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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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기만 한 표정으로 화면에 집중하다가 간간이 안경을 위로 추어올리는 모습에 진성도 입을 꾹 다물고 책상에 엎드려 그 위에 턱을 댔다. 빤히 태양의 옆얼굴을 쳐다보던 진성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조금 전 태양이 꼬집었던 뺨을 건드렸다. 부드럽고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그 감촉을 떠올리며 볼을 살짝 붉히고 있으려니 뒤에서 ‘저기요..’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어 진성은 바로 책상에서 일어났다. 뒤를 쳐다보자 한 여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제가 사용해야 하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일어날게요.”

컴퓨터실은 원래 입구 쪽에서 번호를 받고 그 자리에서 앉게 되어있다. 진성은 컴퓨터실을 관리하는 사람하고 친분이 있어 아무 제지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거다. 책상에 있던 것들을 전부 태양의 자리에 옮겨둔 진성은 반대편으로 돌아가서는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언제 다 끝나?”

“조금 더 남았어.”

“그래? 다 끝내고 아래로 내려와. 맛있는 거 사줄게.”

“나 이거 하고 강의 있어.”

“뭐? 정말? 없었잖아.”

“갑자기 당겨졌어. 밥 먹을 거면 2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아?”

시계를 확인하면서 하는 말에 진성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성은 2시간 동안 밥을 먹고 다음 강의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태양과 밥을 먹기 위해서 이 다음의 수업을 포기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진성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면서 선뜻 대답하기를 망설였지만 그와 달리 태양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안 되면 다음에 같이 먹자. 난 빵으로 가볍게 때우면 되니까 말야.”

“또 빵 먹으려고? 안 돼. 내가 사줄게. 2시간이라고 했지? 알았어. 그때 같이 먹자.”

다음 수업은 다른 사람에게 대타로 출석 체크를 해달라고 해야 겠다. 이번에 걸리면 위험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같이 먹어주지 않으면 태양이 또 빵을 먹게 될 테니 말이다. 

“강의 다 끝나고 큰 나무 아래로 와. 거기서 기다릴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리라니 무슨 소리. 그럼 난 이만 나가본다.”

손을 흔든 진성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태양은 다시금 모니터를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흐름이 연결되었을 때 한 번에 쓰는 것이 제일 확실한데 진성과 이야기를 했더니 다 흩어졌다. 도대체 무엇을 먼저 건드려야 할지 몰라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려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뭔가 싶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태양은 [아빠]라고 표시 되어 있는 것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세요?”

[나 오늘도 못 들어갈 것 같아.]

전화를 받자마자 하는 소리가 고작 이런 건가. 앞으로 재혼을 할 사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전에 호영씨를 만난 이후로 며칠 동안 호수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서로 사이가 뜨거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숨을 쉰 태양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바로 싫은 소리를 했다.  

“며칠 동안 안 들어왔잖아. 그런데 또 안 들어와요? 아직 결혼식도 안 했으면서 너무 문란한 생활을 하는 거 아니에요?”

[그..그런 게 아니라. 사실 호영씨 병원에 일이 밀려서 그거 도와주고 있어.]

호수의 말에 태양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호영은 개인 병원의 원장이었고 호수는 그 병원에 어렵게 취직이 된 경비였다. 처음에는 인사만 하던 사이였는데 어느 순간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도시락을 싸주게 되면서 눈이 맞아 버렸다. 재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도 종종 호영을 도와 늦게까지 병원에 남아 있었던 호수다. 그런데 재혼을 하고 앞으로 아내가 될 사람이 바빠서 늦게까지 병원에 남아있으니 자기 혼자만 집에 들어와서 편히 쉴 수가 없었던 거다. 태양은 전보다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많이 바빠요?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오는데?”

[한 일주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일주일. 그렇게나 오래? 많이 바쁘면 제가 가서 좀 도와드려요?”

[아니야. 괜찮아. 내가 있으면 되니까. 아 그리고 말야. 내가 도후군 전화번호 가르쳐 줄게.]

“그 사람 번호를 왜 가르쳐 준다는 건데요? 싫어요. 알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 안 좋니?]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일부러 친해지고 싶지도 않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형제가 될 건데...그러니까 그게...]

형제가 된다고 해도 꼭 사이좋게 지내라는 법은 없다. 이쪽에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도 그 남자 쪽에서 거절을 할 수도 있는 거고 말이다. 먼저 친해지고 싶다는 말이라도 꺼낼라 치면 바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호오. 그래?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 분명하다. 도후가 그런 식으로 거들먹거리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왜 이렇게까지 짜증스러운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도후가 잘난 척을 하면 정말 싫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확실하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수화기 너머로 그런 감정이 전해진 것인지 호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아버지는 원래 단란한 가정을 꾸미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기가 워낙 약하다 보니 집안이 시끄럽거나 문제가 생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 얼굴 앞에 대고 도후랑 절대로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쪽도 이쪽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어 태양은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채로 입을 열었다. 

“전화번호 뭔데요?”

[에? 알려줘도 괜찮아?]

“....직접 전화 걸 일은 없겠지만 일단 알아두는 것이 좋겠죠. 어차피 가족이 될 사이인데.”

[태양아....고마워.]

어차피 가족이 될 사이라는 부분에서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정말로 기뻐하는 기색이 수화기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태양은 호수가 알려주는 도후의 전화번호를 달싹거리며 따라 말했다. 

[잘 적었지? 잊어먹지마.]

“알았어요. 안 잊어먹을게요.”

[너 또 안 적고 그냥 대충 입으로만 외운 거 아냐?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까먹으면 어떻게 해.]

“괜찮아요. 숫자는 잘 외우니까.”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태양은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이것저것 하고 레포트까지 하려면 상당히 시간이 빠듯하다. 부친과의 통화는 이쯤 해야 겠다며 태양은 자판을 두드려 앞에 있던 문자 몇 개를 지우며 말했다. 

“나중이 더 통화해요. 지금 할 일이 있어서 바빠요.”

[많이 바빠? 그러면 다음에 보자. 전화 끊을게.]

“네. 끊어요.”

바로 통화를 끊은 태양은 모니터를 보고 자판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태양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변한다. 

“.....전화번호 다른 사람에게 팔아도 되나.”

아주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아낸 도후의 전화번호를 팔수도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최근 제일 인기가 많은 모델이라 하면 그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닐 텐데 말이다. 번호를 팔면 돈 많이 벌수도 있을 거다.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채로 진지하게 생각을 하던 태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두자. 인터넷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도후의 전화번호라고 해서 냅다 돈을 주고 그것을 알아낼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당장 ‘구라 즐’이라는 초딩의 댓글이 달릴 거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팔려고 할 때 ‘어떻게 안 건데?’라는 질문을 받기라도 하면 굉장히 난처해질 테고 말이다. 기타 잡다하게 생길 귀찮은 일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전화번호는 그냥 이쪽만 알고 있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모처럼 좋은 돈벌이가 될 수 있었는데 아깝다고 생각하며 태양은 엔터를 두드렸다. 

강의실에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한 자리에 모여있는 여자애들 이었다. 원래 저런 모습은 한, 두 번 보는 것이 아니라서 무시하고 그냥 자리로 가려 했지만 귀에 들리는 대화 소리가 태양의 발을 붙잡는다. 

“이번 잡지 정말 멋진 것 같아. 몸매 완전 예술이야.”

“딱 내 타입이라니까. 이 팔에 한번 안겨봤으면....”

“아서라. 도후도 눈이 있는데 널 안아주겠어? 저리가. 이 남자는 내 거거든.”

“어머. 웃기고 있어.”

투닥거리다가 진심으로 어깨를 밀치게 된다. 밀쳐진 쪽은 어-하는 소리를 내면서 뒤로 몇걸음이나 물러났고 뒤에 서있던 태양과 부딪혔다. 당황한 여자는 표정을 굳히며 뒤를 쳐다봤고 태양을 확인하고는 바로 얼굴을 붉혔다. 

“태...태양오빠..”

손으로 뺨을 감싸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는 여자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태양은 그녀들이 지금까지 보면서 소란스럽게 군 원인이 되었던 잡지를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 유명해?”

“응? 누구요?”

“저 사람. 유도후 말야.”

태양의 질문에 여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만 있던 여자들 사이에서 키가 작은 한 여자가 잡지책을 들고 태양의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모르고 있어요? 이 사람 지금 진짜 유명해요. 모델 중에서는 최고중의 최고에요.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끝내주게 좋데요. 거기다 지금 학생인데 학교도 정말 좋은 곳에 다니고 있어요.”

“어딘데?”

“S대요.”

“그래?”

그 S대라는 것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들어간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연예인이니까 특례입학 같은 것을 할 수도 있잖은가. 들리는 말로는 말 한 마리 사주거나 건물 새로 꾸며주면 대학 입학시켜 준다고 하던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도후만 나쁜 것이 아니라 아줌마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다. 거기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열을 내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지 않나 싶다. 그래. 이상하다. 왜 도후에 대해서는 험담만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원래 자신은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쩐지 도후에 대해서 알고 난 후부터는 내가 이상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안색을 굳힌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잡지를 들고 있던 여자가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물어왔다. 

“그런데 태양 오빠. 왜 갑자기 도후에 대해서 묻는 건데요?”

“그냥.”

“네?”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물어본 거야. 신경쓰지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데 더 뭐라 할 수가 없다. 표정이 굳어진 여자는 ‘네..네네.’라면서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여자에게서 등을 돌린 태양은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끝내준다! 태양 오빠랑 이야기 했잖아!’라는 등의 소리가 들렸지만 태양은 싹 무시했다.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서 책과 필통을 꺼내는데 그 순간 가방 속에서 작은 엽서가 나왔다. 뭔가 싶어서 꺼내보자 도후의 얼굴이 프린트된 엽서다.

“...................”

아니.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태양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가방을 열어 안을 뒤졌다. 하지만 더 이상의 도후 엽서는 나오지 않았다. 이거 한장 뿐이라는 건데 이게 왜 가방에서 나왔냐는 거다. 일부러 이런 엽서를 챙기지도 않았는데. 

정말 이상하다는 듯 표정을 굳히고 있던 태양은 곧 어떤 사실을 하나 떠올릴 수가 있었다. 며칠 전에 서점에서 가서 책 몇 권을 샀는데 그때 여자가 엽서 몇 장을 챙겨줬던 것이다. 그때 잘 살피지 않고 책 사이에 대충 껴놨는데 이게 가방으로 흘러들어온 모양이다. 

태양은 얇은 엽서를 잡고 앞 뒤로 돌려봤다. 그러다가 앞면으로 돌려 도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이상하다. 전까지만 해도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재혼 상대의 아들이라고 알게 된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눈에 잘 들어온다. 여기서 저기서 하물며 이런 식으로 가방 속에서도 튀어나오니 태양의 입장으로서는 그저 황당할 뿐이다. 지금 이 현상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태양은 엽서를 반으로 접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려 하는데 괜히 찝찝하다. 남의 얼굴을 반으로 접고 개운한 상태로 있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할까 싶어 많이 망설이던 그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어 다시금 가방을 위로 올리고 엽서를 꺼내 판판하게 폈다. 그래도 가운데에는 길게 줄이 간 자국이 남아있다. 살짝 올라가서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후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태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를 한참동안 쳐다보던 태양은 투명스럽게 말했다. 

“정말 재수 없어.”

엽서를 다시금 가방에 집어놓고 발아래에 두고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는 교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학생들 모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아연한 듯 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에 태양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태양의 물음에 교수는 헛숨을 들이키며 주먹으로 이마에 난 땀을 훔쳐냈다. 

“바..방금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그랬나? 그렇군. 학생이 교수에게 그..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하지만 분명히 정말 재수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지만 본인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더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냥 수업을 진행하자며 교수는 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책을 펼쳐 주십시오.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수의 말에 태양은 책과 노트를 펼쳤다. 샤프를 꺼내 두어번 누른 그는 눈에 힘을 주고 교수를 쳐다봤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움찔하고 몸을 떤 교수는 다시금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려 칠판 쪽으로 서서 강의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진성의 말에 태양은 먹음직스럽게 볶아진 곱창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며 곱창을 씹는 태양의 모습에 진성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어때?”

“맛있어. 용케 이런 곳을 찾았네?”

“입 소문이 난 곳인데 찾는 길이 어려워서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장소야. 나도 오늘 처음 와봐. 너랑 같이 오려고 꾹 참고 있었지.”

“그래?”

뿌듯해하는 진성의 말에 별 상관없다는 식으로 대꾸한 태양은 잡채와 곱창과 야채를 그릇에 듬뿍 올리고 크게 한입 먹었다. 뜨거운지 표정이 바로 굳어졌지만 혀를 잘 움직여 열을 식히면서 어렵게 한입 먹고 우물거리며 입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서 진성은 먹지도 않은 채 태양이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진성이 보나마나 고픈 배를 채우기에 바빴던 태양은 열심히 곱창을 먹다 안경알에 묻은 고추장을 닦아내기 위해서 안경을 벗었다. 그러자 검고 동그란 눈동자가 여과 없이 나타난다. 그것에 움찔하고 몸을 떤 진성은 그만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젓가락이 바닥을 뒹군다. 그 소리에 태양은 얼굴을 들어 진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젓가락이 그냥 떨어져서....여기요. 새것 좀 가져다주세요.”

“옆에 있잖아. 그냥 꺼내면 되잖아.”

태양이 턱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로 수저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처음에 저기서 젓가락과 수저를 꺼냈는데 잠시 깜박했다. 

“그렇지. 수저통이 있었지. 잠깐 깜박하고 있었네.”

어물거리며 대답을 한 진성은 새로운 젓가락을 꺼내 곱창을 뒤적이며 슬그머니 태양을 쳐다봤다. 진성이 쳐다보나마나 태양은 영 관심 없다는 듯 꼼꼼하게 안경을 닦고는 다시금 썼다. 두어번 눈을 깜박여 안경알이 완전히 깨끗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금 젓가락을 들고 곱창을 먹기 시작한다. 먹으면서 대화도 좀 나누고 싶은데 태양은 그런 것 따위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그저 먹기에 열중할 뿐이다. 그것에 진성은 태양 앞으로 곱창을 덜어주며 말했다. 

“배 많이 고팠어? 천천히 먹어.”

“배부르면 그때부터 천천히 먹을 거야. 그런데 넌 안 먹어? 배고플 거 아냐.”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많이 먹어.”

“나중에 부족하다고 뭐라 하지마. 나 이것 다 먹고 밥도 비벼 먹어도 되지?”

“그래.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

고개를 끄덕이며 잘 익은 야채도 전부 태양의 앞으로 넘겨준다. 태양이 다섯입을 먹는 동안 진성은 한입을 제대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럼에도 진성은 멍하니 태양이 먹는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집중한 눈으로 곱창을 쳐다본 채로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오물거리며 움직이던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나와 입술에 묻은 양념을 핥았을 때에는 진성은 움찔했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왜 이러나 싶어 가슴을 손으로 누른 진성은 자꾸만 태양을 흘깃거리며 쳐다봤다. 태양은 여전히 잘 먹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이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쩐지 변태 같아 진성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형이라는 사람은 어땠어? 처음 만나고 난 후에 연락은 좀 하고 있어?”

진성의 물음과 동시에 태양은 목구멍에 뭔가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쿨럭-하고 기침을 한 태양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한잔을 다 비우고 난 후에 휴지로 입술을 닦고는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로 대꾸했다. 

“아니. 연락은 안 하고 있어. 하고 싶지도 않고.”

“연락처는 아는 모양이네?”

“알고 있지. 그 쪽은 내가 자기 연락처 아는 것도 모르고 있을걸.”

“그래? 그 사람이 직접 연락처 안 가르쳐 줬어?”

진성의 물음에 태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젓가락을 들었다. 그 인간 때문에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 안 먹을 수는 없다. 그렇게나 큰 손해를 감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집중한 얼굴로 곱창을 파기 시작하는 모습에 진성은 다시금 그 화제에 대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찌된 연우인지 알 수 없지만 태양은 재혼 상대의 아들에 대해서 묻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며칠 전에 처음 물어봤는데 그때에도 인상을 쓰는 등의 굉장한 표정을 지어서 집요하게 파고들 수가 없었다. 적당히 시간을 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지금 다시 물어보는 건데 이번에도 표정을 저렇게 굳히고 있으니 다시 말 꺼내기가 무섭다. 잘 먹는 사람 괜히 건드려서 체하게 하지 말고 그냥 입 다물고 있자고 생각하며 진성은 곱창에 섞여서 나온 순대를 꺼내 먹었다. 

진성이 조용해져서 좋기는 한데 입맛은 떨어져 버렸다. 물을 한잔 다 마셔서 그런지 몰라도 배가 많이 부르다. 평소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분명 그 녀석 때문이다. 

망할 녀석. 갑자기 생각나서 사람 입맛을 잃게 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놈이라며 투덜대면서 태양은 뜨거운 불판을 젓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이쪽은 그 쪽 때문에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데 그 쪽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굉장히 좋은 옷을 입고 예쁜 모델들에게 둘러싸여서 행복한 상태로 촬영인가 뭔가를 하고 있는 중일까. 

좋은 옷 입고 예쁜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면 기분 굉장히 좋겠다. 촬영하고 있는 중에 전화를 걸면 어떻게 딜까. 분위기 확 깨지는 거 아닐까 싶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난 태양은 눈을 빛내며 폰을 꺼냈다. 그것에 내내 태양의 눈치를 보고 있던 진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전화 하려고?”

“잠깐만 조용히 있어봐.”

답지 않게 회심의 미소를 지은 태양은 번호를 누르고 귀에 폰을 댔다. 무슨 음모를 꾸미는 듯 처음에는 상당히 활기에 찬 표정을 짓고 있던 태양이지만 점점 얼굴이 이상해진다. 

폰을 귀에 댄 채로 굳어지는 태양의 표정에 진성은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이건 태양이 뭐라 말을 해주지 않아도 그 표정만으로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것 같다. 지금 통화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렇게나 표정을 굳히고 있는 거겠지. 태양의 눈치를 보던 진성은 곱창과 순대를 태양 쪽으로 밀어 넣었다. 

“안 받으면 끊고 이거나 먹어. 이거 다 먹고 밥 먹는다며.”

진성의 말에도 태양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통화를 끊고 다시금 번호를 누른 후에 귀에 댄다. 그런데 이 인간이 신호음이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가는 동안에도 받지를 않는다. 

혹 전화번호가 다른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아버지가 알려주는 그대로 확실하게 외웠는데 틀릴 리가 없잖은가. 혹시 아버지가 잘못된 번호를 알려준 거 아닐까 싶다. 원래 빈틈이 많은 사람이니 그런 실수를 한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정말 그렇다면 지금 괜히 전화를 한 거다. 

혀를 찬 태양은 폰을 닫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하는 행동에서 기분 나쁨이 역력하게 묻어난다. 태양의 눈치를 보던 진성은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누구한테 걸었어?”

“형한테.”

“형?”

“재혼한 상대의 아들.”

“아아...”

그 상대에 대해서 말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더니만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되는 일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진성은 순대를 들어 입에 넣었다. 그것에 태양이 곱창을 들어 진성 앞으로 밀어넣는다. 

“넌 왜 순대만 먹냐. 곱창도 좀 먹어.”

“응.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진성은 태양이 건넨 곱창을 들어 입에 넣었다. 태양이 준 것이기 때문인지 어떤지 몰라도 유독 쫄깃 거리는 맛이 일품이다. 푹 빠진 얼굴로 오물거리며 곱창을 먹은 진성은 물을 잔에 따르며 물었다. 

“그런데 부모님 언제 결혼식 하신데?”

“몰라 조만간 하겠지. 오늘 전화 온 거 보니까 아줌마 병원이 바빠서 시간이 안 나나봐. 봄 즈음에 결혼식을 할 것 같은데....뭐, 두 사람이 하는 거니까 내가 한다고 해서 바로 그 날에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아저씨 정말 능력 있다. 병원 원장이라니. 돈 엄청 벌 거 아냐.”

“돈 벌어도 그게 아줌마 돈이지 우리 아빠 돈은 아니잖아. 괜한 말 하지 말고 먹기나 하자. 타겠다.”

“아. 응.”

고개를 끄덕인 진성은 얼굴을 내려 열심히 곱창을 먹었다. 그 모습을 흘겨보며 태양은 젓가락을 움직여 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작업을 했다. 

문득 도후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우리 엄마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생각을 해도 그렇게 밖에 못하는 인간인가 싶어 그때는 경멸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쪽이라도 그 남자와 같은 경우였을 때 그리 생각하게 되었을 거다. 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다 심약한 아저씨에게 24살짜리 아들이 있고, 코딱지만한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여자를 잡아서 팔자 고치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비단 그 남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쉬울 것 같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 때에는 지금 생활에 만족을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까 또 속이 복잡해진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 든 태양은 손을 들어가게 점원을 불렀다. 

“아줌마. 여기 소주 3병만 주세요.”

“소..소주? 술 마실 거야?”

아직 2시인데다 있다가 수업도 들어가야 하는데 무슨 소주인지 모르겠다.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진성이지만 태양은 상관없다는 듯 엄지로 코를 비비며 말했다. 

“좀 마셔야 겠다. 기분 점점 꿀꿀해지잖아.”

그래도 당장 소주 3병은 너무 한 게 아닌가 싶다. 말리려고 손을 드는데 점원이 빠르게도 술병을 가지고 온다.  

“고맙습니다.”

태양은 점원이 내려놓은 소주를 앞으로 가져가 손바닥으로 감쌌다. 맨손으로 손쉽게 병뚜껑을 따낸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병 채로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첫 맛이 쓴지 살짝 인상을 쓰는 태양의 모습에 진성은 반사적으로 앞에 놓인 두병의 소주를 양 손으로 잡았다.  

“이거 다 마실 거야?”

“다섯 병만 안 넘으면 돼.”

“다섯 병만 안 넘으면 된다니....”

멍해져서 중얼거리는 순간 태양이 병 채로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순식간에 술 한 병을 다 비우고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찼다. 

“먹어도 안 취하네.”

중얼거린 태양은 진성이 잡고 있는 술병을 가지고 가 손으로 뚜껑을 따 다시금 나발을 불었다. 벌컥벌컥 하고 술을 물처럼 마시는 태양의 모습에 진성은 그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딸꾹질을 하며 비틀거리는 태양의 팔을 잡고 있는 진성은 어쩐지 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다시금 태양의 몸이 비틀거린다. 그런 태양의 허리를 급히 끌어안은 진성은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너 지금 말만 괜찮은 상태야.”

진성의 말대로 태양은 말만 괜찮았다. 목소리도 또렷하고 눈동자도 또랑 거렸지만 걸음은 비틀거리고 옆에 진성이 부축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꼬꾸라질지도 모르는 상태다. 덕분에 지금 진성이 학교 강의도 전부 재끼고 태양을 집에 데려다 주는 거다. 

자꾸만 비틀거리며 못 걷는 태양의 허리를 열심히 부축하며 진성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애매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젊은 사람이 이렇게 비틀거리고 있으면 사람들 눈에 보기 안 좋을 텐데 말이다. 애초에 술을 마실 때 말려야 할 텐데 말이다. 답답한 기분에 한숨을 푹푹 내쉬자 태양의 다리가 안쪽으로 꼬인다. 옆으로 몸을 밀어붙이는 것에 진성은 태양의 몸을 부축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조심해. 다리에 힘 줘야지.”

“나 지금 다리에 힘주고 있어.”

뚜렷한 눈으로 확실하게 그렇게 말을 하면 뭐라 반박의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 너 정말 다리에 힘주고 있구나-라는 식으로 밖에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여간 술주정뱅이가 상대하기 제일 힘든 일이라면서 한숨을 푹푹 쉰 진성은 태양의 허리를 고쳐 잡았다. 그 순간 달콤한 향기가 맡아졌다. 이건 무슨 냄새인가 싶어 눈을 내리자 옆에 완전히 밀착한 상태인 태양이 보인다. 

평소와 달리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태양. 거기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어 묘한 느낌을 풍기는 옆모습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매끄러워 보이는 옆선과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거기다 살짝 내리뜬 긴 속눈썹이 유혹적이다. 잡고 있는 허리도 왜 이렇게 가는지 모르겠다. 목이 타는 듯 한 느낌을 받으며 진성은 침을 삼켰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당황한 진성은 마구 눈을 굴리며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다. 심호흡을 해보고 애국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다시금 태양 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태양이 긴 한숨을 쉬며 얼굴을 든다. 멍하니 앞을 쳐다보는 모습을 진성은 멍하니 쳐다봤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남자면서 왜 이렇게 예쁜 거지. 아니 그 전에 자신은 왜 태양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거란 말인가. 몽롱한 기분으로 태양을 보고 있으려니 그 순간 비틀거리던 태양의 몸에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진성의 어깨에서 팔을 치우고 스스로의 힘으로 똑바로 서는 것에 진성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왜 그래? 그냥 어깨에 팔 걸쳐. 그래도 괜찮아. 너 혼자 서 있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괜찮아. 그보다 너 먼저 돌아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여기까지 왔는데 물이라도 한잔 줘라.”

그 먼 거리에서 여기까지 힘들게 데려다 줬는데 여기서 쫓아내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싶다. 서운함을 담아서 그리 말해 봐도 태양은 반응이 없다. 굳은 표정으로 앞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진성은 고개를 돌려 태양이 보는 쪽을 쳐다봤다. 

태양이 사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검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 옆에 장신의 한 사내가 서있었다. 이런 곳과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사내였다.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는데도 선글라스까지 착실하게 끼고 있었지만 날렵한 옆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진성은 상대에 대해서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에....설마?”

여자애들이 하도 난리를 쳐대서 모델이나 연예인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던 진성도 도후라는 모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집에 가면 있는 두 누나들도 지금 저 모델에게 푹 빠져서 난리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정말로 지금 눈앞에 있는지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믿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눈을 비비자 태양이 진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이만 돌아가 봐.”

“뭐? 나 정말 지금 가라고?”

“응. 정말 미안하다.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용건만 간단하게 말한 태양은 가방을 추스르고 진성을 지나쳐 갔다. 이쪽은 애초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고 그냥 가 버리는 것에 괜히 울적해진다. ‘정말 너무하잖아.’라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말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태양은 도후의 앞에 가서 섰다. 지금 이 시간에 사람이 많이 없다고 해도 도후가 서있으니 저 앞을 지나가던 아줌마들이 자꾸만 이쪽을 쳐다본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재수 없으니 저절로 시선이 가는 모양이다. 태양은 눈을 위로 들어서 팔짱을 끼고 띠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도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건데요?”

묻는 태양에게 바로 한마디 해주려 했던 도후는 문득 태양의 인상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가 변했기에 이렇게 낯선 느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어 태양을 빤히 쳐다보던 도후는 곧 알게 된다. 지금 태양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느낌이 조금 더 원만해진 것 같다. 아니다. 동그란 눈매 때문에 귀염성이 있는 인상이었는데 은테 안경을 쓰니 날카로워진 것 같다. 재수 없이 툭툭 내뱉는 말투하고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도후의 입에서는 이상한 질문이 나왔다. 

“......너 안경 썼냐?”

“그거 알아내고 싶어서 여기에 와 있는 거예요? 정말 실없는 사람이네요.”

폼 잡고 서있기에 또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다. 피식-하고 웃은 태양은 도후마저 지나쳐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에 심히 어이가 없었던 도후는 크게 입을 벌렸다. 

지금 저게 누구를 실없는 사람이라는 말하는 것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태양 때문에 귀찮고 성가신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던 도후는 바로 태양의 뒤를 쫓아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우리 엄마한테 무슨 말 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하긴 뭔 말을 해요. 저번에 레스토랑에서 만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당신 어머니가 바빠서 요 며칠 동안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요.”

“웃기지마.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려고? 저번에 차로 집까지 태워다 줬으면 됐지 왜 내가 널 상대 안하고 무시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건데?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한지 알아?”

아무래도 아버지가 아줌마한테 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한 모양이다. 

사람이 생각이 있으면 이런 예민한 부분은 건드리지 말고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건데 원체 성격이 약한 아버지는 그것을 견뎌하지 못하고 아줌마한테 다 말하면서 마지막에 ‘어떻게 하지?’라고 말했을 거다. 아버지의 그 약한 모습에 아줌마는 주먹을 쥐고 일어나 ‘기다려봐. 내가 다 알아서 할게.’라는 식으로 말을 했을 거다. 그래서 바로 도후에게 전화를 걸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겠고, 당장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어떤 어떤 제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겠지. 그 말 때문에 여기까지 이렇게 휑 하고 달려온 건가 싶다. 

모델로 뜨기 전에 긴 무명시절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했을 텐데 사람이 왜 이렇게나 맹한 건가 싶다. 정말로 이쪽보다 3살 연상인가 싶을 정도다. 한심하기도 해서 살짝 옆으로 뜬 눈으로 쳐다보자 도후가 왈왈 거리며 따져댔다.  

“어떻게 할 거냐고. 너 때문에 지금 굉장히 난처하단 말야!”

“그래요? 그것 참 안 됐네요.”

안경알 너머의 동그란 눈동자가 또렷한 기운을 뽐냈다. 

태양의 눈동자가 너무 동그랗고 반짝거려서 도후는 미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태양이 한 말을 이해하고 그것을 머리로 접수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떻게 사람이 흥분한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식으로 태연한 반응을 취할 수 있는 건지 그게 굉장히 궁금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듯한 경험을 하며 도후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태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할 말은 그것뿐이냐?”

“그럼 무슨 말을 더 해요? 당신 붙잡고 안 됐다고 울어주기라도 해요? 뭐 그렇게 해달라고 하면 해줄게요. 마침 주머니에 안약도 있고 우는 척 정도는 해줄 수 있어요. 어때요? 해줘요?”

말을 할 때마다 작은 머리통이 가볍게 흔들린다. ‘너 말 제대로 못 듣잖아. 그러니까 내가 자세히 말해 주는 거니까 잘 들어봐.’라면서 어린애를 어르듯 말하는 것 같다. 그런 태양의 태도와 움직임에 도후의 이마로 핏줄이 하나 서 올렸다. 

지금까지 그 누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했단 말인가. 맹세코 그 누구도 없었다. 아, 모친이 이런 식이긴 했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어머니다. 어머니만 자신에게 막 대해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도후는 이를 갈면서 음산하게 말했다.  

“이 자식....너 정말 이렇게 나올....”

태양의 멱살을 잡아볼까-하고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확인하는 순간 도후는 바로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도후는 인상을 쓴 채로 부글부글 끓는 속을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이 자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바로 태클이고 잘난 혓바닥으로 이쪽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앉아 있으려고 한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태양을 상대할 수가 없다. 그것을 깨닫게 된 도후는 아주 진지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태양은 잔머리가 잘 굴러가는 녀석이었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주 확실한 수단을 사용해서 저 놈의 입을 막아내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어지럽게 눈을 굴리던 도후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아저씨다. 조금 비겁한 방법이긴 하지만 태양은 자신의 부친의 일에 유독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 아저씨를 인질로 삼아 이러쿵저러쿵 하는 식으로 말을 하면 바로 입을 다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서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이번 결혼식은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해버리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그래. 그런 문제다. 이것 참. 의외로 쉬운 문제 처리 방법이었는데 괜히 어렵게만 생각해서 머리 아팠다. 좋았어. 이번에는 찍 소리도 못 내게 해줄 거라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은 도후는 태양 쪽으로 얼굴을 내렸다. 

“이봐. 내가.....”

의기양양해서 얼굴을 내린 도후는 아무도 없는 공간을 확인하고 바로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어?”

보이는 시야가 환해져도 달라진 것은 없다. 당황한 도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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