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화 〉 이튿날 새벽
* * *
진동이 느껴졌다. 감각이 희미했다.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언제 잠든 거지. 품속에서 무언가 꼼지락대는 게 느껴졌다. 가늘게 눈을 떴다. 윤가영이 나한테 등이 보이게 옆으로 누워 자기 폰으로 오른손을 뻗고 있었다.
윤가영이 폰을 쥐고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윤가영의 몸을 감은 오른팔에 조금 힘을 줬다. 윤가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작게 미소 지었다. 윤가영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가 폰으로 시선을 돌려 전화를 연결했다. 윤가영이 폰을 왼손으로 바꿔 들고 귀에 가져다 댔다. 눈을 감고 가만히 들었다. 스피커로 사내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걸걸한 저음인 게 왠지 중년일 것 같았다. 윤가영이 사내의 말에 나직이 네, 네, 하고 대답했다.
ㅡ근데 자고 있었어요?
“네...”
ㅡ미안합니다.이따 봅시다.
“네에... 이따 봬요.”
ㅡ예.
전화가 끊겼다. 눈을 슬며시 떴다. 윤가영이 폰을 덮어두고 몸을 돌려 내게 안겨 왔다. 다시 눈을 감고 윤가영을 끌어안았다.
“누구예요?”
“준권 씨 친척분이래...”
“오고 갈 분 이미 다 오고 간 거 아니에요?”
“이튿날에 오는 분도 많으셔... 지금 오셔서 발인할 때까지 계속 같이 있어주시겠대...”
“네. 근데 되게 늦게 연락했네요.”
“응... 사실 낮에 한 번 연락해주셨는데 내가 까먹고 너한테 얘기를 안 했어... 네가 상주라는 거 알고 도와줄 사람 필요하겠다 해서 끝날 때까지 같이 있겠다 한 분이거든... 일 마치는 대로 바로 오신댔고...”
으음, 하고 소리 내서 알겠다고 표현했다.
“미안.”
윤가영이 말했다. 살폿 웃었다.
“괜찮아요. 저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 도맡아서 도와주셨잖아요.”
“당연히 내가 해야지...”
“그래도 고마워요.”
“응...”
작게 대답하는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어째선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싱숭생숭해지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을 스스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윤가영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줬다. 힘이 더 들어가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지는데 신기하게 마음은 놓였다.
“근데 친척분 오면 막 이러고 있지는 못하겠네요.”
“응...”
윤가영이 내 품에 더 파고들었다.
“나 이래도 되는 걸까...?”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되죠.”
“... 너무 어린애 같지 않아...? 너도 힘들 건데 속없이 너한테 안기고 있고... 심지어 내가 어른인데...”
“속없다 생각 안 해요. 의지해도 돼요. 의지해줘요.”
“응... 고마워...”
윤가영이 입으로 작게 숨을 내뱉었다.
“평생 이렇게 껴안고만 있을 수 있음 좋겠다...”
“그니까요.”
“응...”
말이 끊겼다. 침묵이 찾아들었다. 졸음도 같이 왔다. 이대로 잠들면 오는 사람은 누가 맞이하지 하지.
“나 졸려 온유야...”
내가 해야 할 듯했다.
“자요.”
“... 되게 얕게만 잠들어 있는 방법 없나...?”
“나중에 개발되면 내가 알려줄게요.”
흐응, 하고 콧소리가 들렸다.
“일단 자둬요.”
“네가 깨어있게...?”
“네. 이따 깨워줄게요.”
“으응... 고마워...”
“네.”
짧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숨소리를 들었다. 윤가영이 쌔액쌔액 숨을 들이셨다가 내쉬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뒤에서 수아가 호흡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둘이 숨 쉬는 소리는 거리감만으로밖에 구분할 수 없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윤가영과 이수아의 가는 숨소리를 구분하고, 그 속에서 있을 리 없는 규칙을 찾았다. 잘되지는 않았다. 그냥 숨소리가 희미해질수록 내가 지금 점점 잠들고 있구나 하고 무심코 깨닫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 잘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윤가영이랑 수아 사이에서 잠자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사이가 좋아도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고 말 거였다. 물론 문을 잠가놓았으니 우리를 깨우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을 테지만.
나를 안은 윤가영의 팔을 조심히 거두고 몸을 반대로 돌렸다.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만히 기다렸다. 어느새 암순응한 눈이 수아의 실루엣을 받아들였다. 정자세로 누운 수아는 이불을 골반까지만 덮어두고 있었다. 수아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왠지 안정감이 들었다. 여자의 육체는 신기했다. 그것을 감각하는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격렬한 정을 동하게 하기도 하고 평화를 찾게도 했다.
왼팔을 조심스레 수아의 배 위에 얹었다. 면 너머로 느껴지는 살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수아가 혹시 깨지는 않았을까 하고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깨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눈을 감았다. 잠들지는 않기 위해 무언가 생각하려 했는데, 곧장 내가 감히 품에 안았던 여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김세은.백지수.송선우.윤가영.이수아. 하나같이 내게는 과분한 사람이었다. 단둘이서 일생을 함께하는 것만으로 천운이라 여길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내 지나친 욕심에 삼켜지기에는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떡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아니 사실 옳은 방향은 알고 있지만, 그 길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거 아닌가. 과연 내가 내 욕심을 포기하게 되는 날이 있을까.
과거에도 그랬지만, 나로서는 부정적이었다. 나는 주제넘게도 평생 이렇게 욕심을 낼 것 같았다.
슬며시 눈을 떴다. 정적인 수아의 실루엣을 바라보다가 고개 돌려 윤가영도 확인했다. 둘 다 고요히 자고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일어나서 베개랑 이불만 조심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새로운 요 하나를 가지고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깐 다음 베개랑 이불을 놓았다. 그대로 자리에 누워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 올리고 폰을 켰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내 밝기가 자동으로 조정되어 적당히 어두워졌다. 시간은 새벽 3시를 넘어가 있었다. 나도 자둬야 다시 해가 떴을 때 움직일 수 있을 텐데. 할 게 있으면 빨리하고 다시 눈을 감아야 할 듯했다.
엄지를 움직여 패턴 잠금을 풀었다. 홈 화면에 있는 캘린더가 오늘이 어린이날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는 생각만 있었는데, 오늘이 어린이날이었구나.
괜히 캘린더를 넘기며 남은 공휴일과 미리 기록해뒀던 학사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카톡에 들어가 나와의 채팅에서 일정을 눌러 생일들을 확인했다. 3월 출생인 선우를 제하고는 앞으로 챙겨야 할 사람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들과의 기념일도 어떡할지 생각을 해둬야 했다. 왜 여태 생각을 못 했을까. 오늘까지 떠올리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였다. 물론 최근 여러 일이 있어서 차마 떠올리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옛날부터 세은이와는 딱히 기념일을 챙기지 않아서 애초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나 진짜 존나 미친놈이구나. 무심해도 너무 심각하게 무심했다.
화면을 넘기며 달마다 캡처하고 노트 앱을 켜 파일을 만들고 이미지를 업로드했다. 여자친구들의 생일은 일일이 타이핑해서 강조를 했다.
생일 말고 다른 기념일도 챙겨야 했다. 괜스레 눈을 찌푸려 달력을 훑으며 기억을 되돌렸다. 우선 세은이랑 사귄 것은 아무래도 작년에 첫 경험을 했을 때로 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정확한 날짜가 도저히 기억이 안 났다. 세은이를 소중히 대한 적은 정작 적었지만, 지나온 시간 동안 우리는 처음을 되짚기 어려울 정도로 수없이 사랑해왔다.
세은이는 그 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세은이는 나랑은 다르게 정확히 언젠지 시각도 알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그럴 것 같았다. 세은이가 날짜를 알리라는 것이 확실한 것도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사죄하며 기념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듯했다.
지수, 선우, 가영, 수아도 챙겨야 했다.
지수랑 선우하고는 첫 경험을 한 날이 같았다. 그렇다고 기념일을 동시에 챙기는 건 분명 둘 다 싫어할 거였다. 지수하고는 첫 키스를 한 날로 정해야 할 듯했다.
잭콕을 마시고 지수랑 첫 키스를 한 게 4월 3일이었고, 지수랑 선우하고 첫 경험을 한 날이 11일이었다. 윤가영하고는 14일에 했고, 수아랑은 30일에 했다. 만약 대본 리딩 나가기 전에 첫 키스를 한 걸 기점으로 잡으면 수아랑은 25일에 사귀기 시작한 거였다.
모아보고 나니 살짝 어지러웠다. 아무리 봐도 나는 미친 새끼였다. 살아있는 게 모두에게 죄송한 수준이었다.
구글로 기념일을 계산하고 노트에 일자를 적어넣었다. 7월에 챙길 기념일이 많았다. 7월은 최대한 개인 일정을 잡아두면 안 될 듯했다.
기념일을 적은 메모는 잠금 설정했다. 갤러리에 들어가 생일을 캡처한 것들을 정리했다.
더 정리해야 할 게 없나 하여 갤러리를 훑어봤다. 야한 사진이랑 영상이 눈에 띄었다. 모르는 누가 보면 절대 안 될 것들이었다.
보안 폴더를 형성해 비밀번호를 세은이의 생일인 1205에 55를 붙여 여섯 자리로 설정했다. 찍어서는 절대로 못 맞출 거였다. 그 뒤 갤러리에서 야한 파일을 다 골라내서 보안 폴더로 옮겼다.
폰을 끄고 머리맡에 둔 다음 눈을 감았다. 입으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해야만 할 일이 많았다.
핸드폰을 하면서 잠이 달아났는지 눈을 감았는데도 아까처럼 졸리지는 않았다. 나른한 기분만 이따금 들 뿐이었다.
어느 순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폰을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폰화면을 앞으로 내밀어 앞길을 보면서 걸었다. 문을 열고는 밖을 내다봤다.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이 오고 있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온다고 하셨던 친척분인 듯했다. 고개를 꾸벅였다. 나를 본 두 분이 마주 목례해 왔다.
“아이고, 온유야.”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느닷없이 껴안았다. 아주머니도 와서 나를 안았다가 풀어줬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처음 보지?”
“네...”
“당숙이라고 불러라.”
“네, 당숙 아저씨.”
당숙 아저씨가 미소를 머금고는 일단 예부터 차리자, 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가 섰다. 두 분이 이름을 적고 분향한 뒤 영정에 두 번 절하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 뒤 두 분이 나랑 맞절했다.아저씨가 일어나고는 다가와서 또 나를 안았다가 놓았다.
“새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가족실에서 잠깐 눈 붙이고 계세요. 종일 깨어있어서 많이 피곤한 거 같아요.”
“그렇구나. 너도 피곤할 텐데 자러 들어가야 하지 않겠니.”
“네.”
“그래. 일단 잠깐만 앉아봐라.”
“네.”
바닥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두 분이 나를 둘러싸듯 해서 앉았다. 살짝 불편했다.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너 되게 작을 때는 오가며 한 번씩 봤었어...”
“네...”
“지금은 아주 장정이야, 어릴 때는 귀엽기만 했는데.”
당숙 아저씨가 말했다. 멋쩍게 웃음 지었다. 당숙모가 내 왼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근데 요즘 시험 기간 아니니? 우리 아들은 내일부터 시험 본다는데. 딸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이고.”
“저희도 비슷해요. 내일모레하고 다음 주 월요일 화요일까지 봐요.”
당숙모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구나.”
“그러면 시험 보러 가야 하지 않겠니.”
당숙 아저씨가 물었다.
“장례식이 더 중요하죠.”
“으음. 시험 못 보면 영점 처리되지 않아? 특별한 일 때문에 결시하는 경우 상정해서 보완해주는 제도라도 있니?”
“있을 거예요. 저번 시험 점수에서 퍼센트로 반영하거나 전체 시험 점수 평균 내서 받게 하거나 할걸요.”
“그럼 네 실력이나 노력에 비해서 낮게 나올 수도 있잖아. 이번에 시험 점수 낮게 받아서 나중에 대학 진학에 불이익받고 그러면 평생 억울해질 수도 있을 텐데.”
“괜찮아요. 후회 안 할 거예요.”
“대학에 크게 뜻이 없니?”
“네. 별로 맘 없어요. 그냥 가게 되면 가는 거라는 생각 정도뿐이에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도 나중에는 바뀔 수도 있잖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은 애당초 안 하는 게 나아.”
“아마 시험을 안 보는 것보다는 여기에 남아 있지 않은 걸 후회할 거예요.”
당숙 아저씨가 흐음, 하고 소리 냈다.
“그래. 그럼 내일 시험은 아예 안 볼 작정이니?”
“그럴 거예요.”
“음. 알겠다. 지금 많이 피곤하댔지?”
“조금요.”
“그럼 자둬. 나랑 당숙모하고 여기 친척 아줌마 아저씨들이 밖에 있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응. 근데 일단 자기 전까지 생각 좀 더 해봐. 내일 진짜 시험 보러 갈지 말지. 되게 중요하잖아.”
“알겠습니다...”
“그래. 자러 가.”
“네. 감사합니다.”
당숙 아저씨가 손사래 쳤다.
“아니야.”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이고 가족실로 들어갔다. 애초에 불을 안 켜고 나와서 안은 어두웠다. 소리가 안 나게 조심조심 발을 뻗어 요에 드러눕고 눈 감았다. 친척 두 분이랑 잠깐 대화한 게 피로를 몰고 온 건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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