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6화 〉 촬영하는 화요일 (1)
* * *
복도를 걷는데 뒷머리가 잡히는 느낌이 났다. 그대로 목이 젖혀졌다.
“아.”
멈춰 서자마자 머리채가 풀리는 느낌이 났다. 뒤돌아봤다. 정하윤이 코앞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더 가까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눈썹이 절로 치켜 올라갔다.
“뭐하는데?”
“너 머리 왤케 길렀냐?”
“기른 게 아니라 자란 거거든.”
“그게 기른 거잖아. 뭐 스타일링하게? 누구 보여주려고?”
“아니 뭐 별로 기르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냐?”
“길렀다고 인정했네, 지금?”
“자란 거랬잖아.”
퉁명스레 답하고 돌아서서 다시 발을 옮겼다. 지금 정하윤이 뭐라고 더 몰아붙이면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정하윤이 오른편에 따라붙어 발을 맞춰 걸었다. 정하윤이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말을 먼저 꺼내야 할 것만 같은 강박감이 들었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듬을 거야.”
“언제? 오늘? 누나가 미용실 같이 가줄까?”
“됐어. 따라올 생각하지 마.”
머리채가 또 잡혔다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정하윤을 봤다. 정하윤이 히히 웃었다. 웃기 싫은데 미소를 보는 순간 저절로 내 입꼬리도 올라갔다. 억지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컷. 오케이, 좋았어요.”
오지윤 감독이 끊었다. 스태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촬영할 때의 경직된 무음이 서서히 깨졌다. 모니터하러 걸어가는데 수아가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팠어?”
“아니. 힘준 것도 아니었잖아.”
“사실 살짝 줬는데?”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가 그 말 하니까 갑자기 아파진 느낌이야.”
“그래도 최대한 안 아프게 당겼어.”
“고맙다.”
“응. 일단 앉아봐.”
“응.”
모니터 앞 의자에 앉았다. 수아가 뒤에 서서 내 뒤통수를 계속 쓰다듬어줬다.
“감독님.”
스태프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지윤 감독도 다가온 스태프를 바라봤다.
“그저께 왔던 밥차 또 왔어요.”
“그저께... 아 그 스테이크요?”
“네. 오늘은 또 메뉴 다른 거 같더라고요.”
“커피차도 있어요.”
다른 스태프가 한마디 덧붙였다. 백도영이 왔구나. 뭔가 섬찟했다.
“으음.”
오지윤 감독이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밥 먼저 먹읍시다.”
오 감독이 선언했다. 예, 하고 답하는 소리랑 탄식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오 감독이 나를 바라봤다.
“온유 군이 인복이 많네요. 데뷔도 전에 서포트해주시는 분들 많은 거 보면.”
머쓱하게 웃었다. 백도영을 떠올리자마자 순간 오싹해졌다. 만약 이틀 전에 강성연이 기습 키스했던 걸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오늘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어딘가 문제가 발생해서 드라마 촬영이고 뭐고 할 수 없게 될 거였다.
수아가 내 어깨를 주물렀다.
“가자 오빠.”
“응.”
일어났다. 수아가 내 오른 소매를 잡고 마음대로 걸어서 나를 끌고 갔다. 이끄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여 계단을 밟고 본관을 빠져나왔다.
밖에 있던 정시은이 고개를 두리번대다 우리를 보고 빠르게 걸어왔다.
“가위바위보 해요. 빨리. 수아도.”
정시은이 급하다는 듯 오른손을 뻗으며 말했다.
“왜?”
“빨리요.”
수아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도 팔을 뻗었다. 나도 오른손을 내밀었다. 정시은이 입을 열었다.
“가위, 바위, 보.”
나랑 수아가 가위를 내고 정시은이 보자기를 냈다.
“앗! 이게 왜 이렇게 돼요?”
정시은이 고개를 들어 나랑 수아를 번갈아 봤다.
“설마 미리 막 짠 거 아니죠?”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가위바위보하자고 할 줄 어떻게 알고 짜놔. 그래서 뭔데? 왜 한 거야?”
“푸드트럭이랑 커피차 주문해야 되는데 사람은 셋이니까 이긴 사람 둘이 같이 가고 한 명은 혼자 고독하게 가서 주문하자고 하려 했죠.”
셋이라니. 정서아는 어디다 두고 말하는 걸까.
“서아는?”
“네? 안 왔죠. 오늘 없었잖아요.”
“아 그랬지. 학교 간 거야?”
“네. 잘은 모르겠는데 여태 있던 것도 견학 핑계로 무리해서 온 거일걸요?”
“으음, 그렇겠네. 선생님 입장에 학생이 매일같이 드라마 촬영 구경한다고 학교 빠지는 거로 보일 수 있겠다.”
“진짜 그런 거 맞잖아요.”
“그래도 자기 각본이니까 조금 다를 수도 있지. 아무튼. 너 커피차 갈래 푸드트럭 갈래?”
“저 커피차요.”
“응.”
고개 돌려 수아를 바라봤다.
“지금 갈까?”
“좀 이따. 일단 앉아있자.”
“응.”
셋이서 계단을 내려갔다. 운동장 스탠드에 스태프들이 앉아있었다. 몇몇은 이미 커피 같은 걸 주문하고 받았는지 손에 뭐가 들려 있었다. 연령대가 은근 다양해서 운동회 때 학생들이랑 학부모들이 앉아있는 느낌도 살짝 났다.
수아가 자연스레 사람들이 없는 외곽 쪽으로 갔다. 말없이 따라갔다. 수아가 바닥을 손으로 탁탁 털고 앉았다. 나랑 정시은도 똑같이 앉을 자리를 털고 앉았다.
“편의점에서 살 거 있어?”
내가 물었다. 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또 마실 거 사서 드리려고?”
“응.”
“이미 옆에 커피차 있잖아.”
“바쁘거나 해서 못 드셨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한 번 가서 확인 먼저 해보면 되겠네.”
“그럼 내가 보고 올게.”
정시은이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스탠드 밑으로 내려가고 푸드트럭이랑 커피차가 있는 교문 쪽을 향해 다다다 뛰어갔다. 수아가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나를 쳐다봤다.
“저 언니보다 내가 좀 더 성숙한 거 같지 않아?”
“뭐 정신적으로?”
“응.”
대답에 흔들림이 없었다. 자기가 더 정신연령이 높다는 확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모르겠는데.”
“아니 진짜로?”
“밝고 쾌활하다고 해서 어린 건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느낌이란 게 있잖아.”
“글쎄...”
고개 돌려 정문 쪽을 봤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듯하던 정시은이 이내 둘아서서 우리를 향해 와다닥 뛰어왔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을 뿐 활짝 웃으면서 달려오는 건 아닌데 어딘가 해맑아 보였다. 그냥 풍기는 기운이 긍정적이었다. 의뭉한 구석이 사라지고 조금 더 어려진 정이슬 느낌이었다.
“조금 어린 거 같긴 해.”
“그치.”
“근데 너보다 어리다는 건 아니고.”
수아가 치, 하고 소리 냈다. 얼굴을 봤는데 표정이 뾰로통했다. 코웃음이 나왔다. 수아가 검지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오른손으로 잡으려 하는데 수아가 손을 교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무리 봐도 내 손을 비집어 넣을 공간은 없어서 포기했다.
“사진 찍어왔어.”
정시은이 스탠드를 성큼성큼 올라오면서 말했다. 수아 옆에 앉은 정시은이 폰으로 사진 두 개를 번갈아 보여줬다. 수아 옆에 바짝 붙어서 봤다. 푸드트럭 메뉴는 파니니랑 꼬치에 꽂은 그릴 소시지, 마약 옥수수가 있었다. 커피차는 그냥 이동형 카페였다.
“진짜 그냥 다 하나씩 주문해서 먹고 싶다. 그치 않아요?”
정시은이 내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니까. 근데 요리사분들 커피는 드신 거 같아?”
“아 맞다. 차에 컵 비워져있는 거 몇 개 봤어요. 커피차에서 나오던 컵이랑 같았어요.”
“으응.”
그럼 커피차로 커피는 확실히 마신 게 맞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안 가져다드려도 되는 게 맞나. 고민스러웠다.
“근데 아까 보니까 마약 옥수수 알갱이 다 분리해서 시즈닝 넣고 컵에 담아주더라고요.”
정시은이 말했다.
“그거 사이드로 하나 시키고 다 같이 나눠 먹는 거 어때요? 포크 여러 개 달라고 하고.”
“좋아요.”
수아가 흔쾌히 답했다.
“오빠도 먹을 거지?”
“응.”
“수아야 우리 소시지도 나눠 먹자.”
정시은이 말했다. 수아가 내키지 않는지 순간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바로 내렸다.
“넘 많지 않아요? 파니니 하나 다 먹는 것도 어려울 거 같은데.”
“내가 한 칠십 퍼 먹을게.”
“그래도 뭐 하나는 남기게 될 거 같은데...”
“그럼 둘이서 파니니 하나 시키고 그거 반 나눠서 먹는 건?”
내가 물었다. 수아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쏘아봤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왜 하냐고 추궁하는 듯했다.
“좋은 거 같아요. 그렇게 하자 수아야.”
정시은이 말했다.
“... 네.”
정시은이 히 웃고 왼팔로 수아를 안으며 기댔다.
“고마워. 기왕 다 나눠 먹기로 한 거 디저트도 나눠 먹지 않을래?”
“들어갈 배 있어요?”
“파니니 반만 먹으면 오히려 배고파지지 않을까 해서. 애초에 디저트는 막 그렇게 배부른 것도 아니잖아.”
“음...”
수아가 오른손 검지로 머리를 배배 돌렸다.
“뭐 먹게요?”
“츄러스나 크로플 생각 중. 너는?”
“츄러스 맛있을 거 같아요.”
정시은이 숨을 크게 삼키고 왼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츄러스 먹고 싶었는데.”
수아가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마주치고 나를 쳐다봤다.
“오빠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딱히. 파니니랑 옥수수 먹고 커피 하나 마심 충분할 거 같아서.”
“오빠 소식가예요?”
정시은이 물었다.
“아니? 솔직히 파니니 하나도 양 꽤 되지 않아?”
“으으응...”
어딘가 탐탁지는 않은데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디저트 하나 정도는 더 들어갈 수는 있을 거 같아도, 너무 다 탄수화물인 거 같아서.”
“그럼 소시지는요?”
“글쎄, 그건 당장은 안 당겨서.”
“그래도 다 먹어봐야 되지 않아요? 다시는 못 맛볼 수도 있는 건데.”
“아, 맞네.”
혹여 다음에 또 온다고 해도 왠지 강예린은 똑같은 메뉴를 가지고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못 먹는다면 나중에도 못 먹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한 입은 남겨줄게. 그럼 되지?”
수아가 말했다.
“고마워.”
“근데 그래도 문제 생길 수 있다?”
정시은이 말했다.
“마지막 한 입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더 먹고 싶은데 없는 거야.”
“그럼 세 입 정도 남겨주면 되겠네요.”
“그럼 너 먹을 게 완전 없지 않아?”
“츄러스까지 먹을 거 생각하면 뭐 하나는 남기게 될 거 같아서요.”
“으응... 나만 많이 먹는구나...”
피식 웃었다.
“아냐. 나도 입 터지는 날 오면 진짜 엄청 많이 먹어.”
“뭔 소리야.”
수아가 딴지 걸었다.
“그냥 평소에도 많이 먹잖아. 왜 아닌 척해.”
“미안해.”
정시은이 풋 웃었다.
“왜 사과해요.”
“뭔가 그래야 할 거 같아서.”
“이제 슬슬 가죠?”
수아가 말했다.
“아, 응.”
정시은이 말했다.
“그 전에 일단 둘 다 번호 좀 주세요.”
“우리 번호 교환 안 했었나?”
“안 했어요.”
번호를 빨리 나눴다. 정시은이 단톡방을 하나 만들어서 푸드트럭이랑 커피차 메뉴 사진을 보내왔다.
“치킨 로제 먹을래요?”
수아가 물었다.
“응. 좋아. 오빠는 파니니 뭐 먹을 거예요?”
“나 불고기.”
“네.”
정시은이 푸드트럭에서 주문할 메뉴를 정리해 올렸다. 각자 카페 메뉴를 하나씩 적었다.
“오빠는 디저트 진짜 안 먹어요?”
“크로플 먹어 오빠.”
수아가 말했다.
“무슨 크로플?”
“플레인.”
“응.”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밑으로 내려갔다.
“나눠 먹으려구?”
정시은이 물었다.
“일방적으로 뜯게요.”
수아가 답했다. 정시은이 과장되게 헉 소리를 냈다.
“완전 양아치다.”
“오빠 이런 거 좋아해서 괜찮아요.”
“휘둘리는 거?”
“대충 그런 거요.”
정시은이 미소 지었다.
“오빠가 진짜 귀여워 해주나 보다.”
“두 살 차인데 뭘 귀여워해요.”
수아가 퉁명스레 답했다. 정시은이 입꼬리를 올린 채 수아의 뒤에서 꼭 껴안았다.
“내가 봐도 너 엄청 귀여운데.”
정시은의 숨결이 왼 귀에 닿아서인지 수아가 목을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하지 마요...”
정시은이 헤 웃었다.
“알겠어.”
정시은이 수아를 놓아주고 옆에 서 나란히 걸었다. 잠깐이었지만 수아가 꼼짝 못 하는 모습은 또 신선했다.
나중에 귀를 간질여봐야겠다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