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2)

불완전 변태 1

[오늘 늦어?]

세 시간 전 애인에게서 온 문자였다. 그 위로는 이틀 전, 집에 라면이 떨어졌다는 내용을 끝으로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진다. 분명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회식이 있다고 말할 때 “어어.” 하고 대답 같은 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역시나 잠결이었나.

저번 주 월요일부터 연락 두절이다가 토요일 오후에나 집에 돌아온 애인은 일요일 저녁까지 자기 방에 박혀 잠만 자다가 또다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신발 신는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온 내가 본 것은 현관문을 쌩하니 빠져나가는 뒤통수가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애인과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언제인지 떠올리기도 힘들다. 그러나 혼자 고민해 봐야 의미가 없는 문제였다.

주초부터 늦게까지 회식 자리를 지키느라 지금 내 육체는 돼지고기를 태운 연기와 담배 냄새에 찌들었고 정신은 술과 피로에 뭉개져 있었다. 거기에 오래된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은 더운 공기로 후덥지근했다. 숨이 막혀 목을 조인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개 같은 새끼.”

잔이 비기가 무섭게 악질적으로 술을 부어 넣던 고 부장이 떠올라 무거운 혀가 저절로 움직였다. 내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마침 30층 꼭대기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미처 답장하지 못한 애인의 문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

“…….”

모른 척할 수 없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30층엔 방문자가 드물었다. 5년 전에 이 아파트로 이사 올 때부터 살고 있던 옆집 노부부는 일찍이 외아들을 잃었다고 했다. 각자의 이유로 가족과 연이 끊어진 나와 애인에게도 찾아올 만한 지인은 없었다. 더구나 이런 시간에.

그런데 한밤중에 30층까지 올라온, 완전히 초면인 이 여자의 정체를 나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인지 나를 보곤 우물쭈물했다. 긴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내가 쓰는 샴푸 냄새를 풍기면서.

“생각보다 일찍 왔네.”

3001호 현관문을 붙잡고 선 애인은 속옷 바람으로도 아주 뻔뻔했다. 정말 뜻밖의 마중이었다. 아니, 배웅인가. 예전에는 좀 더 염치라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최소한 난감한 표정이라도 했었다. 지금은 오히려 귀찮아 보이기까지 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기운이 빠진다. 이미 밖에서 잔뜩 시달려 따지고 들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도 아니고.

그래도, 무감해진 상처도 상처인지라 말라붙은 눈물 대신 깊은 한숨이 샌다. 내키지 않아도 이곳만이 내가 돌아갈 집이었다. 여자는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하긴, 아무리 불편한 상황이라도 계단으로 내려가기엔 30층은 너무 높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틀어 여자에게 길을 내어 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가 볼게.”

나를 지나쳐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탄 여자가 작은 소리로 애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완전히 무시당한 내 존재감에 헛웃음이 나온다.

지칠 대로 지쳐 들어선 집은 엉망이었다. 소파에는 벗어 둔 옷가지가 널려 있고 식탁에는 배달 음식을 먹은 흔적이 그대로다. 언제나처럼 참으려고 했던 불만이 소파 밑에 떨어진 콘돔을 발견하는 순간 조그맣게 흘러나오고 말았다.

“좀, 치우지.”

“오자마자 잔소리야.”

잔소리로 넘어갈 일이 아닌 건 알까. 일주일 내내 나와 떨어져 있던 거로는 모자랐던 걸까.

“집에는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넌 내가 다른 연놈들이랑 뒹군 것보다 그깟 집 좀 더러워진 게 더 열 받지?”

술은 내가 마셨는데 술 한 방울 안 마신 애인이 개소리를 한다. 곪아 버린 관계를 헤집고 싶어 애인은 안달을 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싸움이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나와 애인은 고등학교에서 만나 대학에 들어가며 연인이 되었다. 우리의 관계를 드러내고 축하받을 수는 없었지만, 애인은 내 인생에 다시없을 사람처럼 나를 대해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에게 기댈 수 없는 처지인 난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 준비를 했고 애인은 친구들과 사업 준비를 했다. 부유한 집안의 지원으로 실패를 맛본 적 없는 애인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어린 나이에 꽤 큰 빚을 냈다.

그래도 복잡한 현실 같은 건 그 당시 우리에게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영원히 그럴 줄 알았다. 드디어 공허한 내 인생을 채워 줄 짝을 만난 거라고 믿었다.

1년도 안 돼서 당연하게도 애인의 어설픈 사업은 완전히 망했고 돈도 친구도 잃었다. 그쯤, 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바보처럼 기뻤다. 애인의 빚을 갚아 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기꺼이 그가 다시 시작할 발판이 되어 주고 싶었다.

“돈 좀 번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사람을 병신으로나 보고.”

돈, 열등감. 고작 그런 하찮은 것들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관계를 썩게 했다. 변해 가는 애인이 안타깝고 불쌍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해 주던 애인을 어떻게든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좌절에 빠진 애인을 내 집에 들였고 그가 돈에 대한 걱정을 잊게끔 내 빚으로 그의 빚을 메꿨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애인을 향한 내 헌신은 자존심 강한 애인에게 그저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이제 대꾸도 안 해? 내 말은 말 같지도 않다, 이거냐?”

묵묵히 옷가지를 줍던 나를 애인이 밀쳤다.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는 이골이 났는지 바닥에 부딪힌 등이 전혀 아프지 않다. 대신 이럴 때면 지독한 공허함이 찾아온다. 육체적 고통보다 그 텅 빈 감각이 더 두려웠다.

“내가 왜 너를 만나서 이런 취급이나 받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애인은 분이 덜 풀린 듯 씨근대며 테이블 위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새벽 한 시였지만 이젠 한밤중에도 날이 따뜻했다. 속옷 바람으로 나다닐 수 있을 만큼. 이런 상황에도 그런 것들을 따지고 있는 스스로가 참 웃겼다. 나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했는데.

“나가.”

폐에 작은 균열이 생긴 것처럼 생각지도 않은 말이 한숨에 섞였다.

“내가 얼마나 참고 사는데. 자꾸 선 넘는 건 너야, 알긴 해?”

내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듣고 싶지 않은 건지 애인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태우며 제 말만 해 댔다. 아무렇게나 턴 재가 내 발등 위로 떨어진다. 애인에게 내 존재는 찌꺼기 같은 감정을 털어 낼 재떨이에 불과했다.

평소라면 먼저 사과하고 넘어갔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이유도 사라졌다. 애인이야말로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애인은 반대로 내가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란 걸 다시금 새겨 준 셈이다.

자그마치 10년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내 존재 가치였을지도 모르겠다.

“어? 알긴 하냐고.”

애인이 묻는다. 조금씩 커지는 균열로 갇혀 있던 속내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간다.

“알아. 나도.”

그만두자.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잖아.

나는 고개를 들고 애인을 마주했다.

“나가. 그렇게 못 참겠으면 나한테 빌붙어 살지 말고.”

“……뭐? 빌붙어……. 너 지금 말 다 했냐?”

담배를 문 아랫입술이 부들부들 떨린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애인은 내게 달려들었고 나도 더는 맞고만 있지 않았다. 애인에게 맞선 건 처음이었다. 아무렇게나 내지른 주먹이 애인의 입술에 꽂혔다. 애인의 터진 입술에서 피가 번졌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피를 거칠게 문질러 닦은 애인이 나를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웃어? 미쳤냐?”

내가 웃었나?

모르겠다. 몸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얽힌 채로 거실을 굴러다녔다. 말릴 사람도 없었고 살림살이가 부서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엉켜 버린 10년의 세월을 죄다 잡아 뜯어 버리고 나와 애인은 난장판이 된 거실에 드러누워 헉헉거렸다.

몸이 한계에 다다라서인지 머릿속이 텅 비었다. 코 밑이 축축하다 싶더니 입안으로 스민 액체에서 쇠 맛이 났다. 먼저 일어난 건 애인이었다. 그가 내게 다시 달려든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래.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거실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은 애인은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 현관의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 꼼짝 않고 누워 있자 적막을 틈타 지긋지긋한 환청이 또 찾아왔다.

‘쯧.’

엄마는 내 뒤에서 늘 불만스럽게 혀를 차셨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항상 그랬고, 잘못하지 않았을 때도 거의 그랬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날 못마땅해하는 이유를 꽤 나중에야 깨달았다.

밤중에 싸우는 부모님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내가 다른 여자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안 건 중학생 때였다. 그 서글픈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는 더는 아무것도 몰랐을 적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엄마는 자신의 진짜 아들인 동생과 나를 차별했고 아버지에게 나는 지우고 싶은 실수였다.

나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지 알지 못하면서 아등바등 노력했다. 그러나 내 노력을 인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 처지는 성인이 되어 독립하던 그 순간까지 눈칫밥을 먹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은 시작부터 꼬여 있었다. 가족에게조차 사랑받을 수 없게끔 태어난 존재…….

그런 내게 애정을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준 이는 딱 한 사람뿐이었다.

“윽…….”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졌다. 나와 애인의 관계가 엉망으로 변했더라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끔찍한 적막이 어느새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떨쳐 낼 수 없는 무형의 침입자에게서 도망치고자 벌떡 상체를 일으켰으나 빈집엔 날 안아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말이 심했던 것 같다. 아무리 화가 나도 빌붙어 산다느니 그런 말까지는 하지 말아야 했다. 술에 취해서 내가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노라고 사과한다면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곁에만 있어 주면 날 용서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코피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닦지도 않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애인이 타고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있었다. 연달아 버튼을 눌렀지만, 숫자는 더디게 늘어났다.

무언가에 쫓길 때처럼 등골이 오싹해져서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갔다.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다 힘이 풀린 나머지 굴러떨어졌다. 계단 모서리에 찍힌 어깨와 꺾인 발목이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일어나 다시 내달렸다. 애인마저 나를 영영 떠나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공동 현관을 나가자 새벽의 미지근한 밤바람이 땀을 식혔다. 어둠에 잠긴 풍경이 소름 끼치게 적막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과 주차된 차들 사이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애인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늦게 핸드폰을 찾았다. 더듬은 주머니가 비었음을 알고 다시 눈물이 났다. 서러움이 치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외로움뿐이다.

“내가 잘못했어.”

허공에 중얼거려 봐도 들어 줄 애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애인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부 내 잘못이라고 빌면 마지못해 돌아와 줄 것이다. 내 곁에서 사는 게 행복하진 않았더라도 편했을 테니까. 그거면 됐다. 그거면…….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껍데기뿐인 몸도 살아 있다고 센서 등이 환히 켜진다.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흔하디흔한 소음이었지만 조금 달랐다. 울음소리가 아니라 비명에 더 가까웠다. 죽기 전 내지르는 마지막 발악 같은.

가로등이 비추지 않는 화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부스럭거리는 무성한 관목들 틈 사이였다. 잠시 후, 그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고…파.”

어둠 속에서 거대한 인영이 크게 기우뚱거리며 나타났다. 웬 남자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틀대는 형체는 커다랬고 무어라 중얼중얼하는 목소리 또한 낮았다. 평범한 취객인가 싶었는데 가로등 아래로 조금씩 드러나는 커다란 남자의 몸이 전라 상태였다.

적막한 새벽, 갑자기 맞닥뜨린 나체의 기괴함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괜찮으세요?”

무심결에 내뱉어 놓고서 아파트 현관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우뚝 선 남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가로등 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육체 탓인지 두 눈동자가 유독 검다. 유난히 새카맣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과 시선이 맞물린 순간, 남자가 달려들어 나를 덮쳤다.

나는 비명도 못 지르고 뒤로 넘어졌다. 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남자는 나를 깔아뭉갰다.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내 몸에는 딱 죽을 기운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떨어져. 이 미친 새끼야!”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뜻 모를 중얼거림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점점 늘어지더니 이내 꺼져 버렸다. 남자도 죽은 듯이 늘어졌다. 어안이 벙벙해 한동안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어깨를 힘껏 밀어내 거대한 남자 밑에서 빠져나왔다.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 등이 팟, 예고도 없이 불을 밝혔다. 조명 아래 드러난 남자의 온몸이 정체 모를 끈끈한 액체로 범벅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얻어맞은 건지 입술에는 붉은 피가 립스틱처럼 묻어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해괴한 몰골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나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고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남자는 예뻤다. 비현실적인 외모가 남자의 기이한 등장에 합리적인 이유가 되어 주는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미모에 넋을 놓고 있다가 가까워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걸레짝이 된 몸으로 급히 남자를 부축해 아파트로 들어섰다.

예쁘장한 외모에 없던 동정심이 불타오르기라도 한 건지 내 행동의 이유를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남자를 집에 들일 정도로 외로움에 미쳐 버린 걸까?

빌어먹을 엘리베이터는 내가 버튼을 누른 꼭대기 층에 가 있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몸을 고쳐 잡으며 힘겹게 버튼을 눌렀다. 센서 등이 꺼지고도 한참 뒤에서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나와 남자의 몰골은 마치 막 우물에서 기어 올라온 귀신 같았다.

특히, 나는 정말로 뭔가에 홀린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잃은 남자를 소파에 눕히고 재킷과 넥타이만 벗은 차림으로 욕조에 물을 받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몸은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움직였다. 어릴 적, 몸이 약한 동생의 병시중을 들던 습관이 지긋지긋하게 몸에 밴 탓이다.

남자를 끌고 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집어넣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데다 의식까지 잃은 남자를 옮기는 일은 평균 이상의 체격인 내게도 중노동이었다. 애인과의 몸싸움으로 한 차례 기운을 쓴 터라 셔츠가 온통 땀에 젖고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픈데도 이를 악물고 그 정신 나간 행위를 계속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온수는 금세 흙과 오물로 더러워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물속에 손을 담가 남자의 몸을 닦았다.

“같은 남잔데 고소하진 않겠지.”

물론 내 애인의 성별을 들킨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제일 먼저 욕조에 잠기지 않은 남자의 얼굴부터 닦아 냈다. 피에 젖은 입가에 물을 끼얹고 조심히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에 닿은 입술이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러워 무시하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무슨 얼굴이…….”

더러움이 씻겨 나간 남자의 얼굴에 작은 감탄이 터졌다. 하얗고 깨끗한 작은 얼굴에 직선으로 시원스레 뻗은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한 섬세함이 공존했다.

눈초리, 코끝, 입가, 그런 곳까지 하나하나 눈길이 갔다. 거기에 의식이 없어서인지 아스라한 분위기마저 흐르는 보기 드문 외모였다.

나는 다시금 실수하지 않도록 술렁이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괜히 헛기침을 해 댔다. 조금 높아진 고소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잡념을 털어 내고 남자를 씻기는 데에 집중했다. 가장 더러워 보이는 남자의 손을 물속에서 건져 냈다.

“손도 예쁘네.”

조심히 손바닥을 맞대 보았다. 나와 손가락 한 마디가 차이 날 정도로 크고 남자다우면서도 곧은 손은 쓰레기통이라도 뒤졌는지 자잘한 오물이 달라붙어 있었다. 손톱 밑은 특히나 검붉은 흙이 잔뜩 끼어 지저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둥근 손톱 끝은 모난 곳 없이 다듬어진 형태다.

엄지 표면으로 손톱 끝을 문질렀다. 끼어 있던 것은 흙만이 아니었다.

“털인가?”

손톱 밑에서 빠져나온 잿빛의 짧은 털이 물 위를 둥실둥실 떠다녔다. 고양이와 영역 싸움을 한 것은 이 남자였던 모양이다. 다 닦인 손에는 이제 막 포장지를 깐 새 상품처럼 생채기 하나 없었기에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늘어진 팔을 타고 남자의 몸으로 향했다. 얼굴에 홀려 눈치채지 못했는데 남자의 상반신은 보는 순간 감탄했던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로 멋졌다. 촘촘하게 짜인 근육이 상처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로 덮여 있어 보기만 해도 탄력이 느껴졌다. 극진한 관리 없이는 만들 수 없는 몸이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무심코 입술을 핥다가 별안간 꼴깍 침이 넘어갔다. 그 소리에 놀라 더 닦을 것도 없는데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을 놓쳤다. 의지가 없는 손이 물 안으로 잠기는 소리가 가슴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내가 미쳤나……?

무의식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스스로도 진저리쳐질 정도로 아주 기분 나쁘고 더러운 욕망이었다. 내 눈은 이성을 무시하고 점점 남자의 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얄팍한 배꼽 근처에서 흐려진 이성을 겨우 되찾았다.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적시며 슬며시 남자를 흔들었다.

“……저기요.”

흔들리는 몸을 따라 찰랑찰랑 욕조 속이 물결쳤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남자를 확인한 내 가슴도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내 시선이 다시금 남자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죄책감보다 욕망이 앞섰다.

넘칠 듯 말 듯 한 죄책감은 체모 한 올 없이 깨끗한 남자의 사타구니를 보고 완전히 증발했다.

“미친.”

말아 쥔 주먹으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진 입술을 눌렀다. 남자의 다리 사이는 애초에 털이 자라지 않은 것처럼 모공 하나 없이 매끈했다. 살짝 분홍빛이 도는 색이 옅은 성기는 어울리지 않게 위압적일 정도로 묵직했다.

갑작스러운 시각적 폭력에 넋을 잃고 말았다. 남자는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마치 인간의 욕망을 끌어모아 만든 인형처럼. 물속에서 일렁이는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듯 욕실을 벗어났다.

젖은 두 손에서 물기가 뚝뚝 흘렀다. 후끈거리는 건 붉어진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집을 나간 애인 때문에 울고불고한 것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르는 남자의 몸을 보고 흥분하는 꼴이라니.

“내가 왜 이러지.”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성에 눈을 뜨고부터 쭉 내게 상대는 애인뿐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본 적도 없었고 애인 외의 남자에게 성적으로 끌릴 거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주인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뻣뻣해진 아랫도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날뛰는 욕망만 탓하긴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온기를 나눠 본 지가 3년이 넘었다. 게다가 지금 욕실에 있는 남자의 육체는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조금 흥분했을 뿐, 내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다시 욕실로 돌아갔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물속에 계속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남자의 몸에 시선을 두지 않고 욕조에서 남자를 건져 냈다.

“하아-…. 정신 똑바로 차리자.”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남자의 젖은 몸을 대충이나마 수건으로 닦아 줄 수 있었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히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속옷은 생략했다. 확연한 체급 차이나 허벅지 사이 그것의 양감으로 봐선 맞을 성싶지도 않고.

좀처럼 정신이 들 것 같지 않은 남자를 소파에 두고 씻으려 욕실로 들어갔다.

이제 보니 남자의 몰골만큼이나 내 꼴도 엉망이었다. 아무렇게나 닦은 코피가 인중에 말라붙어 지저분했다. 아파트 이웃과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지 누군가 봤다면 경찰을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일부러 찬물로 세수를 하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려 했다. 피곤한 데다 술에 취해서일까, 현실 감각이 둔하다.

저 남자가 눈을 떠 또 나를 공격하면? 혹은 뭔가 오해를 하고 나를 신고한다면? 그전에 화가 풀린 애인이 돌아와 남자를 본다면?

모르겠다. 너무 피곤해서 이제 그만 침대에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만 절실했다.

씻고 나와 보니 벌써 새벽 네 시에 가까웠다. 곧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며칠 병가를 내야겠다. 맞은 얼굴이 멍투성이였고 계단에서 구를 때 접질린 건지 발목도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일단은 좀 눕자.

나는 침대에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 ∞ ∞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알람 소리는 당연히 듣지 못했고 핸드폰에 회사에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숙취와 지난밤의 후유증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먼저 회사에 전화해 병가를 받았다.

어젯밤 일어난 일 중 가장 상식적인 사실은 ‘계단에서 굴렀다’라는 것뿐이었다. 10년 된 남자 애인과 몸싸움을 벌였다든가, 웬 벌거벗은 남자를 주웠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한다 해도 재미없는 농담 취급이나 받으면 다행이었다.

해서 그저 ‘술에 취해 굴렀다’로 어제 일을 일축했다. 악명 높은 고 부장과의 회식이 뜻하지 않게 내 거짓말에 신빙성을 더한 셈이다.

전화를 끊고 도로 침대 위에 쓰러져 누우려다가 바깥의 남자가 걱정돼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방문에 귀를 기울이자, 아니나 다를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방을 가로질러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골프채를 하나 꺼내 들었다.

사업하려면 필수라고 해서 풀세트로 장비를 맞춰 줬더니 3개월도 하지 않고 팽개친 애인의 물건이었다. 어쨌든 나는 골프에 문외한인지라 골프채를 야구 배트 쥐듯이 잡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어젯밤 난동의 현장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달라진 점은 소파 위에 있어야 할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긴장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픈 발목을 질질 끌며 소리가 난 곳으로 추정되는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식탁 너머 활짝 열린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냉장실과 냉동실이 모두 비었고 온갖 식자재가 그 이상한 남자와 함께 바닥에 뒤엉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남자는 쓰러지기 전까지 배고프다고 중얼거렸더랬다.

골프채를 단단히 고쳐 잡고 둥근 헤드로 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씻겨 놨더니 다시 음식물로 범벅이 된 남자가 끙끙 앓으며 부스스 눈을 떴다. 초점이 없는 시선이 허공을 부유했다.

“저기요. 정신 좀 들어요?”

“배고파…….”

남자의 상태는 그저 허기졌다고 치부하기엔 심각해 보였다.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골프채를 내려놓고 남자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적어도 지금은 어제처럼 나를 힘으로 깔아뭉개진 못할 듯싶었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구급차 부를까요?”

이 남자가 내 집에서 죽기라도 하면 일이 골치 아파졌다. 서둘러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남자가 날 보지만 않았다면.

흠결 없이 새카만 눈동자가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처럼 아스라하던 남자의 얼굴을 완성했다. 동시에 불분명하던 욕망이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내 배 속에 묵직하게 얹혔다.

남자의 손끝이 힘없이 내 무릎을 건드린다.

“……배고파, 고기.”

고기. 남자의 입에서 처음 나온 단어였다. 남자에게 붙잡혔던 시선을 들었다. 냉장실 신선 칸에 소고기 한 팩이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다 끄집어내졌는데 신선 칸 서랍은 유일하게 무사했다. 무릎걸음으로 냉장고로 가 서랍 속의 고기를 꺼내 남자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이거 말하는 거예요? 잠깐만요. 금방 구워 줄게요.”

비닐 랩을 막 벗겨 낸 그때, 벌떡 상체를 일으킨 남자가 내 손에서 고기를 낚아챘다. 그리곤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말릴 새도 없이 남자가 시뻘건 고깃덩이를 짐승처럼 뜯어 먹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대로 넋이 나가서 시뻘건 핏물이 남자의 턱을 타고 질질 흘러내리는 모습을 쳐다만 봤다. 우적우적. 질긴 생살이 이빨에 짓이겨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하얗고 고른 치아가 성긴 근섬유를 끊으면 붉은 입술과 혓바닥이 날고기를 날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마치 짐승이 포식하듯.

“욱.”

헛구역질이 치밀어 전날 먹은 술 냄새가 섞인 위액을 바닥에 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기를 순식간에 해치운 남자는 아쉬운 듯 혀를 날름거리며 손에 묻은 피까지 싹싹 핥아 먹었다. 모양새 좋은 입술 주변이 온통 묽은 피투성이로 변했다.

600g의 소고기를 흔적도 없이 먹어 치운 남자는 이윽고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엎드려 남자에게서 도망쳤다. 무언갈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남자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뒤에서 내 발목을 꽉 붙들었다. 하필 다친 발목이었다.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악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코를 부딪친 충격에 아파할 새도 없이 등 위로 거대한 인기척이 겹쳐졌다.

“배고파. 고기.”

“이, 이러지 마세요. 제발.”

나는 울면서 빌었다. 당장이라도 남자가 내 어깻죽지를 물어뜯고 뼈를 발라 먹어 버릴 것 같았다. 목덜미까지 가까워진 기척이 공포심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남자는 먹이를 탐색하는 짐승처럼 내 냄새를 맡아 댔다.

“흐, 흡….”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죽은 척을 했다. 속절없이 귓가에 남자의 숨결이 닿았다. 남자의 탐색이 길어질수록 숨이 넘어가고 의식이 흐려졌다. 남자가 어눌한 발음으로 나에게 질문했다.

“너, 고기야?”

나는 그대로 까무러쳤다.

익숙한 소리가 반복해서 이어졌다. 짧고 단조로운 멜로디가 초인종 소리라는 걸 깨닫고 번쩍 눈이 뜨였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제일 먼저 몸을 더듬어 확인했다. 어딘가 물어뜯긴 건 아닐까 하는 염려와 달리 내 몸에는 이빨 자국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순간 꿈인가 했으나 애석하게도 퉁퉁 부어오른 발목에 띠처럼 검푸른 손자국이 선명했다. 정작 그 장본인은 냉장고 옆에 웅크리고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또다시 끙끙 앓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초인종이 계속해서 울렸다. 그 소리가 혹시라도 남자를 자극할까 봐 절뚝거리며 재빨리 인터폰을 들었다. 화질 나쁜 작은 화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비쳤다. 애인이 ‘미친 할멈’이라고 부르던 옆집 할머니였다.

―총각. 집에 있어요?

일자로 쭉 늘린 입매를 보니 잔뜩 벼른 표정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감에 나는 목을 몇 번 가다듬고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세요?”

―이 집에서 큰소리가 자꾸 나서.

눈으로는 연신 남자가 있는 쪽을 주시했다.

“저희 집은 아닌데요.”

―아니긴 막 우당탕탕 하는 걸 내가 들었는데.

“……시끄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이. 시끄럽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고…….

그럼 어쩌란 건지 노인은 말을 흐리면서도 문 앞에 버티고 섰다. 1년 전부터 집요하게 나와 애인의 호구 조사를 하며 중매를 서 주겠다고 귀찮게 하더니 이 김에 문을 열고 들어와 직접 내 생활을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지금 내 쪽에서는 남자가 보이질 않아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죄송합니다. 조용히 할게요.”

―아니 총….

끈질긴 노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다리를 절뚝이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몸을 말고 있었다. 내게 해를 가하기는커녕 외려 피해자의 몰골에 가까웠다. 널브러진 골프채가 발끝에 걸렸다.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했지만 여차하면 남자에게 그것을 사용하려고 했다.

창밖은 여전히 밝았으나 시간은 많이 흘러, 오후 여섯 시였다. 그러니까 남자는 긴 시간 동안 무방비하게 쓰러진 나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생고기를 좀 뜯어 먹었기로서니 남자가 나를 잡아먹을 거라는 괴상한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과대망상을 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술이 덜 깨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어딘가 모자란 사람에게 하마터면 애먼 짓을 할 뻔했다.

허탈해져 두 팔을 허리춤에 얹고 어질러진 집 안 꼴을 둘러보았다. 남자를 편한 곳으로 옮겨 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그럴 기력이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집을 어느 정도 치우고 모자와 마스크로 멍이 든 얼굴을 가린 채 밖으로 나왔다. 슬슬 발목이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아파졌고 빈 냉장고도 채워야 했다.

예측 불가능한 남자를 혼자 두는 게 조금 걱정이지만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듯 보였다. 원대로 배를 채워 주면 무슨 사연인지 들을 수 있겠지.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남자에게 줄 고기를 몇 팩 골랐다. 붉고 싱싱한 고기가 장바구니에 겹겹이 쌓였다.

∞ ∞ ∞

발목 염좌 진단을 받고 입사한 후 처음으로 이틀 연차를 썼다. 모처럼 일을 쉬기까지 했으나 남자와 지내며 알아낸 정보는 극히 적었다.

일단 내 예상대로 고기를 잔뜩 먹이자 남자는 더 이상 앓아눕지도, 공격적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 그랬냐는 양 아주 얌전했다. 문제는 남자의 입으로는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식탁에 앉은 남자는 대접 위에 쌓인 스테이크용 고기를 하나하나 빠르게 해치웠다. 내가 옆에 놔둔 포크나 나이프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두 손으로 고기를 들고 야무지게도 뜯어 먹어 댔다. 남자의 먹는 모습이 처음처럼 역하지 않았다. 괜히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 부르는 게 아닌 모양이다.

아예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식사 중인 남자를 관찰했다. 처음 남자를 봤을 때 느꼈던 위화감엔 큰 체격도 한몫한 모양으로 남자는 180인 나에게도 드물게 ‘크다’라고 느껴질 만큼 체격이 좋았다. 대략 키가 한 뼘가량은 차이 나는 것 같았다.

“……요즘 애들은 발육이 다르다더니.”

입가에 묻은 피만 아니라면 남자의 맨얼굴은 대학생쯤으로 보였다. 스물한두 살쯤 됐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여덟, 아홉 살 차이려나. 그 생각을 한 뒤론 남자에게 느꼈던 공포심이 싹 가셨다.

“몇 살이에요?”

남자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봤다. 질겅질겅, 열심히 생고기를 씹는 입은 멈추지 않는다. 말끔하게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 놓으니 특출난 외모를 떠나 얼핏 보아도 순한 인상의 얼굴이었다.

“이름은?”

이미 몇 번이나 물어보고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이지만 되묻는 데 그다지 큰 인내심이 필요치는 않았다. 남자가 나를 쳐다보는 반응만으로 꽤 즐거웠기 때문이다.

남자가 손에 쥔 고기에서 선홍색 핏줄기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휴지를 뽑는 사이, 핏물은 근육이 선명하게 갈라진 팔뚝을 타고 내려 새하얀 팔꿈치에 고였다가 남자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닦아 주려고 자리를 옮긴 나는 휴지를 들고는 머뭇거렸다.

애인의 옷을 입혔다가는 나중에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하는 수 없이 내 옷을 입혔더니 티셔츠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반바지는 좀 작았던 모양이다. 남자가 의자에 앉자 한껏 말려 올라가서 하얗고 다부진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밀려드는 민망함과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에 굳은 채 나는 큼직한 근육이 매끈하게 뻗은 새하얀 허벅지를, 그리고 그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연분홍빛 핏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기. 배고파.”

마지막 살점까지 전부 먹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낯부끄러운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을 황급히 거뒀다. 밖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성희롱으로 신고당해도 할 말이 없는 추잡한 짓거리였다.

자꾸만 남자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게 되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어제 구르며 머리를 잘못 부딪친 걸까. 민망함에 대접을 싹싹 비운 남자를 괜히 나무랐다.

“이틀 동안 먹은 고기가 얼마 친 줄 알아요?”

남자는 멀뚱히 나를 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만 다셨다. 덩치에 맞지 않는 순진무구한 표정에 구멍 날 이번 달 월급 걱정도 잊고 어이없이 웃음이 났다.

내가 남자에 대해 알아낸 첫 번째 사실은 오로지 생고기만 먹는다는 것이었다. 조리된 고기는 입도 대지 않았다. 닭이건 돼지건 소건 간에, 그게 무슨 고기든 생고기만을 고집했다. 게다가 한번 먹기 시작하면 눈앞에 있는 고기를 전부 먹어 치울 때까지 멈추지 않는 대식가였다.

내 타박에도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을 보니 답답한 한숨이 나왔다.

“식비 내놓으라고 안 할 테니까 배고프단 소리 말고 다른 말 좀 해 봐요. 보호자 이름이나 전화번호, 뭐 알고 있는 거 없어요?”

발견 당시 전라였으니 신분증이나 연락처가 적힌 카드 따위를 가지고 있을 리도 만무하고 본인 머리도 백지 상태라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정작 남자는 남의 일인 양 태평하다.

“배고파.”

“……딱 한 덩이만 더 먹읍시다. 마지막이에요. 더는 없어요.”

일어나 냉장고로 향하자 곧바로 따라붙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동물의 그것과 비슷했다. 피식 웃으며 냉장고를 열어 신선 칸에 쟁여 둔 고기 한 팩을 꺼냈다.

신선 칸과 채소 칸에는 남자에게 주려고 사다 놓은 각종 고기가 그득했다. 서랍으로 된 칸이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냉장고를 열어 멋대로 꺼내는 탓에 고기는 서랍 안에 숨겨 두었다. 남자는 냉장고 문은 곧잘 열면서 손잡이가 안으로 패인 서랍은 열 줄 몰랐다.

이것이 내가 알아낸 두 번째 사실로,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남자는 영화나 뉴스에 나오는 짐승 소년과 공통점이 많았다. ‘고기’, ‘배고파’ 외엔 할 줄 아는 말도 없고 스스로 씻을 줄도 몰랐다. 심지어 막 태어난 아이처럼 걸음걸이마저 어색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말을 걸면 8할은 반응이 없지만 2할은 눈치껏 내 말을 알아듣는 듯이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혹시 섬 노예 비슷한 인신매매 범죄의 피해자일까 하는 의심도 해 봤다. 하지만 티브이에서나 볼 법한 예쁜 얼굴이며 흠집 하나 없는 새하얀 몸을 보면 그건 또 아니었다. 골치가 아파지니 어쩌자고 이런 수상쩍은 남자를 집에 끌어들였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고기를 접시 위에 올려 주기 무섭게 먹어 치우는 남자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시 경찰밖에 답이 없나……. 신고하면 데려가겠지. 그리고 그 후에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남자는 고기에 온 정신을 빼앗겨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지끈거리는 눈가를 문질렀다. 어릴 적 엄마가 내 목을 조른 날 밤, 동생의 신고로 찾아온 경찰이 뭐라고 했던가.

「요즘 애들은 혼 좀 냈다고 자기 어머니도 신고하는구먼. 말세다, 말세야.」

경찰은 믿을 수가 없다. 무책임한 경찰의 손에 이끌려 시설에 간다면 그들이 오직 생고기만 먹는 괴식가이자 대식가인 남자를 제대로 보살필까? 굶겨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만약 본래 보호자가 나타난다 해도 남자를 이렇게까지 방치한 사람이다. 폭력의 흔적은 없지만, 이 남자는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꼭 폭력만이 학대가 아니라는 걸 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분간은 데리고 있자.

그게 내 결론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안정이 되면 남자가 무언가 말을 할지도 모르고……. 또 지금 나에겐 곁에 있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으니까.

탁자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애인에게서 연락은 없다. 내가 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계속 꺼져 있었다. 10년의 세월이 참 허무하게 무너진다. 가라앉는 기분을 지우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덟 시, 남자를 씻기고 나도 씻으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남자가 손가락에 묻은 핏물을 쪽쪽 빨며 나를 눈으로 좇았다. 더 달라는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아이를 달래듯 타일렀다.

“내일부터 나는 출근해야 해요.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

남자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더니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사뭇 귀여웠다.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가 보여 주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흠.”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설명해 줘야 할 것 같다.

“해가 뜨면 나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배고파.”

“고기는 잔뜩 두고 갈 겁니다.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와서 또 줄 거고요.”

“…….”

고기 타령이 멈춘 거로 보아 알아들은 걸까. 알아들었을 거라고 나 좋을 대로 넘겨짚으며 남자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위에 늘어선 칫솔 세 개를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이것도 바람피우는 게 되나.

“아무렴 그 새끼만 할까.”

애인에겐 과분한 양심의 가책을 지우고 내가 가르친 대로 양치질 중인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맨 칫솔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씹는 게 아니라 문질러요. 이렇게…….”

치약을 묻혀 주면 입에 넣기가 무섭게 인상을 쓰며 뱉어 내는 탓에 하는 수 없이 맨 칫솔로 양치질을 시켰다. 그마저도 엉망이건만 치아는 래미네이트라도 한 것처럼 깨끗했다.

“진짜 신기하단 말이지.”

반들반들한 턱을 슬쩍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부드러운 피부는 며칠이 지났는데도 까끌까끌해질 기미조차 없다. 아랫도리도 깔끔한 걸 보면 애초에 체질인가 보다.

어설픈 양치를 끝낸 남자를 욕조 턱에 걸터앉혔다. 양손으로 어깨를 누르면 얌전히 주저앉는 남자가 재밌어서 어느덧 이 시간을 꽤 즐기게 됐다.

“턱받이 같은 걸 사야 하나.”

갈아입힌 지 하루 만에 티셔츠는 남자의 식사 예절 점수를 증명하듯 지저분했다. 세수를 시키기 전에 목에 수건을 둘러 주었다. 남자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얌전한데 그날은 왜 그랬어요?”

묵묵부답인 얼굴을 미지근한 물로 닦았다. 물을 끼얹으면 목을 움츠리며 두 눈을 꾹 감는다.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터졌다.

“졸지에 싱글 대디가 됐네.”

젖은 얼굴로 남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내내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어색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이며 이따금 벌어지는 도톰한 아랫입술이 사람을 홀리려고 태어난 얼굴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멍한 표정은 빈 도화지처럼 자국을 남기고 싶은 못된 충동을 부추긴다.

“……사람을 왜 그렇게 봐요?”

낮게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욕망이 묻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남자의 눈빛에 왜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남자가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배고파.”

“……하, 그럼 그렇지.”

남자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어린애, 아니 강아지에 더 가까웠다. 혼자 망상에 빠졌다는 자괴감을 남자의 탓으로 돌리며 일부러 남자의 얼굴을 수건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그 후엔 티셔츠를 갈아입히고 애인의 침실에 남자를 눕혔다. 각방을 쓴 지가 3년이라 애초에 드레스룸이던 방은 애인의 물건으로 꽉 차 있었다. 어차피 이제는 주인 없는 침대였다. 비워 둬서 무엇 하냐는 심정으로 어제부터 이곳에다 남자를 재웠다.

“고기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먹어요. 그러다 배탈 나겠어요.”

“…….”

얇은 여름용 이불을 남자의 가슴께까지 덮어 주고 방을 나오려 돌아섰다. 그런데 문득 사소하나 아주 중요한 의문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방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머뭇거리며 돌아섰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근데…… 화장실은 갔어요?”

“…….”

남자는 내가 눕혀 준 자세 그대로 누워 고개만 나를 향했다. 이틀간 그렇게 먹어 댔는데 남자가 화장실에 가는 걸 못 본 것 같다.

“그…… 볼일은 봤냐구요.”

“……배고파.”

“나도 모르겠다. 잘 자요.”

더 파고들기는 좀 그랬다.

방문을 열 줄 모르는 남자를 위해 남자의 방과 내 방문을 살짝 열어 둔 채로 두었다. 그래도 사람인데 정 마려우면 뭔가 표시를 하겠지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최악의 경우, 내일 아침 남자를 깨우러 들어갔을 때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다 정말 아기나 강아지처럼 배변 훈련을 시키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성인용 기저귀라든가. 아니, 그건 아니지.

머리가 복잡해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끼익.

문이 벌어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잠든 의식을 흔들었다. 그렇다고 바로 잠에서 깨지는 못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든 탓에 정신이 수면의 경계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열린 문 쪽에서 건조한 맨발로 슥슥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기척은 머리맡에서 멈췄다. 매트리스가 가장자리로 기운다. 누구지……? 애인이 돌아왔나. 잠결에 생각했다.

잠시 뒤, 뭉툭한 것이 뺨을 짓눌렀다. “흐읍.”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입가가 서늘해진다. 닿은 건 코인가? “쩝쩝.” 누군가 귓가에 대고 입맛을 다신다.

전신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수마에 잠긴 정신을 건져 내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가위에 눌린 듯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 순진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먹고 싶어.”

안 돼…! 막힌 목구멍으로 소리치며 눈을 떴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다 잠에서 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으나 새벽 어스름에 젖은 방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서늘한 숨결이 닿았던 뺨을 쓸어 보았다. 식은땀으로 축축할 뿐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몰려드는 피로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며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알람이 울리기 딱 2분 전이다. 알람을 미리 꺼 두려 잠금을 풀었다. 문자가 와 있었다. 발신자는 뜻밖에도 잠수 중인 애인.

[할 말 있어 좀 보자]

[저녁에 집으로 갈게]

헤어지자는 소리든 넘어가 줄 테니 다시 시작하자는 소리든 별로 궁금하지가 않다. 애인은 자존심이 강한 인간이었다. 휘어질 바엔 부러지고 마는 성격이 단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그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내 집에서, 내 돈으로, 먹고, 자고,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애인의 열등감은 나를 향한 패악질로 변했다.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자란 나 역시 그 치졸하고 서글픈 감정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 관계가 회복될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다 받아 주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잠깐 떨어져 지낸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건 이제 불가능하단 사실을 실감했다. 썩은 관계에 10년을 목맸던 내가 그저 한심했다. 한숨을 쉬며 간단하고도 단호한 답장을 보냈다.

[집은 안 돼]

이 시간에 내 문자를 기다린 듯 곧바로 답장이 왔다.

[왜?]

다른 남자가 네 침대에서 자고 있거든. 하고 보내면 애인이 어떤 기분일지,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궁금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가는 애인의 성격에 칼부림이 날지도 모른다. 애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적당한 변명거리를 고민하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그럼 내가 회사 앞으로 갈게]

웬일인지 애인의 태도가 고분고분하다. 그새 화가 풀린 거라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럼 7시까지]

반나절 안에 애인의 성질을 최대한 돋우지 않고 평화롭게 헤어질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결국 알람이 울렸고 요란한 소리에 제대로 자지 못한 머리가 욱신거렸다. 방을 나서려던 나는 반쯤 열려 있는 방문 앞에서 멈칫했다.

내가 어제 방문을 이렇게 많이 열어 두었던가?

쥐 죽은 듯 조용한 거실로 나가자 어젯밤 침대에 눕혀 두었던 남자가 소파 위에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냉장고가 활짝 열려 있다. 안 봐도 뻔했다. 남자가 새벽에 또 냉장고를 뒤진 모양이다.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자의 뒤치다꺼리가 마냥 귀찮지만은 않았다. 어질러진 냉장고를 정리하고 신선 칸을 열었다. 고기를 다섯 팩 꺼냈다가 한 팩을 더 꺼냈다. 애인을 만나면 귀가 시간이 늦어질 테니 넉넉히 먹여 놓는 편이 마음이 놓여서였다. 남자 전용이 된 하얀 대접에 생고기를 켜켜이 쌓아 두는 것으로 괴상한 상차림을 마치고 남자가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비좁은 소파 위에서 남자는 마치 아기처럼 몸을 말고 있었다. 깨우려고 손을 뻗다가 마음을 바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비쳐 드는 아침 해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깨끗한 피부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혼자 보기에 아까운 장면이었다. 어딘가에 화보로 써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손톱 아래 마디로 보기 좋게 솟은 뺨을 살살 쓸었다.

“얼굴이 아깝다.”

이 얼굴로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배고파’와 ‘고기’뿐이니 남자를 이렇게 만든 신도 참 야속하다. 하지만 내심 내겐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처럼 실컷 먹여 주고 보살펴 줄 테니까.”

남자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까만 눈동자에 온전히 나만이 담겨 있다.

“그냥 내 애인 할래요?”

“…….”

뺨을 쓸던 손으로 남자의 입술을 건드렸다. 그러겠다는 수락도, 싫다는 거부도 하지 못하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기묘한 만족감이 든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남자에게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고팠죠? 밥 먹을 시간이에요.”

∞ ∞ ∞

“조카 선물이라도 사 주려고?”

고 부장이 어깨 너머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아뇨. 그냥.”

급하게 보고 있던 사이트를 닫았다. 점심시간을 틈타 식사 때마다 티셔츠를 더럽히는 남자를 위해 턱받이 하나를 주문한 참이었다. 고 부장이 크게 떠들어 대는 바람에 주변의 관심이 쏠렸다. 시선이 모이자 고 부장은 더 신이 났다. 하나같이 못마땅한 시선들임은 모르는 눈치다.

“그럼 장가도 안 간 사람이 웬 아기용품을 봐?”

“잘못 들어간 겁니다.”

“에이 아닌데. 뭔가 있는데? 같이 애 만들고 싶은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

미친 새끼. 튀어나올 뻔한 욕을 가까스로 삼키고 속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거듭 아니라고 부인했다. 부하 직원들 괴롭히는 게 주요 업무인 고 부장에게 꼬투리가 잡히면 며칠은 고생이었다.

“부장님! 그만 하세요. 대리님 민망하시겠어요.”

“그래요. 그런 건 사생활이잖아요.”

“요즘은 그런 말도 다 직장 내 괴롭힘이래요.”

보다 못한 여자 사원들이 끼어들었다. 고 부장에게 당한 피해자가 많아 사내에 생긴 일종의 고 부장 퇴치 작전이었다. 오십 중반에 황혼 이혼을 당한 고 부장은 유독 여자 사원들에게 기를 못 폈다.

“어? 크흠, 그, 그런가. 자네는 좋겠네. 회사에 편들어 주는 사람도 있고.”

고 부장은 기름 낀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자리를 떴다. 사내에 떠도는 뜬소문의 원흉은 대부분 남 얘기에 사족을 못 쓰는 고 부장이었다. 게다가 술에 취하면 매번 진상의 새 역사를 쓰니 여러모로 역겨운 사람이다.

“대리님, 고 부장님 저거 다 질투예요.”

제일 먼저 나서서 고 부장을 막아 준 예 주임이 내 책상에 편의점 커피를 올려 둔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이유 모를 불편한 호의다.

“이것도 월급에 포함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커피 잘 마실게요.”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필요한 정도만 대꾸했다. 옆에서 “저기…….”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집에 두고 온 남자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 애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답지 않게 내 퇴근 시간이라도 재고 있던 걸까. 예전 같으면 기뻤겠지만 지금 와선 우스울 뿐이다.

[도착했어 회사 앞이야]

금쪽같은 금요일 밤을 무사히 보낼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를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날 발견한 고 부장이 말을 걸었다.

“벌써 가나? 금요일인데 다 같이 한잔해야지.”

“죄송합니다. 발목이 아직 다 안 나아서 술은 좀.”

“그런 건 저기, 다 알코올로 치료돼. 거, 남자가 발목 좀 삔 거로 약한 소리야?”

고 부장이 저토록 회식에 목숨을 거는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사정은 한참 달라졌다. 돌아가면 쓸쓸한 빈집에서 홀로 티브이나 보다가 오지 않는 잠을 붙들려 씨름할 고 부장과 다르게 나에겐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의사가 당분간 술은 절대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 참. 의사 말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그래. 자꾸 핑계 대는 거 보니 진짜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거 아니야?”

“하하…. 아닙니다. 정말로.”

억지로 만들어 낸 미소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전 오늘 선약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요.”

“저도 일이 많아서. 다음 주에 가시죠.”

주말을 사수하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밀어붙이니 고 부장도 결국 꼬리를 내렸다. 홱 감정 상한 면상에 가볍게 묵례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저기! 잠시만요, 대리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옆자리 예 주임이 급하게 따라 나왔다. 어깨에 걸친 가방으로 보아 퇴근길인 듯했다. 동행하자는 모양인데 지금 회사 앞에는 애인이 와 있어 곤란했다. 하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어쩔 수 없이 예 주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예 주임이 곁눈으로 날 힐끔거렸다. 내게 볼일이 있는 거라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기 전에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예 주임은 내가 먼저 말을 걸 줄 몰랐다는 듯 어깨까지 움찔대며 놀랐다. 엘리베이터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데 열릴 듯 말 듯 움찔거리는 작은 입술을 보니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게…… 실례인 줄 알지만, 대리님 여자 친구 있으세요?”

“네?”

껄끄러운 상황은 불쾌한 상황으로 돌변했다. 물어본 건 자기면서 예 주임은 한껏 당황해서는 고갯짓도 모자라 두 손까지 내저어 댔다.

“아, 고 부장님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냥 궁금해서요.”

“……아뇨. 없습니다.”

곧 헤어질 남자 애인과 정체 모를 이상한 남자를 키우고 있긴 하지만 여자 친구는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예 주임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 그렇구나.” 했다. 나는 그제야 예 주임의 호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아차렸다.

나를 왜?

황당했다. 이유가 뭐든 내겐 그저 귀찮은 감정이었다. 그냥 있다고 해야 했나. 뒤늦은 고민을 하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예 주임이 애인과 마주친다고 해서 나와 애인의 관계를 의심할 리는 없지만, 이래저래 나만 불편해질 상황을 구태여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예 주임을 뒤로하고 서둘러 건물을 나왔다.

한층 더 후덥지근해진 여름 공기에 금방 피부가 끈적끈적해졌다. 이마에 들러붙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익숙한 얼굴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그다지 멀지 않은 벤치에서 일어서며 애인이 성의 없는 투로 날 불렀다.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이 집에서 나갈 때 그대로다. 입가엔 나한테 맞아서 생긴 딱지가 아직 앉아 있었다. 그 꼴을 보니 그나마 남아 있던 정도 떨어진다. 외모를 보고 만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10년간 내 눈을 가리던 콩깍지가 드디어 떨어졌나 보다. 후줄근한 애인보다 저런 남자를 사랑한 나 자신이 창피했다.

누군가 알아볼세라 애인을 재촉했다.

“일단 어디 들어가서 얘기해.”

애인은 말없이 내 뒤를 따라왔고 나는 회사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골목 안쪽에 있는 작은 카페라 손님이 적었다. 최대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지는 편이 안전하겠지만 애인을 차에 태우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대충 주문을 마치자 애인과 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애인은 내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애인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한번 눈 감아 줄게.”

“……뭘?”

애인의 눈가가 와락 구겨졌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몰라서 물어?”

“어. 난 진짜 모르겠어서.”

여상한 투로 묻자 애인이 눈을 부라리며 발끈했다.

“너……!”

커피를 내온 점원을 보고 애인은 입을 다물었다. 쪽팔린 줄은 알면서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점원이 멀어지자 애인이 낮게 으름장을 놨다.

“마지막이야. 네가 나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고.”

마지막을 강조하는 애인 앞에서 나는 급할 것 없이 잔을 들었다. 대충 아무 차나 주문했는데 하얀 잔을 채운 액체의 색이 빨갛다. 가는 길에 맥주나 한 캔 사서 가야겠다. 그리고 맛있게 고기를 뜯어 먹는 남자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면 꽤 괜찮은 금요일이 될 것 같다.

“야, 내 말 안 들려?”

“필요 없어.”

“뭐라고?”

“네가 주는 기회 이제 필요 없다고.”

“……미쳤냐, 너?”

“미쳤으면. 걱정은 돼? 나 이제 너 데리고 살 생각 없어.”

“하.”

애인이 비틀린 얼굴로 날 비웃었다.

“아까 그 여자냐?”

이건 또 뭔 소린가 싶다.

“시치미 떼지 마.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너한테 붙어 있던 여자.”

예 주임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예 주임과는 3년째 직장 동료였다. 애인과 오며 가며 스쳐 지나간 몇 안 되는 동료 중 하나이기도 하고. 물론 애인은 기억도 못 하겠지마는.

“아주 좋아 죽겠단 얼굴로 너 쳐다보더라? 왜, 너 좋다는 여자 생기니까 꼴에 결혼해서 가정이라도 꾸리고 싶어졌어?”

더는 저따위 저급한 모욕을 들으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 낭비라면 지난 10년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나는 보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음대로 생각해. 더는 너하고 이런 얘기 하고 싶지도 않아. 여기서 끝내자.”

“야, 앉아.”

돌아가려다 말고 지갑에서 있는 대로 지폐를 꺼냈다. 오만 원짜리 두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자 애인은 얼이 빠져 입만 벙긋댔다.

“커피값.”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왔다. 몇 걸음 못 가서 뒤따라온 애인이 거칠게 내 어깨를 잡아챘다. 돌아본 애인의 표정이 참 웃겼다. 현실 파악이 안 돼도 한참 안 된 얼굴이다. 한때 더없이 달던 입술이 쓰게 비틀렸다.

“너 이러다 후회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아.”

“후회……. 그건 이제 네가 할 차례지. 조심히 가.”

어차피 갈 데도 없을 거다. 지갑에 있던 돈이 떨어지니 내게 연락한 거겠지.

“고생했어. 네 말대로, 나 같은 거랑 살아 주느라.”

부들부들 떠는 애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미련 없이 걸음을 뗐다.

“야! 너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뒤에서 들려오는 악에 받친 외침에 픽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런 때도 있었다. 너 없인 살 수 없을 줄 알았지. 외로움이 고통보다 싫어서 맞지 않는 조각을 내 살까지 파내 가며 끌어안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소리를 질러 대는 애인을 쳐다본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서서 쌍욕이라도 해 주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저 벌레만도 못한 놈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려고 최대한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 ∞ ∞

집에 돌아온 내 손에는 계획대로 맥주 한 캔과 남자에게 줄 특등급 한우 한 팩이 들려 있었다. 10년의 묵은 때를 벗겨 내서일까, 모처럼 개운한 기분이었다.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재킷을 벗어 대충 의자에 걸어 두었다. 집 안이 조용했다. 내가 없는 동안 무료할 남자를 위해 켜 둔 티브이 소음만 아무도 없는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남자를 찾아 부르려다가 아직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다. 남자에게 임시로라도 이름을 붙여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남자는 애인의 방에도 화장실에도 없었다.

설마 밖으로 나간 건 아니겠지. 잠깐 걱정이 들었지만, 방문도 열 줄 모르는 남자가 도어록이 달린 현관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남은 곳은 한 곳. 설마 하면서 내 방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침대 위에 남자가 몸을 둥그렇게 말고 누워 있었다. 잠깐 놀랐다가 내 이불을 끌어안고 웅크린 모습이 귀여워 그만 웃음이 났다. 그사이 내게 정이라도 들었는지 반나절 떨어져 있었다고 내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일어나 봐요. 내가 진짜 맛있는 고기도 사 왔는데.”

눈을 뜬 남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두 개의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나는 얼굴은 어느 모로 보나 길거리에서 주울 법한 미모가 아니다.

이대로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썩 떳떳하지 못한 본심을 숨기고 상냥히 웃어 주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혹시 혼자 둬서 화난 거예요?”

표정이 없는 얼굴을 역시 나 좋을 대로 해석하며 남자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는 상대를 마주하고 이렇게 유쾌할 수가 있을까.

“밥 먹을까요, 우리?”

끌어안고 있는 이불을 조심스레 빼내자 말귀를 알아들은 남자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착하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놓고 당황했다. 남에게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동에 어색하게 올라간 손을 내리려는데 눈을 깜박이던 남자가 고개를 기울여 내 손바닥에 다시 정수리를 대 왔다.

계속해 달란 건가……?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러운 머리칼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남자는 딱히 원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얌전했다. 하긴 악의 없는 손길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다만,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쓰다듬는 쪽은 나인데 기분이 좋아지는 쪽도 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귀여워…….”

“……고기.”

나지막한 남자의 중얼거림에 한발 늦게 어이가 없어졌다.

“쓰다듬게 해 줬으니 먹을 거 내놔라, 그 뜻이에요?”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남자의 애교 아닌 애교가 꽤 달가웠다. 남자를 식탁에 앉혀 두고 늦은 저녁을 준비하면서 어느덧 애인과의 구질구질한 이별은 까맣게 잊혀 갔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를 두고 나 혼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려 큰일이었다.

“왜요. 맛이 별로예요?”

접시에 몇 번 씹지도 않은 두툼한 등심이 철퍽 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막 한 모금 마신 맥주를 내려놓았다. 그간 남자가 고기를 남기는 일이 없었기에 놀라 물었지만 남자는 피가 묻은 입술만 핥아 댔다.

아침에 평소보다 많이 먹여 두긴 했지. 그래도 비싼 건데.

맛있게 먹는 모습을 기대한 터라 내심 아쉬워하며 티슈를 뽑아 남자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사실 오늘이 나한테는 되게 기념할 날이에요.”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남자는 내 말에 집중하는 듯 보였다. 핏물을 흡수해 눅눅해진 티슈를 손바닥 안에 말아 쥐고 엄지로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마저 훔쳐 주었다. 말랑한 입술이 미는 힘에 아래로 살짝 벌어졌다가 퉁, 탄력 있게 본래의 하트 모양으로 돌아간다.

“이제 이 집에는 나밖에 안 사니까 있고 싶은 만큼 편하게 있어도 돼요.”

남자의 입술 안쪽에 닿았던 엄지가 묽은 핏물과 투명한 타액에 젖어 반짝였다. 어쩌다 묻은 소스를 빨아 먹듯 엄지를 쪽 빨고 맥주와 함께 혀 위에 감도는 비릿한 맛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배부르면 고기는 내일 또 먹어요. 알았죠?”

남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이제는 나도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잘 준비를 했다. 남자를 씻겨 옷을 갈아입히고 애인의 방으로 가려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방문 앞에 멈춰 섰다.

굳이 계속 다른 방을 써야 할까?

술기운에 느슨해진 머리가 가뜩이나 의사 표현도 불가능하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이지 못한 남자를 밤에 혼자 재우는 짓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단 결론을 내렸다. 돌아본 남자는 하필이면 촉촉하게 젖어 있어 나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음.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내가 뭐라고 하든 상관할 남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내 의도가 그다지 깨끗하지 못하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다가 그쪽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불안하기도 하고…….”

빤히 보는 까만 눈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괜스레 목덜미를 쓸며 이 방은 에어컨이 없어 한여름이 되면 더울 거라는 변명까지 덧붙여 가며 은근슬쩍 본심을 꺼냈다.

“앞으론 같이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괜찮죠?”

침묵은 긍정이라 했다. 긍정보다는 부정의 반응이 격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시험 삼아 내 방 쪽으로 방향을 틀어 슬쩍 남자를 끌어당겨 봤다. 순순히 따라오는 남자의 발걸음에 안도했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이 방 침대가 더 넓으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내 방 침대 한편에 남자를 눕혔다. 양심의 가책 탓인지 괜한 소리가 자꾸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같이 누워 자고 싶었을 뿐, 결코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흑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남자가 먼저 원한다면 몰라도…….

아니지. 고개를 털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을 끊어 냈다. 행여나 남자가 불쾌하지 않도록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러워졌다. 어색한 몸짓으로 이불을 걷고 침대에 누웠다.

“자다가 배고프면 나 깨워요.”

마치 그런 이유로 함께 자는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옆에 누운 남자를 힐끔거렸다. 남자의 눈이 감기는 모습을 확인하고 어두운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묘한 안정감이 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고작 한 사람분의 무게감이 더해졌을 뿐인데.

이 집에 사는 5년 동안 느껴 보지 못한, 집 안이 꽉 찬 기분. 창피함을 무릅쓰고 같이 자자고 하길 잘했다.

“잘 자요.”

“…….”

말 한마디 없이도 가득한 존재감을 안겨 주는 남자에게 작게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 ∞ ∞

모처럼 푹 잠을 잔 덕분인지 주말인데도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잠든 남자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방을 나와 제일 먼저 남자가 먹을 고기를 준비했다. 그득히 쌓인 고기를 보니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 뿌듯하다. 요리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기에 지금 와서는 생고기를 먹는 남자의 식성이 고맙기까지 했다.

준비를 마치고 남자가 깨길 기다리며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길 몇 시간째. 정오가 지나도록 깨지 않는 남자가 걱정되기도 하고 기다림에 지쳐 슬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똑바로 누워 있던 남자는 어느새 또 아기처럼 웅크린 자세를 하고 있었다. 도무지 면역이 생기지 않는 귀여운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남자를 깨웠다.

“벌써 점심때가 다 됐는데 배 안 고파요? 어제 고기도 남겼잖아요.”

“…….”

“저기, 괜찮아요?”

‘고기’ 소리에도 남자는 미동조차 없다. 조심스레 남자의 어깨를 당겨 똑바로 눕게 했다. 그러자 좋았던 기분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잠든 줄 알았던 남자는 상태가 나빴다. 처음 만난 날처럼 안색이 흐리고 온몸이 차가웠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보였다.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서둘러 생고기를 한입 크기로 조각내 와 남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닫힌 입술을 더럽히기만 할 뿐이었다.

“어디가 아픈 건지 말이라도 해 줘요. 네?”

소용없어진 고기를 치워 버리고 따듯한 물에 수건을 적셔 와 차게 식은 몸을 닦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다. 남자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익히지 않은 고기를 그렇게 먹어 댔으니 탈이 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난 남자의 이름조차 몰랐다. 병원에 접수하는 동시에 경찰에도 남자의 신변이 넘어갈 테고, 혹시 남자가 실종 신고라도 되어 있다면 경찰이 내게서 남자를 빼앗아 가는 것을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건 안 되지. 절대.”

뭐라도 해야 했다. 집 안의 온도를 높이고 두꺼운 겨울 이불을 꺼내 남자에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내 체온을 조금이라도 나눠 주고자 남자의 옆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남자의 차가운 몸에 달라붙어 가슴 위에 팔을 둘러 안았다.

“눈 좀 떠 봐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줘요.”

초여름이었다. 내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는데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남자의 몸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체온이 오르자 숨이 가빠졌다. 남자와 닿은 부분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열기가 이성을 녹인다. 아찔해진 의식으로 헐떡이는 숨을 쏟아 냈다.

“말해 봐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죽은 듯 누워 있는 남자의 가슴에 귀를 대고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에 집중했다. 남자가 내게 뭐라도 말해 주길 바라면서.

∞ ∞ ∞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서늘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천천히 시야가 밝아졌다. 익숙한 내 침실의 천장에 짙게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밤인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윽.’

문득 골반을 스치고 예민한 배꼽 아래를 간지럽히는 감각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의도가 분명히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내려다보니 하반신을 덮은 이불이 거대하게 부풀어 있다. 그 안에 누군가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단숨에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도사리고 있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남자였다. 어느새 벗겨진 건지 이불 아래 내 몸은 헐벗은 상태였다. 이미 피가 몰려 곧추선 내 성기를 쥔 남자가 붉은 입술을 벌려 딱딱해진 끄트머리를 머금어 갔다. 예민해진 귀두가 뜨겁고 축축한 점막에 감싸이는 감촉이 척추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남자는 내 반응을 살피듯 곧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남자가 힘을 주어 입안을 조였다. 동시에 뜨거운 혓바닥으로 요도 부근을 뭉근하게 문질러 댔다.

‘아!’

뒤통수를 베개 위에 떨구며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흐으…….’

뿌리까지 삼켜지는 살 떨리는 쾌감에 이번엔 허리가 떠올랐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각이 낯설기까지 하다. 남자는 입술을 단단히 조이며 달아오른 기둥을 쭙 빨아올렸다가 다시 혀로 기둥을 감싸며 목구멍까지 완전히 삼켰다. 애인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눈물이 핑 돌 만큼 정성스러운 애무였다.

‘하앗, 아… 하아…!’

백치의 남자가 어떻게 오럴섹스를 알고 있는지, 심지어 잘하기까지 하는지 따위를 궁금해하기에 나는 애정 어린 접촉에 너무 굶주려 있었다.

‘아… 잠깐. 너무, 흣… 깊어요.’

연한 입속 점막을 쑤시는 감각이 무서워서 남자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남자는 얼마든지 해도 좋다는 듯 혓바닥을 아래쪽에 납작하게 붙이고 목구멍을 더 열어 주었다. 처음 맛보는 배덕한 정복감에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하읏…!’

남자의 매끈한 콧날과 턱이 아랫배와 사타구니를 찌르는 느낌이 미치도록 좋았다. 사정 욕이 강렬하게 밀려왔으나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다. 사정을 미루려 들썩이던 허리를 바닥에 바짝 붙이자 내 허벅지를 붙잡아 벌리고 있던 남자의 손이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리고 터질 듯이 부푼 음낭을 지나 땀이 밴 회음을 쓸어 올린다.

‘흐으….’

이윽고 남자의 손가락이 간질이듯 꽉 다물린 주름을 배회했다. 그 손길에서 무언의 욕망이 읽혔다. 고개를 들어 내 다리 사이에 엎드린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내 것을 입에 물고 있었다. 뜨거운 시선이 엉켜 들었다.

처음부터 남자는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욕망을 자극했다. 남자의 눈을 보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남자의 시선에 갇힌 채 흥분으로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기대감에 다물린 입구가 움찔거린다.

너도 하고 싶었어? 차마 묻지 못한 내 더러운 욕망을 남자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구멍을 강하게 짓눌렀다.

‘흣!’

그 자극이 기폭제가 되어 벌써 속이 뚫린 것처럼 허벅지 안쪽이 경련했다.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그대로 남자의 입속에 사정했다.

‘흐, 으…….’

여운은 치솟았던 쾌감만큼 길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잔상에 떨며 완전히 탈력해 버린 몸으로 겨우 고개를 비틀어 아래를 보았다. 남자의 입에서 물렁해진 내 성기가 툭 빠져나왔다. 남자가 허리를 세워 앉았다. 유난히 붉고 탱탱하게 부푼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모습을 나는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안쪽으로 끝이 말린 빨간 혓바닥 위에 희뿌연 정액이 가득하다. 꿀꺽 불거진 목울대가 과장되게 일렁인다. 남자는 내가 싸 놓은 정액을 삼키고 씨익 웃었다.

‘맛있다.’

낯선 남자의 모습에 당황할 새도 없이 몸이 쑥 꺼지는 감각이 나를 덮쳤다. 깜짝 놀라 일어나 앉은 내 몸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축축해진 옷이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었다.

……옷?

두꺼운 겨울 이불을 들쳐 본 나는 곧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꿈……이라고?”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몽정이었다. 확실히 속옷 안쪽이 질척했다. 허탈감과 자괴감이 밀려들어 웃음도 나지 않았다. 사춘기 때도 몰랐던 걸 이 나이 먹고 겪게 되다니, 어이가 없다 못해 쪽팔릴 지경이다.

어차피 봐도 모를 남자였지만 그렇다고 보여 줄 만한 모양새도 아닌지라 나는 조심히 몸을 일으키며 남자가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반쯤 젖혀진 이부자리가 비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남자의 상태가 떠올랐다. 더러워진 속옷을 갈아입고 급히 거실로 나왔다. 제일 먼저 티브이 앞에 앉은 남자의 까만 뒤통수가 보였다. 아주 그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내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가 보다.

“몸은 좀 괜찮은 거예요?”

남자가 나를 스윽 본다. 꿈속에서와 달리 말간 눈동자를 보니 죄책감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남자의 고개도 다시 화면으로 돌아간다. 지금 어색한 건 아마도 제 발 저리고 있는 나 혼자겠지. 겸연쩍어 뺨을 긁적이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뭐 좀 먹을래요? 먹을 수 있겠어요?”

“……고기.”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의 목소리는 퍽 기운이 없었다. 티브이에선 이따금 즐겨 보던 동물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이었다. 사바나 초원에서 가젤이 풀을 뜯고 있다.

“저게 먹고 싶어요?”

가젤 고기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혹시나 해서 핸드폰으로 가젤 고기를 검색해 봤다.

“저건 어렵고, 대신 양고기는 어때요?”

“……고기.”

화면은 사자가 도망가는 가젤의 목덜미를 무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눈이 번질거린다. 처음 아파트 화단에서 튀어나왔을 때의 그 눈빛.

『사자들이 먹고 난 사체는 하이에나의 차지가 됩니다.』

죽은 가젤을 질질 끌고 가는 하이에나가 나오자 남자의 눈동자에 서렸던 이채가 사라진다. 자리에 서서 남자와 화면을 번갈아 보며 상반된 반응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나는 서둘러 냉장고에서 가장 싱싱한 생고기를 꺼내 남자에게 가져갔다.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더는 남자를 먹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배고프죠? 여기 고기예요. 얼른 먹어요.”

남자는 잠시 시선을 주더니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던 비싼 소고기였다.

“왜 그래요? 좋아했잖아요. 싫으면 다른 고기로 가져올까요? 닭? 돼지?”

내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남자의 손끝이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들에 향해 있다. 나는 그만 고깃덩이가 든 팩을 놓쳐 버렸다. 내 불길한 상상이 맞아 들었다.

살아 있는 고기. 그것이 남자가 원하는 것이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마트 직원이 몇 분째 한 코너를 서성이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아, 고기를…….”

“어떤 고기요? 오늘 들어온 소고기가 진짜 싱싱해요.”

마트 직원이 내민 빨간 생고기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혹시 여기 살아 있는 고기는 없습니까?”

“예?”

마트 직원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직원의 시선을 무시하고 나는 냉장고에 가득 쌓인 고기들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싱싱해도 이것들은 다 죽은 고기였다. 애초에 마트에서 살아 있는 고기를 찾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닭이나 돼지를 가져가라고? 만에 하나 어디서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 간다고 한들 진짜로 남자가 그것을 눈앞에서 잡아먹기라도 하면?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정말 남자가 살아 있는 짐승에 식욕을 느끼는 거라면 솔직히 무섭고 거부감이 든다. 그런데 생각을 할수록 비이성적인 공포는 옅어지고 점차 납득이 갔다.

평범한 일은 아닐지라도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극한의 상황에 부닥치면 같은 인간도 잡아먹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남자는 정상적으로 사회화가 된 인간이 아니었고 이성보다 본능이 강했다. 어디 야산에서 사냥하며 살았을 가능성도 있으니 짐승을 산 채로 먹고 싶은 욕구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남자와 달리 나는 사회화된 이성적 인간이다. 아무리 약육강식의 동물 다큐멘터리를 즐겨 본대도 그건 야생의 짐승이고 또 어디까지나 화면 너머의 세상이었다.

내 고민은 몇 시간 전부터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았다. 내 말에 혼자 고민하던 마트 직원이 별안간 손뼉을 쳤다.

“활어 찾으시는구나! 생선 코너는 저쪽이에요.”

“네?”

“예? 살아 있는 고기 찾으시는 거 아니세요?”

마트 직원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물이 가득한 수족관에 각종 생선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다. 보글보글, 살아 숨 쉬면서.

집으로 돌아와 혹시나 하며 남자의 앞에 펄떡거리는 생선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남자는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이 생선을 뜯어 먹었다.

생선 특유의 어딜 보는지 모르겠는 눈동자며 갈라진 아가미는 내겐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대가리를 물어뜯기는 날생선의 몸부림은 동정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어디의 무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생선도 고통을 느낀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는데, 그런 연구는 뭐 하러 하는 건지. 그렇다고 먹지 않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런 불편한 진실과는 별개로 손질도 안 된 생선을 뼈째 아작아작 씹어 가며 잘 먹는 모습을 보니 한시름 놓였다.

“좀 천천히 먹어요.”

내장에서 흘러나온 갈색 즙이 예쁜 얼굴을 더럽히지 않도록 맞은편에 앉아 틈틈이 남자의 얼굴을 닦았다.

“턱받이가 빨리 와야겠네.”

반쯤 먹힌 생선의 꼬리가 축 늘어진다. 머리부터 먹혀 고통이 짧았을 거다. 냉장고 신선 칸을 채우던 생고기는 싹 냉동실로 옮겨졌다. 매번 활어를 먹이려면 수족관이라도 들여놓아야 하나 고민이다. 급한 대로 당분간은 가까운 횟집에서 활어를 사다 먹일 계획이었다.

“더 줘.”

“……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생선 한 마리를 다 먹은 남자가 처음으로 ‘고기’와 ‘배고파’ 말고 다른 말을 했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어쩌면 진짜로 남자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희망이 보였다.

∞ ∞ ∞

『안녕~. 안녕~. 모두 오늘도 인사하지요~.』

색색의 배경 앞에서 아이들이 두 손을 흔들며 노래하는 장면이 티브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인사법을 가사에 붙인 어린이 교육용 동요는 강산이 약 세 번 바뀔 때까지 살아온 내가 들어도 익숙한 멜로디여서 한 번 듣고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귀에 쏙쏙 박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동용 채널을 틀어 놓고 소파에 앉아 남자에게 말을 가르쳐 보는 중이었다. 형형색색에 북적북적한 화면을 보는 남자의 반응도 마냥 흥미가 없진 않은 것 같다.

“안녕은 다른 사람이랑 만나거나 헤어질 때 하는 인사예요. 이렇게요.”

남자의 손을 잡아 허공에 흔들다가 은근슬쩍 손깍지를 꼈다. 무언가 반응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싶던 때, 힘없이 잡혀 있던 남자의 손이 내 손을 맞잡는 힘이 얼핏 느껴졌다. 놀라 쳐다봤지만 남자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남자가 내게 보내는 신호들이 정말 내 착각일 뿐인지 답답했다.

『해님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밥 잘 먹겠습니다~. 다 같이 밥 먹으면 맛있어~.』

“맛있어는 알죠? 한 적 있잖아요.”

아, 그건 내 꿈에서였던가.

지난밤 꿈이 아직 생생했다. 남자가 맛있다고 삼킨 것이 뭔지 떠오르자 얼굴이 뜨끈뜨끈해진다. 얼른 잡고 있던 손을 풀어 뺨을 식혔다. 평소 꿈을 그리 자주 꾸는 편이 아닌데 최근 들어 악몽에 몽정까지, 뭐 때문인지 잠자리가 영 좋지 않다.

『엄마, 아버지, 오빠, 언니, 할아버지, 할머니도 잘 먹었습니다~.』

“어, 이건 필수네요. 밥 먹이는 보람밖에 없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듣고 싶…….”

잘하는 거라곤 먹는 것뿐이니 가르쳐 두면 제일 잘 쓸 수 있을 말이라 들떠서 다시 남자를 봤다. 그런데 화면을 보고 있을 줄 알았던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

손수 씻겨 놓은 하얀 얼굴이 예뻤다. 만지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왜, 그래요?”

남자와 눈이 마주치면 긴장이 된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인지 살짝 붉은 눈가가 야해서인지 이젠 모르겠다.

‘고기’나 ‘배고파’로 분위기를 깨던 남자가 웬일로 조용하다. 이 적막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심장이 두근거리며 전신의 혈관으로 피를 뿜는다. 뿜어진 피가 하고많은 장기 중에 하필이면 다리 사이로 몰린다.

『안녕~. 안녕~. 모두를 정말 좋아해요~.』

경고등이 울려 대는 내 머릿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노랫소리가 마지막으로 조금 특별한 인사를 한다. 말을 하려고 입을 떼고 나서야 내 숨이 뜨거워졌다는 걸 알았다.

“좋아해요.”

“…….”

“-가 무슨 말인지 알아요?”

사람을 홀리는 얼굴로 남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그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이 내 욕망을 부채질한다. 알려 주면 어떤 얼굴로 변할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졌다.

“가르쳐 줄게요.”

꿈에서 남자의 입속에 사정한 순간부터 내 이성은 바닥난 상태였다. 무책임하게 꿈속의 남자를 탓하며 현실 속 남자의 뒤통수를 잡아당기고 급하게 입술을 물었다. 거의 달려들다시피 했다.

남자의 입술은 무방비했다. 도톰한 입술을 혀로 핥고 입술로 물다가 쉽게 벌어지는 틈을 가르고 들어갔다. 혀에 날카로운 치아가 닿았다. 문득 남자가 내 혀를 고기로 착각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러나 지금 내 의식의 고삐를 쥔 건 이성이 아니라 들끓는 욕망이었다.

“깨물면 안 돼요.”

잠깐 뗀 입술 사이로 말을 흘리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고개를 비틀고 목덜미를 당겨 한껏 달라붙었다. 혀로 남자의 고른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비벼 대며 자극했다. 그러자 얌전하던 남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아… 느꼈어요?”

제 이름 하나 모르는 백치라도 남자는 남자였다. 그리고 몸을 대고 다리 사이를 만져 주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남자였다.

조금의 저항도 없는 남자의 매끈한 턱을 지나 목으로 입술을 미끄러트리며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아 보드라운 맨살이 바로 만져졌다. 털이 없어 매끈한 하복부를 손바닥으로 쓸고 내려가 군침을 삼키며 구경만 했던 그것을 쥐었다.

“……뭐야.”

손안에 쥐어진 묵직한 살덩이가 말랑하다. 바지를 찢을 듯 서 버린 나와 같진 않더라도 조금은 발기했을 줄 알았는데.

망연해진 기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어색하게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남자의 입술이 내 침으로 번질거렸다. 누군가 머리 위에서 찬물을 쏟은 듯 정신이 들었다.

내가 미친 게 확실했다. 이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아니, 이미 범죄였다.

“미안해요. 내가…….”

증거를 없애는 범인처럼 소매로 남자의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도망친 욕망이 무책임하게 놓아 버린 고삐를 바꿔 쥐느라 나는 허둥지둥했다. 뒷걸음질 치며 일어나다가 그만 커피 테이블에 오금이 걸렸다. 몸이 뒤로 휘청거렸고 넘어지지 않으려는 두 팔은 허공에서 휘적댔다.

꼴사나운 비명이 터지기 직전, 내 몸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품 안에 안겼다.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넘어지는 나를 받아 든 것이다. 내가 저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다치지 않도록…….

상황을 파악하자 수치심이 밀려왔다. 아랫도리에 몰렸던 피가 얼굴로 솟구친다. 이런 순진한 남자를 이용해 욕구나 풀어 보려 한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좀, 잠시만. 미안해요. 잠깐만 혼자 있을래요? 금방 올게요.”

다정하고 포근해서 더 죄책감을 자극하는 너른 품을 떨치고 남자에게서 도망쳐 집을 나왔다.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거울에 쿵 이마를 박았다.

쓰레기. 그 단어로밖에 나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감정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나는 그 남자를 좋아한다.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고 평범한 사람도 아니지만 좋아하게 됐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 차근차근 애정을 쏟다 보면 남자도 언젠가는 응답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횟집에 들러 활어를 샀다. 아까보다 더 크고 싱싱한 놈으로 골랐다.

“어떻게 손질해 드릴까요?”

“그냥 주세요.”

“회 좀 뜨시나 보네.”

회는 고사하고 과일도 잘 못 깎았지만 펄떡거리는 비닐봉지를 받으며 그냥 웃었다. 먹을 거로 사과한다는 게 조금 치사한 방법이다 싶긴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에게 가장 확실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남자가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어쨌든 남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 수 없고 난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돌봐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남자와 내가 함께 있을 이유는 지금으로서는 그거면 충분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타자 자기의 미래를 예감했는지 생선이 비닐봉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펄떡거렸다.

“미안하다.”

남자 덕분에 혼잣말이 늘어 생선에게까지 사과를 하는 내 모습이 민망하면서도, 남자로 인한 변화가 싫지만은 않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풀었다. 문이 열리고 내리려고 보니 나올 때는 없었던 작은 택배 상자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어? 왜…….”

도망치듯 나오느라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걸까. 훅 불어난 불길한 예감에 비닐봉지도 내팽개치고 급하게 현관으로 들어섰다가 발밑이 미끄러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뭐지…?”

현관 타일이 온통 젖어 있어 조금만 움직여도 신발 밑창에서 연신 뿌드득 소리가 났다. 타일이 검어서 뭐가 묻었는지 알기 힘들었다.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붉은 액체가 현관을 넘어 레드카펫처럼 소파까지 이어져 있었다.

“윽.”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녕~. 안녕~. 모두 오늘도 인사하지요~.』

티브이에서는 아직도 그 동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화면을 보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러나 그 정도의 옅은 안도로는 집 안을 새빨갛게 적신 불안감을 밀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어디 다친 거예요? 이게 다…….”

우적우적.

남자에게로 다가가던 발걸음이 멈췄다. 남자가 뭔가를 먹고 있었다. 먹을 걸 꺼내 놓고 간 기억이 없었으므로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확인했다. 굳게 닫힌 냉장고와 깨끗한 식탁을 보자 두 발이 늪에 빠진 것처럼 땅에 붙어 버렸다.

“뭐…… 먹는 거예요. 지금?”

남자는 반응이 없다. 저작 운동을 하는 아래턱만 위아래로 움직인다. 소파를 돌아가는 다리가 납덩이를 매단 듯했다.

찌걱찌걱.

벗지 못한 신발 밑창이 끈적하게 젖어 갔다.

『해님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밥 잘 먹겠습니다~. 다 같이 밥 먹으면 맛있어~.』

저 빌어먹을 노래를 꺼 버리고 싶었다. 앞에서 본 소파 역시 온통 붉게 젖어 있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건 피였다. 그렇지만 피라고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날생선이나 생고기로는 어림도 없는 양이다. 문 앞의 택배와 열려 있던 현관문이 머릿속에 불길한 가정을 세웠다.

아닐 거다. 또 내 착각이겠지. 하지만 마음과 달리 피 냄새에 섞인 불안과 공포가 머릿속에 스며 빠르게 번져 갔다. 손끝은 차가워지고 두 다리는 덜덜 떨렸다. 나는 간신히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피 칠갑을 한 남자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에 문 것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엄마, 아버지, 오빠, 언니, 할아버지, 할머니도 잘 먹었습니다~.』

남자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툭 떨어뜨렸다. 내 시선이 그것을 따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모자였다. ‘백운택배’라고 적힌 로고가 피로 얼룩덜룩했다.

“흡!”

채 삼키지 못한 비명이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남자의 고개가 나를 향하는 것이 깨질 듯한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 몸속의 모든 장기가 쪼그라드는 것 같아 더 버티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다고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지만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끔찍한 공포 속에서 빌어먹을 노래가 끝나 갔다.

“잘 먹었습니다.”

너무도 평온한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남자가 웃고 있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휜 눈과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너무도 예뻐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믿기지 않았다.

“맞, 죠?”

내게 되묻는 남자의 턱에서 뚝, 뚝, 진득한 피가 떨어졌다.

사람을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사람을 잡아먹었다.

내 머릿속은 오직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 또 더, 더러워졌어요.”

남자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을 했다. 충격으로 망가진 뇌는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그 부작용인지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왜 울어요? 나 때, 때문에?”

남자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더듬거리는 말투와는 조금 달랐다. 버퍼링에 걸린 영상처럼 말 사이가 뚝뚝 끊어져 기묘했다. 사람의 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와 비슷했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찌걱거리며 소파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크고 하얀 발이 거리낌 없이 피 웅덩이를 철퍽 밟는다.

언제나 멍하던 남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나를 걱정하는 듯한 감정이 깃든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다움마저 소름 끼쳤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그림자가 공포에 질린 나를 뒤덮었다. 남자가 커다란 손을 든다. 어깨가 움찔했다. 피 냄새가 짙게 밴 서늘한 손바닥은 가만히 내 뺨을 덮고 눈물을 훔쳐 냈다.

“미안해요. 잘못했, 했어요.”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남자가 내뱉는 모든 말들이 그가 파 놓은 함정으로 이끄는 달콤한 미끼 같다. 자꾸만 젖어 드는 눈을 부릅뜨고 다른 무언가로 변해 버린 남자에게 물었다.

“너…… 정체가 뭐야?”

피로 물든 얼굴이 말없이 미소 짓는다. 남자의 두 팔이 나를 감싸려는 듯이 벌어졌다.

잡히면 안 돼.

나는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쳐 내고 지옥이 되어 버린 집을 뛰쳐나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아직 30층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남자가 뒤따라와 날 집어삼킬 것만 같아 엘리베이터에 올라탐과 동시에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러 댔다. 무사히 문이 닫혔다. 거울로 피가 묻은 뺨을 발견한 나는 황급히 티셔츠를 끌어 올려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집을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순하디순하던 남자였다. 아파트를 빠져나와 목적지도 정해 놓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미친놈처럼 혼자 내달리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야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연거푸 헛구역질해 대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누르는 손이 떨려서 고작 번호 세 개를 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간신히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내 심정과 달리 단조로운 연결 음이 이어졌다.

―네, 송산 경찰서입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현실감에 혀가 굳었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나도 내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는데.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헛소리를 믿어 줄까? 정말 사람을 먹긴 한 걸까? 남자가 물고 있던 건 택배 기사의 모자였을 뿐이다. 시체는?

언뜻 본 집 안에 그런 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집을 비운 시간은 겨우 30분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성인을 먹어 치우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공포가 가신 머리가 뒤늦게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

만약 정말로 내가 본 것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문제였다. 나까지 엮여 조사를 받게 되면 회사나 가족들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인육을 즐기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집에 데려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서 매장되어 영영 고립될 터였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여보세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네요.”

전화를 끊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미지근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스치자 머리가 식는다. 일단은 확실히 하는 것이 먼저였다.

남자가 사람을 먹은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또 내 어이없는 착각인지. 어쩌면 남자가 단순히 택배 기사와 몸싸움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다시 집으로 돌아가 모든 걸 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도어록 잠금 해제 소리가 천둥처럼 복도에 울렸다. 문고리를 붙잡은 채 안쪽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서 아주 천천히 현관문을 당겼다. 조용히 들어선 집은 조금 전에 본 지옥 그대로였다.

“아…….”

절망 섞인 탄식이 흘렀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말라붙어 가는 핏자국 위로 내 발자국이 어지럽게 섞여 있다. 누군가 볼세라 급히 문을 닫고 현관에 서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남자는 거실에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아까처럼 신발을 신은 채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도 주방에도 없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일전의 기억을 떠올려 내 방으로 직행했다. 역시나 살짝 열려 있는 문 안으로 핏빛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발자국은 그것뿐이다. 내가 나가고 혼자 남겨진 남자가 정해진 것처럼 내 방으로 향한 것이다.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에 등허리가 뜨끔해진다.

숨을 죽이고 방문을 밀었다. 펼쳐진 풍경은 언젠가 본 것과 닮아 있었다. 피투성이의 남자가 저번처럼 내 침대 위에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나는 모든 걸 확실히 하고자 마른침을 삼키며 다가갔다.

잠든 얼굴의 눈가가 유독 붉다. 꼭 울기라도 한 것처럼. 이 와중에도 그 모습에 심장이 철렁한 나 자신에게 경악했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을 지우며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깨지 않게 조용히 방을 나와 문을 닫고 식탁 의자를 끌어왔다. 의자 등받이를 방문 손잡이에 걸어 열리지 않게끔 만들었다. 갑자기 말도 잘하게 되었으니 언제 문을 열 수 있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문을 완벽하게 틀어막긴 충분하지 않더라도 나올 낌새가 보이면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어 줄 터였다.

남자를 방에 가두고 본격적으로 집 안을 뒤졌다. 그러나 피만 낭자할 뿐 집 안 어디에도 시체 같은 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거실 중앙에 서서 머리를 쥐어뜯어 봤자였다. 일단은 피가 말라붙어 가는 바닥을 닦았다. 걸레는 금방 시뻘겋게 물들었다. 바닥을 다 닦았을 때는 후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할 정도였다.

쉬지 않고 커터 칼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든 피범벅이 된 소파를 치워야 했다. 그대로 내놓는 건 불가능했다. 커터 칼로 가죽 소파를 죽죽 찢었다. 갈라진 틈으로 피가 스민 솜과 스펀지가 내장처럼 튀어나왔다.

조각난 가죽과 스펀지 따위를 쓰레기봉투에 욱여 담고 뼈대만 남은 소파의 목재 프레임도 부쉈다. 4인용 소파 하나를 모두 해체하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여러 개의 대형 쓰레기봉투에 나눠 담긴 소파는 더 이상 본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넋이 나간 채로 기계처럼 쓰레기봉투를 내다 버렸다. 녹초가 된 몸으로 마지막 남은 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내 것 같지가 않았다. 현실감이 없어 멍하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남자가 나온 건가? 허겁지겁 닫힘 버튼으로 손을 뻗었지만, 열리는 문을 막기엔 늦어 버린 후였다.

누군가가 폐쇄된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아, 옆집 총각!”

옆집 할머니였다. 반색하던 노인이 내 얼굴을 보곤 놀라며 합, 입을 다물었다. 힐끔힐끔 땀에 젖은 내 몰골을 살피더니 쓰레기봉투를 쳐다봤다. 나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쓰레기봉투를 슬쩍 뒤쪽으로 숨겼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코를 슬며시 막는다. 좁은 공간이 비린내 나는 정적에 잠겼다.

“같이 사는 그 총각이랑 또 싸운 거예요?”

“……네?”

순간 남자를 말하는 줄 알고 당황했으나 노인이 말하는 ‘그 총각’은 아마도 애인일 터다. 옆집 노부부와 생활 패턴이 겹치지 않는 나와 다르게 애인은 종종 ‘미친 할멈’과 마주쳤다. 그런 날이면 애인은 꼭 술에 취해 있었다.

「미친 할멈이 뭐라는 줄 아냐? 나보고 멀쩡한 친구 혼삿길 막지 말라더라. 어이가 없어서 노인네 면상에 대고 욕이 다 나왔네. 네가 남자한테 박히는 놈인 줄도 모르고 멀쩡하단다.」

잊고 있던, 그러나 지워지진 않던 기억이 불쑥 내 목을 움켜쥔다. 노인이 무책임하게 던진 참견에 맞는 건 유감스럽게도 결국 나였다.

“……싸운 거 아닙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요새 자주 그러네. 혹시 그놈이 때리고 그래요? 아까 막 소리 지르구 그래서 어찌나 걱정되던지 심장이 막…….”

“아까, 언제요?”

“응? 한 세 시간 전쯤인가?”

노인은 싸우지 않았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머리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방금 노인의 말로 남자가 택배 기사와 마주친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모종의 이유로 몸싸움을 하고 도망간 거라면 남자는 멀쩡했으니 그 피는 전부 상대방의 것이란 소리였다. 혹시 그 사람이 신고라도 한다면 정말 낭패였다.

“그 총각이랑 산 지 오래됐지? 둘이 형제는 아닌 것 같던데…… 친구야?”

“……죄송합니다.”

일일이 대꾸하기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내 속을 모르는 노인은 못마땅하다는 양 혀를 찼다.

“으유, 사지 멀쩡한 남자 둘이 결혼도 안 하고. 그거 다 불효야, 불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내렸다.

‘쯧.’

등 뒤로 엄마의 저주와 같은 환청이 나를 바짝 쫓아왔다. 씨발! 피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를 수거함에 거칠게 집어 던졌다.

방에 가둬 둔 남자는 밤이 되도록 잠잠했다.

“혼자 놔두고 나가지 말걸.”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의미 없는 후회를 하며 바닥에 남은 소파의 잔해를 쓸어 내는 도중 대걸레 끝에 무언가 달그락하고 걸렸다. 마루 위를 도르륵 굴러간 것이 모아 놓은 부스러기들 사이에 섞였다. 나는 검붉은 막대기처럼 보이는 걸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기겁을 하며 놓쳤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저 멀리까지 굴러간 그것을 다시금 확인하려고 기어갔다. 아니길 바랐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그것은 명확한 증거였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절망감에 빠졌다. 뭉툭한 손톱과 마디뼈가 불거진 그것은 누가 봐도 남성의 손가락이었다. 거기다 잘린 단면이 잇자국으로 울퉁불퉁했다. 덩그러니 놓인 손가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먹은 거야…? 진짜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휙 돌아봤다.

똑똑.

문이 굳게 닫힌 방 안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기서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입을 막고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방문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방문 너머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철컥, 철컥.

별안간 문고리가 의자에 걸려 덜컹거렸다. 계획대로 도망치기는커녕 다리가 풀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먹먹하게 흘러나왔다.

“열어 줘요. 열어 주, 주세요.”

바닥을 디디고 있던 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남자는 사람을 먹은 게 분명했다.

그것뿐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는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남자와의 짧은 기억을 더듬던 내 사고는 남자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이하지만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 ∞ ∞

“저, 대리님.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말을 건 예 주임이 바탕 화면만 띄워 놓은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눈가를 찌푸렸다.

“괜찮으세요? 엄청 피곤해 보이시는데.”

“피요? 어디…….”

남자를 내 방에 가둔 지 3일째.

방에 들어갈 수 없어 며칠 동안 정장도 갈아입지 못했다. 미처 지우지 못한 피가 남아 있었다는 생각에 식겁해 엉망으로 구겨진 셔츠를 샅샅이 살폈다. 옷을 사 입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내 정신력은 완전히 바닥이었다.

“아뇨아뇨. 피곤해 보이신다구요. 어? 대리님! 코피 나요!”

코 아래로 미지근하고 묽은 액체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사무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가슴으로 떨어진 피가 하얀 셔츠에 붉게 스며든다. 비강을 채우는 비릿한 냄새에 저절로 검붉은 손가락이 떠올랐다.

그걸 내가 어떻게 했더라. 맞아. 변기에 내려보냈지. 믹서기에 갈아서.

뼈가 칼날에 걸리는 소리는 차마 듣고 있기 힘들 만큼 섬뜩했었다.

“욱.”

구역질이 나서 휴지 뭉치로 내 코밑을 받치는 예 주임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쯧.’ 고 부장이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변기를 붙잡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빈 구토를 했다. 침과 눈물이 분간 없이 흘렀다. 그저 위를 짜내느라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구역질이 잦아들자 나는 어느덧 흐느끼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이후로 경찰이 찾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방 안에서는 남자의 애달픈 애원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용서해 달라며 밤새도록 빌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나를 잡아먹으려는 수작일지 몰랐다. 그 눈물에 홀리지 않으려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하지만 밤새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미어졌다. 나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연민을 떨치기 어렵다. 머리로는 치열하게 남자의 존재를 의심하고 두려워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을라치면 방문을 열고 서럽게 우는 남자를 안아 주는 꿈을 꾼다. 미쳐 버릴 것 같다.

∞ ∞ ∞

남자와 있는 시간이 버거워서 매일 같이 해가 진 늦은 시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나마 가득 찬 듯하던 집 안은 소파까지 사라져 한층 삭막해졌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남자를 가둬 둔 방문 앞에 섰다. 내가 온 걸 알았는지 문 너머에서 남자가 드득드득 문짝을 긁어내렸다.

“열어, 어 주세요. 배고파. 배고파요.”

남자를 가둬 둔 지 7일째.

내내 잘못을 빌던 남자가 배고프다고 울기 시작했다. 저대로 두었다간 굶어 죽을지도 몰랐다. 그건…… 곤란했다. 전처럼 잠이 들면 먹을 것을 넣어 주려고 했지만, 남자가 24시간 내내 방문에 붙어서 울어 대는 통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잘,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남자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구슬펐다. 며칠간 이어진 피 말리는 감정 소모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이마를 문에 기댔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처음으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뭘…… 뭘 잘못했는데요?”

“…….”

문 너머가 고요해진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걸까. 아니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걸까.

“마음대로 먹, 먹어서. 슬프게, 해서. 미안해요.”

가슴 속에 아슬아슬 쌓여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무너져 내린다. 지금 당장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나에게 잘못을 빌고 있는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이성을 잃고 문고리 밑에 받쳐 둔 의자를 빼냈다. 입이 마르고 손이 덜덜 떨렸다. 두려웠다. 하지만 남자가 날 잡아먹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하얗게 질린 손이 문고리로 다가간다. 차가운 금속 문고리가 손바닥의 열을 앗아 갈 때까지 그 손이 내 손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하…….”

긴장에 젖은 숨이 가늘게 떨렸다. 천천히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방문이 열리기 직전, 느닷없이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 파드득 문고리를 놓쳤다. 제집처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애인이었다. 이제는 전 애인이 된 그의 얼굴이 싸늘했다.

저 얼굴을 잘 알았다. 열등감이 머리꼭지를 뚫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 어김없이 술을 찾던 때의 얼굴. 신발도 벗지 않고 비틀대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애인한테서 역시나 술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나에게 애인은 태연히 물었다.

“거기 서서 뭐 해?”

다행히 열릴 기미가 없는 방문과 애인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애인과 합심한다면 방 안의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인의 성격에 정체 모를 불청객을 그냥 넘어가 주진 않을 거다. 그렇게 되면 택배 기사와의 불미스러운 사고가 드러날 테고, 증거를 인멸한 나는…… 공범이 된다.

상상만으로 눈앞이 깜깜했다.

“뭐 하냐고.”

“여긴, 왜 왔어?”

“왜 와? 집이니까 오지.”

“전에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었나 본데…….”

“뭔 말. 혼자 무슨 헛소리야? 근데 소파는 어디다 팔아 치웠어?”

표정을 굳히고 있던 애인이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잔뜩 긴장한 나를 비웃으며 투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술기운에 이지를 잃은 애인의 눈동자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헤어지자는 말이었어.”

목소리가 떨렸다.

“멍청하게 굴지 마. 나 아니면 누가 너랑 살아 줄 것 같아? 그 여자도…… 널 알면 마음 바뀔걸. 내가 참고 넘어갈 테니까 너도 적당히 해.”

킥킥 웃으며 애인이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뺨을 찔렀다. 애인은 모른 척하고 넘어갈 작정이었다. 은근슬쩍 또 내게 빌붙을 계획이었다. 내가 싫다는데도.

“필요 없다고 했어.”

이번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애인의 얼굴이 굳는다.

“너 자꾸 열 받게 할래? ……알았어. 내가 너한테 소홀했던 거 인정할게.”

소홀? 애인의 무신경한 단어 선택에 어처구니를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애인이 지금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었다. 미안했다고 무릎을 꿇어도 모자랐다.

꽉 쥐어진 주먹에 힘이 실렸다. 내 얼굴을 지그시 보던 애인이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징그럽게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그것도 모자라 술 냄새가 진동하는 입으로 더러운 소리를 지껄였다.

“네가 왜 이러는지 알겠다. 내가 널 그동안 외롭게 했지. 오늘은 우리 같이 잘까? 오래간만에 예뻐해 줄게. 누가 알아? 네가 잘만 하면 우리가 다시….”

모욕을 참지 못하고 달라붙어 오는 애인을 거칠게 밀쳤다. 눈가가 뜨거워서일까, 눈앞에 있는 애인의 모습이 뭉개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닥치고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씨발. 짜증 나니까 그만해라, 진짜.”

결국, 애인의 입에서도 쌍욕이 튀어나왔다. 가면이 벗겨진 애인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여기서 맞붙어 봐야 결과가 어떨지 뻔했기에 쓰디쓴 치욕을 삼키고 이번에야말로 알아듣게 말했다.

“너나 적당히 해. 아직도 상황 파악 안 돼? 나 너 버린 거야.”

“……버려? 씨발, 네가 뭔데 날 버려.”

아니다.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이런 버러지를 언제까지 인간 대접을 해 줘야 하는 거지?

“너같이 분수도 모르고 빌붙어서 피만 빨아먹는 빈대 새끼를 몇 년이나 먹여 살렸으면 고맙습니다.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사람이면?”

나는 그랬다. 사람 취급 못 받고 자랐어도 쫓겨나듯 집을 나올 때 부모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고개를 숙였다. 아쉬운 소리 같은 건 꿈도 못 꿨다!

“아아,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내가 이렇게 된 거, 다 너 때문이야. 아닌 척,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사실 속으로는 날 좆같이 보던 너 때문이라고!”

애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내 머리채를 쥐었다. 두피가 뜯겨 나가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몸은 의미 있는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패대기쳐졌다. 후들거리는 무릎이 꺾이고 일말의 자비도 없는 손길이 뺨을 내리쳤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다 된 전구처럼 깜빡깜빡 점멸했다.

술기운과 내 객기가 맞물려 애인의 폭력성을 활활 태우는 연료가 되었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몇 대를 맞았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애인의 폭언이 쏟아지고 있다는 건 알았다. 나는 점점 좁아지는 시야를 들어 닫혀 있는 방문을 찾았다.

이제 열 수 있을 텐데. 나올 수 있을 텐데.

“……살려 줘.”

“하,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어? 이럴 거면서 왜 괜히 사람 힘…….”

끼익.

뒤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말을 멈춘 애인이 돌아본다. 천천히 벌어지는 문 안쪽에서 남자가 한 걸음 밖으로 나왔다. 예의 멍한 얼굴이 나와 애인을 본다. 아주 찰나였지만 날 발견한 검은 눈동자가 빛나는 것 같았다.

“뭐냐……?”

말라붙은 갈색 얼룩으로 범벅인 남자의 몰골을 보고 애인은 멈칫했다.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잊고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소름 끼치는 핏자국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인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나서면 끝장이었다.

“와…. 다시 봐야겠다, 너. 뭘 믿고 버티나 했더니 그새 다른 놈을 들여앉혔어?”

술에 취한 데다 흥분한 애인은 남자를 뒤덮은 얼룩이 피라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자신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음에 화가 나서 따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 머리채를 신경질적으로 놓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이없다는 듯 웃어 댔다.

“하! 씨발. 그래도 정조 하난 잘 지키길래 봐줬더니. 그래서, 어린놈 좆이 그렇게 좋든? 응? 아악! 씨발!”

제 분을 못 이기고 악을 쓴 애인이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질러 대다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애인이 손에 든 것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시퍼런 칼날이 섬뜩하게 허공을 갈랐다.

“야. 거기 너는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꺼져라. 어? 죽기 싫으면. 나 오늘 얘랑 끝장 볼 거니까.”

“너 미쳤어…? 그걸로 뭐 하려고?”

날카로운 칼끝이 나를 노렸다.

“왜, 이제 좀 내가 무서워?”

흥분한 애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긴장으로 굳은 몸짓이 그가 단순히 협박만 할 생각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했다. 자존심이 짓밟힌 애인은 저 칼에 기어코 피를 묻힐 작정이었다.

억울했다. 애인과의 관계를 지키려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런 결말을 맞을 줄 알았다면…… 절대 어떤 노력도 희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어이 인생 종 치고 싶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했는데!”

“닥쳐!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른 애인이 칼날을 높이 치켜들었다. 공포에 질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푸욱. 칼날이 살을 가르고 깊숙이 박히는 소리가 났다. 숨을 멈춘 채 무력하게 덮쳐 올 고통을, 비참한 끝을 기다렸다.

“씨, 씨발. 끼어들지 말랬잖아!”

애인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웅크리고 있던 내 앞에 어느새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고개를 들자 넓은 등이 보였다. 남자였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남자가 나를 감싼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애인이 넘어진다. 미친놈 같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 있어야 할 칼이 보이지 않았다.

“안 돼…….”

끔찍한 예감에 남자를 보았으나 벽처럼 내 앞을 가리고 선 등에서는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던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히 내게 향한다. 남자의 넓은 어깨 위로 마주친 시선이 내게 묻는다.

이건 먹어도 돼?

“…….”

남자와 눈을 마주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남자의 시선이 내 깊숙한 곳에 응축되어 있던 덩어리를 터뜨렸다. 혈관을 타고 피 대신 뜨거운 분노가 전신에 흘렀다.

“먹어.”

하지만 터져 나온 분노의 첫 파편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나는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애인의 얼굴이 공포에 일그러진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잔뜩 겁에 질린 그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너는 모르겠지. 네가 겪게 될 일이 무엇인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듯 애인이 도망치려 했다. 애인을 위한 내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먹어! 전부 씹어 먹어 버려!”

촤악!

뜨겁고 비린 피가 튀었다. 속눈썹 위로 피가 엉겨 눈을 뜨기 힘들었다. 손을 들어 미지근하게 젖어 버린 얼굴을 닦았다.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끄, 끄흐……. 끄흐큭.”

남자에게 깔린 애인은 발작하듯 두 다리를 떨어 댔다. 내게 등을 보인 채 남자는 애인의 머리통을 붙잡고 있었다. 까드득, 까득. 쩝쩝.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씹는 소리가 조용해진 거실에 적나라하게 울렸다. 나는 화면 너머를 보듯 남자가 애인을 잡아먹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붉은 피가 융단처럼 밀려와 힘없이 널브러진 손끝을 적신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이건 내 손인가, 화면 속의 손인가, 헷갈렸다.

“하, 하하…….”

왠지 모를 웃음이 터졌다. 꽉 막혔던 숨통이 마침내 뚫린 듯했다.

아, 이건 빌어먹을 해방감이었다.

내 웃음소리에 남자가 식사를 멈추고 내게로 다가왔다. 남자가 피범벅을 한 얼굴로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애인이 휘두른 칼이 남자의 배에 깊이 박혀 있다. 내 목에 꽂혔어야 할 그 칼을 뽑아내자 즈윽 기묘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작게 신음했다. 남자의 옷이 피로 흠뻑 젖어 있어 누구의 피인지 구분되지 않았으나 치명상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내가 또 먹어 버려서 화났어요?”

남자는 이제 말을 더듬지 않았다.

지금 와서 그런 사소한 변화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피에 젖은 손으로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핏방울이 맺힌 머리카락이 붉게 빛났다. 예쁜 얼굴이 또 엉망이다.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남자에게 웃어 주었다.

“아니, 잘했어.”

지금부터 나는 남자의 완전한 공범이었다.

칭찬을 받은 남자는 돌아가서 마저 식사를 이어 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걸레를 찾았다. 바닥에 흥건한 피가 말라붙으면 닦기 어려웠다.

지난번의 일로 그 사실을 몸소 겪은 내가 닦을 만한 것들을 잔뜩 가지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애인은 600g의 소고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가 애인의 몸을 전부 먹어 치우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전신에 핏물을 뒤집어쓴 남자는 애인의 그림자처럼 고여 있는 피 웅덩이에 무릎을 꿇은 채 날 올려다보았다.

“잘 먹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무겁게 나를 짓누르던 내 10년을 10분 만에 먹어 치우고서 화사하게 웃는 얼굴에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바닥에 남겨진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주워 남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애인의 손가락을 남자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손가락을 남기는 안 좋은 식사 예절을 고쳐야 했다.

“남기면 안 돼.”

남자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안 남길게요.”

천천히 열린 입 안으로 애인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오물거리는 입술 사이로 하얀 이빨에 짓이겨지는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맛있어…?”

무의식중에 내뱉은 질문에 소름이 돋았다.

맛있냐니, 알아서 어쩌려고?

손톱 조각까지 모조리 씹어 삼킨 남자는 그저 입맛을 다셨다. 고개를 털고 피범벅이 된 집 안과 남자를 둘러보다가 일단 남자를 일으켰다.

“가서 씻어. 할 수 있지? 깨끗이 씻어야 해.”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바닥의 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머리가 더없이 냉정하게 사태를 되짚었다. 돈 문제로 가족은 물론 친구들과도 멀어진 애인이었다. 사라진 애인을 당장 찾을 만한 사람은 없다. 애인은 우리의 관계뿐 아니라 내게 얹혀살고 있다는 사실도 철저히 숨겼다. 법적 주소지는 그대로 본가로 되어 있었고, 택배를 시킬 때마저도 내 이름을 썼다.

나는 작게 조소했다.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자기 인생에서 열심히 내 존재를 지운 행동이 끝내는 자기 죽음까지 가려 버릴 줄은 몰랐겠지. 그 노력 덕분에 혹시 누군가 실종 신고를 한대도 나를 의심할 이유도 증거도, 역시 없다. 아파트 CCTV가 걱정이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는 전부 먹어 치워 버렸으니까…….

지금 더 시급한 문제는 남자였다. 무언가를 먹을수록 남자는 정상적인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득 머리부터 뜯어 먹는 남자의 식사 습관이 뇌리를 스쳤다.

먹은 생명체의 지능을 흡수하는 걸까? 뇌를 먹음으로써?

본능적으로 돋는 소름을 무시하고 가장자리부터 굳어 가는 피를 박박 문질렀다.

남자는 허무하게 죽을 뻔한 나를 지켜 줬다. 내 인생에 들러붙어 있던 끔찍한 벌레도 말끔히 제거해 줬다. 사람을 먹지만 나를 먹지는 않는다. 비록 인간이 아닐지라도 내 말을 잘 듣는 착한 괴물이다. 내가 데리고 있으면 괜찮을 거다.

내가 데리고 있어도…… 괜찮을 거다.

“아니, 다 상관없어.”

남자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내가 포기한다면 인간의 순리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남자는 살아남기 힘든 존재였다.

나는 남자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피를 흠뻑 흡수한 걸레와 수건이 죽은 애인의 무덤처럼 쌓여 갈 때쯤 남자가 욕실에서 나왔다. 바닥을 닦다가 맨몸으로 물을 뚝뚝 흘리고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모습에 하릴없이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잘못했어요.”

“…….”

걱정이 무색할 만큼 풀 죽은 목소리를 들으니 무표정이라 생각한 남자의 표정에도 감정이 보이는 듯했다. 혼나길 기다리는 어린애 같은 겁먹은 표정.

네가 뭘?

반발 심리가 고개를 쳐들었다. 피를 닦던 수건을 던져두고 욕실에서 깨끗한 수건을 꺼내 와 젖어 있는 남자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나쁜 건 그 새끼야.”

애인은 날 죽일 작정으로 칼을 가져왔다. 그 점에서 이미 우발적 사고라고 할 수 없었고 실제로 내게 칼을 휘둘렀으니 애인은 살인자다. 운 좋게 남자가 있어서 살았지만, 희생자는 분명 존재했다. 지난 10년 동안의 나는 오늘 죽은 거나 다름없다.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응당한 일이다.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렇게 남자를, 그리고 나를 다독였다.

피와 땀으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나오자 잠이 쏟아졌다. 일주일간 제대로 자지 못한 탓도 있지만, 회피 욕구에 가까웠다. 과부하에 걸린 뇌가 활동을 멈추고 강제 절전 모드에 돌입하면서 몸도 정신도 늘어졌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날 기다리던 남자를 데리고 전처럼 한 침대에 누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부 개 같은 악몽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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