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2)

펄럭. 펄럭. 하고 천을 터는 소리에 깊은 잠을 들 수가 없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계속해서 들리는 저 소리가 거슬려서 그만 좀 들렸으면 싶었다. 그랬더니 점점 신경에 거슬려서 더 눈을 감고 잘 수가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제발 좀 봐주라는 느낌으로 태양은 옆으로 팔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침대 위를 툭툭 건드리지만 딱히 잡히는 부분이 없다. 옆으로 얼굴을 돌리자 텅 빈 부분만이 보였다. 좁은 침대이니 널널하게 누워있는 듯 한 느낌에서 옆에 도후가 없다는 것은 진작 눈치 채고 있었다. 문제는 도후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이쪽을 이렇게 침대 위에 덩그라니 두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다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 순간에도 바깥에서 펄럭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태양은 끙-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파...”

정말 아팠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더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반쯤 일어난 상태에서 이도 저도 아닌 자세로 엎드려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도후가 들어왔다. 걸레를 들고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도후는 침대에 엎드린 상태의 태양을 보고는 놀란 듯 바로 그의 옆으로 달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일부러 일어나지 말고 그냥 누워있어.”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어깨와 팔을 붙잡고 다시금 자리에 눕게 했다. 똑바로 침대에 누운 상태가 된 태양은 옆에 앉은 도후를 쳐다봤다. 

“뭐하고 있었어요?”

“청소를 하고 있었어.”

“....맞다. 어제 난리가 났었지.”

태유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상을 부수고 뒤집어서 거실은 엉망이 되었다. 바로 치우겠다는 도후를 말리고 바로 침대로 달려가게 한 것은 바로 태양이다. 

일어나서 청소를 해야 겠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도후 혼자서 청소를 하게 한 것은 미안하지만 지금 헤실 거리고 웃는 것을 보아하니 청소를 한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태양은 팔에 턱을 댄 채로 도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도후는 웃고 있었다. 입술의 양끝을 올리고 만족에 가득 찬웃음을 지으며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태양은 괜히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청소가 재미있어요?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에? 내가 웃고 있어?”

도후는 의외라는 듯 손으로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뺨을 쓰다듬으며 이쪽을 쳐다봤다. ‘나 아직도 웃고 있어?’라고 묻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 태양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후가 뺨에서 손을 떼고 태양의 볼을 감쌌다. 

“뭐 웃으면 웃는 거겠지.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아파요.”

중얼거린 태양은 허리에 손을 대고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정 자세만을 고집했던 도후가 어제는 별에 별 자세를 다 취하려고 했다. 애초에 도후를 앉히고 그 위에 앉으려 했던 것이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후 쪽에서 자세를 바로 잡아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대로 눕혀서는 이런저런 짓을 해댔다. 몸을 너무 구겨지게 해서 그대로 허리가 뚝 부러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것을 다 인내해서 지금 이렇게 허리가 제대로 붙어있는 거다. 어제를 생각하면 심난하기만 했다. 눈을 위로 들고 길게 한숨을 쉰 태양은 도후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런 체위는 어디에서 알아냈어요? 허리 반으로 접혀서 안 펴지는 줄 알았잖아요.”

“아 그게...좀 흥분을 했더니...”

어제 일에 대해서는 태양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런 식으로 짐승 같이 달려든 적이 달리 없었기 때문에 어제는 도후 본인도 낯설 정도였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 유혹적이라서.... 그 순간 태양의 이런저런 모습에 떠올랐다. 위험하다 싶었던 도후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지사제 먹을래?”

“그거 먹어봤자 아무 소용없을 걸요. 아.....”

“왜 그래? 배 아파?”

태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도후는 바로 이불을 걷고 태양의 몸을 안아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을 문을 열고 안에 태양을 세운 도후는 문을 잡은 채로 태양을 쳐다봤다. 그것에 태양은 허리에 손을 대고 도후를 쳐다봤다. 도후가 왜 바로 일을 보지 않고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는 거냐고 묻는 시선을 보내자 태양은 눈으로 옆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그 사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도후는 태양이 길게 한숨을 쉬자 ‘아.’하는 소리를 내며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로 문을 닫았다. 그제야 안쪽에서 앉는 소리가 났다. 도후는 머뭇거리다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많이 아파? 아프면 말해.”

“뭘 해줄 수 있다고 댁한테 아프면 말을 해요.”

“뭐. 그건 그렇지만...”

태양의 생리적인 현상을 이쪽에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괜히 초조했다. 팔짱을 낀 상태로 도후는 화장실 앞에서 왔다 갔다 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자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슬리퍼가 바닥을 직직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태양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건가 싶어 잔뜩 긴장한 채로 있으려니 그제야 천천히 손잡이가 돌려지고 헬쓱한 얼굴을 한 태양이 나왔다. 밖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문만 열고 그 앞에 서있는 것에 도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나오고 거기에 그러고 있어?”

“씻고 싶어요.”

“응? 아. 그래.”

세수나 양치를 하고 싶은데 허리를 숙이지 못해서 할 수가 없으니까 도움을 요청하는 거다. 도후는 안으로 들어와 태양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세면대 앞으로 온 태양은 세면대에 손을 대고 얼굴을 숙였다. 그것에 도후는 수건을 꺼내 태양의 목에 두르고 물을 틀었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태양의 얼굴을 닦아내는 도후는 진지하기만 했다. 혹여라도 태양이 입고 있는 옷에 묻을 까봐 조심스럽게 물을 묻히고 비누칠까지 했다. 그리고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을 다 닦아낸 도후는 테양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시원해?”

“양치도 할래요. 치약 좀 짜줘요.”

“그래.”

시키는 대로 칫솔에 치약을 짜낸 것을 태양에게 내민다. 그러자 태양은 그것을 잡고 양치를 하기 시작했다. 양치질을 하는 동안 몸이 흔들리게 되니 그것이 안 좋은지 미간 사이에 주름이 생겨있다. 그것을 보고만 있으려니 한참 동안 이를 닦던 태양이 칫솔을 내렸다. 도후는 기다렸다는 듯 물이 담긴 양치 컵을 내밀었고, 그것을 받아든 태양은 입을 헹구고 컵을 세면대 옆에 내려놨다. 물을 떠 입술에 묻은 치약을 닦아낸 태양은 눈을 들어 도후를 쳐다봤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그건 그렇죠.”

조금의 부정 없이 바로 긍정을 한 태양은 몸을 돌렸다. 그런 태양의 허리에 팔을 감은 도후는 부축을 해서 거실로 나왔다. 두툼하게 깔아둔 이불 위에 태양을 눕히고 그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태양이 눈을 들어 도후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있지 말고 편하게 있어요.”

“아니. 난 이게 편해.”

“거짓말.”

태양의 지적에 도후는 이불 위로 올라와 태양의 허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을 든 그는 태양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몸 많이 아파?”

“뭐, 점점 익숙해지겠죠. 그보다 이리 와요.”

"응? 하지만 몸 아프잖아."

"괜찮으니까 이리와요."

태양은 팔을 벌렸고 그것에 도후는 냉큼 태양의 옆으로 갔다. 그가 옆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 태양이 팔에 머리를 벤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도후는 태양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도후의 품에 딱 안긴 태양은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바로 도후의 손가락이 태양의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 가볍게 긁적인다. 

“피곤해? 더 잘 거야?”

“더 자고 싶었는데 누가 청소하는 것 때문에 중간에 눈을 뜬 거예요.”

“그래? 그러면 더 자고 일어나. 눈 뜨면 맛있는 거 해줄게.”

도후의 말에 태양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행동이 멈춰지고 태양은 깊은 잠이 빠졌다. 금세 잠들어 버린 태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도후는 손을 내려 태양의 등을 토닥였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이다가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도후의 품에 안겨 있었다. 멍한 느낌으로 태양은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오후 2시다. 도대체 몇 시간을 잔건지 모르겠다. 너무 자서 잠에 취해서인지 머리도 좀 아프고 기분도 그렇다. 배는 고프다 못해 아픈 것 같았다. 태양은 몸 위에 올려진 도후의 팔을 치워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허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똑바로 일어나 앉은 태양은 집을 둘러봤다. 

집에 원래 이런 느낌이었던가. 집 안의 공기가 상당히 뭉글뭉글 한 것 같다. 동그랗게 뭉쳐진 기분 좋은 무엇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뚝거리면서 방으로 들어간 태양은 잠바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내일은 월요일이지만 집에 도후가 있으니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어떨지를 모르겠다. 다음 주가 시험인데도 태양은 내일 학교 땡땡이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지금은 ‘뭐, 어때. 피곤하면 좀 쉬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만다. 

핸드폰을 열자 낯선 번호가 찍혀있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이건 누구한테 온 건지 모르겠다. 낯선 번호를 빤히 쳐다보던 태양은 핸드폰을 닫아 책상 위에 올리고 다시금 밖으로 나와 도후의 옆에 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위로 엎드렸다. 

“으음....”

바로 신음 소리를 낸 도후는 감은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얼굴에는 멍한 기색이 한 가득이다.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도후는 얼굴을 돌려 태양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당연하게 태양의 팔을 잡아 당겨 다시금 이불 위로 눕힌다. 그리고 그 위로 엎드려 바로 입술을 겹쳤다. 

입 안으로 도후의 혀가 들어오자 태양은 눈을 감았다. 기분 좋게 도후의 행위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도후의 손이 허리나 엉덩이 쪽으로 내려가려 하는 것에 태양은 아차 싶어서 바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도후가 입술을 떼고 태양을 내려다본다. ‘왜 손을 잡는 거야?’라고 묻는 시선을 보내는 것에 태양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요.”

“........안 되는 건가...”

태양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 도후는 그대로 태양의 몸 위로 쓰러졌다. 어깨에 머리를 대고 긴 한숨을 쉬는 것에 태양은 도후의 단단한 등에 손을 대고 가볍게 흔들었다.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예요. 이제 일어나요. 배 안 고파요?”

물음에 도후는 태양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웅얼거리며 물었다. 

“태양이 넌 어떤데?”

“난 배가 고픈 것 같은데..”

“그럼 일어나야지.”

도후는 태양에게서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앉는 것까지는 어떻게 성공을 하긴 했는데 어째 표정이 덜 깼다. 멍하니 위를 보다가 고개를 두어번 털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 먹을래?”

“양념치킨 먹고 싶어요.”

“몸에 안 좋아. 그런 거 먹지마. 된장찌개 해줄까?”

“........김치찌개. 어제 술 마시면서 먹었을 때 밥이랑 먹고 싶었어요.”

“알았어. 어제랑 똑같이 해줄게.”

하품을 한 도후는 뒤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긁적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온 도후는 물을 제대로 닦지도 않은 상태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앞을 서성이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런 도후의 모습은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바지에 김치 국물이 묻은 하얀 티셔츠에 머리는 까치집이었다. 얼굴은 그나마 볼 만 했는데 턱 아래에 거웃한 수염이 몇 개나 보였다. 과연 저 모습과 방에 놓인 잡지 속의 인물을 동일인으로 봐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어찌 날이 갈수록 자연인이 되어가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냉장고에서 얼굴을 든 도후가 턱을 긁적이며 묻는다. 

“왜?”

“상당히 우스운 몰골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태양이 너도 나 못지 않아.”

“그런가.”

중얼거린 태양은 눈을 내려 자신의 몰골을 살폈다. ....확실히 도후와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이다. 본인도 똑같은 주제에 괜히 도후에게 뭐라 한 건가 싶었던 태양은 하품을 하며 이불에 볼을 비볐다. 그 상태로 뒹굴 거리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베개에 볼을 대고 눈을 감자 퉁퉁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건 식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다.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도후가 해주는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겠구나. 그 생각으로 기분이 한껏 좋아진 태양은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그에 맞춰 주방에서도 콧노래가 들린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태양의 귀에는 확실히 들렸다. 감은 눈을 뜬 태양은 조용히 하고는 도후의 콧노래 소리를 들렸다. 지금 그가 기분이 굉장히 좋다는 것은 느껴졌다. 

그래. 기분이 좋단 말이지. 태양은 입술을 올리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딩동.

“응?”

한창 좋은 여운에 젖어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다. 

태양은 베개에서 얼굴을 떼고 뒤를 쳐다봤다. 그러자 주방에서 나온 도후가 손을 티에 닦으며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누구야.”

“지금 아침이 아니라 오후에요.”

“아. 그런가.”

대꾸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은 하지 않는 투다. 도후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바로 하며 현관 앞으로 갔다. 달칵 거리고 문 여는 소리가 나는 것에 태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누워만 있지 말고 운동이나 하면서 허리의 뭉친 근육이나 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관 쪽에서 ‘웃?!!’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후의 소리다. 도후가 저런 식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이상했던 태양은 바로 안색을 굳히며 거실을 나와 현관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왜 그러는.......어?”

전처럼 하얀 소복을 입은 할머니가 와서 떡 사라고 하는 건가 싶었던 태양은 딱딱하게 굳은 도후의 너머로 보이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전신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사내는 호수였다. 분명히 화요일 아침에 신혼여행을 떠난 사람이 왜 저런 곳에 저리 서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보다 지금 도후와 자신의 몰골은... 한창 달라붙어 있을 때 오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울 일이지만 말이다. 

태양은 당황해서 도후를 쳐다봤다. 마침 뒤로 얼굴을 돌렸던 도후는 작게 입술을 씰룩였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고 묻는 시선을 보내는 것에 태양은 턱으로 뒤를 가리켰다. 일단 빠져 있으라는 의미의 표시에 도후는 슬그머니 뒤로 몸을 물렸다. 그것에 태양은 절뚝거리며 현관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태...태양아...”

“.....왜 그래요?”

이상했다.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 거라든가 지금 호수의 표정이라는 것도 말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하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호수가 팔을 벌리며 태양에게 달려들었다. 

“태양아!!”

“웃!”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호수가 목에 매달렸다. 허리에 직격으로 오는 충격에 태양은 안색을 굳혔다. 그 순간 바로 도후가 뒤로 나타나 태양을 뒤에서부터 받쳐줬다. 결과적으로 넘어지지 않게 되었지만 뒤는 도후에게 잡히고, 앞은 호수에게 끌어 안겨 중간에 끼어서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순간에도 호수와 도후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해댔다. 

“태양아!! 태양아!!”

“태양아? 괜찮아?”

“태양아! 큰 일 났어!”

“허리 안 아파? 괜찮냐고?”

“태양....!”

“조용.”

동시에 태양의 이름을 부르려 했던 호수와 도후는 조용히 하라는 태양의 나직한 말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앞과 뒤에서 시끄럽게 굴던 것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으니 기분이 별로다. 태양은 옆으로 몸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일단 두 사람 떨어져 봐요.”

그 말에 도후와 호수는 주춤거리며 떨어졌다. 하지만 호수의 손은 여전히 태양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왜 이러나 싶어 눈을 내리자 호수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젖은 눈동자로 이쪽을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태양아....”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에 들어가서 말을 해봐요.”

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을 벗었다. 많이 지친 듯 쉽게 신을 벗지 못하고 자꾸만 헛발질을 하는 것에 태양은 호수의 팔을 잡아줬다. 그래서 겨우 신을 벗은 호수는 태양의 손을 잡고 식탁 앞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이쪽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끌어안기부터 하다니 지금은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에 도후가 옆에서 손으로 뭘 마시는 흉내를 낸다. 태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후가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올렸다. 그것을 확인한 태양은 식탁 위에 올려진 호수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자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요?”

호수는 눈을 들어 태양을 보는가 싶더니 옆으로 눈을 돌리고 도후를 쳐다봤다. 도후가 왜 저기에 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 보다는 도후가 이 집에 있는 것 자체가 낯선 모양이다. 눈을 굴리며 머뭇거리는 것에 태양은 잡고 있는 호수의 손에 힘을 줬다. 

“저 사람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그게....그러니까...”

호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내렸다. 망설이던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눈을 들어 태양을 쳐다보고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나타났어.”

“그 여자라니요? 호영 아줌마 말고 달리 만나는 여자가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

침을 삼킨 호수는 도후를 쳐다봤다. 도후는 다른 여자 운운하는 부분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에 침을 삼킨 호수는 일부러 태양을 쳐다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엄마가....거기에 있었어.”

“.......뭐라고요?”

“다른 남자랑 같이 있었는데...공항에서 마주쳐서...그런데 갑자기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서 그러니까...그게...”

“또 돈 달라고 했어요?”

“........................”

“말을 확실히 해봐요!!”

확실하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버벅거리는 것에 속이 답답해진다. 식탁을 쿵-하고 내려치는 것에 호수가 놀라 움찔하고 몸을 떨자 도후가 뒤로 와서는 태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양아. 진정해.”

“말을 제대로 해보라니까요!”

태양의 닦달에 호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도후를 흘겨보는 것에 그가 있기 때문에 솔직하게 다 말을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 것 상관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팍 좀 말해보라고 따지고 싶었는데 그 순간 호수가 입을 열었다. 

“....지금 호영씨도 집에 가 있을 거야. 도후군이 가서 좀 그녀 좀 안정시켜줘.”

“왜 제가 어머니를 안정시켜 드려야 하는 겁니까? 두 분 싸운 겁니까?”

“.......내가 헤어지자고 했네.”

도후는 숨을 삼켰고 그건 태양도 마찬가지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듯 눈을 크게 뜨는 두 사람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던 호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 뒤에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입술을 사려 물고 긴 한숨을 쉬는 호수의 모습에 도후는 눈을 들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태양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도 태양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려니 도후가 한쪽 팔에 자켓을 올린 채로 나오며 태양에게 말했다. 

“나 먼저 가 볼게.”

그리 말하고는 바로 현관으로 달려간다. 그것에 태양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후를 불렀다. 

“이봐요.”

“응?”

구두를 다 신고 뒤를 쳐다보는 도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확실하게 말을 해준 것은 아니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얼굴에서 그의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던 태양은 더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조심해서 가요.”

“그래.”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나 싶었는데 다시금 태양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중에 보자.”

호수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후가 워낙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다 할 말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려니 그런 태양의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은 도후가 몸을 돌리고 밖으로 나갔다. 탕.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어도 태양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닫힌 문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태양아.’라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은 다시금 안으로 들어와 호수의 맞은편에 앉아 의자를 끌어 앞으로 다가간 후에 물었다. 

“자세히 말해 봐요. 푸켓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거기까지 내려가서 정말 좋았어. 한껏 들뜬 상태로 있었는데....그런데 그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

“엄마가 왜 거기에 있었던 건데요? 남자랑 있었다면서요? 그 여자도 재혼해서 신혼여행 왔데요?”

“그건 아니고...그 남자는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인데...그러니까...”

“그 남자랑 놀아야 하니까 돈 좀 달라고 하던가요?”

“그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 여자가 하는 짓이야 뻔하지.”

“태양아. 그 여자라니. 네 어머니인 사람인데....”

“그런 여자를 누가 어머니라고 생각해요. 절대로 생각 안 해요.”

단호한 말에 호수는 입을 다물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시금 자신 없어 보이는 모습을 취하는 것에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태양은 호수의 손목을 잡아 흔들며 그의 말을 재촉했다. 

“더 자세히 말해 봐요. 어서요.”

“....네 말대로야.”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다. 하지만 태양에게는 아주 잘 들렸다. 정말 어이가 없었던 태양은 헛웃음을 흘리며 천장을 쳐다봤다. 

이혼을 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대략 10년 정도 된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 하나 매달고 나타나서 돈을 달라고 했단 말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니 심히 어이가 없다. 

“정말로 그런 말을 했어요? 남자랑 놀아야 하니까 돈 달라고?”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고....조금 비슷하게...”

이렇게 호수가 말을 하니 더 어이가 없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다. 십년 동안 얼굴 안 보이고 있어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슬슬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건가. 아주 확실하게 자신이 어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골치가 아파진 태양은 팔짱을 끼고 얼굴을 내렸다. 그러자 호수는 그런 태양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그 여자가 알게 되었으니까 앞으로 계속 찾아올 것 같았어. 실제로 푸켓에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눈앞에 나타나서 돈을 요구했고. 그래서 주기는 했는데, 그걸 호영씨가 보고 그래서....”

“그걸로 싸웠어요?”

“........응.”

고개를 끄덕인 호수는 완전히 시무룩해져서는 아래로 눈을 내렸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완전히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태양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번 문제가 호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여자가 더 많은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진정시키기 못하겠다. 아니. 왜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 저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인가.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결국 속에 담아뒀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버지가 확실한 태도를 보였으면 애초에 그 여자가 더는 접근을 안 했을 게 아니에요.”

“하지만 네 어머니고, 그리고 내 첫 번째 부인이고....”

“그러면 호영 아줌마는 뭐고요?”

호수의 얼굴이 흠칫-하고 굳는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쳐다보는 호수를 노려보며 태양은 말했다. 

“지금 아버지의 아내는 호영 아줌마잖아요. 그 분이랑 행복해지려고 재혼을 하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 때문에 그걸 포기하겠다는 말이에요?”

호수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태양이 지금 하는 말에 불만이 있어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으니까 저런 표정을 짓는 거다.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났다. 태양은 주먹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여자 어디서 만났어요?”

“태양아.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아버지가 이 모양인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이 듣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때문에 호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졌어도 좀처럼 말이 부드럽게 나오지 않았다. 태양은 호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제대로 좀 해요! 언제까지 그렇게 안일하게만 살 거예요?! 아버지 인생이니까 좀 확실하게 행동하란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 아버지를 보면 내가 속에서 열이 나요!”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를 치자 호수는 숨을 삼켰다. 겁을 집어먹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에 혀를 찬 태양은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태양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참을 수가 없다. 그 옆에 자신이 있었으면 그 여자가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었을까나 싶다. 

안 봐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빤히 보였다. 그 여자는 호영 아줌마가 옆에 있어도 나타났을 거다. 자기 입으로 당당하게 전처라고 말을 하고 ‘생활이 조금 힘드니까 돈 좀 빌려줘. 아니면 한국에 돌아가서 계좌에 넣어주던가.’라는 식으로 말을 했을 거다. 그 장면을 조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태양은 눈을 위로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화가 풀어질까. 굳은 얼굴로 내내 텅 빈 공간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폰이 울렸다. 누가 전화를 하는 건가 싶어 태양은 책상 위에 있던 폰을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보이는 것은 도후의 번호다. 태양은 바로 폰을 받았고 기다렸다는 듯 도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도후의 목소리에 태양은 속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요.”

[너 말고 네 아버지 말이야.]

“.....................”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릴까-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고 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려니 도후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널 아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쯤 분명 아저씨를 닦달 하고 있을 것 같더라고. 어때? 내 말이 맞지?]

“맞기는 무슨...”

100% 들어맞았다. 하지만 그것을 순순히 긍정할 수 없었던 태양은 말을 돌리기 위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일단 엄마한테 가서 말을 들어봐야지. 네 아버지 보다는 우리 엄마가 더 말을 잘 할 거야. 그리고 네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렇게 나오면 이쪽도 나름대로 손을 써둬야 할 테고 말야. 아, 이번 문제 법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거야?]

법 운운을 할 때 도후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일반 상식으로도 이혼을 한 상대가 갑자기 나타나 돈을 요구한다는 것을 굉장히 이상한 것이다. 때문에 법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여자의 접근을 막겠다는 것이지만 여자는 태양의 어머니다. 그러니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 거다. 하지만 도후의 조심스런 태도와 상관없이 태양은 냉정하게 말했다.    

“법으로 갈 필요도 없이 내가 알아서 할 게요.”

[주먹으로 때리게?]

“그래도 낳아준 사람인데 때릴 것 같아요?”

[......뭐..................]

말이 없는 것이 수상하다. 이 인간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하고 있었나 싶어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로 수화기에 귀를 대자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뒤를 이어 도후가 서둘러 말했다. 

[일단 둘이서 노력해보자. 이런 식으로 갑자기 깨지면 그만큼 어이없는 일이 없잖아. 나도 알아서 잘 해 볼 테니까 너무 아버지 닦달하지 말고. 알았어?]

“.....누가 닦달을 한다고....”

[아저씨 볶지마. 알았어?]

“........................”

[대답 좀 해보시지?]

“.........알았어요.”

[좋았어. 그러면 내가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안으로 연락할게. 그 동안 아저씨 좀 잘 다독여줘. 내가 너랑 아저씨만 있는 게 정말 걱정이다.]

“내가 아버지를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을 하는 건데요.”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네가 아저씨를 잡아먹을 것 같거든.]

도후의 말에 태양은 피식-하고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천천히 몸을 눕힌 태양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다. 

태양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진 것이 느껴진 것일까. 도후가 다시금 말을 건다. 

[너무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하고 있어. 몸 상태 안 좋은데 화내면 너만 손해야. 알았지?]

“알았어요.”

[형님은 말이지. 동생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큰일이야.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서 동생 집으로 갈까봐.]

익살스런 말에 태양은 ‘칫.’라는 소리를 내며 다른 쪽 팔을 위로 쭈욱 뻗었다. 

“오기는 어디를 와요. 가서 아줌마 상태나 살펴봐요.”

[그래. 알았어. 그럼 이만 끊는다. 몸 상태 안 좋아지면 말 하고.]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네.”

태양은 전화를 끊고 한 손에 들어오는 핸드폰을 쳐다봤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까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면서 어깨와 목 부분이 당겼다. 아까는 정말 흥분을 했던 모양이다. 빈속인데 괜한 일로 칼로리 소비를 했다면서 태양은 폰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망설이던 태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싱크대 앞에 서있는 호수다. 태양은 바로 호수의 뒤로 다가가며 물었다. 

“아버지 뭐해요?”

“응? 그냥 밥 좀 할까 해서....”

대답을 하면서도 얼굴은 싱크대에 고정되어 있다. 이쪽을 쳐다보지 못하고 손만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에 괜히 속이 안 좋아진다. 팔짱을 낀 태양은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나도 이젠 고기반찬 해준다고 해도 화 안 풀려요.”

“그...그런가?”

태양이 엇나가고 방에만 있고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호수는 꼭 고기를 사왔다. 고기를 맛있게 해주면 태양이 그걸 먹기 위해서도 잠시나마 집에 붙어있고 방밖으로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에는 그런 방법이 백이면 백 다 먹혔지만 지금은 아니다. 태양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호수의 옆에 붙었다. 그러자 호수가 당황해 하며 말했다.    

“저기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말고....”

“소리쳐서 미안해요. 그리고..건방지게 굴고 나쁜 말해서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진짜 안 그럴게요.”

말을 하면 할수록 면목이 없다. 아까는 너무 심하게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고생했다는 것을 아니까 부드럽게 나가고 싶어도 간혹 그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욱하게 된다. 이제 어린애도 아니니까 그건 좀 참아야 할 텐데 말이다. 

손가락으로 싱크대에 올려진 도마를 꾹꾹 누르는 태양의 행동에 호수는 눈을 깜박였다. 태양의 사과에 뭔가가 속에서 올라오는 모양이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호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뭐가 죄송할 게 있다고....내가 더 미안하지. 내가 제대로 했으면 너도 이렇게까지 안 됐을 텐데...”

“지금 내가 뭐가 어때서 이렇게까지 안 되었다고 하는 건데요. 그런 말 들으면 나 속상해요.”

“그...그런가?”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 호수의 모습에 태양은 한숨을 쉬며 그의 팔을 잡아 뒤로 밀었다. 

“비켜 봐요. 내가 할게요.”

“아니야. 내가 할게.”

“괜찮다니까요. 여행하고 돌아왔으면 일단 씻기부터 해요. 먼지투성이일 거 아냐. 그 모습으로 어딜 들어와요. 어서 화장실로 들어가요. 어서.”

“으...으응.”

태양에게 떠밀린 호수는 주춤거리며 화장실 앞까지 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하는 것에 태양은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것에 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태양은 한숨을 쉬며 싱크대 위를 쳐다봤다. 싱크대 위에는 도후가 요리를 하던 그대로 재료가 널려 있었다. 도후가 맛있는 김치찌개를 해준다고 했는데...

“...할 수 없지. 김치찌개는 나도 잘 만드니까.”

중얼거린 태양은 차를 타기 위해서 도후가 켜놨던 물을 옆으로 치워두고 냉장고로 가서 김치를 꺼냈다. 좋은 기분으로 요리를 하려 했지만 가슴 한쪽에 먹구름이 끼인 듯 답답하기만 했다.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채로 태양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태양은 호수의 방문을 열었다. 보이는 것은 볼록하게 솟아오른 이불이다. 귀를 기울이자 색색 거리는 숨이 들렸다.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다. 태양은 조용히 문을 닫고 가방을 추슬렀다. 소리가 안 나도록 운동화를 신은 태양은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그고 잽싸게 엘리베이터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바깥에 선 태양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저 앞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 차가 보인다. 도후의 차다. 태양이 곧장 그리로 가 문을 열고 앞에 타자 도후가 바로 시동을 걸었다. 허리를 편하게 해서 아픔을 줄인 태양은 의자에 등을 붙이며 물었다. 

“아줌마는 어때요?”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요?”

태양의 대답에 도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쪽으로 차를 돌렸다. 차가 단지를 벗어나자 도후는 다시금 말했다.  

“그 여자하고 아저씨하고 어떤 관계인지 확실하게 알기 전까지는 쉽게 흥분하지 않을 거야.”

“그건 무슨 말이에요?”

“아저씨가 전처에 대해서 아무 마음이 없는데 그 여자가 돈 달라고 매달리는 거라면 돈 얼마는 그냥 줄 수 있다는 입장이야. 하지만 아주 만약에 아저씨가 전처에게 아직 마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아버지가 엄마에 대해서 마음이 있다면 아줌마는 헤어질 생각이래요?”

“아마도. 그런 쪽으로는 단호하니까. 우리 집안사람들은 오로지 한 사람만 보는 기질이 있거든.”

“당신도 그래요?”

도후는 바로 태양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그래.”

“흐음.”

태양의 미심쩍어 하는 뉘앙스에 도후의 눈썹이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대놓고 따지기도 뭐하고 그 화제는 다시금 거론하기 민망한 것이기에 도후는 입을 다물고 운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도후를 태양은 빤히 쳐다봤다. 어제는 누추한 모습을 하고 있더니만 지금은 꽤나 말쑥해졌다. 이제야 좀 모델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도후가 물었다. 

“아저씨 전처에게 마음이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 여자가 아버지한테 달라붙는 거죠. 돈 좀 뜯어내려고.”

“그저 돈 뿐인 거야?”

“당연하죠. 결혼도 날 낳은 것도 그 돈 때문인데.”

“무슨 말이야?”

이건 또 뭔가 싶어 도후는 신호가 걸린 틈을 타서 얼굴을 돌려 태양을 쳐다봤고, 태양은 그런 도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채 말했다.   

“할아버지가 돈이 많아서 그거 보고 결혼을 했는데 친척이 사기를 쳐서 다 날렸거든요. 그때 내가 4살인가 5살인가 그랬는데 그때부터 집안 분위기 안 좋았죠. 전에는 착한 척이라도 하더니만 그때부터 막 나가서 10년 동안 아버지 등골 빼먹다가 더 나올게 없으니까 다른 남자랑 가 버린 거예요. 나 낳았을 때에도 다른 애인이 있던 사람이니....내가 확실하게 우리 아버지 아들인지 어떤지도 몰라요.”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나 진짜 우리 아버지 아들 맞아요.”

“아. 그렇...”

“내가 직접 친자 감식 의뢰했으니까.”

“...................”

그건 또 뭐야.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태양은 도후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아래로 눈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아들도 아닌데 같이 살면서 뒷바라지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면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아...그래.”

도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적막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지금 이건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없는 부분이고 또 그래서도 안 되었다. 지금은 굉장히 신중해 져야 했다. 말 한마디에 어떤 상황이 생길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많이 망설이던 도후는 차의 속도를 늦추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태양아. 나는...”

“아예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그래도 좀 정신을 차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다.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더 엉망이 되어 있었던 거다. 제길. 그 여자.... 이를 갈며 태양은 중얼거렸다. 

“열 받아 죽겠네.”

“태양아. 일단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당신은 몰라요.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고요.”

그 순간 끽-소리를 내며 차가 멈췄다. 잘 달리고 있다가 갑자기 멈추는 것에 태양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앞으로 손을 뻗어 유리를 짚어서 부딪치는 일을 간신히 면했지만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있어서 정말 위험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당황한 태양은 얼굴을 돌려 도후를 쳐다봤다. 그 순간 태양의 뒷머리를 끌어당긴 도후가 바로 입술을 겹쳤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온다. 태양이 주춤한 사이에 한번 더 태양의 입안을 흩어낸 도후는 바로 혀를 떼고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태양의 뒷목을 강하게 잡으며 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 했지?”

“....................무슨 말을 했다고..”

갑자기 머리를 잡고 키스를 했을 뿐이잖아. 그것 가지고 지금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점점 이상하게 변하는 태양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후는 진지하기만 한 얼굴로 말했다. 

“진정하라고 했지?”

“..........................”

“진정하라고 했어. 안 했어?”

그리 묻는 도후의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똑바로 바라보니 괜히 주눅이 든 태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했어요.”

“그러면 진정해. 아무리 어머니가 미워도 그렇지. 낳아주신 분한테 그런 말 사용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도후의 말에 태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에 힘을 주고 아래로 시선을 피하려는 것에 도후는 태양의 목을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을 줘 자신을 보게 했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물었다. 

“알았냐고.”

“알았어요.”

“다음부터 그런 말 하지마. 그런 말하면 당장 마음은 풀어져도 앞으로 너 사는데 아무 도움 안 돼.”

단호한 어조다. 도후가 이런 식으로 말을 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양은 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옆으로 눈을 피해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는 것에 도후는 입을 열려다 뒤에서 빵-하는 소리가 들리자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금 운전대를 잡아 차를 몰던 그는 저 앞에 사거리에서 차가 잠시 멈추는 순간 옆 자리에 앉은 태양을 불렀다. 

“강태양.”

부르는 소리에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도후의 강한 모습에 알게 모르게 기가 눌려 있었던 태양은 옆으로 눈을 움직여 도후를 쳐다봤다. 그러자 도후가 다시금 ‘강태양.’하고 이름을 불렀다. 작게 혀를 찬 태양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밥 먹었어?”

“.....우유 한잔만 먹었어요.”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물음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아까는 무섭도록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만 지금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어느 쪽이 진짜인 거냐며 태양은 별 생각 없이 아무 거나 말했다. 

“김치찌개.”

“뭐야. 그게.”

도후는 피식-하고 웃었다. 굳은 표정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지금은 꽤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런 상태로 앞을 보고 운전을 하는 것에 태양은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이중인격인가...”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저은 태양은 얼굴을 푹 숙였다. 태양의 그 모습에 도후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벌리려다 그냥 다물었다. 

지금은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해도 태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두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에 도후는 운전하는 것에 집중을 하면서 괜찮은 맛집이 있나 확인했다. 

도후가 말없이 운전을 하는 와중에 태양은 아래만 쳐다보고 있던 눈을 들어 그의 옆얼굴을 힐긋 거렸다. 익히 알고 있는 도후의 얼굴이다. 하지만 전처럼 그저 잘 생겼다는 느낌만 들지는 않았다. 지금 도후는 완연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 투정을 부리는 이쪽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정말 어른인 상태였다. 때문에 불편했다. 불편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던 태양은 흔치 않게 풀이 죽은 상태가 되어서 조금 더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오전 7시인데도 문을 연 음식집을 발견했다. 주차를 한 도후는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태양이 앉아있던 쪽으로 돌아가서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나와. 혼자서 못 걸을 것 같아?”

“...배 안 고파요.”

“그래도 좀 먹어.”

도후는 태양의 손을 잡았지만 태양은 싫다는 듯 팔에 힘을 줘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안 먹고 싶어요. 괜히 먹었다가 배탈 나면 어떻게 해요. 어제도 몇 번 더 화장실 갔단 말이에요.”

“배 아프면 내가 화장실까지 안아서 데려다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려. 어서.”

지금의 도후는 평소와 달리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버티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태양은 살짝 찌푸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태양의 팔을 잡은 도후는 차 문을 닦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와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도후는 가장 구석진 곳으로 가서 태양이 앉을 곳에 먼저 방석을 깔았다. 그런 도후의 옆에 가만히 서있던 태양은 도후가 눈으로 앉아보라는 표시를 보내자 어기적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다른 쪽을 쳐다보는 태양이지만 도후는 상관하지 않고 벽에 걸린 메뉴를 확인하며 물었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

“그러면 육개장 하나에 김치찌개 정식 하나 시킨다?”

“마음대로 해요.”

“모처럼 내가 밖에서 음식 사는 건데 태도가 왜 그래. 얼굴 좀 풀어. 여기요.”

“뭐 시키실래요?”

“육개장에. 김치찌개 정식 하나요.”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도후는 태양 앞에 젓가락과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석 더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아프면 말해.”

도후의 말에 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아래로 내리는 태양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평소에는 입가에 웃음을 단 채 반짝이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늘 어떤 장난을 칠까. 어떤 말을 해서 이쪽을 골탕 먹이기나 당황스럽게 할까-하고 꿍꿍이를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기가 꺾여서 풀이 죽어있는 이런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도후는 젖은 수건을 태양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받으려 하지 않던 태양은 계속해서 내미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미적거리면서 손을 닦는 태양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굳은 상태로 쉽게 풀어지지 않고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는다. 태양이 저렇게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도후는 일부러 더 말을 많이 하려 노력했다.  

“나 어제 엄마랑 술 마셨어.”

“...............아줌마랑요?”

“응. 우리 엄마 겉으로는 강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약하거든. 나 하나 키운다고 접근하는 남자들 다 차단하고 나이 다 먹어서 이제야 남편 하나 생겨서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리나 했더니 이런 의외인 상황이 발생했잖아.”

도후는 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으며 태양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너만 답답한 게 아니라 다 그래. 우리 엄마도 그렇고 아저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 지금 상황이 어이없고 싫어. 그런데 너만 그런 것처럼 얼굴 그렇게 칙칙하게 하고 있으면 되겠어?” 

그 때 여자가 반찬을 가지고 왔다. 먼저 김치와 나물 등을 올리는 것에 잠시 대화가 중단된다. 중년 여자가 빈 판을 들고 자리에서 떠나자 도후는 다시금 말했다. 

“네가 제일 어리잖아. 그런데 제일 나이 많은 척 하면서 분위기 잡지 말고 막내처럼 굴어봐. 애교도 떨고 농담 좀 해보고 그래. 전에는 잘 만 하더만....”

도후 딴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차에서 강압적으로 말을 한 것이나 억지로 데리고 와서 자리에 앉힌 것에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도후가 그것에 대해서 말하진 않았지만 그냥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 차갑지만 사실 속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다. 정말 든든한 형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에게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거겠지. 태양은 이것저것 챙겨주는 도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줌마 같은 사람이 엄마라면 나도 당신처럼 자랄 수 있었을까-하고 생각했어요.”

“응?”

“아침에 밥 차려주고 학교 다녀오면 잘 다녀왔냐고 안아주는 사람이 엄마였다면,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요. 밥은 커녕 얼굴 보면 화내고, 소리를 치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물건 던지고, 때리고. 욕하고. 그러다가 다른 남자랑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나 보이던 사람이 우리 엄마였어요. 그런 사람한테 내가 뭘 보고 배웠겠어요.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지. 아버지 없었으면 지금쯤 교도소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내가 잘 해야 하는데...”

점점 말을 하는 것이 도후에게 들려주기 위함인지 그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물수건을 쳐다보며 태양은 입술을 달싹였다.  

“정신 차려야 하는 건데..”

점점 자신감이 없어진다. 남의 탓을 하면서 버리듯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었기에 앞으로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앞으로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 때 위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와 물수건을 접어대기만 하는 태양의 손을 잡았다. 태양은 눈을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도후를 쳐다봤다. 도후는 굳은 눈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즉효약이었다. 더 이상 어두운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밥 먹자.”

도후는 태양의 손에 수저를 들려주고 어느새 온 건지 알 수 없는 육개장에 밥을 말았다. 그때까지도 손에 수저를 쥔 채로 가만히 있기만 하는 태양의 모습에 도후는 육개장을 크게 한입 떠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맛있겠다. 먹어. 어서.”

“....잘 먹을게요.”

중얼거린 태양은 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김치찌개도 훅훅 불어서 입에 넣었다. 매콤하고 시원했다. 맛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입맛에 맞는 것 같다. 태양이 젓가락까지 들고 본격적으로 밥을 먹기 시작하자 도후는 어묵 볶음을 들어 태양의 밥 위에 올려줬다. 

“어떻게든 될 거야. 나쁜 일 하는 사람은 원래 잘 안 되게 되어있어.”

그런데 그 여자는 왜 아직까지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에는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다들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인식들도 많이 사라졌다. 악한 놈들이 결국에는 살아남고 승리한다는 생각이 만연한 세상인데 말이다. 태양이 먹다 말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나 국물을 떠먹던 도후가 얼굴을 들었다. 

“왜?”

“나 육개장 먹을래요.”

“...........왜?”

“그것도 맛있을 것 같아요.”

태양의 말에 도후는 자신이 먹던 것을 내려다봤다. 벌써 밥을 말았는데. 그리고 꽤 맛있었는데. 속을 풀만한 걸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던 도후는 결국 앞에 있던 뚝배기를 들어 태양의 앞에 두고 태양이 먹던 밥공기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김치찌개를 크게 퍼서 그릇에 넣은 후에 싹싹 비벼서 입에 넣었다. 엄청나게 잘 먹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도 수저를 들고 육개장을 한입 먹었다. 아. 이것도 맛있다. 고개를 끄덕인 태양은 얼굴을 숙이고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차가 멈추고 바로 옆에 학교 교문이 보인다. 이제 내려가야 하는데 묘하게 움직이기 싫다. 멍하니 교문을 쳐다보던 태양은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며 도후를 쳐다봤다. 

“다녀올게요.”

“무슨 일 생기면 혼자 움직이지 말고 같이 움직여. 절대로 혼자서 행동하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어요.”

대답에 도후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고 태양은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문을 닫자마자 창문이 내려가고 그 쪽으로 도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럼 학교 잘 다녀와.”

“그쪽은 오늘 일 하는 날이에요?”

“아니. 오늘은 쉬는 날이야. 엄마 옆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말야.”

“옆에서 잘 보살펴 드려요.”

“알아서 잘 할게. 그럼 다음에 보자.”

손을 흔든 도후는 창을 올리고 운전석에 가 앉았다. 차가 천천히 후진을 하고 도로 쪽으로 진입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도후의 차를 확인한 태양은 눈을 깜박이다 긴 한숨을 쉬었다. 

오늘의 도후는 꽤나 어른스러웠다. 전처럼 바보 같은 모습도 좋지만 저렇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이쪽을 이끌어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이쪽보다 3살이 많기는 많았던 모양이라며 태양은 몸을 돌렸다. 몇 걸음을 옮기자 뺨으로 차가운 바람이 닿는다. 이제 5월이라 슬슬 더워져야 하는 게 정상인데 왜 아직도 바람은 이렇게나 차가운지 모르겠다. 지금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걸까. 두어번 눈을 깜박인 태양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움츠린 상태로 걸음을 서둘렀다. 

강의실에 들어왔을 때 다들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얼마 전 일학년들과 몇 번 주먹을 오고 간 덕분에 과거 자신이 어땠다는 정보가 확 퍼진 모양이다. 일부러 숨기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사람을 따돌리는 듯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나 싶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직접적으로 동기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원래 남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고 일부터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과 일 때문에 바빠서 자주 강의에 빠지는 진성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진성이 옆에 있으면 그래도 덜 심심했을 텐데 말이다. 

목 뒤를 잡은 태양은 책을 꺼내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중간 정도 읽어내려갈 무렵 머리 위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보는데요?”

눈을 들자 여자 동기가 서있었다. 동기는 눈이 마주치자 바로 태양의 책상 앞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손을 댄 채로 본격적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빠 싸움 잘한다면서요?”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오빠가 고등학교 때 짱이었다는 걸로 소문 많이 났어요. 주먹으로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라면서요? 그 지역 고등학교는 다 장악했다면서요? 전 그런 사람 소설 속에서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오빠가 그랬어요?”

별세계의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것에 악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고 궁금해서 묻는 말이라는 것을 느낀 태양은 앞에 놓인 책을 넘기며 대꾸했다. 

“내가 뭘 그랬다고.”

“빼지 말고 말 좀 해줘요. 싸움 잘 해요?”

싸움을 잘 하느냐고? 그런 것도 다 상대적인 거다. 이쪽이 암만 주먹을 휘두르면서 ‘난 싸움을 잘해.’라고 해봤자 주변에서 ‘넌 아니야.’라고 말을 하면 다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먹을 휘두르는 일에 있어 엉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한창 날아다닐 때에는 다들 아무 말 하지 않고 눈과 입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곤 했다. 그렇다는 것은 싸움을 잘 한다는 건가. 태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싸움 잘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뭐에요. 확실한 대답을 해주세요.”

책상에 양 손바닥을 내린 동기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태양에게 어떤 대답을 듣게 될 지 정말 기대가 된 다는 듯 쳐다보는데 다른 말을 하면 계속 저런 상태일 것 같다. 그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보내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태양은 귀찮은 듯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나 싸움 잘해.”

“역시나...! 멋져요!”

대번에 환호가 오른다. 여자의 뒤로 몇몇 여자 동기들이 달려들자 태양은 뒤로 살짝 몸을 물렸다. 피하는 태양의 태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몇몇 여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말을 해댔다. 

“오빠. 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오빠한테 일러도 되요?”

“전부터 우리 집 앞에 이상한 남자가 왔다 갔다 하는데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저 혼자서 반지하에서 살고 있어서 정말 불안하거든요. 부탁드릴게요.”

“전 전부터 사귀던 남자랑 헤어지고 싶은데 요새 하도 말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오빠가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오빠 부탁드릴게요. 네?”

........이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옛날에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서 여자들 사이에서 외면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먼저 말을 걸어오는 건가. 태양은 시끄럽게 구는 여학생들을 빤히 쳐다봤다. 어떻게 할까 싶어 눈을 굴리던 태양은 가운데에 있던 안경을 끼고 마른 몸의 동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정말로 집 근처에 이상한 남자가 있어?”

“네. 며칠 전부터 자꾸만 우리 집 근처에 서있어요. 전에 배달을 했을 때에도 슈퍼에서 일하는 이상한 녀석이 괜히 집적거리고... 그래서 거리가 좀 떨어져도 이모네 집에서 하숙을 할까-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은 여자 혼자 살기 너무 무서워요.”

“그 남자가 너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을 했어?”

“쳐다보는 시선이라는 게 있잖아요. 정말 무서워요.”

뺨을 손으로 감싼 동기는 안색을 굳히며 얼굴을 내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여학생들이 동기의 편을 들어주고 나선다. 

“맞아요. 전에 애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검은 잠바 입은 남자가 서있었다니까요.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데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 날 애 데리고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재웠다니까요.”

“요새 반지하에서 생기는 사고가 많으니까 정말 무서워.”

“그래. 넌 정말 조심해야 겠다.”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하나씩 말을 하면서 걱정을 해준다. 그것에 안경을 낀 동기는 침울한 얼굴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괜히 그런 말을 꺼내는 건가 싶었는데 저렇게 침울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동안 정말 시달렸던 모양이다.  

“오늘도 있었어?”

“며칠 안 보이긴 했지만 또 언제 나타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문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 늘 긴장하고 있어요.”

“그래?”

물음에 동기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티비를 보면 혼자 사는 여자를 노리는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이 동기의 집 근처에 있다는 그 남자가 그런 목적으로 근처를 배회하는지 어떤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은 가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면 오늘은 같이 너희 집에 가자.”

“......정말이요?”

“왜. 안 돼?”

“아..아니요. 괜찮아요. 같이 가요.”

급히 고개를 끄덕인 여자는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태양이 이쪽을 도와주는 건가 싶어 긴가 민가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다른 여학생들이 어깨를 잡아 흔들며 기뻐했다. 

“잘 됐다. 이제 괜찮을 것 같아.”

“그래. 남자가 한번 나서야지 그런 것들이 안 달라붙는다니까.”

“응. 이제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아.”

정말 안심이 되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긴 한숨을 쉬는 것에 태양은 덮고 있던 책을 펼치며 말했다. 

“그러면 오늘 강의 다 끝나고 같이 집에 가자. 달리 할 일은 없지?”

“네. 없어요. 고마워요. 오빠.”

“아니. 괜찮아.”

대답을 한 태양은 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금 책을 보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것에 주변에 몰려들어 있던 여학생들은 뒤로 조심스레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잘 됐다. 안심이야.’라고 말하는 것에 태양은 책을 손으로 눌렀다. 

원래 여기저기에 껴드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일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문제였다. 동기의 일인데다가 수상한 녀석이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있어 큰 스트레스고 위협이 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녀석인지 몰라도 확실하게 쫓아내 버리면 동기도 이쪽도 안심이 될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태양은 책에 있던 내용을 머리 속에 구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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