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화 〉 푸드트럭 (5)
* * *
강성연의 말대로 기립하고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강성연이 앞장서 걸었다. 나란히 서서 발을 맞췄다.
“다른 데 가서 앉자.”
강성연이 말했다.
“다른 데 어디?”
“사람 없는데.”
“... 촬영장 벗어나면 외부인들이 볼걸. 만에 하나기는 한데, 사진 찍힐지도 모르고. 너무 떨어지면 안 돼.”
“개 빡세네. 진짜 아예 아무도 없는 데 찾고 싶은데.”
욕심이 많았다. 그런데 내 눈에는 지금 보이는 벤치도 적당해 보였다. 나무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조금 가려지기도 하고, 외부인의 시선도 닿지 않을 곳이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아?”
“아예 사람 마주칠 가능성도 없는 데라 했잖아.”
“그건 현대사회에 불가능한 장소 조건 아닐까?”
“아니거든.”
강성연이 쏘아붙이면서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있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과도의 날을 뽑아 말없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뭐야?”
“너 배 안 불러?”
동문서답이네.
“더부룩하지는 않게 먹었어.”
“그럼 조금은 들어간다는 거지?”
강성연이 사과 깎는 데 집중하여 나는 보지도 않고 물었다.
“응.”
“어.”
사각사각 소리가 균일하게 들렸다. 깎아내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는데 껍질에 붙은 과육이 적었다. 급하게 깎을 줄 알았는데 알뜰한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꼼꼼한 성격인데 내가 잘 모르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내 주머니에서 봉투 좀 꺼내봐.”
“어디?”
“왼쪽. 바지 주머니.”
“응.”
눈으로 주머니가 있는 데를 찾고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부스럭거리는 걸 잡아 꺼냈다. 투명한 위생백이었다.
“벌려줘.”
“응.”
위쪽을 잡아 비벼서 틈을 만들고 양손으로 벌렸다. 강성연이 사과 껍질을 한 번 끊어서 집어넣고 마저 깎기 시작했다.
“답답해?”
“아니? 왜?”
“존나 지켜봐 가지고. 신경 쓰여서.”
“안대 쓰고 있을까?”
“개 오바 떨지 말고.”
강성연이 마침내 사과 껍질을 다 깎아 봉투에 넣고 조각을 하나 잘라서 나한테 건넸다. 그 노란 과육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강성연도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입 벌려.”
입을 벌렸다. 강성연이 사과 조각을 집어넣었다. 입을 다물고 오물오물 씹었다. 입 안에 퍼지는 과즙이 내가 진짜로 강성연이 직접 깎은 사과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강성연이 또 한 조각을 뚝 잘라내고 나를 봤다.
“꼭 먹여줘야 먹을 거야?”
“아니. 당황스러워서.”
왼손으로 사과 조각을 받았다.
“근데 뭐야?”
“사과 준 거잖아.”
“그니까.”
“너 병문안 왔을 때. 그거 사과 내가 거절했었으니까. 이번엔 내가 이것저것 미안한 거 다 사과한다고...”
“으응.”
“넌 이미 받은 거다.”
웃음이 나왔다. 새 사과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응.”
“... 이제 더 안 먹을 거지?”
“아냐. 다 먹을게.”
강성연이 손에 쥔 사과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강성연이 과도를 접고 주머니에 넣었다. 이빨로 사과를 베어 물면서 먹었다. 과즙이 달콤했다. 그냥 과일 하나 먹는 것뿐인데 자꾸 웃음이 나와서 코로 흥흥거렸다.
“... 웃지 마라.”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겠어. 근데 이거 맛있는 사과다.”
“응.”
“반응이 싱거운데.”
“맛있는 거도 줬는데 반응까지 재밌어야 돼?”
“아니. 고마워.”
“... 근데 너 뭐 배 다 차면 연기 안 된다거나 해서 좀 부족하게 먹은 거 아냐?”
“아냐. 그런 징크스 같은 거 없어.”
“다행이네.”
“트럭 안에 사과는 또 없어?”
“왜?”
“한 알만 줘. 칼도.”
“나한테 주게?”
“응.”
“아냐. 그냥 지금 남은 거 줘.”
한 입 더 베어 물려는 걸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안 찜찜해?”
“괜찮아. 음료수 입 안 대고 마시는 거랑 비슷한 거지 뭐.”
이번에는 강성연이 내 손에서 과일을 뺏어가 조심조심 돌려먹었다. 세 번째로 베어무는데 입가로 과즙이 새어 나와서 강성연이 급히 고개를 숙이고 왼손으로 밑을 받쳤다.
“흘리고 먹네.”
강성연이 킥킥 웃다가 고개를 들고 씹던 걸 삼킨 다음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좆 까.”
“근데 계속 간접 키스하는 건데 괜찮아?”
“닥쳐.”
강성연이 내 이빨 자국을 피해 계속 파먹었다.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뭐?”
“이빨은 안 닿았을 데도 입술은 살짝 닿았을 거라는 거.”
“아. 씨발. 그렇네.”
강성연의 표정이 심각했다. 아직 삼키지 않은 사과가 있어서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게 괜히 귀여웠다.
“양치 열심히 해.”
강성연이 사과를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럴 거야.”
“응.”
강성연이 과육이 남은 사과를 응시하다가 오른발 끝을 들었다 내리며 땅을 두드렸다.
“근데 너 나한테도 아직 미안해?”
“... 그치.”
“안 그래도 돼.”
“응.”
“...”
“그리고, 앞으로 억지로 친한 척 안 해도 돼. 뭐 미안해서 죄책감으로 잘해주고 그러는 거 나는 좀 그렇거든. 진짜로...”
말을 마친 강성연이 사과의 남은 과육을 크게 크게 베어 물고는 사과 심지를 위생백에 넣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구기듯 해서 부피를 줄인 다음 오른 주머니에 넣었다.
강성연이 사과를 으적으적 씹으면서 두 손을 양쪽 주머니에 푹 쑤셔 넣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알 수 없이 침울했다. 뭐라도 말을 건네야 할 듯한데, 쉬이 건드리기 어려웠다.
강성연이 사과를 삼키고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가 원래 친해서, 그래서 비 오고 땅 굳는 것처럼 사이 봉합하고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넌 아니었었구나...”
목멘 소리였다. 강성연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이젠 정말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냥 속죄하는 것처럼, 의무감으로 나한테 친한 체하고 그랬구나...‘
강성연이 말을 맺고 눈물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느꼈다.
당황스러웠다. 지금 상황에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몰랐다. 강성연을 품에 끌어들이고 조심스레 다독였다. 강성연이 내 두 팔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손아귀가 꽤 억세게 조여왔다. 강성연이 얼마나 힘주고 견뎌왔는지가 조금이나마 짐작되는 듯했다.
왼어깨 어림이 따스했다. 눈물이 차츰 번져가는 게 느껴졌다. 가슴에 무거운 게 얹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나 존나 비참해... 좋아하는 애는, 읍... 나랑 말도 안 섞으려 하고... 반친구도 없고... 친한 친구였던 앤, 끅... 내가 병신 짓해서 이제는 의무감으로 나 대하고... 윽... 씨발...”
“의무감으로 안 대해. 같이한 시간이 얼만데.”
“1년 반도, 윽... 안 되잖아... 존나 십년지기한테도 못 할, 끕... 존나 오글거리는 말을 하고 있어...”
맞는 말이었다. 능청스레 넘기고 싶은데 말이 도저히 안 나왔다.
“... 씨발... 윽... 또 분위기 조졌네...”
위험했다. 이 상황에 웃어서는 안 됐다.
“나 진짜 어떡해야 돼...? 존나 할 줄 아는 거, 끅, 하나도 없는 개병신인데.., 분위기만 초치는 씹새끼인데... 계속 살아야 돼...?”
“당연히 살아야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끕... 내가 살아서 뭐하는데.”
“많지. 너무 많지. 열여덟 살이잖아, 우리. 살 날이 얼마나 많은데. 그동안 할 게 없겠어? 고등학교가 끝인 것도 아니고. 대학교 들어가면 거기도 다른 사람 많을 거고. 사회 나가도 그럴 건데.”
“근데, 윽... 만나는 사람들이 정시은 같은 사람들이면?”
“시은이가 왜?”
“존나 처음 보는데, 윽, 불편하게 무슨 관계인지 캐묻고. 네가 나 여자로도 안 볼 거라는 말 슬슬 유도해서 쐐기 박고.”
“그런 말은 안 했잖아.”
“했거든? 끕... 네가 바보라서 모르는 거지.”
“그냥 순수하게 의견 물어본 거일 수 있잖아.”
“애매하게 가까이 붙어 앉아서, 윽, 신경 쓰이게 하던 거, 내가 알고는 있어서 다행이라고 꼽준 거는?”
“그건, 정시은이 자기도 모르게 너한테 눈치 준 것처럼 말하게 돼서 네가 움직인 건 줄 알고 당황했는데, 마침 너도 생각하고 있던 거를 행동으로 옮긴 거라 다행이라고 한 거일 거야.”
강성연이 끅, 하고 소리 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내가 주디스 버틀러 얘기했을 때 궁금하다고 물어본 건? 그건 내가 진짜로 아는지 모르는지, 끅, 시험한 거잖아.”
“아닐 거야. 너무 생각하지 마. 사람들은 생각보다 별다른 속뜻 없이 말하고 행동하니까. 너무 상상하고 해석하려 들면 너만 애달파져.”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악의적으로 나올 수 있다고?”
“악의적이지 않았어. 시은이가 오해를 사기 쉬운 성격이긴 한 거 같아. 어둠 없이 자랐다고 해야 하나. 막내라서 선 조금 넘어도 다들 봐주거나 했든가. 이렇게 아무 근거 없이 추측하는 건 안 좋은데, 아무튼 그 애가 선에 대한 감각이 조금 모자란 거 같기는 해. 그런데 네 생각대로 나쁜 애인 건 아니야. 오히려 순진할 뿐이지.”
“너 지금 순수악 말하는 거 아냐?”
“아냐. 시은이는 착해.”
“그럼. 난 비틀리고 꼬여서 착한 애가 친근하게 다가온 거에 혼자 피해망상걸리고 질질 짜는 쓰레기라는 거야?”
“아니야. 넌 상처받았을 뿐이야. 아직 미성숙해서 그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몰라서 아파하는 거고.”
“넌 존나, 윽, 성숙한 것처럼 말한다?”
“글쎄. 몸은 크다는 얘긴 들었어.”
“존나 유치해...”
“그럼 나도 미성숙한가 봐.”
“병신...”
“욕은 해도 좋은데 일단 좀 웃어 봐.”
“진짜 병신... 멘트 존나 구려... 그럼 내가 웃을 거 같아?”
“살짝 웃음기 있었는데.”
“끅, 착각이거든.”
“그래.”
“그래 이 지랄...”
“자꾸 너한테 호의적인 사람한테 그렇게 틱틱대지 마. 그러다가 너한테 안 좋은 마음 먹고 접근하는 사람만 남아.”
“그럼 넌 나한테 뭔데...? 윽...”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 네가 나한테 했던 짓들 생각하면, 윽... 그냥 나쁜 새끼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왜 나한테 기대고 있는 건데?”
“... 쓰레기 새끼...”
“왜.”
“비꼬았잖아... 아무리 미워도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고...”
“그렇게 로맨틱한 말은 안 했는데?”
강성연이 피식 웃었다. 이제 딸꾹질은 조금 나아진 느낌이었다. 나도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개새끼...”
“웃었네.”
“기가 차서 웃은 거거든.”
“그래도 내가 이겼어.”
“그럼 뭐 더 웃기려고 시도 안 해?”
“응. 자신 없거든.”
“개병신... 그러면서 지수는 어떻게 꼬신 거야.”
“꼬셨다니.”
“걔 너 존나 좋아하잖아.”
“...”
“존나 그걸 몰랐어?”
“뭐...”
“좆 병신...”
헛웃음 지었다. 강성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순간 달큼한 향이 밀려들었다. 정신 차렸을 때는 사과맛 입술이 맞닿아 있었다. 가느다란 혀가 내 입술을 두드렸다. 강성연이 여전히 내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양손으로 강성연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돌렸다. 강성연이 쿡쿡 웃으면서 팔을 놓고 몸을 뒤로 물렸다.
“야.”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강성연의 웃음소리가 고막을 톡톡 건드렸다. 조심히 고개 돌려 강성연을 바라봤다. 눈물 어린 미소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 연약함이 아련한 무상감과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 같았다.
금방 내게 맞닿았던 선홍빛 입술이 벌어졌다.
“너랑 백지수 둘이 사귀어도 첫키스는 내가 뺏은 거다.”
겨우 그런 이유로 기습키스를 한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넌 첫키스 아냐?”
“네 첫키스 뺏은 건데 내 첫키스쯤 헌납해줘야지.”
“...”
순진한 건지 악독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기왕이면 오늘 가서 지수랑 키스해줘. 나랑 간접키스 되게.”
“미쳤구나, 너.”
“그거 정신 온전치 않은 애한테 하기 좋은 말은 아니야.”
“나도 알아.”
강성연이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는지 눈만 크게 떴다. 이윽고 눈꼬리가 휘어졌다. 강성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쿡쿡거렸다.
“진짜 미친 새끼...”
“또 웃었네.”
“꺼져...”
강성연이 한동안 웃다가 얼굴을 쓸어내리고 한숨을 폭 내쉰 뒤 일어났다. 표정이 한결 개운해 보였다.
“넌 좀 이따 나와.”
“너 지금 가도 돼?”
“음? 아.”
“내가 먼저 갈게.”
“응.”
강성연이 도로 앉으려 몸을 낮추다 순간 비틀거리더니 왼손으로 등받이를 잡아 균형을 잡았다.
“괜찮아?”
“어...”
강성연이 제대로 벤치에 앉았다. 그냥 가는 게 맞나 순간적으로 고민했다가 표정이 괜찮은 걸 다시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향했다.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강성연은 지금 무슨 생각 할까? 다음에 날 볼 때 어떡하려고 기습키스를 박았을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 미칠 것 같았다.
문득 수아가 강성연을 두고 바이 아니냐고 했던 게 떠올랐다. 지수는 그럴 수 있다고 답했는데. 만약에 강성연이 정말로 바이라면 방금 키스는 단순히 심술을 부린 것만이 아닐지 몰랐다.
그런데 서로 쌓아온 무시 못 할 악연이 있는데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솔직히 좀 허무맹랑한 것도 같았다. 동성애자로서 깊이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한 것을 생각하면 역시 레즈라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설령 바이라고 해도 이성에게 느끼는 끌림은 희박할 게 분명했다. 여태껏 나를 경쟁상대로서 더 의식해왔었으니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폰을 꺼냈다. 강성연한테서 문자가 온 거였다. 알림바를 내려 미리 보기로 내용을 확인했다.
[평일에 엄마 한 번 더 촬영장으로 올 거야]
강성연은 안 오는 건가. 학교에 가야 하니 당연히 못 올 거였다.
답장 보내야 하는데. 뭐라고 할까. 갑자기 강성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막막해졌다. 어색한 건 싫은데 당장은 그리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일단 눌러서 메시지함으로 들어가고 키패드를 열었다. 고민할 틈이 없게 빠르게 타자 치고 전송했다.
[알겠어 고마워]
바로 숫자가 사라졌다.
[어]
답장을 보고 화면을 껐다. 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오는 걸 막아줄 수는 없겠느냐고 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시일이 가까우면 이미 협의가 되었을 테니 계획을 물리는 것도 어려울 거였다. 그냥 알겠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였다.
아, 분명 사과도 제대로 다시 하고 감정까지 해소돼서 다 잘 풀린 게 되었어야 했는데. 왜 입술을 들이대서는.
작게 한숨 쉬었다. 촬영에 또 들어가야 하니 지금은 이걸로 고민할 게 아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