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2)

차가 학교 앞에 멈췄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태양은 안전벨트를 풀려고 손을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도후가 손을 들어 어깨를 잡았다. 

“정말 몸 괜찮겠어?”

“괜찮아요.”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 실은 도후는 차를 운전하는 내내 뭐 마려운 것 마냥 이쪽을 흘겨보고는 했다. 이쪽에서 괜찮다고 하는데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굳은 얼굴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것에 태양은 어깨에 올려진 도후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몸 안 좋아지면 택시 타고 갈 테니까요.”

“그냥 내가 여기서 기다릴게.”

“그러다가 들킨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요.”

계속 자리에 앉아 있으면 떠나려 하지 않을 거다. 도후가 이곳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일 하나 없음을 알고 있는 태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자 바로 창문이 열리고 이쪽으로 몸을 바짝 붙인 도후가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있다가 집에서 보자.”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는 태양이지만 그런 태양을 보는 도후의 표정은 여전히 시원하지 못했다. 신경이 쓰이는지 흘깃 거리며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태양은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것에 계속 이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 없었던 도후는 유리를 내리고 시동을 걸었다. 검은 차가 학교 정문 앞에서 사라지자 태양은 위로 든 손을 내렸다. 

오늘이 벌써 수요일이다. 원래라면 화요일 정도에 학교에 올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허리가 온전치 못해서 오늘 이렇게 학교에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학교에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도후가 그걸 했다고 이틀 동안 집 안에서 완전히 퍼져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쉬었는데도 아직도 허리가 아팠다. 이렇게 몸이 안 좋아서야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며 파란 하늘을 쳐다보던 태양은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몸을 돌려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몰라도 느낌이 사뭇 이상하다. 태양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부친의 번호를 눌러봤다. 귀에 대고 상대방이 받기를 기다렸지만 암만 기다려 봐도 들리는 것은 신호음뿐이다.

“벌써 떠났나.”

호영과 호수가 떠나는 것은 화요일이었다. 수요일인 지금까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전화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은가. 핸드폰이 안 된다고 하면 집 전화도 있는데..... 

급했던 모양이라며 어깨를 으쓱인 태양은 걸음을 서둘렀다. 본관 가까이로 왔을 즈음 저 위에 서있는 진성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오던 진성은 태양을 발견하자 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태양아.”

“안녕.”

“태양아. 너 일요일에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아. 있었어.”

“무슨 일?”

“별 거 아니야. 일학년들이 야구 방망이 들고 와서 머리를 치려 한 것뿐이야.”

그러다가 안 되니까 떼로 몰려들어서 덤비려고 했지만 이쪽이 방어를 잘 해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정말 별거 아니었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옆으로 고개를 숙이는 태양이지만 그런 태양의 태도에 진성은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렸다. 

“정말이었던 건가... 맙소사.”

진성이 중얼거리는 말에서 이상한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태양은 ‘왜? 무슨 일인데?’라고 물었고 그것에 진성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실은 일요일에 이 학교로 졸업생 몇몇이 온 모양이야. 그러다가 일학년들이 태양이 널 공격하는 것을 창가에 서있던 선배가 본 거야. 월요일 아침에 학교로 찾아와서 그 일학년들 전부 색출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

이쪽에서 그냥 입 다물고 있으려 했는데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있단 말이지. 일학년들이 불쌍하게 되었다는 간단한 생각만을 하고 있으려니 진성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일이 아니라니까. 너 그동안 왜 전화 안 받았어?”

“꺼놓고 있었어.”

몸도 안 좋고 옆에 도후도 있으니까 다른 걸로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 안 나오면 진성이 연락을 할 거란 걸 알기에 일부러 전원을 끄고 있었던 거다. 태양의 자연스러운 대꾸에 진성은 할 말을 잃는다. 뭐라 말을 할 거리가 없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푹 내쉬던 진성은 일단 태양의 팔을 잡았다. 

“일단 교수님 방으로 올라가자. 일학년들 데리고 올 테니까 대화나 한 번 나눠봐.”

“대화를 나눠 보라니?”

“일학년이 떼로 달려들어서 선배 하나 구타하려 했는데 그게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어림도 없지. 교수님들하고 선배가 일학년 녀석들 제적한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

제적이라. 꽤 강수를 뒀다. 하긴 생긴 지 몇 년 안 되는 학교이니 그런 쪽을 확실하게 해둬야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일러주고 있는데도 태연하기만 한 태양의 반응이 답답했던 진성은 태양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어서 가자고 말했다. 

교수는 태양을 보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서 하던 일을 마저 하던 교수는 진성이 일을 저지른 일학년들을 데리고 오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교수는 맞은편 소파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도 모자라 소파 옆에 붙여놓은 의자에 앉아있는 녀석들을 쳐다봤다. 전부 넷이고 다들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교수와는 어떻게든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지만 태양은 그렇게 할 수 없는지 움찔한 기색으로 얼굴을 내렸다. 있는 힘껏 후려쳤으니 맞을 때 굉장히 아팠을 거다. 그러니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거다. 느긋하게 있으려니 교수가 태양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학생들이 맞나?”

“맞습니다.”

바로 돌아오는 긍정의 대답에 교수는 인상을 쓰고 일학년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일학년들이 더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차던 것도 잠시 교수는 다시금 태양을 쳐다보며 물었다. 

“태양군. 달리 다친 곳은 없나?”

“없습니다.”

“이렇게나 많이 달려들었는데 정말 괜찮나?”

“괜찮습니다. 원래 주먹질은 잘 합니다.”

“........그래?”

태양이 주먹질을 잘 한다고 하나 겉으로 보기에 태양은 어디까지나 범생 타입이었다. 때문에 미덥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교수지만 태양은 상관하지 않고 눈을 깜박였다. 

원래 특기는 싸움질이다. 공부 같은 거야 정말 적성이 안 맞지만 몸으로 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자신이 있었다. 차라리 머리를 쓰는 일로 덤볐다면 이쪽을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덤비다가 역으로 두들겨 맞은 것도 억울할 텐데 하필이면 그 모습을 졸업한 선배가 볼 것이 무엇인가. 선배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눈이 좋은 모양이다. 저 녀석들을 전부 찾아내다니 말이다. 하긴 얼굴에 저런 성대한 멍이 들어 있는데 못 찾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주 잡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려니 이마에 손을 댄 교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우리 학교가 문을 열고 후배가 선배를 구타하려 흉기를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무서운 일이 다른 과도 아니고 우리 과에서 벌어지다니.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학과장님께 말을 한단 말이야.”

중얼거림이 나중에는 개인적인 한탄이 된다. 마치 이쪽 들으라는 듯 말하는 것에도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평온한 얼굴을 지속하는 태양의 모습에 교수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전부다 자퇴를 시키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자네들이 너무 불쌍하지. 그래도 졸업장을 잡고 있어야 앞으로 취업이라도 할 테니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태양군....”

“어차피 이쪽한테 많이 맞았으니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일부러 빙빙 말을 돌리게 하는 것도 귀찮다. 교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태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그것에 교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저도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요 다친 걸로 치면 저쪽이 더 하잖습니까. 그걸로 대충 비긴 일로 치죠 뭐.”

“음음. 역시 선배라서 일학년 보다 훨씬 낫군.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네. 이런 일은 크게 해봤자 서로에게 안 좋을 뿐이야.”

고개를 크게 끄덕이던 교수는 이번에는 일학년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지난 이틀 동안 충분히 제지를 받았으니 뉘우치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선배를 하늘처럼 생각하고 모셔야 할 거야. 이번 일이 다른 과에서 벌어졌으면 너희들은 바로 학교에서 쫓겨났어.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일학년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쪽이 없는 동안 많이 깨진 모양이다. 저렇게 얻어맞았는데도 주눅이 들어있다니. 그래도 악에 받친 녀석들이라면 당장 맞은 곳의 견적을 떼서 난리를 칠 텐데 이놈들은 그런 걸로 보면 그나마 순한 것 같다. 조금은 귀엽게 보인다면서 가만히 있으려니 교수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속에 담긴 것을 풀게나. 난 나가서 마실 것을 가지고 오겠네.”

자리에서 일어나던 교수는 갑자기 태양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맙네.’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학과장이나 다른 교수들에게 엄청나게 깨진 모양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하니 저렇게나 고마워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후배가 선배를 구타하려 했다는 일로 소송을 걸거나 지역사회 신문에 나기라도 하면 교수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졌을 거다. 학교 측도 신생인데 괜한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원래 이번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저 후배들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이번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교수가 밖으로 나가자 방 안의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후배들은 불편한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내렸다. 이쪽을 쳐다도 못 보고 있다. 전에 맞았을 때 정말 아팠던 모양이다. 

“아프냐?”

“네...네..?”

“맞은데 아프냐고?”

“아뇨? 네. 아니. 그게..저....”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는 모양이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더 잘 말을 할까 싶어 쳐다봤지만 어김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들 이쪽과는 그다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쪽도 말하기 싫어하는 녀석을 데리고 입 아프기 싫다. 태양은 손가락의 끝을 누르며 말했다. 

“그때 핸드폰을 들고 있었거든.”

“네?”

“핸드폰을 들고 있어서 힘을 세게 줄 수가 있었어. 손에 아무 것도 없었으면 턱은 날려버릴 수 있었는데 말야.”

맨손이었다면 한방으로 끝낼 수도 있었는데. 태양은 얼굴을 들고 망연한 표정을 지은 채 이쪽을 쳐다보는 일학년들은 똑바로 바라봤다. 

“죽을 정도로 맞아서 서너달 병원에 입원하고 싶으면 말해. 군대 안 가고 싶은데 핑계거리 없으면 그때도 말해. 뼈 하나 확실하게 부러뜨려줄 수 있으니까.”

순수한 호의로 이런 말을 했다고 여겨지기는 힘들 것이다. 어느 정도 겁을 주기 위함도 있었고 다음에 걸리면 알아서 하라는 경고의 의미도 있었다. 어느 정도 먹혔는지 사색이 되어서는 이쪽을 쳐다도 못 보는 일학년들을 흩어보던 태양은 무릎에 손을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던 순간 태양은 ‘아.’하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아. 나는 뼈 한 대 부러뜨리면 적어도 반년은 입원시키는데. 그건 염두 해 둬라.”

누군가 딸꾹질을 한다. 그 소리를 들으며 태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마침 음료수 병이 든 봉지를 들고 오는 교수와 마주쳤다. 

“태양군. 그냥 가는 건가?”

“이틀 빠졌는데 더 수업을 빼먹을 수는 없어서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학생이 수업을 열심히 들어야지. 태양군은 수업 태도가 정말 좋아서 늘 믿음직스럽다니까. 그래 이만 가서 수업을 듣게나. 그리고 이번 중간고사 때에는 내가 신경 많이 써주겠네.”

이 말은 이번 시험 때 A+을 주겠다는 의미다. 내내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양이지만 이때만큼은 급격히 얼굴색이 좋아졌다. 입술을 한껏 올리며 환한 웃음을 지은 태양은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양이 웃는 얼굴을 보여주니 더 안심이 된 건지 교수도 따라 웃으며 들고 온 음료를 태양의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다고. 두 번 다시 이런 일 안 생기게 할 테니 그냥 참고 넘어가 주라고 하는 것에 태양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으로서는 소송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교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요즘 세상이 하도 흉흉하고 인터넷이 판을 치니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던 차에 태양이 이렇게 말을 해주니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나 보다. 감동한 표정을 짓는 교수를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태양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저 교수의 시험은 앞으로 걱정할 필요도 없겠다. 만족에 찬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려니 저 아래에서 올라오던 진성이 태양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태양아. 어떻게 됐어?”

“잘 해결됐어.”

태양은 진성의 앞에 가서 섰다. 그것에 진성은 딴에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학년들 그냥 둘 거야?”

“그냥 둬야지 어떻게 해. 얼굴 못 봤어? 그런 꼴이 됐는데 더 무슨 짓을 하면 애들 불쌍하잖아.”

그리 말하며 태양은 병의 뚜껑을 따서 음료를 마셨다. 시원했다. 만족한 얼굴로 음료수를 내려다보는 태양의 얼굴에 진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렇게 보여?”

“응. 너답지 않게 웃는 얼굴이다.”

“다 그럴 이유가 있어.”

머리 깨지게 공부를 해도 성적은 늘 바닥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도후가 일부러 붉은 줄을 쳐준 책도 있고 교수도 성적을 잘 해 주겠다 했으니 말이다. 이번 일로 졸업 때까지 저 교수의 성적은 잘 나왔으면 좋겠다. 달리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좋은 기회가 오면 그걸 잡는 것이 이득이다. 

태양의 옆을 따라 걸어오던 진성은 눈을 움직여 태양을 위, 아래로 흩어봤다.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일학년들이 저 상태고 태양은 연락도 안 받아서 정말 무슨 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말이다. 그제야 가슴을 무겁게 누르던 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진성은 긴 한숨을 쉬었다. 

“웬 한숨이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얼버무린다. 그런 진성을 쳐다보던 태양은 내심 궁금했던 것에 대해서 물었다. 

“그런데 일요일에는 왜 갑자기 가 버린 거야?”

잘 걸어오던 진성이 멈춰버렸다. 걷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는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묻지 말아줘?”

“.......아니....그게....”

목이 타는지 진성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로 입술을 깨물다가 괜히 다른 쪽을 쳐다보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셔츠를 잡았다 놓았다. 몇 번이나 정신없이 눈을 굴리던 진성은 태양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말야. 지금 그 모델하고 친해졌지?”

“모델이라니. 누구?”

“앞으로 네 형이 될 사람 말야.”

친해지다 못해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다가 도후가 갑자기 달라붙어서 식탁 위로 쓰러져서 펄펄 끓는 된장찌개에 화상 입을 뻔 했다는 말을 해버릴까 싶다. 하지만 그런 말은 가족에게라도 자랑스럽게 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에 태양은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무난한 대답을 했다. 

“형이랑은 지금 사이가 좋아.”

“얼마나 좋아?”

“아무 많이.”

“.......너 그 도후라는 모델을 좋아해?”

“좋아하느냐고?”

“응.”

“형이라는 의미로. 아니면 다른 의미로?”

“그러니까 그게....”

“이성적인 의미로 좋아함이라면 그래. 맞아. 그 사람 좋아해.”

“...............태양아....”

우주가 무너져 내린 모양이다. 진성은 가장 소중한 것이 사라진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비어버린 듯 쾡한 얼굴이 되어서는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는 진성의 얼굴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진성의 어깨를 토닥인 태양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휑-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리고 그냥 가 버리는 태양의 모습에 진성은 울먹거리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태..태양아. 나도 널...’라는 처량 맞은 소리가 칙칙한 복도에 작게 울렸다. 

신을 직직 끌면서 태양은 마지막 남은 음료를 다 마셨다. 시원하고 달아서 좋았지만 묘하게 배가 아프다. 괜히 음료수를 먹었나 싶지만 조금 참으면 알아서 소화가 되겠지. 태양은 음료병을 쓰레기통에 넣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대화 소리가 들렸던 강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쪽을 쳐다보는 동기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태양은 상관하지 않고 늘 앉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천천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몸을 움직인다. 괜찮은 것 같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몸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양이로구나. 앞으로 종종 더 하게 되면 회복의 속도가 더 빨라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태양은 가방을 책상에 올리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바로 자는 시늉을 내는 태양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여학생들이 얼굴을 가까이하며 소근 거렸다. 

“태양이 오빠가 고등학교 때 일진이었다는 거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내가 전에 다니던 학교가 공학이었는데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데. 저 오빠가 있는 그 곳에 진짜 유명해서 그쪽에 찍히면 지방으로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을 정도야.”

“그렇게 안 생겼는데...”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거라니까. 알고 봤더니 우리 오빠가 저 태양오빠랑 같은 고등학교 졸업생이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데. 중학교 때부터 벌써 오토바이 타고, 고등학교 올라가자마자 집단으로 몰려다녀서 싸움박질만 했데. 태양 오빠 뒤에 버티고 있는 사람이 그 학교 짱이었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머리가 이상해서 그 짱한테 걸리면 다 병원에서 일 년이고 이년으로 들어가 있었다잖아.”

“.....태양 오빠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어?”

“주먹질은 기본에 연장은 우습지도 않았데. 그냥 때리면 뼈 안 나간다고 길 가던 아저씨한테 쇠라이터 빌려서 그거 주먹 속에 넣고 싸웠다는 거 아냐.”

“나는 면도칼도 씹고 다녔다고 들었는데..”

“면도칼은 10년 전에나 나왔던 말이지.”

“아니야. 나도 그렇게 들었어.”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중얼거리던 여학생은 태양의 어깨가 위로 올라가자 움찔하고 몸을 떨며 급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근처에 있던 여학생들도 다른 쪽으로 가 버리고 강의실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전과 다르게 무거운 공기가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양은 자는 척 하면서 그 소리들을 다 듣고 있었다. 전에는 아무 말도 안 돌아다녔는데 한번 일이 터지니까 여기저기서 말들이 돌아다닌다. 애초에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고 지금 나오는 말들이 거짓도 아니니 크게 신경은 안 쓰인다. 그저 앞으로 조금은 귀찮아 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주차를 마친 도후는 차에서 나왔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잠바의 깃을 세워서 종종 걸음으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뭔가가 날아와 머리를 강타했다. 퍽-소리가 날 만큼 세게 날아온 것에 절로 소리가 나온다. 욱-하고 입술을 깨문 도후는 이게 도대체 뭔가 싶어 인상을 쓴 얼굴로 뒤를 쳐다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동석이다. 그것도 목에는 보자기를 묶어서 뒤로 팔락거리게 하고 머리로는 양철냄비를 쓰고 한 손에는 문방구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장난감 검을 든 모습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왜 저러나 싶어 도후는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채로 동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 그 모습이 뭐냐? 너 밤무대에 진출한 거냐?”

“결투를 하자!”

“뭐라는 거야. 애가 갈수록 띨띨해지네.”

처음 봤을 때의 그 또렷하고 영리해 보이던 모습은 전부 어디로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난데없이 나타나 결투를 하자니 진심으로 그리 말을 하는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저런 상태인 녀석하고 무슨 말을 해봤자 이쪽 입만 아플 거라는 생각이 든 도후는 그냥 무시를 하자 싶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동석은 도후를 그냥 보낼 줄 수가 없었다. 냅다 달려가서 장난감 검으로 도후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퍽!!

“우악!!”

정말 아팠다.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손으로 잡은 도후는 이를 악물고 뒤를 쳐다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멀찍이 떨어진 동석이다. 검을 양손으로 들고 이쪽을 노려보는 동석을 확인함과 동시에서 배에서 뜨거운 뭔가가 화르륵 올라왔다. 

“너 맞고 싶냐! 이 자식이! 어리다고 봐줬더니!”

“봐 주지마! 이 괴물자식! 당장 태양씨한테 떨어지라고 했잖아!!”

“내가 태양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울컥한 도후는 동석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것을 쉽게 피한 동석은 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놀이터로 달려가는 와중에도 동석은 도후의 속을 긁어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잡아봐! 이 느려터진 놈아!!”

“이 자식아!!!”

잡아서 이번에야 말로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두들겨 줄 거다. 이 건방진 녀석 두고 보라면서 이를 간 도후는 냅다 동석의 뒤를 쫓았다. 

동석은 의외로 발이 빨랐다. 놀이터로 들어온 것은 좋았지만 동석이 너무 재빨라서 붙잡을 수가 없다. 전생에 다람쥐였던 건지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서는 훌쩍훌쩍 아래로 잘 뛰어다닌다. 동석을 쫓아서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도후는 무릎에 퍼지는 통증에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지만 저 위에 서서는 검을 흔드는 동석의 얄미운 얼굴을 보고는 이를 갈며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아봐! 이 느려터진 녀석아!”

“이 자식! 넌 어른을 공경할 줄도 모르는 거냐?!”

“어른도 어른 나름이지. 넌 어른이 아니야! 이 바퀴벌레!”

“이렇게 생긴 바퀴벌레가 어디에 있느냐고!!”

도후는 제자리 뛰기를 해서 동석을 잡으려 했다. 간발의 차이로 도후의 손에서 벗어난 동석은 길게 혀를 내밀며 정글짐으로 달려갔다. 그런 동석을 쫓아서 도후는 정글짐 위로 올라갔다. 이런 것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운동신경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글짐에 들어가서는 쉽게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면서 위로 올라갔지만 동석은 벌써 반대편으로 통과해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당당한 포즈를 잡고 있었다. 이쪽에서 그쪽을 바로 붙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동석의 표정은 시건방지기만 했다. 냅다 내려가서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도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다. 할 일이 없어 저런 어린애랑 놀고 있는 입장이 한심하기만 하다. 나오는 것은 한숨과 헐떡이는 거친 호흡뿐이다. 손으로 턱으로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자 동석은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벌써 항복이냐?”

“항복 좋아하시네."

“역시 바퀴벌레. 끈질기기는.”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 시건방진 녀석아.”

이를 악물고 씹어 삼키듯 말하는 것에도 동석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턱을 위로 올리고 오만한 표정을 지은 동석은 선심 쓰듯 말했다. 

“내가 이번만 친절하게 말로 해주는 거다. 당장 태양씨에게서 떨어져.”

“너나 떨어져. 이 녀석아. 진짜 붙잡으면 눈물 쏙 나도록 두들겨 패줄까보다.”

“잡지도 못하면서. 엉덩이만 커다래서는. 이 둔한 놈. 너 같은 놈은 태양씨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얼굴도 못 생긴 게.”

“누가 못 생겼다는 거야!”

울컥해서 소리를 치자 동석의 입술이 비틀어 올라갔다. 그 얼굴을 확인한 도후는 아차 싶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상대는 이쪽보다 스무살도 어린 녀석인데 그런 놈의 도발이 넘어가 뭘 이렇게 흥분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새삼 자신의 행동이나 모습들이 우습고 부끄럽게 여겨진 도후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아래로 내렸다. 

이렇게 가다가는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거다. 쉽게 흥분하고 달려드니까 저 어린 녀석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고 더 날뛰는 거나. 도후는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동석이 크게 소리 내 울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 그 방법이다. 

도후는 팔짱을 끼고 눈을 아래로 내렸다. 정글짐의 맨 꼭대기에 올라타서는 그런 폼을 잡아봤자 하나도 안 멋있었지만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가 의외였던지 동석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런 동석을 착 가라앉은 눈으로 쳐다보며 도후는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알게 뭐야. 이 바퀴벌레야.”

“바퀴벌레든 뭐든 그래도 난 태양 옆에 있으면 잘 맞거든? 하지만 네가 태양 옆에 있으면 어떨 것 같냐?”

물음에 동석의 몸이 움찔하고 떨린다. 의외의 공격을 당한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아무 말도 못하는 동석을 내려다보며 도후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네가 암만 노력해도 네가 태양의 옆에 있으면 그건 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쿠궁!!

어디선가 요란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실제로 얼굴에 세로로 된 줄이 처진 동석은 심하게 움찔했다. 이거다 싶었던 도후는 동석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동생이 뭐야! 아들로 보이겠다!!”

“으읏!!!”

도후의 외침과 동시에 동석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으며 사색이 되었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달 떠는 동석을 깔보며 도후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암만 길고 날뛰어도 넌 꼬맹이고 난 어른이야. 그 차이를 좁힐 수 없다면 입 다물고 꺼져라. 어린이집.”

냉랭한 말을 한 도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글짐에서 내려왔다. 

아, 오랜만에 하려니까 정말 힘들다.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 하면서 위에서 내려온 도후는 여전히 굳어서 움직일 줄을 모르는 동석을 흘겨보고는 놀이터에서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도후지만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아. 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 할 일도 없지. 저런 어린이집 녀석을 두고 뭘 이렇게 진지한 반응을 취하는 건지. 오전이라 사람이 없는 게 천만 다행이다. 지금 이런 모습을 다른 누군가 봤다면 얼굴을 들 수도 없었을 거.....

“안녕.”

“헉!”

난데없는 인사에 도후는 사색이 되어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아파트 건물 옆에 서있는 태유다. 꽃단장을 하고 선글라스까지 확실하게 쓴 태유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런 태유의 모습도 도후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도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태유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보다 봤어?!”

“봤어. 너 유치하더라.”

“.....................”

봤다니. 태유가 눈앞에 나타난 것보다 그가 동석과 있었던 그 일을 봤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굳어서는 멍하니 있으려니 계단 아래로 내려온 태유가 도후의 앞에 서서 그의 모습을 위, 아래로 살펴봤다. 한참동안 도후를 쳐다보던 태유는 아래로 눈을 내렸다. 도후는 지금 호수의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저 영국의 유명한 축구스타 베컴도 신었다던 바로 그것을 말이다. 맨 발가락이 바깥으로 나와 처량 맞게 꼼지락 거리는 것을 확인한 태유는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전화기도 꺼놓고 잠적해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꽤 많이 수수해졌다?”

“........시끄러워. 그보다 왜 여기에 나타난 거야.”

툴툴 거리면서도 도후는 잽싸게 발가락을 뒤로 숨겼다. 그래봤자 후즐근한 츄리닝 바지와 대충 입은 잠바와 때가 탄 모자를 숨길 수는 없는 건데 말이다. 너무도 자유스러운 모습을 태유 앞에서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도후는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런 도후의 모습에 웃음을 지은 채로 태유는 말했다. 

“매니저가 난리 났어. 너 맨션에도 없고 다른 곳에도 없다고 말야. 어머니한테 연락을 해도 그 분 외국으로 나갔더라? 그래서 지금 에이전시 완전히 뒤집어진 거 알아?”

“알게 뭐야. 난 휴가 중이란 말야.”

“화요일까지 였잖아?”

“일요일 일 했으니까 수요일까지 연장해서 쉴 거야.”

“제 멋대로 구나.”

제 멋대로 라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태유에게 그런 말은 듣기 싫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날짜에 촬영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바꾸는 걸로 유명한 태유가 지금 누구한테 제멋대로 운운을 한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태유가 예의 열 받는 어조로 말한다. 

“일은 해야지. 안 그래?”

“하게 되면 내가 알아서 해.”

“자기가 해야 할 일도 미루고 빈둥거리고 있는 거 태양이가 안 좋아할 텐데. 태양이는 자기 할 일을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해. 그거 알고 있어?”

“........제길...”

태양 때문이 아니라 이쪽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기에 어쩔 수가 없다. 

매니저도 하필이면 태유를 보낼 것이 뭔가 싶다. 차라리 직접 오든가. 아, 이쪽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니까 직접 올 수가 없었던 건가. 그러면 다른 경로로 알아보면 좋았잖아. 속으로 투덜대며 도후는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로 쪼르르 따라오는 태유의 모습에 도후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어딜 따라와?”

“나도 태양이 집에 갈 거야.”

“오지마! 절대로 오지마!”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나 고등학교 때 태양이 집에 와 본적 있어. 너만 태양이 집에 온 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각이야.”

“.......................”

아. 그런 건가. 묘하게 사람 기운 빠지게 하는 태유의 말에 팔을 아래로 내리고 가만히 있으려니 이쪽을 지나쳐 간 태유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문을 열리게 한 후에 도후를 쳐다본다.  

“안 탈거야?”

“.....제기랄....”

작게 욕설을 토해낸 도후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 도후의 뒤를 쫓아 안으로 들어간 태유는 10층을 누르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태유가 당연한 듯 10층을 눌렀을 때부터 도후는 속이 살짝 꼬이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태양의 집에 온 적이 있었을까. 이 녀석은 태양의 뒤를 밟는 놈이니까 집 주소도 분명 어둠의 경로를 이용해서 알아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무지 속이 편해지지 않는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으려니 태유가 뒤로 한걸음 옮기며 말했다. 

“왜 이렇게 아저씨가 된 거야? 너 지금 모습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

“그래도 촬영 때에는 누구보다 더 낫지.”

“그것도 언제까지 갈까?”

“적어도 너보단 오래 가겠지. 중성적인 이미지도 이제는 끝물이야.”

“그럴까?”

“그렇지.”

“.....................”

“.....................”

보이지 않는 전기가 두 사람 사이의 눈동자에서 빠르게 오고 갔다.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보다가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얼굴을 돌렸다. 

“여기는 여전하네.”

중얼거린 태유는 식탁 위에 올려진 것들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에 도후는 바로 ‘아무거나 만지지마.’라고 말했지만 그런 말을 해도 태유는 상관하지 않고 이것저것을 건드려댔다. 

태유를 상대로 어떤 말을 해봤자 어차피 들어주지도 않을 거다. 이쪽 입만 아플 것 같았기 때문에 도후는 바로 태양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대로 촬영 장소로 가는 걸까? 뭐 지금 모습이 나쁘지 않으니 바로 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역시 태양이 걸렸다. 전화를 하고 싶은데 지금 태양이 수업중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지니 꺼려진다. 그렇다고 문자를 보내기는 조금 부끄럽고 말이다. 괜한 부분에서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은 도후는 문득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를 발견했다. 

“좀 쓰고 갈까나.”

막상 태양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종이라도 한 장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든 도후는 볼펜을 꺼내 종이에 글을 적었다. 

[갑자기 촬영이 있어서 갔다 올게.]

이건 조금 딱딱한 것 같다. 여기서 더 뭘 써야 의미가 부드럽게 전달되는 걸까. 턱에 손가락을 대고 고심하고 생각을 하던 도후는 다시금 볼펜을 내렸다. 

[갑자기 촬영이 있어서 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게.]

“이게 훨씬 낫군.”

금방 돌아올게라는 어감이 괜찮다. 고개를 끄덕인 도후는 볼펜을 종이 옆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냉장고 문을 여는 태유다. 

“아무거나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여기가 네 집인 것도 아닌데 그렇게 무섭게 굴 필요는 없지 않아? 내가 뭘 건드리든 신경쓰지마. 내가 물건을 망가뜨리는 것도 아니니까.”

태유의 말대로 이 집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태유에게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태유가 이것저것 건드리는 것을 마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도후는 잠바를 걸치며 말했다. 

“이봐. 안 가는 거야? 빨리 와.”

“알았어.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마.”

도후를 따라 나와 구두를 신으며 태유는 중얼거렸다. 

“이 좁은 현관에 자전거를 두는 것도 여전하네. 그래도 전에 것하고 달라졌나?”

전에 어떤 자전거가 있었는지 알 바는 아니다.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인상을 쓴 채로 문을 연 도후는 먼저 밖으로 나와 태유를 쳐다봤다.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시선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태유는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아아. 오랜만에 왔더니 정말 좋다. 고향에 온 것 같네.”

잘도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싶다. 태유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도후는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문을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을 내내 쳐다보고 있던 태유는 손가락으로 열쇠가 들어간 주머니를 건드렸다. 

“열쇠는 언제부터 가지고 있게 됐어?”

“뭐가?”

“열쇠 말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태유는 꽤나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묘하게 불쾌해 보이는 그 얼굴에 도후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걸렸다. 도후는 열쇠가 든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이죽거리고 웃었다. 

“태양이가 줬어. 넌 이런 건 못 받았지?”

사람 바위를 건드리는 웃음에 태유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완전히 인형처럼 변한 얼굴이 된 태유는 도후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그의 소매를 있는 힘껏 잡아 당겼다. 그것에 팔이 뒤로 빠지는 듯 한 느낌을 받은 도후는 웃-하는 소리를 냈다. 

“...........이거 내놔.”

“뭐?”

“내놓으라고.”

“뭐라는 거야!”

“주라고.”

“에잇..! 너도 그 꼬맹이랑 같은 과였냐!”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 그 동석인지 뭔지 하는 꼬맹이랑 꼭 닮았다. 태유나 동석이나 둘 다 상대하기는 싫었던 도후는 태유를 밀쳐내고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계단 쪽으로 갔다. 그런 도후의 뒤를 쫓으며 태유는 당당하게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달라니까.”

“아, 진짜! 달라붙지마! 기분 나쁘니까!”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태유는 계속해서 내 놓으라는 말을 했고 그 말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던 도후는 ‘으아앗! 그만 둬!’라는 소리를 질렀다. 

딩동.

벨을 누르는데도 안에서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바로 달려와서 문을 열고 ‘왔어?’라는 말을 해야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닌가 싶어 태양은 한동안 문 앞에 서있기만 했다. 그런데도 1분이 지나도 역시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엉덩이가 아파도 택시 대신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왔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이거 벌써 빠진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쓴 태양은 열쇠를 꺼내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요.”

부르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 전에 문을 열자마자 방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공기에 집에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어디 간 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태양은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간 태양은 책상 쪽을 쳐다봤다. 별 생각 없이 눈을 내린 건데 마침 하얀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태양은 책상 앞으로 가 종이를 들어올렸다. 

[갑자기 촬영이 있어서 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게.]

“........촬영인가. 돈 벌러 간 거로구나.”

그쪽이 일을 하러 간 건데 그것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잖은가. 그러고 보니 화요일까지 쉬었지. 인기 많은 사람이 오늘까지 쉴 수는 없었을 거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은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태양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며 옷을 갈아입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나온 태양은 주변을 둘러봤다. 배가 고픈데 뭘 해먹어야 하나 싶다. 오늘 아침에 도후가 해준 된장찌개가 있는데 그거나 끓여서 다시 먹을까. 하지만 막상 된장찌개가 든 뚜껑을 열었을 때 식욕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혼자서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 어떻게 하나 싶어 미간 사이에 부름을 만들고 있던 태양은 거실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미 몇 십번이나 주문을 해서 다 외우고 있던 치킨집 번호를 눌렀다. 조금 있자 익숙한 멜로디가 나오고 경쾌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네로 치킨 집입니다.]

“여기 마진마켓이 있는 아파트인데요. 3동 1007호 양념 한 마리 가져다주세요.”

[네. 알았습니다. 30분 안에 가져다 드릴게요.]

여자의 경쾌한 말을 다 들은 태양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거실에 깔아져 있던 이불 위에 앉았다. 멍하니 있다가 쿠션을 들어 무릎에 올리고 화면을 쳐다봤다. 집에 조용하기 때문일까. 정말 심심하다. 재미 하나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양념치킨이 올 테니까 30분 지난 후에는 그걸 먹으면 될 테지만 그 전까지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곧 시험기간이니까 공부나 좀 할까.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분명 엉덩이가 아플 텐데. 그래서 일어나기가 싫다. 태양은 눈을 굴리다가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옆으로 누운 상태로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정말 이상하네....”

도후가 여기에 있었던 것은 한 달 정도다. 그런데도 그의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인지라 태양은 이불에 머리를 비비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턱수염을 근사하게 기리고 선글라스까지 쓴 사내는 눈에 힘을 주며 공장 건물을 둘러다 보고 있었다. 그것에 근처에 있던 촬영 스텝들이나 몇몇 모델들, 그리고 그 모델들의 관계자가 눈을 멀뚱히 뜨고만 쳐다본다. 그들이 쳐다보던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사내는 열심히 고개를 돌리며 찾고자 하는 인물을 수색했다. 그런데 10분이 되도 20분이 되어도 찾고자 하는 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앗!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다음 촬영은 어떻게 하려고!!”

사내는 도후의 매니저였다. 며칠 동안 잠적을 해서 사람 속을 들었다 놨으면서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간 거란 말인가. 이 인간 촬영을 할 마음이 있는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패닉 상태가 되어서 누가 건드리면 바로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상태가 된 매니저는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 때 하얗고 긴 손가락이 매니저의 어깨를 두드렸다. 

“언놈이 날 건드려!”

누가 건드린 건지 모르겠지만 눈물 쏙 나게 해주마. 크왁-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돌린 매니저는 서있는 것이 태유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급격하게 공손해졌다. 성을 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양 손을 배 위에 올린 그는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태유씨. 안녕하십니까?”

“지금 도후를 찾는 거죠?”

“그 녀석 지금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공장 뒤에서 외계인하고 교신 중이던데요?”

“..........네? 외계인 뭐요?”

“가서 보면 알아요.”

입을 다문 태유는 빙그레 웃었다. 설명하는 것은 여기까지. 그러니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찾아보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에 침을 삼킨 매니저는 고맙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였다. 몸을 돌린 매니저는 이번 촬영 장소가 되었던 공장 밖으로 나가자마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태유하고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아니. 방금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말을 듣는 것에 불과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나저나 실제로 말을 해보니 훨씬 더 차갑다. 한기가 풀풀 날리는 것 같다며 팔을 문지르며 오웃-하는 소리를 낸 매니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때 마침 건물 뒤에 홀로 서있는 도후가 눈에 들어왔다. 

“앗! 저 녀석! 저기에 있었어! 이봐..!”

거기서 더 크게 도후를 부를 수 없었던 것은 역시나 이상했기 때문이다. 위로 든 손을 내린 매니저는 조심스레 도후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섭도록 인상을 쓴 채로 핸드폰을 하늘로 들고 있는 도후를 쳐다봤다. 도대체 뭘 하는 건가. 하늘에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쳐다보지만 눈에 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점점 알 수가 없어진 매니저는 도후의 뒤로 가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말시키지마 난 지금 무척이나 진지하니까.”

“그게 진지한거냐.....”

하늘을 향해 핸드폰을 들고 인상 쓰고 있는 모습의 어디에서 진지함을 찾아볼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 장난을 하는 건지 꽁트를 찍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매니저인 자신을 두고 몰래카메라를 찍는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지만 수상한 것은 없다. 뭐, 도후가 이상한 면이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촬영이다. 이제 슬슬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자는 말을 하려는 순간 핸드폰을 아래로 내린 도후가 잔뜩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도대체 왜 안 터지는 거야?!”

정말 신경질이 나는지 엄지로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대는 것에 매니저는 얼굴을 내려 도후의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핸드폰 안 터져?”

“여기에 들어온 내내 먹통이잖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공장이 많아서 전기가 많이 집중되니까 통화가 잘 안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런 말은 진작 해야지!”

“우왁. 깜짝이야. 내가 일부러 말 안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성질을 내고 그래.”

당장 태양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으니까 화가 나는 거다. 그것에 대해서 일일이 매니저에게 말할 수 없었던 도후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화가 나 성큼성큼 가 버리는 도후의 모습에 매니저는 황급히 그 뒤를 쫓으며 물었다. 

“그런데 말야. 너 연락이 안 되는 동안 뭐하고 있었어?”

매니저의 집요함에 도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며칠 동안 쉬고 돌아온 것의 대가는 매니저의 추궁이었다. 계속해서 어디에서 뭘 했냐고 물어대는 것을 ‘시끄럽다.’라는 대답 100번 하는 것으로 겨우 잠잠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계속 달라붙어 도저히 떨어질 것 같은 집요함에 도후는 빠득 이를 갈며 매니저를 쳐다봤다. 

“내가 어디 가서 뭘 하는지 일일이 말을 해야 하는 거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다. ‘그 부분은 건드리지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표정을 짓는데 계속해서 집요하게 파고 들 수가 없었던 매니저는 손을 들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그를 흘겨본 도후는 한발 먼저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도후가 나타나자 바로 준비가 진행됐다. 선 채로 옷이 갈아 입혀지고 머리가 정리된다. 턱과 목 부근의 화장을 새로 하는 것에 도후는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옆으로 익숙한 기척이 느껴진다. 이게 뭔지 알 수 있었던 도후는 그냥 무시할까도 했지만 그러면 후환이 너무 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눈을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태유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제부터 촬영이야?”

“.....그래.”

“얼굴 풀어. 그렇게 굳은 얼굴로 있으면 제대로 촬영이 되겠어?”

“잘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리 말한 도후는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만들어진 웃음을 짓는 것에 태유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럼 수고해. 난 이만 돌아갈게.”

“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난 촬영이 다 끝났거든. 그래서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어.”

“뭐라고? 네 촬영이 언제 끝났다고 그래?”

“촬영은 신경도 안 쓰고 다른 것에만 집중하니까 내가 촬영이 다 끝났는지 어떤지를 모르는 거지.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손을 흔든 태유는 몸을 돌리고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 모습에 당황한 도후는 턱을 문지르고 있는 붓을 치워내고 뒤로 고개를 젖혔다. 

“야! 기다려! 너 설마 태양이한테 가려는 건..! 야! 기다려 보라니까..!”

도후는 앞으로 팔을 뻗었지만 태유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도후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열심히 태유를 불렀지만 태유는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였을 뿐이었다. 

책을 들었다 놓은 태양은 긴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재미있는 게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일 잘 보는 BL쪽은 전멸이고 일반 만화책도 그저 그랬다. 잡지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데. 일반 서적이라도 사서 가야 하나. 이렇게까지 안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데. 팔짱을 낀 채로 오늘 나온 목록이 나온 표를 보고 있던 태양은 마침 옆을 지나치던 여점원은 불러 세웠다.

“여기 신간 새로 안 나왔어요?”

“네?”

판타지 책을 끙끙거리며 들고 오던 여점원은 힘들게 얼굴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태양을 확인하고는 눈을 댕그랗게 떴다. 전에 BL만화책을 서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린 점원은 들고 있던 판타지 책을 옆 선반에 올리며 태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신간은 안 나왔어요. 하지만 추천해드릴 수 있는 건 있어요.”

“아뇨. 괜찮아요. 다음에 올게요.”

남이 추천하는 것 말고 이쪽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오늘은 마땅히 건질만한 책이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가야 하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돌리자 그런 태양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점원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다..다음에 꼭 오세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다. 태양은 고개를 돌려 점원은 흘겨보다가 다시금 앞을 쳐다봤다. 위로 올라가서 건물 옆에 세워둔 자전거를 잡고 도보로 나왔다. 

그냥 집에 들어가려 하니 조금 그렇다. 어디라도 가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눈을 들어 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아. 오늘 날씨 정말 좋다. 근처에 공원이 있으면 거기서 자전거 좀 타고 들어갈까. 아니면 그냥 일찍 들어가서 시험공부나 할까. 참 고민이 많이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태양아.”

부르는 소리에 태양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허리까지 올라간 건물의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태유를 발견했다. 하얀 털옷을 입고 있었던 태유는 특유의 화려함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빙글 거리고 웃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태유를 확인한 태양은 멍하니 그를 불렀다. 

“.........선배?”

태양의 부름에 태유는 기분 좋은 듯 환하게 웃으며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왔다.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어서 태양의 앞으로 온 태유는 얼굴 옆에 댄 손을 발랄하게 흔들었다. 

“안녕. 오랜만이지?”

그답지 않게 왜 이렇게 발랄한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인지라 눈을 꿈뻑이며 쳐다보고 있으려니 태유가 태양이 잡고 있는 자전거 위에 손을 올렸다. 

“나 좀 태워줘.”

“태워달라니. 어디를 가려는 건데요?”

“너희 집에."

".........왜요?"

"우리 술 마시자."

“지금 아직 2시인데요?”

"무슨 상관이야."

태유는 태양이 뭐라고 하기 전에 저 앞을 쳐다보며 씩씩하게 말했다. 

“자 출발하자.”

완전히 집으로 갈 생각이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태양은 태유를 등 뒤에 매단 채로 한숨을 쉬며 자전거에 오르며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단단히 붙잡아요. 떨어져도 나 책임 안 질 거예요.”

“알았어.”

그저 뒷자리에 엉덩이만 살짝 댄 상태로 있던 태유는 태양의 말에 손을 위로 들었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태유의 손은 태양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세게 끌어안아 태양의 등에 볼을 댄 태유는 안도한 듯 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좋다.”

“그래요?”

태양은 앞으로 둘러진 태유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가 단단히 잡았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태양은 자전거 패달을 밟았다. 

태유가 가벼운 건지 아니면 길이 잘 정리되어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참 잘 나갔다. 태양이 패달을 꾹꾹 누를 때마다 그의 등이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간다. 그 감촉을 즐기는 듯 희미한 웃음을 짓던 태유는 지나치는 식으로 물었다. 

“허리 괜찮아?”

“...........어떤 의미로 그런 물음을 던지는 건지 모르겠네요.”

“도후랑 했어?”

처음에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지만 두 번째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 비틀거렸다. 재수 없으면 자전거와 함께 자빠질 뻔 했던 태양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자전거 탄 상태로 차에 치이면 즉사에요. 알면서 왜 그래요?”

“잤어?”

“....................”

집요하게 군다. 그것은 분명 어떤 단서를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원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쪽은 일주일 동안 만나지 않았으니 들킬 건덕지가 없으니 문제가 있다면 역시 도후인가. 도후가 어떤 티를 냈기 때문에 태유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거다. 말을 돌리고 어물거리면 분위기만 더 이상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냥 빠르게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짧게 한숨을 쉰 태양은 땅을 발로 차며 자전거 페달을 꾹꾹 눌렀다. 

“잤어요.”

태양의 대답에 태유는 눈을 감았다. 듣기 싫은 말을 들어 버렸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눈을 꾹 감고 있던 그는 다음 순간 눈을 뜨고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랑 잤구나. 이제 태양이도 어른인건가.”

도후랑 잤다고 이쪽이 어른이 되는 건가. 원래부터 어른이었다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태양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태양이 침묵을 지키는 것이 1분이 되고 2분이 되자 태유 쪽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됐다. 정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는 듯 길게 한숨을 쉰 태유는 태양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투덜댔다. 

“너는 정말 재미없는 녀석이야.”

“그것도 좋다고 했잖아요.”

“옛날이야기지.”

태유의 말에 태양은 슬그머니 입술을 올렸다. 

“선배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좋아했어요.”

뒤에 매달려 있는 태유의 호흡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태양은 모르는 척 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나랑 같은 것 같아서 그래서 좋았어요. 그래서 더 사랑할 수가 없었어요.”

이상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다. 자신과 완전히 다른 타입. 아니면 자신과 같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끌리게 된다. 물론 처음에 태유를 봤을 때에는 적의를 느꼈지만 하도 부딪히다 보니 나중에는 의식을 할 새도 없이 그의 옆에 당연한 듯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알게 된 것 같다. 이 사람은 나랑 같구나-라고 말이다. 

“나랑 같아서 좋으면서도 싫었어요. 난 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생겨 먹어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거라며 늘 체념하고 포기를 하게 된다. 그것이 본인은 싫고 괴로워서 사고를 친다지만 결국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상처를 주고 괴롭힌다는 것을 늘 보게 되고 깨닫게 된다. 그게 늘 태양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아픈 멍은 나아지지 않아 또 다른 사고를 치게 되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 공부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버지를 위함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태유에게서 떨어져야 온전히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배를 벗어나야지 내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죠. 선배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변해야 했던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모든 걸 선배 탓으로 해서 미안해요.”

전부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쉽게 입 밖으로 말을 할 수 없었던 거다. 지금이라도 말을 했더니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태유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다. 뭐라고 말을 해줘야지 이쪽이 덜 무안해지는데 말이다. 열심히 패달을 밟으면서 태양은 뒤로 살짝 고개를 젖혔다. 

“내 말 들려요?”

“.........재미없어.”

“네?”

“정말 재미없어.”

이번에는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없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고백이 재미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재미없다는 것일까. 알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려니 태유가 배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준다. 

“사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재미없다.”

태양의 등에 볼을 비비던 태유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세상에 감동이나 즐거움이 없잖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즐거움이 있을까나. 애초에 태유가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고백은 굉장히 의외였다. 비밀스러운 어떤 것을 엿들은 기분이다. 태유는 굉장히 기분이 가라앉은 모양이다. 그건 태양도 마찬가지다. 딱히 태유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할 거리가 없었던 태양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우울한 듯 가만히 있던 태유는 황단보도 앞에 잠시 멈춰서는 순간 주먹 쥔 손을 허공으로 뻗으며 씩씩하게 외쳤다. 

“좋아. 가자. 내가 양주 쏜다!”

마침 신호가 바뀐다. 앞으로 몸을 내밀며 태양은 말했다. 

“양주는 독해서 안 돼요. 소주로 가요.”

“........정말 재미없어 졌다니까.”

학생일 때 무슨 말을 해도 ‘알았어요. 선배.’라고 대꾸해주는 태양과 지금의 태양은 너무도 달랐다. 지금의 태양은 하나도 귀엽지 않고 시어머니 같다면서 태유는 이마로 태양의 등을 가볍게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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