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오빠. 여기서 내려요.”
“알았어.”
태양은 얼굴을 내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과 분위기를 파악했다. 깔끔하고 좋은 곳이었다. 이상한 날파리들이 꼬일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멈추자 밖으로 나간 태양은 다른 동기들과 함께 있는 안경을 낀 여자를 쳐다봤다.
“여기 이상한 놈들이 있을 것 같은 곳은 아닌데? 골목길도 넓잖아.”
“근데 전등 설치가 이상해서 밤이 되면 바로 캄캄해져요. 그리고 사람들도 이상하게 밖으로 안 나오고. 여기는 8시만 넘으면 다들 집안에 들어가 있어요.”
“특이하네.”
“그래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늦게 오거나 애들하고 놀고 늦게 들어오면 굉장히 긴장하게 되요.”
말하는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한 가득이다.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름대로 큰 스트레스 였던 모양이다. 하긴 여자 혼자 사는데 수상한 남자가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 점점 더 잘 도와줘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태양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는 안경 낀 동기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일단 너랑 너희가 먼저 가고 있어. 가다가 그 이상한 남자가 있으며 옆으로 몸을 피해.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오빠는 같이 안 가요?”
“남자가 있으면 먼저 피할지도 모르니까. 난 뒤에서 따라갈게.”
“네.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여학생들은 팔짱을 끼고 먼저 앞장 서 걸어갔다. 불안한지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뒤를 쳐다본다.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자 겨우 앞을 쳐다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걸음이 불안하기만 하다. 그것을 확인한 태양은 그녀들의 뒤를 쫓으며 주변을 살폈다.
넓은 골목이라고 하지만 도로에서 너무 들어간다. 거기다가 겉으로 보이는 쪽과 달리 안쪽은 굽이굽이로 들어간 골목길이 대부분이었고 건물도 크고 높아서 건물 뒤로 들어가 버리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처음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을 풍기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태양은 저 앞에서 걸어가는 동기들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잔뜩 긴장을 하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좀 풀어져 있다. 대화를 나누면서 일정한 속도로 멀어지는 동기들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핸드폰을 꺼내들자 낯선 번호가 찍혀있다. 낯설긴 하지만 눈에 익는다. 어디서 또 이런 번호를 본 것인가 싶어 생각을 하던 태양은 어제 폰에서 이 번호를 확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뭐라 딱 짚어서 설명할 수 없지만 불쾌하고 안 좋은 기분이다. 태양은 전화를 받기 위해서 통화 쪽으로 손가락을 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통화가 딱 끊겼다. 그때 저 앞에 가던 동기들이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을 하는 것에 태양은 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들 뒤로 다가갔다.
“왜 그래?”
“오늘은 없나 봐요.”
그 말에 태양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쳐다봤다. 꼼꼼하게 살펴봐도 눈에 딱 들어오는 낯선 인물이 없다. 묵묵히 주변을 살피던 태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을 낀 동기를 쳐다봤다.
“다들 오늘 공부할 거 가지고 있지?”
“네.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어. 난 여기에 잠시 있어볼게.”
“같이 들어가 있어요.”
“아니. 여기에서 한 시간 정도 있어볼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태양의 말에 여학생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어떻게 할까-하다가 여기에 있어도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말에 할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 그녀들은 태양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들어갈게요.”
“힘들면 안으로 들어와요.”
“괜찮으니까 괜히 나오지 말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마. 그러면 이상한 낌새를 느낀 녀석이 안 올 수가 있으니까. 알았지?”
태양의 말에 여자들은 ‘아, 그렇구나.’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금 태양에게 눈인사를 하며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보아하니 집 옆으로 들어가서 다시 열쇠로 문을 따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남자라면 모르겠지만 여자가 살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되는 구조다. 태양은 동기들이 전부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저기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을 발견하고 그리로 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곳 즈음에 쪼그리고 앉아 난간 틈 쪽으로 눈을 댔다. 그러자 동기의 집 근처가 제법 잘 보인다. 이제는 시간의 문제다. 그 수상한 녀석이 나타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오늘은 한 시간 내일은 30분. 그리고 하루 쉬었다가 그 다음날 다시 와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태양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래도 아까 왔던 수상한 번호가 마음에 거렸다. 도대체 누가 두 번씩이나 전화를 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태양은 핸드폰을 강하게 쥐었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폰의 떨림이 손바닥으로 퍼졌다.
우우우웅.
진동에도 바로 폰을 열어 받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까 싶어 몇 번 망설이던 태양은 폰을 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다. 하지만 태양은 그 순간 전화를 한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말을 하세요.”
[태양이니?]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뻔뻔하고 기분 나쁜 목소리다.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태양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뻔뻔하게 잘도 전화를 하네요.”
[어머나.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니. 너무한다. 애.]
너무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속에 알게 모르게 웃음이 서려있다.
태양에게 암만 심한 말을 들어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을 여자였다. 강하게 나가면 느물거리면서 잘 피해갈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태양은 끓는 속을 진정시켰다. 폰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주먹 쥔 채로 태양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전화 했어요?”
[보고 싶어서. 우리 좀 만나자. 너 대학생이라면서. 얼굴 좀 보여줘. 너 잘 컸는지 어떤지 보고 싶거든.]
“그럼 오늘 만나죠.”
[어머. 정말? 웬일이니? 싫다고 욕하면서 끊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친어머니잖아요. 안 그래도 저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하는 말이야?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이야?]
“정말로 하는 말이에요. 저 원래 입바른 말 못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알았어. 오늘 만나.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 너 어딘데? 어디서 만날까?]
“어머니가 편한 곳에서 만나요.”
[그러면 너 대학로 쪽으로 올 수 있어?]
“갈 수 있어요. 5시쯤에 보죠.”
[알았어. 그럼 그때보자. 어머나. 정말 기대된다. 내가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아무것도 먹지 말고 와. 알았지?]
“알았어요. 이만 끊죠.”
[그래. 끊자.]
바로 전화가 끊긴다. 뚜-하는 소리를 내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손바닥 위에 쥔 태양은 그것을 노려보고 긴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는 정말 변함이 없다. 여전히 뻔뻔하고 여전히 재수 없다. 잠깐 목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이렇게나 기분이 나빠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울렁거린다. 토가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손가락으로 입을 누르고 있으려니 저 아래로 이상한 자가 나타났다.
검은 점퍼를 입은 사내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내가 동기가 말했던 그 자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어 태양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기둥 뒤에 서있던 사내가 천천히 동기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동기의 집은 이층 주택이었다. 초록색 문을 살짝 연 사내가 구석진 쪽, 동기네 문을 쳐다보는 것에 태양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계단 위에 있는 소주 박스를 발견하고 그리로 가봤다. 눈에 보이는 것은 초록색 소주병. 이거면 될 것 같아 그것을 하나 들고 계단을 내려온 태양은 소리 없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계속 문에 붙어서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그냥 쳐다보고만 있지 기회만 되면 바로 안으로 달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사내의 뒤로 가서 선 태양은 잠시 그렇게 있었다. 사내가 먼저 이쪽을 알아차려주기를 기다렸는데 쉽게 눈치 채지 못한다. 주욱 안쪽만 쳐다보는 것에 어쩔 수 없이 태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해?”
“히잇..!”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말 놀란 모양이다. 잡고 있던 문에서 미끄러져 앞으로 굴러 넘어질 뻔 했던 사내는 사색이 되어 뒤를 쳐다봤다. 그리고 태양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 한다.
“시..실례합니다.”
“어딜 그냥 가려고.”
태양은 이쪽을 피해 도망가려는 손목을 잡아 벽으로 밀어냈다. 강한 힘에 잡힌 사내는 변변찮은 저항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벽에 달라붙어 당황스러워 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왜..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냐고?”
사내의 앞으로 다가간 태양은 말없이 사내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겨났다. 얼굴이 드러나자 사내는 숨을 삼키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벌써 다 봤다. 태양은 들고 있던 모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얼굴은 반반한 놈이 왜 이런 짓을 해? 너 관음증 있어?”
“왜 이러십니까?!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신고해. 안 그래도 너 경찰서에 데리고 가려고 내가 온 거야.”
태양의 말에 사내는 안색을 굳혔다. 굳은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사내는 은근슬쩍 다른 말을 꺼냈다.
“저는 그저 슈퍼에 가려고.”
“헛소리 할래?”
태양은 내내 뒤로 숨기고 있던 소주병을 앞으로 내밀었다.
태양이 소주병을 내밀자 사내는 바로 안색을 굳혔다. 몸을 움츠리며 뒤로 몸을 붙이는 사내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태양은 소주병으로 벽을 후려쳤다. 그러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소주병이 깨졌고 사내의 안색이 더 나빠진다. 놀란 듯 움찔하고 몸을 떠는 사내를 노려보며 태양은 깨진 소주병을 천천히 위로 들었다.
“너 죽고 싶어?”
“아니요. 아니요!”
“너희 집 부모님들은 네가 이렇게 하고 다닌 거 알아? 집 주변 사람들은?”
“저는 그냥....”
우물거린다. 또 다시 같잖은 변명의 말을 할 생각인 모양이다. 이런 놈들의 행동이야 뻔했다. 약하게 나가면 끝까지 잡아떼고 큰소리를 치지만 강하게 나가면 그 뒤는 없다. 안 그래도 기분이 나쁜 상태였던 태양은 여자 혼자 사는 집 부근에 있는 것도 열 받는데 제대로 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사내의 행동에 점점 더 화가 났다. 무표정한 얼굴이 된 태양은 깨진 소주병을 들어 사내의 얼굴 옆에 댔다. 그러자 사내가 기겁을 하며 옆으로 얼굴을 피하지만 그만큼 태양은 소주병을 사내의 볼에 더 붙였다.
“하...하지 마세요!”
“움직이지마. 네가 움직이니까 더 찌르게 되잖아. 그냥 손에 힘줄까?”
“아뇨..아뇨...!”
사내가 고개를 저어서 소주병과 볼이 닿게 된다. 덕분에 살짝 상처가 나면서 피부 위로 피가 스며 나왔다. 따끔한 아픔이 느껴진 것인지 바로 사내의 움직임이 멈춘다. 사색이 되어 입을 꾹 다물고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태양은 소주병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또 여기에 올 거야?”
“안 오겠습니다! 절대로 안 올게요!”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찍어.”
“네?”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눈을 크게 뜨는 사내를 노려보며 태양은 소주병을 치워내 사내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걸로 손가락 찢어서 도장 찍으라고.”
“.....무슨.....”
“따라와.”
태양은 사내의 멱살을 잡아 아까 앉아 있었던 계단으로 질질 끌고 갔다. 사내는 다리에 힘을 주고 쫓아가지 않으려 했지만 태양의 힘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질질 끌려가다 시피한 사내는 결국 계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고 태양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과 볼펜을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사내는 태양이 종이를 흔들자 손을 뻗어 종이와 불편을 받아 들였다.
“거기에다가 내가 부르는 대로 쓰고 도장 찍으면 돼.”
사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종이와 태양의 얼굴만 번갈아 봤다.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쓸 준비를 하지 않는 것에 태양의 눈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안 하냐?”
“하..하겠습니다.”
태양의 표정이 무서워지자 사내는 바로 종이를 바닥에 깔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태양은 사내에게 이 부근에 얼쩡거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것을 어길 시에는 간단한 보복조치가 있을 것이고 경찰서로 가게 될 거라고 간단한 언급을 하기도 했다.
돌바닥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잘 써지지 않는 모양이다. 몇 번이나 글자를 틀리고 나서야 사내는 태양이 부르는 대로 글을 다 적고는 얼굴을 위로 들었다. 그것에 태양은 내내 들고 있던 소주병을 내밀었다.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소주병을 받아 들었다. 다음 행동으로 가지 않고 손에 들린 소주병을 쳐다보기만 하는 것에 태양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찍어.”
사색이 된 사내는 깨진 병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제 안 할 테니.”
“내가 피부 벗겨줄까?”
“아니요!!”
“어서 해.”
“네..네..!”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침을 삼키고는 소주병을 엄지손가락에 댔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두려운 모양이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자는 천천히 깨진 쪽에 손가락을 눌렀다. 하지만 바로 상처가 생기지 않았다. 장난을 치듯 손가락을 댔다 떨어뜨리기만 하는 것에 태양은 발로 사내의 무릎을 툭툭 쳤다.
“제대로 찍어. 한 번에 못하면 다른 손 다 깔까?”
“아니요! 아니요!!”
고개를 저은 사내는 손가락에 힘을 줘 꾸욱 눌렀다. 그러자 피가 조금 베어 나왔다. 하지만 뭘 하기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적은 양이었다. 그래도 다시 병에 손가락을 대기 싫었던 건지 사내는 엄지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피가 번지게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종이 아래에 꾸욱 눌렀다. 한참 동안 엄지를 누르던 사내가 천천히 손을 떼자 태양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놔.”
사내는 쓴 것을 급히 태양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서 괴발개발 쓴 글씨와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지장을 확인한 태양은 눈을 내려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피가 나는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계속해서 몸을 떨면서 눈을 굴리는 것이 정서 불안인 것 같다. 아니. 정서 불안이 아니라 이쪽이 너무 무서워서 그런 건가. 태양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도 이러면 너 진짜 가만히 안 둬. 다음번에는 저기 보이는 아파트에 놀러가자. 20층 높이에서 아래 쳐다보고 있으면 기분 좀 상쾌해질 것 같지 않아?”
“저..저는...”
“이 집 근처로 오지마. 다음에 또 말 들리면 그때는 알아서 해. 알았지?”
부드럽게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내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지 굳은 얼굴이 풀어질 줄을 몰랐다. 급기야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사내의 행동에 태양은 어깨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가.”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사내는 급히 달려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중간에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태양은 가방을 고쳐 메며 동기의 집 앞으로 갔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도 동기들이 나와서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중에서 의뢰를 했던 동기는 저 멀리 도망가는 사내와 태양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오빠. 어떻게 된 거예요?”
“저 녀석 맞아?”
“맞아요. 저 인간이에요. 정말 무서웠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다시는 여기에 안 올 거야.”
“정말요?”
물음에 태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여학생들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잘 됐다는 말이 오가는 가운데 안경을 낀 동기가 태양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에요?”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에는 경찰서 데리고 갈 거니까 나 다시 불러. 알았지?”
태양은 종이를 접어서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오빠. 정말 고마워요. 나 되게 안심됐어요.”
“앞으로도 어려운 일 있으면 불러. 도와줄게.”
“아...네..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여자는 손을 마주 잡았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은 여자는 옆으로 몸을 돌리며 대문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오빠. 안에 들어와요. 피자 시켰어요. 우리 같이 먹어요.”
“나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네? 어디를 가는 데요?”
“집안에 일이 좀 생겨서. 아직 모르는 거니까 문단속 잘해. 그리고 저기에 깨진 소주병 조각 좀 치워 줘. 알았지?”
태양이 가리키는 쪽에는 초록색 병조각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왜 저렇게 된 건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태양이 바로 몸을 돌렸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여학생들은 점점 멀어지는 태양의 뒤로 크게 손을 흔들었다.
“오빠. 조심해서 들어가요.”
동기들의 인사에 태양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대학로로 가려면 일단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야 할 거다. 어디에서 만나자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도착해서 연락을 하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서두르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뭔가 싶어 태양은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도후였다.
“.......................”
폰은 계속해서 울렸다. 액정 위에 떠오른 도후의 전화번호를 빤히 쳐다보던 태양은 폰을 열고 꺼짐 버튼을 눌렀다.
오랫동안 누르고 있자 핸드폰이 꺼졌다. 검게 변한 액정을 확인하고 폰을 가방 속에 집어넣은 태양은 저 앞에 보이는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음식점 안에 들어가자 훈훈한 공기가 느껴지면서 살짝 눈이 감겼다. 상대 쪽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바깥에 서있었더니 괜히 피곤하고 졸린 것 같다. 손가락으로 눈을 비빈 태양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상으로 당당하게 말을 하던 여자지만 말만 그럴 뿐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양의 예상대로 여자는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살이 많은 데도 불구 젊은 사람처럼 입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화려한 옷에다 화장도 진하게 한 얼굴이다. 전에는 주름이 별로 없어서 제 멋대로 꾸며도 그럭저럭 봐줄만 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정말 괴물 같다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으려니 거울을 내리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이쪽을 못 알아보고 옆으로 얼굴을 돌리던 여자는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태양을 쳐다봤다. 그것에 태양은 느릿한 걸음을 옮겨 여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머. 너 정말 멋있어 졌다. 지금 몇 살이니? 22살인가?”
“24살이에요.”
“그래. 맞다. 24살이었지.”
모르고 있었으면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뻔뻔하게 웃으며 말한 여자는 턱에 손을 댄 채로 태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랑 꼭 닮았네.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아?”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요.”
“그래? 이상하네. 나랑 이렇게 닮았는데. 나 닮아서 인기 많겠다. 그렇지?”
친근한 척 말을 거는 여자지만 태양은 입을 꾹 다물려 져서 열리지 않았다. 점원이 가져다주는 물을 받은 태양은 주문은 나중에 한다는 말로 점원을 보내고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한껏 웃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여자가 하는 행동만 보면 엄청 사이좋은 모자간으로 보일 지경이다. 태양은 그런 여자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돈 없어요?”
“응? 뭐가?”
“돈 없어서 남한테 구걸할 만큼 사정 안 좋아요?”
그제야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하지만 단수가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금세 눈을 흘기며 마음 상한다는 식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투덜댔다.
“너 엄마한테 말이 너무 심하지 않니?”
“남자랑 사귄다며. 이번에는 몇 번째야? 전에 손잡고 같이 나가던 배불뚝이 영감은 이제 없나봐. 하긴 그쪽이 워낙 가벼워야지. 이번에도 남자 돈 다 탕진하게 하고 다른 남자한테 갈아탔어?”
“너...!”
입술을 깨문 여자는 바로 손을 날렸다. 하지만 태양은 바로 여자의 손목을 잡아 힘을 줬다. 그러자 손목이 꺾어진 여자는 바로 인상을 쓰며 소리를 낸다.
“아..아파..!”
“부러뜨릴 수 있으니까 손은 들지마. 나 엄마라고 안 봐주는 거 당신이 더 잘 알잖아.”
태양이 손을 놓자마자 여자는 잡힌 손을 주물거리며 눈에 힘을 줬다. 웃는 얼굴은 바로 사라져서는 표독스런 표정만이 남았다.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것에 태양은 앞에 놓인 잔에 손을 댔다.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지마.”
“싫어. 난 네 엄마고 그 남자의 전처야. 돈이 없어서 좀 빌리는 건 나쁘지 않잖아?”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병신 되도 괜찮아?”
잔의 표면에 묻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태양은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 남자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만나는 남자나 주변 사람들 전부 병신 만들어 줄까? 많이 손볼 것도 없이 머리 한 대 제대로 치면 바로 반신불구야. 식물인간이 된 남자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어?”
입을 다문 태양은 눈을 들어 여자를 쳐다봤다. 이쪽의 거친 말에 놀랐는지 여자의 얼굴은 굳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직은 아니란 말이지. 태양은 잔에서 손을 뗐다.
“당신 몇 번이나 중절한 거 지금 만나는 남자가 알아? 빚 있는 건? 전에 이용했던 사채업자한테 아직 돈 다 안 갚았지? 몇 년 전에 그 사람이 눈 시뻘겋게 돼서 당신 찾더라고. 지금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당신 여기에 있다고 말할까봐.”
그제야 여자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고 낭패한 기색을 비춘 여자는 머뭇거리며 급하게 말했다.
“나..나한테 그렇게 하면 네 아버지도...”
“남이잖아. 이혼한 거 잊었어? 그것도 십년 거의 다 되가는데. 남한테 와서 협박하고 돈 뜯으면 그건 범죄지. 이번에 새어머니 되는 분이 유능한 분이라 변호사 선임하는 건 문제도 아냐. 이것저것 절차 다 밟고 법으로 나가면 당신 어떻게 될 것 같아? 지금까지 잘 피해서 다녔는데 다 늙어서 감방 들어갈래?”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자 여자의 표정이 흔들린다.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동요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까불지마. 왜 나타나서 사람 피곤하게 해. 지금 당신이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입술을 깨문 여자는 태양을 노려봤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봐도 태양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종 평온한 얼굴을 한 채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여자는 옆에 놓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너랑은 말 못하겠어. 호수씨랑 말해야겠어.”
“또 와봐. 그때에는 바로 경찰들이랑 같이 경찰서 가는 거야.”
여자의 어깨가 움찔한다. 들고 있던 가방에서 천천히 손을 떼는 것을 보아하니 이쪽에서 다른 대답을 할 것을 원했던 모양이다.
아버지 운운하면 한 수 접어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심하면 심했지 여기서 더 약하게 가지는 않을 거다. 태양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바닥에 내려놓자 여자도 앞에 놓여있던 커피에 손을 댔다.
“앞으로 나타나지마. 나타나면 당신이 사귀는 남자들한테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 다 말 할 테니까.”
“그...그걸 그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
“나 아는 사람 많아. 당신 과거 알아보는 거랑 정보 모으는 건 문제도 아니야. 지금부터 시작해서 3일만 모으면 산처럼 쌓일 걸?”
여자는 노려봤다. ‘네가 그런 일을 정말 할 수 있어?’라고 묻는 듯 노려보는 시선에 태양은 잠시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인가-하고 말이다. 보통 방법으로는 떨어지지 않을 여자다. 이 여자가 얼마나 질기고 독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평범한 방법으로 이 여자를 떨어뜨리는 것은 무리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다고 그냥 똑같이 대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태양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오늘 참 종이를 많이 꺼낸다고 생각하면서 볼펜까지 꺼내 종이에 계좌 번호를 적은 태양은 그것을 여자 앞으로 밀었다.
“여기에서 100만원 입금해.”
“뭐?! 무슨 말이야?!”
“입금 안 하면 다 말한다니까.”
여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했던 그대로 자신이 당하게 되니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태양은 태연하기만 한 얼굴로 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오늘부터 수요일가지 100만원씩 정확히 8시까지 입금해. 전부 다 합하면 300만원이네. 그렇지?”
한 학기 등록금은 될 것 같다. 이걸로 아버지 주머니 사정 좀 덜어주면 그걸로 좋다. 더불어 이걸로 여자가 크게 데이면 더더욱 좋고 말이다.
팔짱을 낀 태양은 ‘어떻게 할래?’라는 느낌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그것에 여자는 입술을 씰룩이며 이를 갈았다.
“웃기지마. 내가 이런 일을 할 것 같아?”
“안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알면서 왜 그래?”
태양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눈에 힘을 줬다.
아주 어렸을 적에 종종 썼던 표정이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상대방이 벌벌 떨면서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인지 사색이 된 여자는 입술을 떨며 의자 뒤로 몸을 붙였다.
“겨..경찰에 신고할 거야.”
“나도 똑같이 경찰에 신고할 거야.”
“협박을 하는 게 누군데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는...!”
“머리 잘 굴려. 맞고소하면 누가 더 피 볼지 말야. 당신은 저기 지방 삼류 변호사 선임하는 것도 감지덕지겠지만 난 우리 새어머니 연줄 이용하면 티비에서나 보는 유능한 변호사랑 만날 수 있거든. 그것도 다 인맥으로 일처리 되는 거야. 변호사 구하는 것보다 지금 나한테 이 돈 주는 게 더 싸게 먹힐 텐데. 안 그래?”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태양이 하는 말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여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교활하게 눈을 굴렸다. 어떻게 하면 지금 이 구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는 얼굴이다. 그런 여자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던 태양은 여자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시간 1분이라도 늦거나 빠르면 난 바로 움직일 거야. 수요일까지 꾀부리지 말고 잘 보내. 그리고 다음에 다시 나타나 이런 짓거리 하면 그때는 공하나 더 붙여줄게. 그러면 얼마야? 천만원이지?”
태연하게 금액을 쉽게 올린다. 여자는 입을 벌리며 기가 막혀했지만 태양은 태연하기만 하다. 여자의 늙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 다음에 또 나오면 그 때는 공 하나 더 붙어서 일억이고. 그 다음에는 십억이야. 십원 하나라도 틀리게 입금되면 나는 내 식대로 움직일 거니까 알아서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법이다.
전에는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집 밖으로 나다니며 괜한 데에 화를 풀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른이 되어 머리가 좀 자라니까 어떤 식으로 화를 푸는 것이 제일 현명한 방법인지 알게 되었다. 그냥 간단하게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 상대에게 가서 풀면 되는 거다. 여자가 호수의 주변을 맴돌며 돈을 요구하고 질 나쁘게 군다면 이쪽도 똑같이 해주면 된다. 똑같이 주변을 맴돌면서 돈을 요구하고 상대 남자 몇 번 손봐주고 난리치면 되는 거다. 여자 얼굴에 똥물 좀 칠해주면 이제는 쉽게 이쪽에 접근을 하거나 다가오지 못할 거다.
위험하게 가라앉는 태양의 눈동자에 여자는 몸을 떨었다. 이제야 태양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여자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나식.”
“당신이 키웠는데 내가 제대로 컸겠어?”
태양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며 심드렁하니 말했다.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거울을 보고 이야기 해.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해 봐. 답은 바로 나오잖아. 우리 둘 서로 싫어해도 하는 짓은 똑같아. 그래서 모자인가 봐.”
머리에서 손을 뗀 태양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여자가 보여준 그 웃음이다. 그것을 깨달은 것인지 여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빙글빙글 웃는 얼굴의 태양은 잔을 위로 들었다.
“가 봐. 그리고 돈은 확실하게 보내. 알았지?”
여자의 얼굴은 이제 발갛게 달아올랐다. 빠득-하고 이를 갈던 여자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가 버리나 싶었지만 결국에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를 잡아챘다. 그리고 성큼성큼 나가는 것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저 여자 커피 값은 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백만원을 입금해줄 테니까 커피 값은 그냥 이쪽에서 내주는 걸로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태양은 몸을 돌려 의자에 손을 대고 바로 뒤에 붙어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거기서 뭐해요?”
신문을 펼쳐 읽는 척을 하고 있던 자는 태양의 물음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아주 짧은 순간 상대는 어떻게 할까-하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신문지를 내려 태양에게 얼굴을 보였다.
“걱정 되서.”
어설픈 표정을 지으며 신문을 완전히 내린 도후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선글라스도 착실하게 쓰고 있었다. 그래도 워낙 눈에 튀는 스타일이라 조금 전 가게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유도후 아냐?’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버렸다. 그 소리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 태양은 그 소리를 바로 잡아냈다.
빤히 쳐다보자 도후는 주문한 녹차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 쪽으로 건너갔다. 조금 전 여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도후는 녹차를 홀짝이며 태양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며 은근히 옆으로 눈을 돌리는 것에 태양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많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 중이야.”
“그래요? 생각 잘 한 후에 말해 봐요.”
도후는 눈을 돌려 태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태양은 평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피로함이 전해졌다. 도후는 손을 뻗어 태양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요. 그런데 기분은 나쁘네요.”
태양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도후의 손가락을 잡아 당겼다. 도후와 손가락이 얽히게 된다. 타인의 온기가 전달되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더 매달리게 된다. 점점 세게 손을 잡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물었다.
“돈은 왜 달라고 했어?”
“저런 인간은 백번 말해도 소용없어요. 일단 금전적인 손해가 가야지 쉽게 행동하지 못해요. 자기 돈 나가는 건 미치도록 싫어하는 인간이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제일 확실해요. 저 여자 법보다 돈이 더 위인 인간이에요.”
“......그런가..”
도후의 중얼거림에 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을 하고 손을 대도 저 여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돈이라면 다르다. 돈 하나가 인생의 모든 목표인 여자이니 만큼 자신의 수중에서 돈이 나가게 된다면 달리 생각하게 될 거다. 아주 다른 방법으로 이리로 접근을 할 수도 있고, 아주 포기를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같이 살았을 때 엇나가기 시작하는 자신의 보고 지긋지긋해 했으니 이런 수모를 겪고도 다시금 접근을 할까 싶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한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것이라서 단정 지어 말을 할 수가 없다. 태양은 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협박은 해뒀으면 당장은 안 나타나겠지만 쉽게 떨어질 여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아줌마를 너무 거물처럼 말했나.”
“실제로도 거물이야. 안 그래도 내가 아는 변호사가 있어서 그쪽에 연락을 취하긴 했는데 괜찮아?”
“유능한 변호사에요?”
“굉장히.”
“그러면 그 사람한테 부탁하면 그 여자 다시 안 나타나게 할 수 있어요?”
“국외 추방이라도 가능할 걸?”
“그렇게 해주면 정말 고맙겠는데요.”
중얼거린 태양은 피식-하고 웃었지만 도후는 속으로 ‘정말인데..’라고 생각했다.
도후는 손을 깍지 끼고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협박은 네가 하고 법적으로 하는 것은 내가 알아보는 거지. 딱이잖아?”
확실히 그렇다. 이쪽에서 협박을 하고 도후가 법적으로 알아봐서 압력을 가한다며 그 여자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다.
여자가 다시금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굉장히 예민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도후가 이렇게까지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알게 모르게 정말 의지가 되는 사람이다. 그 순간 몸에서 긴장이 쫙 풀린 태양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하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당신 얼굴 봤으면 연예인이라는 것을 트집 잡아 협박을 하려 했을 걸요.”
“그런가?”
“당연하죠.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물러난 건 내가 전에 어떻게 돌아다녔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
“아저씨한테 전화 했더니 바로 나오던데? 그 여자가 너랑 만난다고 아저씨한테 자랑을 했나봐. 그것 때문에 아저씨 굉장히 놀라서 엄마가 달려갔어. 지금도 굉장히 걱정하고 있을 거야. 빨리 돌아가 봐야지.”
“제길. 그 여자...”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자신을 만난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한 거란 말인가. 분명히 아버지를 자극 할 생각이었겠지. 그렇게 건드려대면 이쪽에게 접근하게 하는 것이 싫어서라도 아버지가 쉽게 지갑을 열 것이라고 생각한 거다.
망할 여자. 삼백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더 부를 것을 그랬다. 너무 큰 액수를 부르면 엇나갈 것 같아 적당히 부른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되다니.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나갈 것을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뒤에서 점원이 나타났다.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은 점원은 도후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계속 여기에 계실 겁니까?”
점원의 말에 도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조금 더 있을 건데요. 왜 그러죠?”
“지금 가게 안에 사람들이 유도후씨가 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그게 그러니까.”
끝까지 말을 하기가 곤란한지 점원은 난처한 기색을 비쳤다. 그것에 도후는 점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안 그래도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쪽을 알아보고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치 빠른 가게 매니저와 점원들이 길을 막아서 사람들이 여기까지 들어오지는 않고 있지만 점점 숫자가 많아지니 자체적으로 제지를 가할 수가 없어진 거다. 즉, 가게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도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서 지갑을 꺼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지금 일어나도록 하죠. 여기서 계산해도 됩니까?”
“됩니다. 이쪽 분도 같이 계산하는 겁니까?”
“합해서 해주세요.”
도후는 점원이 내미는 계산서를 보고 돈을 냈다. 잔돈을 받아 동전 하나까지 전부 지갑에 넣은 그는 의자에 푹 묻혀서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는 태양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태양은 도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의 한쪽 어깨에 매달려 있는 가방을 대신 들어서 자신의 어깨에 올린 도후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태양에게 대신 씌웠다. 눌려진 머리를 대충 흩트려서 부풀린 그는 이쪽을 쳐다보며 환호를 올리는 사람들을 피해 점원이 만들어준 길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급히 계단을 내려가 도로로 내려간 후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입소문이 퍼진 것인지 긴가 민가 하는 표정으로 서있던 사람들은 도후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로 환호를 올렸다. 그런 사람들을 피해 앞으로 걸어간 도후는 길가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태양도 문을 열고 차를 탔고 바로 차가 움직였다. 그러는 중에 앞을 막고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도후는 후진을 해서 곧장 도로로 들어갔다. 도로로 나와서 한창 달릴 때가 되어서야 태양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뺄 수가 있었다.
“사람들 무섭게 들이대네요.”
“원래 그래. 집으로 갈 거지?”
“가야죠. 아버지가 걱정할 텐데.”
들어가기 전에 전화부터 할까나.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귀에 댔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기다렸다는 듯 호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양이니?]
“네. 저에요.”
[너 엄마랑 만났어? 지금 같이 있어?]
“지금은 옆에 없어요. 그리고 이번 문제 해결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해결을 했다니?]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괜한 생각은 하지 말고 아줌마랑 말 잘 해요.”
[태양이 너 설마 엄마한테 손을 댄 건....]
“손은 사용하지 않고 말만 좀 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금방 집에 들어가요. 낯선 사람이 벨 눌러도 문 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알았죠?”
[응. 알았어.]
호수가 전화를 끊자 태양도 폰을 듣고 손 위에 올렸다.
지금 호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엄마와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전전긍긍해하고 있겠지. 짧은 한숨을 쉰 태양은 폰을 주머니에 넣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아버지랑 사이가 좋구나.”
“그렇죠. 워낙 믿음이 안 가서 안 챙겨주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나는 너무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랑 친한 녀석들을 보면 부러워. 뭐든지 상대적인 거니까 자신에게 빈 부분이 있다고 그것에 너무 연연하지 마.”
그쪽은 아버지가 없고, 이쪽은 이상한 어머니가 있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냥 훌훌 털어내라는 건가. 승복을 하고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건가.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바로 뭐라고 했을 거다. 있는 대로 입을 놀려서 상대의 입을 다물게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태양은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도후의 말을 들었다.
“그냥 너 답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지금 그 상태도 충분히 나쁘지 않고 말야.”
지금 이 상태가 나쁘지 않다라...
눈을 깜박인 태양은 앞을 쳐다봤다. 빠르게 달리는 것 때문에 앞이나 옆에 있던 것들이 전부 뒤로 밀려졌다. 지나쳤던 것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굴을 돌려 창을 쳐다보자 도후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멍하니 도후의 얼굴을 보고 있던 태양은 ‘선글라스 벗으라고 할까..’라고 머리로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말을 꺼냈다.
“나 졸려요.”
“그러면 자. 도착하면 업어서 데리고 갈 테니까.”
도후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태양은 바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당신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응?”
“당신이 없었으면 더 피곤해졌을 거예요.”
중얼거린 태양은 그 후에 말이 없었다. 태양이 무슨 말을 더 할까 싶어 집중하고 있었던 도후는 들리는 것이 고른 숨소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옆으로 뻗어 태양의 어깨를 만졌다. 조심스레 똑바로 눕게 하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겼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정리하고 그냥 떨어지기가 아쉬워서 볼도 만져봤다. 조금은 거칠어진 것 같다.
“피부가 퍼석해졌네.”
나중에 영양크림이나 좀 사줘야 겠다며 도후는 다시금 운전대를 잡았다.
태양은 감은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캄캄한 아파트 단지다. 내 이럴 줄 알았다며 태양은 옆으로 얼굴을 돌려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든 도후를 쳐다봤다.
팔짱을 낀 도후는 깊은 숨을 토해내고 있었는데 정말 깊이 잠이 든 것 같아서 깨울 수가 없었다. 태양은 도후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의 잠든 얼굴을 쳐다봤다. 너무 빤히 쳐다봤던 것일까. 움찔하고 코를 씰룩인 도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에는 멍하니 있던 도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태양과 눈이 마주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고 있어요?”
“아. 그게 말이지. 네가 너무 잘 자서 깨울 수가 없었어.”
웅얼거리듯 말을 하며 도후는 손가락으로 눈을 비벼 묻어있는 것을 털어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차 천장까지 손이 닿도록 기지개를 하던 그는 몸에서 나는 뚜둑 거리는 소리에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으윽, 뻐근해. 괜히 잤나 보다.”
“피곤해요?”
“아니. 그냥 널 깨울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다 보니 잠이 든 모양이야. 이제 내릴까.”
도후는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옆에 앉은 태양이 움직이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쪽을 쳐다봤다.
“왜? 안 내릴 거야?”
“이리 와 봐요.”
“응?”
손가락을 들어 까닥이는 태양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에서 달리 느껴지는 것이 있었던 도후는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의 상황을 파악했다. 좋아. 사람이 없다. 원래대로 자리에 앉은 도후는 태양 쪽으로 얼굴을 숙이고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을 뿐이지만 그 행위가 점점 열기를 띄어갔다. 어느 순간 태양의 머리를 끌어안은 도후는 입을 벌리고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 도후의 행동에 맞춰 태양도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벌렸다.
태양의 얼굴을 잡아 천천히 입술을 누르며 떨어진 도후는 조금은 상기된 뺨을 하고 있는 태양을 쳐다봤다. 입을 열고 틱틱 거릴 때에는 얄밉지만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귀엽기도 했다. 사랑스러웠다. 손가락으로 태양의 턱을 슬슬 문지른 도후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태양과 나란히 의자에 앉은 도후는 앞을 쳐다봤다. 조금 전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긴 했지만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끄러워진 것이다.
집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밤이라서 다행이지만 만약 낮이었고 보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쩌란 말인가. 요새는 적당이라는 것을 너무 방치하고 있는 것 같다며 머리를 긁적인 도후는 태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에 들어갈까?”
“들어가요.”
“그래.”
도후는 뒤로 해서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마찬가지로 차에서 내린 태양은 도후의 옆에 붙어서 걸음을 옮겼다.
밤이라 그런지 공기가 좀 쌀쌀하다. 얇은 옷을 입고 있는 태양의 상태가 신경 쓰였던 도후는 그쪽으로 팔을 들며 물었다.
“안 추워?”
“괜찮아요.”
막 태양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는데 안 춥다고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위로 올린 손을 내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올려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태양이 그런 도후 쪽으로 은근슬쩍 몸을 붙였다. 그러자 도후도 자연스럽게 태양의 어깨에 손을 올릴 수가 있었다.
묘한 느낌이다. 도후도 그렇고 태양도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은 채로 둘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안에 들어가서까지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 싶었던 도후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다른 쪽을 쳐다봤다. 한번 의식을 하려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 도후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빈손으로 들어가도 되나? 과일이라도 사 갈걸 그랬나?”
“괜찮아요. 집에 밥 있고 김치 있잖아요.”
“그래도....”
달리 먹을 것이 있어야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먹을 것이 없는 상태로 멍하니 있으면 그만큼 어색한 일이 달리 없을 거다. 어떻게 하나 싶어 고민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도후는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받던 도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옆으로 몸을 돌리며 폰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상대가 더 빠른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기만 하던 그는 곧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네? 자..잠깐.....끊어버렸잖아.”
상대가 굉장히 말이 빨랐나 보다. 결국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폰에서 얼굴을 떼는 도후를 쳐다보며 태양은 물었다.
“누군데 그래요?”
“어머니.”
“네?”
“지금 여기로 오겠다고 하셨어. 2분 있다가 도착한데.”
‘정말이지 일 밀어 붙이는 추진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라고 중얼거리며 복잡한 표정을 짓는 도후를 쳐다보며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거실에 있는 것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호수와 호영.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태양과 도후였다. 도후는 무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태양은 호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서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호영이 이 집에 처음 왔는데 청소는 하나도 안 되어있고 먹을 것도 없어서 난감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호영과 호수는 학생처럼 무릎을 꿇고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잔뜩 긴장을 한 호수와 달리 호영은 뭔가를 결심하고 온 듯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자신들이 굳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호영이 다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이만 일어나 볼까나.
“자, 그럼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태양의 말에 호수는 사색이 되어 얼굴을 들었다. 무릎에 올려져 있던 손도 반쯤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자신과 호영만 두고 지금 어디를 가는 거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태양은 못 본 척 무시했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호수의 몫이었다. 지금 이 상황도 호영 아줌마와 관련된 일도, 그리고 엄마와의 일도 전부 그의 결단으로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언제까지 이쪽이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태양은 도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도후가 ‘이대로 가도 정말 괜찮아?’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태양은 묵묵히 턱을 위로 올렸을 뿐이다. 계속 앉아 있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는 그 무언의 표시에 도후는 호수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에 이어 도후까지 일어나자 호수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린다. 사색이 되어 멍하니 태양쪽을 쳐다보는 것에 호영은 내내 다물어져 있던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좋나요?”
난데없는 호영의 물음에 호수는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전처와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녀를 좋아하는 감정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런 여자가 나타났다고 우리 사이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거죠? 당신이 그 여자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게 미안함을 느껴 헤어지자고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 않아요. 전 정말로 당신이 좋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건데요?”
“그건....그건....”
호수는 망설였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저럴 때에는 그냥 ‘당신을 사랑해요.’라면서 안아주는 것이 제일인데 말이다. 저렇게 뭘 모른다면서 답답한 느낌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호수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여자 때문에 당신이 피해를 보는 게 싫었어요.”
호수의 말에 호영의 표정이 차분해진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을 느낀 호수는 긴장했지만 그래도 말하기를 멈추진 않았다.
“그 여자는 다른 사람하고 달라서.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서. 당신이나 병원으로 찾아가서 귀찮게 하는 것이 싫었어요. 그것 때문에 당신이 진저리를 낼 것 같고 또 내게 실망을 하게 될 것 같아서...당신이 내게 안 좋은 느낌이 들기 전에 그 전에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어요. 서로에게 좋은 모습이 남아 있을 때 떨어지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서....그래서 나는....”
“저는 당신이 정말 좋아요.”
호영의 고백에 호수는 얼굴을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호영은 호수의 손을 잡으며 확신에 찬 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좋으니까 어떤 허물도 다 덮어줄 수 있다고 했어요. 설령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겨도 같이 해결하자고 하지 않았나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그렇죠?”
“....맞아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죠..”
“그러면 우리 서로를 조금 더 믿어요.”
호영의 말에 호수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아직은 좀 불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던지 호영은 잔잔한 웃음을 지은 채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여자 백이 달려와도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병원을 빼앗아 가려 했던 녀석들 다 때려눕히고 버티고 있던 나에요. 그런 잔머리 굴리는 여자에게 질 것 같아요? 꿈쩍도 안 하고 당신도 안 빼앗겨요. 알았나요?”
“.......호영씨..”
“호수씨. 이리와요.”
호영은 팔을 벌렸다. ‘자, 이제 내 품으로 들어와.’라고 말하는 듯 한 행동과 표정에 호수는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슬그머니 호영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태양과 도후는 조용히 집에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선 둘은 처음에는 서로를 쳐다보지 못했다. 부모님의 로맨스를 보는 것은 쑥스럽기만 했다. 머리를 긁적이거나 바닥을 발로 차는 등의 행동을 반복하던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난간 쪽으로 몸을 돌리며 팔을 대고 아래를 쳐다봤다. 단지 안은 텅 비어있었다. 조용한 아파트 내부를 쳐다보던 태양은 조금 전 봤던 호수와 호영을 떠올렸다.
아버지 자체는 걱정이지만 호영은 믿음직스러웠다.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 뭐라 한다고 해도 호영이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하긴 호영 아줌마는 큰 병원을 혼자서 지금까지 잘 운영을 할 만큼의 여장부다.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그것들을 이겨내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니 만큼 엄마 따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다. 호영이 전보다 훨씬 믿음직스럽고 대단하게 여겨진 태양은 한쪽 입술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성별이 바뀌었어.”
“뭐, 우리 엄마가 워낙 여장부 스타일이라.”
“그렇죠.”
그게 더 좋다. 멋지다고 여겨졌다. 과연 사람들마다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걸까. 이제부터는 이쪽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아줌마가 알아서 아버지를 잘 챙겨줄 거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태양은 눈을 감았다. 들리는 것은 도후의 숨소리다. 깊은 호흡 소리를 들으며 태양은 점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치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얼굴을 들자 도후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것과 동시에 담배를 한 대 피고 싶어진 태양은 도후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 대만 줘요.”
정말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도후는 인상 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담배 안 피잖아.”
“끊었을 뿐이지 원래 잘 피워요.”
“그래도 안 돼. 어디 형 앞에서.”
도후는 앞으로 내밀어진 태양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절대로 담배를 주지 않을 기세다. 강렬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며 ‘담배는 절대로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줄 수 없어.’라고 말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후를 빤히 쳐다보며 태양은 중얼거렸다.
“같이 자고 나서도 형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
도후는 움찔했다.
아니. 왜 이런 말을 하는 거란 말인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려니 태양이 다시금 이쪽을 쳐다본다. 이쪽을 향한 태양의 눈동자에 약간의 웃음기가 서려있는 것을 확인한 도후는 심장이 있는 곳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너..너! 안 그래도 아픈 부분을 그렇게 사정없이!”
“더 후려파줄 수 있는데요. 송곳 같은 날카로움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줄 수 있어요. 왜요? 양심의 가책 좀 느끼게 해줄까요?”
“나만 좋아서 한 게 아니잖아! 그건 합의였어!”
“맞아요. 합의였죠.”
바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태양의 행동에 도후는 기운이 빠졌다.
이번에도 이런 식인가. 태양의 말 한마디에 흥분 했다가 그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기운이 빠지게 된다. 괜히 예민한 반응을 취했다면서 도후는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얼굴을 돌렸다.
“고마워요.”
저 아래를 쳐다보고 있던 도후는 굳은 얼굴을 들어 태양을 쳐다봤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을 확인하고는 점점 얼굴이 붉은 빛으로 차올랐다. 괜히 머쓱해진 도후는 헛기침을 하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무섭게...”
“무섭긴요. 정말 고마워서 그러는 건데.”
이런저런 일 전부를 통틀어서 옆에 도후가 있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힘이 되었다. 그가 옆에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쁜 상황이 되었을 거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저런 강한 성격의 아줌마가 옆에 있으니까 앞으로는 정말 걱정 덜었다. 지금까지 이쪽에서 신경 썼던 모든 것을 아줌마가 대신 해결해줄 거다. 아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실수투성이에 마음이 약해서 의도치 않게 사고를 치는 아버지를 떠넘기는 것은 미안하긴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어리버리한 면을 아줌마가 좋아하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다.
태양은 한결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말했다.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좋아해요.”
“..................”
“사랑한다고요.”
무드도 없고 뜨겁지도 않은 고백이었다. 하지만 지금 태양의 말을 듣는 순간 도후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에?’라는 기분이 된 도후는 그저 멍하니 태양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사랑한다는 단어를 한부로 남발할 수 있는 것이던가.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 쳐도 남자가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지 않다. 웬만한 각오가 없고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태양은 장난을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진지하게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정말 이쪽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한 거다.
사랑한다니. 태양이 지금 이쪽을 사랑한다고 말한 건가. 정말로. 진짜?
“.......아...그게 저기...”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이 바싹바싹 마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체온이 올라갔다. 기쁘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감정은 역시나 그것이다. 쾌감. 환희와 열정이 들끓고 있었다.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도후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도후가 위로 손을 들어 담배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침묵의 시간이 길었던 것에 따라 담배의 길이는 그만큼 짧아져 있었고 도후는 그만 불이 있는 곳에 손을 대고 말았다.
“아..뜨..뜨거워!!”
놀란 도후는 바로 담배를 떨어뜨리고 데인 손가락을 잡았다. 살짝 닿았지만 그래도 뜨거운 건 뜨거운 거다. 잠시 넋 놓고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한 거란 말인가. 얼굴을 구긴 도후는 손가락을 주물거리며 훅훅-하고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앞에서 나타난 태양의 손이 도후의 손가락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도후가 어떤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을 입 속에 넣었다. 합-하고 태양의 입 속에 들어가자 피부로 질척하고 촉촉한 느낌이 들었다. 짧은 소리를 지른 도후는 바로 손가락을 빼내고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뭐하는 거야!”
손을 잡고 언성을 높이는 도후의 얼굴은 완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양은 태연하기만 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살짝 핥았을 뿐인데 뭘 그렇게 겁탈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정말 덮치면 난리 나겠네.”
농담으로 말을 했을 뿐인데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덮쳐 볼까-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눈을 빛낸 태양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채로 위로 손을 들었다.
“이리 와 봐요. 덮쳐보게.”
태양의 말과 행동에 도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이 손을 옆으로 휘두르면서 ‘부웅.’하는 소리를 내자 도후는 더 뒤로 물러났다.
도망을 치는 듯 한 도후의 행동이 재미있기 때문일까. 태양은 작정을 하고 도후에게 달려들었다. 다다닥-하고 달려오는 태양에 기겁을 한 도후는 엘리베이터를 지나 비상계단이 있는 쪽으로까지 갔다.
“정말 왜 이래! 사람들 본다고!”
“댁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조용히-하고 이리 와 봐요. 어서.”
두 걸음 떨어진 쪽에 있던 태양은 손을 까닥이며 어서 이리로 오라는 행동을 취했다. 이쪽이 물러나기만 하니까 그게 재미있어서 더더욱 저런 행동을 하는 걸거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 도후는 혀를 찼다.
“너 정말...”
앞으로 걸어간 도후는 태양의 손목을 잡고 뒤에 있는 그늘진 계단 쪽으로 들어갔다. 순순히 따라오는 태양을 벽에 기대게 한 그는 얼굴을 내려 태양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입술만 대고 있다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두드리듯 핥아대는 것에 태양은 눈을 감고 입술을 열었다. 그 속으로 당연한 듯 도후의 혀가 들어온다. 말캉 하고 부드러운 혀가 입천장과 혀를 쓰다듬는다. 태양은 얼굴을 들어 도후의 혀에 맞춰 혀를 움직였다. 장난을 치듯 살살 핥다가 뒤로 물러나는 태양의 움직임에 도후는 손을 들어 태양의 허리를 잡았다. 잘 잡히는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하반신을 밀착한다. 그러자 아래에서 슬슬 신호가 올라왔다. 그것에 도후는 입술을 뗐다.
“조금 더 하면 위험할 것 같은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도후의 뺨을 한손으로 감산 태양은 얼굴을 들며 말했다.
“무슨 상관이에요.”
동시에 다시금 입술이 닿는다. 그런 태양의 행동에 도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 다시금 얼굴을 내려 입술을 댔다. 처음에는 입술만 핥다가 나중에는 태양의 볼이나 귀를 깨물기도 한다. 그것에 태양은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했지만 도후는 계속해서 태양의 얼굴을 여기저기 건드렸다. 그 간지러운 감촉에 결국 태양은 작게 소리 내 웃어 버리고 말았다. 키득 거리는 낮은 웃음 소리에 도후는 멍한 표정을 지은채 태양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취한 듯 뭐라고 속삭이는 듯 한 말에 태양의 웃음이 조금 더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