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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들어갈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태양은 얼굴을 드는 순간 바로 걸음을 멈췄다. 태양이 얼굴을 든 쪽에는 팔짱을 낀 상태로 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도후가 보였다. 발아래에 커다란 봉지를 두 개나 두고 있던 도후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가 이상한 낌새가 전해진 것인지 얼굴을 들다가 태양을 발견하고는 ‘아아.’하는 소리를 냈다.
“늦었잖아.”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그런 말 하지 말고 빨리 문이나 좀 열어. 화장실 가고 싶어 죽겠고만.”
투덜댄 도후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고는 냉큼 문에서 떨어졌다.
화장실을 가고 싶어 죽겠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커다란 봉지도 수상쩍다. 문 앞으로 가면서 슬쩍 내려다보자 식료품이 잔뜩 들어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불안한 기분이 든 태양은 인상을 쓰며 도후를 쳐다봤다.
“이거 더 뭐에요?”
“나중에 말해줄게. 빨랑 문 열어. 빨랑.”
“....................”
“아. 싸겠다니까!”
정말로 급한지 이제는 발을 동동 구르고 얼굴색도 좀 창백해진 것 같다. 마음 같아서야 저 뒷산에 있는 곳으로 가서 시원하게 싸고 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도후의 눈빛이 너무도 절실해서 차마 그런 말은 못하겠다. 긴 한숨을 쉰 태양은 문을 열었고 그 순간 도후는 총알처럼 집으로 들어가 냅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탕-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촤아아-하고 시원하게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변기에 구멍 뚫리겠네.”
중얼거린 태양은 한쪽 손에 다 들고 있던 짐을 현관 안쪽에 두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이 잔뜩 쌓인 식료품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도후의 것 같은데 들고 들어가야 하는 걸까? 혹시 그 인간이 화장실에서 나와서 ‘화장실 잘 썼다. 난 이만 가볼게.’라면서 이것들을 들고 가 버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봉지를 발끝으로 툭툭 치는데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진다. 이건 또 뭔가 싶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봉지를 살짝 열던 태양의 눈이 급속도로 반짝였다.
“고기다.”
그렇다. 고기였다. 봉지 안쪽에 잔뜩 든 고기를 발견한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봉지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고기의 양이 많은지 무게도 만만찮다. 가슴 한쪽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슬그머니 입술 꼬리를 올리며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우연찮게 저기 복도의 끝에 서있던 동석과 눈이 마주친다.
집으로 가려다가 이쪽을 돌아봤던 것인지 동석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고 몸을 굳혔다. 그런 동석에게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 앞에 댄 태양은 쉿-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에 동석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만족의 표정을 지은 태양은 봉지를 들고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곧 탕-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달칵-하고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가 복도 위로 울려 퍼졌다.
“아. 살 뻔 했네. 제길 갑자기 마려울 건 뭐야.”
투덜대며 밖으로 나온 도후는 식탁에 봉지를 올리는 태양을 흘깃 하고 쳐다봤다.
며칠 전에 조금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해도 그래도 아직은 서로 서먹한 사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쌀 것 같다고 문을 열라고 재촉했던 것은 좀 아니다 싶다. 폼 다 구기게 이게 지금 뭐하는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난처해진 도후는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태양의 옆으로 갔다.
“저기 말야. 요새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신체 흐름이 조금 이상해진 모양이야.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이거 왜 가지고 왔어요?”
“응?”
반문을 하는 도후를 쳐다보며 태양은 식탁 위에 올린 봉지를 가리켰다.
“이거 다 왜 가지고 왔어요? 나 주려고 가지고 온 겁니까?”
절반은 비슷하다. 저번에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너무도 빈약했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 붙잡는 여자들을 뿌리치고 마트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사들고 여기에 왔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태양을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태양이 나타났던 거다. 하여튼 화장실 사건은 그냥 넘어가고 질문을 던지는 태양의 표정이 정말 밝다. 눈이 반짝거리고 볼도 조금은 홍조가 떠오른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두고 화장실 일에 대해서 변명의 말을 하는 것도 바보 같다 여겨진 도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음. 너 뭣 좀 먹이려고 사들고 왔어.”
“그래요? 그럼 이 고기로 뭔가를 만들어 주는 겁니까?”
바로 봉지 안에서 고기 한 덩어리를 꺼내 앞으로 내민다. 손을 내밀고 있는 태양은 여전히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만들어줄 수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도후는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줄게. 이걸로 주물럭 좀 해주려고 그랬지.”
“잘 됐네요. 나도 마침 상추 사가지고 왔는데. 이걸로 맛있게 요리해주면 방금 있었던 일은 머리 속에서 지워줄게요. 더불어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도 않을게요.”
“........................”
그럼 그렇지. 이 악마 같은 자식. 이 녀석이 그 일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음식이고 뭐고 다 싸들고 그냥 돌아가고 싶어지지만 기대에 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을 보자니 정말 그렇게 행동을 할 수가 없어진다. 나오는 것은 한숨이고 뒷목만 댕긴다.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도후는 태양의 앞에 있던 봉지를 들고 싱크대 앞에 섰다.
“옷 벗고 해요. 나 잘 기다리니까 서두르지 말고 열심히 해봐요.”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좀 조용히 있으라고.”
이를 악물고 음침하게 중얼거린 도후는 봉지 안에서 사온 것들을 꺼냈다. 그런 도후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태양도 사들고 온 것들을 식탁 위로 올렸다. 그것들을 넌지시 쳐다보며 도후는 투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너도 장 봤냐? 그래도 집에서 알아서 밥 먹고 있었나 보다?”
“뭐, 집 밥 먹는 것이 제일이니까요.”
“뭐야. 잘 챙겨먹고 있는 줄 알았으면 이렇게까지 준비해서 오는 게 아닌데.”
들으라는 듯 투덜대는 것에 봉지에서 당근을 꺼내던 태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나 뭐 만들어서 먹이려고 온 거에요?”
“그럼 가짜로 오냐?
“아니. 당신 같은 사람이 본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인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리라고 생각하기 어렵잖아요. 혹시 다른 일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다 말해 봐요.”
당근을 흔들면서 그리 말하는 태양은 ‘구라치지 마요. 다 보여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딱 잡아떼도 상관없을 테지만 태양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집요하게 굴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을 해서 길게 귀찮아하느니 그냥 지금 여기서 다 말해버리는 편이 나을 거다. 도후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 끝나고 갑자기 뒤풀이를 하자고 하는데 싫어서 중간에 빠져나올 핑계거리가 필요했을 뿐이야.”
역시나. 그런 건가.
이런 인간이 이런 것을 들고 여기에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면 반찬이 없어서 밥을 제대로 못 먹는 동생을 챙기러 왔어-라는 말에 바로 넘어가서 감동을 했을 테지만 태양은 도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성격상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다른 핑계대고 쉬지 그랬어요.”
“워낙 철저한 녀석들이라 정말 장 보지 않으면 안 떨어질 것이 분명하거든.”
끈질기게 달라붙던 녀석들은 한 손에 장을 잔뜩 보고 와서야 뒤로 물러났다. ‘뭐야. 정말 밥 하러 가는 거야? 너랑 안 어울려.’라고 야유를 하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온 거다. 그걸 태양은 알아야 했지만 태연한 얼굴을 한 채로 식탁에 매달려 몸을 천천히 흔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뒤풀이라면 모델들하고 하는 거잖아요. 쭉쭉빵빵인 여자들이 잔뜩 있을 텐데 뭐가 싫어서 그런 핑계를 대고 도망 오는 데요?”
“네가 몰라서 그래. 그 쭉쭉빵빵들도 엉겨 붙으면 짜증이 난단 말야.”
“엉겨 붙는 모델들이 많나요?”
“많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지금 내가 남자 모델 중 에서는 제일 인기가 많거든.”
“인기 많은 것 치고는 되게 한가한 것 같지만 말이죠.”
정말 인기가 많으면 쉴 시간도 없이 여기저기로 일 하러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태양의 말에 인상을 쓴 도후는 그쪽을 쳐다보며 항변하듯 말했다.
“그건 돈만 주면 아무 일이나 하는 녀석들 이야기지. 난 이미지를 중시해서 나한테 안 맞는 일은 안 해. 가려서 일 받는단 말야.”
“찾아줄 때 그냥 이것저것 해서 돈 벌어요. 뭐가 잘났다고 일 가려서 받아요. 어차피 인기라는 것도 한 철이잖아요.”
“......................”
멍한 표정을 짓는 도후에 반해 태양은 ‘내가 뭐 틀린 말 했남?’라는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에 도후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너랑 무슨 말을 하려는 내가 바보지. 됐다. 그냥 넘어가지.”
도후의 말에는 태양도 찬성을 했다. 앞으로 맛있는 요리를 해줄 사람을 계속 건드려서 피곤하게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맛있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한 태양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화장실로 들어가기 전에 도후를 쳐다봤다. 양파를 까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화장실로 들어간 태양은 물을 틀면서 슬그머니 입술을 올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싶어 태양은 눈을 위로 들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려니 바깥에서 탕탕-하고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집에 있어서 그런가.”
아버지는 있어도 워낙 조용해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때문에 집에 있어도 그 존재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 도후는 다르다. 저렇게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것에도 상당히 큰 존재감을 느낀다. 오랫동안 조용한 곳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도후의 그 존재감이 너무도 크게 느껴진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끼며 태양은 비누를 골고룬 바른 얼굴을 씻기 위해서 허리를 숙였다.
내내 거실에서 뒹굴 거리던 태양은 한참이 지난 후에 도후가 어떻게 요리를 하는 지가 궁금해서 그 뒤로 갔다. 가만히 서서 쳐다보자 도후도 흘깃 쳐다보기만 할 뿐 뭐라 하지 않았다.
실수를 하면 한마디 해주려 했는데 의외로 꼼꼼하다. 솜씨좋게 요리를 하는 모습에 태양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할 줄 아는 요리가 많네요.”
도후는 태양을 흘겨보며 대꾸했다.
“무명일 때에는 독립해서 따로 살았으니까. 그때 식비 좀 아끼려고 이것저것 해서 먹다보니 이렇게 된 거야. 덕분에 내 숨겨진 요리의 재능을 깨닫게 되었지.”
그리 말한 도후는 펄펄 끓는 된장국의 간을 보고는 ‘음.’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브랜드로 치장을 한 인간이 된장국의 간을 보고는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까 기분 되게 이상하다. 낯선 느낌이 든 태양은 손을 내려 잘 익고 있는 고기를 한 점 들어 냅다 입에 넣었다.
“.....웁!”
얼굴을 굳히며 허리를 숙이는 태양의 행동에 도후는 혀를 찼다.
“멍청이! 뜨거운데 그냥 넣으면 어떻게 해!”
도후의 타박에도 태양은 말을 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바람을 만들어 뜨거운 혀의 열을 식혔다. 그런 태양의 등에 손을 댄 채로 도후는 태양의 턱에 손을 대고 위로 올렸다.
“괜찮아? 혀 내밀어봐.”
“괜찮아요.”
“혀 데이면 힘들다니까. 어서 내밀어봐.”
처음에 너무 뜨거워서 놀라 행동을 크게 했을 뿐이지 지금은 정말 괜찮다. 하지만 도후가 너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싫다고 계속 뻣튕길 수가 없다. 왠지 모르게 민망함을 느끼며 태양은 슬그머니 혀를 내밀었다.
“조금 더 길게 내밀어봐. 그래.”
그 말에 조금 더 혀를 내민다. 그러자 도후는 길게 내밀어진 태양의 혀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괜찮은 것 같은데. 너는 왜 기다리지 못하고 손으로 집어먹어? 전에도 그랬으면서..”
전에도 볶음밥을 해서 먹을 때 냅다 손으로 집어서 입에 넣는 것 때문에 안 그래도 눈치를 줬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짓을 한다. 이보다 훨씬 뜨거운 것이었으면 바로 혀를 데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인상을 쓴 채로 얼굴을 든 도후는 그 순간 태양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태양의 눈빛에 도후는 말문이 막혔다.
뜨거운 것을 먹었기 때문일까.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눈물에 젖은 검은 눈동자가 더 촉촉해 보인다. 더불어 하얀 뺨은 발그랗게 상기되어 있었고 길게 내민 혀는 분홍색이었다. 다른 여자들의 혀를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도 이렇게 귀엽고 예쁜 빛을 발하는 혓바닥은 또 처음이다. 도후는 입 안에 잘 들어가 있던 자신의 혀가 꿈틀거리고 반응을 보이는 것을 느끼는 순간 사색이 되어 태양의 턱을 잡아 위로 올렸다.
“혀 집어넣어!”
“...........응?”
혀를 내밀고 있어서 발음이 이상하다. 여전히 혀를 내밀채로 ‘너 왜 그래?’라고 말하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태양의 행동에 도후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진다.
“돼...됐으니까 어서 혀 집어넣으라고! 어서!”
도후의 외침에 태양은 순순히 혀를 집어넣고 도후를 빤히 쳐다봤다. 말은 않지만 ‘너 왜그래?’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에 도후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태양은 인상을 쓴 채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요리하는데 네가 옆에 있어서 괜히 신경 쓰이잖아.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나가있어. 어서.”
이상한 모습을 보인 주제에 나가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나 제대로 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태양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후는 계속 손을 휘저었다.
“빨리 나가. 그래야지 빨리 요리를 하지! 어서!”
저렇게 질색을 하면서 손을 휙휙 젖는데 계속해서 주방에 서있을 수가 없다. 태양은 역시나 도후는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거실 쪽으로 나와 맨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티비를 틀었다. 쿠션을 끌어안고 멍하니 티비를 보는 태양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도후는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경험한 건지 모르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내의 혀를 보고서 흥분하게 되다니. 최근 일이 바쁘다 보니 제대로 된 상대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아서 이러는 건가 싶어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도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잘 먹었어요.”
“그래.”
건성으로 대답을 한 도후는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까 주방으로 들어와 고기를 손으로 집어먹었다고 그러는 걸까. 그때 화가 난 것이 아직까지 가는 거라면 이 남자 성격이 이상한 것도 부족해서 속이 굉장히 좁은 거다.
그런데 손으로 음식 좀 집어먹었다고 이렇게까지 뚱해 있는 남자가 정말로 있나 싶다. 미심쩍었던 태양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도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것에 도후가 뒤로 몸을 물리며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지금 화났어요?”
“화 안 났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자꾸만 시선을 피하잖아요.”
태양의 지적에 도후는 입매가 굳어진다. 그것을 예리한 태양의 눈이 잡아낸다.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태양은 취조를 하듯 집요하게 굴었다.
“화 안 났다고 하면서도 계속 시선 피하잖아요. 그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히 이상하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정말 이상하다는 것쯤은 도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의식하게 되지 자꾸만 태양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진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태양의 시선을 피하며 도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에 태양이 손을 뻗어 도후의 손목을 붙잡는다. 소스라치게 놀란 도후는 팔을 치워내려 했지만 태양의 손힘이 의외로 세서 쉽게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끙끙 거리며 팔을 빼내려던 도후는 결국 포기를 하고는 길게 한숨을 쉬며 손목을 잡고 있는 태양을 내려다봤다.
“왜 그러는 거야. 상 치워야 하잖아. 손 치워.”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고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에 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 먹은 그릇을 하나씩 포갰다.
“치우는 거라면 내가 할 테니까 그 쪽은 그냥 앉아 있어요.”
“뭐? 그냥 내가....”
“음식까지 해줬는데 치우는 것까지 부려먹을 수는 없잖아요. 여긴 내 집이니까 그냥 가서 앉아 있어요. 오늘 일 했으면 피곤했을 텐데.”
태양의 말에도 도후는 가만히 있었다. 태양의 성격상 상 치워주는 거 안 도와주고 가만히 있어도 뭐라 한마디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태양은 식탁 앞에 서있기만 하는 도후의 옆으로 가 팔꿈치로 그의 몸을 밀어냈다.
“서 있지 말고 거실로 가 있어요. 설마 소파가 없다고 해서 거실에 안 가 있겠다는 말을 할 생각은 아니겠죠?”
“그건 아니야.”
“그러면 가서 좀 앉아 있어요. 댁이 없어야 나도 더 편하게 여기를 치울 거 아니에요.”
그릇을 든 채로 그리 말하는 태양의 앞에서 계속 서있을 수가 없다. 뻘쭘해진 도후는 태양의 주변을 빙 돌아서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이라고 해도 주방 사이에 있는 식탁을 넘어가면 바로 거실이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쿠션 하나만 굴러다니는 거실에 간 도후는 어떻게 할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닥에 앉았다. 태양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있는다.
........지금 이게 뭐하는 건가 싶다. 나 이러려고 그 쭉쭉빵빵한 여자들 뿌리치고 이리로 온 거였나.
허탈해진 도후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그릇을 치우는 태양이다. 반찬을 냉장고에 다시 집어넣은 태양은 이번에는 설거지를 할 생각인지 싱크대 앞에 섰다. 도후가 있는 곳에서는 태양의 뒷모습이 보인다. 팔을 움직이며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도후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태양에 깜짝 놀라 눈을 돌렸다.
“심심하면 티비나 보고 있어요.”
“아. 그래. 알았어.”
당황을 감추기 위해서 급히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켠 도후의 표정이 금새 칙칙해진다. 티비를 틀어도 재미있는 것은 하나도 안 한다. 유선 채널은 없는 건가 싶어 채널을 돌려보지만 고정 채널만 나온다. 뭐 이런 티비가 다 있나 싶어 도후는 그냥 바닥에 누워버렸다. 길게 누워 있다가 딱딱한 바닥이 불편해서 쿠션을 끌어 머리 아래에 구겨 넣었다. 그렇게 하니까 좀 나은 것 같다.
“바닥 차가우면 불 좀 올릴까요?”
“아니. 괜찮아. 신경쓰지마.”
“신경 안 쓰일 리가 없잖아요. 잘 나가는 모델이 우리 집에 와 있다가 감기 걸려서 가면 어떻게 하라고요.”
태양의 말에 도후는 몸을 굽히고 태양을 쳐다봤다. 누워 있어서 태양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에 간이 비대해진 도후는 다시금 태양을 자극할 만한 화제를 끄집어냈다.
“여기 왜 이렇게 가구가 없냐.”
“원래 남자들끼리 사는 곳은 이래요.”
“나도 밖에서 살 때 친구랑 같이 살았거든? 그 녀석도 남자였는데 그때 우리들은 이렇게 살풍경한 환경에서 살지 않았다.”
남자들만 살면 모든 주거 공간이 이런 식으로 삭막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큰문제가 있다. 그것을 지적해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에 태양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도후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는 모양이죠. 우리 아버지랑 난 지금 이 집이 좋아요. 뭐가 더 있고 없어서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까 참고 있어 봐요. 여기는 우리 집인데 당신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에 맞춰서 이것저것 사들일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다. 애초에 뭐 사달라고 한다 해서 그것에 반응을 보일 태양도 아니고 말이다. 괜히 입만 아프게 말을 했다면서 도후는 쿠션에 머리를 비볐다. 처음에는 꽤 또렷해있던 도후의 눈동자가 점점 흐릿해진다. 혀로 입술을 핥은 도후는 팔짱을 끼며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전까지만 해도 졸리지 않았는데 배가 부른 건지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여기서 이렇게 자버리고 연락이 없으면 매니저가 난리가 날 텐데. 자기 전에 핸드폰이나 좀 켜둬야 할 것 같은데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 싫다.
그동안 스케줄이 꽤 무리가 되는 것이었다. 올해에는 영화를 찍는다 어쩐다 해서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쓸데없는 녀석들이 귀찮게 달라붙어서 더더욱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이번에 새로 산 집에서는 잠이 잘 오지 않아서 고생을 했는데 여기는 왜 이렇게 잠이 잘 오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는 딱딱한 바닥과 좋은 냄새가 나는 쿠션이 이렇게나 수면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좋은 냄새? 쿠션에서 좋은 냄새가 났나? 도후는 쿠션에 코를 대고 흐읍-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맡아진다. 이건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지? 의아해져서 다시금 숨을 깊게 들이키는데 옆에서 달칵-하는 소리가 들린다. 놀란 도후는 급히 감은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분홍색의 천이다.
“지금 뭐해요?”
물음에도 대답이 없다. 태양은 쿠션에 머리를 박은 채로 있는 도후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태양이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도후는 다른 의미로 침묵하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싶다. 밖에서는 폼생폼사로 온갖 폼을 잡으며 모든 이들의 선망의 시선을 받는 이 몸이 왜 이 집안에 들어서면 그 즉시 망가지는 건지 모르겠다.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가 심히 무안했던 도후는 꼼지락 거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양반다리를 한 채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태양이다. 혹여라도 어이없다는 식의 표정이 떠올라 있으면 정말 민망했을 테지만 지금 태양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순수한 궁금증일 뿐이다. 이 인간이 왜 이러는 건가-하고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에 침을 삼킨 도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요새 일이 많아서 피곤했나봐. 잠시 잠이 들었네.”
“졸려도 우리 집에서 자지는 말아요. 난 낯선 사람 집에서 못 재우니까.”
“......................”
말을 해도 꼭 저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앞으로 형제가 될 사이인데 빈 말이라도 ‘많이 피곤한가 보네요. 내 방에서 눈 좀 붙이고 가요.’라는 식으로 말을 할 수는 없는 건가.
입술을 씰룩거린 도후는 얼굴을 내리다가 무릎 바로 앞에 놓인 접시를 확인하고는 바로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이건 뭐야?”
“식후 디저트요.”
“디저트라고 이게?”
도후는 다시금 접시 위에 올려진 것들을 확인했다.
하얀 접시에 올려진 것은 아무렇게나 대충 썰어놓은 당근이었다. 이걸 지금 식후 디저트라고 가지고 온 거란 말인가. 심히 어이없다.
“내 눈에는 이거 당근으로 보이는데?”
“당근 맞아요. 이게 식후 디저트.”
태양은 길게 자른 당근 하나를 들어 한입 깨물고는 우물거렸다.
그 태연하고도 당연한 듯 하는 행동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입이 붙는 것을 느끼면서 도후는 손가락으로 접시를 가리켰다.
“디저트는 과일 같은 걸 내와야 하는 거 아냐?”
“이것도 씹다보면 달아요. 먹으면 뱃속에서 알아서 섞이는 걸 뭘 따지고 먹어요. 그리고 요즘 과일값 비싸서 우리 집에서 못 먹으니까 과일로 디저트 먹고 싶으면 다음부터는 과일도 따로 사와요. 그러면 깎아는 줄게요.”
오물거리면서 야무지게 당근을 먹으면서 그리 말한 태양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는 도후에 살짝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사실 과일이 없어서 당근을 내놓는 것은 너무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바깥으로 나가 과일을 사올 수도 없는 거 아닌가. 태양은 일부러 당근을 흔들며 더 당당하게 말했다.
“당근이 얼마나 좋은데 투정이에요. 이건 고추장만 있으면 반찬으로도 먹을 수 있어요. 안주로도 먹을 수 있다고요. 그리고 댁은 모델이니까 더더욱 당근을 먹어야 해요. 당근 먹으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말 몰라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
“지금 들었으니까 앞으로 열심히 먹어요. 자.”
당근을 하나 들어 앞으로 내밀자 도후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런 도후의 입 안에 당근을 밀어 넣은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티비 옆에 붙어있는 작은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등을 보인 채로 바닥에 둔 전공서적을 펼치는 태양을 빤히 쳐다본 채로 도후는 입에 물고 있는 당근을 빼냈다.
“너 도대체 언제부터 성격이 그랬냐?”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내가 내 성격 언제부터 이랬는데 관찰한 것도 아닌데.”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지.”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저 인간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나 잘 알게 된 건지 모르겠다.
투덜대며 당근을 갉아먹으며 도후는 티비를 켰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떠들어대는 프로를 보면서 당근을 씹고 있으려니 이거 의외로 먹을 맛이 난다. 냄새도 괜찮은 것 같고 말이다. 생 걸로는 잘 안 먹는데 이거 잘하면 입맛 들게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야금야금 갉아먹으려니 태양이 슬그머니 뒤를 쳐다보며 묻는다.
“꽤 맛있죠?”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하다.
움찔한 도후는 들고 있던 당근을 아래로 내리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맛있어.”
“맛있는데 안 맛있다고 괜히 그러는 것 좀 봐. 유치하긴.”
“유치하긴 누가 유치하다는 거야?!”
울컥한 도후는 얼굴을 길게 빼내며 소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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