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 하셨습니다.”
인사를 도후에 맞춰 촬영을 했던 감독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고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른 스텝들에게도 인사를 한 도후는 몸을 돌려 입구로 서둘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여자들이 다가와 말을 건다.
“오늘 잘 했어요. 평소보다 박력이 더 들어가서 멋있어요.”
“정말 최고였어요.”
촬영하는 장면을 또 다르게 찍고 있었던 모 잡지의 기자들의 칭찬의 말에 도후는 엄지를 세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인사에 기자들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든다. 그것을 본 채 만 채 하며 도후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바로 매니저가 뒤따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무슨 약속 있어?”
“내가 약속 있으면 뭐 어쩌려고? 뒤라도 쫓아오게?”
노려보는 도후의 눈초리는 장난이 아니다. 칼로 찌를 것 같은 으스스한 눈빛이지만 이미 그런 것에 면역이 되어있었던 매니저는 찔끔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너 어제 누구랑 있었어? 설마 여자랑 있어서 그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여자는 무슨. 동생이랑 있었어.”
“에? 동생? 그 새로 생긴다는 동생이랑 같이 있었어? 우와. 웬일이야. 의외로 도후 너 자상한 형이었구나.”
“자상한 형이라....”
그 자상한 형이 동생이 될 녀석의 허리를 휘어 감고 딥키스를 해버렸다. 그건 패륜이 아니던가. 헬쓱하게 얼굴이 질린 채로 걸음을 빨리한 도후는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오른쪽에서 ‘도후씨.’라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 얼굴을 돌리자 몸매가 눈에 확 띠는 예쁘장한 여성이다. 얼굴이 익숙하다 했더니 얼마 전부터 열심히 물밑으로 연락을 취해오던 어느 지명도 있는 탤런트다. 그런데 바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여자가 도후의 코앞까지 다가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오늘 촬영 끝났으면 우리 같이 밥이라도 먹을래요?”
“도후는 오늘 저랑 약속이 있답니다.”
말과 동시에 팔이 어깨에 올려진다. 탁-하고 충격이 올 정도로 강한 일격에 도후는 속으로 숨을 삼키며 눈을 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하얀 털모자 속에 작은 머리를 집어넣은 태유다.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짓는 도후의 얼굴을 눈 바로 앞에서 보면서도 태유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태연하기만 한 어조로 말했다.
“나랑 약속 있는 거 맞지? 그렇지?”
“.......................”
이 녀석은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가볍게 언쟁을 벌인 후 도후는 촬영 내내 태유를 무시했다. 태유도 딱히 도후에게 친한 척을 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오늘 촬영 컨셉이 흑과 백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면 도후와 태유가 말을 안 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전부 알아차렸을 거다.
대충 일을 끝내고 앞으로 이 녀석과는 연결되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싶었는데 왜 또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태유가 눈을 꿈뻑이며 묻는다.
“나랑 같이 안 갈 거야? 그러면 이 여자 분이랑 같이 식사하시던가.”
“너 정말이지...”
혀를 찬 도후는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여자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차 앞에 섰다. 주머니에 열쇠를 꺼내 차에 올라타려는데 반대쪽 차 밖에 서있던 태유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것에 도후는 표정을 구긴 채로 유리창을 내렸다. 그러자 살짝 허리를 숙인 태유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문 열어줘야지. 우리 같이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같이 간다고 했지만 차에 태워준다고는 안 했어.”
“호오.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시겠다? 그러면 난 태양이한테 연락 해야지.”
바로 도후의 표정이 뭐 씹은 것 마냥 구겨진다. 정말 싫다는 얼굴을 하는 도후지만 태유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턱에 손가락을 댄 상태로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전화해서 뭐라고 말을 할까나.”
“제길...”
태유가 태양을 운운하는 순간 괜히 초조해졌다. 그가 태양과 무슨 말을 하든지 알 바는 아니지만 동시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혀를 찬 도후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태유가 느긋하게 차에 올라타며 말한다.
“고마워. 너 태양이한테 약하구나.”
“그게 아니라...!”
“알았어. 일단 출발할까?”
아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냅다 바깥으로 집어던져 버리고 두 번 다시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해 버리고 싶다.
쉽게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도후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뽑아드는 태유의 행동에 바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 강한 힘에 태유는 눈을 들어 무시무시한 눈빛 광선을 뿌리는 도후를 쳐다봤다.
“내려서 뒤에 타.”
“무슨 말이야. 여기에 앉으면......”
“난 그 자리에 아무나 안 앉혀. 그러니까 내려서 뒤에 타.”
원래 옆자리에 누가 앉는 것을 못 견뎌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태유가 이 자리에 앉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바로 손목을 잡고 뒤로 던져 버릴 것 같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도후의 모습에 태유는 슬그머니 입술을 올렸다.
“예민하구나.”
이건 예민하니 안 하니의 차이가 아니다. 애초에 그쪽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그것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지만 쉽사리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있으려니 자리에서 일어난 태유가 보란 듯 뒷자리로 건너가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됐지? 이제 어디 갈 거야?”
“........................”
“태양이한테 가는 거지?”
인상을 팍 쓴 도후는 뒤를 쳐다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얻어 타는 거면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될까?”
“내 입 가지고 내가 말을 한다는데 무슨 상관일까나?”
“너 진짜 재수 없다. 원래 그렇게 사람 속 긁는 성격이냐?”
“속을 긁다 못해 미치게 하는 것이 내 특기야.”
“아주 잘났다.”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낀다. 이를 악문 도후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일부러 거칠게 차를 몰았음에도 의자에 손을 대고 앞을 쳐다 보고 있는 태유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태유는 딱딱하게 굳은 도후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은근슬쩍 물었다.
“내 성격 태양이랑 닮았지?”
그 물음에 도후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린다.
그것을 본 채 만 채 하며 태유는 은근슬쩍 말했다.
“태양이가 날 닮은 걸까. 아니면 내가 태양이를 닮은 걸까?”
“시끄럽게 굴지마. 한번만 더 입 열면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릴 테니까 말야.”
태유에게 휘말려서 입을 열게 되면 더 화가 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도후는 그리 말하고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태유가 계속해서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말에 일일이 반응을 취하면서 열을 낼 필요가 어디에 있나 싶다. 그냥 무시하자면서 번호를 누른 도후는 폰을 귀에 댔다. 상대가 금방 전화를 받아주면 좋을 텐데 계속해서 들리는 것은 통화음뿐이다. 처음에는 묵묵히 기다리던 도후지만 곧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귀에서 뗀 폰을 내려다 봤다.
“이 녀석은 도대체...”
“문자로 보내. 그래야지 확인할 걸.”
“.........쳇.”
자세한 말을 해주지 않아도 태양에게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정말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후는 순순히 태양에게 문자를 보냈다.
태양은 계속해서 도서실에 있을 기세였다. 문자를 보내서 언제까지 학교에 도착한다는 말을 하고는 집까지 같이 갈 생각이다. 왜 태양을 이렇게 데리러 가게 되는 거고, 자신의 맨션이 아닌 태양의 아파트로 가려고 하는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지만 벌써 결정한 것을 물릴 수도 없었다. 뒤에 있는 태유는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자며 자기 최면을 건 도후는 열심히 운전대를 움직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음산한 도후의 말에도 태유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얼굴 가죽이 벗겨질 것처럼 노려보는 도후는 마주 쳐다보며 태유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했잖아. 나도 태양이 보고 싶다고. 태양이 얼굴 보고 돌아갈 거라니까.”
“태양이하고 바로 집으로 갈 거니까 넌 이만 돌아가. 얼굴 봐도 인사 나눌 시간은 없을 거야.”
“내가 태양이랑 인사를 나누면 그만이지 인사 나눌 시간이 없다는 것은 무슨 소리야? 벌써부터 그렇게 태양이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가?”
“소유권이라니....”
도후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아까부터 그런 이상한 말만 해대다니. 이쪽이 태양의 주인인 것도 아닌데 소유권인지 뭔지를 주장할 필요가 없잖은가. 이 녀석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도후는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태양이 다니는 학교에 도착했을 때 6시 반 정도가 되었다. 그때까지 태양에게서 답 문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에 태양이 없을 것도 생각해 봐야 했기 때문에 20분 정도를 차 안에 있다가 찾아볼 요량으로 이렇게 학교로 가는 길이다. 학교 도서실에 있다고 했으니 거기만 슬쩍 들렸다가 밖으로 나오면 되겠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도 없고 어둡다. 사람이 없으면 불도 안 켜두는 건가 싶어 위를 쳐다본 도후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 도후의 옆에 붙으며 태유가 말을 건넸다.
“태양이 하고 뭐하고 놀아?”
“........................”
“태양인 아직도 만화책 잘 보지? 전에 들어보니까 방학 때에는 아는 선배네 주점에서 알바 한다고 하던데 이번 여름에도 알바를 할 건가.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바다로 놀러 가면 좋을 텐데. 태양이한테 말 한번 해봐. 나랑 같이 놀러 가면 비용은 전부 내가 낸다고 말야.”
“알바 하는 건 대학 등록금 마련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애한테 돈 댈 테니 놀러가자고 하면 따라갈 것 같아?”
“알바비용도 내가 주면 되잖아.”
“태양이는 그런 돈 안 받아.”
“받을 걸? 분명히 받아. 태양이는 그런 애거든.”
확실하게 말한 태유는 빙그레 웃었다.
자신만만하게 태양이 이런 저런 애라고 말하는 것에 도후는 할 말을 잃고 만다.
무표정한 얼굴로 태유를 내려다보던 도후는 앞으로 얼굴을 돌리고 걸음을 빨리 했다. 그것에 태유는 걸음을 빨리해 도후의 옆에 섰다. 이건 일부러 붙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다. 태유고 나발이고 정말 싫었다. 도후는 걸음을 빨리해서 언덕을 올라갔다. 그것에 태유는 일부러 그런다는 듯 더 달라붙었다. 그런 태유의 행동에 도후는 바로 그를 노려봤다.
“너 정말...!”
“너 정말 평범하다.”
중얼거리는 말에 도후는 ‘에?’하는 반응을 취했다.
“왜 이렇게 평범하지? 얼굴은 평범의 수준은 뛰어넘는데 말야. 그래서 태양이가 너한테 끌리는 걸까. 그 녀석 의외로 취향이 담백하니까 말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싫다고.”
내내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던 태유는 싫다는 말을 할 때에는 얼굴을 똑바로 들어 도후를 쳐다봤다.
내내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던 주제에 지금 이순간의 태유는 마치 칼날을 품고 있는 듯 한 눈빛을 날리고 있었다. 위로 살짝 올라간 눈을 치뜬 태유는 도후를 흘겨보며 몸을 돌렸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평범한 주제에.”
“.........................”
그러니까 지금 그 평범하다는 말을 누구한테 하는 거란 말인가.
평범이라고? 잘 뜨지 않았을 때에도 ‘이렇게 잘 생겼는데 왜 이렇게 안 뜨는 거지?’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어디를 가도, 손에 쥔 것이 하나도 없어도 얼굴 하나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대우를 받고 주목을 끌었던 이 몸을 두고 지금 평범하다고 말하는 거란 말인가. 정말로? 진심으로?
믿을 수가 없어진 도후는 허리에 손을 대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도대체가.....”
태양에서부터 태유까지. 사람을 쥐고 흔드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둘 다 말발이 워낙에 좋아서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애초에 저런 타입을 상대하는 것이 벅차기만 했다 도후는 길게 한숨을 쉬다가 품에서 담배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길가에 서서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붙이려고 눈을 내리던 순간 저 아래 쪽으로 나있는 길로 걸어오는 태양이 보였다.
“태....!”
태양과 이쪽의 사이에 있는 길이 언덕으로 되어 있어서 불러도 잘 듣지 못할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자 저기에 계단이 있다. 도후는 마음이 급해졌다. 태유보다 훨씬 먼저 태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으로 머리 속이 꽉 찬 도후는 들고 있던 담배를 뱉어내고 급히 계단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태양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마치 태양의 그림자가 길게 일어나 태양의 몸을 끌어안는 듯 한 현상으로 말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잘못 된 것이 아닐까 싶어 주춤하고 있는 사이 그림자가 더 확실하게 보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뭔가를 들고서는 태양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자. 놀란 도후는 크게 입을 열었다.
“태양아!!!”
퍽!!!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도후는 다음 순간 더 크게 눈을 떴다.
사내가 들고 있던 것은 태양의 머리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다. 딱 부딪치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웬 걸. 야구 방망이는 정확히 태양의 팔목에 가로막혔다.
당황한 사내는 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태양은 놓치지 않았다. 태양의 몸이 잠시 위로 떠오른다 싶었을 때 길게 뻗어진 태양의 다리가 사내의 배를 걷어찼다. 욱-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붕 떠서 저 뒤로 날아간다. 그러자 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 태양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쓰러진 자에게 걸어갔다. 이제 별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갑자기 다른 쪽에서 몇몇 사내들이 더 나타났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부축하는가 싶더니 태양에게 달려들었다. 하나만 있는 줄 알고 느긋하게 있던 태양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도후는 옆에 있던 계단을 달려들었다. 그 순간 뒤에서 나타난 손이 도후의 팔을 잡았다.
“읏!”
갑자기 잡아당기는 힘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다리에 힘을 줘서 넘어지는 것을 피한 도후는 이건 뭔가 싶어 얼굴을 돌려 팔을 붙잡고 있는 태유를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태양이가 위험하잖아!”
“괜찮아.”
“뭐?”
“가면 방해야.”
태연하기만 한 태유의 말에 도후는 순간 태양에게 어떤 일이 생기고 있는지를 잊었다. 멍하니 있으려니 뒤에서 퍽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지금 상황이 떠오른 도후는 급박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쳐다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날아다니는 태양과 그런 태양의 발차기와 주먹질을 받고 맥없이 뒤로 날아가는 정체불명인 녀석들이다.
“뭐야. 저건...”
도후는 믿을 수가 없어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럼에도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편안하게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태양은 쓰러지려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는 연거푸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다가 뒤에서 다가오는 녀석에게 잡고 있던 녀석을 던지며 그대로 달려가 발차기를 날렸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말이다.
태양에게 덤비려던 녀석들은 전부 넷이었지만 그 넷이서 태양 하나를 상대하지 못했다. 얼마가지 않아 전부 바닥에 쓰러진 녀석들을 신음을 흘리며 맞은 곳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런 녀석들의 중앙에 선 태양은 느긋하게 위로 올린 소매를 아래로 내리며 어깨를 두어번 털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
“이게 도대체.....”
“한번 싸우면 시야가 좁아져서 상대를 잘 못 봐. 그래서 잘못하면 옆에 갔다가 맞을 수도 있어. 명색이 모델인데 얼굴 맞아서 커다란 멍을 달고 있을 수는 없잖아. 태양이 주먹은 세니까.”
태유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후가 불쌍했던지 태유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잘 들으라는 듯 속삭였다.
“예전에 같이 다녔을 때 태양이 별명이 돌아이였어.”
“돌아이?”
“또라이라고. 저 녀석 싸울 때는 나도 상대 못했어. 그만큼 무섭거든.”
태유의 말에 도후는 입을 다물고 뒤로 조금 몸을 물렸다. 그런 도후를 흘겨본 태유는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걸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태유보다 먼저 태양에게 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멍하니 보고만 있으려니 태양이 얼굴을 들어 이쪽을 쳐다본다. 이쪽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이 마주쳐도 별 동요가 없다.
맑고 동그란 태양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도후는 마음 한쪽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유가 붙잡아도 그 손을 뿌리치고 아래로 내려가서 도와줄 것을 그랬나.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걸려서 표정을 굳히고 있으려니 태유가 가방을 들어 먼지를 털며 그것을 태양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태양은 여전히 쓰러져서는 신음을 흘리고 있는 녀석들을 본 채 만 채 하며 태유를 쳐다봤다. 태유가 뭐라 말을 하자 태양이 옆으로 얼굴을 돌린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저으며 태유를 지나쳐 위로 올라갔다. 이리로 오는 태양을 본 도후는 긴장해서 몸에 힘을 줬다.
도후는 앞에 와서 멈춰서는 태양을 쳐다봤다. 그에 맞춰서 태양이 옆으로 머리를 넘기며 태연하게 물었다.
“왜 왔어요?”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데도 안 나와서 데리러 왔어.”
“여기에 없으면 어쩌려고요.”
“없으면 없는 거지.”
도후의 대답에 태양은 피식-하고 웃었다.
조금 전 할리우드 액션을 펼치면서 사내 넷을 상대했으면서도 태연하기만 한 얼굴을 하고 있다.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확실하게 현상을 띠우고 눈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태양이 그런 도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도후도 입을 다물고 태양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상한 느낌이다. 조금 전의 장면을 봤기 때문인지, 태유에게 이런 저런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어도 눈앞에 있는 태양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이상해요?”
낯설다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던져지는 태양의 물음에 도후는 눈을 깜박였다.
“내 모습이 싫어요?”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이러면 되게 싫어하시더라고요.”
태양은 얼굴을 아래로 내리고 발로 땅을 툭툭 쳤다. 발로 찬 흙이 튀어서 구두 위에 튀었다. 도후는 그것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정말 싫어하더라고요.”
웅얼거리듯이 말을 하는 태양이 생소하다. 언제나 또렷하게 말을 하던 녀석이 왜 이렇게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눈을 아래로 내리자 계단 아래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태유가 보인다. 사내 녀석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도후는 손을 들어 태양의 팔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하는 팔을 잡아 앞으로 당긴 도후는 태양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피부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런데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주머니에 있는 폰을 열어 거기서 나온 불빛으로 피부를 살피는 도후의 행동에 태양은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까 팔로 막았잖아. 멍 들었나 안 들었나 보는 거야.”
“...................”
묘한 표정을 짓는 태양과는 상관없이 도후는 계속해서 태양의 팔을 살폈다. 그러자가 여전히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너 의외로 튼튼하구나.”
도후는 소매를 내리고 태양의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태양이 눈을 들어 이쪽을 쳐다본다.
여전히 동그란 눈을 하고 있다. 검은 자위 위로 살짝 내려단 긴 속눈썹을 쳐다보던 도후는 손을 들어 태양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싸움 잘하더라.”
“좀 해요.”
“그게 좀 하는 거냐. 아주 날아다니더만. 그런데 그 녀석들은 누구야?”
“짐작은 가지만 말은 안 할래요.”
“왜?”
“알아서 처리하려고요. 원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는 편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이런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말란 말인가. 자세히 말을 해주면 이쪽에서 더 처리를 잘 해 줄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태양의 양쪽 허리께에서 두 개의 팔이 나타난다.
“태양아. 배고프다.”
뒤로 나타나 너무도 당연하게 몸을 끌어안은 태유는 태양이 어깨에 턱을 대고는 살짝 비볐다. 그것에 바로 도후의 안색이 굳어졌지만 그런 것 따위 모른다는 듯 태연의 극치인 표정을 지은 태유는 태양의 볼을 이마를 대며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태양이 너는 배고프지 않아? 그렇게 움직였잖아.”
태유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하고 의심이 될 정도다. 이렇게 애교를 떨어대다니. 그것보다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매달릴 수 있었던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태양은 태유가 뒤에 매달려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배가 조금 고픈 건 같은데..”
“그러면 뭐 먹으러 가자. 내가 사줄게. 너 갈비 좋아하지? 갈비 먹으러 가자. 내가 맛있게 하는데 알고 있어. 댁도 같이 가. 사줄게.”
“필요 없...”
“갈비 좋아하는데.”
갈비가 먹고 싶으면 이쪽 돈으로 사서 먹을 거라는 말을 하려는데 난데없이 태양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얼굴을 돌리자 이쪽을 빤히 쳐다본 채로 태양이 말했다.
“나 갈비 굉장히 좋아해요.”
턱에 손가락을 대고 그렇게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건가. 어떤 반응을 취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태유가 ‘자. 먹으러 가자.’라면서 태양의 팔을 잡아 당겼다. 벌써 저만큼 내려가 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쉰 도후는 어기적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처음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에 태양은 눈을 들어 도후와 태유를 쳐다봤다.
도후는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고 태유도 하얀 모자만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특유의 분위기라는 것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급으로 차려입은 모델이 둘이나 있으니 자연스럽게 사람의 이목이 쏠리게 된다. 워낙 화려한 사람이 나타나서인지 점원들은 바로 말을 걸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자 저 안쪽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자가 급하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조용한 자리로 안내해주세요.”
“알았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앞으로 팔을 뻗는 것에 태유가 앞장서고 그 뒤를 태양과 도후가 따른다.
맛있는 갈비를 먹을 기대를 품으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도후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른다.
“왜요?”
“갈비 금방 먹고 돌아가자.”
“나 갈비 많이 먹을 거예요. 천천히 시간 들어서요.”
“......나가서 내가 다시 사 줄 테니까 대충 먹고 나가자고."
“한 곳에서 먹고 그냥 나가는 거지 뭘 또 다른 곳으로 가서 먹어요. 그럴 돈 있으면 차라리 날 주라고요.”
“뭐해? 이리와.”
태양의 타박이 끝나자마자 태유가 부른다. 저 앞에 자리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태양이 도후를 두고 곧장 그리로 간다.
“저게. 사람 마음도 모르고....”
태양이 태유와 함께 있으면 괜히 속이 부글거리고 끓는다. 초조하고 싫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떨어뜨리려 하는 건데 왜 그걸 모르는 거란 말인가. 다른 때에는 눈치 빠르게 행동하더니 제일 중요할 때에는 왜 저렇게 곰탱이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표정을 굳힌 도후는 자리로 갔다.
다른 자리와 달리 구석이 있는데다 길게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자리다. 옆에 통로도 하나인데다 근처에 달리 앉을 자리도 없어서 다른 사람이 올 염려도 없는 자리였다. 태유는 여기에 꽤 많이 왔었나 보다. 이런 자리를 알아서 준비해준 것을 보면 말이다.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는 태유를 흘겨본 도후는 태양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태양이 옆에 둔 가방을 들어 무릎에 올린다.
“가방 나한테 줘.”
주문을 마친 태유가 손을 내밀자 태양은 가방을 건넸다. 태양의 가방이 태유의 손에 들어가면 바로 인질로 변할 것 같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도후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양은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며 물었다.
“뭐 시켰어요?”
“우선 갈비 5인분 시켰어. 너 많이 먹으라고.”
3명이서 5인분이면 많은 게 아닌가 싶다. 고기만 먹을 건가 싶어 인상을 쓰는 도후에 반해 태양은 만족한 얼굴이다.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은 주제에 왜 저렇게 고기를 잘 먹는 건지 모르겠다. 5인분 다 먹을 때까지 자리에서 못 일어나게 되었다며 혀를 차려니 태유가 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진한 웃음을 짓는다.
“여기 정말 맛있어. 그리고 자주 오는 편이라 점원들이 알아서 사람 막아줄 거야.”
“편리하겠네요.”
“응. 편리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태유는 도후를 쳐다봤다.
“내가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
“난 고기 별로 안 좋아해.”
“그러면 있다가 냉면이나 찌개 같은 거 시켜서 먹어. 그것도 사줄게.”
“.......................”
사준다고 하나는 말을 들으면 으레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왜 괜히 속이 꼬이는지 모르겠다. 표정이 굳은 도후는 젓가락을 내려놔주는 태양을 흘겨봤다.
아까 차 안에서도 보긴 했지만 지금 봐도 딱히 아픈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나 날아다녀서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멍이 든 곳이 없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정도 진정이 되니 진지하게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이걸로 내내 의혹에만 감싸여 있던 것들이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다. 태양은 고교시절 때 흔히 말하는 일진에 속해 있었던 거다. 태유는 그 집단의 짱인가 뭔가 하는 거였고 태양은 행동대장 쯤 되었던 걸까. 그런 것도 인상이 좀 험악하게 생긴 것들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태양도 태유도 둘 다 얼굴이 곱상하기만 하다. 공부만 했을 것 같은 녀석들인데 이상하다. 도후는 학생 때 공부만 하던 쪽이어서 일진이니 뭐니 하는 같은 것과는 영 인연이 없었다. 다니던 학교도 외고여서 학업을 중시하던 곳이었고 말이다. 애초에 공부 외에 다른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타입이라 모델이 된다고 했을 때에는 주변 사람들이 더 놀란 케이스였다.
도후는 젖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렇구나. 원래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녀석들이 그런 쪽에 있는 거구나-라고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반찬 나왔으니까 좀 먹어봐요. 샐러드도 맛있는데.”
“아. 그래.”
언제 또 이렇게 나온 건지 모르겠다. 별 생각 없이 음식을 집어 입에 넣자 태양이 그릇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물었다.
“맛있어요?”
“괜찮네.”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말하던 도후는 아차 싶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뭘 이렇게 잘 먹고 있는 거냔 말인가.
움찔해서는 눈을 들자 보이는 것은 태양이다. 식탁에 손을 올린 채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마치 ‘더 먹어요.’라고 말하는 듯 한 그 얼굴에 도후는 앞에 있던 김치를 들어 입에 넣었다. 그 모습에 비로소 얼굴을 돌린 태양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하나씩 들어 입에 넣었다. 그런 태양의 모습을 짐짓 흐뭇한 듯 쳐다보며 태유도 젓가락을 들었다.
“깔끔하게 나오지? 여기 고기도 맛있어. 아, 나왔다.”
그릇에 산처럼 쌓인 갈비가 나왔다. 저거 다 먹으면 한참이 걸리겠다 싶어 질린 표정을 짓는 도후와 달리 태양은 바로 눈을 반짝였다. 점원의 손길에 따라 갈비가 펼쳐져서 불 판 위로 올라간다. 지글 거리며 구워지는 것에 태양의 눈동자가 더 반짝였다. 그것에 태유가 웃으면서 앞에 있던 김치를 들어 입에 넣었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언제 재혼하는 거야?”
“화요일에 신혼여행 다녀오신 다음에 입적만 하실 건가 봐요.”
“결혼식은?”
“번거로울 것 같아서 안 하신데요. 하면 좋겠지만....”
“그래도 나이 먹어서 자기 짝을 찾아서 다행이다. 아저씨는 꼭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워낙 말썽을 부렸어야지.”
“누구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되었는데요.”
“어? 내 탓만 하는 거야? 기억 안 나나 본데 네가 사고치려 할 때마다 난 꼭 말렸어. 그 말 안 듣고 날뛴 건 태양이 너야.”
“뭐, 그건....”
확실히 태유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에는 태유나 부친이 하는 말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에 화가 많이 들어차 있어서 일단 그것을 풀기에 급급했다. 혹여라도 그것을 푸는 일을 막는 이가 있으면 바로 성을 내며 더 주먹을 휘둘렀던 것도 같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미간을 찡그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종업원이 와서 고기를 뒤집는다. 와서 고기를 잘라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 대화를 계속해서 할 수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태유와 도후는 유명한 모델이다. 하물며 도후의 어머니의 재혼에 대한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면 가십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것이 싫어서 두 분이 결혼식을 하지 않는 건데 말이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태유도 답답함을 느끼는지 종업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잘라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이쪽으로 오지 말아 주세요.”
“네? 하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이쪽에서 부를게요.”
태유의 말에 점원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정말 가도 되는 건가 싶어 조심스런 눈빛을 보내자 태유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에 점원은 인사를 하며 바로 몸을 돌렸다. 점원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자 태유가 대신 고기를 들어 태양의 그릇에 올렸다.
“됐지? 이건 익었으니까 먹자.”
“잘 먹을게요.”
태양은 냉큼 고기를 들어 입에 넣고는 몇 번 씹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다.”
“많이 먹어. 너 고기 좋아하는 건 여전하다.”
“입맛은 원래 안 바뀌는 거예요.”
중얼거린 태양은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비싼 데라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맛있다. 몇 번 씹자마자 바로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는 것에 자연히 손길이 급해진다. 한참을 먹던 태양은 옆에 앉아있던 도후의 젓가락질이 시원찮다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먹어요.”
“괜찮아. 알아서 먹을게.”
“알아서 안 먹을 것 같으니까 챙겨주는 거잖아요. 어서 먹어요.”
태양은 고기를 들어 도후의 그릇에 올렸다. 그러자 도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느낌으로 고기를 들어 입에 넣는다. 태양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맛있죠?”
“괜찮네.”
“솔직하게 맛있다고 말하면 좋을 텐데.”
한쪽 입술을 올리며 말하는 것에 도후는 표정을 풀었다.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태양에게 있어서 태유는 좋은 선배였을 테고 오랜만에 만난 사이다. 태유가 그동안 태양의 뒤를 조사했다는 것은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 말을 해도 되는 거다. 학교에서 사고가 있어서 태양도 기분이 안 좋을 텐데 계속 인상을 쓰는 건 조금 그렇다. 일단 지금은 잘 먹고 집에 들어가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겠다. 학교에서 그 일은 왜 그런 거고, 태유에 대해서도 말이다. 도후는 잘 익은 고기를 들어 태양의 그릇에 올렸다.
“먹어. 채소도 먹어. 고기만 먹으면 배 나온다.”
“괜찮아요. 배 안 나와요. 알면서 그래요?”
“자만하면 언젠가 배불뚝이가 되어 있을 거다.”
“안 그래요. 걱정을 말아요.”
정말 괜찮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양은 도후가 주는 것들을 다 먹었다. 다른 때라면 절대 먹지 않고 오로지 고기만 먹었을 거다. 그런데 도후가 주는 것은 의외로 먹을만 했다.
“좀 먹어봐. 이거 괜찮은데.”
달리 도후가 건네는 것을 먹은 태양은 젓가락으로 입술을 누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이건 이렇게 싸서 먹는 거야.”
하얀 김치 속에 속을 넣는 도후의 행동에 태양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저런 건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다 알기 마련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기분으로 보고 있는데도 눈치 채지 못한다. 이쪽이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굳이 정정하지 말고 그냥 놔두자는 기분으로 태양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오늘 일 나갔는데 내일도 일 하나요?”
“당분간 쉴 거야. 휴식 동안에 부르면 알아서 하라고 했어.”
“그러면 내일부터 그냥 집에 있을 거예요?”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태양의 집이 편한 것도 아니고 할 일 없이 뒹굴 거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맨션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아마도 태양 혼자 있으면 밥 차려먹지 않고 아무거나 시켜먹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자장면이나 피자 같은 것을 시켜 먹겠지. 간혹가다 직접 밥을 차려먹겠지만 곧 귀찮다며 손을 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곁에 있어주는 거다. 어디까지나 동생을 보살피는 기분으로 옆에 있어주는 거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조금에 조금도 없다.
“사이가 좋네.”
“에?”
난데없이 껴드는 말에 도후와 태양은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손에 턱을 댄 채로 무끄러미 이쪽을 쳐다보는 태유가 보였다.
“두 사람 굉장히 사이가 좋네?”
“앞으로 형이 될 사람이니까요.”
“그런가. 형이 될 사람인가. 하지만 나도 태양이한테는 형이었잖아?”
태유의 말에 태양은 ‘뭐, 그건...’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형이라는 존재를 삼으라 하면 아무래도 도후보다는 태유 쪽이 더 적합했다. 아무래도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사람인데다 학생 때에는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멋대로 공부를 한다면서 태유의 옆에서 빠져나갔을 때에는 정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나 힘들어했으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역시 그때 빨리 그 쪽에서 벗어난 것은 잘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태유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태유가 이쪽을 얼마나 신경썼는지를 알고 있으니 말이다. 딱히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태양은 고기를 들어 태유의 그릇에 올리려 했다. 그 전에 태유가 빠르게 먼저 말했다.
“입에 넣어줘.”
“네?”
“직접 입에 넣어줘.”
동시에 태유는 아-하고 입을 벌렸다. 그것에 태양은 눈을 깜박이다 태유의 입에 들고 있던 고기를 넣어주려 했다. 갑자기 옆에서 나타난 젓가락이 태유의 입에 김치를 구겨 넣지 않았다면 고기가 들어갔을 거다.
갑자기 입 안에 들어온 김치에 태유는 입을 다물었고 태양은 들고 있던 고기를 내려놨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도후는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맛있지? 고기만 먹으면 안 되지. 야채도 같이 먹어야지.”
도후는 양상추를 들어 태유의 그릇에 올렸다. 잔뜩 올리고는 ‘어서 먹어.’라는 듯 선량한 웃음을 짓는 것에 태유는 입에 들어온 김치를 천천히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맛을 음미하는 듯 눈을 감고 있던 태유는 천천히 눈을 떠서는 도후를 응시했다.
“그래. 꽤 맛있다.”
입술 한쪽을 올리며 웃음을 지는 태유와 그런 태유를 보면서 눈빛을 가라앉히는 도후. 알게 모르게 두 사람 사이의 알력이 느껴지는 것 같다. 서로 다른 타입이라 알고 지내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생각처럼 친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확실하게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껴들 수가 없었던 태양은 그저 고기만 열심히 먹었다.
금방 구운 것을 먹고 다시 고기를 올리며 굽기 시작하자 도후와 태유도 갈비를 먹기 시작했다. 먹는 동안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도후가 야채 같은 것을 들어 접시 위에 올려줄 뿐이었다. 그 행동을 보고 자극 받는 것이 있었던지 태유도 고기를 들어 태양의 접시 위에 올리곤 했다. 암만 먹어도 계속해서 접시 위에서 야채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둘이 야채를 주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태양은 고기만 공략했다. 2인분 가량을 먹어서 슬슬 속이 차는 것을 느낄 즈음 태유가 태양에게 권했다.
“우리. 술 마실래?”
“술이요? 저는 괜찮은데요.”
“그래? 도후 넌 어때?”
“..............아. 나는 술은....”
“좋다고? 알았어. 여기요.”
이쪽의 말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손을 들고 점원을 부리는 태유의 행동에 도후는 움찔했다. 말리려 했지만 그 전에 태양이 도후의 옷을 잡아당긴다.
“왜 그래요? 술 못 마셔요?”
“아니. 못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피곤해서 술이 몸에 안 받으면 마시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처리한다니. 네가 술을 얼마나 마신다고....”
“소주 7병 정도는 괜찮아요.”
고기를 뒤집자 치익-하는 소리가 난다. 태양은 금세 도후에게서 신경을 끊고 고기 굽는 일에 집중했지만 도후는 그리 할 수가 없었다.
소주 7병 정도는 괜찮다니. 소주가 무슨 음료수도 아니고. 그냥 음료수도 그렇게 마시면 배탈이 날 거다. 작작 마시고 적당히 고기를 먹은 후에 그냥 집으로 가자는 말을 하려는 순간 점원이 다가왔다.
“여기 소주 다섯병 우선 주세요.”
“알았습니다. 샐러드 더 가져다 드릴까요?”
“다 먹은 것은 더 가져다주세요.”
“알았습니다.”
점원이 물러나자 태유는 옷을 벗어 자리 뒤에 넣으면서 말했다.
“술 마시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지 않아?”
“그러네요.”
“예전에는 둘이서 잘 마셨는데.”
“그랬죠.”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태양이지만 그런 태양의 반응에 도후는 기가 막혔다.
전이라면 고등학교 시절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때부터 술을 마셨단 말인가.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케케묵은 구시대적인 발상을 하면서 얼굴을 굳히고 있으려니 태유가 도후를 쳐다보며 묻는다.
“그쪽은 술 잘 마셔?”
“술은 그럭저럭 먹는 편이야.”
태유의 앞이기 때문에 술을 못 마셔도 잘 마시는 척 해야 했다. 애써 허세를 부린다는 것이 전해졌을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태유는 도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럼 오늘 기대할게.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시자고.”
“차를 가지고 왔는데 술을 어떻게 마셔. 됐어. 나는 그냥 안 마시고....”
“뒤에 모텔있잖아. 거기서 자고 일어나면 될 거 아냐. 오늘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내가 쏘는 거라니까.”
태유는 들고 있는 젓가락을 흔들면서 그리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렇게까지 술을 사려 하다니. 정말 좋은 녀석이잖아.’라고 말이 나올만한 패턴이지만 도후는 그렇지 않았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안 좋은 술버릇까지 있는 마당에 태유의 모든 말이 얄밉게만 들린다. 저 자식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같은 계열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얼굴을 모르는 상대에 대한 소문도 자주 듣게 된다. 건너 건너로 이쪽의 술버릇이 어떻다는 말을 듣고는 일부러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지도 모른다. 도후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술이 나오면 마셔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안 마시자니 저 태유라는 녀석이 독사처럼 물고 늘어질 것 같은데. 고민으로 머리가 뽀개질 무렵 허벅지 부근으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눈을 내리자 허벅지 가운데에 태양의 손이 닿아있다.
아니. 왜 갑자기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한 도후는 얼굴을 들어 태양을 쳐다봤고 눈이 마주치자 태양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 도후는 치부를 들킨 듯 한 기분이 들어 슬그머니 얼굴을 내렸다. 서먹한 공기가 그들 사이를 감돌았다. 그 때 즈음 점원이 주문한 소주를 들고 나타났다.
“여기에 있습니다.”
술을 내려놓은 여자는 새로 내온 반찬을 위에 올려놨다. 절반쯤 먹은 것도 다시 새것으로 갈아줘서 순식간에 처음 찬을 받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도후는 젓가락을 들어 샐러드를 비비기 시작했고 태유는 당연한 듯 병을 땄다.
“자. 태양이 먼저 받아라.”
“제가 먼저 따를게요.”
“괜찮아. 내가 너 오랜만에 봐서 따라주고 싶어서 그래.”
태유의 말에 태양은 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들었다. 그런 태양의 잔에 소주를 따른 태유는 이번에는 도후를 쳐다봤다. 막 샐러드를 입에 넣으려던 도후는 반짝이는 태유의 눈빛을 보고는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자. 너도 받아야지.”
“나는 괜찮은데....”
“이쪽이야 말로 괜찮으니까 염려 말고 한잔 받아. 많이 마시면 모텔에서 자고 가자니까.”
이 녀석 정말 집요하게 군다. 안 받고 있으면 계속해서 달라붙어서 술을 따르려 할 것이다.
옆에 태양이 있으니까 거칠게 반응을 취하지 못하겠다. 짧은 한숨을 쉰 도후는 잔을 들었고 그 순간 내내 가만히 있던 태양이 손을 들어 슬그머니 도후의 손목을 잡았다.
“마시기 싫은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마셔요.”
태양은 도후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태양의 그 행동에 태유는 금세 재미없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쪽이랑 같이 술 마신 적 없어서 그래. 한 잔 쯤이야 괜찮지 않아?”
“차 몰고 와서 안 되요. 그리고 나 모텔 같은 데서 잘 못자요. 알잖아요?”
모텔에서 잘 마음은 없으니까 일부러 이 사람에게 술을 먹이지 말라는 거다. 사전에 확실하게 봉쇄를 하는데 그것을 두고 뭐라 할 수가 없다. 잠시 아쉬운 듯 한 표정을 지은 태유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잔을 위로 올렸다.
“그럼 우리끼리 마시지 뭐.”
“그렇게 해요.”
잔을 부딪친 태유와 태양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번에 다 마셨다. 입맛을 다신 태유는 이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너랑 마시니까 좋다.”
“그러게요.”
“요즘에도 술 잘 마셔?”
“전처럼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마셔요.”
“그렇긴 하겠다. 너나 나나 너무 일찍 술을 시작해서 평균보다는 월등하지.”
태유의 말에 태양은 한쪽 입술을 올렸다. 이도 저도 아닌 묘한 웃음이다. 그리 썩 좋게 느껴지지 않는 웃음을 짓는 태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채로 태유는 술잔을 들었다.
“어울려 놀았던 녀석들하고는 아주 연락 안 하고 있는 거냐?”
“몇 명은 하고 몇 명은 안 해요. 원래 찾아서 연락을 하는 성격이 못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나한테 연락 안 한건 너무했어. 너랑 내가 보통 사이도 아니었잖아.”
“형 생각은 때때로 했는데 연락을 안 한 것 뿐이에요. 잊지는 않았어요.”
“그 말 정말이야? 진짜로 하는 말이라면 좋겠는데.”
“만들어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가.”
태유는 얼굴을 아래로 내리며 후후-하고 웃었다. 다른 때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웃음이다. 쑥스러워 한다고 해야 하나 기뻐한다고 해야 하나. 태유가 어떻다-라는 식으로 확실하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 수줍게 웃는 녀석은 확실히 아니었다.
태유와 태양은 도후는 완전히 잊은 듯 자기들끼리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듣기에 아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는 거니 할 말이 많은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쪽을 너무 찬밥 취급하는 것 같다. 도후는 계속해서 샐러드를 파면서 태양의 얼굴을 힐긋-하고 쳐다봤다. 벌써 소주 한 병을 다 비워가면서도 태양의 얼굴색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태연하기만한 얼굴을 하고 행동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술 정말 세구나. 새삼스러운 것을 알게 된 도후는 어쩐지 태양이 낯설게 느껴졌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전에 담양공고에 갔을 때 어떻게 빠져나왔어? 선생들이랑 경찰한테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면서?”
“그냥 각목 몇 번 휘둘렀더니 알아서 피하던데요? 총을 꺼내긴 했어도 정말 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멈추라고 말해도 그냥 담 넘고 튀었죠. 그러다가 근처에 오던 택시 잡아타고. 그랬더니 돈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에 내려서 걸어서 집까지 왔죠.”
“너 그 때 길 잃었다고 했잖아.”
“그래서 40분 거리 2시간동안 뱅뱅 돌았어요.”
“나한테 전화를 하지 그랬어?”
“미처 생각을 못 했던 거죠.”
“광식이 결혼했다더라. 유치원에서 일하던 여자하고.”
“그 녀석 그쪽에 가있잖아요?”
“손가락 하나 내주고 나왔어. 요즘도 아직 그런 원시적인 걸로 탈퇴를 하는 모양이더라.”
“손가락이라....뭐하고 먹고 산데요?”
“작은 음식점하나 낸다고 하던데. 왜 그쪽에서 나오면 다들 음식점을 하는지 모르겠어. 십중팔구는 그거더라고. 그렇다고 그 녀석이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잖아.”
“다시 그 쪽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죠.”
“그건 그렇지만....”
그쪽이라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걸까? 흔히들 말하는 어둠의 세계라는 것 말이다.
태양과 태유의 말은 점점 이차원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처음 듣는 생소함은 없었지만 너무도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아, 그거.’라는 식으로 말을 하니 차마 끼어들 수가 없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같은 기분이 된 도후는 고기를 뒤집어 한쪽에 쌓아 놨다. 어느 순간 도후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고기를 굽고 자르고 구석에 쌓아두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와서 이러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뭐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하고 생각한 채로 무뚝뚝한 얼굴로 고기를 굽는 일에 집중하려니 갑자기 다리로 이상한 것이 느껴진다. 표정을 굳힌 도후는 눈을 돌려 태양을 쳐다봤다. 잔을 기울어 술을 마시는 태양은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 지금 술에 취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발바닥으로 남의 다리를 쓰다듬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도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앉은 태유를 쳐다봤다. 태유가 마침 고기를 드는 순간 도후는 아래로 손을 내려 태양의 허벅지를 밀었다. 그러자 태양이 더 발을 쓰다듬었다.
앗! 그러지 말라니까! 이쪽은 건강한 남자라서 그렇게 하면 자극을 받는..!
“왜 그래?”
“응?”
당황한 도후는 급히 얼굴을 들어 태유를 쳐다봤다. 손에 턱을 괸 상태로 태유는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곤란한 얼굴이야?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있고 말고. 지금 댁의 후배가 아래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단 말이야. 솔직하게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도후는 그저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그것에 태유의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도후의 속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옆으로 얼굴을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앞으로 우리 종종 촬영장에서 만나자.”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없는 거잖아.”
“너 유명하잖아. 네가 누구랑 찍고 싶다고 하면 스폰서 쪽에서 맞춰줄 거 아냐. 이렇게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은 사이니 친구라고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같이 유명해 지자고.”
지금 태유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유명하기로 따지면 그쪽도 할 말이 없다. 특유의 중성적인 이미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다 소문으로는 정말 대단한 뒷배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 주제에.....
한번 입을 열면 이런저런 말이 다 나올 것 같았다. 태유에게 유감이 쌓여 있는 상태였던 도후는 옆에 있는 태양을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른 거는 다 넘기더라도 태양의 앞에서 모델 일 관련으로 이상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도후는 냉정한 눈으로 태유를 쳐다봤다. 이쪽을 보면서 빙글거리고 웃는 것이 자신의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보인다. 단지 흥분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저러는 거다. 그런 것에 휘말리면 그건 바보다. 도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만 화장실에 다녀올게.”
“화장실은 앞으로 죽 나가서 카운터 오른편에 있어.”
친절하게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는 태유지만 그런 태유를 쳐다보는 도후의 표정은 딱딱하기만 했다. 흘깃 쳐다보는가 싶더니 아무 말 없이 가 버리는 것에 태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보다 훨씬 더 유명하면서 저렇게 맨 얼굴로 가는 건가.”
중얼거린 태유는 술을 마시며 태양을 쳐다봤다. 본인은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분위기 쇄신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태양은 그 페이스에 마냥 넘어가주지 않았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태유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왜?”
“저 사람이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저 사람이라고 부르네. 형이라고 안 하는 거야?”
“아직 딱 정한 호칭은 없지만 형이라고 부를 때도 있어요. 그보다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봐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아무 일이 없는데 저렇게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태양의 말에 태유는 고기를 누르고 있던 젓가락을 떼고 얼굴을 들었다.
“도후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무슨 말이에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요.”
딱 잘라 말을 하면서도 태양의 손은 잔을 잡고 있었다. 비단 정곡을 찌른 것이 아니더라도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건드리니까 괜히 그것을 숨기려 드는 것이다. 태유는 소주병을 들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륵-하고 잔에 차는 술을 쳐다보며 태유는 물었다.
“왜 먼저 전화하지 않았어?”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요. 형도 100일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고 했잖아요.”
“말만 그렇게 한 거라는 거 알고 있잖아. 내가 너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잖아?”
“다 지나간 이야기 아니었어요?”
“지금도 널 좋아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지나치는 듯 무심한 태유의 물음에 식탁에 잔을 내리던 태양의 손이 움찔하고 떨린다. 그런 태양의 반응을 살피며 태유는 다시금 물었다.
“지금도 좋아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처음보다 훨씬 또렷해진 물음에 도후는 숨을 삼켰다.
이건 정말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려는데 사람들이 너무 쳐다봐서 얼굴을 가릴 것이 필요해졌다. 화장실에서 한참 일 보고 있는데 도촬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는데 설마하니 태유와 태양이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줄은 몰랐다.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도후는 자리에서 뜨지 않고 낮은 칸막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숨을 죽였다. 저 바깥쪽에 있는 종업원이 힐긋 거리며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후는 쪽팔림을 감수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태양의 목소리가 들린다.
“장난 하지 말아요.”
“장난 아니야.”
“그런가요?”
장난이 아니라는 말도 태양은 심드렁하게 받아 넘겼다.
고기를 두어번 뒤집더니 바로 입에 넣으며 우물거리며 씹는 것에 태유는 손에 턱을 괴고는 태양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넌 여전하구나. 태연한 얼굴로 잘도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그건 형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왜 마음에 들지 않아?”
쉽게 먹을 수 없는 고급 갈비를 앞에 두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안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물을 마시면서도 다른 쪽을 쳐다보기만 하는 태양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태유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나 얼굴 괜찮잖아. 여자 대신이라고 생각해도 돼. 너라면 그렇게 여겨져도 괜찮아.”
“난 예쁜 얼굴 싫어요. 잘 생긴 얼굴이 좋아요. 거기다 동족을 핥아주는 짓 따위 하기 싫어요.”
내내 느긋한 웃음을 짓고 있던 태유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그런 태유를 눈앞에 두고도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긴 침묵이 생겼다. 태유는 아래로 눈을 내리며 다 익은 고기를 들어 태양의 접시와 자신의 접시에 덜어냈다.
“나한테서 너와 같은 부분이 느껴져?”
“형은 나랑 같아요. 완전히 똑같은 냄새가 나요. 그 냄새가 정말 싫어요.”
태양도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올려진 고기를 들었다 놨다. 의미가 없는 몇 번의 행동을 하다가 젓가락으로 고기 가운데 부분을 꾸욱-하고 세게 눌렀다.
“이제 겨우 자리 잡아가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도 이제 재혼하면 나도 마음 속에 있는 짐이 어느 정도 줄어드는 거죠. 이제부터 진지하게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할 거예요. 어렸을 때처럼 되는 대로 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살아봤자 아무것도 못 얻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형도 이제 그만 하지 그래요.”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어. 뭘 그만 하라는 거야.”
“나도 그쪽에서 아주 떨어진 거 아니에요. 왜 자꾸 사람 뒤를 캐는 거예요.”
“알고 있었어?”
“규환이 형이 알려줬어요. 형이 사람 시켜서 내 뒤 캐고 있다는 거.”
“규환이 그 자식...”
“규환이 형도 다 형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괜히 전처럼 가게 쳐들어가서 물건 깨부수지 말아요. 전에 그것 때문에 리모델링 하느라고 돈 몇 천 들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알고 있었어?”
“그럼. 모를 것 같아요? 물건 부수고 싶으면 돈 배상을 해주던가. 돈도 많이 벌었을 것 같은데 가게 그 꼴 만들어 놓고 그냥 가면 안 되죠. 규환이 형도 요즘 장사 안 돼서 힘든 것 같던데.”
태유는 아래로 얼굴을 내려 식탁만 쳐다보고 있었다. 규환이나 부순 가게 이야기가 나오니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한참동안 그러고 있나 싶더니만 갑자기 얼굴을 들고 이쪽을 쳐다본다.
“너 때문이야.”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싶었다.
태양은 쓴웃음을 지으며 잔에 소주를 따랐다.
“또 남 탓할 겁니까?”
“정말 너 때문이야. 네가 있으니까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어. 다시 해봐.”
“뭘요?”
“전처럼 이걸로 해보라고.”
태양은 태유가 내민 담배를 받아들지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에 태유는 쓰고 있던 하얀 모자를 벗고 손으로 떡이 진 머리를 가볍게 흩트렸다. 금세 머리가 엉망이 되지만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태유는 가만히 이쪽을 쳐다보기만 하는 태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태양의 문신이 새겨진 귀를 보였다.
“지워야지. 너를 내 몸에서 말야.”
태양은 동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귓불에 있는 문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것에 태유는 다른 손으로 가슴팍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에 길게 연기를 토해낸다. 그리고는 다시금 태양에게 불이 붙여진 담배를 내밀었다.
“한번만 누르면 돼. 그러면 다 끝나는 거야. 나도 너를 지울 테니까. 해봐.”
태양은 말없이 태유가 내민 담배를 쳐다봤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담배를 쳐다보는가 싶더니만 아래로 내려가 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태유의 손에서 담배를 가지고 가는가 싶더니만 바로 잔에 남아있던 물속에 담배를 거꾸로 집어넣었다.
“귀에 구멍이나 뚫어요. 맨 살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붙어 있던 불이 꺼졌다. 그것에 태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올렸다. 쓴웃음을 짓던 것도 잠시 태유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태양아. 나는...”
“한번만 더 그래 봐요. 다시는 안 볼 테니까. 고기나 먹어요.”
내내 무표정을 하고 있어서 정말 관심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태양은 이쪽의 행동에 화가 났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진짜로 화를 내는 거다. 그래도 아직은 태양이 자신을 생각하면서 화를 내주기도 하는 구나. 태유는 계속해서 고기를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전부터 너는 그랬지. 내가 이상한 짓을 하는 걸 제일 싫어했어.”
“지금도 싫어요. 끔찍하니까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지 말아요.”
“끔찍하기는 전에는 담배빵도......”
“고기 먹는데 과거 이야기 꺼내지 맙시다.”
태유의 말을 중간에서 딱 자른 태양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에 태유는 손을 뻗어 태양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를 가?”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정말이야?”
“왜요? 화장실 간다면서 다른 곳에 가 버릴 것 같아요?”
“조금 전에 내가 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나서 그냥 가 버릴 수도 있잖아.”
“안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태양은 손에 힘을 주고 태유의 손가락을 떨어뜨리려 했다.
“태양아. 키스 해줘.”
태유의 말에 태양은 바로 그를 쳐다봤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태양의 시선에도 태유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한 번만 해주면 나도 잊을게. 그러면 되잖아.”
“전에도 그런 말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전에는 애초에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으로 말만 한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정말로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질게. 그리고 전에는 입술이 아니라 뺨에다 한 거였잖아.”
“입술이었어요.”
“아냐. 뺨이야. 입술 바로 옆에 여기다가 했잖아.”
태유는 손가락으로 입술 끝 바로 옆 부분을 눌렀다. 그런 태유의 뻔뻔한 행동에 태양은 위로 눈을 들었다.
태유의 말에 딱히 화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곤란한 것도 아니었다. 눈을 위로 들고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던 태양은 식탁에 손바닥을 누르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태유에게 입을 맞췄다.
태유의 입술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그리고 기름기에 젖어 있었고 술 냄새도 조금은 났다. 입술만 누르고 있으려 했더니 태유가 잽싸게 입을 벌리려 한다. 혀가 달려들 것 같은 예감에 태양은 그쯤 하라는 듯 바로 얼굴을 뗐다. 그런 태양의 행동에 태유는 굉장히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충 만족한 얼굴을 했다.
“부드럽네.”
“그러게요.”
나름대로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것이 느낌은 꽤 좋았다. 아주 오래전에 태유와 했던, 입맞춤을 가장한 뺨에 뽀뽀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태양은 아무 생각 없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고 그런 태양의 행동을 빤히 쳐다본 채로 태유는 말했다.
“나한테 연락 자주 해야 해.”
“알았어요.”
태양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태유는 손을 놔줬다. 의자 뒤로 몸을 붙인 태유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것을 확인한 태양은 몸을 돌려 복도를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던 태양은 저 카운터 뒤에 있는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도후다. 꽤 폼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태양의 눈에는 별거 없어 보인다. 그 앞으로 걸어가 옆으로 얼굴을 숙인 채 빤히 쳐다보자 도후가 마지 못 해 눈을 들어 태양을 흘깃-하고 쳐다본다. 그리고는 옆으로 얼굴을 돌려버리는 것에 태양은 손을 들어 도후의 턱을 잡았다.
“다리 저리죠?”
내심 움찔한 도후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별로.”
“저리면서 안 저린 척 하지 말아요.”
“읏!”
태양은 다리를 들어 도후의 무릎을 살짝 쳤다. 그러자 겨우 서있는 상태였던 도후의 몸이 옆으로 크게 비틀거린다. 가까스로 넘어질 뻔 한 것을 막은 도후는 얼굴을 붉힌 채로 태양을 노려봤다.
“너 정말...!”
“남 이야기 엿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흠흠..”
태양의 말에 도후는 슬그머니 얼굴을 내렸다. 나름대로 안 들키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민망했던 도후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섰다. 그런 도후의 모습을 시종 웃는 얼굴로 쳐다보던 태양은 턱으로 바깥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들어가서 내 가방 좀 가지고 와줘요.”
“왜? 가려고?”
“가야죠. 계속 있어봤자 당신 예민한 상태로 있을 거잖아요. 고기도 다 먹었으니 더 있을 필요가 없죠.”
태양의 그 말에 도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다.
“설마해서 묻는 말인데....너 정말 고기만 먹으려고 여기에 온 거냐?”
“그러면 고기 먹으러 오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요?”
“.........................”
정말 사람 할 말 없게 만든다. 저런 태연한 얼굴이라니. 태유와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내내 긴장하고 있던 이쪽이 바보 같아지잖은가.
인상을 쓴 채로 빤히 쳐다보려니 태양이 바람을 불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워냈다. 가볍게 고개를 턴 태양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아-하며 위로 얼굴을 들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이 뺨을 스치고 뒤로 넘어가는 것에 일순 시선이 빼앗겼다. 멍하니 태양의 얼굴을 쳐다보던 도후는 아차 싶어서 벽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바로 다리에서 이상 신호가 왔다.
“....쳇.”
조금만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다리가 이렇게나 저리다. 역시 나이 먹는 것은 속일 수 없는 거라면서 인상을 쓰려니 팔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눈을 내리자 이쪽의 팔을 잡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왜 그러나 싶어 도후는 투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가방 가지고 오라며.”
“언제 일어나서 화장실에 들어왔어요?”
“응?”
“선배랑 내 이야기 끝까지 안 들었나 봐요?”
물음에 도후는 움찔했다.
엿들은 것에 대해서는 더 말을 안 해줬으면 하는데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잘도 툭툭 건드린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계속 잡아떼는 것도 이상하다 싶었던 도후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끝까지 못 듣기는 했지만....”
“태유 선배랑 나 키스 했어요.”
머리 한쪽이 텅-하는 소리를 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도후는 눈을 크게 뜨고 태양을 쳐다봤다. 그런 도후의 얼굴을 눈앞에 하고 있음에도 태양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지. 뽀뽀라고 해야 하나.”
그리 말하고는 입술을 비틀어 올린다.
태유와 뽀뽀를 했던 키스를 했던 그건 이쪽 알 바가 아니다. 아니었지만 왜 이렇게 속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주먹만 한 뭔가가 가슴을 치고 목구멍으로 넘어올 것 같다. 울렁증을 동반한 분노가 명치를 호되게 후려쳤을 때 도후는 태양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안쪽에 있는 화장실 칸으로 집어던지듯 밀어 넣었다.
벽에 부딪쳤으면서도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얼굴을 들었다. 그런 태양의 멱살을 다시 잡은 도후는 얼굴을 내려 태양의 입술을 눌렀다. 따닥-하고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도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 문대는 일에 열중했다. 처음에는 태양이 입을 다물려 하는 것에 괘씸한 마음이 들어 턱을 잡고 일부러 벌리게 했다. 그러자 태양의 입이 천천히 벌려진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도후는 득달같이 태양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가 느껴졌다. 동시에 알콜 냄새가 났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도후는 태양의 얼굴을 양 손으로 단단히 잡은 채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조금 더 결합이 깊어진다.
“.....웁...”
입안으로 들어와 자기 세상인 것처럼 날뛰는 도후의 혀에 태양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웬만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도후가 너무 강하게 빨아들여서 혀뿌리가 아팠다. 거기다가 닿아있는 하반신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몸을 비벼대는 것이 이대로 계속 가면 위험하겠다 싶었던 태양은 도후의 허리를 잡고 뒤로 밀었다. 처음에는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도후지만 계속해서 허리를 밀어내자 버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떨어뜨린 그는 왜 밀어내냐는 식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혀를 내밀어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핥은 도후는 다시금 얼굴을 내려 입을 맞추려 했다. 그것에 태양은 옆으로 얼굴을 치우며 기습공격을 하는 도후의 턱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왜 이래요?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시끄러워.”
손바닥으로 입이 눌려 웅얼거리며 말을 하면서도 도후는 태양의 손을 잡고 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다시금 태양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쪽 거리더니 다물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도후의 혀에 태양은 오른쪽으로 얼굴을 젖히며 말했다.
“그만 해요. 이러지 말아요.”
도후는 태양이 사라진 곳에 얼굴을 고정하고 있었다. 반쯤 혀를 빼어 물고 있던 그는 붉은 혀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 태양의 얼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며 말했다.
“도발했잖아. 안 그래?”
그리 말한 도후는 이를 갈았다.
웃는 얼굴로 태유와 뽀뽀를 했다는 말을 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왜 나는 태유와 태양이 입을 맞췄다는 것에 이렇게 흥분을 하는 거지? 원래 태양은 동생일 뿐이잖아. 그래. 원래 동생하고는 입을 맞추지 않는 거잖아. 그런데 이쪽은 벌써 입을 맞췄어. 그럼 다 끝인 거지. 그래 그런 거야! 다 끝인 거야!
뒤죽박죽으로 머리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억지로 합리화시킨 도후는 태양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잡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이리로 와. 순순히 입술이나 내 놓으라고.”
“......................”
평소와 달리 사내 냄새를 물씬 풍기는 거친 도후의 모습이 의외였던지 태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순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태양은 도후의 목을 양손으로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쪽. 하고 태양의 입술이 닿는다. 태양에게 입술을 내놓으라 했던 도후지만 막상 태양이 이런 식으로 귀엽게 입맞춤을 하니 멍해져 버렸다. 눈을 꿈뻑거리며 금세 순한 양이 되어버리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입술을 올려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도후의 입술을 핥았다.
할짝.
“.....읏!!”
태양의 혀가 입술에 닿는 순간 도후는 놀라 주먹으로 입술을 누르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태양이 그런 도후의 어깨를 손으로 잡아당기며 다시금 입을 맞춘다.
도후와 달리 무작정 혀를 밀어 넣으려 하지 않았다. 혀를 깨물고 핥아대는 태양의 행동에 도후는 당황했다.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정말 안 되는데.
조금 전 자신이 태양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리지 못하는지 당황한 도후는 자세의 역전이 되어 벽에 붙어버린 상태로 태양의 귀여운 입맞춤을 받게 되었다.
할짝. 할짝. 할짝.
계속해서 입술의 표면을 혀로 핥기만 한다. 그때마다 도후는 눈을 내려 태양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움직이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간간히 눈을 든 태양이 이쪽을 쳐다보며 눈꼬리를 살짝 휘었을 때 하반신으로 직방으로 자극이 왔다.
읏! 이제는 더 못 참겠다!!
눈을 질끈 감은 도후는 태양의 가는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똑똑.”
“헉!!”
그대로 태양을 끌어안고 짐승 같은 입맞춤을 하려 했다. 화장실이고 뭐고 그냥 깔고 누워버리려고 했다. 그 순간에 들리는 똑똑-이라는 인위적인 소리는 거의 상실되어 있던 이성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태양의 몸을 끌어안은 상태로 도후는 얼굴을 들어 바깥을 쳐다봤다. 그러자 화장실 바깥문에 등을 기대고 있는 태유가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태유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더 하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자. 다른 사람들이 안으로 못 들어오고 있잖아.”
태유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던 도후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곧 그의 말을 접수하고 이를 악물었다.
“제길....”
도후는 어렵사리 태양의 몸을 둘러있던 팔을 풀었다. 그러자 뒤로 한걸음 물러난 태양이 손을 들어 팔을 주무른다. 그 행동에 도후는 화장실 벽에 손을 댄 채로 한 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왜 그래? 부딪쳤어?”
“그건 아니고 그쪽에서 너무 격렬하게 끌어안아서 팔이 좀 아프네요. 멍이 들었나.”
.........괜히 물었다. 차라리 말을 말 것을.
도후는 옆으로 눈을 내리고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있으려니 저 멀리로 출장 나가 있던 현실감각이 슬슬 돌아온다.
나 지금 뭐하는 거지. 왜 태양이 태유와 입을 맞췄다는 것에 흥분을 해서 태양에게 입을 맞춘 거야. 지금도 생각날 만큼 태양을 거칠게 끌어안고 무작정 그의 혀를 빨아들였다. 그러다가 태양이 입을 맞춰주는 것에 멍해졌지.
.......나 정말 왜 이러냐. 지금 저 앞에는 태유도 있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도후는 차마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한숨만 푹푹 쉬는 도후의 모습에 태유는 눈을 돌려 태양을 쳐다봤다. 태양은 실의에 빠진 도후를 쳐다보고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태양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위로 올라가있는 것을 확인한 태유는 ‘미치겠군.’라고 중얼거리며 문에서 등을 뗐다.
“빨리 나와. 바깥에 있는 사람들 안에 들어와야지.”
“화장실 오려는 사람들 많아요?”
“그보다는 유명한 유도후를 구경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거지. 너무 늦게 나오면 큰 거 본다고 오해 받는다? 인터넷의 먹이감이 되고 싶지는 않겠지?”
윙크를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태유에 도후는 안색이 싹 변해서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성큼성큼 걸어가 태유의 앞에 있던 문을 활짝 열고 도망치듯 바깥으로 나가 버리는 것에 태양도 좁은 칸막이 안에서 나왔다. 태양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려 하자 태유가 발을 들어 앞을 막는다. 그것에 태양은 얼굴을 돌려 태유를 쳐다봤다.
“좋았어?”
“뭐가요?”
“도후하고 말야.”
“방해 받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죠.”
“전에는 안 그랬잖아. 남자 같은 것에 흥미가 없는 거 아니었어?”
“흥미가 없었는데 저 사람은 재미있어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어느 부분이 널 이렇게 할 정도로 재미있는 걸까? 난 잘 모르겠는데?”
“잘 모르는 편이 더 좋아요. 난 다른 사람들하고 저 사람의 똑같은 부분을 보고 환호하고 좋아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태양은 태유를 똑바로 바라봤다. 기죽은 구석 하나 없이 당당하게 바라보는 태양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구기고 있던 태유는 벽에서 등을 뗐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입을 맞추려는 것에 태양은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입술을 막는 태양의 행동에 태유는 바로 불만에 찬 표정을 지었지만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속삭였다.
“하지 말아요. 아까로 마지막이에요.”
“소독해주려는 거야.”
“소독은 방금 받았어요.”
태유의 갈색 눈동자가 굳어버린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쳐다보는 태유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태양은 어깨를 으쓱이며 밖으로 나갔다.
과연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고 싶은 건지 그게 아니면 화장실에 들어간 도후와 태유를 구경하기 위해서 몰려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은근슬쩍 핸드폰을 들고 오는 것을 보아하니 도후와 태유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온 모양이다. 여자들은 그렇다 쳐도 남자들까지 저렇게 화장실 앞에 몰려들어 있으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점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많이 힘들어 보인다. 그냥 빨리 나가는 편이 이 가게를 위하는 일이 될 것 같다며 태양은 몸을 돌렸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온 태양은 도후가 건네는 잠바를 입고 가방을 들려 했지만 도후는 내민 태양의 손을 흘겨보기만 할 뿐 가방을 내놓진 않았다. 묘하게 심술궂은 얼굴이 되어 다른 쪽을 쳐다보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도후의 눈동자 안쪽에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뒤를 쳐다보자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태유가 보였다. 도후가 죽일 듯 노려보나마나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태유는 두 사람 앞에 섰다.
“두 사람은 같이 돌아갈 거지?”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은데요. 선배도 같이 차에 타고 가요.”
“됐어. 나는 아는 녀석더러 데리러 오라고 할게.”
“그래요? 그러면 우리 먼저 갈게요.”
태양의 말에 태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아.”
“네?”
왜 그러나 싶어 얼굴을 드는 순간 볼에 말캉한 것이 닿는다. 볼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는 태유의 행동을 막을 새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려니 천천히 얼굴을 뗀 태유가 얼굴 바로 앞에서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는다.
“오늘 모처럼 같이 술 마셔서 좋았어.”
“..........그래요.”
대답을 하면서도 옆에 있는 도후가 신경 쓰인다. 아니나 다를까. 도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또 다시 삼파전이 벌어질 것 같아 태양은 도후의 팔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도후지만 그의 눈은 태유를 향해 있었다. 당장 달려들어 주먹을 날릴 것 같은 기세의 도후와 달리 태유는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이를 간 도후는 태양의 손을 뿌리치고 먼저 앞으로 걸어가 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올라갔다.
옆으로 돌아가 앞자리에 들어간 태양은 가방을 뒷자리에 집어던지는 도후의 행동을 한쪽 눈으로 쳐다보며 안전벨트를 맸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눕히고 배에 손을 올리고 있자 시동을 걸고 바로 차가 움직인다. 도로로 빠져나가는 차의 움직임은 꽤 거칠었다. 이거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화났어요?”
태양의 물음에 도후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앞만 보고 운전을 하는 것에 태양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그 순간 차가 옆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몸이 훽-하고 쏠릴 정도로 세게 차를 모는 것에 태양은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차 천천히 몰아요. 나 토해버릴 거예요.”
역시나 반응이 없다. 앞만 쳐다보고 있는 도후의 미간 사이에 진한 주름이 생겨진 것에 태양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눕힌 태양은 놀리듯 말했다.
“내가 태유 선배하고 키스한 게 그렇게 화나요? 하지만 혀는 안 집어넣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순간 도후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마침 보도 쪽에 붙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쪽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어서 앞으로 훽 넘어가는 꼴을 막을 수 있었던 태양은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있는 도후를 흘겨봤다.
“차 잘 몰라고 했죠? 나 당신하고 같이 죽기 싫어요.”
“.....강태양.”
“왜요? 이제야 나랑 말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도후를 쳐다보는 태양은 웃고 있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에 조금도 뉘우치거나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뺀질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는 것에 괜히 허탈해진다. 긴 한숨을 쉰 도후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관두자.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말이 있으면 확실하게 하지 그래요? 그런 식으로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속 터지는 건 결국 당신뿐이에요.”
또 무슨 시비를 붙이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정말 너 상대할 기운은 없으니까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주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의 눈동자가 너무도 진지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요. 이런 식으로 무시하고 당신 혼자서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나도 마음에 안 드니까.”
진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얼굴을 굳힌 채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도후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아니. 왜 저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는 거란 말인가. 애초에 저런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어이없는 일을 당해서 화가 난 이쪽이 화를 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나저나 어떻게 된 게 선배라는 사람하고 입을 맞추고 뺨에 뽀뽀를 한단 말인가. 여기가 외국도 아니고. 아니. 이제 외국도 그런 식으로 인사는 안 하겠다. 그런 주제에 저런 뻔뻔한 얼굴이라니. 저런 식으로 이쪽을 쳐다봐서도 안 되는 거 아니야?
“난 말이지.”
“그래요. 말을 해봐요.”
“....................”
“왜 말을 안 해요?”
멍석이 깔아지면 아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란 말인가. 태양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도후는 갑자기 ‘내가 왜 그런 문제를 두고 화를 내야 하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태양의 뭐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태유와 입을 맞추고 그 녀석이 태양의 뺨에 입을 맞췄다는 것에 이렇게나 예민한 반응을 취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건 벌써 몇 번이나 고민을 하고 생각을 했던 문제다. 그때마다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이 또 있을까. 도후는 결국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힘껏 운전대를 후려쳤다.
빵-
하필 친 곳이 여기일게 뭔가. 큰 소리가 나는 것에 움찔한 도후는 얼굴을 돌려 태양을 쳐다봤다. 팔짱을 낀 태양은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표정으로 ‘뭘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확-하고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다.
“왜 태유하고 입을 맞춘 건데! 넌 아무하고나 입을 맞추냐?!! 남자하고도!!”
“태유 선배하고는 원래 사이가 좋았어요. 거기다 입술이 아니라 그 옆에 했거든요?”
“그게 그거지! 얼굴 조금만 틀면 거기가 입술이잖아! 넌 사이가 좋으면 아무나하고 입을 맞추는 거냐! 그래도 되는 거야?!”
“그렇게 하지 말아요?”
“그래! 하지마!!”
“알았어요. 안 할게요.”
“뭐?”
“앞으로 태유 선배하고 입맞춤 안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된 거죠? 그렇죠?”
“......................”
“대답을 해야죠. 그러면 된 거냐고요?”
“으...으응.”
“그러면 여기에서 이러지 말고 빨리 차 몰아요. 졸려서 집에 들어가서 바로 자고 싶으니까요.”
“아. 그래.”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끄덕인 도후는 태양이 시키는 대로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였다. 도로 가운데로 돌아온 차는 잘 움직였다. 차는 잘 움직였지만 그 차를 운전하는 도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어쩐지 멍한 상태인 것 같다. 그런 도후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본 채로 태양은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애초에 내가 누구하고 입을 맞추던지 상관하는 댁이 더 이상하다는 거 알아요?”
도후의 손이 움찔하고 흔들린다. 운전대를 잘못 잡아서 크게 차가 흔들리거나 브레이크가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몰고 간다. 그것에 입술을 살짝 올린 채로 태양은 누구 들으라는 듯 말했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네.”
태양의 말에 도후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태양에게 무슨 말을 하기에는 지금 도후는 심적으로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올라오려고 한다. 그것을 꾸욱 참은 도후는 그냥 운전에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열심히 차를 몰았다.
차를 세우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10층을 누를 때까지도 태양과 도후는 둘 다 입을 다물고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좁고 밀폐된 공간에 있기 때문일까. 괜히 옆에 있는 태양의 존재가 더 잘 느껴지는 것 같다. 목이 바싹바싹 타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말야.”
“왜요?”
기다렸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에 도후는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그래요?”
투명스럽게 대꾸한 태양은 그냥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더 집요하게 물어볼 것이지 뭘 저렇게 쉽게 포기하는지 모르겠다. 전에는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어서 이쪽의 말을 기어이 듣고 말았던 주제에 말이다. 속으로 투덜대고 있으려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태양은 먼저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후는 그런 태양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태양은 문 앞에 서서 열쇠를 들고 있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지 몇 번이나 열쇠를 집어넣고도 돌리지를 못한다. 술을 많이 마시더니 그것 때문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가. 먼저 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길게 한숨을 쉰 태양이 뒤를 돌아보며 들고 있던 열쇠를 내밀었다.
“문 좀 열어줘요.”
열어달라고 하는데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도후는 태양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 문 앞에 섰다.
처음에 열쇠가 들어가기는 했는데 이게 잘 돌아가지 않았다. 왜 이러나 싶어 도후는 손에 힘을 주고 계속해서 열쇠를 흔들었다. 달칵 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고 이마에서 땀이 촉촉하게 차오른다. 이거 낭패스러운데-하고 생각하는 와중에 태양의 체온이 느껴졌다. 한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떨어져서는 이쪽이 하는 행동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태양의 시선이 손등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점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숨을 쉴 수가 없어진다. 이마 가운데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잔뜩 인상을 썼다. 그렇게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고 난 후에야 달칵-하고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도후는 힘이 쫙 빠져서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준채로 피로한 얼굴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자. 들어가.”
“고마워요.”
태양은 도후가 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이 이 문을 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몸만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태양의 행동에 도후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며 혀를 찬 그는 열쇠를 끄집어내 한 손에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태양이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자 도후는 태양의 방으로 들어가 잠바와 셔츠를 벗고 옆에 있던 낡은 옷장을 열었다. 뒤적이려니 전에 입었던 츄리닝 바지가 없다. 빨아서 없는 건가. 도후는 그 안쪽에 있던 반바지와 폼이 넉넉한 셔츠를 꺼내 입었다. 대충 입으니 그럭저럭 맞는 것 같다. 그 상태로 밖으로 나가자 마침 태양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쪽이 멋대로 옷을 갈아입은 것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아무 말이 없다. 태양은 도후를 지나쳐 거실로 들어가서 맨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켜는 것에 도후는 슬그머니 그 옆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는 말없이 티비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을 봐도 티비에서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유명한 개그맨이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어도 그 뿐이다. 별다른 감상이 들지 않아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려니 태양의 시선이 느껴졌다. 도후는 최대한 태연하게 얼굴을 돌려 태양을 쳐다봤다.
“왜 그러는데?”
“안 씻고 그냥 옆에 앉는 거예요? 가서 씻고 와요.”
“........있다가 씻을 거야.”
고작 그런 걸 물어보려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거냐.
괜히 실망하게 된 도후는 입술을 씰룩이며 다시금 화면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 도후의 모습에 흐음-하는 소리를 낸 태양도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도후는 최대한 침착한 척을 하려 했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초조함이 전해진다. 달달 떨리는 다리라든가, 무릎을 건드리는 손가락에서 다 알 수가 있었다. 정말 속을 읽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다.
태양은 기다렸다. 도후가 먼저 말을 하는 순간을 말이다. 하지만 태양의 기대와 달리 도후는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꿨다. 채널을 계속 바꾸는 것이 꼭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계속 채널을 건드리면 결국 전기세만 많이 들게 마련이다.
전이라면 당장 도후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 들고 갔겠지만 지금은 그냥 도후가 하고 싶은 대로 뒀다. 인상을 쓴 채로 리모컨을 누르는 도후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태양은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몸을 반쯤 일으켜서는 도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도후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태양은 벌써 볼에서 입술을 떼고 한 뼘 정도 물러나 있었건만 도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마냥 굳어 있었다. 한참동안 의미 없이 움직이는 화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뻣뻣하게 굳은 목을 옆으로 돌린 도후는 태양을 쳐다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볼에 키스.”
“....뭐?”
“선배가 그렇게 한 거 신경 쓰고 있었죠? 이제 신경 쓰지 말라고 해준 거예요.”
차에서부터 지금까지 안절부절 못해하거나 괜한 말을 거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태유가 볼에 뽀뽀를 한 거나 입술에 입을 맞춘 것이 너무도 신경 쓰이는데 그것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기가 이상하니까 자꾸만 엇나가고 있었던 거다.
태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도후를 쳐다봤다. 도후의 검은 눈동자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것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태양은 도후의 목에 손을 감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나 아까 갈비집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마저 하고 싶은데.”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라니..”
아연한 듯 도후가 중얼거리는 순간 태양은 그의 뺨에 손가락을 대고 입을 맞췄다. 쪼옥-하고 길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맞춤에 도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닿은 입술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뜻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났다. 화장실에서 잡았던 태양의 허리가 얼마나 가는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반쯤 취해있는 상황에서 닿아있던 태양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얼굴을 아주 조금 떨어뜨리고는 슬며시 입술을 올리는 그 모습에 도후는 하반신에서 불끈-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제길..!”
바로 태양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입술을 눌렀다. 너무 급해서 처음에는 입술과 턱 사이에 부딪치긴 했지만 위로 올라가서 겨우 입술이 맞닿을 수 있었다. 도후는 그 즉시 태양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달다. 너무 달다. 조금 더 깊숙한 쪽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태양의 혀를 잡아 쪽쪽 빨았다. 태양의 혀가 움직이면서 반응을 보이자 더더욱 흥분하게 된다. 태양의 얼굴을 단단히 잡고 조금 더 깊숙이 혀를 밀어 넣으려 하자 태양이 주먹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 떨어져 보라는 그 신호를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랬다가는 화를 낼 지도 몰랐다. 도후는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아쉽다. 다시금 입을 맞추려 하자 태양이 그런 도후의 턱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잠깐..”
“잠깐은 무슨...”
그쪽에서 먼저 시작했으면서 이제와 그만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아직 멀었다면서 도후는 태양의 티를 길게 늘여서 드러난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쭈욱-하고 입술을 문지르다가 입을 벌려 살을 한뭉큼 깨물었다. 그 순간 태양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도후는 흥분했다. 바로 태양의 몸을 바닥에 쓰러뜨린 도후는 그 위에 올라타 태양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쪽쪽 거리면서 계속해서 태양에게 입을 맞췄다. 태양의 얼굴 여기저기에 도장을 찍어댔다.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만 둘 수가 없다. 태양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행위였다. 가능한 오랫동안 주욱 이렇게 하고 싶었다. 태양의 이마에 찐하게 입을 맞추려는데 갑자기 다리 사이에 강한 자극이 온다.
“욱!!”
놀란 도후는 바로 얼굴을 떼고는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다리 사이에 있는 자신의 성기를 한손에 잡고 있는 태양이다. 설마하니 태양의 손이 그런 곳에 달라붙을 줄은 몰랐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장면을 보고만 도후는 입을 반쯤 벌렸다. 그리고 자신의 몸 아래에 깔린 태양의 얼굴을 쳐다봤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섰네.”
반쯤 멍한 기색이 묻어나는 도후의 목소리에 반해 태양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마치 옆집 강아지가 발정기가 되어 고추가 섰네-라고 말하는 듯 한 뉘앙스다. 비교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도후는 태양의 말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섰다고요.”
일부러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안다. 울컥한 도후도 손을 내려 태양의 츄리닝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반쯤 발기해 있는 성기를 잡았다.
뭐야. 저도 이렇게 된 주제에....
같은 사내의 성기지만 묘하게 말랑거리는 것이 기분 좋다. 태양의 성기를 주물거리면서 도후는 투덜대듯 말했다.
“너도 서 있잖아.”
“어쩔 수 없잖아요. 기분 좋은데.”
“.......................”
기분이 좋다라. 한 방 먹었다.
다시금 경직된 상태로 있으려 하는 도후였지만 태양은 한쪽 무릎을 세우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래로....더 해봐요.”
시키는 대로 도후는 손을 내려 태양의 성기를 잡았다. 살살 잡다가도 힘을 준다. 그것에 태양의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겼다. 태양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거기..........그쪽도 기분 좋죠?”
“.......읏....”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사정할 것 같았다. 바로 사정을 하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은 도후는 태양의 성기를 꾹꾹 눌렀다. 손바닥으로 잡았다 폈다 하면서 약하고 강한 자극을 줬다. 더불어 태양이 주는 자극에 점점 머리가 몽롱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도후는 최대한 태양의 사정을 이끌었다.
이쪽의 손길 덕분인지 태양의 뺨이 발그레하게 변했다. 밉살맞은 말을 많이 하던 입술에서 달콤한 한숨이 터지고 부드러운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것에 도후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제길..!”
“읍..!”
이를 악문 도후가 얼굴을 내려 입을 맞췄다. 딱-하고 이가 부딪혀 아프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도후가 무릎으로 다리를 벌렸다. 그 순간 성기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들어가면서 동시에 태양은 사정을 해 버렸고 도후도 사정을 했다.
손등과 팔에 떨어지는 질척한 정액에 태양은 감은 눈을 떴다. 손을 위로 들자 하얀 액체가 묻어났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정액이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려니 도후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정액이 잔뜩 묻어있던 손이 거실 바닥에 눌러졌다. 여전히 거긴 숨을 쉬면서 태양은 도후를 쳐다봤다.
도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거친 숨을 내쉬며 동시에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이 몇 올 달라붙어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도후의 눈동자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다시금 도후가 얼굴을 내려 입을 맞췄다.
아까처럼 무조건 혀를 집어넣는다든가 억지로 입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이쪽을 배려하기 위함인지 부드럽게 입을 맞추면서 천천히 뺨을 쓰다듬었다. 도후의 손길에서 질척하게 젖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저게 자신의 정액인가 싶어 옆으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벌려진 다리 사이로 도후의 무릎이 들어왔다. 무릎이 엉덩이 사이에 닿아 꾸욱 하고 눌렀다. 그것에 태양은 아래쪽으로 눈을 내려 사정을 한 도후의 성기가 아직도 힘을 내는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지금 뭐하려고요?”
“.........괜찮아.”
낮게 쉰 목소리로 그리 말한 도후는 태양의 눈 바로 위에 입술을 눌렀다. 그것에 한쪽 눈을 감은 태양은 도후의 손이 츄리닝 바지와 속옷을 벗기려 들자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잠깐 기다려 봐요. 지금 뭐하는 건데요?”
“괜찮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봐.”
“....뭐라고요?”
“가만히 있어. 알았지?”
태양이 아무 반응을 취하지 않는 순간 도후의 손은 계속해서 츄리닝 벗기려 하고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한쪽 발에 걸린 츄리낭을 벗기고 속옷까지 벗긴 도후는 태양의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태양을 내려다봤다.
“가만히 있으면 될 거야.”
그리 말하는 도후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거렸다.
이거 완전히 발정을 한 모양이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호되게 물리게 생겼기에 태양은 옆으로 슬그머니 눈을 내렸다.
“태양아.”
쪽-하면서 도후의 입술이 이마에 닿는다. 동시에 뺨과 턱과 눈 아래에 계속해서 도후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태양.....”
도후가 이런 식으로 이쪽의 이름을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때문에 태양은 몸에서 힘을 빼고 도후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것에 도후의 어깨가 흠칫-하고 굳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반응을 취할지 몰랐던 모양이다. 그것에 태양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왜요?”
“아...아니...”
“그럼 계속 해봐요. 기분 나빠지면 걷어차 버리면 되니까.”
걷어차기는 뭘 걷어차면서 도후는 태양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건 흔한 기회가 아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두 번 다시 이렇게 할 수 없을 저도 몰랐다. 지금 당장 태양이 남자라든가 앞으로 형제가 될 상대라든가 하는 생각은 머리 한쪽으로 완전히 밀어내 버렸다. 그런 것 따위 생각 해봤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도후는 그냥 무작정 입을 맞추며 한쪽 손을 내려 태양의 엉덩이 사이의 좁디 좁은 곳을 눌렀다. 세게 눌러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 순간 도후는 더럭 겁이 났다.
말도 안 돼. 왜 이렇게 좁은 거야. 이렇게 좁아서야 뭘 어떻게 할 수도 없겠다. 피만 엄청 많이 나오는 게 아니냐면서 사색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태양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파.”
“아파? 그게 말이지....”
중얼거리며 도후는 다시금 태양의 좁은 입구를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주름이 만져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틈도 말이다. 슬며시 손가락을 눌러 살살 비비자 태양의 허리가 바들 떨렸다. 그것에 도후는 놀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것도 아파?”
“......아니요. 묘한 기분이 들어서 그래요. 괜찮으니까 계속 해봐요.”
태양의 말에 도후는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냥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 아무래도 잘 안 들어갈 것 같아서 근처에 있던 정액을 손가락에 잔뜩 묻히고 천천히 진입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힘이 들어서 머뭇거리게 되었지만 눈 딱 감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태양의 배에 힘이 들어갔다. 헛숨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후는 손가락을 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손가락 하나가 끝까지 다 들어갔다.
태양의 안은 따뜻했다. 촉촉하고 강하게 죄여드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빨간 물이 드는 것을 느꼈다. 눈이 뒤집힌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아주 어렸을 적에 야한 사진을 보거나 영상물을 봤을 때에나 느껴졌던 그런 격한 마음이 생기는 것에 도후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때부터는 엄청난 유혈사태다. 분명 큰 일이 생기게 될 테니까 진정을 하고 앞으로 정말 잘 해야 해.
도후는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고 천천히 뽑아내자 그때마다 태양의 배에 힘이 들어갔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고 있는 태양의 이마에 땀이 촉촉하게 차오른다. 그 뿐만이 아니라 뺨도 발그레한 물이 드는 것 같았다. 아파서 저러는 건지 좋아서 이러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괜찮아?”
“....괜찮아요. 그런데 느낌이 이상해.”
“이상해?”
도후의 물음에 태양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대로 정말 이상했다. 도후의 길고 큰 손가락이 하나만 안에 들어가 있는데도 느낌이 정말 이상했다. 배설감이 들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팠다.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차 있는 것이 영 이상했다. 손가락만 해도 이런데 도후의 성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건 만화책하고는....
“전혀 다르잖아.”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양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감겨진 태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확인한 도후는 머뭇거렸다. 태양은 괜찮다고 하지만 정말은 아픈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나는 것은 이쪽에게도 힘든 일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아주 잠시 고민을 하고 있던 도후의 눈에 살짝 늘어져 있는 태양의 성기가 들어왔다. 사정을 하고 난 후로 아주 쪼글해지지는 않은 것이 몇 번 만져주면 바로 기립할 것 같다.
“만져주면 괜찮지 않을까?”
“........아....”
성기를 만지면 쾌감을 느끼게 되니 그렇게 하면 뒤쪽의 느낌이 어느 정도 상쇄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조심스레 성기를 만지자 태양이 입을 벌리고 가느다란 비음을 흘렸다. 기분 좋게 들리는 그 소리에 도후는 다시금 물었다.
“기분 좋아?”
태양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답지 않게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멍하니 태양을 쳐다보던 도후는 아래에 힘이 불끈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다급해졌다. 그래서 손가락을 빼내고 이번에는 두 개를 집어넣으려 했다.
“읏! 뭐하는 거예요?!”
“아, 미안. 아픈가?”
갑자기 두 개를 넣으려 하니 괜찮을 리가 없다. 태양은 급히 다리를 오므리고 반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것에 도후는 태양이 그냥 가 버리는 건가 싶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들어 태양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기 때문에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 조절을 할 수 없었던 도후는 있는 힘껏 태양을 눌렀고 덕분에 바닥에 쿵-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힌 태양은 ‘윽.’하는 소리를 지르며 도후를 쳐다봤다.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의 눈에는 너무한다는 감정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에 이도 저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던 도후는 다시금 태양의 어깨에 양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안 아프게 할게. 그러니까 가지마.”
“.....................”
도후의 다급한 말에 태양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만 멀뚱거리고만 있으려니 도후가 손을 내려 이쪽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싹싹 비비는 행동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이 사람이 지금 뭘 하는 건가 싶다. 하반신은 발가벗겨 놓고 그 민망한 부분에 손가락을 잔뜩 밀어 넣었던 주제에 이제는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다. 하려고 했던 일이 있으면 그냥 그쪽 일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지적을 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 태양은 가만히 있었다. 멀뚱히 쳐다보는 태양의 시선에 도후는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손을 뺐다. 그러자 반쯤 들려져 있던 태양의 머리가 다시금 바닥으로 떨어졌고 다시금 쿵-하는 소리와 함께 저릿한 아픔이 뒷머리로 퍼졌다. 이번에 태양은 사양하지 않고 무덤덤한 어조로 아픔을 표현했다.
“아얏.”
“괘...괜찮아?”
“아파요. 부드럽게 대해줘야죠.”
“아. 그렇지.”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도후는 안절부절 못 하는 상태였다. 그런 도후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태양은 아래로 눈을 내렸다. 반바지를 입고 있는 도후의 그 부분은 확실하게 큰 텐트를 치고 있었다. 저런 상태이니 지금 굉장히 힘이 들 것이다. 당장 벗고서 하고 싶을 테지만 이쪽이 남자이다 보니 욕심껏 움직일 수가 없는 거다. 여자였다면 금방 촉촉하게 젖어갈 테고, 몸의 구조도 다르기 때문에 한결 수월했을 텐데...
태양은 손을 들어 도후의 뺨을 건드렸다. 툭-하고 치는 손길에 도후는 눈을 내렸다. 이쪽을 쳐다보는 도후의 눈동자 안쪽에 붉은 물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한 태양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지금 나랑 하고 싶어요?”
직설적인 물음에 도후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현을 했다. 그것에 태양은 웃으며 다시금 물었다.
“나랑 해도 괜찮겠어요? 나는 남자잖아요. 거기다가....”
말을 하려던 순간 막히게 된다. 도후가 얼굴을 내려 입을 맞췄기 때문에 태양은 처음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런 태양의 얼굴을 잡고 쪽쪽 거리며 입을 맞추던 도후는 얼굴을 들고 태양의 보드라운 양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쪽을 쳐다보는 도후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정염으로 가득 차 어쩔 줄 몰라 하며 초조해하던 얼굴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말로 지지한 표정을 지은 채로 도후는 태양에게 물었다.
“넌 지금 이런 상태에서 멈출 수 있어?”
도후의 진지한 물음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앞으로 형제가 될 사람이고 남자다. 그런 사람을 몇 번이고 계속 보면서 즐거워지고, 입을 맞추게 되고, 쓸데없는 유혹을 하게 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부러 선을 긋지도, 그렇다고 인정을 하지도 않았던 태양이지만 지금 도후는 그 선을 완전히 넘어버린 모양이다. 태양을 안음으로 해서 모든 것을 그냥 구겨서 버릴 작정인 거다. 입을 맞추고 나서 우왕좌왕하며 고민을 하던 도후의 얼굴이 아니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인정하기로 한 듯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한쪽 입술을 올렸다.
피해갈 수 없으면 즐겨라-인가.
태양은 팔을 위로 들었다.
“이리 와요.”
입고 있던 셔츠는 반쯤 흘러 내려와 있었고 아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몰골로 이리 오라고 하는데 마다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도후는 바로 태양의 위로 엎드렸다. 셔츠를 위로 올려서 드러난 가슴에 입술을 댔다.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태양의 눈치만 보고 계속 못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용기를 내서 해보는 거다. 태양의 피부는 정말 부드러웠다. 입술만 댔을 뿐인데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쪽쪽 거리면서 태양의 가슴에 정신 없이 입을 맞추다가 작은 살덩이를 발견했다. 눈을 빛낸 도후는 몇 초 망설이는가 싶더니 냅다 태양의 젖꼭지에 달라붙었다.
작았다. 정말 작았다. 그런데 그게 더 마음에 든다. 잘 건드려지지 않는 태양의 젖꼭지를 물고 핥으려니 태양의 숨이 거칠어졌다. 느끼고 있는 건가 싶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태양의 반응을 살피던 도후는 아래로 손을 내려 다시금 태양의 민감하고 소중한 부분을 건드렸다. 동그랗고 탱탱한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양쪽으로 벌리고 다물어진 입구를 건드렸다. 처음 한 개를 집어넣자 태양은 숨을 삼켜도 아픈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에 용기를 낸 도후는 손가락 하나로 계속해서 태양의 내부에서 움직였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빼내고 두 개를 같이 집어넣으려 한다. 아까 하려다가 실패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잘 해보려 노력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태양이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태양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이 들렸다. 그것에 맞춰 도후의 호흡도 가빠졌다.
생애 이렇게까지 긴장 된 적이 또 있었나 싶다. 머리 한쪽이 지끈거리면서 아플 정도로 정말 긴장을 하고 있었다. 목구멍 안쪽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결국 손가락을 전부 다 밀어 넣었다. 두 개를 다 밀어 넣은 도후는 얼굴을 들었고 그 순간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뚝-하고 눈 아래로 떨어지는 것에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턴 도후는 태양의 안색을 살폈다. 태양은 여전히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채로 가뿐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고 있는 것이 편하지 많은 않은 모양이다. 그런 태양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도후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입구 쪽을 건드리다가 천천히 깊숙이 밀어 넣는다. 꽉꽉 다물려서 손가락을 뽑아낼 것 같은 내벽의 압력을 잘 피해내며 도후는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몇 분을 하니 아래의 근육이 어느 정도 풀어진 것 같았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태양의 표정이 다르게 변했다. 인상을 쓴 것은 마찬가지지만 손가락의 위치에 따라 미간 사이에 주름이 달라졌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흥분이 되는 듯 거친 호흡을 토해내던 도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건지 바로 손가락을 빼내고는 태양의 무릎을 잡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때 내내 눈을 감고 있던 태양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무릎을 잡고 있는 도후의 손목을 잡았다.
“아래 적셔야 하잖아요.”
“적시라고?”
“넓혀야 해요. 그냥 무작정 당신 거 넣으면 나 죽어요.”
“...아. 그렇겠군.”
손가락하고 성기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도후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태양의 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정말 짐승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거다. 어떻게 하나 싶어 눈을 굴리던 그는 태양의 무릎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에 태양이 도후를 쳐다보며 묻는다.
“어디를 가는 거예요?”
“기다려 봐.”
성기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어서 걸음 옮기기가 참으로 거시기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도후는 주방으로 들어가 싱크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바로 참기름이다. 좋았어. 라면서 눈을 빛낸 그는 그것을 들고 태양이 누워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도후는 셔츠만 둘둘 말아 목 부근에 올리고 있는 태양의 모습에 걸음이 꼬였다. 비틀하고 넘어질 뻔 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도후는 바로 태양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런 도후를 태양은 이상한 듯 쳐다봤다.
태양은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저런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다.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다리를 크게 벌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도후는 바로 참기름을 뚜껑을 열고 태양의 엉덩이 사이에 댔다.
“이상해도 참아.”
“잠깐. 뭘 하는.... 읏..!”
확 풍기는 참기름의 고소한 향기에 태양은 낭패한 기색을 띄웠다. 하지만 태양이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보다 도후가 참기름을 태양의 다리 사이에 뿌리는 일이 훨씬 먼저 벌어졌다. 주르륵-하고 하얀 피부에 미끄러지는 참기름을 손가락으로 흩어낸 도후는 바로 입구에 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바로 손가락이 쑥 들어간다.
“우왓. 너무 미끌거려.”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 상처 생기면 몸에 더 안 좋아지잖아요.”
“아. 그런가.”
그저 미끌거리는 것을 찾아 움직였을 뿐이다. 그 외에 자세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양의 호통에 어떤 식으로 반응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가락을 깊숙이 넣은 채로 가만히 있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긴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무슨 일 있으면 당신 어머니가 알아서 해주겠지. 의사니까.”
“아. 그렇군.”
하지만 의사인 어머니에게 태양의 이런 상태를 보여줄 수가 있을까. 애초에 무엇 때문에 이런 상처가 생겼는지 말을 꺼낼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뭐, 아무려면 어떤가. 도후에게 있어 앞으로 일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태양이다. 눈앞에 있는 태양. 이 녀석을 어떻게든 안아야지 성이 찰 거다. 이를 악문 도후는 손가락을 빼내고 태양의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위로 엎드렸다.
“잠깐...읏..!”
도후는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도후의 손가락을 받아 들였을 때의 통증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조급한 그의 행동에 걱정이 된다. 천천히 하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도후의 굵직한 귀두가 입구를 꾸욱-하고 눌렀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입구를 벌리고 들어오려 하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이를 악문 태양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찌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후의 것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너무 컸다. 그래서 무리였지만 참기름의 도움 때문인지 몰라도 의외로 쉽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원래 그런 기능 쪽으로는 발달이 미비한 곳으로 계속해서 성기를 밀어 넣으려 하는 도후의 팔을 잡은 태양은 이를 악물고 고민했다. 생각보다 훨씬 아팠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도후에게 그만 하라면서 그 몸을 발로 차 떨어뜨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좀 참을 것인가 하고 말이다. 끙끙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태양은 위에 있는 도후를 쳐다봤다. 그러자 무서울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는 도후가 보였다.
“제..제길...왜 이렇게 좁은...”
“..................”
“나올 것....같잖아..”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서 하반신을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도후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하고 싶었던 말이 쑥 들어갔다.
처음에는 반 정도 장난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되어 버리다니. 거기다 중간에 도후를 뿌리친다고 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굉장히 안 좋은 기분이 들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거냐며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태양은 손톱을 세워 도후의 팔에 자국을 만들었다. 손톱이 파고 들어가 아플 만도 하건만 도후는 그런 것 따위 알 수가 없는 듯 집중해서 계속해서 태양의 몸속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좁게 다물러져 있던 곳은 성기를 밀어 넣는 대로 천천히 벌려지고 있다. 크게 벌어져서는 안쪽으로 살이 패어진다.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든 도후는 더 세게 밀어 넣으려다가 태양이 아파하는 소리를 내면 그때마다 멈칫 거렸다. 그렇게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어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을 즈음 완전한 삽입을 이뤄냈다.
눈을 감고 숨을 헐떡이던 도후는 얼굴을 들어 태양을 쳐다봤다. 태양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미간 사이에는 확실하게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프긴 아픈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입술을 앙 다문 채로 신음 소리를 죽이고 있었던 거구나. 마음 한쪽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태양의 머리를 한 쪽 손으로 끌어안았다.
“태양아.”
“......뭐하는 거야...”
이마에 입을 맞추려 하는 도후의 얼굴을 피하려 옆으로 얼굴을 돌리자 몸 속 가득 들어와 있던 것에서 묘한 느낌이 풍겼다. 단단한 것으로 몸이 고정되어 있어서 쉽게 움직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아팠기 때문에 태양은 인상을 쓰며 ‘아파...’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도후는 급히 입술을 떼고 자세히 태양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상태로 있긴 했지만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때문에 태양의 몸 안에 들어가 있던 것이 불끈하고 더 커졌다.
잔뜩 인상을 쓴 태양은 도후를 노려봤다.
“뭐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태양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이 되어서 더 흥분하게 되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즉시 이쪽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니 말이다. 대충 말을 얼버무리던 도후는 결심에 굳은 얼굴을 하고는 태양의 양 어깨를 잡았다.
“일단은 하자.”
“뭐? 자..잠깐만...욱!”
태양이 말을 하기도 전에 도후는 깊숙이 밀어 넣고 있었던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좁은 곳에 겨우 들어간 만큼 끄집어내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추진 않았다. 잘라먹을 것처럼 꽉꽉 조이는 곳은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도후에게 큰 쾌감을 선사했다. 말랑말랑한 내부가 탄력을 가지고 꿈틀거리는 것에 도후는 넋이 나갈 것 같았다. ‘뭐야. 이런 느낌은...’라고 중얼거린 도후는 손을 내려 태양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몸을 움직였다. 느리게 움직이면서 태양의 몸속을 파고들던 도후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내려 다시금 태양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댔다.
“읏..! 아프다니까..!”
도후가 멋대로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은 상관없지만 몸은 숙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도후가 몸을 숙이니까 압박이 더해져서 굉장히 느낌이 이상했다. 소리가 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은 태양은 얼굴에 달라붙어 침범벅으로 만들어놓는 도후의 턱을 잡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도후는 그저 거친 콧김을 내뿜을 뿐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윽!”
흥흥. 거리지 말란 말이다. 그보다 왜 이렇게 집요한 거야!
태양은 인상을 팍 쓰며 도후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더 세게 이쪽을 끌어안는다.
“읏!”
더 깊이 들어와 버렸다.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은 태양은 크게 말했다.
“아프다니까..!”
“부드러워..”
“뭐?”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태양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후를 쳐다봤다. 그러자 몽롱한 눈을 한 도후가 태양의 이마에 길게 입술을 누르며 허리를 움직였다. 계속해서 움직이려니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다. 말랑거리는 살 안쪽으로 성기를 삽입시키며 도후는 중얼거렸다.
“부드러워. 따뜻해.”
“자...잠깐!! 이봐!!”
“기분 좋아..!”
“아읏! 아프다니까..!”
“괜찮아. 괜찮아.”
“안 괜찮아!”
태양은 도후의 턱을 잡아 뒤로 밀어내려 했지만 그런 태양의 손을 잡아 바닥에 누른 도후는 반쯤 나왔던 것을 끝까지 집어넣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체액과 참기름이 튄다. 그것에 맞춰 구수한 향이 나는 것에 태양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었다. 전혀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저 불쾌하고 속에 뭐가 차는 듯 한 느낌과 더불어 아프기만 했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해 버리고 만다. 지금 딱딱한 바닥에서 도후의 힘만으로 된 관계를 맺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는 생각 말이다.
안 그럴 것 같더니만 이 녀석 원래 이렇게 배려가 없는 타입이었나. 기분이 좋았던 것은 처음에 얼굴 전체에 입을 맞춰줬을 때 뿐이었다.
태양은 끙끙 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도후의 손목에 단단히 잡혀서 바닥에 고정된 자신의 손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여기서 벗어나기는 글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헉헉헉.”
“................”
“헉헉헉헉헉.”
“..........................”
옆으로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들리는 것은 도후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도후가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찌걱거리는 젖은 살의 마찰음이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태양은 몸 안쪽으로 파고 들어오는 성기에 아얏-하는 소리를 냈다. 아까는 그런 소리를 내면 바로 안절부절 못해서는 괜찮으냐고 물어봤던 주제에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완전히 몰입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나저나 언제 멈추게 되는 걸까. 아까부터 계속 헉헉 거리고만 있으니 마치 커다란 개와 하고 있는 것 같다. 수간은 질색인데-라고 중얼거리던 태양은 도후가 누르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그것에 이쪽에서 도망치려 하는 건줄 알았는지 도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도후에게 괜찮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태양은 도후가 손을 치우자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그것에 도후가 잠시 움찔한다. 그러다가 ‘태양아!’라고 크게 연호하며 태양의 몸에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