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430화 (429/438)

〈 430화 〉 촬영 재개

* * *

승합차 문을 열어 수아랑 올라탔다. 김민준이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우리도 벨트를 착용했다. 차 밖에서 윤가영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응.”

수아가 미소 짓고 내 왼허벅지에 오른손을 올리더니 차창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윤가영에게 왼손을 흔들었다. 윤가영은 오늘 들어갈 신이 없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이따 봐요.”

“응.”

윤가영이 김민준한테도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했다. 김민준이 고개를 꾸벅이면서 네, 하고 답했다. 이내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저 가면서 대본 좀 읽어도 돼요?”

수아가 물었다.

“어, 응. 읽어.”

김민준이 답했다. 수아가 대본집을 펼치고 내려봤다. 나도 말없이 대본을 뒤졌다. 중간에 대사를 잊어서 막혀버리면 면목이 없게 될 거였다. 촬영이 최대한 원활하게 이어지도록 준비해둬야 했다.

“얘들아, 다 왔어.”

고개 들었다. 차창 밖으로 멀리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익숙한 촬영장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고, 걸어가면서 보이는 스태프 모두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분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세팅 받고 메이크업을 받았다. 코디분들 손이 분주했다. 최대한 빨리하라고 언질이라도 된 듯했다. 괜히 긴장됐다. 교복 와이셔츠를 입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찍을 신의 대본을 살핀 다음 카메라 앞에 섰다. 오지윤 감독이 스태프들에게 무어라 지시하고 카메라 앞에 슬레이트가 들어왔다. 얼마 안 가 큐 사인이 떨어졌다.

*

“컷! 오케이.”

오지윤 감독 목소리였다. 살짝 허탈감이 들었다. 몰입이 필요한 신이 끝나고 나면 꼭 이랬다. 터덜터덜 걸어가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진행팀 스태프 한 명이 이쪽으로 급히 왔다.

“감독님, 밥차 왔는데요.”

“그래요? 잠깐 점심 먹고 다시 들어가죠.”

스태프들이 네, 하고 답했다. 탈력감에 젖은 한숨 소리도 미세하게 들렸다. 수아가 자연스레 내 옆에 와서 내 오른팔을 잡고 슬며시 팔짱 껴왔다.

“좀 이따 가자.”

“왜?”

“사람 많아서.”

“그래.”

수아를 신경 쓰면서 스태프분들이랑 밥차로 향하는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수아가 팔짱을 느슨하게 풀어 왼손목을 내 팔에 걸치기만 했다. 얼마 안 가 한 손에 컵스테이크를 들고 유유히 걸어오는 사람이 나왔다. 풍기는 냄새랑 겉으로 보이는 내용물이 상당히 그럴싸했다. 스태프 한 명이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 기웃거렸다.

“뭐예요?”

“스테이크요. 다른 종류도 몇 개 있더라구요. 빨리 가서 먹어요.”

“예.”

컵을 든 여스태프가 일회용 포크로 스테이크 한 조각 찍어 입에 넣었다. 간단하게 질의를 한 스태프가 다급히 밥차로의 행렬에 동참했다.

“온유야 뭐해?”

뒤에서 들린 소리였다. 수아가 조용히 왼손목을 뺐다. 고개 돌려 봤는데 나한테 말을 건 정서아하고 정시은이 같이 서 있었다.

“그냥 사람 좀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중.”

“으응. 일단 뭐 있는지 확인하러 가보자.”

“아직 많을 건데 좀만 더 있다가 가요.”

수아가 말했다. 정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시은이 입을 열었다.

“근데 팔짱 끼고 있던 거예요?”

“어? 응.”

“왜요 왜요?”

“그냥 사람 많을 거니까 이따 가자고 했는데, 스태프분들 사이에서 빠져나갈 때 미아 안 되게 잡기라도 하고 있으래서 손목만 걸쳐두고 있었어요.”

수아가 말했다. 정시은이 우워어오,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반응이야.”

“뭔가 설레서요.”

“뭐 어느 지점이?”

“그냥 윤우 캐릭터랑 좀 갭 느껴져서요. 윤우는 극극 소심남인데 오빤 뭔가 직진남st여서.”

“여동생 챙긴 건데 직진남이 나올 건 아니지 않아.”

“그냥 그런 느낌이 왔어요. 안 둘러대고 팔짱 꼈다고 바로 인정하는 것도 박력 있었구.”

“아냐. 나 되게 소심해.”

“진짜 소심한 사람을 오빠가 몰라서 그래요.”

정시은이 정서아의 뒤로 가 두 손을 양볼에 댔다.

“우리 언니가 진짜 소심한 타입인데.”

정서아가 귀찮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오른손을 뒤로 해 검지로 정시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정시은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뭔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언니 소심한 거 맞잖아. 온유 오빠 번호 물어보는 것도 되게 어려워 했으면서.”

“너 진짜 죽을래?”

정시은이 에헤헤 웃으면서 잽싸게 내 뒤로 와 양손으로 옷자락을 잡았다.

“언니 좀 막아주세요 오빠.”

“뭘 막아. 안 때릴 테니까 그냥 와.”

“약속?”

“약속.”

정서아가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정시은이 서서히 다가가 새끼손가락을 마주 내밀었다. 정서아가 고리를 걸고는 정시은에게 다가가 왼손으로 등을 찰싹 때렸다.

“아!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는 너고.”

“내가 뭔 거짓말했는데.”

“나 안 소심한데 소심하다고 그랬잖아.”

“맞는 말 한 건데 왜.”

“또 맞을래?”

“아니?”

“그럼 그만해라.”

“알겠어.”

잠잠히 듣고 있던 수아가 입을 열었다.

“시은 언니는 근데 느낌이 저보다 더 우리 오빠한테 오빠 소리 많이 하는 거 같아요.”

“그래? 넌 평소에 오빠라고 안 불러?”

“오빠라고 하긴 하죠. 근데 그냥 야라고 하거나 이름 부를 때도 있어 가지구.”

“으응, 나는 언니들보고 그냥 언니라고 하는데.”

“남매는 서로 그렇게 호칭하는 사람 많대.”

정서아가 대신 답했다.

“언니 드라마 같은 창작물만 보면서 어떻게 알아?”

정서아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정시은을 봤다.

“아무리 허구여도 현실은 담거든? 가끔 실제랑 되게 동떨어진 이상한 거 껴있긴 해도 많이 볼수록 큰 수의 법칙 적용돼서 뭐가 평균적인 건지 알게 돼.”

정시은이 고개를 주억였다.

“응... 맨날 느끼는 건데 언니는 놀리는 맛이 되게 좋은 거 같아.”

“... 진짜 너 언제 내가 조져버릴 거야...”

“어휘 조심해야죠 작가님.”

“하...”

정서아가 고개를 돌렸다. 정시은이 히히 웃으면서 정서아를 껴안았다. 정서아가 오른팔로 정시은을 안았다. 귀찮지만 귀엽긴 한 나이 터울 많은 사촌 동생을 돌보는 언니 느낌이 났다.

“너 되게 힘들겠다.”

“어. 죽을 거 같애 집 가면. 이슬 언니까지 있어 가지고.”

“와.”

절로 감탄이 나왔다. 매일 정이슬이랑 정시은 사이에 껴서 있는 걸 떠올리자마자 감당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상상돼?”

“어. 어지러워. 상상만 했는데.”

“그치. 나 대본 쓸 때도 집중하기 너무 힘들었어. 둘 다 엄청 산만해서.”

“응. 네가 사실상 정신적 맏언니였겠다.”

“음. 근데 그건 또 아니야. 이슬 언니가 할 땐 또 해서.”

“오히려 둘째 언니가 제일 유치할 때도 많아요. 덕질하는 거에 흥분 못 감추는 것도 그렇고. 오빠 번호 받았을 때도 무슨 자랑...”

정서아가 두 손으로 정시은의 양 볼을 꾹 눌렀다.

“그만해라.”

“웅.”

정서아가 손을 뗐다.

“슬슬 가는 거 어때?”

“네. 좋아요.”

수아가 답했다. 사람들이 몰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근데 넌 수아 어케 불러?”

정서아가 물었다.

“그냥 이름 부르지. 이수아라고.”

“동생아, 그렇게는 안 불러?”

“응. 좀 이상해 뭔가, 그렇게 부르는 건.”

“그래? 그렇게 이상한가.”

“그럼 여동생아, 이렇게 부르는 거는 어때요?”

정시은이 물었다.

“뭔가 느낌이 좀 ai인데?”

“그니까요. 그게 좋지 않아요? 언뜻 들으면 무심한 듯하지만, 사실 오직 한 대상만을 생각하고 지시하는 호칭? 한국에 이수아라는 이름은 찾아보면 몇 명 있을 건데, 내 여동생은 딱 하나니까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정한. 무뚝뚝한 츤데레 느낌의 호칭인 거죠.”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그럴싸하지 않아요?”

“들어보니까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난 수아가 좋은 거 같아.”

큽, 하고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정서아였다.

“아 미안.”

“아냐.”

고개 저었다. 곱씹어 보니 맥락 없이 들으면 낯부끄럽게도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괜히 창피했다. 푸드트럭 주문을 위해 선 행렬의 뒤에 서서 메뉴를 보기 위해 고개를 쳐들었다.

오픈된 푸드트럭 위 전광판에 ‘겁쟁이둘 배우 & 스태프분들 파이팅’이라고 쓰여 있었다. 푸트트럭 안에 사람 다섯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에는 위생복을 입은 남자 둘이랑 여자 셋이 있었는데, 여자 두 명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강성연하고 강예린이었다. 보자마자 얼떨떨했다.

왜 여깄지? 진짜 왜 왔을까. 머리가 잘 안 돌아갔다. 그냥 질문만 맴돌았다.

수아가 내 왼소매를 한번 끌었다. 고개 돌려 눈을 마주쳤다. 수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안에 그 사람 아니야?”

“어... 맞아.”

“누구요?”

정시은이 물었다.

“그냥 안에 내 친구랑 친구 어머니 있어서.”

“헐. 오빠 응원한다고 직접 온 거예요?”

“그런 거 같은데...?”

“뭐예요 반응? 오빠도 오는지 몰랐어요?”

“응...”

“대박.”

“그 친구라는 사람이 여자친구야? 아님 아직 썸?”

정서아가 대뜸 물었다.

“아뇨?”

이수아가 대신 답했다.

“오빠 그냥 친구도 없어요.”

정서아가 픽 웃었다.

“그건 아닐걸. 뭐 일단 이성적인 관곈 아닌 거지?”

“응.”

내가 답했다.

“근데 여기까지 직접 올 정도면 최소한 감정은 있는 거 같은데...”

“그건 아닐 거야. 그냥 한 번 싸웠다가 다시 친해져서 서로 죄책감 같은 거 있어 가지고, 평소에 서로 괜히 의식하고 잘해주려 하다 보니까 지금 또 온 거 같아.”

“으응, 서사가 있구나...”

정서아가 납득한 듯 답하고 푸드트럭 쪽을 봤다. 뭔가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 듯했다.

굳이 따지면 강성연 말고도 강예린까지 나한테 보상해주려는 심리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까지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거였다.

“무슨 일 있었는지 알려주면 안 돼요?”

정시은이 말했다. 고개 저었다.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니어서.”

“아, 네...”

“메뉴나 생각해두자.”

“좋아요.”

정시은이 메뉴판을 보려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빼 들었다. 그냥 읽어달라고 하면 될 거였는데. 행동거지가 귀여운 애였다. 나도 메뉴판을 보는 척하다가 컵스테이크를 먹어야겠다 대충 정하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한 번 쓸었다.

마주하고서 대체 뭔 말을 해야 할까. 그보다 강성연은 나랑 마주하면 뭔 말을 할지 생각은 해뒀을까. 아마 했겠지. 아니 분명 했겠지. 그리 생각하니 좀 치사하다 싶었다. 미리 연락은 해줬어야 할 건데. 이따 올 거면 왜 나한테 미리 연락을 안 했냐고 한마디 해야 할 거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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