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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후는 입을 크게 벌렸다. 허허-하는 소리만 연달아 내던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바깥으로 내고는 두어번 털다가 그냥 집어 던졌다. 그리고 태양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고는 애써 화를 참으며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당장 내려. 나 약속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너를 데려다 줄 시간이 어디에 있어. 당장 내려. 어서.”
“싫다고 말했잖아요. 우리 집 여기서 버스 타면 한 시간은 걸려요. 차 있으니까 30분이면 도착할 텐데 왜 내가 내려요. 당신이나 앞에 보고 시동이나 걸어요.”
“너.........정말이지.”
도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선글라스마저 위로 하고 빤히 쳐다보지만 태양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었다.
조금 전 과는 전혀 다른 자세다. 호영이 있었을 때에는 예의바른 태도로 조근조근한 어조로 말을 했으면서 지금은 저런 건방진 태도에 어투를 사용하고 있다. 입을 벌린 도후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독이며 말을 꺼냈다.
“너 이중인격이냐.”
“이중인격이 아니라 어른들 앞에서 예의가 바른 거죠. 누구처럼 철없이 굴면 떨어지는 거 없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태양은 손가락을 펼치며 손등을 엄지로 쓱쓱 문질렀다.
모처럼 좋은 곳에 와서 맛있는 거 먹나 했더니 다 물 건너 갔다.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 아버지 재혼할 상대분이 좋은 사람이니 그것에 만족하기로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태양은 눈을 들어 여전히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기만 하는 도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해요. 나 집에 데려다 주고 댁은 약속 장소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후는 눈을 들어 위를 쳐다봤다. 상당히 어이가 없었던지 한동안 그 자세로 있던 것도 잠시 입술을 씰룩인 그는 태양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너. 뒷머리 잡아서 던져버리기 전에 당장 내려.”
“뭘 그렇게 화를 내세요. 어차피 우리들은 형제가 될 거잖아요.”
“누가 형제라는 거야! 너는..!”
“저도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마음에 들어요. 아버지가 그런 분과 재혼을 한다고 생각하니 많이 안심이 되요.”
태양의 말에 도후는 표정을 굳혔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를 빤히 쳐다본 채로 태양은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아주머니의 행복을 바라고 나도 그래요. 어차피 두 분은 결혼을 하실 거고 우리들도 싫어도 형제가 될 겁니다. 매번 얼굴을 마주 보고 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지 두 분이 힘들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이번만 차로 태워다 줘요. 그래야지 나중에 아주머니가 물어볼 때 데려다 줬다고 말할 거고, 그러면 아주머니도 안심할 거 아닙니까.”
태양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이쪽이 태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어머니는 그 사람과 벌써 결혼을 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쪽에서 날뛰어서 다 차려진 밥상을 뒤집어 엎을 수도 없는게 아닌가. 혀를 찬 도후는 앞을 쳐다보고 안전벨트를 맸다.
“제길.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당신 마음에 안 들어요.”
“......말 하나를 안지는 구만.”
“원래 내 성격이 그래요.”
“말만 존댓말이지.”
투덜댄 도후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바로 차가 움직인다. 그것에 태양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의자에 완전히 몸을 눕혔다. 의외로 쉽게 차를 움직인다. 한바탕 언성을 높인 후에나 움직일 줄 알았는데. 재수 없게 털털 거리면 그냥 차에서 내릴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주 말이 안 통할 만큼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그건 다행이다. 그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를 꺼내 확인을 하자 과 친구다. 태양은 바로 통화를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야?”
[오늘 아버지 재혼 상대랑 만나는 날이잖아.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거 아냐?]
“아니. 다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야.”
[그래? 그러면 우리 시내에서 만날래?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괜찮아. 지금 형이 집으로 데려다 주고 있으니까. 다음에 만나자.”
형 운운하는 것에 도후가 흘깃하고 뒤를 쳐다본다. 그것을 모르는 척 하며 태양은 일부러 전화에 집중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그 형이라는 사람 잘 생겼어? 어때?]
“흐음. 글쎄...”
[조금 심드렁하네? 이상하게 생겼어? 이야. 그 인간도 참 불쌍하다. 너랑 같이 다니라면 키도 좀 있고 얼굴도 괜찮아야 할 텐데.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어?]
“응. 못생겼어.”
단호하게 하는 말에 차가 끼익-하고 흔들린다. 옆으로 크게 기울어지는 것에 태양은 위를 손으로 집으며 전화에서 살짝 얼굴을 떼고 이쪽을 노려보는 도후를 빤히 쳐다봤다.
“왜요?”
“.....지금 누구한테 못생겼다고 하는 거야?”
“당신 이야기 아닌데요? 남의 통화 엿듣지 말고 운전이나 제대로 하세요. 만난 지 하루 밖에 안 되는 당신이랑 같이 죽고 싶지 않거든요.”
화장실에서 있었던 경우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태양에게 막 뭐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도후는 분한 듯 입술을 씰룩이다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쪽에 대한 화가 상당히 컸는지 일부러 거칠게 운전을 한다.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었다가 다시금 왼쪽으로 몸이 흔들리게 되었지만 태양은 그런 일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계속해서 통화를 했다.
[뭐야? 지금 그 형이라는 사람하고 싸우는 거야?]
“그런 거 아냐. 싸울 만큼 친하지도 않아.”
[그래? 으음. 그럼 오늘은 못 만나겠고 내일은 일요일이고....내일 만날까?]
“아니. 내일은 혼자서 쉬고 싶어. 다음에 학교에서 보자.”
[그럴까? 그럼 다음에 보자.]
“응.”
폰을 닫고 주머니에 넣은 태양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 몸을 내밀며 운전을 하고 있는 도후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로 가는 거 아니에요. 조금 저 차선에서 왼쪽으로 틀어야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런 말은 진작 하란 말이야.”
인상을 쓴 도후는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도 신경질을 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로 이쪽을 데려다 줄 모양인가 보다. 중간 정도 잘 가다가 멋대로 차선을 바꾸고는 도로 옆에서 ‘내려.’라고 또 왈왈 거리면 그때는 정말 차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말이다.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다시금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은 태양은 도후가 이상한 곳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뒤에서 ‘거기가 아니라니까요.’라는 말을 툭툭 내뱉었다.
“태워다 줘서 고맙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태워다 좋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거지만 정말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지 몰라도 매번 다른 차선으로 넘어가서 정확히 1시간 10분이 걸려 버렸다. 차라리 버스 타고 오는 게 말도 안 하고 마음도 더 편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길게 한숨을 쉬려니 따라서 바깥으로 나온 도후가 아파트를 흘겨보고는 바로 인상을 쓴다.
“이런 데서 사는 거야?”
도후의 말에 태양의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린다.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태양은 차에 팔꿈치를 올린 채 물었다.
“여기가 뭐가 어때서요?”
“낡았잖아. 집값도 얼마 되지도 않고....혹시 너희 부자 우리 엄마한테 빌붙으려는 거 아냐.”
“빌붙지 않아도 알아서 잘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도 집값 꽤 비싸요. 건물이 낡았다고 집값이 싼 곳이라고 생각하다니. 머리 꽤나 비었네요.”
“...........뭐?”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뭐?’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도 머리가 나쁘다는 증거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인 태양은 시니컬한 웃음을 날리며 차에서 몸을 뗐다.
“댁이나 어머니한테 얹혀살지 말고 지금부터 열심히 저축해요. 나이도 많은 주제에 아직도 겉멋만 들어 있으면 언제 독립할 겁니까.”
“너? 거..거기 서! 이 자식아!”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하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있어. 한심하긴.”
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 태양은 몸을 돌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태양은 뒤를 쳐다봤다. 쫓아오면 더 데리고 놀아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뒤쫓는 기색은 없다. 지레 떨어진 모양이다. 집요하게 굴 것 같이 생겼으면서 의외로 싱겁게 떨어져서 재미가 없다. 빤히 뒤를 쳐다보던 태양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 들어가 10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도후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급히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지만 벌써 위로 올라가 버렸다.
“제...제길..!”
차를 아무데나 세울 수가 없어서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오는 덕분이 놓치고 말았다.
이 녀석 이쪽 속만 잔뜩 긁어놓고는 그대로 내빼는 것 좀 봐라. 당장 붙잡아서 손을 봐줄 거라며 주먹을 쥔 도후는 10층에서 멈추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는 눈을 빛냈다.
그래. 10층이란 말이지. 두고 보자. 나한테 붙잡히면 넌 그 날로 제삿날이다.
이를 바득바득 간 그는 급히 버튼을 눌렀다. 연거푸 누르는데도 망할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안 내려오는 건지 모르겠다. 태양에게 있는 데로 속이 긁혀서 누가 옆에서 살짝만 건드려도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상태가 된 도후는 연신 시근덕거리며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그때 주머니에서 띠리릭-하는 벨소리가 울렸다. 급히 폰을 꺼내 귀에 대자마자 거친 말이 나온다.
“누구야?”
[나야. 지금 어디야?]
폰 너머에서 들리는 귀여운 목소리에 도후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진다.
“지금 바빠. 나중에 통화해.”
[그런 게 어디에 있어. 늦었으면서 되려 당당하네. 지금 어디야? 빨리 와.]
“지금 내가 바빠. 할 일이 좀 있으니까 기다려. 늦게라도 갈 테니....”
[나 기다리는 거 싫어해. 알잖아?]
“...................”
[지금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만 하고 나한테 와. 빨리.]
응석을 부리듯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는 것에 도후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생긴다.
엘리베이터는 점점 아래로 내려와 이제 막 2층이 되어가려는 참이다. 조금 더 기다리면 10층으로 올라가서 그 재수 없는 녀석 면상에 한 방을 날려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에도 폰 건너편의 사람은 계속해서 도후를 재촉했다.
[도후야. 보고 싶단 말야. 빨리 와. 응?]
어쩔 수 없는 건가. 버튼에서 손을 뗀 도후는 몸을 돌렸다.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려.”
[됐다. 알았어.]
기분이 좋아진 듯 금방 밝은 어조로 말을 한 상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신호음이 울리는 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도후는 땡-하고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확인하며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나중에 보자. 건방진 녀석.”
다음에 볼 때는 그냥은 안 넘어간다.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도후는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방의 온도를 올린 태양은 티비를 켜고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몸을 씻었다.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에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김치와 나물 몇 가지를 꺼내고 싱크대에 올려놨다. 커다란 그릇에 밥을 뭉텅이로 푸고 그 안에 김치와 나물과 깨와 참기름과 고추장을 한 번에 넣고 대충 비볐다. 다 섞이기도 전에 크게 한입 떠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면서 거실로 나왔다. 아무것도 없이 썰렁하기 한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태양은 뉴스 채널을 오락 채널로 돌리고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이번에는 또 뭔가 싶었던 태양은 끙차-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 대충 올려뒀던 양복 상의에서 핸드폰을 꺼내 귀에 댔다.
“여보세요.”
[태양아. 지금 어디야?]
“집이요.”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무릎걸음으로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앉는다. 바닥에 앉아 쟁반 안에 담긴 밥을 비비면서 호수의 말을 기다렸다.
[도후군이 잘 데려다 줬어?]
“안 데려다 주려는 거 달래서 이쪽까지 오긴 왔어요.”
[그래? 그런데 말이지. 태양아....]
“할 말이 있으면 확실하게 하세요. 말 더듬으면 옆에 아줌마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옆에 호영씨는 없어.]
아. 그런가. 그러면 상관없다.
태양은 밥을 크게 퍼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꿀꺽-하고 침을 삼킨 호수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나 정말 재혼한다. 그래도 되는 거지?]
“하세요. 내가 언제 재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크게 밥을 퍼서 또 한입 먹은 태양은 손가락으로 입술에 묻은 밥알을 떼서 다시 입 안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빠는 혼자 사는 것보다 누구랑 같이 사는 게 훨씬 나아요. 아줌마 보니까 성격 시원시원할 것 같은데요 뭐.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도후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나랑 잘 안 맞는 타입인 것 같으니까 꼭 친하게 지내라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안 맞는 사람이랑 억지로 친한 척 하는 거 나 잘 못해요. 알죠.”
[당연히 잘 알지. 그리고 말야 태양아....]
호수는 몇 번 망설이는가 싶더니 뒷말을 이었다.
[여러모로 고맙다. 어려웠을 텐데....]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 태양은 피식하고 웃었다. 머리를 뒤로 기댄 그는 불이 하나 나간 전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한테 고마울 게 뭐 있어요. 그만 아줌마한테 가보세요. 오늘은 주무시고 들어오셔도 되요.”
[너 무...무슨 소리를..!]
“됐어요. 끊어요. 나중에 와서 더 이야기해요.”
이야기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옆에 내려놨다. 그릇을 한 손으로 단단히 받친 태양은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서는 티비 화면에 고정을 했다.
좋아하는 게스트들이 많이 나왔지만 오늘따라 내용이 영 재미가 없다. 전에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에 하면 꼭 본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나오는 게스트에 따라서 프로그램의 내용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말 잘 하는 사람을 데리고 나와야지 몸으로 웃기려는 사람을 데리고 오면 어쩌나 싶다. 거기다 저기 사람 좋게 웃은 사람은 얼마 전에 음주운전을 한 사람이 아니던가. 잘도 뻔뻔스레 얼굴을 내밀었구나 싶어 태양은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한 것은 10년도 전의 일이다. 아버지는 워낙 숫기가 없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예뻤지만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라는 살림은 하지는 않고 맨날 쇼핑을 한다고 돌아다니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어대니 순하기만 한 아버지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져서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런 굉장한 성격을 가진 어머니와 15년 동안 살았으니 그것 나름대로 꽤 대단하다. 듣기로는 연애도 오랫동안 했다고 하던데 말이다.
연애를 할 때에는 성실하기만 한 사람인줄 알았다던 엄마가 그렇게 사람이 달라질 줄은 몰랐다고 술을 마시며 중얼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던 사람이 이번에 아주머니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아주머니와 서로 잘 되어서 좋은 가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두 분 다 지금 쉰이 다 되고 넘은 나이였지만 뭐 어떤가. 자신들의 행복을 찾아서 재혼을 한다고 하는데 뭐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태양은 베란다에 걸어둔 이불을 걷었다. 이불을 털어서 한쪽 팔에 올린 태양은 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아버지는 어제 밤 들어오시지 않았다. 자고 오라고 했더니 정말로 자고 올지는 몰랐지. 아직 식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밤을 같이 지새우는 사이가 된 것인가. 아니지. 이쪽이 눈치 채는 것이 늦어서 그랬지 사실은 꽤 오랫동안 만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동안 서로 육체관계가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러면 벌써 끝까지 간 거라는 걸까. 혹시 두 분은 이세에 대해서 욕심을 내고 있으신 건가? 그렇다면 내가 이 나이에 동생을 볼 수도 있다는 걸까.
“.......그만 두자.”
이세를 낳던 밤을 지새우던 그건 그 두 사람의 몫이었다. 이쪽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레 걱정을 할 문제는 아닌 셈이다. 거기다 아버지의 밤에 대해서 생각을 하자니 왜 이렇게 민망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며 손바닥으로 두어번 뺨을 두드린 태양은 이불을 손에 올린 채로 베란다로 나갔다.
이불을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발로 걸레를 누른 채 설렁설렁 닦으려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읽고 싶은 책이 있었지...”
중얼거리며 태양은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올려진 수첩을 꺼냈다.
찾고자 하는 책을 살 수 있는 곳을 꽤 멀어서 쉽게 오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 살 것을 적어두고 한 번에 시간을 내서 사러 가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살 책들이 10권이 넘어섰다.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책이 있을까 싶어 한 번 더 확인을 하다가 전부 사야 할 듯 싶어 ‘돈이 많이 깨지겠군.’라고 중얼거린 태양은 수첩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고 머리를 정리한 태양은 더블 버튼의 코트를 입고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엠피쓰리를 목에 걸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후에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달리 두고 가는 것이 없나 싶어 머리 속으로 생각을 하지만 다 잘 챙긴 것 같다. 만족한 듯 두어번 고개를 끄덕인 태양은 현관 쪽에 구겨서 세워둔 자전거를 잡고 복도로 나왔다.
아파트를 벗어나 도로로 달리는 처음 10분은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많이 추워진다. 3월이라 그런지 바람이 꽤 쌀쌀했다. 머리카락이 많이 날리고 눈이 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를 쓰고 안경도 쓰는 건데 말이다. 손도 시렵다면서 잠시 자전거를 멈춰 세운 태양은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다행스럽게도 털장갑이 나왔다. 그것을 손에 낀 태양은 다시금 자전거를 패달을 밟았다.
귀에서는 좋아하는 여자 가수의 경쾌한 음악이 울리고 있었고 차가웠던 바람도 점점 기분 좋게 여겨진다. 그 누구와도 약속을 잡지 않았던 느긋한 주말을 혼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태양의 기분을 좋게 했다. 지금이라면 학교 문제나 친구들 문제나 가족 문제를 모두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그머니 입가의 웃음을 지은 채로 태양은 더 열심히 패달을 밟았다.
집에서 서점까지의 거리는 거의 30분이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서점으로 들어간 태양은 처음에는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곳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이 마비 된 것 같다. 이놈의 날씨는 왜 풀어질 줄을 모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여름에는 말도 안 되게 더워지겠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은 태양은 수첩을 꺼내 살 책을 미리 확인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 가지에 몰두하게 되면 그것에 정신없이 몰입하게 된다. 하나씩 손에 책이 쌓여지고 점점 무거워지고 있지만 태양은 태연하기만 한 얼굴이다. 쪼그리고 앉아 찾고 있던 책을 집어든 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잡지 쪽으로 갔다. 이번에 나온 신간 잡지를 고르기 위해서 다양한 잡지들이 잔뜩 올려진 곳 앞에 선 태양은 그 순간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왜냐하면 남성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잘생긴 사내의 얼굴이 도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턱을 손으로 잡은 채로 살짝 들고 있는 모습은 꽤 어려운 각도임에도 불구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뜬 채로 입술까지 살짝 벌리고 있으려니 옆에서 잡지를 고르던 여학생들이 낮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러댄다. 정말 멋있다면서 어디 것을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에 태양은 눈을 움직여 다른 잡지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진열되어 있는 잡지 중의 20%정도가 도후의 얼굴 사진으로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성 잡지에 남자 모델이 서는 것은 꽤 드문 일이 아니던가. 거기다 이렇게나 많은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다니. 확실히 최근에 떴다는 호영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양은 손을 내려 제일 앞에 있는 잡지를 뒤척였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세미 누드 식으로 촬영을 한 도후의 모습이었다.
“이것 봐. 정말 멋있다. 배가 왕자잖아.”
“이게 진짜 근육이지. 다른 사람들처럼 징그럽지도 않고....이건 정말 예술이야. 예술.”
“우리 이것도 사자.”
“나도 가지고 싶은데...”
“다음에 사. 너 지금 돈 없잖아. 이거 사라면 너 참고서 다음에 사야 하잖아.”
“그렇긴 하지만....으음...”
고민이 되는 듯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던 여학생은 바로 아래에 있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몰라. 참고서는 학교 앞에서 사고 지금은 이거 살거야.”
“너 그렇게 해도 괜찮아? 나중에 엄마가 물어보면 뭐라고 하게?”
“몰라. 공부하다 배고파서 뭐 사 먹었다고 하지 뭐. 그렇게 하면 금방 넘어가. 그만 가자. 여기에 있으니까 이것저것 다 사고 싶어진다.”
“그러자.”
한 손에 잡지를 잔뜩 든 채로 여학생들은 사라졌지만 태양은 그 자리에서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고고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도후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태양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도후의 미간 사이를 꾹 눌렀다.
“못 생긴 게.”
입 밖으로 소리 내 말을 하자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성격도 나쁘고 센스도 안 좋은 주제에.”
이제 완전히 기분이 풀어진다. 손가락을 든 태양은 사고 싶었던 잡지를 들어 올리고는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찾던 책을 팔 위에 올리고 바로 계산대로 갔다. 책을 한쪽 구석에 올리며 태양은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계산해 주세요.”
“알았습니다.”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한 여자는 책 뒤의 바코드를 찍었다. 처음 몇 번은 태연한 얼굴로 찍던 여자지만 점점 표정이 굳어진다. 작은 만화책을 든 여자는 그것을 태양 쪽으로 보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것도 사시는 거예요?”
“그래요.”
순순히 긍정을 한 태양은 점원이 왜 물어보나 싶어 눈을 내려 계산대 위에 올려진 것들을 쳐다봤다.
보이는 것은 손바닥만한 작은 만화책이다. 그 책 위에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붉은 글자가 적혀 있고 남자 둘이 껴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쪽을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에 태양은 다시금 책을 앞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여기 알바한지 며칠 됐어요?”
“네? 하...한 일주일 됐나.”
“두 달 일하면 이런 일 적응될 거예요.”
“............네..”
태양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은 여점원은 계산을 마저 하고 봉지에 책을 집어넣었다. 그것을 태양에게 건넨 여자는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
여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태양은 밖으로 나갔다. 자전거를 찾아서 뒤에 책을 올리고 끈으로 단단히 고정을 했다. 자전거에 올라타 도보로 이동했다. 사람들을 피해서 자전거를 타다가 신호에 걸려서 신호등 앞에서 멈춰선다.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서 위를 쳐다보는 순간 재수 없게도 저 위에 대형화면으로 광고가 나왔다. 그것도 도후의 얼굴이 나오는 광고 말이다. 향수병을 들고서 폼을 잡고 있으려니 뒤로 나타난 여자가 도후의 가슴을 끌어안고 그의 목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는 카피 문고가 나오고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 남자의 향기 특별하다.’라는 식의 말이었는데 태양이 보기에는 영 이상하기만 했다. 별 이상한 것을 다 본다며 얼굴을 돌리는 순간 그 아래에 연결된 작은 티비 안에서 걷고 있는 도후가 보였다. 하얀 길을 걸어가며 포즈를 잡고 몸을 돌리며 사라진다. 저건 또 뭔가 싶어 아래로 눈을 내리자 이번에 보이는 것은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도후가 있는 광고판이다. 같은 사진이 몇 개나 반복이 되어서 벽에 걸려 있다. 왜 저런 것이 저기에 있는 건가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려니 옆에 여자가 멈춰 섰다. 그 여자를 쳐다보자 우습게도 여자의 한 쪽 팔에는 도후가 나오는 잡지가 떡 하니 들려 있었다. 조금 전 서점에서 봤던 바로 그 잡지였다.
이상하다. 왜 갑자기 그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잘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모르던 사람이 아는 사람으로 바뀌어서 더 잘 보이게 되는 건가 싶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한 태양은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자 자전거 패달을 밟았다.
유도후. 올해로 27살이 되는 전문 모델이다. 어느 순간 방송매체에 얼굴이 나온 이후로 근 이년 동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 남자 모델 중에서는 몸값이 제일 비싸고 파리나 프랑스 패션소에도 나간다고 한다. 요즘에는 CF를 찍기도 했는데 그게 또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 십대부터 삼십대의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고 그 위의 여성들에게도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영화를 찍는 다는 소문이 돌기도 한다고 했다. 그 외에 여자가 있다는 소문은 없지만 종종 미인인 팔등신의 여성과 팔짱을 끼고 번화가에 나타난다는 말도 돌고 있다고 한다.
“…화려하네.”
말 그대로 정말 화려했다. 그냥 조금 인기가 있나 보다 싶었는데 조금 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인기가 많았던 거다. 그런 주제에 잘도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 레스토랑에 선글라스만 쓰고 들어올 생각을 했구나. 뭐, 어머니가 재혼을 한다고 하니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어슬렁거리고 나타난 듯한 느낌이 강하지만 말이다.
조금 더 뒤져보면 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태양은 진지한 얼굴로 도후의 이름을 쳐봤다. 그러자 나오는 것은 그의 사진들뿐이다. 그냥 딱 볼 때에는 잘생긴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깨끗하게 정리 되서 나오는 것을 보니 멋진 것 같기도 하다. 표정도 다양하고 포즈도 잘 잡는 것 같다. 성격은 안 좋고 센스도 영 아닌 것 같더니만 의외로 자기 할 일은 잘 하는 타입이었던 건가.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서 새롭긴 했지만 그 뿐이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도후의 검은 눈동자에 태양은 살짝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뭘 노려보는 거냐. 이 성격 나쁜 녀석아.
한 대 쳐줄까 싶어 주먹을 쥐려는데 옆으로 다가온 사람이 어깨를 가볍게 친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태양은 바로 바탕화면에 깔아져 있던 사진들을 전부 꺼버렸다. 그러자 전부터 작업하고 있던 레포트가 나타난다. 자판에 손을 올리고 이제부터 쓸 준비를 하고 있는데도 진성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은 진성은 책상에 손을 올리고는 태양을 빤히 쳐다봤다.
“컴퓨터실에 와서는 뭘 보고 있었던 거야? 너도 그 유도후인가 뭔가 하는 녀석 좋아하는 거야?”
금방 끈다고 했는데 얼굴을 보긴 본 모양이다. 여기서 딱 잡아떼는 것도 이상하다 싶었던 태양은 진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유도후에 대해서 잘 알아?”
“잘 아는 것은 아니고 지금 우리 과 여자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녀석이잖아.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까 싫어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야.”
“그래?”
대꾸를 하는 목소리에서 미묘한 것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정말 관심이 없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을 거다. 아무래도 좀 수상했던 진성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야. 너도 정말 그 녀석한테 흥미 있는 거야?”
“흥미는 무슨. 저렇게 못생긴 녀석은 별로야.”
“못생기다니. 그 정도면 굉장히 잘 생긴 축에 속한 거야.”
기가 막힌 듯한 어조로 말하는 진성이지만 태양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레포트는 오늘까지 해서 제출해야 하는 거다. 강의 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아있으니까 열심히 하면 얼추 맞출 수 있을 거다. 교수가 레포트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출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기만 하는 태양의 행동에 진성은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것도 잠시 태양의 옆얼굴을 보는 동안 점점 표정이 풀어진다.
하얀 피부에 내려앉은 검은 머리카락이나, 차갑게 빛나는 은테의 안경이라든가, 고정된 검은 눈동자와 긴 속눈썹까지, 모든 것이 진성의 눈을 현혹시킨다. 일견 보기에는 차가운 저 뺨에 손가락을 대보고 싶어진다. 하얀 피부 아래에 흐르는 피도 차가울까 싶어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살짝만 만져보면 안 되는 건가 싶어 집중해서 바라보자 태양이 옆으로 눈을 내린다. ‘뭐야? 아까부터 왜 자꾸 날 쳐다보는 거야?'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에 진성은 움찔해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쵸콜렛 하나를 꺼냈다.
“배고프지 않냐? 이거 먹어.”
그것에 태양은 바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봉지를 까서 쵸콜렛을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맛이 마음에 든다. 짧은 한숨을 쉰 태양은 다 녹아가는 쵸콜렛에 아쉬움을 느끼며 진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것 밖에 없어?”
“왜? 배고파?”
“배고프진 않고 쵸코렛 더 먹고 싶어.”
“그래?”
진성은 가방을 풀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손을 움직여 보지만 딱히 짚이는 것이 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서 열심히 손을 움직이던 그의 손끝에 사탕 두어개가 잡힌다. 그것하고 가방 앞 쪽에 들어가 있던 비스켓까지 끄집어내 전부 태양의 앞에 내려놓은 진성을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라도 먹어.”
“사탕이랑 과자는 별론데. 쵸콜렛 먹고 싶어.”
“쵸콜렛 많이 먹으면 있다가 점심 못 먹어.”
“밥은 그다지 생각이 없어서 말야.”
과자를 뜯어 입에 넣은 태양은 건성인 투로 대답을 하고는 컴퓨터 화면을 쳐다봤다.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열 줄의 글을 지워내고는 다시금 자판을 두드려댄다.
다른 사람들은 책을 펼쳐 두거나 인터넷을 뒤져서 레포트를 작성하는데 태양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저 강의 들은 것을 머리 속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원래 알고 있던 지식을 섞어서 대충 레포트를 써서 제출한다. 그렇게 하면 큰 낭패를 보지 않을까 싶지만 태양의 그런 방식은 교수들이 꽤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시험을 잘 못 보는 타입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레포트를 암만 열심히 해도 학점이 잘 나오지 않기도 했다.
이쪽은 완전히 열외로 치고 열심히 화면만 쳐다보기만 하는 태양의 모습에 진성의 손가락이 꼼지락 거린다. 결국 진성은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 밥 먹고 왔어? 안 먹고 왔어?”
“대충 때웠어.”
“대충 먹으면 안 돼. 레포트 다 썼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밥 사줄게.”
“됐어. 돈도 없으면서 맨날 나 밥 사주면 어쩌자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하나 사 먹일 수 있어. 그만한 능력은 있는 남자야.”
허리에 손을 올린 진성은 가슴을 앞으로 주욱 내밀었다.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팔뚝 근육을 보이거나 알통이 나오는 곳을 두드리거나 하는 행동에 태양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정말인데 안 믿어주는 것 같네?”
“아냐. 믿고 있어. 아주 잘 믿고 있어.”
“정말이야?”
“당연하지. 내가 널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그렇지?”
태양의 대답에 진성의 표정이 풀어진다.
평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잔뜩 인상을 쓰며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는 주제에 자신의 앞에서는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 귀엽다. 다른 여자들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굴면 진작 여자 친구가 생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정말 귀여운 녀석이라고 생각한 태양은 손을 들어 진성의 볼을 꼬집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가 레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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