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2)

 14

두 공기를 다 먹고 배가 부르다며 물을 홀짝이고 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던 태양이 ‘아.’하면서 얼굴을 들며 말했다. 

“내가 정리 할 테니까 방걸레질 좀 해줘요.”

“내가 왜?!”

“좀 해줘요. 그러면 그쪽이 설거지를 하든가.”

태양의 말에 도후는 눈을 굴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걸레질보다는 설거지가 백번 천 번 더 나을 것 같다.

“내가 설거지 할게.”

“그러면 그렇게 해요.”

태양은 자기 밥그릇만 딱 치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입안을 헹구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기를 당했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긴 했지만 이제서 뭐라 하기도 좀 그렇다. 불만이 있어도 차마 말을 하지 못한 채 도후는 그릇을 싱크대 안에 집어넣고 반찬을 냉장고에 넣었다. 다 먹은 찌개 그릇들도 싱크대에 넣고 수세미에 퐁퐁을 뿌렸다. 고무장갑은 불편해서 끼지 않고 그냥 맨 손으로 열심히 그릇을 닦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태양이 거실 바닥에 엎드려서는 걸레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의외로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거실 바닥을 닦는 그 모습에 도후도 괜히 더 열심히 설거지를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수저와 젓가락을 씻고 수저통에 넣은 도후는 물 묻은 손을 싱크대에 달려있던 수건에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나 다 했....”

“사과 좀 깎아 봐요. 먹고 싶다.”

“......................”

방금 설거지를 끝내고 온 사람한테 지금 저게 할 말인가 싶다. 

요즘 살림을 하는 주부들이 때때로 남편에게 살의를 느낀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때의 기분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후는 의외로 성실하게 사과를 예쁘게 깎았다. 식탁에 앉아 세 개의 사과를 깎은 도후는 그것을 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태양에게 내밀었다.

“먹어.”

“나 이거 빨고 올게요. 기다려요.”

도후를 지나쳐 간 태양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걸레를 빠는지 물 트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것 때문에 신경질을 내기도 뭐했던 도후는 거실 한쪽 바닥에 앉아 사과를 들어 입에 넣었다. 

달고 시원하다. 잘 고른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다리를 죽 뻗은 도후는 아래로 눈을 내려 바닥을 손가락으로 쓱 문질렀다. 과연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는다. 저 녀석 꼼꼼하다니까. 손가락을 비빈 도후는 여전히 물소리가 나는 화장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 빨리와. 막 깔을 때 먹어야 맛있단 말야.”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한 번 더 물 트는 소리가 나더니 곧 태양이 옷에 손을 닦으며 밖으로 나온다. 

바로 이리로 올 것 같더니만 그게 아니라 현관으로 쪽에 붙어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저기가 호수 아저씨의 방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들고 있는 사과를 베어 무는데 태양이 이불을 한손에 끌어안고 나왔다. 

“일어나요.”

“그건 또 뭐야?”

“맨 바닥에 앉아있으면 추우니까 까는 거잖아요.”

그 말에 도후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한쪽에 이불을 펼쳐서 두드리는 태양의 모습에 도후는 사과를 한입에 넣고는 말했다.  

“그냥 소파를 사지?”

“그것도 일, 이만원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원래 맨 바닥에서 사는 게 편해요.”

“소파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

“그렇게 좋은 거면 형이 좀 사줘요.”

“그럴 때만 형이냐.”

다른 때는 옆집 개 부르듯 부르면서 말이다. 

코웃음을 친 도후는 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잽싸게 이불 위로 올라갔다. 

아 좋다. 역시 맨 바닥 보다는 이불 하나 까니까 훨씬 낫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운 무릎에 올린 다리를 까닥이던 도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티비를 켜봤자 재미없는 드라마만 할 거고, 만화책을 본다고 해도 저건 너무 엄하다. 도후는 방에 들어가서는 전공서적을 한 아름 들고 오는 태양을 쳐다보며 물었다. 

“다른 만화책 없어?”

“가져다가 봐요. 내 방 책꽂이에 있어요.”

“책꽂이? 그런 거 없었잖아.”

“책상 아래에 있어요. 그리고 베란다 쪽에도 있어요.”

책상 아래에는 책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도후는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둘러보자 저 안쪽에 낡은 책장이 보인다. 저런 곳에 책장을 둬도 괜찮을까 싶어 그리로 가본 도후는 엄청난 양의 만화책이 빼백하게 꽂혀 있는 것을 보고는 ‘오옷.’하는 소리를 냈다. 그 중에서 시리즈로 된 것을 하나 빼고는 거실로 나와 책을 흔들었다. 

“나 이거 본다.”

“마음대로 해요.”

태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금 책장 앞으로 간 도후는 그곳에서 한 아름의 만화책을 꺼내서 거실로 들어왔다. 재빨리 이불 위로 올라가 들고 온 만화책을 머리맡에 둔 도후는 막 자리에 엎드리려다가 옆자리에 엎드려서는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있는 태양을 확인하고는 바로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공부요.”

“무슨 공부? 중간고사 공부? 언제부터 시험 보는데 벌써부터 공부를 하는 건데?”

“5월 둘째주부터 해요. 나 공부하니까 이제 말 그만 붙여요.”

5월부터 시험 보는데 뭘 벌써부터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주나 일주일 전부터 슬슬 하면 되는 게 아닌가. 뭐,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엎드려 만화책을 읽던 도후는 사각 거리는 소리에 옆으로 눈을 내렸다. 보아하니 태양이 일일이 페이지를 확인하며 열심히 글을 읽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부터 읽는 거야?”

“네.”

“그러지 말고 중요한 것만 골라서 읽지 그래.”

“말만 하지 말고 중요한 게 뭔지 좀 알려줘 봐요.”

태양은 중요한 것을 읽으라든가 핵심만 외우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그런 걸 감 잡을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일일이 보는 거다. 그런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건가. 그런 느낌으로 반항 적으로 쳐다보자 도후도 그런 태양의 시선에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네가 공부하는 거니까 중요한 게 뭐인지는 네가 더 잘 알거 아냐.”

“난 잘 몰라요. 그러니까 알려달라고요.”

“나원 참.”

그냥 무시하고 만화책을 읽으면 그만일 테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가만히 두면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일일이 외우고만 있을 거다. 다른 때에는 똑 부러지고 요령 좋게 살 것 같은 녀석이 곰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까 괜히 더 답답하다. 도후는 태양의 손에서 책과 펜을 가지고 가서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여기랑 여기를 읽지마. 어차피 중복되는 거잖아. 그리고 이건 큰제목 아래에 소제목 외우고 나머지는 이해만 해.”

“이해를 하라고요?”

“다음에 생각할 때 대충 떠올릴 수 있을 만큼만 기억해 두라고. 그리고 이건 안 해도 돼.”

도후가 갑자기 중간에 10장을 그냥 넘겨버리는 것에 태양은 그의 손을 잡으며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왜요? 왜 그냥 넘어가는 건데요?”

“앞이랑 중복되잖아. 그리고 중간이랑 중복되고 그리고 이런 건 원래 안 나와.”

빼백하게 글자가 적힌 부분에 당당하게 엑스를 그리는 도후의 행동에 불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지은 태양은 도후를 흘겨보며 말했다. 

“장담할 수 있어요?”

“장담할 수 있어.”

“나중에 시험에 나오면 어떻게 해요?”

“내가 장을 지지면 되잖아. 그러니까 이건 보지마. 괜한 시간 낭비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것을 봐. 이거랑. 이것도.”

도후도 처음 보는 책일 것이 분명한데 이상할 정도로 당당하게 엑스를 그리고 동그라미를 표시한다. 처음에는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었던 태양도 도후가 너무도 당당하게 그러니까 가만히 있게 된다. 

입 딱 다물고 도후가 하는 말만 듣고 있던 태양은 시험 범위를 거의 다 체크해주는 도후의 행동에 미심적은 어조로 물었다. 

“우리 교수님이랑 친해요? 왜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찍어주는 건데요?”

“보면 알잖아. 어디에서 뭐가 나올지 정도는 말야. 이런 것은 원래 다 빤하게 보이기 마련이야.”

그 빤하게 보이는 것이 왜 내 눈에는 안 보이느냔 말야. 

영 기분이 껄끄러웠던 태양은 도후가 가지고 간 책을 앞으로 잡아끌었다. 

“복지 전공 했어요?”

“아니. 의대 들어갔는데?”

“........의대도 특차로 들어갈 수 있어요?”

“특차는 무슨. 나 정시로 정정당당하게 들어갔거든.”

“정말이요?”

“정말이지. 거의 만점 받아서 대학 들어갔다니까. 나 외고에 있을 때에도 전교 5등 안에는 들었어. 공부 머리는 있었어.”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사람 말 좀 믿어라.”

투덜댄 도후는 책에 줄을 치며 점점 범위를 줄여나갔다. 

처음에는 막 줄을 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까 교수가 몇 번이나 반복을 했던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로 정시로 의대에 들어간 건가? 꽤 오랫동안 모델 일을 했던 것 같던데 그걸로 어찌어찌 들어간 거 아냐. 그런데 의대도 특차가 되나. 안 되는 것 같은데. 

“정말로 정시로 들어갔어요? 의대에 들어간 거 맞아요? 그런데 왜 모델을 해요? 의사되면 좋잖아요.”

“원래 연예인 일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 돌아가신 아버지가 배우여서 말야.”

“아버지가 배우셨어요?”

태양의 순진한 물음에 도후는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라는 기분마저 든다. 도대체 몰라도 이쪽을 너무 모른다. 그래도 꽤 유명해서 최근 이런저런 말들이 하나 둘씩 매스컴을 타고 있는데 말이다. 

“너 나에 대해서 정말 모르는 구나.”

“알아야 할 건 또 뭔데요?”

바로 옆에 엎드려 팔위에 턱을 올리고 동그란 눈을 꿈뻑이면서 ‘내가 왜 너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건데?’라고 말하는 듯 한 그 표정에 말문이 막힌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진 도후는 ‘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건가.’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내렸다. 그렇게 하는데 알게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든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여전히 책에 줄을 그으면서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 엄청 유명했어. 진짜 대단한 분이셨다고. 그래서 어렸을 적에 종종 촬영장이나 세트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좋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처음에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내가 연기 쪽에는 영 잼병이고, 사진을 찍히는 일은 그나마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모델 일을 하나, 둘씩 시작하게 되었고 말야. 뭐, 아버지가 유명한 배우라서 친한 분들이 아직 연예계 쪽에 많이 남아 계시거든. 그분들 덕분으로 요새 CF도 많이 찍고 뭐, 그러고 있지.”

“아. 그래서 전에 아줌마가 말 안 들으면 일 잘라낸다고 하셨구나.”

“그래. 우리 엄마가 그 분에게는 아직도 말발이 좀 서시거든.”

도후의 말에 태양은 눈이 가늘게 떠진다. ‘뭐야. 역시나 그런 거였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에 도후도 살짝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 일을 맡았던 거예요?”

“왜 그런 눈으로 봐? 그 분들도 바보는 아니야. 정말 제폼 이미지랑 안 받으면 고용하지 않을게 당연하잖아. 어느 정도 맞으니까 날 사용하는 거야. 그리고 나도 무턱대고 일 맡는 편도 아니란 말야. 이래봬도 가려서 받는 편이라고.”

“돈 벌 때 확 번다면서요. 그렇게 할 거면 가리지 말고 찍으라니까요.”

“그렇게 하는 게 자기 수명 줄이는 일이라니까. 됐다. 이거나 봐라.”

도후는 태양이 가지고 간 책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다른 쪽에 둔 만화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제 이쪽은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듯 들고 있는 만화책에 집중하는 모습에 태양도 서적으로 눈을 내렸다. 

도후가 얼마나 잘 해놨나 확인하려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면 얼마나 잘 해줬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의외로 괜찮다. 도후가 체크한 부분을 읽고 있으려니 전에 교수가 했던 수업 내용이 다시금 귀에서 들리는 것 같다. 귀찮아서 대충대충 하는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태양은 새삼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당신 제법이네요.”

“공부 머리는 있었다니까.”

“흐음.”

정말 정시로 의대에 들어간 모양이다. 도후를 알아가면서 의외인 면들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 놀라운 것은 바로 의대다. 

그렇구나. 의대에 들어갈 정도로 머리가 좋았구나. 의대에 갈 정도면 정말 머리가 좋다는 거니까 다른 책도 보여줘서 좀 정리를 해달라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이건 뭔가 싶어 얼굴을 들자 도후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머리는 좋을 것 같은데 정말 공부 머리는 안 돌아가는 거냐?”

“어렸을 때부터 공부 하라는 말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 아저씨는 그렇다 쳐도 너희 어머니도 그랬어?”

“그 여자 이야기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네요.”

평소와 달리 태양의 목소리는 한 단계 낮아져 있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지금 태양의 기분이 안 좋고, 모친에 대한 화제를 꺼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일순 괜한 것을 건드린 건가 싶었던 도후는 ‘...그럼 공부마저 해.’라는 말을 하고는 슬그머니 책을 들어 위로 올렸다. 

그냥 무시를 하려 했지만 알게 모르게 신경 쓰인다. 

아저씨는 태양이 중학교 때에 모친과 이혼을 했다고 들었는데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이혼을 한 걸까. 좋은 식으로 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 태양이 표정을 싹 굳히고 사전에 차단을 해 버렸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을 할 거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무언의 의사가 팍팍 전해진다. 저렇게 노골적인 정도로 의사를 피력하는데 말을 걸 만큼 도후는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분위기 파악이라는 것을 할 줄 알았던 도후는 옆에 쌓아둔 만화책을 하나씩 줄여 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자세하게 읽었다. 너무 엎드려서 책을 읽어서 팔이 저리고 가슴이 아프다. 원래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옆에 도후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이런 자세로 있게 되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양은 얼굴을 들어 도후를 쳐다봤다.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웬걸, 도후는 벌써 잠들어 있었다. 태양은 손을 들어 도후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봐요. 일어나 봐요. 여기서 자고 갈 거예요?”

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뺨을 건드리지만 도후는 되려 인상을 쓰며 그런 태양의 손을 치워내 버렸다. 그리고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길게 코를 곤다. 

“그냥 자게 둬야하나.”

중얼거리듯 말을 한 태양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의 커다란 창문을 잘 닫고 주방의 불을 껐다. 방에 책을 올려두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태양은 다시 거실로 나와 도후가 먹다 만 사과를 들고 가 랩핑에 싼 후에 냉장고에 넣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이를 닦고 나온 태양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잠이 든 도후를 쳐다봤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전에 한 번 들어서 옮기려다가 도후가 굉장히 무거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 받으려고 들어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태양은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바닥을 짚었다. 따뜻하다. 하긴 몇 시간 전부터 계속 난방을 돌렸는데 따뜻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난방비 잘 나간다. 절반 정도는 이 인간한테 받아내야지.”

혼자 있을 때에는 씻을 때만 잠깐 올리고 비 올 때에도 한 시간 정도 올리고 끄고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집에 오면 하루 내내 돌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난방비가 도대체 얼마가 더 나오는 거란 말인가. 일일이 계산하기도 머리가 아파진 태양은 얼굴을 내려 잠든 도후의 얼굴을 쳐다봤다. 

잘 생겼다. 잠자는 얼굴은 이렇게 괜찮은데 눈만 뜨고 있으면 왜 자꾸 건드리고 싶어지는 걸까. 그것도 참 병이라고 생각하면서 태양은 손가락을 들어 도후의 코를 꾸욱 하고 찔렀다. 너무 높아서 진짜인가 싶어 눌러봤는데 잘 눌러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엄지를 세워 눈꼬리를 슬며시 위로 올려봤다. 그러자 으음-하는 소리를 낸 도후가 옆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자 태양은 손을 들어 도후의 가슴을 잡고 똑바로 눕혔다. 그러자 도후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생긴다. 그러지 말라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살살 문지르자 금세 평온한 얼굴이 된다. 그래. 이렇게 편한 얼굴을 할 거면서 애초에 왜 인상을 구기느냔 말이다.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 팔에 얇은 이불을 가지고 온 그는 거실의 불을 끄고는 도후가 누워있는 곳으로 갔다. 이불에 누운 태양은 가지고 온 것을 넓게 펼치고 덮은 후에 도후의 팔에 머리를 벴다. 그러자 으음-하고 소리를 낸 도후가 태양 쪽으로 몸을 돌려 팔을 들어 그 몸을 끌어안았다. 손으로 태양의 등을 두어번 토닥이더니 길게 한숨을 쉬며 몸에서 힘을 뺀다. 그 상태로 도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의외로 잠버릇이 얌전하다. 

“이상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남의 침대에 들어오거나 몸을 끌어안아서 이상한 잠버릇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태양은 눈을 감았다. 

도후는 살짝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팔이 저린 것이 더 잘 느껴진다. 

“팔 저려....”

왜 이렇게 팔이 저린지 모르겠다. 요즘 무리를 해서 또 팔에 피가 잘 통하지 않게 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뜬 도후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잠든 태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헛숨을 삼켰다. 

뭐야! 왜 또 이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야! 왜 그런 거냐고! 

순간적으로 태양과 입을 맞췄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모처럼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제 같이 있는 내내 태양이 내색을 하지 않아서 이쪽도 그냥 편하게 있을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왜 그런 기억이 떠오르는 거냔 말이다. 

낭패스럽기만 했던 도후는 머리를 부여잡고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어버버-가리고 있던 그는 어떻게든 태양의 얼굴을 치워내려 아래로 눈을 내렸다. 그러자 다시금 보이는 태양의 잠든 얼굴과 붉은 입술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꿀꺽.

갑자기 목이 말랐다. 그래서 침을 삼킨 거지 이건 그 외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한 변명의 말을 하지만 다 부질없을 뿐이다. 자꾸만 태양의 입술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러지 말자며 태양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쳐내려 했지만 밀치기는 커녕 되레 얼굴을 가까이하게 된다. 

왜 이렇게 태양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 아니구나. 태양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쪽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거다. 윽. 그런 그만둬.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이건 범죄야. 하게 되면 너는 벗어날 수 없는 진창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그만 둬. 멈추라고. 제발 멈추란....!! 

“냄새나요.”

“헛...!”

막 입을 벌리고 태양의 입술을 누르려는 순간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도후는 급히 얼굴을 뒤로 물렸고, 이쪽 팔에 머리를 기댄 채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태양이 보였다. 

“입 맞추고 싶으면 양치하고 와요.”

태양의 말에 도후는 반사적으로 혀를 움직여 입 안을 훔쳤다. 

입 냄새? 그런 거 안 나는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어리버리한 생각을 하던 도후는 아차 싶었다. 정말로 입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하고야 말았다. 태양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던 도후는 슬그머니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그런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한 손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난 담배 피는 사람의 입에서 나는 냄새 제일 싫어해요. 엄청 구리단 말이에요.”

엄청 구리다니. 

태양은 별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말에 도후는 가슴에 수십개의 비수가 꽂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깼으면 이만 일어나요. 벌써 11시잖아요. 언제까지 잘 거예요?”

태양의 말에도 도후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서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려니 태양이 손을 치우며 ‘배고프다.’라고 중얼거린다. 그것에 도후는 팔을 내리고 배를 문지르는 태양을 쳐다봤다. 태양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후는 일단 눈을 붙이면 몇 시에 자도 일단 11시나 12시까지 자야 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의 정황을 살펴보자면 태양은 이쪽에게 완전히 끌어 안겨져 있었다. 때문에 아침 일찍 눈을 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드는 생각에 도후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혹시 나 때문에 늦게 잔거야?”

“맞아요. 당신 때문에 지금까지 배고파도 참고 누워있었어요. 일어나려고 하면 잡아당기고 갑자기 입을 맞추려 하는데 어떻게 일어나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 짓도 안 하니까 나도 죽은 척 같이 누워 있었던 거예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하는 말에 도후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한다.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는 듯 움찔거리며 몸을 떨면서 점점 창백해지는 도후의 얼굴에 태양은 속으로 혀를 내밀었다. 역시나 단순하다. 이대로 말로 찜 쩌 먹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같이 누워 있었던 거지? 넌 네 방에서 자야 하잖아.”

“그걸 물어볼 때에요? 나 지금 배고프다고요.”

“....그....그래서 뭐 어쩌라고?”

도후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 태양은 그 쪽으로 몸을 돌리고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태양에 놀란 듯 도후는 몸을 움츠렸지만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어제 내가 밥 했으면 오늘은 당신이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 걸로 당연한 일을 찾을 수도 있는 거냐?

심히 어이없기는 하지만 상황부터 도후가 태양에게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도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악-하고 물 트는 소리를 들으며 태양은 다시금 이불 위로 쓰러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워 있던 곳에 있었지만 꼼지락 거리며 점점 도후가 있었던 곳으로 가게 된다. 도후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에 엎드리게 된 태양은 눈을 감고 그의 체취를 맡았다. 담배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그 속에 도후의 향기도 확실히 있었다. 그래서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잘 잤다.”

중얼거린 태양은 이불에 볼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태양이 아직 이불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을 때 화장실에 들어간 도후는 진지하기만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눈을 들어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새빨간 물이 들어있었다. 

“말해봐라. 유도후. 빤히 쳐다보지만 말고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입이 있으면 한 번 말을 해보란 말야.”

하긴 입이 있어도 지금 이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낭패가 짙은 얼굴이 된 도후는 길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내렸다.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도후는 물속에 집어넣은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그래도 저릿함은 완전히 가시질 않았다. 

팔이 저린 것은 이곳에 태양이 머리를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눈을 떴을 때 태양의 얼굴이 보이는 것에 놀라긴 했지만 그 얼굴을 밀쳐 내거나 치워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럽기만 해서 계속해서 머리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입을 맞추려 했을 뿐이다.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르자 도후는 얼굴을 붉힌 채로 주먹을 쥐어 물을 후려쳤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튄 물이 옷이 튀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도후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원래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을 뿐 더러, 남자를 상대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왜 태양을 상대로 입을 맞추려 했단 말인가. 그때 자신의 몸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게 아니면 갑자기 내 몸 속에 흐르고 있던 남자를 좋아하는 인자가 눈을 뜬 걸까? 그런데 그런 인자가 있기나 하는 걸까?

“왜 이렇게 안 나와요. 나도 화장실 들어가고 싶단 말이에요. 안 나올 거예요?”

“나..나갈 거야! 잠깐만 기다려...!”

도후는 급히 세수를 하고 입 안을 헹궜다. 그냥 헹구는 것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려니 벽에 걸어진 작은 수납장에서 포장이 채 뜯어지지 않은 칫솔이 보인다. 그것을 하나 끄집어내서는 포장을 뜯고 바로 치약을 묻히고 양치를 했다. 처음에는 대충 닦으려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점점 열심히 하게 된다. 열과 성의를 다 해서 양치를 하고 혓바닥과 입천장까지 닦은 도후는 손바닥에 하-하고 냄새를 뱉어내서 치약 냄새밖에 안 나는 것에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길게 한숨을 쉬던 것도 잠시 그는 몸을 돌려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내고 문 앞에 섰다. 들고 있던 수건을 주물럭거리다가 걸이에 다시 올려두긴 했지만 선뜻 나갈 수가 없다. 

도후는 긴장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태양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망설이던 그는 문을 열고 슬그머니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싱크대 앞에 서있는 태양이다. 

화장실에 들어가고 싶다는 사람이 왜 저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차마 먼저 말을 걸 수가 없었던 도후는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태양이 이쪽을 쳐다보는 순간 도후는 바로 다른 쪽을 쳐다봤다. 눈에 다 보이는 도후의 행동에 태양은 피식-하고 웃으면서 얼굴을 아래로 했다. 

“뭘 그렇게 무안해해요.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태양의 말에 도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심적 동요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에 바로 정색을 하며 태양을 쳐다보고 말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한창 혈기 왕성할 때에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요.”

그리 말하며 태양은 들고 있던 고추의 끝에 쪼옥-하고 입을 맞췄다. 그것에 바로 도후의 얼굴이 괴상하게 구겨진다. ‘너...너너...!’라면서 태양에게 삿대질을 하던 도후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는지 냅다 몸을 돌려 태양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자기 윗도리를 가지고 나와 베란다로 나가 버린다. 바깥 창을 열고 바로 담배를 입에 무는 도후의 모습에 태양은 고추를 내리고 중얼거렸다. 

“귀엽기는....”

저도 모르는 사이 중얼거린 태양은 도마 위에 깻잎을 모아 넣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별 생각 없이 냉장고를 뒤적이던 태양의 얼굴이 다음 순간 의외의 빛이 떠오른다. 

“에. 없네?”

어제 도후가 사온 재료들로 모처럼 소불고기를 해먹으려 했더니 파가 없다. 파가 없으면 안 되는데. 파를 굉장히 좋아했던 태양은 주변을 둘러보다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고 있는 도후를 쳐다봤다. 

심부름꾼 발견이다. 

회심의 표정을 지은 태양은 냉장고 문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란다에 선 도후는 인상을 팍 쓴 채로 담배 연기를 뻐금뻐금 뱉어냈다. 

도대체가 저 녀석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민망해야 할 화제에 대해서 저렇듯 태연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래도 되는 거냔 말이다. 뭐 신경을 쓰고 외면을 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등의 행동을 했다면 둘 사이가 굉장히 어색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보단 차라리 얼굴을 붉히는 게 훨씬 귀엽겠다. 애초에 얼굴을 붉히는 태양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인상을 팍팍 쓴 채로 계속 담배를 피고 있으려니 뒤에서 드르륵-하는 소리가 난다. 뭔가 싶어 뒤를 쳐다보자 활짝 연 창문에 살짝 몸을 기대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그 순간 너무 놀란 도후는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켁! 쿨럭쿨럭쿨럭!!”

“왜 갑자기 그래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지금 너는 귀신보다 훨씬 질이 나빠!

실제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던 도후는 기침을 하며 한 손으로 목을 주물럭거렸다. 다른 손에 끼고 있던 담배를 창 바깥쪽으로 내민 그는 태양을 흘겨보며 투명스럽게 말했다. 

“뭐 때문에 나온 거야. 담배 연기 맡지 말고 나가 있어.”

“나가서 파 좀 사와요.”

“........지금 뭐라는 거야?”

“파 사오라고요. 대파. 다시 말해줘요? 아니면 대파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으로 그려줘요?”

“잠깐 기다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대파를 사오라는 거야?”

“그래요. 당신더러 대파 사오라는 거예요. 사올 돈 정도는 줄 테니까 그렇게 너무 쫄진 말아요.”

설마 돈이 없어서 이렇게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겠는가. 

“잠깐 기다려봐.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대파를 사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놀면서 담배나 한가롭게 피는 당신에게 대파 사오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너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좀 유명한 사람이거든. 뭐 사러 나갔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들길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그렇게 좋은 차 몰고 화려한 옷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다녔어요?”

“.......................”

도후는 천천히 아래로 눈을 내리떴다. 태양의 말을 듣고 보니 그건 그렇다. 그동안 자신이 하고 다녔던 몰골은 완전히 ‘나 연예인이야. 알아봐 줘.’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서 대파나 사와요. 여기 이천원. 거스름돈은 가져도 돼요. 심부름 값이니까. 담배 피지 말고 막대 사탕이나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있어요,”

이천원을 내밀지만 도후는 그것을 바로 받아들지 않았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이천원만 쳐다보고 있는 것에 긴 한숨을 쉰 태영은 도후의 주머니에 억지로 이천원은 구겨 넣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발걸음도 가볍게 혼자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태양의 모습에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지금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거란 말인가. 뭐 전부터 배고프니 뭐 사와라. 저거 사와라 라는 경우가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나.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안 좋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딱히 거절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투덜댄 도후는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대충 비벼 끄고는 구석에 넣어둔 뒤에 거실로 들어왔다. 입고 있던 옷을 다시금 태양의 방에 걸어둔 그는 주방에 있는 태양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겉옷이나 좀 줘봐. 이런 꼴로 나갈 수는 없잖아.”

“입고 왔던 옷 입고 가요.”

“그거랑 지금 입은 옷이랑 어울려?”

바지는 츄리닝인데 위에 옷을 양복 같은 느낌이 나는 옷을 걸쳐 입으면 확실히 보기에 이상할 거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어 태양은 호수 방으로 들어가 파란 츄리닝을 들고 왔다. 그것을 내밀자 바로 도후의 표정이 굳어진다. 

입을 것 가지고 오라서 가지고 왔는데 왜 쳐다만 보고 입지 않는지 모르겠다. 태양은 뭘 하냐는 듯 들고 있는 옷을 흔들었다. 그러자 길게 한숨을 쉰 도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옷을 입었다. 좀 작은 것 같다. 팔을 두어번 흔든 도후는 이 상태 그대로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호수의 방 안쪽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문 바로 옆에 거울이 있다. 잘 되었다며 불을 켜고 호수의 방에 들어가서 옷 입을 꼴을 살핀 도후의 표정이 바로 구겨진다. 

옷이 너무 작았다. 팔도 작고 폼도 작았다. 츄리닝 바지에 맞지도 않은 파란 츄리닝을 입고 있으니 정말 우스운 꼴이다. 이건 생활 백수도 아니고 지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이런 모습으로는 어디에 가서 모델이라는 말도 꺼낼 수 없을 거다. 확-하고 얼굴을 붉힌 도후는 바로 바깥으로 나와 주방에 있는 태양을 불렀다.

“이게 뭐야?”

“나름 잘 어울려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저런 말을 하니 더 속이 터진다. 주먹을 쥐고 가슴을 두드리며 하늘을 쳐다보며 하-하는 소리를 낸 도후는 다음 순간 눈빛을 착 가라앉히며 태양을 쳐다봤다. 

“진담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지?”

“진담 아닌 건 어떻게 또 알아냈네요.”

“너 정말...”

바로 얼굴을 구기며 인상을 쓰는 도후에 태양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방으로 들어간 태양은 늘 쓰던 캡모자를 들고 와 도후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거라도 써요.”

“이런 꼴로 돌아다니다가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괜찮아요. 그런 꼴로 있는데 누가 유도후인 줄 알겠어요. 평일 낮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할 일 없는 백수 정도로 생각하겠죠.”

“너 정말....”

“다녀와요. 이러다가 계속 여기에 있게 생겼잖아요.”

계속 여기에 있으면서 태양과 쓸데없는 말싸움만 하게 될 거다. 그건 이쪽도 싫어하는 것이지만 지금 자신의 몰골이 이 모양이니 선뜻 발을 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나 싶어 몇 번 망설이던 도후는 ‘에잇.’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 한쪽에 있던 슬리퍼를 구겨 신고 문을 열자 태양이 바깥쪽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한다. 

“대파 잘 사와요. 알았죠?”

“쳇. 나도 모른다고.”

꿍얼거린 도후는 슬리퍼를 찍찍 끌고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편안한 자세로 있던 도후지만 점점 몸에 힘이 들어간다. 살짝 인상을 쓴 그는 손을 들어 입고 있는 파란 츄리닝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바지를 확인했다. 모자가 잘 씌어져 있는지 손으로 눌러보기도 한 그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마스크라도 하고 올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태양이 왜 다시 왔느냐고 뭐라 할 것이 분명했다. 

나 분명히 잘 나가는 모델 맞는데 왜 지금 이런 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라며 도후는 한숨을 푹푹 쉬며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마침 밖으로 나오는 아이와 마주쳤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도후는 이 아이가 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던 녀석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하필이면 저런 녀석과 마주칠 것이 뭐라면서 도후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도후를 지나쳐 복도로 나오던 동석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발을 멈추고 도후를 쳐다봤다. 다급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암만 봐도 이상하다. 

“잠깐만요!”

문이 닫히기 직전에 급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동석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는 도후의 앞에 가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동석의 행동에 도후는 인상을 썼다. 이 녀석아 혹시 뭔가를 눈치 챈 건가 싶어 당황한 도후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은근히 옆으로 돌리는 것에 동석의 눈이 점점 가늘어진다. 

동석은 생각했다. 이 남자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고 말이다. 동석의 예리한 눈이 쉴새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참동안 눈을 굴리던 동석은 뭔가를 떠올리고는 크게 입을 벌리며 도후를 가리켰다. 

“그 녀석이다!!”

“.......그 녀석이라니....”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녀석이라는 거냐. 하여간 말 한번 예쁘게 한다. 입술을 씰룩인 도후는 동석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여기서 꼬마를 상대하는 것보다 그냥 밖으로 나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던 도후는 걸음을 서둘렀다. 급히 바깥으로 나가는 도후지만 그런 그를 그냥 보내줄 동석이 아니다. 동석은 집요하게 도후의 뒤를 쫓았다. 

“이봐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길을 막듯이 선 동석이지만 옆으로 피해서 가면 못 지나갈 것도 없었다. 무시하고 그냥 지나갈까 싶어 갈 방향을 잡고 있는데 그런 도후를 빤히 쳐다보던 동석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전에 그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던 몰상식한 아저씨 맞죠?”

“몰상식이라니. 이 쥐톨만한게..”

입이 뚫려서 말만 하면 다인 줄 아는 모양이다. 이놈의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은 왜 이렇게들 입이 험한 건지 모르겠다. 냅다 동석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도후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동석을 쳐다봤다. 키가 큰 어른이 노려보는 데도 동석은 기 한 번 죽지 않고 점점 더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전에 태양씨 집 앞에 있던 그 놈팽이야. 그렇죠? 내 말이 맞죠?”

“태양씨?”

도후의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렸다. 

농팽이라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그를 자극 시키는 것은 바로 태양씨라는 부분이다. 아니. 이 꼬맹이는 나이가 몇이나 된다고 태양에게 무려 태양씨라고 부르는 거란 말인가.

“너 지금 몇 살이야?”

“내가 몇 살인지 알아서 뭐하려고요?”

“너 연장자를 부를 때에는 그에 걸맞는 호칭을 붙이라고 배웠어, 못 배웠어? 태양이가 네 친구냐? 어디서 태양씨라고 불러? 형이라고 부르지 못해?”

말로 해도 울컥거리는 화가 풀리지 않는다. 급기야 도후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동석의 머리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도후가 머리를 칠 때마다 뒷걸음질을 치던 동석은 곧 다리에 힘을 주며 도후를 노려봤다. 

“이 아저씨가 지금 누구 머리를 건드리는 거야!!”

“이 자식이. 내가 형이지 왜 아저씨야!!”

“형은 무슨! 아저씨 주제에!!”

“나 아저씨 아니야! 형이라니까! 아직 서른도 안 됐거든!!”

“서른은 무슨! 백 살은 다 되 보인다!!”

“백 살이라니!! 너 백 살이 이렇게 피부 탱탱하게 잘 생긴 거 봤어!”

“잘생긴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래!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쪽 팔리지도 않냐?!”

“이 녀석이 정말이지...!”

어리지만 않으면 바로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을 거다. 거꾸로 들어서 탈탈 털어줬을 거고, 귀를 주욱 늘려서 경로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놨을 거다. 정말 확 해버릴까도 싶었지만 이쪽은 아이보다 족히 스물은 넘게 나이를 먹었다. 침착하자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동안 도후에게 밀쳐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싹싹 문지르며 동석이 크게 외쳤다.  

“내가 좋은 말로 할 테니까 잘 들어! 앞으로 태양씨에게 접근하지마!!”

“........뭐라고?”

이제는 존대고 뭐고 없다. 

팔을 뻗어 도후에게 삿대질을 한 동석은 목에 혈압마크까지 세운 채로 악을 썼다. 

“태양씨한테 접근하지 말란 말야! 그 사람은 내 사람이라고!!”

동석의 말에 도후는 크게 입을 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