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화 〉 삼우제를 치르고
* * *
당숙 아저씨의 차를 타고 산소로 갔다. 장례식 때 봤던 다른 친척분도 몇 명 있었다. 친척분들이 계셔서 삼우제 제사상은 빠르게 차려졌다. 삼우제를 치르고 잠시 산 공기를 마신 다음 하산했다.
가파른 산길에서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왠지 여기에 다시는 안 오지는 않을 듯했다.
친척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차에 올랐다. 우리도 연방 인사를 하다가 당숙 아저씨 차 뒷좌석에 올랐다. 당숙 아저씨가 운전석에 앉고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로 아저씨의 얼굴을 보는데 살짝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산소 가볼래 온유야?”
잠시 고민하다 왼편을 봤다. 윤가영이랑 수아가 눈을 마주쳐왔다.
“오빠 마음대로 해.”
“가고 싶으면 가자, 온유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래요.”
“주소는 어딘지 아니?”
“제가 알아요.”
윤가영이 말했다. 당숙 아저씨가 폰을 꺼내고 윤가영한테 건넸다.
“주소 좀 찍어줘요.”
“네.”
윤가영이 주소를 기입하고 폰을 돌려줬다. 당숙 아저씨가 폰을 거치대에 놓고 내비게이션으로 쓰며 운전했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네.”
“그래요?”
내가 물었다.
“응. 한숨 자고 일어나면 도착하겠어.”
“당신은 자면 안 돼죠.”
당숙 아주머니가 타박했다. 당숙 아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렇네. 맞지.”
아저씨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차창을 내다봤다. 풍광이 눈에 잘 안 들어왔다. 그냥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드라마 촬영을 재개해야 했다. 장례식으로 꽤 장시간 텀을 뒀으니 일정이 보다 빠듯해질 터였다. 그러면 지수랑 선우하고 있을 시간이 줄어들게 될 거였다. 게다가 지수랑 선우하고는 윤가영이나 수아처럼 촬영장에서 마주치지도 못할 테니까 공백이 더 크게 느껴질 거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별장으로 가야 할 듯했다.
그런데 촬영일로 되게 바빠지면 유은이는 어떡하지. 도와달라고 할 때 제대로 도와주는 게 가능할까. 나를 대신해줄 사람을 구할 수도 없을 텐데.
머리가 아팠다. 유은이가 필요로 하는 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에 유은이가 맞춰야 할 판국이었다. 그냥 운 좋게 내가 도울 수 있는 때로 타이밍이 맞기를 바라야 했다.
“오빠 자?”
“아니.”
“자고 싶으면 자.”
당숙 아저씨 목소리였다. 기껏 나를 위해 시간을 내고 운전까지 해주시는데 내가 자도 될까.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아뇨, 저 지금 안 졸려요.”
눈을 뜨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어제 본 시험 얘기, 밴드부, 찍고 있는 드라마 등을 소재로 얘기를 나눴다. 수아랑 윤가영도 적절히 말을 섞었다. 내 쪽에서 할 말이 떨어지자 당숙 아주머니 아저씨가 자기 자식들 얘기를 꺼냈다. 두 분 다 말주변이 좋아서 도착하기까지 이야기가 끊기지 않았다.
정차하고 다들 밖으로 나왔다. 올라가는 길에 커다란 문이 잠겨 있었다. 과거에 외가 친척분들이 근처 간이 창고에서 열쇠를 찾아 연 것을 떠올리고 똑같은 곳에서 열쇠를 찾아 열었다. 납골묘가 있는 곳까지 다 같이 올라갔다.
캔콜라를 땄다. 종이컵에 조금 붓고 납골묘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는 술을 마시기는 했어도 즐긴 적은 없었다. 마셔야 할 때만 마실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윤가영이 왼편에 와 말없이 나를 안고 내 등을 쓸었다. 윤가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내 눈가에 닿은 윤가영의 옷깃이 뜨거운 물로 천천히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윤가영의 품은 내가 의식하려 하지 않았던 그리움을 자극했다.
눈물이 그치고 나서도 잠시 그대로 안겨 있었다. 어떻게 떨어져야 할지 잘 알 수 없기도 했고, 이대로 품에서 벗어나고 나면 다시는 지금의 감각을 못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아서였다.
풀이 자란 땅 위로 종이컵 속 콜라를 뿌렸다. 당숙 아저씨 아주머니한테 잠깐 숨 좀 돌리게 돌아다니겠다고 말하고 산소를 걸었다. 윤가영이랑 수아가 옆에 나란히 걸었다.
“내일부터 바로 촬영이네.”
수아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언니들 오늘 안 봐도 돼? 촬영 바빠지면 잘 못 볼 텐데.”
“응... 이따 별장으로 가도 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네가 먼저 말했네.”
“일단 하기는 해야 되는 얘기니까.”
“으응... 고마워.”
수아가 살폿 웃었다.
“됐어.”
조금 더 걷다가 당숙 아주머니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다 같이 하산했다. 문을 잠가 열쇠가 숨겨져 있던 곳에 도로 놓은 다음 차에 탔다.
차 안은 따스했다. 차가 나아가면서 높지 않은 방지턱을 지날 때면 살짝살짝 들썩거렸는데, 그 움직임 덕에 내부가 모종의 요람처럼 느껴졌다. 나른해서 절로 눈이 감겼다.
일어났을 때는 서울이었다. 눈을 비비고 폰을 켜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역이 가까이 있었다. 적당히 보다가 이쯤에서 내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친구 만나니?”
당숙 아저씨가 말했다.
“네.”
“그래. 주말이었지.”
차가 길목에 멈춰섰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막 연락해야 된다거나 하는 부담은 가지지 마.”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응.”
“그래.”
“이따 봐.”
수아가 말했다.
“응.”
“잘 가.”
윤가영이 말했다.
“네.”
차에서 내리고 문을 닫았다. 도로를 걷다가 당숙 아저씨의 차가 떠나는 걸 보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지도 앱을 켜고 도착지를 지수 별장으로 찍었다.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리고 버스로 갈아타 좌석에 앉았다. 오른 주머니 속 폰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뭔가 사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내렸다. 폰을 꺼내서 지수한테 메시지 보냈다.
[나 지금 버스 타고 별장 가는 중인데 안에 있어?]
숫자가 금방 사라졌다. 말줄임표가 떴다.
[응. 안에 있어]
[뭐 사갈까?]
[걍 빨리 와]
[알겠어]
버스에서 내리고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만 두 개 샀다. 대문 앞에 서서 왼주머니를 뒤지는데 열쇠가 없었다. 폰을 꺼내 지수한테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두 번 가고 바로 연결됐다.
“여보세요.”
ㅡ왜?
“나 열쇠 없어.”
ㅡ어. 기다려.
전화가 끊겼다. 닫힌 문 앞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주인이 오기만을 바라는 개가 된 느낌이었다. 이내 대문이 열렸다. 지수가 나를 올려봐 왔다. 단발이 조금 길어졌는지 끈으로 꽁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옷차림도 흰 민소매에 하얀 카디건, 검은 돌핀 팬츠에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남한테 잘 보여주지는 않을 편한 복장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지수가 왼손으로 내 소맷자락을 끌어 안에 들였다.
“빨리 들어와.”
“응.”
지수가 대문을 닫았다. 왼손에 있는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지수가 고개 저었다.
“아냐 일단 네가 들어.”
“알겠어.”
지수가 몸을 돌리고 걸어가서 현관문 앞에 있는 잿더미를 품에 안아 들었다. 안겨 있는 게 꽤 익숙한지 잿더미는 버둥거리지 않았다.
“문 열어줘.”
“응.”
현관문이랑 유리문을 열고 신발을 벗었다. 잿더미를 안은 지수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아 잠그고 주방으로 갔다. 잿더미가 얌전히 앉아서 지수가 선반에서 참치캔을 꺼내 까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지수가 참치캔을 잿더미 앞에 내려놓았다. 지수가 앉을 의자도 함께 꺼내면서 자리에 앉아 잿더미가 챱챱 소리를 내며 참치를 먹는 모습을 바라봤다. 지수가 내 옆에 앉아 같이 바라봤다.
“나 얘 요즘 잘 못 본다.”
“으응...”
지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너 촬영 언제부터 다시 해?”
“내일부터.”
“... 너 여기서 일 더 바빠지면 어떡해? 잿더미는 그래도 가끔은 오는데 넌 아예 안 보이게 되는 거 아냐?”
“그렇지는 않을 거야.”
“적당히 조절할 거지?”
“응.”
“그럼 됐어.”
지수가 다시 잿더미를 봤다. 잿더미는 벌써 반절 넘게 먹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오는 건 뭔 매너야? 얘기는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미안해. 마음이급했나 봐.”
“아니 뭐 미안할 건 아냐...”
지수가 멋쩍은 듯 말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지수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너는 여자친구가 나 만나기 전에 좀 꾸며줬으면 좋겠다 이런 거 없어?”
“난 지금 너 너무 좋은데.”
“음...?”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인 거 같아서. 그게 좋아.”
“치...”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잿더미가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은 캔을 들어 물을 조금 담고 다시 내려놓았다. 잿더미가 또 고개를 숙여 분홍빛 혀를 내빼며 물을 약간 마시고는 그대로 러그에 배를 깔며 드러누웠다. 지수가 피식 웃고 캔을 치운 다음 잿더미를 안아 들었다.
“올라가자.”
“응.”
바나나 우유를 들고 지수를 따라갔다. 2층에서 지수를 앞질러 방문을 열어주고 안에 들어가게 한 다음 문을 닫았다. 선우는 안 보이는 게 오늘은 없는 모양이었다. 지수가 침대에 잿더미를 내려놓고 그대로 누웠다. 협탁에 바나나 우유를 두고 지수 반대편으로 가 나도 누워서 잿더미를 사이에 끼웠다. 배를 까고 누운 잿더미가 고개 돌려 나를 봤다가 다시 지수를 멀뚱멀뚱 올려봤다. 지수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잿더미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잿더미 되게 당연하게 눕는다.”
내가 말했다.
“완전 너 같아.”
“그래도 난 항상 감사해해.”
“그래?”
“응. 물론 잿더미도 고마워하긴 할 텐데, 그래도 표현은 못 하니까 내가 좀 더 낫지 않아?”
“네가 잿더미만큼 귀엽지는 않잖아.”
“그 부분만 빼고.”
“다른 건 다 네가 이긴다?”
“응.”
지수가 픽 웃었다.
“무슨 자신감이야...”
마주 웃고 오른팔을 뻗어 지수를 안았다. 지수가 잿더미를 잡아 등 뒤로 옮기고 내 몸에 밀착해 나를 마주 안았다. 가슴팍에 지수의 이마가 닿았다. 지수의 입김이 간지러웠다.
“왜 오늘 선우 없냐고 안 물어봐?”
“그냥 부모님 도우러 갔겠지 싶기도 하고, 간만에 둘이서만 있는데 물어보면 좋아하진 않을 거 같아서.”
“으응...”
지수가 잠깐 그대로 나를 안고 있다가 잿더미가 골골거릴 때 등을 돌리고 오른손으로 잿더미를 쓰다듬었다.
“나 안아줘.”
“응.”
지수의 몸에 밀착하고 오른팔로 끌어안았다.
“반대로 선우랑만 있고 나 없을 때는 나 어딨냐고 찾을 거야?”
어떤 답변을 바라고 질문하는 걸까.
“그러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왜? 내 명의로 된 곳이니까?”
“응.”
“그럼 여기 말고 뭐 어디 나가서 둘이서만 있을 때는 나 찾을 거야?”
답하기 난감한 질문이었다. 솔직히 그러는 건 선우한테 너무한 짓이었다. 이미 내가 여자친구를 여럿 두고 있는 게 모두한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로. 맨날 너 생각하고 찾고 있어.”
“꼭 나만?”
“... 어머니도 생각해.”
“... 너무 잘 빠져나가는 거 아냐?”
머쓱하게 웃었다. 지수가 다시 몸을 돌려 내 가슴팍에 이마를 대며 꼬옥 안아왔다.
“얄미워... 짜증나...”
“미안해.”
지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수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사랑해.”
“... 나도...”
작은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이불 안이 따스했다. 지수에게 안겨 있으면 안락하고 포근했다.
“따뜻하다...”
지수가 말했다.
“그니까.”
“지금 좀 졸려...”
“같이 자자, 잿더미처럼.”
“... 근데 바나나 우유는 어떡해...?”
“음, 안 시원해져서 별로 맛 없으면 내가 또 사 올게.”
“굳이 그럴 필욘 없는데... 알겠어... 자자.”
“응.”
말만 그렇게 하고, 내 품에 안긴 지수와 배를 내보인 채 곤히 잠든 잿더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이미 자둔 탓에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이불과 지수의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함만 느낄 뿐이었다.
항상 지금만 같으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