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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에서 문자가 왔다는 소리가 났다. 의자에 앉아 있던 도후는 가방에 손을 넣어 폰을 끄집어냈다.
[나 배고픈데 고기반찬 먹고 싶어.]
“...................”
굳이 누가 보냈는지 확인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문자였다.
간단하고 귀엽다면 귀엽다고 할 수 있는 문자였지만 그 문자를 보는 도후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인상을 팍 쓴 채로 도후는 태양이 보낸 문자를 내려다봤다. 보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몇 번이나 고민을 했다. 이 문자에 답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아주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얼굴을 숙였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어? 누구한테 온 거야?”
“보지마.”
도후는 바로 폴더를 닫고는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행동에 도후의 뒤에 서있던 여자가 허리를 세우며 묻는다.
“수상하네. 애인이야?”
“알거 없잖아.”
하여간 남의 일에 일일이 참견을 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 저리로 떨어져 있으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지만 여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남자 탈의실에 들어왔으면서도 테이블을 건드리거나 의자를 잡고 몸을 옆으로 비튼다. 그러더니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도후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봤다.
“옷 갈아입을 거니까 나가줘.”
“뭐 어때. 그냥 갈아입어 안 보고 있을게.”
안 보고 있는 다고 하면서 눈은 이쪽으로 고정되어 있다.
촬영을 하던 때의 의상을 그대로 입고 와서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차림을 하고 있으면서 왜 저렇게 당당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저러고 싶으냐면서 길게 한숨을 쉰 도후는 여자 쪽에서 몸을 돌리고 셔츠에 손을 댔다. 다음부터는 촬영을 할 때 저 여자를 좀 피해달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하던 찰나 쿵-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꺅!”
여자의 비명소리에 도후는 놀라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태유와 머리를 감싼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다. 태유는 문에 부딪힌 머리를 감싼 채로 끙끙 거리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 미안. 아무도 없는 줄 알았지.”
말로는 미안하다 하지만 풍기는 어조는 전혀 미안해하는 게 아니다. 인상을 쓴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유에게 따지듯 말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문 열어야 하는 거 아니야?!”
“설마하니 그 앞에 서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더군다나 남자 탈의실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은 조금도 못했지.”
말을 하는 태유의 입술을 살짝 비틀어져 있었다. ‘남자 탈의실에 있는 너 정말 문제 있는 거 알아?’라고 말하는 듯 한 그 미묘한 웃음에 여자의 얼굴이 붉어진다.
머리는 아프지, 도후의 앞에서 창피한 꼴을 당했지, 태유에게 저런 기분 상하는 눈빛을 받았지. 여자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끔찍했다. 이를 갈며 시근덕거리던 여자는 재빨리 문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문을 닫은 태유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도후를 보며 말했다.
“저런 애들은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떨어져. 알잖아?”
“쓸데없이 길게 상대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저것들이 착각하고 더 달라붙는 거야.”
태유는 안쪽으로 들어가 가방을 꺼내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것에 얼굴을 내린 도후도 셔츠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바지에 손을 대려는 찰나 다시금 가방 속에서 문자가 온 것을 알리는 음향이 들린다. 그 소리에도 도후는 움직이지 않았고 옷을 다 갈아입고 목에 스카프를 두르던 태유가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묻는다.
“문자 왔잖아. 확인 안 해?”
“할 거야.”
혼자 있으면 계속해서 무시를 할 수 있을 테지만 태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못하겠다. 어쩔 수 없는 거냐며 한숨을 쉰 도후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문자 답 안해?]라는 것이 찍혀있다.
도후가 보기에 태양은 문자를 막 보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문자를 보냈는데 이쪽에서 반응이 없으니까 화가 난 모양이다. 하지만 도후도 문자를 보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난감함에 인상을 쓰고 있으려니 옆으로 태유가 다가와 묻는다.
“누구한테 왔는데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작업 거는 녀석이야?”
“그건 아니고.....”
도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어떻게 할까 싶어 눈을 내리자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태유가 보인다. 이 녀석 정도라면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해도 크게 흠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 한 도후는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이봐. 문자 보내는 법 알아?”
“왜? 그쪽은 몰라?”
“문자 같은 건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배워두는 편이 좋을 텐데. 이리와 봐. 어떻게 하는지 보내줄게.”
도후의 예상대로 태유는 문자 보내는 법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문자를 보내는 법을 모르다니. 그동안 꽤 불편했겠군.'같은 정도의 반응을 보일 뿐이다.
도후의 손에서 폰을 가지고 간 태유는 문자를 확인했다. 짧은 문자 아래에는 폭탄이라는 수신인 표시가 되어 있었다.
“폭탄이 문자 보냈어? 그런데 일일이 답장해줘도 되는 거야? 더 귀찮게 하면 어쩌려고?”
“폭탄은 아니야. 이건 그저...”
처음에 만났을 때 느낌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홧김에 이렇게 저장을 해둔 것뿐이다. 태양으로 이름을 고치려 했는데 생각만 하지 실제로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바꾸기에도 뭐하고 말이다.
먼 곳을 쳐다보며 딴 청을 부리고만 있자 태유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폰을 똑바로 세운 채로 숫자와 글자가 찍힌 동그랗고 작은 버튼을 가리켰다.
“기본적인 글자는 이렇게 만드는 거야. 그런데 어나 아나 유나 요 같은 건 이 점을 눌러보면 되는 거야. 먼저 누르고 이를 누르면 어가 되고 나중에 점을 누르며 아가 되는 거야. 알았어?”
“어떻게 하는지 네가 한번 해봐.”
태유가 말을 하면서 직접 버튼을 눌러서 글자를 만들었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버튼을 누르는 태유의 손을 집중해서 쳐다봤다. 몇 번 가르쳐 주다가 이쪽에서 못 알아들으면 냅다 폰을 집어던지고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는 말을 할 것 같았던 태유지만 의외로 끈기 있게 설명을 했다.
질문을 하면서 몇 번에 걸쳐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해서야 도후는 대충 알아먹을 수가 있었다. 어느 순간 도후는 태유의 등에 딱 달라붙어서 그가 누르고 있는 핸드폰 액정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간혹가다 태유가 들고 있는 폰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마치 도후가 태유를 끌어안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유는 도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알았어?”
“이런 식으로?”
“그래. 처음 하는 것 치고는 빨리 배우네?”
“다른 건 어떻게 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하면 돼.”
이번에는 문자 적는 법을 알려줬다. 이번에도 쉽게 외울 수 있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도후는 가운데 버튼을 가리켰다.
“이걸 이렇게 누르라고?”
“응.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이걸...”
처음에는 문자를 어떻게 보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배운 것을 복습할 겸 해서 태유에게 확인을 받으려는데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뭘 하기에 이렇게 시간이 걸려. 다 했......”
턱과 코 아래에 수염을 기른 사내는 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깔끔하지도 않은 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거렁뱅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사내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도후와 태유의 모습에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벙 찐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이리로 쏠리자 얼굴을 붉힌 사내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시...실례했습니다.”
사과의 말을 하고는 바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다. 매니저의 얼빠진 행동에 인상을 쓰고 있으려니 앞에 서있던 태유가 피식-하고 웃으며 들고 있던 폰을 도후에게 건넸다.
“우리 오해 받은 것 같지 않아?”
“오해는 무슨....”
오해를 했어도 뭐 어쩔 건가. 이런 일 가지고 일일이 해명을 하는 것도 귀찮기만 하다.
도후는 폰을 들고 태양이 보냈던 문자에 답을 쓰고 그것을 검사 받기 위해서 태유에게 보였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잘 했어. 그런데 그렇게 보낼 거야?”
액정에 적힌 문자는 [지금간다]라는 짤막한 문자가 적혀 있었다. 뭐가 급하다고 글자 사이를 띄우지도 않고 이렇게 적은 건지 모르겠다.
태유의 물음에 도후는 폰을 앞으로 하며 발송을 눌렀다.
“이렇게 보내야지. 딱히 할 말도 없는데...”
“생긴 것 하고 달리 꽤 자상하구나.”
자상하다고?
별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바로 표정을 굳히는 도후지만 태유는 몸을 돌리고 안쪽에 있던 잠바와 가방을 챙겼다. 짐을 한쪽 어깨에 걸친 태유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에 보자.”
태유가 밖으로 나가자 도후도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잠바를 걸치고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밖으로 나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저쪽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매니저가 보인다.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거리고 있는 모습이 무슨 고민에 빠져있는지 짐작케 한다. 한심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쉰 도후는 바로 그에게 가 발로 무릎을 툭툭 쳤다.
“뭐하고 있어?”
물음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매니저는 굳은 표정으로 도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너 태유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냐?”
“이상한 말 하지마.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성가시다는 듯 매니저의 손을 치워낸 도후는 그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이쪽의 충고는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그냥 쌩까버리는 듯한 그 행동에 사내는 급히 도후의 옆으로 와 요란하게 팔을 흔들며 열심히 말했다.
“태유랑 사귀는 거 아니지? 그 녀석 소문 위험하니까 되도록 연결되지마. 알았어?”
“무슨 소문이 났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확실하지 않은 거라면 괜한 사람 잡지 말고 입 조심해.”
“그 녀석은 처음부터 소문이 많은 녀석이었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
“그런 식으로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짜증이 난다는 듯 눈을 흘기자 비로소 매너지가 입을 다문다. 하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눈에는 ‘내 말을 잘 들어둬야 할 텐데.’라는 의사가 진하게 깔려 있었다.
하여간 귀찮아 죽겠다. 이쪽에서 저러쿵 저쪽에서 이러쿵 하는 말 다 듣고 와서 말해봤자 어차피 좋은 반응을 못 얻는다는 걸 알면서 저러고 싶을까. 한심하기도 하고 더 상대하기도 싫었던 도후는 저 앞에 놓인 검은 벤으로 갔다. 도후가 차에 오르자 매니저도 운전석에 앉아 옆에 놓인 가방 속에서 한뭉큼의 서류를 꺼내 도후에게 건넸다.
“이번에 들어온 일거리야. 다 할 거지?”
“추려서 해. 전처럼 다 했다가 다운되는 거 사절이니까.”
“그 정도는 나도 배려를 해주지. 그리고 이건 이번에 들어온 시나리오.”
먼저 준 것들을 읽고 있는데 그 위에 영화 시나리오가 놓여진다. 전에 슬쩍 영화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흘린 후부터 하루에 꼭 하나씩 이런 것이 들어오고 있다.
처음에는 기대에 부풀어 시나리오를 일일이 확인했던 도후지만 지금껏 들어온 것들 중에서 그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는 시나리오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이쪽의 비주얼으로만 승부를 보려 하는 것들이었다. 인기 모델이 영화를 찍는다 하니 어느 정도 화제성이 있을 거고, 주변에서 자금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니 개나 소나 대충 시나리오는 써서 보낸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지금은 시나리오를 받아도 전처럼 기쁘지가 않다.
뭐, 정말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모델이었던 자신에게 선뜻 손을 내밀 리도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봐야 했지만 그 적당선의 작품을 찾을 수가 없다. 이번에 받은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몇 번 종이를 넘기지도 않은 채로 길게 한숨을 쉰 도후는 그것을 들고 흔들면서 인상을 팍 구겼다.
“이런 영화를 누가 출연해. 눈 달고 있는 거야 뭐야.”
눈이 제 자리에 달려 있으면 좀 보라며 시나리오를 돌돌 말아서 머리를 툭툭 치자 그런 도후의 팔을 밀쳐낸 매니저가 똑같이 인상을 쓰며 얼굴을 돌렸다.
“어허! 이게 얼마나 인기 있는 시리즌데! 전에 개봉되었던 것들 다들 인기 많았단 말야!”
“인기만 많으면 뭐해. 내가 분명히 말했지. 킬링 타임용은 안 나간다고. 차라리 영화를 안 찍고 말지 이런 영화에 출연을 하냐. 이런데 나가면 다들 비웃어.”
그런데 더 미치겠는 것은 꼭 이런 것들만 들어온다는 거다. 인상을 팍 쓴 도후가 시나리오를 구겨서 옆 자리에 내려놓는 것에 매니저는 투덜댔다.
“안 나갈 거야? 유명한 영화라니까.”
“솔직히 영화 안 나간다고 내가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CF도 들어오잖아.”
“지금 하는 일로 2~3년은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그래도 장기간을 보면...”
“장기적으로 계속 이 일 하고 싶지는 않아. 복학해서 공부도 해야 하고...서른 되면 다른 일 할 거야.”
도후의 말에 매니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의사 되려고?”
“되고 싶다고 쉽게 되나. 몇 년은 썩어야 할 텐데....마흔이나 되야지 의사 구실이나 좀 하겠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의사가 되긴 될 건가 보네?”
“언제까지 엄마 고생하게 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도후의 집안이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도후의 모친도 이제 나이가 있다. 점점 늙어가고 체력도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병원을 운영할 수는 없다. 그 병원은 언젠가는 도후가 물려받아야 할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서 도후는 이 업계에서 뜨고 공부를 해야 했다.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집요하게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매니저는 답답한 듯 길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너 여기서 떠버리면 난 누구랑 일 하냐.”
“신인 발굴하면 되잖아. 그런 거 잘 하면서 괜히 우는 소리야.”
“요즘 애들은 개성적인 애들이 없단 말이야.”
괜찮다 싶으면 벌써 얼굴에 칼을 댄 애들이다. 그런 애들은 나중에 인터넷에 과거 사진이 뜨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고 네티즌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기에 처음에 고를 때 정말 조심을 해야 했다. 겉보기에 괜찮아서 골랐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과거에 친 사고가 많아서 그것을 수습하는데 시간과 돈이 더 드는 경우가 빈번하니 말이다. 심란한지 쉽게 출발하기 못하고 운전대만 툭툭 건드리는 매니저를 흘겨보며 도후는 말했다.
“나 다른 곳에서 내려줘.”
“어디를 가려고? 설마 여자한테 가는 거냐?”
“안 가. 여자 없어.”
“그래? 그러면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하여튼 정말 집요하다. 다른 매니저들은 이래라 하면 바로 고개부터 꾸벅 숙인다는데 이 인간은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같이 일을 했으니 좋은 점이 많은 만큼 나쁜 점도 많다면서 도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동생 밥 주러 간다.”
“동생?”
“그런 게 있어. 아, 그만 좀 물어보고 빨리 운전이나 해. 여기서 해 질 때까지 있을 거야?”
인상을 팍 쓰고 말을 하자 그제야 차에 시동을 건다. 차를 움직이면서까지 거울을 흘깃 거리며 이쪽의 눈치를 살핀다. 혹여라도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저러는 거다. 저렇게 사람을 못 믿는 건가 싶어 슬그머니 눈에 힘을 주자 바로 눈을 내린다. 그제야 짧은 한숨을 쉰 도후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다시금 일거리가 적혀있는 종이를 넘겼다. 절반 정도를 봤을까. 갑자기 주머니에서 딩동-하는 소리가 난다. 뭔가 싶어 끄집어내자 이번에도 태양이 문자를 보냈다.
[나 과일도 먹고 싶어.]
“하여간 이 녀석은...”
입으로는 존대면서 문자는 반말이냐. 뻔뻔하기로는 이 세상 최고일 거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도후는 신중하게 문자를 쳤다.
바닥에 엎드린 태양은 집중해서 만화책을 읽었다. 한번 읽었지만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정신을 통일한 채로 정독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이 상태가 되면 주변의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거의 푹 빠져서 책을 읽고 있는데 멀리서 딩동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웬만해서는 그냥 무시할 텐데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울린다. 이건 도대체 뭔가 싶어 태양은 얼굴을 돌렸다.
이 시간에 여기를 찾아올 사람은 없다. 가만히 있으면 그쪽에서 알아서 먼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벨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울렸다.
“뭐야 도대체.”
도대체 누가 이렇게 벨을 눌러대는지 모르겠다. 표정을 굳힌 채로 뒤를 돌아본 태양은 계속해서 울리는 벨 소리에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교 단체에서 나온 거라든가 우유를 사 먹으라는 사람이 서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모처럼 집중하고 있었는데 방해를 받아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던 태양은 미간 사이에 잔뜩 주름을 만든 채로 씩씩하게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여는 거야.”
막상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것이 아줌마나 아저씨가 아닌 검은 코트를 멋들어지게 입은 도후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나 싶어 가만히 있자 도후가 발아래에 두고 있었던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뭘 멍하니 있는 거야? 안으로 들어가게 좀 비켜봐.”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는 도후의 뒷모습에 태양은 문을 잠그고 그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왜 여기에 있어요? 바쁜 거 아니었어요?”
“오늘 저녁부터 삼일 동안 휴가였는데 누가 마침 연락을 하는 덕분에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이리로 온 거잖아.”
덕분에 한참을 돌아서 왔다. 마트에 들렸다 오느라고 시간이 더 들어서 지금 굉장히 배고 고프다. 힘들게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데 태양은 그것도 모르고 문을 늦게 열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말을 하려는데 그 순간 도후의 눈에 식탁 위에 먹다 남은 탕수육 몇 조각과 자장면 그릇이 보였다. 그 순간 도후의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이건 또 뭐야.”
착 가라앉은 도후의 목소리에 태양은 왜 그러나 싶어 식탁을 쳐다봤다가 아차 싶었다. 아까 전에 먹은 것을 안 치우고 그냥 뒀다. 저걸 잊고 있었다며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그런 태양을 쳐다본 채로 도후가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너 시켜먹은 음식은 못 먹는다며.”
“못 먹기는 뭘 못 먹어요. 내가 자장면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러면 전에 시킨 음식은 못 먹는다는 건 뭐였어?”
“다 뻥이었죠. 그런 말 믿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뒷짐을 진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리 말했다.
태양이 말로 사람 뒷목 잡게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기가 막혀도 전처럼 바로 흥분하지 않은 도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간다고 했잖아.”
“어디서 오면서 그런 문자 보냈어요? 그 문자 받고 한 시간 동안 배 쫄쫄 굶으면서 있다가 못 참고 시켜먹은 거거든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온건 문자 받고 대략....”
태양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다시금 도후를 쳐다봤다.
“2시간 반이 걸렸네요.”
2시간 반이나 지나서 지금은 8시가 훌쩍 넘었다. 그 동안 연락이 없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배를 쫄쫄 굶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듯 눈을 댕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의 태도에 기가 막혀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입만 벌리고 가만히 있으려니 태양이 눈을 내려 도후의 양 손에 들린 짐을 확인하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나 자장면 시켜 먹은 지 이제 한 시간도 안 지나서 아직 배부른데.”
“.......................”
“배고프면 짬뽕이라도 시켜줄까요? 내가 자주 먹는 집 탕수육도 꽤 괜찮아요.”
지금 저게 할 말인가 싶다.
정말 어이가 없다며 빤히 쳐다보자 태양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메뉴를 불러준다.
“싫으면 한식으로 시켜줘요?”
“너 정말....”
허탈해진 도후는 들고 있던 것들을 식탁 위로 올렸다.
마음 같아서야 냅다 집어 던지고 싶지만 먹을 것을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는 어렸을 적의 교육 때문에 그리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머리가 아파진 도후는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그걸 아닌지 모르는지 태양은 도후가 들고 온 봉지에만 관심 집중이다.
“정말로 과일 사왔네요. 나 이거 먹어도 되요?”
태양이 꺼낸 것은 사과다. 먹든가 말든가 이제는 모든 관심을 끄고만 싶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느낌으로 식탁에 손을 올리고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태양은 쉬지 않고 봉지 안을 뒤적이며 이것저것을 빼냈다.
“소고기 사왔어요? 비싼 거 사왔네요. 맛있겠다.”
고기가 들어간 팩을 보면서 잠시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다른 것들을 끄집어내며 신나하는 태양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도후는 다른 쪽을 쳐다봤다.
내가 지금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갔으면 지금쯤 발 쭉 뻗고 자고 있을 텐데 말이다. 무슨 영화를 보자고 배고프다는 문자에 홀라당 넘어가서 어울리지 않게 답 문자도 보내고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목 뒤를 두어번 주무르던 도후는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고 엉덩이를 대고 있던 식탁에서 떨어졌다.
“잘 있어라.”
도후의 말에 태양은 들고 있던 것을 식탁에 내려놓고 양 손을 뻗어 도후의 팔을 잡았다.
“어디를 가요?”
“너 배부르면 내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잖아. 그냥 돌아갈 거야.”
“가기는 어딜 가요. 이왕 왔으니까 쉬었다 가요.”
“뭐?”
태양의 배가 부르다면 여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없어진 셈이다. 때문에 그냥 돌아가겠다는데 왜 이렇게 붙잡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손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도후의 팔을 단단히 잡은 태양은 억지로 그의 외투를 벗기고 그 몸을 화장실 쪽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 들어가서 씻어요. 이건 여기에 두고. 어서요.”
“자...잠깐 기다려.”
“밖에서 들어왔으면 몸부터 씻어야 하는 거예요. 어서요. 어서.”
“자..잠깐. 너 지금 뭐하는....웃.”
도후가 뭐라고 하기 전에 태양은 그의 몸을 화장실 안으로 집어넣고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조금 있다 화장실에 불이 켜지고 문 밖으로 태양의 목소리가 들린다.
“깨끗하게 씻고 나와요.”
태양의 말에 도후는 입을 벌렸다. 깨끗하게 씻고 나오긴 뭘 또 깨끗이 씻으라는 말인가.
“나원 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다. 허탈해진 도후는 그저 기가 막혀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문을 열고 밖에 나오자마자 나는 것은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비비던 도후는 가스렌지 앞에 서서 요리를 하는 태양을 보고는 슬그머니 그리로 갔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려니 호박, 감자, 버섯과 양파가 송송 들어가 부글부글 끓는 찌개가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참 맛있을 것 같다. 냄새도 좋게 나는 것에 태양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도후는 의외라는 듯 한 기분으로 옆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이쪽이 왔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태양의 모습에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너 요리 꽤 하나 보다?”
“특정 요리에 한해서는 잘 할 수 있어요. 찌개는 된장이랑 김치 밖에 못 해요. 다음에 뭐 먹고 싶을 때 그 둘 중에 하나만 고르면 맛있게 요리해 줄게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된장찌개랑 김치찌개 둘 중에서 하나만 알아서 고르라는 거 아닌가. 그게 뭐냐면서 인상을 쓴 채로 있으려니 태양이 눈을 내려 도후가 입고 있는 옷을 쳐다봤다. 갈아입으라고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헐렁한 것을 꺼내 주긴 했는데 의외로 잘 맞는 것 같다.
“그 옷 몸에 잘 맞아요?”
“응? 다리가 좀 짧긴 하지만....”
“역시 그쪽이 다리가 더 긴 모양이네요. 뭐, 모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발목 부분이 좀 짧은 것 같지만 저 꼴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니까 별 상관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태양은 수저를 들어 국물을 조금 떠 위로 들었다.
“간 좀 볼래요?”
“그럴까...”
옆에 서있기만 하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무안해하던 도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수저에 담긴 국물을 후룩 마신 도후는 바로 혀를 앞으로 내밀며 기침을 했다.
“아, 뜨거...!”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입 안에 들어온 국물은 눈물이 쏙 나올 만큼 뜨거웠다. 혀를 내밀며 헥헥 거리자 태양이 혀를 찬다.
“알아서 식혀서 먹어야죠. 무턱대고 입부터 벌리면 어떻게 해요.”
처음부터 식혀서 줬으면 좋았잖은가. 모든 것이 이쪽 잘못이라는 듯 수저를 흔들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에 괜히 울컥하게 된다. 목을 손으로 잡은 도후는 눈에 힘을 주고 태양을 쳐다봤다. ‘이 녀석...’하고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그것을 못 본채 하며 태양은 말했다.
“혀 아직도 뜨거워요?”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아.”
하지만 좀 따갑기는 하다. 얼얼한 혀로 입천장을 쓸어 올리려니 태양이 수저를 바깥쪽으로 내민다.
“일단 거실에 가서 앉아 있어요. 계란찜이랑 다 되면 부를 테니까.”
뜨거운 국물을 먹게 된 것에 대해서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 주방의 주도권은 완전히 태양이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뻗대고 있어봤자 좋은 말 들을 거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도후는 수건을 목에 걸치고 어슬렁거리며 거실로 갔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쿠션을 배 앞에 두고 리모컨을 꾹꾹 누른다. 그러자 치직 거리면서 화면이 나왔지만 시간이 어정쩡해서 드라마밖에 안 한다. 그 흔한 쇼프로그램 하나 나오지 않는 것에 도후는 바로 태양을 쳐다보며 불만을 토로했다.
“티비는 왜 정규 채널 밖에 안 나오는 거야.”
“그것만 나오면 되지 뭘 더 바래요. 원래 우리 집은 그것 밖에 안 봐요.”
“다른 것도 보게 추가 신청 하면 좋잖아.”
“그 신청할 돈은 땅 파면 바로 바로 나오나.”
시니컬한 대꾸에 더 뭐라 할 수가 없다. 이쪽에서 한 마디를 하면 지지 않고 두마디 세마디 한다는 것을 알면서 왜 나는 대꾸를 했던가 싶다. 차라리 말을 말자며 도후는 티비를 끄고 쿠션을 옆구리에 넣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 옆에 있는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보면 태양은 늘 진지한 눈으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저 녀석이 그렇게나 진지하게 책을 봤던 건가 싶다. 별 생각 없이 책을 보던 도후는 이상하게 여자가 가슴이 없구나 싶었다. 중성적인 여자구나-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책을 넘기던 도후는 곧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책에 얼굴을 가까이 했고 곧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을 말이다.
“헉!!”
놀란 도후는 바로 만화책에서 얼굴을 떼고 책을 덮어 표지를 봤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남자와 남자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착실하게 맨 남자 둘이 껴안는 야리꼬리한 표지였다. 거기다 위에는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로고도 확실하게 찍혀 있고 말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후는 얼굴을 들어 태양을 쳐다봤다. 그러자 냉장고에서 막 일어나던 태양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도후의 표정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태양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
“뭘 그렇게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이...이거...”
“그거 뭐요? 심심하면 읽고 있어요. 말 걸지 말고.”
태양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발로 문을 닫았다. 식탁에 반찬을 올리고 밥공기를 꺼내 밥통 앞에 서는 태양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도후는 들고 있던 만화책을 위로 들어 보였다.
“이거 남자랑 남자가 나오는 건데?”
“원래 남자랑 남자 나오는 거예요. 그것도 몰라요. 모델일 한다면서 되게 깝깝하시네요.”
보니까 모델이 그쪽인 비율이 높다고 들었다. 이것도 직접 알아본 것이 아니라 소문이나 만화를 읽으면서 습득한 것이라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착실하게 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 말에 대해서 뒷받침을 할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더 말은 하지 말자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려니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달려온 도후가 식탁 앞에 손을 올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원래 그쪽이었어?”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서 뭘 물어보려고 저러는 건가 싶었더니 고작 그런 건가.
태양은 밥을 푸다가 말고 손을 아래로 내린 채로 도후를 쳐다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전문 용어는 남발하지 마시고 조금 더 확실하게 말을 해 주시죠.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너 원래 남자를 좋아했어?”
확실하게 말을 하라고 했다고 누가 또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라고 했나 싶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 모 아니면 도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태양은 눈에 힘을 주며 도후 앞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유도후씨.”
“왜..왜 그래...”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좀 떨어져서 말하란 말이다. 그렇게 달라붙어 있으면 부담스럽잖아. 움찔한 도후는 슬그머니 뒤로 몸을 물리려 했지만 태양은 손을 뻗어 그런 도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점점 얼굴을 접근시켰다.
태양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의 이목구비가 똑바로 보이고 있었지만 도후는 그것을 보고도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가 없었다. 그저 안경을 안 쓰고 있어서 눈이 평소보다 훨씬 잘 보이는 구나-라는 맹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비엘 만화책 본다고 세상 모든 남자가 그쪽이라는 몰상식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세상에 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각자가 가지고 있는 취미도 별개인 법이에요. 그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앞으로 세상 살기 정말 힘들 거예요.”
“에?”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지금 뭔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눈만 댕그랗게 뜨고 있으려니 태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이렇게 보수적이고 한 생각 밖에 못하면서 어떻게 모델이 되었데요. 모델이라는 사람들은 원래 좀 개방적이지 않나? 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보면 나도 알게 모르게 선입견에 물들어 있었던 걸까.”
잡고 있던 도후의 손목을 놓은 태양은 선반 아래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하고 머리 속이 저렇게 딱딱해서야 언제까지 모델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저러다가 금방 모델 일 그만 두게 되는 거 아냐?”
중얼거리고 있지만 마치 이쪽 들으라는 듯 말하고 있다.
태양이 지금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던 상황이기도 했던 도후는 그냥 넘겨들을 수가 없었다. 울컥한 표정을 지은 그는 앞으로 넘어와 태양의 뒤에 섰다.
“지금 그건 무슨 말이야? 내가 모델 일을 오래 못할 것 같다는 거야? 뭐야?”
“너무 사람 머리가 굳어서 오래 못 할 것 같다고 말하고 있어요. 왜? 내 말이 꼬아요?”
쪼그리고 앉아서 위를 쳐다보며 꼬우냐고 물으면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그래. 꼽다.’라는 식으로 말을 해버리면 이쪽이 너무 어린애 같은 느낌이 나잖아. 그런 대답 말고 어른스럽게 들리는 대답은 없는 걸까. 나름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기에 밥을 푸고 그것을 도후에게 내밀었다.
“이거나 옮겨줘요. 금방 다 되니까.”
내밀어진 것을 받은 도후는 식탁에 밥공기를 내려놨다.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밥공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도후는 아차 싶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건가 싶다. 자신은 이런 걸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눈에 힘을 준 도후는 뒤를 쳐다봤다. 그 순간 태양이 찌개 손잡이를 행주로 잡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배고파서 예민해진 거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요. 나 된장국은 제법 끓이니까. 아까 간 봤을때 맛있잖아요. 그렇죠?”
그러고 보니 아까 간을 봤을 때 뜨겁긴 해도 맛은 괜찮았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냄비를 들고 식탁 가운데에 내려놓은 태양이 도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고기는 내일 먹고 오늘은 일단 이것을 먹자고요.”
“다음이라니. 나 오늘 집에...”
“피곤하면 자고 가도 되요. 며칠 동안 쉰다고 했으니까 급하게 돌아갈 건 뭐에요? 혹시 여자랑 약속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 됐잖아요. 자, 어서 먹어요. 어서요.”
먹으라고 하는데 계속해서 서있을 수가 없다. 어정쩡하게 자리에 앉으려니 태양이 계란찜고 가지고 와 찌개 옆에 내려놨다.
화려한 것은 없었지만 소박하니 괜찮은 상이 차려졌다. 처음에는 배가 고픈지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괜히 속이 쓰린 것 같기도 하다. 도후는 수저를 잡으며 태양을 쳐다봤다.
“잘 먹을게.”
“먹고 또 먹어도 되요.”
그냥 이거 한 공기만 먹고 집에 갈 거다. 여기서 씻고 밥도 먹었으니까 집에 가서 그냥 푹 자는 일만 남았다. 그런 생각으로 된장찌개를 떠서 훅훅 바람을 불고 입에 넣은 도후의 표정이 바로 풀어진다. 그 표정에 태양은 하얀 배추잎을 들며 말했다.
“맛있죠?”
“....괜찮네.”
괜찮은 게 아니라 상당히 맛있었다. 그래도 두 우물을 파서 맛이 이렇게 괜찮으면 그건 나름대로 성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도후는 계란찜을 떠서 먹으면서 태양을 쳐다봤다. 태양은 하얀 배추에 밥을 얹히고 그 위에 된장찌개 속에 있던 것들을 떠서 올리고 쌈장까지 올린 후에 크게 한입 먹었다. 중화요리를 먼저 시켜먹어서 배가 부르다고 했던 주제에 정말 맛깔나게도 먹는다. 도후는 우물거리며 먹던 태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먹으면 맛있냐?”
“맛있어 보이면 따라서 해 먹어도 되요. 따라 한다고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한참을 씹고 난 후에 하는 말이 고작 저런 거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이쪽에서 따라 거라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다. 하지만 태양이 워낙 맛있게 음식을 먹다 보니 그것을 따라서 먹고 싶다는 기분이 살짝 들기도 한다.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던 도후는 슬그머니 배추 잎을 들고 태양이 먹던 대로 싸서 크게 한입을 넣었다. 크게 잡아서 씹기가 불편했지만 천천히 입을 움직여서 거의 다 먹어갈 즈음 태양이 물었다.
“맛있죠?”
“....이것도 괜찮네.”
한 박자 늦게 나오는 도후의 대답에 태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하게 맛있다고 해도 되는데 일부러 늦게 있다가 괜찮네-라고만 하는 것이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라니까요.”
“내 성격이 뭐가 어때서?”
성격 좋다는 말은 조금 밖에 못 들어봤지만 그렇다고 나쁘다는 말도 많이 안 들었다. 뭐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후는 배추잎을 들어 밥을 올렸다. 그러면서 앞에 앉은 태양을 슬그머니 쳐다본다. 이번에도 태양은 크게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 작은 얼굴에서 볼이 크게 부풀어 올라 있다. 그것이 웃기게 보였다.
“입 터지겠다.”
도후의 말에 태양은 흘깃 하고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입 안에 가득 넣은 것을 다 씹고 점점 줄어들 즈음에 손가락에 묻은 쌈장을 핥으며 말했다.
“안 터져요.”
“너 자장면 먹었잖아. 그런데 또 그렇게 먹냐? 배 터지겠다.”
“입도 안 터지고 배도 안 터져요. 별거 가지고 다 걱정이시네요.”
투명스럽게 말한 태양은 다시금 배추잎을 들어 그 위에 밥을 올렸다. 도후도 그것을 따라 배추잎을 들고 그 위에 밥과 된장에 들어가 있던 버섯과 호박을 올렸다. 그 위에 쌈장을 올리면서 도후는 슬그머니 태양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작게 배추잎을 말아서 입에 넣고 계란찜을 뜨는 것이 보인다. 도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질문을 했다.
“저 만화책은 그저 취미인 거야?”
“소년만화 순정만화를 다 섭렵하고 이번에 손을 댄 거죠. 저것도 한 2년 더 보면 안 보지 않을까요. 다음에는 소설책이나 읽어야죠.”
아. 그런 건가. 이렇게 들으니 저 만화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보다가 질리면 다른 책을 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되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후는 쌈장을 넣은 배추를 돌돌 말았다.
“재미있냐?”
“재미없으면 봐요? 뭘 당연한 질문을 하고 그래요.”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을 해주긴 하지만 저 만화책에 대해서 화자가 되는 것은 껄끄러운 모양이다. 대꾸를 하는 말 속에 알게 모르게 틱틱 대는 기색이 묻어나있다. 도후는 인상을 쓰며 전부터 신경 쓰였던 것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너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용케 존댓말이다. 난 그냥 기분 나빠서 말 놓아버리겠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존댓말을 듣는 게 반말로 듣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나쁠 때가 있거든요. 그걸 노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쪽 듣기에 존댓말이 더 나쁠 수도 있으니까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는 거다.
순간 잘 넘어가던 밥이 목구멍에서 탁 멈추는 것을 느낀 도후는 수저를 식탁 위에 내려놨다.
“에씨. 이 녀석이 정말...”
“어허. 밥상머리 앞에서 누가 그렇게 인상을 써요. 밥 안 줄 거예요,”
눈에 힘을 준 태양은 도후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 움찔하게 된 도후는 위로 올린 눈을 슬그머니 내리며 중얼거렸다.
“안 그러면 되잖아.”
밖에서는 정말 잘 나가는 유도후다. 이쪽 얼굴 한번 봤으면 하고 악수를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는 여자들만 해도 수만에 다다른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틱틱 대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말을 했다가는 또 ‘당신 왕자병 증세까지 있었어?’라는 식으로 말을 할 것이 분명했다. 밥 잘 먹고 그런 말 들어서 체하기는 싫다. 그냥 모르는 척 가만히 있자고 생각하면서 도후는 묵묵히 쌈을 싸서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