 잠기면 안에서도 열쇠가 없으면 절대 문을 열 수 없어요.”
남자를 가두기로 마음먹고 곧장 양방향으로 잠기는 특수 도어록을 설치했다. 설치를 마친 기사가 건네는 작은 열쇠 뭉치를 받아 들자 기사가 썰렁한 집을 눈으로 훑었다. 내 집이 그가 설치한 잠금장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 의문스러운 시선이다.
“뭐 때문에 설치하시는건지 여쭤도 될까요?”
“그게 왜 궁금하시죠?”
“예? 아, 보통은 치매 어르신들 모시는 분들이 저희 주 고객이시거든요. 근데 고객님 댁은 그런 것 같지 않아서……. 아,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문제 생기면 여기로 연락 주십시오.”
받은 명함을 아무 데나 처박아 두고 열쇠를 신발장 서랍 깊숙이 숨겼다. 이제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이 집에서 나갈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뿐이다.
내 방 안에는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무해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실은 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했다. 그러니까 남자를 가두기로 한 내 결정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이제 남자가 나갈 생각을 못 하게끔 할 차례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의 차가운 두 뺨을 감싸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타일렀다.
“나비야.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네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지난 외출에서 내 사나운 분위기를 감지한 남자는 혼이 난다고 생각했는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런 남자의 뺨을 꽉 잡아 나를 보게 했다.
“너를 잡아가서 도망가지 못하게 지하실 같은 곳에 널 묶어 둘 거야. 그런 다음 칼로 네 몸을 조각조각 해부하고 네 정체가 뭔지 알아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고 들걸?”
“……왜요?”
너무도 순진한 물음에 헛웃음이 터졌다.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너는 사람이 아니잖아.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잖아.”
무감하기만 하던 남자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린다. 남자의 색다른 반응에 손끝까지 짜릿한 쾌감이 퍼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두려워하는 남자를 염려하며 뺨을 쓸어 주었다. 불안한 듯 남자가 제 뺨을 잡은 내 손목에 매달렸다.
“당신이 나랑 있어 줄 거죠?”
입꼬리가 떨렸다.
“그럼. 걱정하지 마. 난 널 지켜 줄 수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다 괜찮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머리 위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니까 이제 밖에는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
기분 좋은 향기가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넘실거린다.
“평생 여기에 있는 거야. 나랑.”
남자의 붉은 입술이 열리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당신이랑 평생 여기에 있을게요.”
만족감에 배가 불렀다. 남자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순진하게 평생 나만 보겠노라고 맹세하는 이 가여운 괴물을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가두지 않을 수 있을까.
∞ ∞ ∞
아침부터 우중충하던 하늘은 밤이 되자 비를 쏟아부었다. 남자를 집에 들인 지도 한 달가량이 지났지만, 오늘처럼 귀가가 늦어진 적이 없어 걱정이 되었다. 고 부장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한 회식에서 억지로 술을 연거푸 들이켠 탓에 내 감각은 급한 마음과 달리 물에 잠긴 듯 풀어졌다. 냄새나는 고깃집 밖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휘청했다.
“어, 대리님! 괜찮으세요?”
내 팔을 붙잡은 이는 예 주임이었다.
참, 불쌍한 사람이다. 왜 나 같은 걸……. 아니지, 내가 누굴 동정할 처지던가.
다리에 힘을 주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훌쩍 넘었다. 미리 남자에게 핸드폰을 장만해 줄 생각을 못 한 게 후회가 됐다. 더구나 쏟아지는 비를 뚫고 말도 듣지 않는 몸으로 집까지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다.
“택시 잡아 드릴게요.”
예 주임이 작은 삼단 우산을 편다. 나는 우산도 가지고 있지 않던 터라 염치 불고하고 예 주임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신세 좀 질게요. 미안해요.”
예 주임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거리의 소음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귓가는 왕왕거리고 의식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질서 없이 흐르던 생각이 무심코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예 주임은…… 내 어디가 좋아요.”
“네…?”
“난 딱히 해 준 게 없는 것 같은데.”
“대, 대리님은…… 좋은 분이세요.”
땅바닥만 쳐다보는 작은 정수리가 보였다. 예 주임은 내가 허락한 내 단면만 보았을 뿐이다. 고작 그 정도의 호의에 호감을 느끼게 된 예 주임이 한심하고 한편으로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난 좋은 사람 아니에요. 날 전부 알게 되면 분명 후회할 거예요.”
「그 여자도 널 알면 마음 바뀔걸.」
죽은 애인이 내게 했던 저주 중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내가 예 주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꼭 전부를 알아야만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항의하듯 또박또박 이어진 음성과 달리 예 주임은 날 쳐다보지 못했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예 주임의 대답이 잘못 삼킨 덩어리처럼 목과 가슴 사이에 턱 걸렸다. 못난 반발심에 ‘나 게이예요.’라는 말이 혀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렇게 말해서라도 예 주임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오기가 들었지만, 끝끝내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야말로 정체 모를 남자에게 미쳐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몸은 택시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원하고 건조한 에어컨 바람이 남자의 체온과 비슷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갈증이 밀려든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자 노곤한 한숨이 흘렀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남자의 인사를 받는 것이 어느덧 숨 쉬듯 꼭 필요한 일이 됐다. 빨리 남자가 보고 싶었다. 감질나게 끝나는 키스라도 마음껏 하고 싶었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현관까지 잠시 걸었을 뿐인데 철철 쏟아붓는 폭우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 미지근하게 달아올랐던 몸이 찬물 세례에 식어 이가 닥닥 부딪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니 완전히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따로 없었다. 찝찝하고 초조한데 느려 터진 엘리베이터가 30층까지 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거울에 머리를 기댄 채 술에 취한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다. 남자는 자고 있을까? 아마도 기다리고 있겠지. 곧 남자를 먹여야 할 텐데……. 내일 생각하자.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우르릉!
까무룩 잠들 뻔한 의식이 천둥소리에 번쩍 들었다. 엘리베이터의 등이 깜빡이더니 이내 툭 꺼진다. 다행히 비상 전원으로 전환된 엘리베이터는 무사히 30층에 도착했다. 아파트 전기가 전부 나갔는지 복도엔 센서 등 대신 녹색 비상등만 환했다.
갑자기 불이 꺼져 놀랐을 남자가 걱정돼 다급하게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빗물에 젖은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세 번 만에야 잠금장치가 풀렸다.
“나비야! 괜찮아?!”
집 안은 암흑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를 좁히며 빗소리만 가득한 거실을 둘러보는데 다시 한번 내리친 번개로 짧은 순간 거실이 환하게 밝혀졌다. 남자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인영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있으면 대답해야지. 놀랐잖아.”
남자가 아직 구두도 벗지 못한 내게 말없이 다가왔다. 빗소리 때문일까? 발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은데 남자의 모든 것이 어둠에 묻혀 있다. 단지 가까워진 기척이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왜…, 왜 그래? 갑자기 정전돼서 무서웠어?”
“젖었네요.”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낮고 거칠다. 뭔가 달랐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체취가 피부를 짓누르듯 했다. 젖은 살갗에 소름이 돋고, 아랫배가 당기는 긴장감이 내 말꼬리를 멋대로 흐렸다.
“어. 조금…….”
남자의 손이 셔츠 한 장만 걸친 내 가슴 위를 더듬는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얇은 천 위로 남자의 손가락이 추위에 꼿꼿해진 젖꼭지를 스쳤다.
“읏.”
불가항력으로 야릇한 신음이 나왔다. 남자가 이런 식으로 날 만진 건 처음이었다. 남자의 의도를 파악할 새도 없이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강한 힘이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당기고 뭉개진 입술 사이로 물컹한 혀가 밀려들었다.
“으응, 읍!”
집어삼킬 기세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남자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돌변한 남자는 쉬지 않고 나를 몰아세웠다. 뒤로 꺾인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 무서웠다. 속절없이 밀려나다가 어딘가의 모서리에 허리를 부딪쳤다. 뒤를 더듬어 보니 신발장이었다.
장소는 현관이었고 나는 비에 쫄딱 젖어 신발도 벗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남자는 장소 따위를 따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로서는 남자의 힘에 겨우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중심을 잡자마자 파고든 남자의 허벅지가 다리 사이를 압박했다. 강한 전류가 흐른 것처럼 엉덩이 근육이 바짝 조여지며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으응, 아…!”
억눌린 신음이 터지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코앞에서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하지만 먹이를 보는 시선과는 다르다. 그의 식사를 지켜본 나는 알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데 남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처음 보는 짜증 난 얼굴로 남자가 내 목에 코를 가져다 댔다.
“냄새나요.”
냄새?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알아들을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인간의 모든 욕구 중에서 유일하게 식욕만 왕성하던 남자의 예상치 못한 변화에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오늘 아침에도 빨리 돌아오라며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울상을 짓던 남자였다. 그 유순함은 다 거짓이었던 걸까? 갑자기 겁이 났다.
“잠깐…… 이것 좀 놓고.”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단단한 몸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더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남자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입술이 지나간 자리가 불에 덴 듯 홧홧해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무, 무슨.”
기가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치댈 때는 백치처럼 굴더니! 키스 이상의 접촉을 거의 포기한 나로서는 남자의 지금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흥분으로 풀린 눈동자,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 그리고 허벅지에 닿은 딱딱한 존재감으로도 모자라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 아기 만들어요.”
“아, 아기……?”
쿠르릉.
천둥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내가 귀를 의심하는 사이, 나를 돌려세운 남자가 어둠 속에서도 능숙한 손길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겼다. 당황해서 만류하는 내 몸짓은 전부 허사였다. 젖은 맨살 위로 닿은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곧 그 소름은 다른 의미로 뒷덜미까지 퍼졌다. 거대한 기둥이 그대로 파고들 것처럼 엉덩이골 사이에 문질러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찢고 들어올 것 같은 기세에 겁이 나는데, 본능은 그를 환영하듯 엉덩이를 꽉 조였다.
“자, 잠깐!”
굵은 좆을 내 샅에 문지르며 달라붙는 남자의 골반을 밀어냈다. 그러나 밀어낼수록 더 몸을 붙이며 남자가 내 어깨 위에 턱을 기댔다. 서늘한 손이 반쯤 선 내 성기를 감싸 쥔다.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으흣.”
“나 다 알고 있어요. 당신도 원했잖아요.”
그간의 내 추태를 전부 기억하고 있단 말이었다. 뒤늦게 수치심이 솟구쳤으나 상대는 내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남자였다.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고 허물어뜨리고 싶은 이성을 간신히 붙든 이유는 단순했다. 윤활제도, 콘돔도 없이 저 큰 걸 넣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인간의 구색을 갖추려 성기를 달고 있는 것 같던 남자가 시간을 들여 넓히는 법을 알고 있을 리도 없었다.
“지금, 지금은 안 돼. 다음에 하자. 응?”
언제나처럼 얌전히 내 말을 따를 줄 알았던 남자가 떨어지기는커녕 숫제 추삽질을 하듯 허리를 흔들며 축축한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비벼 댔다.
“아… 하, 하지 마.”
노골적인 자극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왜 지금은 안 돼요?”
애타는 목소리에 아쉬운 한숨이 터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미친 듯이 하고 싶었다.
“하아… 적실 게, 흣… 없어.”
“아…….”
알아들은 걸까? 미묘하게 탄식한 남자가 드디어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안도와 함께 긴장이 풀려 신발장 위에 상체를 늘어뜨렸다. 가뜩이나 피곤한 몸에서 기운이 쑥 빠졌다. 그런데 등 뒤에 있는 남자의 기척이 여전했다. 불안감에 돌아보려는 순간, 허리를 뒤로 잡아당기는 힘과 함께 엎어지며 손등에 이마를 박았다.
“아!”
강제로 엉덩이를 쭉 뺀 자세가 된 내 시야에 아무렇게나 벗겨져 발목에 걸린 바지와 남자의 두 무릎이 보였다. 벌어진 두 발 사이에 꿇어앉은 남자의 무릎 때문에 다리를 오므릴 수가 없었다. 훤히 드러나 있을 곳을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 뭐 하려고! 아읏.”
커다란 손에 쥐어 잡힌 엉덩이가 벌어지고 뜨거운 감촉이 회음부와 구멍 사이를 길게 핥아 올린다. 꼬리뼈를 타고 올라온 적나라한 감촉이 뒤통수를 때렸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외설적인 애무에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 버려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덜덜 떨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날렵한 콧대가 엉덩이에 마구 뭉개지는 느낌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 예쁘고 순진한 얼굴로 지금… 거기를…….
“하, 하으…….”
물컹한 혀가 주름을 벌리고 파고들자 반사적으로 하반신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신발장 상판에 이마를 비비며 남자가 주는 쾌락에 연약한 해초처럼 휩쓸렸다. 이대로 뿌리째 뽑혀 버린대도 상관없을 만큼 좋았다. 녹진해진 구멍 안으로 쑤욱 긴 손가락이 쑤시고 들어왔다.
“아흑…!”
오래간만에 느끼는 삽입감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잔뜩 움츠러든 내벽을 꾹꾹 밀어 넓힐 때마다 내 몸은 감전된 것처럼 파드득 튀었다.
“이러면 돼요?”
될까? 모르겠다. 엉덩이를 내민 꼴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배꼽에 닿을 듯 팽팽하게 발기한 내 성기 끝에서 투명한 선액이 주르륵 바닥으로 길게 늘어지며 떨어졌다. 그사이 남자는 손가락을 두 개로 늘렸다.
“아, 아! 응….”
기분 좋은 압박감에 절로 앓는 신음이 나왔다. 나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쥐고 문질렀다. 세 번째 손가락이 조금 급하게 구멍을 벌리며 진입했다.
“하으윽!”
뻐근한 통증마저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몸이 제멋대로 진저리를 쳐 댔다. 처음에 비해 성의 없이 구멍을 넓히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가고 몸을 일으킨 남자가 허물어지는 내 몸을 뒤에서 받쳐 안았다.
“이제 해도 되죠?”
대답 대신 옅게 신음하며 가슴을 단단히 감싼 남자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두툼한 귀두가 구멍 위를 짓눌렀다. 그러나 버거운 크기의 성기는 쉽게 진입하지 못하고 위아래로 몇 번 미끄러졌다. 나와 남자의 입에서 안타까운 숨소리만 오고 갔다.
“좀, 더 벌려요.”
“아!”
남자가 내 등을 눌러 엎드리게 하더니 다시 아까처럼 다리를 강제로 벌리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룩한 귀두가 가차 없이 구멍 안으로 쑤셔 박혔다. 그리고는 흉흉한 크기의 기둥이 미끄러지듯 쑤욱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장이 밀리는 무서운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혔다. 단연코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아, 아아…! 천, 천천히.”
남자의 복부를 밀어내려는 내 노력은 거품처럼 부질없었다. 남자는 자비 없이 그 거대한 성기를 욱여넣었다. 만족감이 묻어나는 낮고 긴 탄식이 등 뒤에서 흘렀다. 반면 내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내장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서 숨을 쉬기만 해도 온 내벽이 짓눌렸다. 그런 사정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뻣뻣이 굳어 있는 내 상체를 확 끌어당겨 일으켰다.
“아… 하으윽!”
단단히 틀어박힌 기둥의 각도가 비틀리고 접합부가 눌리자 안쪽에서부터 통증이 찌르르 번졌다. 그냥 넣기만 해도 이렇게나 견디기 힘든데 남자가 본격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대면 내 몸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두려움이 섞인 숨만 내쉬다가 별안간 아랫배에 느껴지는 서늘한 손길에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초점이 돌아오고 눈앞에 보인 건 거울, 정확히는 거울 속에 비친 나와 남자의 상반신이었다. 거울 속 나는 남자에게 꽁꽁 묶여 있었다. 남자는 내 아랫배를 커다란 손으로 뭉근하게 문질렀다. 배꼽 아래가 어쩐지 조금 볼록했다. 그것이 남자의 거대한 성기 끝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봐요. 들어갔어요.”
기이한 광경에 아랫배를 더듬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흔들어 댔다.
“흐으… 만지지 마.”
흥분으로 사리 분별이 어려웠다. 자칫 힘주어 눌렀다간 그것이 배를 뚫고 나올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상상을 했다. 공포심으로 긴장한 내벽이 조여들자 남자가 거칠게 목을 울렸다. 어딘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별개로 남자가 흥분할수록 내 흥분도 고조되었다. 남자가 내 귀와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며 퍽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아기 낳아 줄 거죠? 대답해 줘요. 빨리.”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낳을게…. 흣, 낳아 주, 으읏, 줄게.”
“약속이에요.”
다짐을 받은 남자가 허리를 뒤로 빼 박혀 있던 성기를 주욱 뽑아냈다. 내벽을 주르륵 긁어내는 감각에 헉하고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물 밖에 내던져진 붕어처럼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내 몸을 꽉 옭아맨 채로 남자가 다시 허리를 밀었고 안쪽 깊숙한 곳까지 퍽 꿰뚫렸다.
“헉.”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뒷덜미가 눌리며 허리가 앞으로 접혔다. 남자는 나를 신발장 위에 엎어 놓고 무자비하게 허리를 찧어 댔다. 쿵쿵 망치질 소리가 나는 하반신이 부서질 듯 아팠다.
“윽, 흐윽…!”
남자의 섹스는 과격했다. 내가 지금 섹스를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나를 범하고 있는 게 내가 아는 남자이긴 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흥분은 차곡차곡 쌓여 갔다. 내 허리를 꽉 움켜쥔 악력과 엉덩이에 부딪히는 단단한 하복부, 평소와 다르게 거칠어진 남자의 숨소리만으로도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아….”
말 한마디 없이 온몸으로 나를 짓누르고 기계처럼 박아 대던 남자가 짧게 신음하며 깊이 찔러 들었다. 등에 달라붙은 남자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고 허리를 쥔 손에 힘이 풀려 남자가 내 안에 사정했다는 걸 알았다. 들어올 때보다 더 축축해진 성기는 수월하게 빠져나갔다. 뒤가 뻥 뚫린 것 같았다.
“흐으….”
아무렇게나 벗겨진 옷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현관 타일 위에 주저앉은 내 꼴은 거의 넝마였다. 몰아치는 섹스에 난도질당한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폭풍을 맞고 모르는 곳에 떠밀려 온 기분이었다. 벌어진 구멍에서 남자의 정액이 흘러나오는 느낌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무릎을 굽힌 남자가 눈을 맞춰 왔다. 몽롱하게 풀린 눈에 여운이 가득했다. 남자는 먹이를 조르는 새처럼 내 입술에 마구 입술을 부벼 댔다.
“한 번 더요.”
“으, 읍….”
겨드랑이 아래로 서슴없이 들어오는 손길에 몸이 떨렸다. 아까 전 자세 그대로 나를 돌려세우려는 남자를 급히 만류했다.
“침대, 침대로 가자.”
현관에서 난잡하게 붙어먹은 것도 모자라 나와 남자는 옷가지를 모두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서 다시 엉켜 들었다. 똑바로 누우려는 나를 남자는 뒤집어 눕혔다. 내 엉덩이를 잡아 벌리더니 곧바로 구멍에 귀두를 맞추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두 번째 진입이라고 쉽지는 않았다. 굵은 귀두가 뜨끈해진 구멍을 열고 단번에 내벽을 짓쳐 깊이 파고드는 바람에 이불을 물어뜯었다.
“큭, 하아… 아, 아…….”
거친 신음이 연신 흘렀다. 투박한 허리짓에 성감은 고통의 언저리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했다. 더는 들어갈 곳이 없을 때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음에도 남자의 하복부는 완전히 내 몸과 닿지 못했다. 까닥했다간 무언가 잘못될 것처럼 배 속이 길게 뚫린 듯한 느낌에 꼼짝도 못 하고 헉헉거리며 불안한 숨만 내쉬었다.
“후… 너무… 좋아요.”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남자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아흐…!”
“하아…….”
반쯤 빠져나갔던 기둥이 다시 박혔다. 불편한 장소에서 불편한 자세로 갑자기 맞아야 했던 첫 번째와는 달랐다. 거대한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울렸다. 성기의 왕복 반경을 조금씩 넓히던 남자는 이윽고 쑤걱쑤걱 소리가 날 정도로 길게 빼냈다가 끝까지 처박기를 반복했다.
“하으… 읏! 흑, 아흐읏…!”
그 성의 없는 움직임에도 허리가 들썩이고 목이 뒤로 젖혀졌다. 발바닥부터 서서히 뜨끈한 작열감이 찾아왔다. 절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시트를 그러쥐었다. 남자의 굵은 성기가 콱콱 내벽을 짓찧으며 몸 안에 갇혀 있는 쾌락을 쉼 없이 두드려 깨웠다. 말초신경부터 불붙듯 시작된 작열감이 온몸으로 퍼지자 전신의 근육이 수축하며 바들바들 떨렸다.
“나, 하으, 나와… 아, 아아!”
“큿…….”
남자가 좁아지는 내벽을 뚫고 퍽 소리가 나도록 성기를 처박았다. 내벽이 수축해 몸 안에 박힌 성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커도 너무 컸다. 그런데도 남자는 더 안으로 파고들 심산인지 허리를 밀어붙이며 내 엉덩이를 짓뭉갰다. 뜨겁게 달궈진 귀두와 울퉁불퉁한 기둥이 예민해진 속살을 자비 없이 자극했다.
“흐, 앗…!”
배 안쪽에서 시작된 절정이 온몸을 휩쓰는 건 순식간이었다. 성기에 직접적 자극 없이 사정하는 낯설고 잔인한 쾌감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그러나 허리를 치대는 남자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시트를 쥐어뜯던 손을 뒤로 뻗어 남자의 무릎을 잡았다.
“자, 잠, 우, 움직… 흐윽… 아흐…….”
한계를 넘은 쾌감은 고문과 같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계속해서 가해지는 자극을 피해 남자의 무릎을 밀고 허리를 뒤틀며 벗어나려 했다. 아주 조금 성기가 빠지자 남자의 손이 내 허리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무른 살 속에 푹 꽂힌 성기가 경련하는 내벽을 쓸어 대며 다시 움직였다.
“그만, 아… 아아, 그만!”
정말 잠깐만이라도 멈춰 줬으면 했다. 이젠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사정을 했는데도 절정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남자에게 멈춰 달라 빌었다.
“멈, 흑, 멈춰…. 아! 제바알….”
“하아… 우는 거예요?”
남자가 추삽질을 멈춘 틈에 허리를 감고 있는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빼 줘. 제발, 빼 줘.”
박혀 있을 뿐인데 저릿저릿한 감각이 가시질 않았다. 시야는 이미 눈물로 뿌옜다. 이런 자세는 싫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후우… 지금…?”
그러나 남자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 되물었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벌린 입술에서 당혹스러운 숨소리만 흘렀다. 그사이 남자가 내 다리를 더 넓게 벌리더니 아예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접합부가 눌리며 삽입이 깊어졌다.
“아흐으…….”
나를 가두려는 듯 남자의 양팔이 머리 옆에 기둥처럼 꽂혔다.
“지금은 안 돼요.”
지금은 안 된다니.
“싸고 나면 빼 줄게요.”
말의 내용과 다르게 다정하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인 남자는 허리를 위에서 아래로 찍듯이 난폭하게 쑤셔 넣기 시작했다. 잠깐만 빼 달라는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사정이라는 목적을 한시 빨리 이루려는 것 같았다.
“아, 아아! 우윽!”
정신없이 신음하며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모래알처럼 끝없는 절정에 휩쓸렸다. 하반신은 남자의 거대한 성기에, 상반신은 남자의 굵은 팔 안에 갇혀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익사하지 않으려면 물살을 거슬러선 안 됐다. 이젠 모르겠다. 낯선 쾌락에 완전히 몸을 맡기고 덩달아 허리를 들썩였다.
인간이 아닌 남자가 나와 똑같이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흣… 아, 기분, 기분 좋아?”
“좋아요. 하아… 기분 좋아요.”
등 뒤에 닿는 피부의 감촉, 귓가에 쏟아지는 야릇한 숨소리, 더 깊은 곳에 닿고 싶어 하는 남자의 하반신, 모든 것이 인간의 정사와 똑같다.
가늘게 이어지던 의심과 불안을 끊고 기쁨과 쾌락에 몸을 내맡겼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기에.
“얼마나…… 얼마나 좋아? 응?”
내 끈질긴 물음에 답하는 대신 남자가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목을 긁는 신음을 내며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구멍에서 정액이 튀고 볼기 부위가 얼얼해졌다. 거대한 성기가 빠르게 내벽을 할퀴는 감각이 아프면서도 눈이 뒤집힐 만큼 강렬한 쾌감을 가져왔다. 아무렇게나 벌어져 흔들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발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시트를 밀어냈다. 짙게, 뜨겁게 몸을 지배하는 쾌감의 반동으로 나는 울부짖으며 손톱을 세워 시트를 쥐어뜯었다. 자지러지는 신음이 내 목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흐으읏…!”
“크, 흣!”
내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사정한 남자가 성기를 깊숙이 파묻고 몸을 떨었다. 나 역시 사정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반신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시트를 푹 적시며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기력도 없었다. 몸이 수면 위를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당신이, 하아…….”
흥분에 잠긴 남자의 목소리에 구멍이 멋대로 움찔댄다.
“내 머리를 뜯어 먹어도 모를 만큼 좋았어요.”
한발 늦은 대답이 상상을 뛰어넘어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내게 머리가 뜯어 먹혀도 좋아?
소름 끼치면서도 엉뚱한 대답에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마주한 남자의 얼굴도 엉망진창이었다. 인형처럼 얌전하기만 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풀린 눈매와 벌어진 입술이 지극히 천박한 인간스러웠다. 식욕이 강한 남자이니 극단적인 비유법에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남자의 머리를 뜯어 먹을 일은 없을 테니까.
“읏.”
채 다물어지지 않는 구멍에서 비어져 나온 정액이 찐득하게 흘러내렸다.
“아… 흘러나와요.”
남자가 정액을 쓸어 다시 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다. 순진한 건지, 아닌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까워?”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눈매가 여전히 몽롱했다. 남자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 아직도 발기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남자의 성기를 문질러 세웠다. 마찰로 벌겋게 달아오른 표피를 자극하는 손길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도 손안의 기둥은 단단해졌다.
괴물은 괴물이네.
무심코 든 생각이 우스웠다.
“뭐가 걱정이야. 내가 임신할 때까지 계속 안에 싸면 되지.”
“임신……할 때까지요?”
남자는 내 말에 감동이라도 한 눈치였다. 가벼이 입에 담은 임신이란 단어에 어쩐지 기묘한 흥분이 피어났다. 나에게 이런 변태적인 성향이 있었다니 의외였다.
“그래, 임신할 때까지.”
확답을 들은 남자가 눈을 빛내며 내 허리를 꽉 힘주어 쥔다. 선명하게 핏줄이 선 남자의 팔뚝을 보자 분명 내 구멍을 가득 채워 줄 거란 기대에 숨이 다시금 가빠져 왔다.
∞ ∞ ∞
사무실 의자에 앉으며 들키지 않게 입 안쪽을 깨물었다. 도중에 까무룩 정신을 잃듯 잠이 든 터라 몇 시까지 해 댔는지는 몰라도 아직 완전히 다물리지 않은 뒷구멍이 얼얼했다. 아침에 찬물을 끼얹어 몸은 식었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미열이 감돌았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미친 듯이 박히고, 남자가 사정하는 잠깐 사이에 숨을 돌린 다음 다시 박히고의 반복이었다. 끝에 가서는 내 건 서지도 않았는데 몇 번이나 오르가슴에 다다라서 소변 같은 걸 지린 것 같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민망할 만큼, 그야말로 짐승같이 해 댔다.
더러워진 침대도 정리하지 못하고 남자와 함께 샤워했다. 샤워기 아래에서도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남자의 성기가 처음처럼 딱딱해서 조금 질린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남자는 무슨 강박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꼭 후배위로만 삽입했다.
그중에서도 날 제일 소름 끼치게 한 건 넘치도록 싸 댄 자신의 흔적을 씻어 내지 못하게 막던 남자였다. 정액을 빼내려고 뒤로 가져간 내 손을 붙잡은 남자의 얼굴이 차가웠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 이거 안 빼내면 나중에…….」
「그만. 나랑 약속했잖아요.」
별생각 없이 이유를 가르쳐 주려던 나는 묘하게 강압적인 태도에 결국 손을 내려야만 했다. 아직 뭔가 남아 있는 것 같은 배를 감싸 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대로 뒀다간 고생할 게 뻔한데…….
지금이라도 뒤처리를 하려고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깜짝 놀란 표정의 예 주임과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대리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아, 네. 덕분에.”
지나치려는데 예 주임이 “어?” 하고 불길한 소리를 냈다. 그 자리에 멈춰 서 예 주임의 눈치를 살폈다. 미묘한 표정으로 예 주임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뭐……가요?”
“대리님.”
이유도 모르고 뒷덜미에 식은땀부터 흘렀다. 불안함을 숨기고 웃었다.
뭔가 눈치챈 걸까?
“향수 뿌리셨어요?”
“향수…요? 아뇨.”
내 대답에 합, 입을 다문 예 주임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예 주임은 후다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셔츠 소매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아 봤다. 오늘 아침 새로 꺼내 입은 셔츠에서는 미미한 섬유 유연제 향기만 날 뿐이다. 아마도 사무실에 비치된 방향제 냄새가 바뀌었겠지.
별것도 아닌 일로 일일이 놀랐다가는 조만간 수명이 반으로 줄어들게 생겼다. 남자의 존재는 아무도 모른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 신경을 잠재우고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칸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가장 끝 칸으로 들어가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퉁퉁 부어 있는 뒤를 더듬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회사에서 뒤를 만지고 있다는 수치심도 잊고 소리 내 중얼거리고 말았다.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사정을 한 것이. 그런데 아무리 휘저어 봐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아직도 뜨끈한 안쪽에는 격렬한 관계의 흔적이 역력하건만 넘치도록 싸지른 정액은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애꿎은 구멍을 헤집어 아프기만 했다.
나중에 탈이라도 나면 골치 아픈데……. 그러나 애먼 엉덩이를 붙잡고 있어 봤자이니 그만 옷을 추슬렀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칸에서 나온 나는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기분만 찝찝해진 채로 손을 씻었다. 그때 화장실 밖에서 복도를 지나가는 여러 개의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래서 대리님한테 물어봤어?”
귀에 익은 목소리. 아마도 같은 사무실을 쓰는 여사원인 듯했다. 콸콸 쏟아지는 수전을 잠그자 주변이 조용해진다. 이어 예 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근데 향수는 안 뿌리셨대.”
“진짜? 그럼 뭐지?”
“향수가 아니라 다른 거 아닐까?”
“SNS에서 광고하는 페로몬 향수, 뭐 그런 건가?”
“대리님이 그런 걸? 그건 아닐 듯.”
“아아, 대리님 진짜 애인 생기신 건 아니겠지?”
“그니까, 요즘 분위기도 변하지 않았어? 좀…….”
조금씩 멀어지던 말소리가 거기서부터 흐려지더니 저들끼리 웃는 소리만 들렸다. 좀, 뭐? 가만히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거울을 봤다. 밤을 새운 티가 팍팍 나는 초췌한 사람이 서 있다.
말갛게 빛나는 남자와 다른, 질 나쁜 종이처럼 허옇기만 한 피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들킬까 봐 불안에 떠는 퀭한 눈.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웃는 얼굴을 해 봐도 볼품없었다. 노력해도 감출 수 없는 결핍의 냄새가 나기라도 하는 걸까.
만약 남자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나 같은 건…….
아니야. 고개를 흔들어 얼른 우울한 생각을 털었다. 쓸데없는 가정은 집어치우고 반대로 생각해 보자. 남자가 나를 만난 것은 남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행운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나만큼 남자를 이해해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 다 운명이야.”
운명. 듣기에 로맨틱하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넥타이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플라스틱 열쇠를 더듬었다. 거울 속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하게 웃고 있다.
∞ ∞ ∞
퇴근길에 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아르바이트생은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무관심이 오히려 고마웠다. CCTV 쪽으로는 얼굴을 돌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필요도 없는 생수나 껌 따위를 몇 개 고르고 그 사이에 콘돔 한 상자를 섞어 들었다. 가장 큰 사이즈를 고르긴 했는데, 남자의 크기에 가당키나 할지 모르겠다.
마침 계산 중이던 손님이 나가면서 계산대가 비었다. 매대를 빠져나와 빈 계산대로 향하던 중에 옆 매대에서 나오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쳤다.
“아!”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이 죄다 바닥에 떨어졌다.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몇 없는 시선이 쏠리자 식은땀이 났다. 나는 사과도 잊고 떨어뜨린 물건들을 급히 주웠다. 누군가 내 얼굴을 보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일 중요한 게 보이지 않았다.
“여기요.”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우락부락한 손이 내가 찾던 것을 턱 밑에 들이민다. 당황한 나는 애써 표정을 굳히고 쓸모없는 것들만 주워 든 채로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제 거 아닙니다.”
“그래요?”
기분 탓인지 되묻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필요도 없는 물건들만 구매해 급하게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완전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내가 왜 그랬지? 더 수상해 보였을까? 그나마 부딪친 사람이 남자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좀처럼 1층에 와 있는 일이 없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결국 콘돔을 못 샀다. 택배는 남자 때문에 이용하기가 꺼려졌다. 이젠 안에서 멋대로 문을 열 수 없으니 누군가 마주칠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없는 사이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어차피 당장은 삽입이 무리이기도 했고 그동안은 남자에게 색다른 것을 가르쳐 볼까 싶다. 남자는 뭐든 금방 배우니까.
슬며시 웃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편의점에서의 해프닝 때문에 귀가 시간이 평소보다 조금 늦어 버렸다. 칭얼거릴 남자를 생각하자 저절로 입꼬리가 솟았다.
“뭐 하고 있을까…, 나비는.”
홈 캠이라도 설치할까? 이왕이면 집 안 곳곳에…….
“고양이 키우시나.”
키가 큰 낯선 남자가 성큼 내 옆에 서며 중얼거렸다. 머릿속 생각을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란 나는 남자를 쳐다보았고 짧은 머리에 체격이 큰 남자는 아무 말도 한 적 없다는 양 주머니에 손을 꽂고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고 있었다. 뱀 문신이 새겨진 왼팔에 내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편의점 봉투가 걸려 있다. 나쁜 예감이 스쳤다.
아까 편의점에서 그 목소리였던가?
낯선 남자는 아연해진 날 스윽 돌아보더니 퍽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왠지 고양이 키울 것같이 생기셔서.”
투박한 검지가 자기 면상을 성의 없이 둥글게 젓는다.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사납게 찢어진 눈매가 샐쭉해졌다. 말문이 막힌 내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예?”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안 타요?”
내키지 않았지만 30층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 놈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남자는 뒤쪽 벽에 기댔다. 나는 최대한 떨어져 버튼이 있는 문 앞쪽으로 바싹 붙었다.
문이 닫히고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숨 막히는 정적에 갇혔다. 기분 나쁜 시선이 뒤통수에 달라붙는 것 같다. 내가 먼저 꼭대기인 30층을 눌렀다.
“아… 역시 위층 사는 형님이셨네.”
어깨 위로 불쑥 뻗어진 우락부락한 팔에 흠칫 놀랐다. 팔꿈치 아래부터 손목까지 뱀이 둘둘 말고 있는 억센 팔이 29층을 누른다.
저런 사람이 아래층에 살았나?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대꾸하거나 말거나 아래층 남자는 혼자서 대화를 이어 갔다.
“여기 산 지 얼마 안 됐어요. 한 3개월?”
“…….”
“생각보다 말이 없으시네.”
날 언제 봤다고? 놈은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투였다.
“아니면 숨기는 게 많아서 그런가.”
의미심장한 말에 뒤를 돌아보았고 샐쭉 웃는 아래층 남자의 표정을 보자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뱀 문신이 새겨진 손으로 까무잡잡한 턱을 쓸었다. 불쾌할 만큼 기세등등하고 여유로운 태도였다.
“내가 오며 가며 형님 애인 몇 번 본 적 있거든. 가끔 같이 담배도 피우는 사이였고.”
이어진 이야기가 너무도 뜻밖이었다.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래층 남자의 기분 나쁜 미소는 더 짙어졌다. 조금씩 거리를 좁힌 아래층 남자가 두 팔을 뻗어 내 뒤의 벽을 짚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무사히 벗어날지 막막했다.
“둘이 오래 만났다면서요. 그런 애인이 실종됐는데 고양이 생각이나 하고.”
아래층 남자는 어이없어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실수하지 않으려 정신을 붙들었다. 죽은 애인이 아래층 남자에게 어디까지 말한 건지는 몰라도 아래층 남자는 죽은 애인의 실종 사건에 관해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의심을 넘어 최악의 경우, 어쩌면 이미 경찰에게 죽은 애인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말했을 수도 있었다.
씨발. 예상치 못한 변수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래층 남자가 무언가로 내 볼을 톡톡 두드리며 내 의식을 제게로 돌렸다.
“그새 새 애인도 만드시고?”
히죽거리며 아까 떨어트린 콘돔 상자를 내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만약…… 나비의 존재까지 들켜 버린 거라면 정말로 위험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 안쪽이 뜨거워진다. 불안은 분노로 변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워-… 경찰한텐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 너무 날 세우지 마시고.”
딱 보기에도 질 나빠 보이는 인간이었다. 날 범인으로 몰 만한 정보를 가지고도 정말 경찰에게 흘리지 않았다면, 내게 돈을 뜯어낸다거나 하는 다른 목적이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일단 발뺌부터 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래층 남자의 얇은 입꼬리가 찢어진다.
“착각? 착각은 형님이 하는 것 같은데요. 난 그냥 이웃끼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요.”
잘 지내봐? 남의 눈치를 보는 일은 이제 사양이다. 아래층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돌덩이 같은 몸이 의외로 순순히 끌려왔다.
“헛소리 집어치워.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야. 그걸로 협박할 생각은 않는 게 좋아.”
진심이었다. 이미 놈은 남자의 먹이로 쓸 목록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으니까. 조금이라도 세상 공기를 더 마시고 싶다면 그만 나대는 편이 신상에 좋았다.
“근데 형님.”
거칠한 목소리가 쇠를 긁는 소음처럼 귀에 거슬렸다. 아래층 남자가 히죽거렸다.
“향기 좋다.”
아래층 남자가 멱살을 틀어쥔 내 손을 잡았다. 팔목에 새겨진 뱀이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에 소름이 돋았다.
“이 미친 새끼가!”
잡고 있던 멱살을 밀쳐 내려 하자 거구의 몸이 반대로 달려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요동쳤다. 체급 차이가 너무 컸다. 어느새 붙잡힌 두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벽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 안 놔?”
“왜요.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내가 그렇게 미친 새끼로 보여요? 여기 CCTV 다 있는데. 지금 경찰 오면 형님이 더 불리하지 않나?”
반박할 수 없는 말과 제대로 약점이 잡혀 버린 처지에 이가 갈렸다.
띵.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알림 음이 울리고 2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놈은 열리는 문을 힐끔 보고 아쉽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내가 뭘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또 봐?
“하.” 하고 조소하는 나를 보고 아래층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손을 놔준다. 그 얼굴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었으나 놈의 말대로 경찰이 오면 더 곤란한 쪽은 나였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아래층 남자가 기분 나쁘게 손을 흔들었다.
최대한 멀어지고 싶은 마음과 달리 30층까지는 금방이었다. 곧 문이 다시 열렸고 바로 아래층에서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치밀어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씨발…… 어떡하지.”
일단 아래층 새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뭐 하는 놈이며, 누구와 살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남자의 먹이로 먹여야겠다.
그래, 그게 제일 깔끔했다. 엉망으로 뭉쳐진 생각의 덩어리를 최악이자 최선의 선택지로 내팽개쳤다.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 막았다. 덜컹거리며 문이 도로 열리고 꺼져 있던 센서 등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복도를 밝힌다. 밝혀진 공간은 새삼 빈틈투성이였다. 아래위로 뚫린 계단과 버튼만 누르면 군말 없이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까지…….
문 하나 잠가 놓고 잘 숨겨 놨다며 뿌듯해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후우…….”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으로 감정을 갈무리하고 문을 열었다.
“왔어요?”
남자까지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나 그랬듯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보니 신경줄이 느슨해졌다. 나는 남자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품을 파고들자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남자의 체취와 서늘한 체온에 마구 요동치던 기분이 가라앉는다.
“기다렸어요.”
언제든 내게 내어 주는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도 평생 너를 만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늦어서 미안해.”
“…….”
그런데 사근사근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적막한 분위기가 이상해서 시선을 들어 보니 날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왜 이러는지 몰라 빤히 바라보자 뒤늦게 웃는 얼굴을 한다. 하지만 검은 눈동자에는 채 벗겨 내지 못한 냉기가 스며 있었다.
백치일 적의 멍한 무표정과는 다른, 차가운 표정이 뇌리에 박혀 어른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전에 없이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남자와 나는 서로를 쳐다봤다.
“뭐 잘못됐어?”
“뭐 하고 왔어요?”
동시에 나온 말이 허공에서 엉켰다.
남자의 질문은 뜬금없는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꺼림칙한 위화감이 들었다. 마치 나를 추궁하는 투였다.
“대답해요.”
“무슨…….”
“누구랑 뭐 하고 왔는지.”
“그야… 회사에…….”
남자의 얼굴에 남아 있던 희미한 미소가 차츰차츰 사라졌다. 완전한 무표정에 그때까지도 달라붙어 있던 남자에게서 몸을 뗐다. 한 걸음 물러나는 내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어색하고도 습관적인 미소였다.
“누구라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비야…….”
“당신한테서 다른 남자 냄새가 나요.”
“냄새?”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검은 눈동자를 내리깐 남자는 긴 날숨만 흘렸다. 한숨이라기에는 차갑고 묵직해서 나는 정말 죄를 지은 것처럼 긴장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남자가 내 귓가에 또박또박 읊조렸다.
“그래요. 내 냄새를 잔뜩 묻혀 놨는데 다른 놈 냄새가 나잖아요.”
낯선 말투에 몸이 경직됐다. 연이어 오늘 겪었던 의문의 조각들이 빠르게 하나로 맞춰져 갔다. 설마 하는 의문은 남자에게서 당연하게 풍기는 체취로 인해 확신으로 돌변했다.
남자와 몸을 섞은 뒤 내게 남자의 냄새가 배어 버린 것이다. 회사에서 향수니 뭐니 해 댄 것도, 아까 아래층 놈이 냄새가 좋다고 떠들어 댄 것도.
“하….”
머리꼭지까지 열이 뻗쳤다. 잠깐이나마 좋아졌던 기분이 손쓸 도리 없이 더러워졌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남자의 모습을 숨길 수는 있어도 냄새까지는 숨기지 못한 거다. 쓴 물처럼 역류하는 감정을 억누르는데 남자가 내 어깨를 쥐었다.
“왜 대답 못 해요?”
상처받은 것처럼 눈썹 끝을 떨어뜨린 얼굴이 가증스럽기만 했다. 저 순진한 얼굴로 나 모르게 개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차가워진다. 남자의 팔을 세게 쳐 냈다. 거칠게 내쳐진 자기 손을 남자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네가 그런 거야? 왜 그따위 짓을…….”
따져 물었으나 사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믿었던 남자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비웃음이 샜다.
“여자고 남자고 네 냄새에 홀려서 정신 못 차리더라.”
남자가 괴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날 만난 것이 남자에겐 행운이라고 단정 지었다. 전부 등신 같은 내 오산인 줄도 모르고 그것만으로 남자가 내 것이라고 좋아했다니.
이미 숱하게 탓해 온 자신의 안일함을 제쳐 두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단 얼굴이 여전히 예뻤다. 저 얼굴이 문제다. 그렇게 보면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로는 부족해서 그랬어? 갇혀 있으니까 이렇게라도 다른 사람 끌어들여서 떠나려고?”
남자를 찌르려고 내뱉은 말이건만 칼에 찔린 것처럼 아픈 건 나였다. 남자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를 거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속인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누구나 탐낼 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제 갈증을 채우기 급급한 나 따위 언제든 떠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뿌려 주는 수분에 의지해 살아가야만 하는 식물 같은 내 처지가 새삼 뚜렷해졌다. 꽉 다문 턱을 떨며 변명도 하지 않는 남자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남자는 생각에 빠진 듯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당신이잖아.”
“뭐? 내가 언제…….”
“다른 사람 냄새를 묻혀 오는 건.”
나에게 박힌 검은 눈동자가 전에 없는 노기를 띠었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나는 그제야 아까부터 남자가 말하는 다른 사람의 냄새가 무엇인지 짐작했다.
조금 전 아래층 놈과 몸싸움을 했던 그 잠깐의 접촉을 말하는 건가?
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남자의 미간이 깊게 팼다. 억울한 오해였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널 두고 그런 놈이랑!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풀고자 입을 열었으나 남자가 한발 빨랐다.
“날 가둬 두고 속이고 있는 건 당신 아니에요?”
정곡을 찔린 나는 입술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왜…… 왜 날 그렇게 봐?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비겁한 인간일 뿐이었고, 죄를 들춰진 인간이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알량한 방어 기제가 발동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손바닥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티 없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기 괴로웠다.
널 위해서 내가 어떤 짓까지 했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씨발,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데. 별 같잖은 새끼한테 말도 안 되는 협박이나 당하고. 간신히 버텨 낸 인생이 누구 때문에 완전히 꼬이게 생겼는데!
뜨거워진 머릿속이 기름을 부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짝!
파열음과 함께 손바닥을 타고 날카로운 열감이 퍼졌다. 어느샌가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여 있었다.
내가…… 지금 때린 건가?
언제부터 거칠어졌는지 모를 숨을 토하며 아릿한 손바닥을 슬며시 말아 쥐었다. 정적 속에서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돌아간 고개 그대로 손을 들어 제 뺨을 더듬거렸다. 나처럼 그 역시 맞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발갛게 부어오른 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 미안해. 그러려던 게 아니라, 나는…….”
뒤늦게 내뱉어진 변명이 나를 괴롭히던 이들과 똑같아 소름이 끼쳤다.
왜지. 정작 날 괴롭힌 이들에게는 제대로 저항 한번 못 했으면서. 왜 내가 없으면 안 되는 남자에게는 이렇게 쉽게 화를 낼 수 있는 걸까.
비겁한 자신이 구역질 날 만큼 역겨웠다.
“그럼 증명해 줄 수 있어요?”
물기 어린 눈이 날 시험하는 것처럼 빤히 본다.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줘요.”
“어, 어떻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고민은 짧았다. 멍청하게 서 있던 난, 마치 그렇게 훈련받은 개처럼 남자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자꾸 뻣뻣해지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냉한 얼굴을 보니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면바지의 허릿단을 잡자 익숙한 비참함이 차오른다. 죽은 애인을 붙잡으려 나는 이런 식으로 나를 바닥에 처박으며 관계를 이어 왔다. 이게 정답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내가 아는 답은 이것뿐이다.
남자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잡아 내렸다. 발기하지 않은 거대한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밤에는 느끼지 못한 위압감이 결심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더 참기 힘든 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정적이었다. 내게 실망해 매몰차게 돌아설 남자의 뒷모습에 떠밀려 나는 남자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겨우 귀두를 삼켰을 뿐인데 입안의 절반이 찼다. 막다른 벽처럼 서 있는 남자의 허벅지를 붙잡고 그저 고개를 더 파묻는 데 집중했다. 간신히 입안 가득 삼켰을 때는 혀가 움직일 공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우, 흐….”
고인 타액이 넘어가며 목구멍이 조여들자 손바닥 아래에 허벅지 근육이 뚜렷하게 갈라졌다. 내가 고른 답이 맞았을까. 구역질을 참으며 조금씩 단단해지는 성기를 목구멍 안쪽으로 더, 더 깊이 삼켰다.
“하아…….”
만족스러운 숨을 흘린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매만졌다. 쓰다듬으려고 한다기보단 본능에 겨운 손짓이었지만 그 접촉마저 기꺼워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대신해 성심성의껏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거대한 귀두가 목젖을 찌르며 목구멍으로 미끄러질 때마다 흡사 구토하는 소리가 이어졌으나 개의치 않고 스스로를 고문하듯 움직였다.
기둥을 더듬어 채 입에 담지 못한 부분을 가늠했다. 겨우 절반. 발기한 성기의 남은 부분이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미 턱은 한계까지 벌어져 뻐근하고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단단해진 살덩이가 입 안에서 크기를 더 키운다. 남자의 좆은 끝을 모르고 커졌다.
“우으…….”
경악할 만한 크기에 괴로운데 짓눌린 혀를 비집고 신음이 흘렀다. 입속에 퍼지는 짙은 남자의 냄새에 발가락이 안쪽으로 곱아들고 허리가 움찔거렸다.
“아… 좋아요.”
남자의 숨이 가빠졌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목구멍을 찌르는 성기도 흉포하게 끄떡거렸다. 나는 남자의 정액을 기꺼이 삼켜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거친 손길로 내 뒷머리를 잡아챘다.
“악!”
비명을 내지른 몸이 차게 굳었다. 폭력을 예감한 몸에서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었다. 그런데 손은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화가 났나? 아니, 지나치게 흥분한 표정이었다.
“안에 쌀래요.”
남자의 통보에 아연실색했다. 새벽까지 혹사당한 구멍으로는 무리였다. 그러나 틀어진 방향으로 한번 물꼬를 튼 물길은 바로 잡기 어려웠다. 상황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입으로 해 줄게. 입에다 해.”
얼른 남자의 성기를 다시 쥐었다. 육중한 기둥은 핏대를 잔뜩 세우고도 꼿꼿이 기립하지 못하고 처졌다.
“그렇게는 못 해요.”
한 치의 고민 없이 거절한 남자가 무릎을 굽혔다. 다가오는 남자의 어깨를 밀어내며 저지했다.
“잠깐만. 나 뒤는 아직. 윽.”
막무가내로 어깨를 밀어 눕히는 힘에 버텨 보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소용없었다. 장소는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관 앞. 내게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리려고 했다. 이렇게 두 번째를 맞이할 줄은 몰랐기에 두 손으로 바지춤을 붙잡은 채 소리쳤다.
“그만해! 안 된다고 했잖아!”
“증명 안 해 줄 거예요?”
그렇게 묻는 남자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분노나 원망이 아닌 간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건…….”
죄 없는 아랫입술만 짓이길 뿐 나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는 나에게서 애정과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보였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몸으로 이 방식은 무리였다.
이제 와서 다른 걸로 증명하겠다고 해도 변명처럼 들리겠지.
조심스럽게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멋대로 밀어붙여 놓을 땐 언제고 남자는 애가 닳은 얼굴로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거절해서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언제나 처음이 중요했다. 비루한 인생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번 선을 넘으면 넘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죽은 애인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지금이라면……. 기회를 보다가 남자의 밑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틀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커다란 손이 내 뒷덜미를 붙잡더니 날개 뼈 사이로 말뚝 같은 것이 콱 박히는 충격이 전해졌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기침을 토했다.
“지금 도망치는 거예요?”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묵직한 바위에 깔린 것처럼 마룻바닥과 남자의 손바닥 사이에 끼인 폐가 짓눌려 숨이 막혔다. 내가 끙끙거리든 말든 남자가 내 하의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옷감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얇은 여름용 팬츠가 손쉽게 찢겨 나갔다.
애지중지 키운 개에게 물린 듯한 배신감에 온몸을 버둥대며 악을 썼다.
“놔! 그만해!”
“약속 기억 안 나요?”
씨발. 이런 좆같은 약속을 한 기억은 없다.
“임신할 때까지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흥분에 겨워 지껄인 저질스러운 농담이 지금 언급되는 이유도 모르겠다.
“안에 쌀 거예요. 당신이 임신할 때까지.”
“아!”
긴 손가락이 건조한 입구를 거칠게 파고들었다. 부어 있는 내벽이 쓰리다 못해 화끈거렸다. 구멍이 찢기는 건 상관없었지만 남자와의 관계가 이대로 망가지는 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꺼내 남자를 타일렀다.
“나비야. 그만해. 응? 부탁이야.”
퉁퉁 부은 내벽을 쑤셔 대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싫은 게 아니라 아파. 아파서 그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비틀어 가며 애원했지만, 등을 누르고 있는 손 때문에 남자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먹혔나?
“조금만 참아요. 우리 아기를 생각해서.”
“아, 아, 아!”
남자의 성기가 날 배려한 듯 아주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헐어 버린 여린 속살은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뒤로 손을 뻗어 필사적으로 남자를 밀어냈지만,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끝까지. 다정하고 무자비하게 박힌 거대한 살 기둥에 눈앞이 흐려지고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흔들리면서 거듭 고개를 흔들었다.
“아파, 아파. 제발.”
“쉬….”
남자가 등 뒤로 내 두 손을 한데 모아 잡으며 나를 달랬다.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두 손의 자유마저 빼앗기고 바닥에 뺨을 대고 엎어졌다.
이 은혜도 모르는 개자식! 욕이 튀어 나가려던 입에서 억 하고 비명이 터졌다. 남자가 서서히 허리를 뒤로 물리자 내장이 딸려 나가는 고통이 덮쳐든 탓이다.
“아, 아윽. 씨…… 흑.”
“힘… 빼요.”
나는 고통에 이를 가는데 가쁜 숨소리가 섞인 남자의 목소리는 쾌락에 흠뻑 젖어 있었다.
“미, 미친…… 헉, 크읏.”
기절하고 싶을 만큼 아팠다.
“많이 아파요? 어떡하지…….”
입으로는 금방이라도 빼 줄 것처럼 말하면서도 반쯤 걸친 좆은 구멍을 틀어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파서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섞였다.
“하아…….”
참아 보려는 듯한 숨을 길게 내쉬고 남자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끝까지 처박은 좆을 빼 주진 않았다. 대신 넓게 펼쳐진 두 손바닥이 내 머리 양옆에 박혔다. 등 뒤로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뾰족한 코끝을 땀에 젖은 내 뒷덜미에 뭉개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흣.”
딱 짐승이나 할 법한 변태적인 행위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한 희열에 젖어 입술을 말아 물고 숨을 참았다. 날카로운 코끝으로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노골적으로 내 냄새를 빨아들이던 남자가 “아.” 탄식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하으… 윽.”
남자가 허리를 들어 좆을 쭉 뽑아냈다. 드디어 빼 주려나 싶었다.
“나 알고 있어요. 어디를 찔러 주면 당신이 좋아하는지.”
“아, 아니, 아니야!”
세차게 고개를 저으면서 본능적으로 닥쳐올 행위를 버티려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단번에 푹 찔러 넣은 성기의 귀두가 내벽의 한 지점에 정확히 처박혔다. 콱 짓눌린 자극점에서부터 말초신경까지 퍼지는 강제적인 쾌감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하으읏…!”
진저리를 치며 손톱으로 딱딱한 바닥을 긁어 댔다. 남자는 무른 속살을 물어뜯듯 거대한 기둥으로 쉼 없이 짓이겨 댔다. 분명 아픈 와중에도 뜨거운 기둥이 내벽에 미끄러질 때마다 몸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억지로 당하면서도 느끼는 내 몸이 낯설었다.
“아, 아, 흐윽.”
나는 조금씩 달아오르는 뺨을 바닥에 비비며 열에 겨워 헐떡였다. 강제로 벌어진 구멍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짓눌린 성기가 발기했다. 이상했다. 이게 정상인 걸까?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 흐느낌에 웃음이 섞여 나왔다. 내 기괴한 웃음소리를 들은 남자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고통과 쾌락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성감이 멀어지자 애간장이 탔다. 아아, 안 돼.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 흐읏, 더, 계속……해. 아, 아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남자를 재촉했다.
“봐요. 기분 좋아졌죠?”
남자가 귓가에 흘린 낮은 웃음소리가 고막을 녹이고 몸을 적신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목에 매달려 키스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나를 돌려 눕히는 대신 내 허리를 잡아 세웠다. 급하게 바닥을 짚었지만 치대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고꾸라졌다. 남자의 손이 엉덩이만 바짝 치켜든 내 배를 덮었다.
“여기…… 하아, 느껴져요?”
넓은 손바닥이 뱃가죽을 뚫고 나올 것처럼 들쑤시는 자신의 성기를 더듬는다. 그 느낌이 너무도 섬뜩해서 고개를 저으며 신음했다. 대답할 여력 따윈 없었다. 그저 고통과 쾌락이 뒤섞인 지독한 늪에 빠져 가라앉지 않으려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여기에 후…… 우리 아기가 생기는 거예요.”
“흐윽. 빨리, 아아… 빨리…….”
한시라도 빨리 사정해 이 난폭한 감각을 끝내 주길 바랐다. 남자가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육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몸이 바닥에 완전히 쓰려졌으나 나를 짓뭉갠 남자는 움직임을 멈출 줄 몰랐다. 남자가 허리를 내리찍을 때마다 바닥에 닿은 뼈마디가 부러질 듯 아팠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허리를 안은 남자의 팔이 점차 조여들었다.
“허억…!”
내장이 죄 조여지는 압박감에 숨이 막히고 무서웠다. 동시에 지독한 절정이 나를 덮쳤다. 그러니까…… 정말 죽을 만큼 좋았다.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어요.”
“하으윽…!”
눈앞을 하얗게 물들이는 절정이 배 속을 뚫는 남자의 성기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의 절절한 고백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제 죄다 쏟아 낸 탓에 바닥에 뿜어진 내 정액은 묽었고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남자의 정액은 피가 섞여 불긋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침내 정신을 놓을 수 있었다.
∞ ∞ ∞
우적우적.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콰직, 꽈드득.
남자가 ‘식사’를 하는 소리다. 어둠이 검은 안개처럼 서서히 걷혔다.
바스락.
발밑에서 비닐이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내가 남자를 위해 만든 식사 공간이 펼쳐졌다. 바닥에 앉아 식사 중인 남자의 구부정한 등이 조금 떨어진 곳에 돌연 나타났다.
‘잘 먹네.’
남자의 주변으로 동그랗게 퍼진 피 웅덩이에서 뭔가가 내 발치로 굴러왔다. 손가락이다. 퉁퉁하고 주름진 것으로 보아 옆집 할머니의 손가락이었다.
‘남기면 안 된다니까.’
손가락을 집어 들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내가 다가가는지도 모르고 식사에 열중이었다.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려다가 멈칫했다. 남자의 머리 위에 일전에 본 더듬이가 솟아 있었다. 열심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꼭 신이 난 강아지 꼬리 같아 귀여웠다.
‘맛있나 보다.’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뼈째 고기를 씹는 소리가 뚝 끊긴다. 더듬이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속에서 남자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코 아래까지 피바다에 푹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붉게 물든 남자의 두 눈만큼은 검었다.
흰자위 없이 새카만 두 눈, 언젠가 본 적 있는 무정한 눈알.
혐오스럽다고 느꼈던 그 눈이 나를 보곤 예쁘게 휜다. 순간, 미세한 감각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발밑에 깔린 온통 새하얀 곤충 떼가 내 몸 위를 기어올랐다. 피부 위를 스치는 수많은 다리의 감촉에 진저리를 치며 양팔을 저어 떨어뜨리려 해도 소용없었다. 모래 늪에 빠진 것처럼 발밑이 훅 꺼지고 그것들은 빠르게 내 몸을 타고 목 밑까지 차올랐다.
‘도와줘…!’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거기에 남자는 없었다. 역삼각형 머리가 달린 하얗고 거대한 곤충이 긴 낫 같은 앞다리를 야금거리며 무정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곤충 떼에 시야를 점령당하는 순간까지 동족을 포식하는 잔인하고 아름다운 곤충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개새끼.
이런다고. 네가 이런다고 내가……!
널 놔줄 것 같아?
“헉!”
나락으로 떨어지던 몸이 왜인지 욕조 속에 잠겨 있었다. 꿈이었음을 인식하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남자는 욕조 턱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에는 더듬이도 없었고 날 보는 두 눈에는 완연한 애정이 넘쳤다. 나와의 행위가 그가 원하던 증명이 되어 준 걸까.
남자가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정하게 물었다.
“물 식지 않았어요?”
차가운 바닥에서 기절할 때까지 날 범하던 남자와 따뜻한 물에 내 몸을 씻겨 주는 남자.
그 간극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인 듯했다. 날 둘러싼 모든 관계가 언제나 그랬듯이.
“……괜찮아.”
물끄러미 남자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물 안에 잠긴 몸을 보았다. 허리께를 두른 손자국이 물속에서 환영처럼 일렁였다.
내 말에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굴던 남자가 돌변한 이유가 뭘까. 단순히 질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석연치 않았다.
남자는 내게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달라고 했다. 그 말에 덥석 남자의 바지부터 내리고 본 내 선택이 문제였을까. 그래도 남자가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심한 걸지도.
남자의 본 모습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완벽한 겉모습에 속아 내가 너무 믿었던 거다. 애초에 남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존재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존재 자체를 정의할 수 없는 남자의 변화에 일일이 이유를 찾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서?
“아직 아파요?”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남자가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핀다. 남자가 괴물이란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 정도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자신에겐 나밖에 없다고. 남자에게 나는 먹잇감일 뿐인 여느 인간들과 다르게 특별하다.
분노와 불안으로 점철된 우울이 그 한 가지 희망에 재가 되어 날렸다. 나는 남자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가 떼며 대답했다.
“괜찮아. 아픈 데 없어.”
남자가 웃는다. 흠잡을 데 없이 예쁜 얼굴에 현기증이 일었다.
“어지럽다. 나가고 싶어.”
“일으켜 줄게요. 잡아요.”
내밀어진 하얀 손과 무해한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뜨겁게 젖은 내 손과 반대로 차갑고 건조한 손을 잡았다. 허리를 일으키자마자 하반신을 찌르는 격통에 이를 물고 신음했다. 등허리는 얻어맞은 듯 쑤시고 구멍은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 이미 찢어졌던가. 기억이 흐리다.
남자가 나를 부축해 방금까지 제가 앉아 있던 욕조 턱에 앉혔다.
“제대로 식사부터 해요.”
입안이 까끌까끌하고 속도 별로였다. 욕실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내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물에 오래 있어서 그래. 피곤해.”
최대한 에둘러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하나뿐인 입구를 가로막고 선 남자는 전에 없이 완강했다.
“그래도 먹고 자요.”
“……지금은 좀.”
남자를 피해 시선을 떨궜다. 마구 짓눌렸던 두 무릎이 시퍼렇다. 탁. 남자가 수납장을 닫는 소리가 타일 벽에 메아리쳤다. 그 작은 울림에도 어깨가 흠칫 떨렸다.
“당신이 잘 먹어야 우리 아기도 건강하게 태어나죠.”
“뭐? 지금 뭐라고…….”
부자연스럽게 찾아온 적막을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똑똑 끊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엷게 웃는 남자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해서 어떤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야?”
“네. 당신이 약속했잖아요. 낳아 주겠다고.”
남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는다.
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던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말이다. 남자는 진짜로 나를 임신시킬 작정이었던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언제부터 그런 착각을 한 거지? 아무리 백치라지만 설마 자신과 같은 형태인 내 몸을 보고도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나를 보는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순진하기만 해서 흥분해 임신이니 뭐니 떠들어 댔던 자신을 책망해야 했다. 난처함에 이마를 짚고 머뭇거리다가 겨우 운을 띄웠다.
“나비야, 미안한데. 난…….”
사실대로 임신할 수 없다고 말해 주려던 순간, 어떤 본능적인 위기감이 닥쳤다. 뒤를 이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완전히 다른 소리였다.
“약속. 기억해……. 기억하지.”
남자의 표정이 금세 풀어진다.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남자의 임신에 대한 집착은 성욕이 아닐 것이다. 으레 짐승들이 그렇듯 번식 욕구라면 몰라도.
엉켜 있던 실타래의 끝을 드디어 찾았다. 그간 무의식적으로 느껴 온 위화감들이 하나둘 풀어졌다. 남자와 가진 두 번의 관계가 묘하게 건조하고 강압적으로 느껴졌던 건 남자의 성적 경험이 전무해서가 아니었다.
남자에게 섹스는 오로지 번식의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집요하리만치 후배위를 통한 삽입 섹스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면…… 이해가 갔다.
유흥거리에 불과한 성욕과 비교한다면야 남자의 번식 욕구가 더 필사적인 건 당연했다. 그렇다면 남자는 나를 주인이나 보호자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번식 욕구를 채워 줄 짝짓기 상대로 보고 있다는 뜻일까?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란 걸 안다면…… 이 관계도 끝이다. 나는 남자에게 다른 인간들처럼 하등 특별할 것 없는 한 끼의 고깃덩이로 전락할 것이다.
나는 남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만약에 내가…… 아이를 낳아 줄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거야?”
남자의 손에서 새로 꺼낸 수건이 떨어졌다. 남자는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사색이 되어 나를 쳐다보았다. 눌러선 안 될 폭탄의 스위치를 건드려 버린 듯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의 발 아래 밟히는 수건이 내가 겪을 미래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가오는 남자를 경계했다. 아까의 일이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며 심장이 뛰었다.
“잠깐. 지, 진정해….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뭐라고 말해야 남자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그러나 해결책을 떠올리기도 전에 남자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그냥 먹혀.’
불길한 상상은 남자가 내 머리를 물어뜯는 최악의 사태까지 치달았다.
“나비야…!”
눈을 질끈 감으며 직접 지어 준 멍청한 이름을 비명처럼 외쳤다. 이어 나를 덮친 건 나를 범하려는 거친 손길도, 머리를 물어뜯는 끔찍한 고통도 아니었다. 허리를 감싸 안는 부드럽고 포근한 감각만이 전부였다. 위압적으로 다가온 남자가 무릎을 꿇고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얼떨떨해진 기분으로 내 배에 이마를 기대며 애원하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는데.”
이별 통보를 받은 연인처럼 구는 남자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저를 보살펴 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를 낳아 주겠다고 한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자는 이미 나를 제 상대로 완전히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졌다.
맥이 풀리자 내 안의 감정들이 손바닥을 뒤집듯 일제히 모습을 바꾸어 간다. 손끝, 발끝부터 퍼지는 짜릿함에 뿌옇던 머리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나하고 약속했잖아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건드리면 금이 갈 듯한 깨끗한 눈동자에 물기가 차오른다. 발긋해진 눈가에 서러움이 가득했다. 남자의 매달리는 모습이 너무도 애절해서 덩달아 입매가 처졌다.
남자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절대로 사실을 말해선 안 된다. 이 비밀은 내가 남자를 완전히 휘두를 수 있는 무기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내 약점이기도 했다. 누구든 찌를 수 있는 양날 검의 손잡이가 내 손에 쥐어진 셈이다.
“내가 더 잘할게요. 당신 마음에 들 수 있게.”
애정을 갈구하는 남자의 모습 위로 언젠가의 내 모습이 겹쳐진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왜인지 머리채를 휘어잡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힘이 들어간 손이 살짝 떨렸다. 나는 그 충동의 정체를 금방 파악했다.
남자의 목에 드디어 완전한 목줄을 채웠다는 만족감,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는 우월감, 관계의 주도권을 잡은 통쾌함!
얼른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멋대로 치솟은 입꼬리를 가렸다.
누구든 욕망하게 만드는 남자가 스스로 내 앞에 무릎을 꿇겠다는데 남자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되어 줄 생각이었다. 나는 신이 된 기분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내가 네 아기를 낳아 줬으면 좋겠어?”
“네. 당신이 아니면 싫어요.”
남자가 칭얼거리며 내 배에 이마를 비벼 댔다. 뿌듯한 만족감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편, 머리는 차갑게 식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애정을 구걸할 때마다 이런 모습이었을까?
나보다 잘난 존재가 다리에 매달리는 모습이 끝없이 애정을 갈구하던 내 결핍을 비뚤어진 자존감으로 채운다.
‘어때. 너도 기분 죽이지?’
발밑에서 빌빌대는 나를 보며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인정했다. 남자의 하얀 뺨을 감싸 쥐고 나직이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네.”
“……나 뭐든지 할게요.”
남자는 처량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자기가 매달리는 상대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이거야 원. 목줄 정도가 아니라 입마개까지 단단히 채운 모양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얹힌 것 같던 속이 개운해졌다. 날 절절히 원하고 있는 남자가 뺨을 내 허벅지에 기대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말아요.”
시선을 위로 들어 찡해진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아, 나비야.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게 내 손으로 굴러들어 왔을까.
어떻게 얻은 건데 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욕망을 쏟아 낼지언정 내 진심을 있는 대로 털어놓지는 않기로 했다.
요컨대, 주인을 문 짐승에겐 복종 훈련이 필요했다.
“우리 늦었지만, 저녁 먹을까?”
위축된 시선이 내 얼굴 위를 바삐 오간다. 역시 남자는 배우는 게 빨랐다. 기회를 주자마자 내 눈치를 살필 줄도 알고.
“싫어?”
“아니요. 좋아요. 금방 만들어 줄게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 남자가 귀여워서 결국 뺨 위로 또 입술을 내리고 말았다. 보드랍고 서늘한 피부가 뜨거운 입술을 식혀 준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말이다. 남자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괴물은 인간의 뇌를 먹고 배우고,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운다. 나는 뼈아픈 실수를 씹어 삼키며 다짐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길들여 보리라고.
∞ ∞ ∞
그 일이 있고 난 뒤, 따로 그날 남자의 행동을 언급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남자는 눈에 띄게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늘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던 출근 시간에도 서운하단 얼굴을 할 뿐 입으로는 얌전히 “조심히 다녀와요.” 했다.
아기를 만들자며 내게 손을 대는 일도 없었다. 집 안 어디서든 부르면 쪼르르 나타났고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 또 쪼르르 멀어졌다. 자기 전엔 내 애정을 확인받고 싶은 티를 내며 “나 오늘 잘했어요?” 하고 묻기까지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 있었다. 점점 짙어지는 남자의 체취였다. 샤워를 하고 나와도 지워지지 않던 냄새는 어느덧 내 몸에 밴 향기를 나도 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며칠 뒤,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현관문 바깥까지 진동하는 남자의 냄새를 맡고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가려고요?”
“응.”
“……주말인데요?”
“살 게 좀 있어. 소파가 없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옷을 갈아입자 설거지를 마친 남자가 침실로 들어오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언제 올 건데요?”
등 뒤로 다가온 남자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요즘 따라 부쩍 늘어 버린 애교를 부렸다. 따라가고 싶단 뜻임을 모르지 않았다. 잘하고 있으니 상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시무룩한 남자를 돌아봤다.
“……데이트할까?”
남자의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이내 사르르 접혔다.
“좋아요.”
아주 완벽히 가둬 버리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남자와의 외출을 앞두자 기분이 퍽 설렜다. 내 손에 보이지 않는 목줄이 있어 더 그랬다. 이왕이면 제대로 데이트 기분을 내고 싶어 괜찮은 레스토랑에 저녁 식사 예약까지 하고 집을 나오니 하필 날씨가 흐렸다. 아파트에서 주차장에 세워 둔 차까지 가는 잠깐 사이 눅눅해진 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시동을 걸고 에어컨 온도를 내리려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가 남자에 의해 저지당했다. 슬며시 손등을 덮는 손끝에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조수석에 앉은 손의 주인을 보았다. 낮은 체온을 증명하듯 보송한 얼굴은 영 더위와 거리가 멀어 보이긴 했다.
“왜, 추워?”
“너무 차가우면 안 좋아요.”
남자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다.”
남자에게 보란 듯이 납작한 배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토닥였다. 내 행동에 환하게 웃는 남자의 미소를 보니 팔자에 있을 수조차 없는 임산부 노릇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았다.
“당신한테도 안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에어컨 온도를 26도에 맞췄다. 먹은 거라곤 얼굴도 본 적 없는 택배 기사와 쓰레기였던 애인, 오지랖 넓은 옆집 노인이 다인데 어디서 저렇게 사람을 홀리는 법을 배웠는지 모를 일이다. 이 또한 남자의 생존 전략인가 싶으면서도 가슴이 뛰는 걸 어쩌겠는가.
기분이 싱숭생숭해져 남자를 쳐다보는 것을 그만두고 차를 출발시켰다. 먹구름 낀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시야 끝부분에 뭉그적거리는 기척이 걸렸다. 남자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손잡고 싶어요.”
귀여운 나비, 영악하기도 해라.
“운전 중이잖아.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손이 열 개라면 열 개 다 내주고 싶은 본심을 숨기고 일부러 거절했다. 말투며 목소리까지 모질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단호했다. 옆자리는 조용해졌다. 그 가벼운 침묵이 주는 떨림에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쥐었다.
“……네. 미안해요.”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내 몸 어딘가를 콱 깨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허리가 움찔했다. 아아, 못 견디게 즐거웠다.
……미친 것 같지만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