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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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옥-하고 입술이 닿는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로 얼굴을 뗄 수가 없었다. 태양의 입술 감촉은 지나칠 정도로 좋아서 계속해서 입술을 대고 있고 싶었다. 태양이 싫은 기색을 비추거나 몸을 치웠으면 도후도 그냥 물러났을 거다. 하지만 태양은 가만히 있었고 그의 양 손은 다소곳이 싱크대를 잡고만 있었다. 이건 괜찮다는 걸까? 계속해서 된다는 걸까. 망설이던 도후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태양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 역시나 가늘다. 얇고 부드러웠다. 새삼스러운 것을 깨달은 듯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태양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살짝 살짝 핥아내며 꾸욱 하고 누르자 태양이 알았다는 듯 입술을 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후는 바로 태양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태양의 입 안에 혀를 넣었을 때 그 달콤함에 놀랐다. 사람의 안 쪽 피부일 뿐인데도 정말 단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쪽쪽 거리면서 입 안 여기저기를 빨아들이고 눌러대자 답답했는지 태양의 손을 들어 어깨를 잡는다. 이제 그만 하라는 듯 어깨를 꾸욱-하고 눌러대는 것에 도후는 많이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천천히 얼굴을 뗐다. 

호흡은 거칠어져 있었다. 완전히 끌어 안겨진 태양의 볼도 조금은 상기되어 있다. 그것이 귀엽게 보인다고 하면 미친 걸까? 애초에 태양에게 입을 맞춘 것 자체가 미친 행동이긴 하지만 말이다. 

침을 삼킨 도후는 여전히 태양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물었다. 

“왜 안 피해?”

“냄새가 안 나서요. 양치했죠?”

“........................”

확실히 했다. 아주 깨끗이 했다. 아무리 했다고 쳐도 그렇지 막 입맞춤을 했으면서 저런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건드리는 말을 하다니. 나 사실 꽤 입 냄새가 나는 타입이었던 걸까. 괜한 생각을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태양이 손을 들어 도후의 볼을 잡았다. 

“남자랑 키스한 적 많아요?”

바로 ‘하아?’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럴 리가 없잖아. 처음이야.”

“나도 그래요.”

“뭐?”

“나도 처음이라고요.”

태양은 도후의 목 뒤를 잡았다. 가볍게 잡아당기면서 얼굴을 위로 들며 속삭였다. 

“다시 해봐요. 기분 좋았으니까.”

“......................”

태양의 말과 동시에 머리 한쪽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뚝-하고 이성의 끈이 너무도 간단하게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바로 태양의 몸을 양 손을 끌어안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처음보다는 훨씬 적극적이 되어 있었다. 도후는 입을 벌리며 태양의 입술을 먹어치울 것처럼 굴었다. 그것에 태양은 피하지 않고 옆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도후의 움직임을 도왔다. 그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도후는 다시금 맛보게 된 태양의 입 안에서 마음껏 날뛰었다. 태양의 혀를 잘근잘근 씹고 내벽을 쓸어 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따닥-하고 이가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불이 붙은 성냥개비마냥 계속해서 타들어가고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헉헉헉-하고 개처럼 헐떡이는 소리가 난다. 지금 이 소리가 누구한테 나는 건가 싶었던 도후는 곧 ‘아. 나로군.’라고 깨달았다. 

제길. 그동안 일을 한답시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고 쳐도 남자를 상대로 이렇게 성급하게 굴다니. 

도후는 팔에 힘을 줘서 태양의 상반신을 더 강하게 끌어안다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었다.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태양이었다. 이 녀석이기 때문에 이렇게 급해지고 참을 수가 없는 거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바지 아래의 성기가 발기하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급히 입술을 떼고 어느새 식탁 위에 누워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태양을 내려다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의 얼굴에 침이 조금씩 묻어 있었다. 잠시 의식을 놓은 사이에 입만 맞춘 것이 아니라 얼굴 여기저기에도 도장을 찍고 난리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헉헉 거리며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도후는 손등으로 턱 아래를 문지르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더 하면 위험할 것 같은데....”

쪽.

도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을 돌린 태양이 얼굴 옆에 있던 도후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저릿하게 퍼지는 그 감각에 도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습을 당한 자 마냥 굳어있는 도후를 응시하며 태양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서 위험하다는 말 하면 이상하지 않아요?”

그리 물으며 눈을 깜박인다. 그러자 흐트러진 태양의 모습이 너무도 잘 보였다. 

살짝 올라가서 날씬한 배가 보이고 그 사이에 수줍게 자리한 배꼽도 보였다. 옷을 들어서 그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도후는 바싹 마른 입 안에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중얼거림과 동시에 도후는 다시금 태양의 몸 위로 엎드렸다. 

식탁에 무릎을 올리고 완전히 태양의 몸 위에 엎드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것을 알지만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태양의 얼굴을 잡고 다시금 입을 겹치려는 순간 두 사람의 호흡 소리를 가르고 금속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칵.

그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떠진다. 몸이 굳어져서 격한 행동을 하던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곧 끼익-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아. 아빠 왔다.”

호수다. 도후는 당황해 태양의 몸 위에서 일어났고, 태양은 그런 도후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욱!!”

바로 배를 손으로 감싸고 바닥에 무릎을 꿇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아차 싶었다. 마음이 급해서 도후를 밀쳐낸다는 것이 그만 발이 먼저 나간 거다. 괜찮으냐는 말을 하려는데 저 안쪽에서 호수의 굳은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야. 이게?”

동시에 바로 안으로 들어온 호수는 거실 옆에 붙여있는 주방에 들어가기 전에 놓인 식탁에 앉아있는 태양과 그런 태양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도후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태양아. 도후군?” 

호수는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에 대해서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그는 손등으로 잽싸게 얼굴을 닦아낸 태양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런 물음을 던지는 호수의 얼굴은 맹했다. 도후와 태양이 달리 이상한 짓을 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다. 원래 호수는 그런 성격이다. 혹여라도 자신들이 키스를 했다고는 조금에 조금도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느긋하게 웃는 얼굴을 하며 식탁에서 내려와 호수의 앞에 섰다. 

“나 발목이 아프다고 했더니 형이 살펴봐주고 있었어요.”

“정말이니? 이런 고마운 일이....”

중얼거린 호수는 손을 마주 잡았다. 도후가 태양의 아픈 발목을 살펴봐줬다는 것에 굉장히 감동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태양에게 성을 낼 수가 없다. 호되게 걷어차여진 배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도후는 완전 경직된 웃음을 지으며 목례를 했다.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그렇군. 전에 보고 이게 거의....며칠만이지?”

“10일은 지난 것 같아요.”

태양을 쳐다보자마자 태양이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그것에 ‘맞다. 그렇지.’라면서 고개를 끄덕인 호수는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집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주방에는 막 요리를 한 듯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거기다 도후가 입고 있는 츄리닝은 태양의 것이다. 도후에게는 조금 짧은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쳐다본 채로 호수는 물었다. 

“그런데 도후군이 우리 집에 언제부터 온 건가? 나는 설마 도후군이 우리 집 같은 곳에 올 줄은 몰랐지.”

“우리 집이 뭐가 어때서요. 사실 형은 나 집에 데려다 주고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여기에 왔었어요, 여기가 마음에 드나 봐요.”

“뭐야? 그러면 오래 전부터 너를 보살펴 주고 있었던 말이야? 이렇게 고마운 일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호수는 완전 감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양은 그런 호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갑작 웬일이에요? 거의 한달 동안 나 내버려 두고 아줌마랑 깨가 쏟아지더니.”

“내가 언제 널 내버려 뒀다고. 일을 하고 있어도 늘 걱정을 하고 있었단 말야.”

“늘 걱정을 했던 사람이 전화 하나 없어요?”

“그...그건....”

민망한 부분을 찔렀나 보다. 제대로 말을 못 하고 버벅거리는 것에 태양은 피식-하고 웃으며 팔짱을 끼며 식탁에 엉덩이를 기댔다. 

“정말 무슨 일이에요? 여행 할 날자 정해져서 그래요?”

“응. 사실 그것 때문에 왔어. 사실 3일 후에 푸켓으로 가게 되었는데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서 이것저것 챙기러 왔어. 여권도 가지고 와야 하니까...”

“그럼 챙겨요. 도와줄까요?”

“응. 그렇게 하면 나는 좋은데.....근데 둘 다 밥 먹기 전 아니야?”

이렇게 맛있는 것을 한다는 것은 아직 밥을 먹기 전이라는 거다. 호수의 말에 태양은 식탁에서 몸을 떼며 그의 팔을 잡았다. 

“나중에 먹어도 돼요. 일단 짐부터 챙겨요.”

“아니. 급한 건 아니니까 밥 먹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부를 테니까 난 신경 쓰지마.”

호수는 도후에게 웃어 보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도망을 가듯 들어가 버리는데 뒤에 대고 뭐라 말을 걸기도 뭐하고 따라 들어가기도 더더욱 뭐하다. 그냥 밥이나 먹을까 싶어 태양은 여전히 배에 손을 대고 있는 도후를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는 밥이나 먹어요.”

젓가락과 수저를 꺼내면서 몸을 돌리는데 어느새 도후가 앞에 와서 서있다. 배에 손을 댄 채로 인상 험악하게 서있던 도후는 태양이 태연하기만 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자 바로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봐.”

“왜 그래요. 길 막으면 못 지나가잖아요.”

“아무리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났어도 그렇지. 그렇게 세게 배를 치면 어떻게 해.”

“아팠어요?”

“당연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을 세운 태양이 도후에게 입을 맞췄다. 쪽-하는 소리와 함께 도후의 분노는 녹 녹듯이 사라졌다. 멍한 얼굴을 하는 도후와 달리 그에게 기습 키스를 한 태양은 태연하기만 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눈썹을 위로 살며시 드는데 그 얼굴에 대고 뭐라 할 수가 없다. 그저 멍하기만 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도후를 지나쳐 간 태양이 젓가락을 챙기고 밥을 퍼서 식탁에 올렸다. 그 모습에 도후도 어기적거리며 가스렌지 앞으로 가서 오목한 접시를 꺼내 그 위에 불고기를 덜었다. 

만만찮다고 생각을 하게 되니 점점 도를 더해가는 것 같다.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방에 호수도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나 태연하게 입을 맞출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입맞춤에 바로 화가 풀리는 이쪽도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것에 대해서 고민에 빠져 있으려니 바로 태양이 재촉을 한다. 

“뭐해요? 배고프니까 빨리 가지고 와요.”

“알았어.”

고기를 들고 식탁에 내려놓으며 의자를 뒤로 빼려 하는데 태양이 얼굴을 들며 묻는다. 

“상추는요?”

“상추?”

“불고기는 상추랑 싸서 먹어야 더 맛있잖아요. 그것도 몰라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라는 듯 쳐다보는 태양이지만 도후는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다. 정말 맛있게 불고기를 했기 때문에 이대로 그냥 먹어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태양은 상추를 안 가지고 왔다는 것으로 사람을 이상한 취급하고 있다. 이럴 때에는 어떤 식으로 반응을 취해야 한다는 학습 자체가 안 되어 있었던 도후는 그저 경직 된 채로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그것에 길게 한숨을 쉰 태양이 의자를 뒤로 물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앉아 있어요. 씻어 올 테니까.”

“아니. 됐어. 먼저 먹고 있어. 내가 씻어올 테니까.”

어딘지 모르게 피곤한 얼굴이 된 도후는 태양에게 손을 뻗으며 몸을 돌렸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상추를 꺼내고 바로 싱크대 안에 집어넣으며 물을 틀었다. 상추를 잡고 가볍게 흔들면서 도후는 미간 사이에 진한 주름을 만들었다. 

이건 아주 상전이 따로 없다.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는 이쪽도 문제가 있다. 나 왜 이렇게 저 녀석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걸까. 이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하지만 뭐라 할 수가 없다. 물을 턴 상추를 그릇에 올린 도후는 그것을 태양의 앞에 내려놨다. 

“자 먹어라.”

“고마워요.”

태양은 먼저 꺼내뒀던 쌈장이나 마늘 등을 열고 상추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 위에 고기를 올리고 쌈장을 살짝 묻히고 바로 크게 한 입 먹었다. 몇 번 오물거리던 태양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도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먹어봐요.”

“그렇게 안 말해도 알아서 먹을 거야.”

투덜대면서도 도후는 상추를 들어 그 위에 고기를 올리고 그냥 입에 넣었다. 잔뜩 인상을 쓰면서 우물거리면서도 다시금 상추에 손을 대는 것을 보니 영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것에 태양은 김치를 밥 위에 올리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저녁에 잡채 해줘요. 알았죠?”

“지금 4시야. 저녁은 무슨 저녁이야. 그냥 배고파지면 불고기 남은 걸로 먹어.”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잡채 해준다고 했잖아요.”

“귀찮아졌어. 안 할 거야.”

“사람이 치사하게...”

“마음대로 말해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도후는 밥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이쪽도 배가 고프긴 했지만 도후도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다. 이쪽이 학교에 다녀오는 동안 밥은 안 먹고 과자만 하나 뜯어서 먹었을 거다. 그러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밥 절반 정도 먹을 때까지 말 걸지 말자고 생각하며 태양은 고기를 들어 입에 넣었다. 

아. 정말 맛있다. 이 사람 정말 요리를 잘 한다. 거기다 이거 저거 해달라고 하면 바로 해주니 굉장히 편리했다. 그동안 먹고 싶었지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것들 목록을 적어서 건네줄까. 그러면 분명 바로 인상을 쓰며 싫어하긴 해도 결국에는 해줄 거다. 어느새 도후에 대해서 빤히 알게 된 태양이었다. 우물거리며 고기를 씹던 태양은 입에 젓가락을 댄 채로 중얼거렸다.

  

“푸켓으로 가는 구나. 거기 재미있나?”

“신혼여행이니까 뭘 해도 재미있겠지.”

“흐음. 다음에 우리도 다음에 여행 안 갈래요? 나 일본 가고 싶은데.”

“나 세 달 있다가 일본으로 촬영가. 그러니까 굳이 여행갈 필요는 없어.”

그쪽에서 알아서 다 준비해 주면 이쪽은 여권이랑 몸만 챙겨서 딱 갔다 오면 된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공짜 여행을 해왔다. 그때마다 이 직업을 갖길 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뻐기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쳐다보는 것에도 태양은 가만히 있기만 한다. 평소와 달리 얌전한 것이 이상하다. 왜 그러나 싶어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는 순간 태양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때 알바생 안 구해요? 마침 나 여름이라서 아르바이트 구해야 하는데.”

“구해도 넌 안 돼. 내가 뭐 하러 너랑 같이 있으면 스트레스 받냐. 절대로 싫다.”

“절대로 안 돼요?”

“그래. 절대로 안 돼.”

“정말?”

“정말이라니까. 말 그만 하고 좀 먹어라.”

도후는 고기를 들어 태양의 밥그릇 위에 올렸다. 이런 식으로라도 태양의 신경을 돌릴 셈이다. 하지만 밥그릇에 올려진 고기를 내려다보던 태양은 눈을 들었다. 착 가라앉은 눈동자에 불길한 뭔가가 느껴진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살짝 긴장하는 순간 발목에 뭔가가 착 달라붙었다. 확 하고 올라오는 소름에 도후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말로 안 돼요?”

그리 물은 태양은 옆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도후의 발목에 대고 있던 발을 슬금슬금 움직여 위로 올라간다. 그것에 도후는 흐읍-하고 거친 숨을 삼키며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런 도후의 표정에도 태양은 느긋하기만 하다. 

긴 발가락이 도후의 다리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간다. 정강이 안쪽을 쓰다듬으며 더 위로 올라가 발가락으로 허벅지를 건드리며 은밀한 부위로 파고 들어오려는 것에 헛숨을 삼킨 도후는 바로 다리를 오므리며 태양을 노려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뭘요?”

“이런 짓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갑자기 남의 허리 휘어 감고 혀 뽑아댈 것처럼 달라붙은 누구한테 그런 말 듣기 싫은데요?”

“......................”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하고나 그런 성인군자 같은 말을 하시죠.”

‘당신이 그런 말하면 안 어울리잖아.’라는 듯 계속해서 발가락으로 다리를 쓰다듬던 태양의 붉은 혀가 유혹적으로 튀어나와 입술을 핥는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오므리는 것에 도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가만히 있다가는 점점 더 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게 될 것 같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인상을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호수가 나왔다. 손을 비비고 있던 호수는 의자에서 일어난 도후를 보고는 눈을 깜박였다. 

“다 먹었나? 도후군?”

“.........저 잠시 화장실 좀 사용하겠습니다.”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는 도후의 모습에 호수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식탁 앞으로 걸어왔다. 

“왜 저러는 거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던데. 고기 매워?”

“아니요. 맵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고 딱 좋아요.”

“그래? 그런데 왜 저렇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지?”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나 보죠.”

태양의 말에 호수는 ‘당황스러운 일?’하고 되물었지만 태양은 그것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하는 대신에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다가 작게 소리내 웃는 태양의 모습에 호수는 이상하다는 듯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식탁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런데 정말 도후군이랑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전에 한식집에서 밥 먹을 때에도 사이가 좋은 것 같긴 했는데 오늘 보니까 정말 사이가 좋네?”

“성격 정말 아니었으면 상대도 안했겠지만 의외로 괜찮더라고요. 두어번 말을 섞다 보니까 재미있겠다 싶어서 놀아주다가 어느새 이렇게 요리를 해주는 사이까지 되어 버렸어요.”

태양의 설명에 호수는 알게 모르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태양아. 도후군에게 너무 장난을 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단 네 형이 될 사람이기도 하니까...”

“장난 같은 거 안 쳐요. 이래뵈도 난 예의바르니까.”

그리 말하며 빙그레 웃는 태양이지만 어쩐지 호수는 그런 태양의 웃음을 보고 나서 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을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던 그는 ‘정리 좀 해야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호수에게서 시선을 돌린 태양은 상추를 들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렸다. 막 크게 한 입을 먹으려 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칙칙한 얼굴을 한 도후가 나온다. 대충 물기를 닦았는지 얼굴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 모습에 태양이 상추쌈을 내리고 말했다. 

“제대로 안 닦으면 감기 걸려요.”

일부러 이쪽을 신경 써서 말을 한다는 듯 한 뉘앙스지만 그 속에 놀리는 억양도 섞여있다. 그것이 전해진 도후는 입술을 씰룩이며 원래 앉았던 자리에 앉아 고기를 수저로 퍼 밥그릇에 넣은 후에 쓱쓱 비볐다.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며 신경질적으로 밥을 비비는 모습에 태양은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삐쳤어요?”

“쿨럭!”

“여기 물이요.”

기침을 하던 도후는 태양이 건넨 잔을 받아 물을 마셨다. 한잔을 다 비우고도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던 그는 눈에 힘을 주고 태양을 쳐다봤다. 

“나 여자 아니거든.”

“그렇게 말 안 해줘도 그쪽이 여자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요. 누가 그 쪽 여자래요?”

입술을 씰룩인 도후는 싹싹 비빈 밥을 크게 한입 먹었다. 우물거리며 먹으면서 김치도 밥 위에 올리지만 내내 태양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무시를 하는 듯한 그 모습에 가만히 있을 태양이 아니다. 

“나 계속 무시할 거예요?”

“.....................”

“왜 그렇게 냉정해요? 우리들은 입까지....”

도후는 바로 수저를 놓고 태양의 입을 막았다. 입 안에 밥을 한가득 넣어서 볼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그는 말을 못하는 대신에 눈으로 방 쪽을 가리켰다. 지금 방에 호수가 있는데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라고 타박하는 듯 한 시선에도 태양은 느긋하기만 하다. 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에 도후는 급하게 입 안에 있는 것을 씹어 삼키고 태양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우리 키스한 거 아저씨가 듣게 할 생각이야?”

“안 듣게 하고 싶으면 나 무시하지 말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의 입술 다 먹어버릴 것처럼 달라붙던 사람이 갑자기 찬바람 쌩쌩 불면 나 적응 안되요.”

“그때는...!”

“그때는 뭐요?”

태양은 눈을 들어 도후를 쳐다봤다.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동그랗고 또렷한 검은자위에 도후는 말문이 막혀 입 안에 남아있던 것을 꿀꺽 하고 삼켰다. 

전에 태양에게 입을 맞춘 것은 정말로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다. 지금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도후는 슬그머니 태양을 쳐다봤다. 

..........꽤 예쁘게 생겼단 말이지. 거기다 입술도 묘하게 색스러운 것 같고... 뭐라 딱 잡아서 말할 수 없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야리꾸리하다. 한번 선을 넘었더니 괜히 그렇게 생각이 되는 건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갑자기 소심해진 도후는 차마 똑바로 태양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자꾸만 옆 눈으로 힐긋 거리면서 쳐다봤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태양은 바로 한마디 했다.  

“뭘 봐요?”

“내가 뭘 봤다고...”

“봤잖아요. 힐긋 거리면서 봤잖아요. 보고 싶으면 당당히 보지 뭘 힐긋 거려요. 그렇게 보면 변태 같은 거 알아요?”

“변태라니. 너 너무 심한 거 아냐?”

“바로 앞에 있는 사람 흘깃거리면서 얼굴 붉히면 그게 변태지 아니에요?”

“내가 언제 얼굴을 붉혔다고!”

“아까도 얼굴 완전 달아올라서 화장실로 들어갔으면서. 솔직하게 말해 봐요. 화장실 들어가서 딸딸이 쳤죠?”

“너!!”

“태양아.”

딸딸이라니! 사람이 서로 가릴 말이 있는 거지! 어떻게 저런 입술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마디 해주려 하는 순간 마침 방에서 호수가 태양을 부른다. 그 순간 도후는 아차 싶었다. 호수가 방에 있다는 것을 깜박하고 너무 목소리를 크게 했다. 설마하니 호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겠지? 혹여라도 들었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 안색이 헬쓱하게 질린 도후지만 그런 도후와 달리 태양은 태연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 방으로 들어갔다. 

“다 챙겼다. 완벽하지. 그렇지?”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작은 가방을 하나 더 챙긴 호수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모든 것을 태양이 챙기고 호수가 챙긴 것은 여권 하나뿐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내색을 하지 않은 태양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완벽하네요. 안 챙긴 것이 있어도 아줌마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챙긴 물건들 중에서 없는 것이 있다고 호수가 징징 거려도 호영이 옆에 있으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찾아 볼 테니까.’라고 말을 해줄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아. 믿음직한 사람이 아버지의 곁에 있다고 생각되니 이렇게나 안심이 되는 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버지를 재혼 시킬 것을 그랬다. 하긴 아버지 나이에 지금의 호영씨를 만난 것도 대단한 운이지만.... 

태양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태양이 정리해 준 가방을 뿌듯한 눈으로 쳐다보던 호수는 그것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일어나 볼게.”

“에? 가는 거예요?”

“응. 다 챙겨서 호영씨 집으로 가면 되거든. 아직 일이 바빠서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아.”

“흐음. 그래요?”

병원 일이 그렇게 바쁘나 싶다. 너무 오랫동안 집에 안 있으려 하니 이제는 일 바쁜 것은 다 핑계고 그냥 호영씨의 곁에 있고 싶어서 저렇게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전에는 이쪽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아니구나. 다른 짝을 만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 버리는 거구나.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든 태양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도후가 호수가 힘들게 드는 가방을 너무도 간단히 들어올렸다.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에? 정말? 그래도 괜찮아?”

“물론이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옷 좀 입고 나올게요.”

태양의 방으로 도후가 들어가자 호수는 바로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로 태양의 손을 잡았다.

“괘...괜찮을까?”

“차 있으니까 데려다 준다고 하는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아직 친해지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친해지려면 적어도 3년은 어울려야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중얼거리고 있는 순간 바로 도후가 나왔다. 금방 옷을 갈아입은 도후는 대신해서 여행 가방을 들고 말했다. 

“나가요. 나 다녀올게.”

도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도후가 짐을 들고 현관으로 나가자 호수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되어 그 뒤를 따랐다. 

모처럼 도후가 차를 몰고서 편하게 데려다 준다고 하는데 뭘 저렇게 긴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호수는 가방이 암만 무거워도 그냥 택시나 버스를 타고 직접 운반하는 것이 더 편한 거다. 그런 호수의 마음을 알고는 있지만 자식 된 마음으로는 호수가 조금 편하게 짐을 운반했으면 싶다. 그것에 대해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태양은 괜찮다는 의미로 호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것에 신을 신던 호수가 뒤를 쳐다보더니 태양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살짝 끌어안았다. 

“다녀올게. 나 없는 동안 밥 잘 챙겨먹어. 너무 사다 먹지 말고.”

“나 요즘 집에서 밥 잘 해먹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응. 알았어.”

호수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도후가 뒤에 서있는 태양을 쳐다본다.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마.”

“안전 운전해요.”

“알았어.”

호수가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혀 진다. 그것에 태양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다 나가 버렸네.”

도후와 호수가 있을 때에는 꽉 찬 것 같았던 현관이 지금은 텅텅 빈 것 같다. 허리에 손을 댄 채로 무끄러미 현관을 쳐다보던 태양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습관처럼 만화책을 가지고 와서 거실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만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몇 번 종이를 넘기던 태양은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자 한기가 올라온다. 원래 잠을 자는 것 외에 뭘 해도 방에서 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책상 앉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히 거실에 나가 있는 것도 이상하다 싶었던 태양은 책상 아래에 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제일 먼저 펼친 것은 전에 도후가 줄을 쳐준 서적이다. 그때 엎드린 상태에서 대충 줄을 그어서 그리 고르기 줄이 처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점은 눈에 확실하게 들어온다. 이것만 외우면 된다는 도후의 자신만만한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지만 무턱대고 많은 분량을 외우는 것보다 이렇게 도후가 줄 쳐준 것을 외우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책 가운데를 손으로 꾹꾹 누른 태양은 눈에 힘을 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쉽게 집중을 할 수가 없었지만 점점 정신이 하나로 모아진다. 곧 태양은 무아지경에 빠져서 문장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달칵.

문이 돌아가는 소리에 태양은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안구가 빡빡해진 느낌이 든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은 태양은 손가락으로 눈 안쪽을 꾹꾹 눌렀다. 중간에 잘 안 보여서 안경을 썼더니 더 피곤한 것 같다. 이를 악물고 기지개를 키려니 다시금 바깥에서 달칵-하고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뭐야? 아무도 없나?”

이 목소리는 도후의 것이다. 태양은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막 거실의 불을 키던 도후와 눈이 마주친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도후는 태양과 눈이 마주치자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로 다가갔다. 

“뭐야? 안에 있었어? 그런데 왜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

“벨 소리 안 들렸는데. 눌렀어요?”

“그래. 몇 번이나 눌렀어. 이상해서 손잡이 돌려보니까 그냥 열리더라. 너 문 잠그지 않고 있었어?”

“아. 그러고 보니....”

도후와 호수가 나가고 난 후에 문을 잠그지 않은 것 같다. 

난처한 듯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에 도후는 태양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요새 좀도둑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고 했던 사람이 문단속도 제대로 안 하냐. 자.”

도후가 내민 것은 종이 봉투다. 

“이건 뭐에요?”

“잡채하기 귀찮아서 사왔어. 그걸로 대충 떼우고 잡채는 내일 해줄게.”

냄새를 맡자 붕어빵 냄새가 난다. 붕어빵으로 잡채를 떼우려고 한단 말인가.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려니 도후가 먼저 선수를 친다. 

“나 샤워한다. 옷 좀 꺼내줘. 속옷도.”

“..........알았어요.”

태양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도후는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전에는 이 집에 들어와도 뻘쭘하게 있었으면서 지금은 아주 자기 집처럼 군다. 그것에 딱히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으니 그게 또 이상하다. 이상하다며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던 태양은 봉투를 들고 거실에 가 앉았다. 안을 열어보자 나오는 것은 다 식어버린 붕어빵이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사들고 왔기에 이렇게까지 식어버린 건가 싶다. 

“되게 맛없겠다.”

이런 걸로 저녁 대용으로 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CF도 찍었으면 돈도 꽤 벌었을 텐데 잘도 이런 천 원 짜리로 저녁을 그냥 넘어가려는 건지 모르겠다. 짧은 한숨을 쉰 태양은 티비를 켜고 벽에 등을 기댔다. 

화면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는 태양의 얼굴은 시종 무표정이었다. 하나도 즐겁지 않다는 듯 가면을 쓴 듯이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태양은 붕어를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식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 하다. 우물거리며 입에 들어가 있던 빵을 씹던 태양은 쏴아아아-하고 들리는 물소리에 눈을 들어 닫힌 화장실 문을 쳐다봤다. 무끄러미 문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어 벽에서 등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난 태양은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는 도후의 잠바를 들었다. 

“전화 와요. 어떻게 해요?”

“나 지금 전화 못 받아.”

“그러면 대신 받아줘요?”

“괜찮으면 그렇게 해줘.”

말을 하던 중에 비누가 들어갔는지 ‘앗. 따가워.’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에 태양은 도후의 잠바에 손을 넣어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귀에 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쪽에서 분명히 여보세요-라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반대편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 아니 그 전에 착 가라앉은 이 끈적한 목소리는 꽤 익숙한 것이다. 설마 싶어 눈을 가늘게 뜬 태양은 폰을 바로 잡으며 물었다. 

“혹시 태유 형이에요?”

[그러는 그쪽은 혹시 태양이야?]

대답하는 목소리 안쪽에 희미한 웃음기가 서려있다. 

맞다. 정말로 태유다. 태유가 어떻게 도후에게 전화를 건 건지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태유는 도후랑 같이 사진을 찍은 사이기도 했다. 같이 모델 일을 하니까 연락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는 거겠지? 

“도후형 바꿔줘요? 그런데 지금 샤워중이에요.”

[샤워중이야?]

“네. 방금 나갔다 왔거든요.”

[그래? 나갔다 와서 샤워하는 거로구나. 나는 또 다른 일 때문에 샤워를 하는 줄 알았지.]

“무슨 일이에요? 전할 말이 있으면 내가 말할게요.”

[도후는 화요일까지 오프인줄 아는데 일요일로 당겨졌어. 중요한 가을 화보가 정해져서 그거 찍어야 하거든. 나랑 같이 말야.]

“가을 화보를 벌써 찍나요? 아직 봄인데.”

[겨울 화보는 여름에 찍기도 해.]

그건 또 몰랐다. 신기해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려니 폰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낮고 간지럽게 들리는 그 웃음소리에 태양은 ‘왜요?’라고 물었다. 

[역시나 나한테 전화를 안 하는 구나 싶어서.]

“아. 그건.....”

[타박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번호 준지 아직 한 달도 안 됐잖아. 난 100일안에만 연락이 와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 걸 뭘.]

은근슬쩍 비꼬는 것도 여전하다. 

전부터 이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 것이 있었다. 처음에 알게 되었을 때에도 이쪽보다 약간 위에 있었던 느낌이니까 말이다. 전에도 그랬는데 오랜만에 만나도 이렇다. 

[도후랑 그래도 잘 지내는 모양이네?]

“처음에는 재수 없었는데 나름대로 성격이 괜찮더라고요.”

[나도 처음에 재수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더라.]

“그래요?”

“누가 재수 없다는 거야?”

반박을 하는 듯 한 투명스런 목소리에 태양은 폰을 귀에서 뗀 채로 도후를 쳐다봤다. 전화가 와서 급하게 씻다가 나온 건지 허리에 타올 하나를 두르고 있고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마구 문지르는 모습을 쳐다보며 태양은 물었다.  

“다 들려요?”

“대충은. 이리 줘봐.”

태양은 앞으로 뻗어진 도후의 손바닥 위에 폰을 넘겼다. 

“무슨 일이야?”

귀에 폰을 댄 도후는 다음 순간 바로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아무래도 휴가가 하루 줄어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울컥한 모양이다. 입을 크게 벌리려던 도후는 식탁에 기댄 채로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을 확인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다고 해도 말은 다 들리는데 말이다. 

태양은 식탁에서 떨어져 다시금 거실로 갔다. 쿠션에 머리를 베고 누운 태양은 붕어빵을 입에 문 채로 티비 화면을 쳐다봤다.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으려니 잠시 후에 방에서 나온 도후가 다시 화장실로 들어간다. 대충 옷을 입었지만 여전히 수건을 머리에 올린 상태인 도후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태양의 옆에 앉았다. 턱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얼굴은 굉장히 심각했다. 아무래도 쉬는 날이 많이 줄어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 됐어요?”

“내일 오래.”

“어디로요?”

“촬영장으로.”

“일 열심히 해서 돈 벌겠네요.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표정 풀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하며 태양은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얼굴로 시선이 느껴진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계속 무시할 수가 없었던 태양은 눈을 돌려 도후를 쳐다봤다. 

“왜요?”

“난 쉬고 싶었다고. 지난 몇 달 동안 쉬는 날 하나도 없었단 말야.”

“이렇게 젊은데 쉬어서 뭐해요.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늙어서 푹 쉬어요.”

“그냥 돈 많이 벌고 죽으라는 말로 들린다.”

“죽으라고는 말 안했어요. 심기 불편하다고 괜히 사람 말 꼬아서 듣지 말아요.”

태양은 무릎으로 도후의 허리를 툭툭 쳤다. 그것에 앞으로 조금 물러난 도후를 확인하며 태양은 화면을 쳐다봤다. 티비만 쳐다보는 태양의 얼굴을 흘겨보던 도후는 지나치는 식으로 물었다. 

“그런데 너 태유랑 아는 사이였어?”

“초등학고 중학교 고등학교 선배에요.”

“.......질긴 인연이군.”

“나름대로 친한 사람이었어요. 갑자기 대학 간다고 내가 빠져나가서 사이가 좀 틀어지긴 했지만....”

말을 하던 태양은 다른 생각이 났는지 입을 다물었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말을 걸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도후는 전부터 아주 궁금했던 점이 있었다. 태유와 태양은 학창시절에 딱히 어울릴 만한 접점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때때로 태양이 언급했던 것들과 태유의 평소 성격이나 모습을 보면 어떤 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요즘 학원폭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 어른들이 걱정을 하며 또래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는 그 유명한 일진이 말이다. 거의 99%로 확신을 하고 있지만 이런 문제는 혼자서 확정을 짓는다고 다 결정이 나는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태양이나 태유에게 물어서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태유 말야. 학생 때 놀던 녀석이었지?”

“그런 게 궁금하면 당사자한테 물어봐요. 괜히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좀 말해줘. 말해줘도 괜찮잖아.”

“선배는 모델이잖아요. 내가 한 말에 타격을 받으면 어떻게 해요. 모델도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인데.”

“남 이미지는 챙겨주고 내 이미지는 신경도 안 쓰냐?”

“앞으로 댁 이미지도 신경써줄까요?”

“됐어.”

태유만 신경을 써주는 것에 알게 모르게 섭섭함이 든다. 태유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해도 이쪽은 형이 될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쪽에 조금 더 신경을 써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던 도후는 태유의 귀에 새겨져 있던 문신이 떠올랐다. 

귓불에 나있는 상처 같은 문신. 아주 작은 그 문신은 태양이라고 했다. 해를 그려 넣은 것 같은 태양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아무래도 의미심장하다. 도후는 팔짱을 낀 상태로 다시금 태양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을 걸었다. 

“태유 말야. 귀에...”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힌다. 지금 뭘 묻는 거냐는 기분이 든 도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궁금하니까 말해 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요? 나중에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도 나 신경 안 쓸 거예요.”

“그래. 신경쓰지마.”

“정말이죠?”

“그래.”

“정말?”

“정말이라니까!”

계속해서 파고드니 울컥하게 된다. 바락 성을 낸 도후는 태양을 쳐다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눈을 가늘게 뜬 태양이다. ‘딱 보아하니 궁금해 죽으려고 하는 구만. 두고 보자. 네가 정말 안 물을지 내 확인할 거다.’라고 말하는 눈빛을 한 태양은 도후의 옆구리를 찌르던 발을 내리고 다시금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을 쳐다보는 태양의 옆얼굴은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의 태도에 화가 난 모양이다. 하지만 태양이 저런 얼굴을 한다고 해서 이쪽에서 섣불리 말을 할 수는 없는 거다. 이 정도쯤이야 일부러 물어볼 것도 없다.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금방 잊혀질 거다. 

그럼. 그렇고 말고. 암. 그렇지.

“.........................”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도후는 핏발이 선 눈을 들어 위를 쳐다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거실 벽에 걸어진 작은 시계다. 끝이 현광 처리가 되어 있어서 캄캄해도 지금이 새벽 2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자리에 누운 것은 정확히 11시 반이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도후는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태유의 귓불에 새겨진 그 문신이 태양과 도대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거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대충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건 가면 갈수록 아니다. 너무너무 궁금해지고 바로 대답을 듣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태유의 귀에 있던 문신을 봤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는데 나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냐. 

잔뜩 인상을 쓴 도후는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 쥐었다. 끙끙 거리던 그는 다음 순간 이불을 발로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못 참겠다.”

더 참았다가는 사람 화병으로 죽게 생겼다. 지금도 목까지 뭐가 치밀고 올라와서 미칠 것 같은 상태였다. 헉헉 거린 도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의 방으로 갔다.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는 힘껏 돌리는데 그 순간 덜컥-하는 소리만 날 뿐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자.....잠가버린 거냐!”

아연한 표정을 지은 도후는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렸다. 

“야. 문 좀 열어봐.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거든?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그러니까...”

덜컥. 덜컥. 

“잠깐 문 좀 열어봐. 뭐 하나만 묻자. 응? 그러니까...!”

암만 손잡이를 흔들어대도 안에서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태양이 반응이 없는 것만큼 도후는 점점 더 초조하고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지금 일부러 문을 잠그고 안 열어주는 게 아닐까. 얼굴이 창백해진 도후는 잽싸게 문에 귀를 댔다. 정신을 집중하고 건너편의 움직임을 들으려 하는데 갑자기 귀가 소머즈 귀가 되었는지 새근새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태양의 숨소리다. 지금 태양은 일부러 문을 잠그고 안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고 있는 거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몸에서 힘이 빠진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도후는 문에 양 손을 댔다. 

이렇게 궁금한데. 답답해서 당장 듣지 않으면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데..! 

“제길!”

낮은 욕설을 토해낸 도후는 주먹으로 문을 쿵-하고 쳤다. 

“얼굴이 왜 이래? 화장이 하나도 안 먹잖아.”

남자의 말에 도후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있는 도후는 전신으로 말을 걸지 말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이상한 듯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여자는 붓으로 도후의 볼을 쿡쿡 찔렀다. 

“자기. 쉬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얼굴이 심각해?”

“................무슨 일이라....”

그 일이 무슨 일이라고 한다면 있기는 있었다. 

결국 도후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태유의 귓불에 있는 문신이 태양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얼마나 집요하게 생각을 하는지 본인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것에 대해서 정확한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은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당장 태양의 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형이 될 인물이다. 그러니까 태양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했다. 태양이 이쪽에게 뭔가를 숨기는 것도 없어야 했다. 조금은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지만 태양이 자신에게 달리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다. 태양이 확실하게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미칠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런 기분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고 정확히 새벽 5시가 되자 문이 열리고 태양이 밖으로 나왔다. 잠에서 덜 깬 건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태양은 문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쾡한 도후를 보고는 움찔했다. 귀신인줄 알았는지 반사적으로 주먹을 위로 들었지만 곧 알아보고는 허리를 아래로 숙였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말해줘.’

‘뭘 말해줘요? 그보다 왜 여기에 있는 건데요?’

인상을 쓴 태양은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빨리 정신을 차리기 위함인지 고개를 털기까지 하는 태양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던 도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유의 귓불에 있는 문신 어떻게 된 거야?’

‘그거 물어보려고 지금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에 있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도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의 앞에 섰다. 

자. 어제 저녁에 묻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던 것에 대해서 지금에서야 물어봤다. 지난 밤을 하얗게 지새우다가 겨우 물어본 거다. 그러니까 이제 나에게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줘. 그 문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태유와 과거에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이제 확실하게 이야기를.....!

‘내가 왜 그 일에 대해서 당신한테 말을 해야 하는 건데요?’

‘............에?’

‘왜 남의 과거를 그렇게 알고 싶어 해요? 스토커에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

여전히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며 태양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가 길게 하품을 한 태양은 팔꿈치로 허리를 찌르며 ‘비켜요. 화장실 갈 거예요.’라고 말하며 이쪽을 지나쳐 갔다. 탁-하고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도후는 그대로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아니야. 저런 말을 듣기 위해서 난 잠을 못자고 태양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어. 저런 말 따위가 아니라 조금 더 확실하고 긴 설명을 듣고 싶었던 거다. 태유의 귀에 난 문신은 말이지요-라고 시작되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데 왜 저런 반응이라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밤을 센 내가 이상하고도 미친놈 같다고 말하는 듯 한 저 행동은 이상하잖아!!

“...........내가 더 이상한 걸지도.....”

“응?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건지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되묻는다. 그것에 고개를 저은 도후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다시금 얼굴이 매달려 화장을 해주기 시작했다. 

“눈은 어떤 식으로 할까요?”

“눈매를 강조하고 그리고 눈썹에 이 하얀 깃털을 붙일 거야. 입술은 금색으로 할 거니까 뺨은 너무 강조하지 말아줘.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워 지니까 말야.”

“알았어요. 그 외에 머리 모양은요?”

“머리는 긴 가발을 쓸 거야. 도후야. 곱슬 거리는 걸로 할래? 긴 머리로 할래?”

묻는 말에 도후는 눈을 감은 채로 대꾸했다. 

“두개 다 주비했으면 다 쓸 거잖아. 편한 것부터 하지.”

“그러면 긴 머리부터 할게.”

“마음대로 해.”

건성으로 대꾸하는 것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평소 도후는 촬영이 있을 때마다 꼼꼼하게 그날 의상을 살피고 화장도 다 보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 다 귀찮다는 듯 손 놓고 눈만 감고 있다. 아침에 왔을 때 안색이 피로해보이긴 했는데 정말로 피곤한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다. 신입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중견들도 도후가 먼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도후가 있던 의자로 하얀 손이 내려온다. 

“오늘 일찍 왔네?”

딱 지금의 도후의 심기를 완전히 망쳐버리기에 충분한 목소리다. 나긋나긋함이 서려 있지만 그 속에 깔려있는 어떤 입자가 도후의 눈을 떠지게 만들었다. 눈을 까뒤집듯 뜬 도후는 의자를 잡고 허리를 숙인 채 웃음 띤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태유를 쳐다봤다.   

“안녕?”

“.......안녕.”

“이 옆에 자리 있는 거야?”

태유가 가리키는 쪽에는 도후의 짐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짐을 치워줄 것을 부탁하자 다들 신속하게 움직인다. 이상할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이다. 왜 저렇게 급하게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몇 번 눈을 깜박이는 동안 급하게 짐이 치워지고 빈자리에 태유가 앉았다. 

“고마워.”

“천만에.”

대꾸한 도후는 다시 거울을 쳐다봤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여기는 나만 사용하게 된 룸이잖아. 그런데 왜 태유가 들어온 거지?

어리바리 상태에서 태유가 나타나 갑자기 말을 걸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그걸 지적하면 분위기 되게 이상해질 것 같다. 때문에 이도저도 아는 상태로 초조하게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물러난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은 도후는 태유를 쳐다봤다. 

“그런데 너 왜 여기에 들어온 거야?”

“너랑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무슨 이야기?”

“내 귀여운 후배가 네 동생이 된 것 같아서 말야.”

그 말에 도후는 안색을 굳혔다. 

“너 혹시 내가 말하기 전부터 태양이가 내 동생이 될 걸 알고 있었던 것 아냐?”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알고 있었어? 우리 어머니 재혼 한다는 정보가 혹시 이 바닥에 세어나간 거야?”

“아직은 아무도 몰라. 단지 내가 태양에 대해서 알아보고 다니는데 그 그물에 네가 걸린 것뿐이지.”

“........뭐라고?”

“나는 태양이가 정말로 좋거든. 귀에 문신을 세길 정도로 말야. 그래서 태양이 몰래 그 녀석 조사를 하고 다니는데 너도 걸린 거란 이 말이지. 설마하니 너랑 태양이가 형제가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말야.”

아니 이 녀석은 안 그래도 평범하지 않으면서 왜 남의 뒤를 조사하고 다니는 거란 말인가. 그것에 대해서 태양은 모르고 있겠지? 모르고 있는 중에도 계속해서 타인에게 조사를 받고 감시를 당하고 있는 걸까. 허락을 받지 않은 도촬을 당할 때에도 기분이 나쁜데 하물며 자신에 대한 일이 다른 사람의 눈으로 확인되어서 건너건너로 알려지면 기분이 얼마나 안 좋을까. 그것에까지 생각이 미친 도후는 표정을 굳혔다. 

“그런 짓은 하지마. 태양이가 알면 기분 좋아할 것 같아?”

“좋아하진 않겠지. 분명 화를 내겠지. 하지만 태양이가 정말로 좋은걸. 그래서 난 태양이가 연락을 끊고 6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그 녀석만 쳐다보고 있는 거야.”

“6년이라니...그건 거의 스토커 수준....”

“맞아. 난 태양이 스토커야. 그래서 그 녀석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계속 쫓아다녔어.”

“........................”

아 또 이렇게 순순히 인정해 주시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도후는 태유를 노려봤다. 태유는 의자 손잡이에 팔을 올리고 도후 쪽으로 길게 몸을 내밀며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너 말야.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건들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건드리면 세게 부딪혀서 반으로 쪼개지거나 튕겨내지는 거야.”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는 거 아닌가. 그래서 박혀있던 돌이 굴러온 돌을 흉보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태유가 너무도 당연하게 말을 하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상당히 모호한 표정을 짓는 도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태유는 붉은 입술을 올렸다. 

“너도 태양이의 덫에 걸린 불쌍한 어린양이지만 그래도 난 중간에 나타나서 그 녀석을 빼앗아 가는 놈은 정말 싫어. 그걸 염두 해 줘.”

“지금 협박하는 거야?”

“협박하는 것 같아. 어떤 것 같아?”

“협박이잖아. 이건.”

바보라도 알겠다. 

태양이의 선배라는 것은 알겠지만 근 6년 동안 떨어져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거잖아. 그래서 멀리 떨어져서 남의 사생활이나 엿보고 알아내는 스토커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주제에 지금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란 말인가.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다. 어느 순간 눈앞에 있는 태유가 곱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마음에 맞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차갑게 굳은 도후의 표정에 태유는 의외라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런 표정 지을 줄도 아는 구나. 그만큼 태양이한테 진심이야.”

“진심이니 뭐니 하는 말은 집어치워. 애초에 네 행동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태양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싶으면 우선 태양이 앞에 당당이 서시지. 그런 식으로 뒤로 조사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는 걸 태양이가 알면 좋아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한 일에 대해서 태양이한테 말 할 거야?”

“그런 것 따위 말할 가치도 없어. 말 안 해.”

딱 잘라 말한 도후는 얼굴을 돌려 거울을 쳐다봤다. 완벽하게 이쪽을 무시하고 옆얼굴만을 보이는 도후의 행동에 태유의 표정이 묘해진다. 

“너 말야....”

“여기 나 혼자 사용해야 하는 곳이니까 나가줘.”

나가라는 말에도 태유는 미동이 없다. 그저 이쪽을 쭉 쳐다보는 것에 도후가 다시금 말했다. 

“나가.”

“알았어. 나가 드리지요. 유도후님.”

빈정거리는 말을 한 태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유가 나가는 순간까지 도후는 전신에 힘을 주고 있었다. 

태유가 그냥은 안 나갈 것 같았다. 뭐라도 한마디 더 할 줄 알았는데 도후의 예상과 달리 그냥 나가 버린다. 문이 닫히고 태유의 기척이 사라지자 도후는 혀를 차며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제길. 저 녀석은 뭐야.”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태양의 스토커잖아. 아니 왜 사람의 뒤를 6년 동안 조사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왜 태양을 귀에 문신으로 새기고 있냔 말이다. 사람 이름을 가지고 신체에 문신을 새겼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더만 사실은 정말 미친놈이었던 거다. 이걸 어떻게 할까 싶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후는 바로 폰을 꺼내 태양의 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릭-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태양은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지금 태양은 도서실에 와 있었다. 한참 공부를 하고 있던 소수의 몇몇 사람들은 웬 전화벨소리인가 싶어 노골적으로 투덜대는 소리를 냈다. 그것에 태양은 급히 전화를 꺼내 통화버튼을 누르고 책상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

이쪽이 전화를 진동으로 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하필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이 도후라는 것에 태양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이 인간이 아침에도 안 좋은 얼굴로 나가더니만 결국에는 사람을 이렇게 골탕 먹이는 구나. 

[지금 어디냐고? 왜 대답을 안 해?]

“지금 도서실이에요. 그래서 전화 못 받아요. 끊어요.”

[잠깐만 기다려! 오늘 도서실에서 몇 시에 나올 거야?]

“그건 알아서 뭐해요?”

[데려다 줄게.]

“당신 오늘 촬영 있다고 했잖아요. 데려다 주기는 뭘 데려다 줘요. 촬영 열심히 하고 사진 잘 찍기나 해요. 폰 꺼 둘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할 말만 한 태양은 도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바로 폰을 끄고 귀를 뗐다. 

“데려다 주기는 무슨.....갑자기 신경써주고 그래.”

중얼거린 태양은 폰을 책상 위에 올리고는 다시금 펜을 들었다. 

처음에는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태양이지만 점점 입가에 웃음이 생긴다. 그러지 말자고 머리로 생각은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온다. 피식-하고 웃은 태양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는....”

아침에 서로 안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 신경 쓰였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건 거다. 그 마음을 가상하게 생각해서 오늘 오라고 해줄까나. 모처럼 아량을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폰에 손을 데려는데 누군가 그런 태양의 어깨를 툭-하고 건드렸다. 얼굴을 들자 보이는 것은 진성이다. ‘뭐야. 이 녀석인가.’하는 기분으로 태양은 다시금 책으로 눈을 내렸다. 

“주말에 왜 도서실에 있어. 나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괜찮아. 공부 더 할래.”

“그러지 말고 일어나.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진성은 그냥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밥을 사줘야 했다. 밥을 사주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느끼고 있는 듯 무시무시할 정도로 눈을 번뜩이는 진성의 모습에 태양은 책을 덮고 그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진성아.”

“으...으응?”

갑자기 태양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진성은 당황한 듯 옆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태양이 손을 들어 그런 진성의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나한테 맛있는 거 사줘봤자 아무 득 없어. 차라리 여자친구에게 사주는 게 어떨까?”

“여자친구라니. 나 그런 거 없어.”

“없으면 만들어봐. 일 년 있으면 졸업인데 여자친구 없이 지나쳐 버리면 허탈하잖아.”

“아니. 괜찮아. 나 일학년 때 여자를 사귄 적도 있고....”

사귀긴 했지만 너무 태양을 챙기다가 채이고 말았다. 그것은 진성에게 있어 나름대로 아픈 과거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피하며 진성은 태양의 팔을 잡아서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너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보나마나 점심 굶을 거야.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 내가 정말 맛있는 거 사줄게.”

“괜찮다니까.”

“그러지 말고 빨리 일어나.”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진성이 집요하게 매달린다. 근처에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눈치를 주자 태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방 속에 책을 집어넣고 핸드폰을 들었다. 여전히 꺼져있는 폰을 내려다보던 태양은 가자며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태양이 따라서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억지로 따라 온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것에 진성은 팔을 흔들며 말했다. 

“이제 슬슬 더워진다. 그렇지?”

“그러네.”

“이번에 태양이 너 유독 공부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이번에야 말로 장학금 받는 거 아냐?”

“받으면 좋지.”

“맞다. 다음 주 수요일에 교수님이 밥 사주신다고 했는데 같이 갈래?”

“너만 부른 걸 텐데 내가 왜 가. 안 갈래.”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넌 교수님들이 예뻐하잖아.”

“별로 예쁨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무슨 말을 해도 태양의 짧은 대답으로 인해 전부 막혀 버린다. 더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어진 진성은 머뭇거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눈을 굴리던 진성은 슬그머니 태양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안경 위로 태양의 검은 머리카락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간혹가다 눈 속에 머리카락이 들어가면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터는 모습을 진성은 멍하니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태양은 진성을 쳐다봤고 그것에 움찔한 진성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런데 그 도후라는 사람하고는 많이 친해졌어?”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데?”

“아니. 왠지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 너 요즘 나랑 잘 안 놀고 일찍 집에 들어가잖아. 어제도 그렇고. 느낌이 집에 누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도후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말야. 내 말이 틀려?”

“아니. 틀리진 않아.”

태양의 긍정적인 대답에 용기를 얻은 진성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내색도 않고 둘 정말 사이가 좋아졌나봐. 완전히 형제 같은 느낌이야?”

“형제 같은 느낌이라...”

정말 형제라면 입맞춤 같은 것은 하지 않을 텐데. 혀를 집어넣어 목구멍까지 밀어 넣을 리도 없고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지도 않을 거다. 갑자기 도후의 성기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겠지.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 태양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전보다는 친해지긴 했지만 아직 형제사이라고 말하기는 애매모호한 단계야.”

“그래?”

“응. 그 문제는 더 말하기 싫으니까 묻지 마라.”

“......알았어.”

정말은 이것 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동안 이쪽과 너무 어울려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도 표현하고 싶었는데 태양이 저리도 딱 선을 그어놓으니 그것을 넘어갈 수가 없다. 억지로 파고 들어가며 분명 싫어할 테니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거다. 

그때 교문 밖으로 나오던 태양이 발을 멈추고 저 앞에 있는 서점을 가리켰다. 

“나 서점에 들렸다 갈게.”

“응? 서점에 무슨 일로?”

“잡지가 새로 나온 것 같아서 말야.”

태양은 손을 들어 서점 한 쪽에 있는 코너를 가리켰다. 과연 잡지가 많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양이 잡지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태양이 혼자서 서점으로 들어간다. 그런 태양의 뒤를 진성은 허겁지겁 따라 들어갔다. 태양은 잡지 코너 앞에 서서 이것저것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그런 태양의 뒤에 선 진성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 고를 건데?”

“잘 나온 잡지를 고를 거야.”

“잘 나온 잡지?”

그러니까 어떤 게 잘 나온 잡지를 고를 건지를 모르겠다. 

궁금해서 눈을 내린 진성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태양이 고르려 하는 잡지가 어떤 것인지 알아 버렸다. 잡지에는 눈이 번쩍 떠지는 예쁜 여자들과 외국인 모델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유도후라는 이름을 가진 모델도 있었다. 좋게 차려입고 폼을 잡은 채 이쪽을 쳐다보는 도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진성은 입술을 씰룩였다. 지금 이 느낌은 뭘까. 그저 잡지에 찍힌 사진 속의 인물과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묘하게 기가 죽는다. 슬그머니 눈을 내리자 태양이 바로 그 잡지를 들어올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두어번 잡지를 흩어본 태양은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사야겠다.”

태양의 손에 들린 잡지의 표지에는 도후가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이쪽을 쳐다보는 사내를 경계에 찬 눈으로 쳐다보며 진성은 꿍얼거렸다.  

“너 지금까지 잡지 산 적 없잖아.”

“아니. 전에도 산 적 있어.”

“.........유도후가 나온 잡지?”

“응.”

“유도후가 뭐가 좋다고 잡지를 사. 돈 주고 사지마. 그냥 실물로 볼 수도 있잖아. 거기다 이런 건 전부 화장발에 조명발, 그리고 옷발이야. 속지마. 유도후 그렇게 잘 생긴 얼굴도 아니잖아.”

태양이 그답지 않게 잡지를 사는 행동 자체가 진성에게 큰 위기로 느껴졌다. 이대로 태양이 먼 곳으로 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려서 전처럼 어울려 놀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은 마음으로 진성은 초조했다. 되는 대로 말을 하고 얼굴을 든 진성은 태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실수를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싸늘하기까지 한 태양의 그 눈빛을 받은 진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진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태양은 말했다. 

“유도후가 네 친구냐. 적어도 3살은 많은 사람이야. 함부로 부르지 마. 알았어?”

“으.....으응.”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태양이 얼굴을 돌린다. 바로 계산대 앞에 선 태양은 잡지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계산해 주세요.”

“11500원입니다.”

돈을 지불 한 태양은 비닐봉지에 담아져서 나오는 잡지를 들고 진성을 쳐다봤다.  

“나가자.”

“응.”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인 진성은 태양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서점 밖으로 나온 진성은 바로 태양의 뒤를 쫓지 않았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미동이 없는 것에 태양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진성을 돌아봤다. 

“뭐하고 있어. 대충 저 앞에 있는 식당에서 밥 먹고 다시 들어가자.”

“태양아. 미안한데 나 그냥 먼저 갈게.”

“뭐?”

먼저 밥을 사준다고 한 것은 그쪽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되 거였으면 애초에 도서실에서 안 나왔어도 되는 거잖아. 심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서있자 그런 태양의 눈치를 보던 진성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정말....미안!!”

마지막에 미안이라는 말을 크게 말한 진성은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깜박이는 신호등을 건너서는 빠르게 사라져 버리는 진성의 모습에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전부터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은 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한 것 같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생각한 태양은 슬슬 식당 쪽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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