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촬영하는 화요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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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트럭이랑 커피차에 줄이 별로 없었다. 정시은이 손을 흔들고 커피차 쪽으로 갔다. 마주 손 흔들고 수아랑 나는 푸드트럭 줄에 섰다. 기다린 시간이 있어서 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푸드트럭 속에 강성연이 있나 확인했다. 평일이라 없을 게 당연한데도. 왠지 강성연을 떠올리면 어색함을 넘어서 몸이 미묘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분명 원수처럼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가 적당히 봉합한 친구 사이였을 터인데, 강성연의 입술 박치기 한 방으로 관계가 애증 어린 남녀 사이로 변해버렸다. 설령 강성연이 별다른 설렘이나 애정 같은 것이 없다고 해도 나로서는 그런 쪽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강성연이 저지른 기습키스는 첫키스를 강탈한다는 짓궂으면서 소심한 복수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강성연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지수랑 나의 사이에 자신이라는 제삼자를 비집어 넣어 삼각관계로 만들어버리는 술수이기도 했다.
어쩌면 강성연은 백지수에게서 첫키스를 넘어 나라는 사람 자체를 뺏는다는 획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미친 생각이기는 하지만 만약 강성연이 자기가 직접 전화를 안 받고 내게 넘겼던 지수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나랑 지수의 관계를 무너뜨리면서 둘 모두에게 복수하려는 생각을 했다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럼 실제로 강성연이 그런 의도를 가졌다고 하면 다음에 보게 됐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 되려나.
“뭔 생각해?”
수아가 물었다.
“그냥 친구.”
“친구 누구?”
“강성연.”
“뭔 생각했는데?”
“걍 오늘은 안 왔네. 왜 안 왔지? 아 오늘 평일이구나. 이런 생각.”
“오빠 학교 오늘까지가 시험 아니었어?”
“아, 맞아. 그랬지.”
마지막 날이라 시험 보는 과목도 하나 적었으니 강성연도 오려면 올 수 있을 거였다. 그런데 지금 없는 거면 강성연도 감정적으로 기습키스를 한 거라 나랑 대면하기 껄끄러운 걸 수도 있었다. 그냥 귀찮아서 안 왔을 수도 있기도 했지만.
“바보야?”
“잠깐 까먹을 수도 있지.”
수아가 흠,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눈살을 찡그렸다.
“뭐 때문에 정신이 빠져있대?”
뜨끔했다. 여자는 왜 이렇게 눈치가 좋은 걸까. 꼭 타인의 감정 상태를 순간적으로 훑는 육감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잠깐 멍 때린 거야.”
수아가 입술을 삐죽였다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봤다. 줄이 줄어들어서 같이 발을 앞으로 옮겼다. 내 대답이 탐탁지 않긴 한데 일단은 넘어가 주는 듯했다.
“주문 오빠가 해.”
“응.”
“근데 그 사람이 왔어야 해 오늘?”
“아니.”
“그럼 왜 찾아?”
“찾은 건 아냐. 그냥 이번에도 왔나 확인한 거지.”
“당연히 안 오지. 귀찮게 왜 와. 시험 끝났는데 친구들이랑 놀거나 집에서 쉬지.”
“그치.”
수아가 내 등을 툭 치고 고개를 쳐들어 정면을 봤다. 남직원이 주문표를 고리에 걸었다, 앞사람이 옆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내가 주문해야 할 차례였다.
“오빠 거 소시지 하나 더 주문해.”
수아가 지나가듯 말했다. 이름이랑 번호를 먼저 말하고, 치킨 로제 파니니랑 불고기 파니니 하나씩하고 그릴 소시지 둘, 그리고 마약 옥수수 하나를 주문했다.
“포크 몇 개 드려요?”
“세 개 주세요.”
“네. 다 되면 전화 드릴게요.”
남직원이 주문표를 걸려 했다. 순간적으로 내부를 슥 훑었다. 지금 보니 안에 강예린도 없었다. 강성연은 없어도 강예린은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셰프님 오늘 안 왔나요?”
“오셨어요. 잠깐 얘기하러 나간다고 하셨는데.”
“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이고 수아랑 같이 줄에서 빠져나왔다.
“온유.”
익숙한 남자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문 뒤쪽 편에 백도영이랑 강예린의 모습이 보였다. 강예린은 반절 정도 마신 커피를 들고 있었고, 백도영은 얼음이 다 녹아버린 거의 다 마신 커피랑 두세 입쯤 남은 그릴 소시지 꼬치를 들고 있었다. 둘이 왜 같이 있는 거지. 일단 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수아가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
강예린이 미소를 띠며 답했다. 특별히 꾸민 것 같지는 않았는데 웃음 짓는 것만으로 화사해 보였다.
“커피는 마셨어?”
백도영이 물었다.
“아뇨, 아직 안 마셨어요.”
“그래? 매니저가 주문해놓고 받아서 바로 너한테 전달했어야 하는 거 아냐?”
“저 매니저님한테 의지하고 부탁하는 게 좀 어색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제가 하겠다고 그랬어요.”
“흠, 그래. 근데 그런 건 남한테 맡기고 할 줄도 알아야 돼. 그게 효율적인 걸 수 있으니까.”
“조금씩 배울게요.”
“응. 근데 너 너무 굳은 거 아냐? 형처럼 대해도 된다니까.”
“알겠어요 형.”
“응.”
주머니에서 폰이 울렸다. 꺼내봤는데 정시은이었다.
“받을게요.”
“어.”
전화를 연결했다.
ㅡ오빠 어딨어요?
“여기 교문 바로 뒤.”
ㅡ오케이. 그쪽으로 갈게요.
전화가 끊겼다. 다시 주머니에 폰을 넣었다.
“누구야?”
강예린이 불쑥 물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강예린의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어서 내심 놀랐다. 와중에 한편으로는 피부가 상당히 좋다는 감상이 들었다. 외모만 보고는 강예린이 누군가의 엄마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정시은이라고, 주연 여배우 있어요.”
“응... 그 저번에 봤던 자매 중에 동생인 애 맞지?”
“네. 걔예요.”
“으응, 근데 둘 다 너무 예쁘더라. 언니 쪽도 뭔가 고상한 배우 분위기 있고...”
뭔가 답을 해야 할 듯한데 수아가 말없이 있어서 나도 고개만 끄덕이고 별 반응을 안 했다.
“근데 오늘 성연이 왜 안 왔는지 안 궁금하니?”
굳이 왜 짚어주시지. 순간 의아했다.
성연이랑 내 사이가 줄곧 원만할 수 있게 하려 하시는 건가. 그렇다고 이렇게 푸드트럭을 자주 끌고 올 정도로 노력을 쏟아부으실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성연이에게 너무 과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으신 듯했다. 아버지 없이 성연이를 길러오고, 가혹하다시피 높은 기준을 두고 성연이를 대해 왔던 것에 대해 부채 의식이 상당하신 모양이었다.
“왜 없지 하긴 했는데, 오늘 시험 끝나서 쉬고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으응. 그렇구나.”
강예린이 고개를 주억였다. 눈에 띄는 표정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어딘가 흐뭇해 보였다.
“성연이가 있는 걸 디폴트로 생각하는 거네?”
강예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 아뇨?”
너무 놀라서 아뇨, 라고 말할 때 음정이 나갔다. 강예린이 쿡쿡 웃었다.
“장난이야. 많이 놀랐어?”
“아뇨, 당황만 좀 했어요.”
“그래. 다행이네.”
“안녕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정시은이 강예린이랑 백도영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
“어, 안녕.”
백도영이랑 강예린이 답해줬다. 정시은이 양손을 모아 손바닥을 내보이며 백도영을 쳐다보며 가리켰다.
“그런데 누구세요?”
“온유 아는 형. 오늘 커피차 보낸 사람.”
“아아! 네. 감사해요. 저번에도 한 번 왔었는데 혹시 그때도...?”
“아마 나 맞을 거야.”
“진짜 감사해요!”
정시은이 예의 바르게 한번 또 고개 숙였다.
“응.”
정시은이 이번에는 강예린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아 위로 들었다. 예상 못 한 당돌한 움직임에 놀랐는지 강예린이 꼼짝도 못 한 채 토끼 눈을 했다. 병실에서 성연이랑 내가 다투는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했을 때랑 비 오는 날 무릎 꿇고 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성연이를 용서해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어른다운 여유를 보여줬던 강예린이라서 얼어붙어 있는 지금 모습이 퍽 새로웠다.
“또 와줘서 너무 감사해요 셰프 언니.”
“언니...?”
강예린이 얼떨떨하다는 듯 정시은이 자신에게 한 호칭을 짚었다.
“언니라고 하면 안 돼요?”
“안 돼... 나한테 네 나잇대 되는 딸도 있는데...”
“예쁘면 다 언니예요.”
강예린이 멋쩍은 듯 웃었다. 그리고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아쉽게 정시은은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는 대체로 이런 애한테 휘둘리는 편이었다.
“언니라고 해도 돼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걸...”
“아무도 안 그래요. 진짜 다 걸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래도 안 돼... 내가 나이가 있는데.”
“그럼 어떻게 불러요?”
“이모나 뭐 다른 호칭 있지 않을까.”
“입에 절대 안 붙을 거 같아요. 언니 얼굴 보고 어떻게 이모라고 해요.”
“그만해...”
정시은이 히 웃었다.
“알겠어요.”
강예린이 한 발짝 물러나 내 옆에 섰다. 이럴 땐 보통 편한 사람 옆으로 가는 건데, 강예린한테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걸까. 뭔가 기분이 미묘했다.
강예린이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너희 다 아직 음식 먹지는 않은 거지?”
“네.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수아가 답했다.
“진짜 냄새부터 너무 좋아요...”
정시은이 말했다. 강예린이 살폿 웃었다. 자기 음식 칭찬이 나오면 기분이 썩 좋아지는 모양이었다. 은근히 알기 쉬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버터 좋은 거 쓰거든. 먹으면 냄새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맛있을걸.”
“아아...”
정시은이 탄식했다. 리액션이 큰 게 예능이나 개인방송 쪽으로 가도 잘 될 것 같았다.
“나 곧 가야 되는데 잠깐만 온유랑 얘기 좀 해도 될까?”
정시은이랑 강예린이 얘기하는 모습을 잠잠히 보고 있던 백도영이 수아를 보며 물었다. 수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백도영이 나를 한 번 보고 발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뒤따라가 나란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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