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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 무슨 말을 들었나 싶을 정도다. 도후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허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도 잠시 손가락을 세워 머리 옆에 빙글빙글 돌리며 그는 말했다.
“이거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냐?”
꼬맹이 주제에 이상하게 말을 한다 싶더니만 머리가 좀 아픈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너무 진지해졌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도후는 동석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기다려! 어디를 가!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았으면서!”
“윽! 이 꼬맹이가 정말 미쳤나!”
무시하고 그냥 가버리려 했지만 동석이 집요하게 다리에 매달리는 덕분에 제대로 갈 수가 없다.
이 녀석 정말 머리가 이상한 녀석 아냐? 괜히 미친 꼬맹이를 건드린 건가 싶었던 도후는 동석을 떨어뜨릴 마음으로 작은 머리통을 양 손으로 붙잡았다.
“이 꼬맹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어서 떨어져! 떨어지라고!”
“떨어질 수 없어! 우리 태양씨에게서 떨어진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
“우리 태양씨라니!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
“우리 태양씨더러 우리 태양씨라고 하는데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야!”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어디서 이런 물건이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태양은 자기 근처에 이런 스토커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인상을 쓴 도후는 어린애고 뭐고 그냥 머리를 잡고 냅다 바깥으로 던져버릴까-하고 진지하게 생각을 했다. 그때 묘하게 시선이 느껴진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얼굴을 든 도후는 근처를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이쪽을 쳐다보는 몇몇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씰룩였다.
“아. 이...이건 말입니다...”
낭패다. 근처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이쪽에서 보기에는 꼬마 쪽이 백번 천 번 잘못을 하고 있는 거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가가 문제다. 분명 꼬마를 괴롭히는 어른 정도로만 보일 텐데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탈피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황해서 굳어 있으려니 구세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후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얼굴을 돌려 정확히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팔짱을 끼고 있는 태양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태양아! 이 미친 꼬맹이 좀 어떻게 좀 해봐.”
“미친 꼬맹이라니....”
중얼거린 태양은 눈을 내려 그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동석을 쳐다봤다.
도후를 상대할 때만 해도 눈에 독기가 가득했던 동석이지만 태양이 나타난 순간 그 독기는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금세 순한 양의 상태가 된 동석은 슬그머니 아래로 눈을 내리고 딴 짓을 해댔다. 그런 동석을 빤히 쳐다본 채로 태양은 물었다.
“너 이 사람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냐?”
“.........아니요.”
“그럼 나한테 볼 일 있냐?”
“아니요. 없어요.”
너무도 순하고 착한 모습이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볼 일이 있겠어요.’라는 듯 슬그머니 잡고 있던 도후의 다리를 놓은 동석은 양 손을 앞에 모으고 곁눈질로 태양을 쳐다봤다. 그 얌전한 모습에 도후는 기가 막혀 크게 입을 벌렸다. 도후와 동석을 번갈아서 보던 태양은 턱을 바깥쪽으로 들며 말했다.
“아무 볼 일 없으면 이만 가봐.”
“실례하겠습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동석은 도후의 곁을 떠났다. 태양의 옆으로 지나쳐 바로 단지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에 도후는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옆에 오는 태양을 쳐다봤다.
“저.....저 꼬마 도대체 정체가 뭐야?”
“2호집에 사는 6살짜리 유딩이에요. 왜? 관심 있어요?”
“관심은 무슨! 나 정말 황당해서...! 저거 이상한 꼬맹이 아냐? 어렸을 적에 약을 잘 못 먹어서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약 잘 못 먹어서 머리가 이상하면 침이라도 흘렸겠죠. 그런데 침은 안 흘리잖아요? 그럼 미친 게 아니죠.”
“침을 흘려야 미친 건가? 저거 정밀 검사 받아보라고 해. 나 정말 저렇게 어이없는 꼬마는 또 처음이네. 아니. 이 아파트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인간들이 많은 거야.”
도후의 말에 태양은 눈을 위로 들어 도후를 쳐다봤다.
“이상한 인간에 나도 포함되어 있어요?”
“당연하지. 가슴에 손을 올려봐. 너도 불포함일 것 같았어?”
“흐음. 그런가.”
도후에게 있어 이쪽은 이상한 인간으로 구분 되어 있는 건가. 그럼 그 이상한 인간이 오라고 달려오는 도후는 뭐란 말인가. 아직 자신에 대해서 뭘 모르고 있다면서 태양은 도후를 지나쳐 슈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태양의 뒤를 쫓으며 도후는 물었다.
“그런데 웬 일이야?”
“심부름 보낸 인간이 유치하게 유딩이랑 싸우고 있기에 동네 창피해서 직접 내려왔죠.”
도후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걸 걱정을 할 거라면 애초에 이쪽을 심부름 안 시켰으면 좋았잖아.
“다음부터 여기올 때 더 조심하세요. 내 장담하건데 한 시간도 안 돼서 허우대만 멀쩡해서는 꼬마를 상대로 언성을 높인 몰상식한 청년이 이 아파트 10층에 드나들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게 될 테니까 말이죠.”
“허우대만 멀쩡? 몰상식? 나를 두고 말하는 거야?”
“그럼 댁 말고 달리 또 누가 있어요.”
“너 정말..!”
“허우대 멀쩡에 몰상식 외에 다른 별명도 얻고 싶으면 더 소리쳐 봐요.”
“잇..!”
“대파 사오라고 했더니 유딩이랑 몸싸움이라니. 나 정말 낯 뜨거워서...”
말을 하면서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진 건지 옆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헛웃음을 흘리는 것에 도후는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그 녀석이 이상했던 거라니까!”
“어련하시겠어요.”
“...........!!!”
무슨 말을 해도 도저히 들어줄 것 같지 않은 태양의 태도에 도후는 괜한 가슴만 두드려댔다. 그런 도후를 안 보는 척 하면서 다 보고 있었던 태양은 재미있다는 듯 입술 한쪽을 슬그머니 올렸다.
도후만 갔다면 아파트 앞에 있는 슈퍼에 들어갔을 거다. 하지만 태양도 같이 나왔기에 그들은 단지에서 벗어나 저 아래에 있는 마트까지 갔다. 물론 자신의 몰골에 불만이 컸던 도후는 정색을 하며 싫다고 했지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태양이 아니다. 말없이 한번 쳐다보는 것으로 도후의 반항을 잠재운 태양은 얌전해진 도후는 데리고 마트로 들어갔다. 계속 꿍얼거리며 불만을 말할 것 같았던 도후지만 의외로 마트로 들어오는 순간 조용해 져서는 팔에 노란 장바구니를 끼고 과자 코너에 가서 섰다. 설마 싶었는데 바로 과자 봉지 하나를 들고는 그것을 태양 앞으로 내밀었다.
“나 이것도 먹을래.”
“그게 뭔데요?”
“과자.”
설마 싶어서 물어보는데 당당하게 과자라고 한다. 정말로 저걸 살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거다. 갈수록 이미지와 안 어울리는 짓을 한다며 태양은 허리에 손을 댄 채로 도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돈 가지고 나왔어요?”
“안 가지고 나왔는데.”
“나중에 돈 있으면 그때 사 먹어요. 남한테 빈대 붙으려 하지 말고.”
“들어가서 돈 줄 테니까 지금은 좀 사자. 응?”
“돈 줄 거예요? 그러면 사도 돼요.”
아까 눈 차갑게 뜨면서 ‘빈대’운운을 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꽤 산뜻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에 기가 막혀서 가만히 있으려니 태양이 안쪽으로 들어가서면서 당면을 들었다 놨다.
원래는 필요한 대파만 딱 골라서 나오려고 했는데 어느새 장을 보는 게 되어 버렸다. 오늘 갑자기 슈퍼가 세일을 해서 여러 가지 품목이 써서 그냥 가는 것도 어쩐지 아깝다 싶다. 집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어떤 건가 싶어 머리로 정리를 하는데 자꾸만 당면으로 눈이 쏠린다. 그러고 보니 잡채를 안 먹은지 오래 됐구나. 아버지가 해주는 당면이 정말 맛있는데 그걸 못 먹으니...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태양은 눈을 들어 뒤를 쳐다봤다. 그런 그의 눈에 과자를 고르고 있는 도후가 보인다. 고작 과자 고르는 일인데 되게 진지한 눈을 하고 있다. 하나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한쪽 팔에 들고 있는 바구니에 과자만 채워가는 모습에 태양은 굽힌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저기요. 잡채 할 줄 알아요?”
“응? 할 줄 아는데. 왜?”
“그러면 이거 사갈게요.”
잘 되었다며 당면을 들어 바구니에 넣는 태양과 달리 도후는 바로 표정이 구겨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는 그는 입술을 씰룩이며 물었다.
“나더러 잡채 해달라는 거야?”
“할 줄 알면 좀 해줘요. 일 있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 쉬게 되었다면서요.”
그러면서 이쪽은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쪽으로 가 버리려 하는 것에 도후는 급히 태양의 옆으로 가서 불만을 토로했다.
“나도 휴식 취할 거거든. 여기에 네가 먹고 싶어하는 요리 하러 온 건 절대로 아니라고!”
“몇 번이나 우리 집에서 잤으면 보답 좀 해봐요. 잡채 하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요.”
“잡채 하는데 한 시간 넘게 걸려! 그리고 내가 너희 집에서 자고 싶어서 잤냐?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태양의 눈동자가 위로 향하는 순간 도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모 모르게 그러니까......그러니까....”
“말이나 제대로 해봐요. 아, 잡채 해주면 내가 카레해줄 게요. 그러면 됐죠? 근데 전에 잘못 만들어서 짜게 됐는데 이번에는 잘 될지 어떨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며 카레를 집어 들더니 옆 칸으로 가 버리는 태양의 모습에 도후는 옆으로 얼굴을 내렸다.
세상 다른 사람 다 상대하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데 저 인간만은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만만치 않다. 그래도 나름 잘 나가는 유도후가 왜 저런 녀석에게 이런 꼴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혀를 찬 그는 바구니에서 몇 개의 과자를 덜어내고 야채 코너로 들어갔다. 그러자 상추를 고르던 태양은 얼굴을 든다.
“왜 여기에 왔어요?”
“잡채 만들라며. 당면만 사면 잡채가 만들어지는 줄 알아? 하여간 살림 하나 못하는 녀석들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지.”
시금치를 고르고 버섯을 들고 그리고 당근을 집는다. 당근은 아직 집에 조금 남아 있는데. 그래도 잘 먹으니까 더 사도 상관은 없을 거다. 거기다 이렇게 싸니까. 태양은 야채를 고르는 도후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맛있게 해줘야 해요. 맛없으면 나 안 먹어요.”
“해주면 맛없어도 그냥 먹어야지 안 먹는 건 또 뭐야.”
투덜대면서도 물건 고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집어 들었던 것들 중에서 조금 이상한 게 있다 싶으면 아래로 손을 내려 그것을 또 골라낸다. 의외로 꼼꼼한 도후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뭔가 싶어 폰을 연 태양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태양아. 지금 어디야?]
“집 앞에 있는 마트인데.”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오늘 회의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
태양은 위로 눈을 올렸다.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킨 태양은 전에 학교에서 진성에게 토요일에 있는 회의에 참석한다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아. 그렇지. 토요일 2시에 있다고 그랬지....벌써 12시 넘었네.”
[왜? 못 올 것 같아?]
“아니. 못 가는 건 아니지만...”
중얼거리며 태양은 눈을 들어 도후를 쳐다봤다. 당근을 잡고 있는 도후는 잔뜩 인상을 쓰며 ‘뭐야? 지금 날 두고 어디로 가려는 거야? 가면 죽을 줄 알아.’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도후와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그저 사람 좋게만 웃고 있을 진성을 떠올리면 태양은 짧은 한숨을 쉬며 폰을 고쳐 잡았다.
“2시까지 가면 되지? 있다가 보자.”
[지금 마트라면서. 올 수 있는 거야?]
“한 시간 씻고 나와서 학교에 가면 되지. 갈 수 있어. 조금 있다가 보자.”
[그래. 그러면 있다가 보자.]
진성이 먼저 전화를 끊고 태양도 폰을 닫았다. 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태양은 도후를 쳐다봤다.
“이쪽을 먼저 약속한 거라서 빼낼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넌 학교에 가고 난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지. 나 이거 다시 집어넣는다?”
“가긴 어디를 가요. 나 돌아오면 잡채 해줘야죠. 나 잡채 먹고 싶단 말이에요.”
도후는 바로 입을 벌렸다. 기가 막혀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만 태양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기만 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일단 필요한 것만 사고 들어가요. 시간 촉박해서 안 되겠어요.”
“내가 차로 태워줄 테니까 괜히 서두르지마. 전에 30분도 안 걸리더만.”
“데려다 줄 거예요?”
태양은 눈을 빛내며 도후를 쳐다봤다. 그것에 아차 싶었던 도후지만 태양이 저렇게 쳐다보는데 이제서 그런 말 안했다고 할 수도 없다. 하여간 아무 생각 없이 말부터 나가는 것은 삼가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도후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차가 있는데 안 데려다 주기도 뭐하고....”
“그러면 우리 다른 것도 사가요. 라면도 필요한데 잘 됐다.”
당장 바깥으로 나갈 것 같았던 태양은 바로 라면이 쌓여있는 곳으로 걸어가다 뒤를 쳐다보며 도후를 불렀다.
“뭐해요. 빨리 와요.”
“나원 참...”
저 녀석은 사양이라는 것을 아는 걸까. 그 전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도 없는 건가. 하여간 양심 쪽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상실한 녀석이라며 혀를 찬 도후는 껄렁거리는 걸음으로 태양의 옆으로 갔다.
옷은 제대로 챙겨 입었고, 모자도 확실하게 쓰고 있다. 거기다가 핸드폰이랑 가방도 잘 챙겼다. 주머니에 지갑이 있는 것도 확인하고 나서야 태양은 도후를 쳐다봤다.
“다녀올게요. 나 잡채 해줘야 해요?”
“잡채도 하고 소불고기도 해 줄 테니까 그만 좀 말해. 귀에 딱지 않겠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귀에 대면서 투명스럽게 말을 하는 모습에 태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슬그머니 입술 꼬리를 올렸다.
“배고프면 뭐라도 사먹어요. 내가 돈 줄까요?”
“됐거든? 나도 돈 무지 많아.”
“그래요? 난 돈 없으면 천원이라도 공짜로 주려고 했죠.”
땅 파도 천원이 안 나온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저 태양의 돈은 공짜로 받기 싫다. 나중에 천원을 받아 갔다는 이유로 또 말도 안 되는 것을 시킬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운전대에 손을 올린 도후는 막 문을 열고 내려가는 태양에 저도 모르게 옆으로 길게 몸을 내밀어 유리창을 내리고 태양을 불렀다. 그것에 태양이 가방을 바로 잡으려던 상태 그대로 얼굴을 내려 도후를 쳐다봤다.
“몇 시에 끝나는데?”
“잘 모르겠어요. 끝나는 대로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요.”
“그래? 뭐 그러면....”
들어가서 이것저것 만들고 있으면 금방 들어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열린 유리문을 내린 도후는 차를 후진 시켰다. 도후의 차가 도로로 진입하고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태양은 바로 피식-하고 웃으면서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정말로 이쪽이 싫다면 저렇게 일부러 돌아갈 시간을 확인하지도 않는다. 알게 모르게 이쪽에 신경을 잘 쓴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도 입을 맞추려 한 거겠지.
“입맞춤인가..”
처음에는 어쩌다가 하게 된 것이었는데 한번 하고 나니 그 느낌도 사뭇 달라진다. 사실 아침에 도후의 입에서 담배가 섞인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면 그냥 가만히 있었을 거다. 입을 맞추는 도중에 눈을 뜨면 도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하기도 했는데 역시나 그 냄새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종종 입맞춤을 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미리 금연을 시키는 것이 어떨까 싶다. 도후가 들으면 바로 펄쩍 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태양은 언덕을 올라가 저 위에 있는 학생회관 건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기 복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누군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자 진성과 몇몇 일학년들이다. 급하지 않으니 화장실은 그냥 건너뛰자고 생각하며 태양은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성아.”
“아. 태양이 왔구나.”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는 척을 하는 진성과 달리 일학년들은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혹여라도 눈이 마주치면 은근슬쩍 옆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도 눈에 보였지만 태양은 모른 척 하며 물었다.
“다 온 거야?”
“한명이 안 왔는데 그 녀석이 열쇠를 들고 있어서 못 들어가고 있어.”
“진성이 넌 열쇠는 어떻게 하고?”
“그 녀석이 먼저 올 일이 있다고 해서 맡겼는데 일이 이렇게 되 버리네.”
그럼 다 왔는데 열쇠를 가지고 있는 그 녀석만 안 온 거란 말인가. ‘전화는?’하고 물어보자 진성은 고개를 저었다. 못 받는 건지 일부러 안 받는 건지 모르겠다. 점점 꼬이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에 짧은 한숨을 쉰 태양은 근처에 있던 여학생을 쳐다봤다.
“머리 핀 있어?”
“네?”
“안 쓰는 거 하나 있으면 좀 빌려줘.”
“네? 네. 알았어요.”
가방을 열어 뒤적이더니 얇은 검은 실핀을 꺼내준다.
“여기요.”
“나중에 하나 사줄게.”
핀을 잡아 일자로 편 태양은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손으로 실핀을 잡아 열쇠 구멍 속에 밀어 넣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서 어떨지 모르겠다. 안 열리면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달칵-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됐다. 그래도 실력은 녹슬지 않은 모양이다. 실핀을 꺼내 주머니에 넣은 태양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자들을 외면하며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굉장하다. 어떻게 하는 거야?”
“비밀이야. 다 알고 있으면 안 되잖아.”
진성의 등을 밀어 들어가게 한 태양도 안에 들어갔다.
학회실은 오랜만에 오는 거지만 이거 지나치게 정리가 안 되어있다. 이제 여기는 이학년보다 일학년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곳이 되었을 텐데 왜 이렇게 지저분한건지 모르겠다. 일학년 때에는 태양도 있었고 다른 꼼꼼한 동기도 있어서 언제나 깔끔했는데 말이다. 신을 벗고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싶어 망설이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어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 태양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로 말했다.
“안 오는 녀석은 안 오는 거고 일단 올 사람들은 다 왔으니까 시작하자.”
“뭐가 그렇게 급해? 무슨 약속 있어?”
“집에 사람이 있어서 그래.”
태양의 말에 진성은 눈을 깜박였다. 자세한 언급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손님이 누구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는지 표정이 사뭇 이상하게 변한다. 그것을 못 본 척 하며 태양은 맞은편에 있던 일학년을 쳐다봤다.
남자 일학년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얼굴을 내렸다. 뭘 저렇게 긴장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쪽에서 그쪽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태양과 일학년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성은 가방에서 꺼낸 노트를 펼치며 말했다.
“5월 말에 학교 행사 때 주점을 하기로 했잖아. 그때 요리는 어떤 걸로 할지를 정해야 하고 술은 어떤 걸로 할지도 정해야 해. 그 외에 달리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고 말을 해줘.”
멍석을 깔면 그 위에 뭔가 놓일 줄 알았다. 하지만 다들 말이 없다. 이런저런 회의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테니 뭐라도 좀 생각하고 와야 할 텐데 다들 입 없는 벙어리 마냥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애들도 남자애들도 딴청을 피우는 것에 진성이 눈을 깜박였다.
“아무도 없나?”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을 거다.
난처해진 건지 노트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기만 하는 진성의 행동에 태양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은 그냥 자리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오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다.
“파전이 기본으로 들어가야지. 그리고 계란말이랑 오징어 부침이랑 김치부침도 넣어. 그 외에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같은 것도 넣고, 과자는 강냉이 아니면 새우깡으로 통일하고. 과일 안주는 단가가 비싸고 바로 안 팔리면 적자가 나니까 통조림을 사용해서 과일 후르츠를 넣던가.”
갑작스런 태양의 말에 진성과 일학년들이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본다. 한 번에 몰리는 시선에 무안해질 만도 한 대 태양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마른 오징어도 괜찮고, 고추나 오이 당근 같은 건 좀 썰어서 고추장이랑 같이 기본 안주로 넣는 것도 괜찮지 않아? 과 예산이 어느 정도야? 이백은 넘어?”
“이백은 되는 것 같아.”
“그 정도면 괜찮겠네. 술은 맥주랑 소주도 통일하고. 아는 데가 있으니까 거기 연결해서 사면 도매점이랑 비슷하게 끊을 수 있을 거야.”
술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것에 진성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일학년 때에도 태양이 거의 알아봤던 것 같다. 어디서 안 건지 모르겠지만 재료나 주류를 싸게 파는 곳을 알고 있어서 거기를 이용해서 다행히 적자가 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태양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미안하기도 하다. 급히 노트를 펼치고 말한 것을 적어 내려가는 진성에게서 눈을 뗀 태양은 여전히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일학년들을 쳐다봤다.
“지금 말 안 하면 그냥 내가 말한 대로 할 거야. 나중에 가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이러쿵저러쿵 말 나오면 안 되는 거 알지? 할 말이 많으면 먼저 할 일을 한 후에 하는 거야.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는 대학생도 있나? 우리 옆집 6살짜리도 아는 건데 말야.”
태양이 계속해서 건드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처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가만히 있는 것 같더니만 이번에는 눈을 들어 이쪽을 쳐다본다. 아니다. 쳐다보는 것에 아니라 노려보는 거다. 딴에는 꽤 분위기를 잡는다고 하지만 태양의 눈에는 우스울 뿐이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태양은 입술의 끝을 살짝 비틀어 올렸다.
“할 말 있으면 하라고.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나직이 말하며 눈빛을 가라앉힌다. 태양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전과 사뭇 달랐다. 뭐라 설명을 할 수 없지만 날카롭게 잘 갈아진 칼을 앞에 두고 있는 듯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다. 목이 바싹 타고 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남자 후배는 슬그머니 눈을 내렸다.
진작 그럴 것이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린 태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진성을 돌아봤다.
“진성아. 다음으로 넘어가자.”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진성은 태양과 후배들을 번갈아 봤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물어볼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신경이 쓰이면서도 진성은 계속해서 회의를 진행시켜나갔다.
처음부터 비협조적이었던 후배들은 내내 마찬가지였다. 계속 말이 없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듯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에 태양이 전부 다 말을 하고 진성이 그것에 대해서 반박을 했다. 결과적으로 태양과 진성이 알아서 전부 다 회의를 해버린 꼴이다. 덕분에 빨리 끝나긴 했다. 태양은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40분으로 끝났군. 이게 1차 회의였지? 다음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 그 때에는 이학년도 좀 부르고 조교님도 불러. 2번째 때에 완전히 정하게. 그리고 음식이나 천막 만드는 일은 너희 일학년 몫이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지금 물어봐줘. 행사하기 이틀 전에 갑자기 물어보면 가만 안 있는다.”
“.....아...알았어요.”
이번에는 말을 않고 가만히 있기가 뭐했던지 여자애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것을 흘겨본 태양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진성도 가방에 노트를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을 구겨 신고 밖으로 나오는 중에도 일학년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안녕히 가세요.’라는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태양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늘은 이쯤 하자는 느낌으로 그냥 학생회관을 나왔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진성은 언덕을 내려가는 즈음에 태양의 옆으로 와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기합이 굉장히 들어가 있다? 너 답지 않아?”
“가만히 있으면 물로 보잖아. 아무것도 아닌 녀석들에게 괜히 우습게 보이긴 싫어.”
“그건 그렇지...”
알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진성은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네가 있으니까 일 굉장히 수월하게 끝났다. 고마워.”
“별 말씀을. 나 그러면 들어가 본다.”
“에? 들어갈 거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안 사줘도 괜찮아. 너도 이만 들어가 있어. 안녕.”
손을 흔든 태양은 진성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내려가 버린다. 그것에 진성은 발을 멈추고 점점 멀어지는 태양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주말에는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오늘 태양을 보면 맛있는 거 사주고 영화도 같이 보면서 즐거운 토요일 저녁을 보내려 했는데 말이다. 일정보다 훨씬 일찍 끝난 어정쩡한 시간인지라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성은 점점 작아지는 태양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태양아...’라는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 앞에 선 태양은 문을 열려다 말았다. 왜냐하면 열쇠가 주머니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열쇠가 없는데 어떻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문에 대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진다. 정말 차갑고 딱딱했지만 건너편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지금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손도 들어서 문에 대봤다. 그러자 갑자기 안쪽에서 달칵-하고 뭔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이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는 순간 문을 열고 나오던 도후가 얼굴을 들다가 태양을 발견한다.
“어? 너 언제 왔어?”
도후는 반쯤 열어져 있던 문을 다 열었다.
“들어오지 않고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열쇠를 안 들고 갔거든요.”
“그러면 벨을 누르면 되잖아.”
벨만 누르면 바로 문을 열어줄 텐데 왜 가만히 서있는 거냐고 묻는 듯 한 눈빛을 하고 있는 도후지만 그런 도후를 보고도 태양은 이렇다 할 반응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것에 도후는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왜 그래? 내 얼굴 이상해?”
“이상해요. 머리는 떡 지고 턱수염은 조금 나고. 보기 흉해요.”
“...........뭐?”
“들어갈게요.”
태양은 도후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다. 그것에 입술을 씰룩인 도후는 문을 다시 닫고 태양을 뒤따라 들어갔다.
지금 모습이 그렇게 이상한가 싶다. 머리를 안 감긴 했지만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거기다 턱수염이 이 정도면 양호한 거다. 이게 뭐가 어떠냐면서 손바닥으로 턱을 슬슬 문지르자 태양이 방에 들어가 가방과 잠바를 벗고 나오면서 코를 킁킁 거렸다.
“불고기 냄새 나네요? 잡채는요?”
“잡채는 저녁에 하려고 재료만 썰어놨지. 참기름이 없는 것 같아서 사러 나가던 중에 너랑 마주친 거야.”
“참기름 창고에 있어요.”
“내가 너희 집에 살았던 것도 아니고 창고에 참기름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베란다에 나가면 창고에 있다니까요. 가 봐요.”
“좀 가져다주면 안 되냐.”
“난 나갔다 들어왔으니까 이제 씻어야 하잖아요.”
“그래그래. 알았다. 무슨 말을 못한 다니까.”
길게 한숨을 쉰 도후는 베란다로 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태양은 주방으로 바로 들어가 후라이팬에 담긴 불고기 한 점을 들어 입에 넣었다. 조금 뜨거워서 후후-하고 바람을 불긴 했지만 곧 오물거리면서 씹은 태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에 묻은 양념을 쪽쪽 빨았다.
“맛있네.”
“야! 손으로 먹으면 어떻게 해! 들어가서 얼른 씻고 안 나와?!”
한 손에 참기름을 들고 나오던 도후는 맨손으로 고기를 집어먹는 태양의 행동에 바로 달려왔다. 옆에 서서 쳐다보지만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는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도후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눈빛에 지레 움찔한 도후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씨..씻고 나와서 먹으라고.”
“알았어요. 예민하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일부러 도후 보라는 듯 고기 한 점을 들어 다시금 입에 넣고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 모습에 도후는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렸다.
“저 녀석 저거....”
투덜댄 도후는 주방으로 들어가 싱크대 위에 참기름을 올리고 나무 주걱으로 고기를 뒤적였다.
모처럼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해두고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표시를 한다거나 말이라도 한마디 잘 해주면 좋지 않은가. 그런데 저렇게 틱틱 거리다니. 두고 봐라. 다음에는 정말 국물도 없다고 생각하던 도후는 달칵-하는 소리에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웃통을 다 벗고 나오는 태양이 보인다.
“읏..!”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손바닥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나오던 태양이 도후를 쳐다본다.
“왜 그래요?”
“너 왜 그런 꼴로 나와?”
“옷 갈아입으려고요. 바지도 벗으려다 만 건데 왜요? 바지도 벗어줘요?”
“벗지마! 방에 들어가서 벗어!”
어디서 그런 행동을 하냐는 듯 양 손을 휙휙 저으며 정색을 하는 도후의 행동에 태양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이상하다는 듯한 느낌으로 쳐다보지만 도후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달리 말을 할 것도 없었던 태양은 배를 문지르며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저 녀석 정말이지 사람 놀라게...”
투덜대던 도후는 자세를 바로하다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상반신을 벗은 모습을 남자가 봤을 때 자신과 같은 반응을 취할까. 도후는 눈을 위로 들었다.
지금껏 모델 활동을 하면서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여자 앞에서도 훌렁훌렁 옷을 벗었고 그건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게 일이고 또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랬는데 조금 전에는 왜 그랬나 싶다. 괜히 예민한 반응을 취해서 분위기가 정말 이상하게 느껴지게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태양의 벗은 상반신을 봤을 때에는 정말 놀랐다. 지나치게 피부가 하얗고 또 날씬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허리도 굉장히 가늘어 보이고....
하긴 옷을 입고 있어도 허리가 가늘어 보이긴 했다. 양 손을 벌리면 다 잡히지 않을까. 다 안 잡혀도 그래도 무리 없이 감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녀석 남자치고는 꽤 가느니까 말이다. 그리고 얼굴도 작고 머리카락도 정말 찰랑거리지. 오늘 눈을 떴을 때 팔에 머리를 베고 있는데도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조금 저리긴 했지만 그건 오래 팔을 베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다.
“........입술도 붉었지.”
립스틱을 바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지나치게 붉었다.
마치 촉촉하게 잘 익은 사과 같은....
“지금 뭐해요? 타잖아요.”
“헉!!”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도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파란 티를 입고 나온 태양이 뒷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올려다보고 있다.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도후는 갑자기 나타난 태양에 지레 찔려서는 정색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뭐..뭐야!”
“탄다고요.”
“탄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다. 그때 이상한 냄새가 났다. 뭔가 눌러 붙은 냄새가 난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코를 킁킁 대던 도후는 아래로 눈을 내려 지글거리고 끓는 불고기를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우왓! 눌러 붙었다!”
당황한 도후는 후라이팬의 손잡이를 잡고 바닥을 마구 긁었다. 모처럼 잘 익은 고기가 눌러 붙거나 살짝 탄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잠깐 헛생각을 했다고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낭패 섞인 표정을 지은 도후는 급히 불을 끄고 밸브를 잠갔다. 가스렌지 앞에 서서 가만히 서있기만 하려니 위로 손을 든 태양의 도후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 조금 탄 부분도 잘 먹으니까 거기는 내가 먹을 게요.”
도후는 얼굴을 내려 태양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옆으로 얼굴을 숙이는 것이 보인다.
방금 세수를 하고 나왔기 때문일까. 머리가 젖어서 촉촉해 보인다. 굵게 뭉치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이마나 볼에 달라붙어 있다. 피부도 한결 깨끗해 보이고 무엇보다 입술이 정말 붉어 보인다. 그러지 말자고 생각은 하면서도 저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도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내려 태양에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