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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428화 (427/438)

〈 428화 〉 중간고사

* * *

아침을 먹고 수아랑 밖으로 나섰다. 이준권의 차를 타지 않은 것도, 드라마 촬영을 안 가고 둘이서 등교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오빠 근데 오늘만 시험 보고 또 계속 촬영하는 거 아냐?”

수아가 걷다가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그치?”

“오빠 그럼 오늘 본 거 빼고 시험 다 영점 처리되는 거야?”

“아닐걸? 학년인가 반 평균 내서 그 점수 주거나 저번 시험 같은 과목 점수로 80퍼인가 100퍼센트로 반영해서 줄걸.”

“흐음, 이번이 학년 오르고 첫 시험인데 저번 시험이라는 게 없지 않아?”

“그렇네. 그럼 반 평균이겠다.”

“한번 쌤한테 물어봐봐. 어떻게 되는 건지.”

“뭐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없잖아.”

“왜? 생기부 평생 남잖아.”

“그건 그런데, 어차피 나이 들어서 생기부 보는 사람도 없지 않아?”

“내가 볼 건데?”

“어?”

“나중에 애기한테도 보여줄 건데?”

미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가까이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안 보였다.

“애들이 보다가 아빠 시험 점수 이게 뭐야? 하고 막 실망하면 어떡해. 사실 아빠 머리가 안 좋은 건가, 이러면서.”

“사정 설명하면 안 그러겠지. 내가 여태 성적을 쭉 망쳐온 것도 아니고. 그리고 밖에서 그런 얘기 하지 마.”

“무슨 얘기?”

“뭐 아기니 아빠니 이상한 소리.”

“아...”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조심해야지.”

의미심장했다. 문득 부푼 배를 쓰다듬는 윤가영이 상상됐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지 마...”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수아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픽 웃고 앞을 보면서 오른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알겠어. 미안해.”

“...”

수아가 나를 획 올려봤다.

“삐쳤어?”

“그런 건 아냐.”

“삐친 거 같은데?”

“안 삐쳤어. 그냥 조심해주면 좋겠다 한 거지.”

“으응.”

수아가 내 옆구리를 주물렀다.

“근데 오빠부터 조심하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물었다. 수아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상처받았어?”

“살짝 당황만 했어. 근데 괜찮아 이 정도는.”

“근데 내가 안 할 거야.”

피식 웃었다.

“나 고맙지.”

“고마워.”

“고마우면 보답은?”

“뭐 원하는데?”

수아가 말없이 왼손을 뻗어 내 배를 쓰다듬었다.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음식 만들어달라고?”

수아가 고개 젓고 왼손 검지로 자기 아랫배를 쿡쿡 찔렀다. 하얀 교복 와이셔츠가 속으로 약간 눌렸다가 나왔다. 와이셔츠 속에 가려진 수아의 하얀 배가 상상됐다. 살집이 없어서 일자를 형성한 복부에서 유일하게 살짝 두드러져 나온 아랫배가 손가락으로 찌를 때마다 약간 들어갔다 금세 원형으로 돌아왔다. 하반신으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어서 시선을 푸른 하늘로 올리고 마음속으로 태극기를 펄럭이며 애국가를 불렀다. 수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에 어딘가 야한 구석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애국가를 더 크게 불렀다.

“알겠지?”

수아가 물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당연히 나중이지. 설마 지금이라 생각했던 거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 되면 안 되는데...”

어의가 복합적이었다. 현재 내 애를 임신하고 있고, 어린 나이에 출산 경험이 있는 윤가영처럼 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말을 간략히 한 거였다. 이런 언어 감각은 어떻게 기른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뇌가 제멋대로 윤가영이랑 수아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부푼 배를 쓰다듬는 영상을 재생했다. 윤가영의 배가 더 컸고 수아의 배는 아직 그다지 눈에 안 띌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아찔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시선을 내리고 수아랑 눈을 마주쳤다. 양손으로 수아의 오른손을 잡았다.

“제발 그만해주라. 부탁할게.”

수아가 킥킥 웃었다.

“오빠 개귀여운 거 알아 지금?”

“몰라. 네가 귀엽다면 귀여운 거겠지. 알겠으니까 좀 봐줘.”

“진짜 당황했구나.”

“어... 살려줘.”

“알겠어. 그만할게.”

“고마워.”

“응.”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수아가 나를 슬쩍 올려봤다가 정면을 보며 걸었다.

“근데 나 나중에는 진짜 할 거야.”

“응... 나중에 얘기하자.”

“알겠어라고만 하면.”

“알겠어.”

“응.”

수아가 선선히 대답했다. 한번 얼굴을 바라봤다. 수아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가 있었다. 얄미우면서도 귀여웠다. 수아가 애를 낳으면 그 애는 얼마나 장난기가 심할까 괜히 걱정됐다.

꾸준히 걸어서 찢어져야 할 길목이 나왔다. 수아가 나를 올려보고 꼭 끌어안았다가 놓아줬다.

“시험 잘 봐.”

“응. 잘 가.”

“오빠도.”

“응.”

손을 흔들며 뒤로 걸었다. 수아도 나랑 똑같이 뒤로 걸으며 손을 흔들다가 거리가 좀 벌어졌을 때 뒤돌아서서 똑바로 걸었다. 나도 돌아서서 학교 쪽으로 향했다.

조용히 혼자 걷고 있자니 수아의 배가 떠올랐다. 커다란 허벅지와 골반이 형성하는 Y존으로부터 조금 위에 야트막한 언덕을 형성하고 있는 아랫배가 서서히 커지는 광경이 상상됐다. 쭉 지켜보고 있자면 변화를 알아차리기 힘든, 그 시나브로 부푸는 배에 나는 무릎 꿇은 채 입술을 맞추고 있었고, 수아는 왼손으로 내 머리를 사랑스레 쓰다듬고 있었다.

어느새 커진 자지가 바지를 툭툭 건드리며 뚫고 나오려고 했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억지로 누르며 허벅지에 붙였다. 더럽게 뜨거웠다.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내 하반신은 당장이라도 여자친구들을 모두 임신시키고 싶어서 못 견디는 듯했다.

그런데 감당은 다 내가 해야 했다. 지금은 하면 안 됐다. 어쩌다 보니 윤가영이 내 아이를 품게 하기는 했지만, 다른 여자친구들까지 이 시점에 아이를 가지게 해서는 안 됐다. 윤가영처럼 아이가 내 아버지의 아이라고 추정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머리가 지저분했다. 이 생각만 붙잡고 있다가 시험도 망칠 수 있겠다 싶었다. 머리를 비우고자 발을 놀려 천천히 속력을 높였다. 그대로 교문까지 달려가고 걷기 시작했다. 숨이 차서 입으로 호흡했다. 시험 보기 전에 괜히 힘을 뺀 건가 후회됐다.

“야.”

강성연 목소리였다. 왼팔이 팔꿈치에 툭 건드려지는 게 느껴졌다. 왼쪽을 봤는데 강성연이 나를 올려보며 나란히 서서 걷고 있었다.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 근데 내가 먼저 인사해야 됐던 거 같은데. 뺏겼네.”

“순서야 뭐.”

“그치. 근데 좀 괜찮아?”

“뭐가?”

“마음이라든가.”

픽 웃었다.

“괜찮아. 고마워.”

“어... 근데 있잖아.”

“응.”

“그, 아니다.”

“왜. 걍 말해.”

“시험공부 했냐고 물으려 했는데 좀 아니다 싶어서.”

“했어. 근데 그게 왜?”

“걍 좀 너무 필터 안 거치고 하는 질문 같아서.”

“난 괜찮은데.”

“몰라, 암튼 난 그랬어.”

“응.”

아무리 봐도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았다. 그런데 본인이 말하기를 꺼리는 모양인데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같이 본관으로 들어가 반까지 갔다. 애들이랑 인사하면서 책상에 가방을 걸어놓았다. 의자에 풀썩 앉아 책상에 교과서를 꺼내놓으니 애들이 다가왔다. 주변 의자를 끌어와 앉는 애도 있었고 그냥 서 있는 애도 있었다. 다들 나한테 괜찮냐고 안부를 물어왔다. 적당히 답하니 화제가 시험으로 넘어갔다.

“잘 볼 수 있을 거 같아?”

“몰라. 기도 메타 가야지.”

“이래놓고 또 존나 잘 맞는 거 아냐?”

“밑바닥은 안 깔아주겠지, 이온유인데.”

“아냐. 나 밑바닥 깔 수도 있어.”

“엄살이다.”

“깔 수도 있다? 즉 자기는 안 깔 거다.”

“내가 다 깔아뭉갤 거다 이거지.”

“레알로. 엄살 개 심해 얘.”

피식 웃었다.

앞문으로 선우랑 지수가 들어왔다. 보자마자 오른손을 흔들었다.

“지수 선우 하이.”

“안녕.”

“안녕 온유야.”

지수가 먼저 건조하게 답하고 선우가 웃으며 답했다.

지수가 걸어와서 내 앞자리 의자에 거꾸로 앉아있는 애를 내려봤다.

“야. 비켜. 내 자리야.”

“오케이.”

친구가 바로 나갔다. 지수가 의자에 앉고 가방을 건 다음 그대로 돌아서 나를 봤다.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지수가 물었다. 친구들이 단순히 묻는 괜찮냐는 질문이랑은 달랐다. 괜찮냐는 질문에는 걱정이 담겨 있지만 필연적으로 친구가 나를 걱정하는 원인, 즉 장례식을 상기하게 했다. 그런데 지수는 장례식을 떠올릴 내가 마음 상할 수도 있을 것까지 고려하며 내 상태를 물어본 것이었다.

지수는 항상 무심한 듯 배려 깊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엿볼 수 없는 지수의 좋은 점이었다.

“괜찮아. 어제 시험공부 했어?”

“했지, 당연히.”

“어린이날이었는데 아깝네.”

“별로. 혼자 노는 것도 재미없으니까.”

지수가 말했다. 선우가 걸어와서 내 책상 위 교과서를 옆으로 살며시 밀고 엉덩이를 올려 걸터앉았다.

“나랑 놀면 됐잖아.”

선우가 말했다.

“됐어. 공부해야 되는데 뭘 놀아.”

선우가 살폿 웃었다.

“뭐야, 말이 다르잖아.”

“놀 거면 시험 끝나고 놀아라.”

하회탈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단상에 하회탈이 서 있었다. 교탁에는 폰 가방이 펼쳐져 있었다.

“폰 내라.”

“네.”

“예.”

애들이 하나둘 걸어가 폰을 냈다. 은근슬쩍 뒤로 빠져서 문자를 보내는 애도 있었다. 나도 일어나서 폰을 끄고 냈다. 다들 자연스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앞을 봤다.

“시험 끝나고 급식 먹고 가라. 잔반이 좀 많이 남는다더라.”

““네에.””

분명 말만 하고 안 먹는 애도 있을 거였다.

오늘이 1학기 중간고사 세 번째 날인데 나는 2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보는 시험이었다. 수아가 나중에 생기부를 아이들한테 보여준댔으니 오늘 보는 시험만큼은 잘 봐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내가 시험을 정상적으로 봤다면 좋은 성적을 받았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

급식을 먹고 본관으로 돌아왔다. 교무실 밖에 하회탈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서 다가갔다. 하회탈이 폰 가방을 들어 나한테 건넸다.

“가져가라.”

“넵.”

양손으로 받았다.

“드라마는 바로 촬영 들어가냐.”

“일요일부터 다시 시작해요.”

“그럼 시험은 월화 못 보냐?”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래. 힘내라.”

“네.”

“응.”

하회탈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반으로 돌아가 폰 가방을 놓았다. 밥을 안 먹고 버틴 애들이 폰을 가져갔다.

애들이 차차 반으로 모여들었다. 성질 급한 친구 하나가 하회탈을 불러왔다.

“밥은 다 먹고 온 거냐?”

““네에.””

“토요일 일요일에 놀긴 놀아도 월요일 화요일 남은 시험도 잘 준비해둬라. 놀기만 하다가 크게 후회한다.”

““네엡.””

“가라.”

애들이 기다린 듯 반을 빠져나갔다.

나는 지수랑 선우하고 느긋이 반을 나섰다.

“내일 뭐 해 온유야?”

선우가 물었다.

“산소 가서 삼우제 치를 거야.”

“으응...”

토요일이니까 같이 있고 싶었던 건가. 그냥 내일 삼우제를 치른 다음 별장으로 가겠다고 지금 말해둘까. 고민스러웠다. 혹시 못 가게 될지도 모르니 일단 내일 상황을 보고 지수 별장으로 갈지 말지를 정해야 할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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