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
갑자기 꽃샘추위가 생겨서 추운 모양이다. 일단 차 안에 들어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도후는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기 세 번째에 있는 차야.”
“그래요?”
태양은 도후가 가리키는 차를 쳐다봤다. 딱 봐도 어느 게 도후의 차인지 알 것 같다. 주변에 있는 다른 차보다 월등히 뛰어난 포스를 자랑하고 있다. 꽤 비싼 차 같다며 태양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설렁거리며 차 쪽으로 갔다.
“차 좋네요?”
“돈 벌어서 차부터 바꿨으니까.”
“연예인이면 이런 차 말고 더 큰 차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차는 소속사에서 가지고 있어. 멀리 이동하거나 스케줄 딱 잡힐 때에만 타지. 평소에는 내가 직접 운전해.”
“운전하는 거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뭐, 그렇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도후는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태양도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별 생각 없이 앞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려고 하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뭔가 싶어서 얼굴을 들자 꽤나 묘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도후가 보였다.
“왜 그래요?”
“...나 지금까지 이 차 앞자리에 아무도 앉힌 적이 없거든?”
“그래서요? 이 자리에 금칠이라도 해놨어요? 나 앉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춥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하는데 뭐라 대꾸를 못하겠다. 말이나 표현은 하지 않지만 몸을 작게 움츠릴 만큼 추위를 잘 타는 것 같은 녀석에게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 뒷자리로 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도후는 말없이 난방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태양이 바로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곳에 양 손을 댔다.
“차갑잖아요.”
손을 대자마자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고 따지는 것에 도후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틀었는데 차가운 게 당연하지. 조금 기다려야지 따뜻한 바람 나오는 거야.”
“뭐 그런 게 있어. 보기는 좋으면서 되게 구리네.”
새로 뽑은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차를 둘러보면서 불만스럽데 투덜대는 태양의 모습에 도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참자. 참자. 그냥 말을 말자. 이 녀석과 말을 하면 이쪽만 더 피곤해질 뿐이다. 그런 식으로 속으로 생각한 도후는 자세를 바로 하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뒤로 몸을 돌려서 차를 빼낸 다음에 바로 단지 바깥으로 나온 그는 언덕을 내려가 대로에 다다르게 되자 입을 열었다.
“어디..”
“오른쪽.”
짤막하게 말한 태양은 그걸로는 설명이 좀 부족하다 싶었는지 손가락을 들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나오는 지하철 선로를 따라서 주욱 올라가면 되요.”
태양의 말에 도후는 대충 위치를 파악하며 차를 몰았다. 전에 차를 탔을때 도후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것에 의외인 듯 태양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운전 잘 하네요. 전에 탔을 때에는 나 튕겨서 바깥으로 던져버릴 것처럼 거칠게 운전하더니.”
그때는 태양이 너무 재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다. 지금은 그때처럼 화가 난 상태도 아닌데 일부러 거칠게 운전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머리로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말하지 않은 채 도후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핸드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다른 쪽에도 손을 집어넣고 자동차 수납도 열어보려니 창밖을 보고 있던 태양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뭐 찾아요?”
“핸드폰.”
“주머니에 없어요?”
“없는데? 아. 뒤에 있는 가방에서 있나 좀 찾아봐줘.”
고개를 끄덕인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손을 뻗었다. 작은 가방을 들고 온 그는 지퍼를 열고 안을 살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화장품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남자가 탄 차에 왜 이런 것이 있나 싶어서 싫은 기분이 들었을 테지만 도후는 모델이다. 이런 가방 한, 두 개쯤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몇 번 안을 들척이자 검은 핸드폰이 나타난다. 그것을 꺼내서 도후에게 내밀자 고맙다고 말한 그가 핸드폰을 가지고 가서는 바로 전원을 켰다.
“끄고 있었어요?”
“술 마신 녀석들이 연락하면서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
“흐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바로 띠리리릭-하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진다. 전원을 키기가 무섭게 벨이 울린다. 어서 빨리 받지 못하겠느냐는 듯 계속해서 울리는 벨 소리에 도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싶어서 액정을 살피니 매니저다. 목소리 톤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은 매니저를 떠올리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답답하다는 듯 눈을 위로 한 채로 멍한 표정을 짓던 도후는 옆에 앉은 태양이 ‘안 받아요?’라고 말하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액정을 열어 귀에 댔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이건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바로 화를 버럭 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가 울린다. 도후는 태양의 눈치를 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도후가 꽤 난처해하는 것 같아서 태양은 일부러 얼굴을 돌려 바깥쪽을 쳐다봤다. 이렇게 차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덕분이 느긋하게 준비를 할 수도 있었고 학교에 도착해서도 꽤 시간이 남을 것 같다. 커피나 한잔 뽑아서 벤치에 앉아서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도후의 대화가 잘 들린다.
“그게 아니야. 아니라니까. 아, 정말 옆에 여자 없다니까..!”
평소 어떻게 지냈으면 저런 말을 하게 되는 걸까. 얼굴을 돌린 태양은 도후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차선을 바꾸기 위해서 얼굴을 돌리던 도후가 눈이 딱 마주친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도후는 태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참으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은 그는 폰을 때 목에 누르고는 말했다.
“지금 그 표정은 뭐야?”
“평소에 여자 잘 만나나 봐요?”
“지금은 정신 차려서 안 만나. 매니저가 괜히 사람 잡는 거야.”
대충 얼버무린 도흐는 다시금 폰에 귀를 대고 말했다.
“여보세요? 당신이 지금 이상한 말 하니까 내 동생 될 녀석이 괜한 오해를 하잖아. 그래. 동생이랑 있다. 말했잖아. 엄마 재혼한다고! 내가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다 엄마가 뭐라고 쪼아대니까 이러는 거잖아.”
인상을 쓰며 말하는 도후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한 손으로 전호를 받으면서도 운전은 꽤 하나구나 싶다. 그런데 운전 중에 통화 하는 것은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러다가 걸리는 건 아니겠지. 일반인이 아닌 유명한 모델이라서 걸리면 더 곤란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태양이 주변을 살펴보는 동안에도 도후는 계속해서 통화에 여념이 없다.
“내가 그 여자들하고 같이 놀았으면 좋았다는 거야 뭐야? 그 여자들 지금 눈에 불 켜고 나한테 달려들려고 하는데 그런 곳에서 몸 대주고 있어야 했다는 거야? 응?”
따지는 소리에 수화기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아무래도 기가 죽은 모양이다. 도후는 몇 번 혀를 차다가 성가신 듯 내뱉듯 말했다.
“아. 몰라. 몰라. 기분 잡쳤어. 끊어. 끊으라니까.”
바로 핸드폰을 닫은 도후는 그것을 뒷자리에 집어 던졌다. 저렇게 끊었으니 다시금 전화가 울릴 것 같은데 의외로 잠잠하다. 태양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금 도후를 쳐다봤다.
“사이가 안 좋나 봐요?”
“사이가 너무 막역하니까 격이 없어져서 막 파고드는 거야. 귀찮기는.”
투덜댄 도후는 앞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운전만 한다 싶더니만 갈라지는 길이 나오자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리며 묻는다.
“여기서 어디로 가면 돼?”
“쭉 가세요. 가다 보면은 나올 테니까.”
“그래?”
도후는 앞을 쳐다보고 운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원래 옆자리에 누구를 앉혀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조금 전에 신경질을 내서 통화를 했기 때문인지 묘하게 태양의 존재가 거슬린다. 뭔가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은 한다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도후는 마침 좋은 화제를 떠올리는 고는 그것에 대해서 물었다.
“몇 학년이야?”
“이학년 올라갔죠. 이제.”
“군대 갔다 와서 늦어진 건가?”
태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깥쪽을 쳐다봤다. 그러는 동안 도후는 머리 속으로 생각을 했다. 군을 다녀오고 지금이 2학년이다. 이래저래 생각을 해봐도 중간에 일 년이 빠진 것 같다. 재수를 했나. 그냥 물어보지 않은 편이 나을 것 같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이 더 답답할 것 같았던 도후는 다시금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일 년 재수했어?”
“네.”
“흐음. 그래?”
재수했구나. 간단하게 그렇게 생각한 도후는 다시 앞을 쳐다봤다. 계속 가다 보니 저 앞에 무슨무슨 대학이라고 적힌 판이 보인다. 도후는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야?”
“저기에요. 그냥 길가에 멈춰줘요. 당신 얼굴 들키면 안 되니까.”
태양의 말에 아차 싶었던 도후는 급히 선글라스를 꺼내서 썼다. 그리고 천천히 길가에 차를 세우자 태양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 동안 도후는 얼굴을 들어 대학 이름이 쓰인 깨끗한 판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보면서 생각을 해봐도 기억나는 대학 이름은 아니다.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며 저 대학이 어떤 대학인가 싶어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결국 도후는 태양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학교야?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학교에요. 신생 전문대. 그래서 나 같은 꼴통도 들어갈 수 있었던 거에요.”
“꼴통?”
꼴통이라는 이미지와 태양의 이미지가 너무도 안 어울린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짓는 도후지만 그런 도후를 똑바로 쳐다보는 태양의 얼굴은 지나치게 태연했다. 마치 남 이야기를 하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생 때 너무 놀아서 머리가 완전 돌이거든요. 고 3때부터 군대 가서까지 4년 죽자고 공부를 했는데도 결국 여기밖에 올 수가 없었어요. 암만 기를 써도 수능이 바닥인데다 내신도 지랄 같았거든요. 반 45명에서 늘 40등에서 43등 사이를 왔다 갔다 했으니까.”
“.......................”
“나중에 보게 되면 그때 과일도 좀 사와요. 이만 가볼게요.”
손을 흔든 태양은 따라 도후도 손을 흔든다. 그 행동에 슬며시 웃음을 지은 태양은 차에서 내리려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아.’하는 소리를 내며 뒤를 쳐다봤다.
“내 번호 알아요?”
“알고 있어. 전에 왔던 번호 저장해 뒀으니까.”
“......그래요?”
의외다. 그냥 지워버리거니 지나칠 줄 알았는데 그걸 저장해 뒀단 말인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 태양은 ‘흐음.’소리와 함께 슬그머니 입술을 올리고는 그대로 차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은 태양은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금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도보를 걸어가는 태양의 뒷모습에 도후는 그제야 위로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방금 들은 말은 정말 의외다. 태양이 많이 놀아서 머리가 돌이었다는 것과 40등 사이를 했다는 것이나,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갔다는 것도 말이다. 딱 보기에는 세상 따위 쉽기만 하지-라는 느낌이라서 학교생활도 원만하고 대학교도 쉽게 들어갔을 것 같은데. 의외로 고생을 했던 걸까.
도후는 살풍경했던 태양의 방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필요한 것만 구비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방의 모습이 지금의 태양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안색을 굳힌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도후는 눈을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놀았길래..”
중얼거리며 운전대에 손을 올리는 순간 태양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는 사이인지 손을 들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 쪽으로 얼굴을 돌린 태양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 행동에 도후는 놀랐다. 이쪽에서 보여주던 시니컬하거나 장난스러운 표정은 하나 없이 그저 예의상으로 지어주는 웃음과 표정을 짓는 태양은 굉장히 낯설었다. 아니다. 처음 태양을 만났을 때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질적으로 태양과는 이제 겨우 세 번을 만났을 뿐인데 그 동안 다른 표정이 이렇게나 확연히 보이다니. 이건 정말...
“친해진 건가.”
처음 태양을 봤을 때에는 재수 똥이라면서 절대로 친해지지 않기로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다. 심경의 복잡함을 느끼며 위로 올라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 태양이 있던 것을 쳐다보던 도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앞으로 형제가 될 사람이다. 친해져서 나쁠 일은 없겠지. 대충 그렇게 생각을 한 도후는 운전대를 잡고 옆으로 돌렸다.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자 태양은 발을 멈추고 뒤를 쳐다봤다. 그것에 그의 옆을 따라 걷던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래요? 형?”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저은 태양은 다시금 앞으로 얼굴을 내렸다. 무뚝뚝함이 묻어나는 그 얼굴을 살펴보던 남자는 태양 쪽으로 몸을 붙이며 말을 걸었다.
“형은 점심때 누구랑 같이 밥 먹어요?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우리랑 같이 먹어요. 형 혼자 먹으면 심심하잖아요.”
남자의 말에 옆에 있던 여자들도 기화라는 듯 눈을 빛내며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먹어요. 오빠랑 같이 먹으면 다들 부러워 할 텐데.”
“그래요. 그렇게 해요. 우리랑 같이 먹고 밥값도 대신 내주세요. 네?”
“내가 왜 밥값을 내줘야 하는데?”
내내 무심한 표정으로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던 태양은 밥 사달라는 말에 바로 반응을 보였다.
미간 사이에 하나의 주름을 만든 태양은 이쪽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여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밥은 너희 돈으로 내야지. 그런 식으로 당연한 듯 다른 사람한테 자기 밥값 내달라고 하는 건 구걸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무나 붙잡고 밥 사달라고 하지 말아라. 보기 굉장히 안 좋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태양의 말에 여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당황한 건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태양은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것에 다른 쪽에 서있던 남자가 여자들 몰래 엄지를 세우며 윙크를 했다. 그것을 흘깃 하고 쳐다본 태양은 발을 멈췄다.
“난 커피 마시고 들어갈 거니까 먼저 들어가. 다음에 보자.”
태양의 말에 세 사람은 눈치를 봤다. 계속해서 태양의 옆에 있자니 지금 분위기상 굉장히 민망할 듯싶다. 그냥 들어가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며 세 사람은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났다.
“다음에 봐요. 형.”
“그래요. 다음에 봐요. 오빠.”
인사를 한 세사람은 태양이 뒤쫓을 새라 급히 물러났다. 후다닥 거리며 달라가는 그들을 흘깃-하고 쳐다본 태양은 계단 위로 올라가 오른편에 있는 자판기 앞에 섰다. 커피를 뽑아들고 근처에 있던 바위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태양은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학교 커피는 맛이 없다. 그래도 이걸 마시고 있으려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 태양은 얼굴을 들어 저 아래로 보이는 도로나 길목을 쳐다봤다.
조금 전 여자애들에게 괜한 말을 했나 싶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밥 사달라-라는 말을 했을 거다. 이쪽에 돈을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왜 평소에는 잘 말도 못 하면서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여지없이 밥 사달라는 말을 하는 걸까. 그렇게 말하면서 달라붙는 것은 정말이지 빈대 근성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 못된 근성은 알아서 바로 잡아 줬으며 좋겠는데.
태양은 얼굴을 들어 저 아래에 보이는 도로를 쳐다봤다. 학교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앉아 있으면 아래의 도로나 다른 건물들이 다 보인다. 도후는 지금쯤 다른 곳으로 가 있겠지. 오늘 오후에는 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모델이니 분명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될 거다. 상상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수수께끼의 공간에 대해서 알고 싶으니 다음에 살짝 구경시켜 달라고 할까? 그런데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인간이 순순히 좋다-라는 대답을 할까. 안 할 것 같은데.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태양은 다시금 후루룩 하고 커피를 마셨다.
다리를 꼰 도후는 인상을 잔뜩 쓴 채로 잡지를 보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것이 누군가 건드리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서워서 그런 도후에게 접근할 수 없겠지만 여자는 그런 것 따위 상관없다는 듯 도후의 옆으로 다가오며 은근슬쩍 말을 붙였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대타로 일 뛰면 누구나 나처럼 인상 쓰게 되는 거야.”
아는 디자이너랑 가볍게 식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그게 완전히 뒤틀어져 버렸다. 갑자기 촬영을 하게 될 모델이 펑크가 나면서 약속을 잡혔던 디자이너가 급하게 도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밥 가볍게 먹고 대충 이야기를 들어주고 집으로 들어가 한숨 푹 자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불만이라는 듯 잡지를 덥고 옆으로 내려놓자 여자가 옆에 있던 테이블에 엉덩이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타로 뛰어도 돈은 들어오잖아.”
“좀 쉬고 싶었어.”
머리를 쓸어 올리는 도후의 얼굴은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그런 그를 웃는 얼굴로 쳐다보던 여자는 테이블에 손을 대고는 도후 쪽으로 몸을 내려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요즘 돈 좀 벌었지? 너 많이 나오잖아.”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흘깃-하고 쳐다본다. ‘그런 개인적인 문제는 물어보지 말지?’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에 여자의 웃음이 한결 진해진다. 정말로 작정을 한 것인지 팔 사이에 가슴을 끼어 넣고는 일부러 골을 깊게 만든 여자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귈래?”
“너는 싫어.”
“어째서?”
“8다리 중에서 하나 더 추가하는 입장은 되고 싶지 않으니까.”
도후의 말에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몸을 물렸다. 여자는 다시금 잡지를 보고 있는 도후를 쳐다봤다. 촬영을 위해서 머리에 핀 몇 개로 머리카락을 고정시켜두고 있었지만 그 모습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꽤 멋지지 않냐면서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여자는 아쉬운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너 아깝다. 많이 멋있어 졌는데.”
“지금이 아니라 한 몇 년 전에 접근했다면 받아줬을 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싫어. 그때 너 무명이었잖아.”
“그랬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을 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 도후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무명이여서 사귀기 싫다니. 앞으로도 너 같은 여자는 절대로 쳐다도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도후는 바쁘게 움직이는 스텝들을 쳐다봤다. 촬영은 늘 빡빡하게 이뤄진다지만 오늘따라 더 복잡한 것 같다. 이쪽 몸 상태가 편치 않아서 괜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옆에 놓인 캔 음료의 병을 따서 한입 물려니 저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난다. 뭔가 싶어 얼굴을 들자 몇몇 사람들과 같이 들어오는 날씬한 몸매의 녀석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을 모두 엑스트라로 만들 만큼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는 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성별이 모호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매로 휘적거리며 안으로 들어와서는 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안을 쳐다본다. 그때마다 대충 묶어 올린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았다 떨어지곤 했다. 본인은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말을 걸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입 딱 다물고 있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태유다.”
여자의 낮은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시기가 서려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태유라는 녀석은 남자면서도 여자 뺨 칠 정도로 얼굴이 굉장해서 종종 여자 모델들의 일을 빼앗아 가곤 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최근에는 여자 모델을 선택하지 않고 바로 저 태유를 지목하는 광고주나 디자이너가 있을 정도다. 옆에 있던 이 여자도 한창 잘 나가고 있지만 몇 번이나 번번이 하고 싶었던 광고나 지면을 저 태유에게 빼앗기고서는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고 얼핏 들었다.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는 관심은 없으니 제발 내 앞에서 저 녀석에 대해서 투덜대지 말아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잔뜩 얼굴을 찡그린 여자가 바로 투덜대기 시작한다.
“머리는 왜 저렇게 기르고 있는 거야? 일부러 배도 드러내고 말야. 요사스러운 녀석. 정말 남자 맞아? 아주 작정하고 사람을 후릴려고 저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고 있어.”
악의를 담고 투덜대던 여자는 그걸로는 부족했는데 도후 쪽으로 몸을 내리며 열정적으로 흉보기에 돌입했다.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지? 저 녀석 머리카락 자연 갈색이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때에는 다 개뻥이야. 분명히 염색한 걸 거야. 눈동자도 한국 사람이라면 저렇게 진한 갈색이 나올 리가 없잖아. 안 그래?”
“혼혈인가 보지.”
“혼혈이 저렇게 개성 없이 생겼니?!”
혼혈이라고 다 개성 있게 생기라는 법은 없다.
그냥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 나은데 이렇게 흥분을 하고 입을 열면 바로 머리가 텅텅 빈티가 난다. 이래서 이 여자가 싫다면서 한숨을 쉰 도후는 덮었던 잡지를 펼쳐 무릎 위에 올렸다. 이쪽과의 대화를 단절하려는 듯한 그 행동에 여자는 바로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비켜줄래?”
도후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던 여자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움찔하고 몸을 굳혔다. 그건 도후도 마찬가지다. ‘이 목소리는....’라고 생각한 도후는 얼굴을 들어 굳어버린 여자 뒤에 서있는 날씬한 몸매를 지닌 자를 쳐다봤다.
“나 그 쪽에 앉고 싶어서 말야. 좀 비켜줘.”
그리 말한 태유는 입술을 올렸다. 멀리서 볼 때에는 체형이 보여서 남자 같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만 보고 있으려니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머리가 굉장히 작고 화장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뽀얗기만 한 피부가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테이블에서 내려온 여자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턱을 위로 들었다.
“다른 곳에 앉아. 다른 데에 자리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로 온 거야? 너 나한테 시비 걸러 왔니?”
“아니. 시비 걸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네 접힌 아랫배가 너무 심하게 나와서 그것 좀 말해줄 겸 해서 이리로 온 거야.”
“.........뭐?”
창백하게 굳어지는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내린 태유는 하얀 천으로 갈 가려진 여자의 날씬한 배를 보고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일어나면 좀 괜찮은데 앉으면 완전히 삼겹이더라. 너도 나이 먹었으니까 관리 좀 해야겠다.”
“너...너너....”
“아까 선생님이 부르던데. 한번 가보지? 네가 피팅한 옷 찢어졌다고 하더라.”
분한 듯 몸을 부들부들 떨던 여자는 그 말에 완전히 굳어버렸다. 설마하니 그런 말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완전히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서는 뻣뻣하게 서있는 여자의 몸을 지나친 태유는 도후의 옆에 앉았다.
잡지를 읽는 척 하면서 태유와 여자의 설전을 보고 있었던 도후는 내심 움찔했다. 왜 하필 여기에 앉는 거야. 둘이 싸우고 괜히 불통 튀는 거 아닐까 싶어서 입 꾹 다물고 있으려니 다행스럽게도 여자가 알아서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기 전에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데 괜찮을까 싶다. 슬그머니 태유를 쳐다보자 그는 무척이나 편안한 얼굴로 스텝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 말을 건넸다.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살짝만 봤을 뿐인데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 녀석은 의외로 눈치가 빠르다. 딱히 안 봤다고 잡아 땔 생각은 없었던 도후는 잡지를 덮으며 태유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여자들한테 미움 받는 거 아냐?”
“여자들한테 미움 받는다고 하고 싶은 말 안할 수는 없잖아. 내가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뭐, 그건 그렇지만....”
남자면서 여자들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조금 우습긴 하지만 바닥이 바닥이다 보니 인맥 관리나 소문 같은 것을 조심해야 했다. 워낙 악의적으로 말을 해대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남자들도 이쪽 바닥에 있으면 괜히 수다스러워지고 음흉해진다. 때문에 뭉쳐서는 사람을 매도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런 쪽으로 보자니 이 태유라는 녀석은 그 쪽으로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생긴 건 곱상한데 하는 행동이나 태도가 험해서 몇 번이나 모델들이나 디자이너와 마찰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용케 매장 안당하고 잘 버티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뒤에 대단한 빽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심상찮게 돌기도 했다. 그런 말을 많이 들어서 꽤 깐깐한 녀석이 아닐까 싶었는데 의외로 말을 해보니 시원스럽다. 생긴 건 여자지만 성격은 남자라는 느낌이다.
태유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도후를 쳐다봤다.
“오늘 촬영 없는 날이잖아?”
“어쩌다보니 대타로 뛰게 되었어.”
“선생님하고 사이가 좋았었지. 그래서 널 대타로도 쓸 수 있는 거구나.”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일을 부탁할 정도로 친하진 않았다. 귀한 휴식 시간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라 썩 표정이 좋아지지 않는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태유가 장난을 걸듯 묻는다.
“요즘 많이 나오던데 모델 일 안하고 다른 거 할 거야?”
“아마도 하게 되겠지. 딱히 모델 일만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이것저것 다 하고 싶었으니까.”
“아무거나 하다가 실패하는 거 아냐?”
“실패 안하도록 노력해야지.”
“그래. 그게 정답이다.”
고개를 끄덕인 태유는 도후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녀석이 이런 식으로 웃어줄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 웃음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도후는 중얼거렸다.
“의외로 편하게 대화가 되네. 나는 조금 더 딱딱할 줄 알았는데.”
“나도 버터 질질 흐르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백해서 놀랐다. 여자들 사이에서 평판은 별로던데 역시 소문이었구나.”
태유의 말에 도후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기에 도후는 태유 쪽으로 몸을 내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얼마 전에 어떤 모델 차지 않았어? 그래서 그 여자가 너에 대해서 악담을 하고 다니던데. 정말 몰랐어?”
“.......제기랄. 그 여자...”
잘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다녔겠다. 누군지 바로 용의자가 머리 속으로 떠오른다. 분한 듯 이를 바득바득 갈던 것도 잠시 앞에 있는 태유에게만이라도 진실을 밝히자 싶었던 도후는 투덜대듯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잠깐 사귀었을 뿐이야. 그런데 좀 뜨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덤벼들어서 딱 잘라냈을 뿐이라고. 정말이지 어디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입 다물게 해줄까?”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투다. 때문에 도후는 얼굴을 들어 태유를 쳐다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도후가 그런 표정을 짓든 말든 태유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웃고 있는 얼굴임에도 불구 왜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뭐라 딱 집어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을 받으며 도후는 물었다.
“어떤 식으로 입 다물게 해주겠다는 거야?”
“어떤 식으로든지.”
지금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적에 불량했던 녀석들 중에서도 제일 만만찮았던 녀석을 앞에 두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든다.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랗기만 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도후는 의외라는 듯 아래로 눈을 내려 태유의 손을 내려다봤다. 가늘지만 단단한 손이다. 보기에는 부드럽게만 보이지만 막상 만져보면 딱딱한 사내 느낌이 나는 손이었다. 이건 태양과 같은 느낌이 나는 손이다.
“너 어렸을 때 그쪽이었지?”
“그쪽이라니?”
“일진 같은 거 말야. 요즘 애들은 그런 식으로 부르나 보던데. 맞지?”
“우리 때에는 일진이 아니라 그냥 짱이라고 불렀는데.”
“역시나. 그쪽에서 놀았던 거냐.”
오늘따라 그 쪽에서 노는 사람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는 구나. 태유도 그렇고 태양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둘 다 태자로 시작되는 이름이잖아. 그 태로 시작되는 이름의 사람 중에는 소위 말하는 논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카메라맨이 손을 흔들며 말한다.
“잠깐 이리로 와 주세요. 맞춰 볼게요.”
별 생각 없이 그리 말한 카메라맨은 도후를 확인하고는 움찔하고 몸을 굳혔다. 신인 모델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름이나 지명도가 있는 모델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한창 매스컴에도 잘 나오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맞춰본다며 불렀으니 욕을 먹을 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꽤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에게 그러 말을 했다가 진탕 욕을 먹었던 기억도 있고 말이다. 굳어서 뻣뻣해져 있는 카메라맨이지만 태유와 도후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태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후를 내려다봤다.
“내가 갈까?”
“같이 가자.”
도후는 무릎에 올린 잡지를 대충 치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앞으로 나가 서있는 태유의 옆에 나란히 선 도후는 아직도 굳어있는 카메라맨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충 서 있으면 됩니까?”
“네..네네..!”
도후가 이렇게나 쉽게 자세를 잡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던 카메라맨은 냉큼 셔터를 눌렀다.
본 촬영이 아니라서 일부러 포즈를 잡지 않았다. 가볍게 몸을 풀어주면서 서있던 도후는 태유 쪽으로 얼굴을 내렸다. 그때 태유의 귀 뒤로 있는 검은 얼룩을 발견했다.
“너 귀 뒤에 상처 있는....게 아니라 문신이네?”
검은 얼룩이라서 다쳐서 딱지가 생긴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문신이다. 아주 작은 문신인데 기하학 무늬 같기도 하다. 이런 곳에 문신을 새긴 사람을 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서 빤히 쳐다보려니 태유가 손가락으로 귀 뒤를 누른다.
“맞아. 문신이야. 있는 줄 몰랐어?”
“그런 곳에 문신이 있는 걸 알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네.”
피식-하고 웃은 태유는 귓불을 손으로 잡은 채 도후를 쳐다봤다.
“이건 내 첫사랑에 대해서 새긴 거야.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 신체 중에서 제일 예민한 부분에 새겨 넣은 거지.”
귀 뒤에 일부러 문신을 새길 정도의 첫사랑인가.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몸에 무엇을 새긴 사람은 몇몇 봤지만 저렇게 귀 뒤에 문신을 새긴 사람은 또 처음이다.
“어떤 모양이야. 그건?”
“태양.”
“.......응?”
순간 도후의 표정이 흔들린다. 흠칫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태유는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말했다.
“이 문신은 태양이야.”
“........................”
‘아, 그래.’라고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인 태양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식탁에 양 손을 올리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던 태양의 얼굴이 순간 태유의 귀 뒤에 달라붙었다. 엽기도 그런 엽기가 없다. 왜 하필이면 태양의 얼굴이 도후의 귀 뒤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상상한단 말인가. 나도 정말 이상해 졌다면서 표정을 굳힌 채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리자 셔터를 두르던 카메라맨이 손을 내리며 ‘됐습니다. 조금 있다가 본 촬영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에 도후는 서둘러 태유의 옆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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