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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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한 마리에 시금치에 당근에 거기다 당면. 세일하니까 만두도 좀 사서 먹을까?”

저 시내에 있는 대형 마트에서 세일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태양은 겸사겸사 뭘 살까 싶어 고르고 있었다. 오늘 수업이 있었지만 막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에 휴강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옷 다 차려입고 나갈 준비 다 끝났는데 다시 벗기도 뭐해서 이것 저것 필요한 것을 사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식료품은 시내에 나가서 필요한 것을 다 산 후에 사면 될 일이고 그리고 서점에도 좀 들리자. 저번에 받아본 신간이 꽤 재미있었으니까 그것이나 좀 사서 들어와야 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필요한 것을 적은 종이를 지갑 사이에 끼워 넣은 태양은 열쇠를 들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자전거를 바깥으로 먼저 내보낸 태양은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채로 서있는 동석을 발견하고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원래 잘 놀래는 성격은 아닌데 갑자기 나타난 동석 때문은 조금은 놀라 버렸다. 태양은 반쯤 열려있던 문 안에서 자전거를 꺼내 복도 쪽으로 밀어내며 문을 닫았다. 

“너 왜 여기에 있어? 어린이집 안 갔냐?”

“..............오늘 아침에 여기서 나오던 남자를 봤어요.”

“뭐?”

이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채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입술을 일자로 다문 동석이 얼굴을 들어 태양을 쳐다본다. 

“그 남자하고 무슨 사이에요?”

“뭐?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 말을 헛으로 듣지 마세요. 나 지금 굉장히 진지해요.”

눈에 힘을 팍 줘봤자 귀여울 뿐이다. 그래도 태양의 취향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마나 진지하기만 한 동석은 태양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남자는 위험해요. 겉만 번드르르한 녀석이라고요. 분명히 태양씨를 버리고 그냥 가 버릴 거라고요. 그런 위험한 녀석은 버려 버리고 그냥....그냥...그냥..!”

열심히 말을 하는가 싶더니만 갑자기 그냥만 반복하고 있다. 어느 순간 팔짱을 낀 상태로 동석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세가 된 태양은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이 녀석의 엄마한테 드라마 볼 때 아이는 방으로 들여보내거나 놀이터로 보내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요즘 애들 티비를 하도 봐서 말만 늘었다고 하던데 지금이 딱 그에 맞는 순간이다. 이 녀석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을 하는 놈을 앞에 두고 시간만 잡아먹었다. 한숨을 쉰 태양은 열쇠를 들어 문을 잠그고 자전거를 끌었다. 그 순간 놀란 표정이 된 동석이 냅다 태양의 다리에 매달린다. 

“가지 마세요! 난 지금 진지하다고요!”

“윽. 뭐하는 거야?”

무시하고 지나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매달리는 동석에 태양은 당황했다. 굳은 얼굴을 내려다보려니 필사적인 얼굴이 된 동석이 보였다. 

“가지 마세요! 태양씨! 가지 말라고요! 그 남자는 위험하다니까요!”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잡혀서인지 잘 풀어지지가 않는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있는 힘껏 걷어차 버렸을 거다. 하지만 동석이 아이라는 것은 몇 번이나 머리 속으로 떠올린 태양은 혀를 차며 동석의 손가락을 잡았다. 힘으로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는 것에 동석은 사색이 되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태양씨가 좋단 말이에요! 난 정말로...!”

“황동석.”

굉장히 음침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열심히 태양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동석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설마 하는 느낌으로 얼굴을 든 동석은 저기 복도 앞에 서있는 30대 여자를 확인하고는 얼굴이 헬쓱하게 질러 버렸다. 

차마 어떤 반응을 취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만 있으려니 주먹을 쥔 여자는 동석의 앞을 성큼성큼 걸어왔다. 동석의 앞으로 온 여자는 으득-하고 이를 갈며 지옥에서나 드릴 법한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어린이집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어...엄마..”

허리에 손을 올리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엄마의 모습에 동석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모양이다. 슬그머니 태양의 다리에서 손을 떼고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에 여자는 바로 동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꿱-하고 개구리가 밟혀 죽는 소리가 났다. 바로 쓰러지는 동석을 옆구리에 낀 여자는 언제 도깨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태양을 보고 호호호-하고 웃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애가 좀 철이 없어서.”

동석이 왜 이러나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엄마를 닮았던 거다. 태양은 엽기적인 모자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 애들은 정말 조숙하네요.”

“애가 좀 유난스러워서 그래요. 다시는 안 그러게 확실하게 교육 시켜둘게요. 그럼 이만.”

“들어가세요.”

정말 미안한 듯 태양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한 여자는 기절한 동석을 질질질 끌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확인한 태양은 자전거를 바로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표정을 하고 있는 태양의 머리 속에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벌써 지워져 있었다.

한쪽 팔에 책을 올리고 만화 칸으로 넘어갔다. 집중한 눈으로 앞에 있던 책들을 쳐다보다가 옆으로 얼굴을 내렸다. 

벌써 사고 싶었던 책을 몇 권 고르긴 했지만 더 사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반 만화책란을 기웃거리던 태양은 어느 순간 잡지 코너 앞에 서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나온 잡지들을 보자니 역시나 도후의 얼굴이 많이 나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널널 하면서 일은 확실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표지를 이렇게나 장식하고 안쪽에도 사진이 나오는데 그렇게까지 하면 얼마나 벌까 싶다. 월급쟁이보다 많이 벌까나. 그런 생각을 하며 태양은 잡지를 열어 안쪽을 살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여자 모델의 허리를 안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도후의 사진이다. 

눈에 검은 화장을 해서 인지 인상이 강해 보인다. 흐트러진 옷차림이나 대충 넘긴 머리도 괜찮아 보였다. 메이크업의 승리인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해서 잡지를 넘긴다. 그러자 긴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하고 같이 찍은 사진이 보인다. 

의자에 앉아있는 도후는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옆으로 살짝 숙여진 그의 매끄러운 콧날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진이 아닌 직접 눈으로 도후의 매끄러운 콧대를 본 적이 있었다. 정말 잘 빠졌었지. 누구라도 부러워 할만 한 그런 코였다. 태양은 손가락으로 도후의 콧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 잘 나왔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태양은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몸을 숙여 보고 있던 잡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굳어있는 태양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도후의 옆에 서있는 자를 가리켰다. 그 순간 태양은 깨달았다. 사진 속에 하얀 모자를 쓰고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모의 남자와 옆에 서있는 이 남자는 동일 인물이었다. 그것을 깨닫기만 하고 바로 반응을 취하지 못하고 있으려니 사내가 허리를 세우고 태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을 위로 든 사내가 선글라스를 아래로 살짝 내리자 밝은 갈색눈동자가 나타난다. 사내는 태양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멋있지 않아?”

“..........태유 선배.”

태양이 부르는 호칭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자는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나 기억하고 있었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쉽게 잊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서 고교 때까지 선배였던 사람이다. 고교 졸업 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이 거짓말처럼 나타나 눈앞에 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있으려니 잡지를 덮은 태유가 손가락으로 커버에 있는 도후의 얼굴을 쿡쿡 찔렀다.  

“도후는 이번에도 여성잡지 커버에 나왔네. 그거 알아? 다른 사람들은 도후가 제일 먼저 여성잡지의 커버를 장식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제의를 받은 건 내가 먼저야.”

“........그런데 왜 안 찍었어요?”

“내가 여자보다 더 예쁘다고 하면서 기분 나쁘다고 한 사람이 있었거든.”

그리 말한 태유는 붉은 입술을 슬그머니 올렸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태양은 ‘이 사람은 여전하구나.’라고 느꼈다.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태유가 손가락을 들어 태양이 쓰고 있는 안경을 건드렸다. 

“안경 언제부터 쓴 거야?”

“고 3때부터 썼어요?”

“나 졸업하고 나서부터 썼어? 공부하려고?”

“그런 것도 있었는데 원래 눈이 좀 나빴거든요.”

“그렇구나. 잘 몰랐는데...”

“안경을 안 써도 일상생활에 차질은 없었거든요.”

“그래?”

잡지가 놓인 곳에 손을 올린 태유는 묘하게 웃는 얼굴로 태양을 쳐다봤다. 검은 렌즈 너머로도 태유가 이쪽을 보는 눈빛의 따뜻함이 전해진다. 원래 이쪽을 볼 때마다 저렇게 따뜻한 눈빛을 짓던 사람이었다.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태양도 태유를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얼굴이 작고 스타일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뭔가 싶어서 눈을 돌리자 서점에 있던 사람들이 흘깃 거리면서 이쪽을 쳐다본다. 왜 그러나 싶었던 태양은 곧 태유가 도후가 찍힌 사진에 같이 찍힌 인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태유가 모델 일을 하고 있었나 하는 깨달음 이전에 태유가 워낙에 눈에 띠는 인물이다 보니 사람들이 이렇게나 쳐다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계속해서 있어봤자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뿐이라는 생각이 든 태양은 저도 모르게 도후가 찍힌 잡지를 들어 올리며 태유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래요?”

“나는 괜찮은데 너는 안 바빠?”

“저도 괜찮아요.”

“그러면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자.”

태유의 말에 태양은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유는 태양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옆에 이 사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에도 중학교 때에도 늘 보이는 쪽에 서있었다. 일부러 말을 거는 것은 아니지만 늘 눈에 띄는 곳에 있으니까 저기를 쳐다보면 이 사람이 있을 거라는 학습은 되었다. 그래서 제일 방황을 했던 고등학교 때에는 태유가 내민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한 2년을 막 놀았던 것 같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말도 못하게 돌아다녔다. 몇 번이나 경찰서에 가고, 병원에 들어가고, 학생주임에게 깨지고......워낙에 다양하고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머리가 다 아프다. 그때에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은 태유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보다 나아졌을까-하는 생각이다. 그러다가 곧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고등학교 이전에도 말썽은 워낙 많이 부려서 여전히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 많이 나게 했기 때문이다. 

빨대를 물고 음료를 찔금 거리고 마시고 있자 앞으로 손을 뻗은 태유가 한쪽에 쌓인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하나를 끄집어내서 자연스럽게 비닐 랩핑을 뜯어 가볍게 흩어본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뭐하는 거야?’라는 말을 했겠지만 태유도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행동해서 그만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계속해서 음료만 빨고 있으려니 태유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묻는다.    

“넌 여전히 만화책을 읽고 있구나.”

“의외로 재미있어요.”

‘그래?’라고 대답은 하지만 이쪽에 말에 크게 감흥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계속해서 만화책을 넘기던 태유의 표정이 어느 순간 묘하게 달라진다. 얼굴을 가까이해서 만화책을 빤히 쳐다보던 태유는 그것에서 눈을 떼고 접은 만화책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건 전에 읽던 거랑 장르가 다르네?”

“순정만화랑 소년만화는 다 봐서 볼 게 없어요.”

“그래?” 

태유는 만화책을 봉지 안에 집어넣고 그 아래에 깔린 잡지와 책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중얼거렸다. 

“일반 서적도 잘 읽는 모양이네. 지금 대학교 다닌다고 했지?”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네가 말을 안 해줘도 주변에 아는 녀석들이 말을 해주거든.”

그 말에 태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유의 주변에는 원래 사람이 많았다. 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알아봐서 태유에게 말을 해주고 태유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일도 아닐 거다. 전부터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쉽게 움직이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태유는 앞에 놓인 잔에 수저를 넣어 빙글빙글 돌렸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최근에는 중간고사를 봐야 하기 때문에 조금 날카로워진 상태에요.”

“하긴 너나 나나 둘 다 공부하는 머리는 없었잖아. 네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너 장난으로 대학 간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대학에 갔을 줄이야. 과연 너다 싶었어.”

“그래봤자 전문대에요. 점수도 제일 낮은 대였고요.”

“그래도 들어간 게 어디야. 난 가보지도 못한 곳인데.”

태유는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자 태유의 얼굴이 더 잘 보인다. 

태유는 기억 속에 있었던 것 보다 훨씬 예뻤다. 혼혈이라 진한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데다 팔과 다리가 길고 얼굴도 예뻐서 전부터 유명했던 사람이다. 얼굴만 예뻤으면 별 화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싸움도 잘했다. 한번 머리가 돌면 아무도 못 말리는 것으로도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객관적인 눈으로 봐도 확실히 위험한 사람이었는데 전에는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이런 사람의 옆에 있었던 걸까 싶다.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때라 독인지 약인지도 모르고 옆에 붙어 있었던 거다. 

아까부터 계속 음료만 먹고 있으니 어느새 바닥에 다 보인다. 쪼르륵-하면서 바닥에 조금 남은 것을 마시고 있으려니 간질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눈을 들자 손에 턱을 괸 채로 이쪽을 쳐다보는 태유가 보였다. 

“건강해 보여서 좋다.”

그리 물은 태유는 웃었다. 그 모습이 예쁘다.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머리를 길게 기르고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 몸매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몰라도 언뜻 보면 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여자 취급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농담으로라도 예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태양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형 덕분이죠. 형이 없었으면 어딘가 부러져서 병신이 되었을 텐데...”

2년 내내 어울려 놀다가 갑자기 나가서 공부를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분위기 정말 싸했다. 일반적으로 그런 식으로 나갈 때에는 집단 구타가 당연시 되는 일이었지만 그 때 태유가 나서서 각목으로 머리 한 대 치는 걸로 무사히 넘어갔다. 태유가 없었으면 지금도 다리 한 쪽을 절뚝거리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태양은 잔 안에 담긴 얼음을 빨대 끝으로 건드렸다. 달그락 거리면서 얼음 조각들이 섞이거나 부딪힌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태유는 눈을 들어 태양을 쳐다봤다. 

아래로 내리고 있는 눈이 귀엽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인지 어려보이는 인상도 마음에 들었다. 태양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태유는 물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해?”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러면 다행이다.”

태유는 뒤로 손을 넣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던 그는 뭔가가 생각난 듯 태유를 쳐다보며 물고 있는 담배를 두어 번 흔들었다. 

“담배 안 피니?”

“끊었어요.”

“대단하다. 마음 확실히 잡았구나.”

“이젠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너희 아버지가 많이 좋아했겠다.”

“.......................”

좋아하다 뿐인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장하다며 태양의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처음 쌈질을 그만 두고 공부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믿지 않았다. 또 괜한 말을 해서 희망을 갖게 한다면서 쓴웃음을 짓기만 했지만 정말로 마음이 잡은 태양이 그 다음날부터 교과서를 새로 사고 기본부터 착실하게 익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식탁 뒤에 숨어서 태양이 공부하는 것을 훔쳐봤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계속해서 공부만 하자 그제야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이것저것 간식을 챙겨줬다. 그러면서 고맙다고 주먹으로 눈을 누르며 훌쩍거리며 울었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씁쓸한 기억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날뛰었던 때에 그렇게나 아버지의 마음에 검은 멍을 들게 했었던 것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이는 모습에 태유는 입술을 올렸다. 

“원래 넌 효자였어. 애초에 우리랑 어울리면 안 되는 녀석이었지.”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냥.”

눈을 내린 태유는 불을 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후에 공중으로 토해낸 태유는 다리를 꼬면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버지는 잘 지내셔?”

“이번에 재혼을 하게 되셨어요.”

“재혼? 누구랑?”

“그게.....”

태양은 잠시 고민을 했다. 말을 할까 말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태유를 쳐다본다. 이쪽을 대답을 기다리려는 듯 재촉 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것에 태양은 옆에 놓인 책 꾸러미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재혼을 해서 형도 생기게 됐어요.”

“형? 몇 살 차이나는 형인데?”

“3살 정도요. 그리고 그 형이......여기 잡지에 나온 사람이에요.”

“도후가 네 형이 되는 거야?”

“네.”

눈치가 빠른 사람인지 바로 알아낸다. 

이쪽에서 말을 꺼내려 했으면 확실히 껄끄러웠을 테지만 태유가 알아서 먼저 말을 해주니 마음이 편해진다. 태양은 책 봉지를 앞으로 잡아 당겼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형한테만 말 할게요.”

“왜 나한테만 말하는데?” 

미묘한 울림을 지닌 물음에 태양은 태유를 쳐다봤다. 그 순간 동그랗게 변한 태유의 입술 사이로 뿌연 연기가 토해져 나왔다. 연기 사이로 태유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게 되자 태양은 뒤로 살짝 몸을 물렸다. 그 순간 태유는 다시금 물었다. 

“나한테만 말하는 이유가 있어?”

“형은 다르잖아요. 정말 내 친 형 같으니까 말하는 거예요.”

“친형이라고 생각하면서 고2 겨울 때 그러게 연락 끊고 전화 한 번도 없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때는 저도 할 일이 많아서....”

띠리리릭----

말을 하려던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가요나 효과음을 넣지 않은 전화벨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긴장이 풀어져 어깨에서 힘을 빼고 있으려니 폰을 꺼낸 태유가 담배를 입에서 빼내며 말했다. 

“여보세요?”

입을 다물고 반대편에서 말하는 것을 듣던 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갈게.”

짧게 통화를 끝낸 태유는 앞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껐다. 

“나 이만 일어날게.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한 번 만날까?”

태유는 지갑을 꺼내 거기서 명함 하나를 뽑아 태양의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내 연락처야. 전화하고 싶으면 해. 알았지?”

태양은 태유가 건넨 명함을 받아들고 번호를 확인했다. 역시나 전과 번호가 달라져 있다. 이러니까 전에 전화를 걸어도 안 받았던 거지.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유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 전화번호도 알려드릴게요.”

“알려주면 내가 먼저 전화하게 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싫어.”

태유의 대답에 태양은 말없이 그를 무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태양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인 태유는 선글라스를 눈에 쓰며 말했다. 

“이번에도 기다려 봐야겠다. 네가 먼저 전화를 하는지 안 하는지 말야.”

손을 흔들며 ‘다음에 보자.’라는 말을 한 태유는 태양이 뭐라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태유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태양은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성의 없이 태유라는 이름만 찍혀져 있다. 

자신이 대학생이라는 삶을 사는 동안 태유는 모델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종종 떠올라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하고 걱정했던 사람이 의외로 좋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그것에 안도한 태양은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은 손에 들린 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해서 연락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전화가 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벌써 일주일 째 도후에게서 연락이 없다. 원래 도후와 통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머리 속으로 집어넣은 태양은 폰을 조물락 거리며 얼굴을 들어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쳐다봤다. 

도후에게서도 연락이 없고 아버지에게서도 연락이 없다. 아버지는 결혼식은 생략하고 이번에 휴가를 내서 여행만 떠난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한 거란 말인가. 원래 좀 느린 사람이라 먼저 말을 해줘야 이쪽에서 이런저런 준비를 해둘 텐데 말이다. 당장 코앞에 불똥이 떨어져서 급하게 일을 준비하면 어쩔 수 없이 실수하는 곳이 있을 텐데 말이다. 그때가 되어서 이쪽을 찾아도 그때는 아무 도움도 안 줄 거다. 이미 몇 번이나 사전에 준비 할 수 있도록 미리 말을 해두라고 경고를 해뒀으니 말이다.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멍하니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뒤로 진성이 나타나 밝은 어조로 말을 건다. 

“태양아. 이런 곳에 있었어?”

“응. 바람 좀 쐬고 싶어서.”

태연한 얼굴로 대꾸하는 태양에 진성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다고 멋대로 나가면 어떻게 해. 오늘 회의 할 거 있으니까 남아 있어 달라고 했잖아.”

“내가 있는 다고 딱히 도움이 되는 건 아니잖아.”

“왜 도움이 안 돼. 다 도움이 된다고.”

진성은 주먹을 쥐며 ‘절대로 네가 필요해. 네가 자리에 있어야 한다니까.’라는 의사가 마구마구 뿜어냈지만 그런 눈빛에도 태양은 아무 반응이 없다. 

이번 5월 말 즈음에 학교에서 축제가 있다. 그때 주점을 하게 되어서 그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회의를 열었지만 원래 그 행사를 주체하는 것은 일학년이다. 이학인데다가 체육부장이라는 뜬금없는 곳에 있는 태양이 있어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무슨 의견을 말해서 그들에게 도움이 줄 생각도 없고 말이다. 이쪽은 그냥 없는 편이 차라리 도와주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다음 회의에는 꼭 참석해 알았지?”

“싫어. 나는 이번 중간고사에 집중하기로 했으니까 괜한 일에 나 끼지 말아줘.”

“중간고사는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아.”

“한 달 밖에 안 남은 거지. 나 독서실에 간다.”

태양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없이 떠버릴 것 같은 그 모습에 당황한 진성은 태양에게 손을 뻗었다. 

“태양아. 가지 말고 좀 이리와 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느긋하게 손을 흔든 태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서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간고사는 5월 둘째 주로 시간이 잡혔다. 원래 뭘 외우는 머리가 없는 지라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지 나중에 교수에게 비빌 구석이라도 생기는 거다. 이번에도 열심히 하자며 태양은 유리문을 열고 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서 빈자리가 많았다. 제일 구석진 자리로 간 태양은 바로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꺼냈다. 그리고 무작정 처음부터 읽어내려 갔다. 정보가 돌아서 어디를 보면 된다는 소리가 은밀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냥 시간 범위를 눈에 익숙해질 만큼 읽어둔 후에 그 다음부터 외우기 시작해야 할 거다. 태양은 머리를 가득 채우는 잡념을 지우고 온전히 책 읽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목이 말랐다. 책에서 눈을 뗀 태양은 따끔 거리는 눈을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책상에 올려뒀던 안경을 다시 썼다. 얼굴을 들어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자 아직 한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벌써부터 허리가 뻐근하고 목이 마른지 모르겠다. 밖으로 나가서 음료수라도 하나 사서 들고 와야지 안 되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양은 바깥에 있는 자판기 앞에 섰다. 그런데 마시고 싶은 것이 없다. 어쩔 수 없나 싶어 2층이나 아래로 내려가 매실을 뽑았다. 시원한 캔에 볼을 대고 좋다며 고개를 끄덕인 태양은 발을 돌렸다. 

캔을 손바닥 사이에 두고 굴리며 위로 올라가는데 저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어 잠시 발을 멈추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학년 후배들의 목소리다. 회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위에서 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회의에 참석 안 했던 것이 걸리지만...뭐 어차피 자신이 없어도 되는 자리였지 않나. 그냥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고 지나치면 되겠지. 

“그런데 태양형은 왜 안 참석안 한 건데?”

“원래 아웃사이더잖아. 그냥 냅둬. 원래 이번 자리는 이학년 낄 대도 없어. 우리들끼리 하는 거잖아.”

“그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짜증나잖아. 와서 얼굴이라도 좀 비치면 선배 대우 해줄 마음이라도 생기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매일 불참하고 눈이 마주쳐도 그냥 쌩까잖아. 지가 뭐 엄청 대단한 줄 알아.”

“뭐 어때. 그 선배는 얼굴이라도 잘 생겼지. 얼굴도 개판이면서 괜히 날뛰는 것들보다는 낫잖아. 전에 인사 안하고 그냥 지나갔는데 갑자기 나 멈춰 세우는 새끼도 있었어. 그래놓고는 자기가 선배인데 왜 인사를 안 하냐고 그러더라? 말을 하면서 징그럽게 몸을 막 흩어보는데. 진짜 책으로 머리 통 후려갈기고 싶었다니까.”

“꼴통 학교에 들어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선배라는 것들도 다 병신 같아. 그렇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더 좋은 곳으로 가지 그랬어? 꼭 별거 없는 것들이 더 어깨에 힘을 넣고 날뛴다니까. 같잖게 말야.”

“그렇지. 오늘 진성 선배 봤어? 무슨 말을 해도 다들 안 들어주니까 당황해가지고는. 그 선배는 왜 과대인 거래? 존재감 하나도 없고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안 들어주잖아.”

“그러니까 말야. 내가 보기에는 다들 하기 귀찮으니까 그 선배한테 떠넘긴 것 같아. 그 선배 그런 일 잘하게 생겼잖아.”

“모두들 하기 싫어하는 일 떠넘겨서 하는 사람?”

“뭐. 그렇지.”

낮게 울리는 키득거리는 소리에 악의가 똘똘 뭉쳐있다. 

태양은 계단 난간에 엉덩이를 걸친 상태로 짧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요즘 애들은 개념을 물 말아 먹은 모양이다. 고개를 살레살레 저은 태양은 계단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후배도 후배 나름이지. 안 그래?”

동시에 헉-하고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들자 보이는 것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다섯명 정도 되는 일학년 들이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에서 선배가 올라오니 얼마나 놀랐을까.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서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기만 하는 것에 태양은 마지막 계단을 올라 그들 앞에 섰다. 그것에 모여 있던 일학년들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다.  

“...저..저기...저희들은....”

“자.”

갑자기 음료를 내미는 태양의 행동에 맞은편에 있던 남학생이 놀라 저도 모르게 그 것을 받아들었다. 이걸 왜 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것에 마주 쳐다보며 태양은 입술의 끝을 살짝 올렸다. 

“뒷다마 까느라 정말 힘들었겠다. 그걸로 한 모금씩 나눠 마셔라.”

정적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태양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멍하니 있는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처음에는 좀 버티던 녀석은 태양이 계속해서 응시하자 몸을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차마 이쪽을 쳐다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태양은 주변에 있는 다른 녀석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다들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내린다. 그것에 태양은 그들을 지나쳐 안쪽 복도로 들어갔다. 

요즘 애들 무섭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바로 뒤에 누가 있을 지도 모르는데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다니. 정말이지 머리 속을 열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을 정도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입을 헹구고 나온 태양은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도서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는 데도 쉽게 집중을 할 수가 없어 괜히 책을 들척이기만 한다. 그 때 누군가 어깨를 치면서 옆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공부하고 있었네? 잘 되고 있어?”

태양은 얼굴을 돌려 옆에 앉아 있는 진성을 쳐다봤다. 진성은 책가방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책과 노트를 꺼냈다. 

“왜 왔어?”

“같이 공부하러 왔지. 심심해할까 봐.”

그리 말하며 진성은 이를 보이며 씨익-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얼굴을 내려 이것저것을 꺼내는 모습에 태양은 표정을 굳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려니 그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책을 꺼내던 것을 멈춘 진성이 얼굴을 든다. 

“왜 그래? 내가 와서 방해가 됐어?”

그리 묻는 진성은 평소와 다름이 없는 얼굴이다. 

늘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성에게 따로 고민이 있다거나 힘든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조금 전에 일학년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태양은 입을 열었다.  

“회의는 잘 했어?”

“응? 뭐. 대충은 했지. 앞으로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해보려고.”

계속 좋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씁쓸해하는 표정이 묻어난다. 어깨를 으쓱인 진성이 책을 펼치고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것에 태양은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애들이 말 안 들어?”

“애들뿐인가. 이학년들도 말 안 들어. 다들 빨리 끝내고 놀고 싶은 거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충해버리려고.”

“대충 했다가 교수한테 한소리 들으려고?”

“어쩔 수 없잖아. 걱정하지마.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 되겠다. 그만 떠들고 공부하자.”

진성은 앞으로 몸을 돌리고 책을 보는 시늉을 했다. 시험 기간이 아닌데다 시간도 어정쩡해서 사람도 별로 없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도 상관이 없었건만 이렇게 몸을 돌리는 것은 이런 화제가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정의의 사자가 아니기에 불의를 보고 바로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드는 성격은 아니다. 몇 걸음 떨어져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이 태양의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진성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과에서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진성이 유일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옆에 진성이 없으면 적적한 대학 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에 까지 생각이 미친 태양은 턱을 쓰다듬으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다음에는 나도 회의에 참석할게. 다음에 또 언제 있어?”

태양의 말이 의외였던지 진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에? 회의에 참석하려고?”

“그래도 부장이잖아. 계속 안 낄 수가 없지.”

“태양아....”

진성은 정말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손을 마주잡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진성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이번 주 토요일을 가리키고는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토요일에 2시까지 학회실로 와.”

“토요일인가. 알았어. 그럼 그때 갈게.”

“응. 꼭 와. 다른 애들이 좋아할 거야.”

과연 좋아할까. 이쪽이 나타날 때면 똥 씹은 표정이나 짓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중에서 일학년에 제일 안색을 굳히겠지. 구석에 밀어 넣어진 쥐들 마냥 발발 떨 것인지, 그게 아니면 되려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노려볼지 기대가 된다. 피식-하고 입술을 비틀어 올린 태양은 공부를 하자고 말하며 몸을 돌렸다. 

다시금 책을 펼치고 몇 장 읽으려던 태양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거의 2시간에 한 번씩 폰을 확인하는 것 같다. 누구한테 문자가 왔나. 혹은 전화가 왔는데 이쪽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 액정을 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원래 핸드폰 따위 잘 보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엄지로 액정을 문지르던 태양은 눈을 위로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머리 속으로 떠올린 그는 바로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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