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 기다리던 사람
* * *
노곤했다. 눈이 감겼다.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장례식장을 슥 둘러봤다.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식탁이 거의 꽉 차있을 때랑은 확연히 차이 났다. 전체적인 소리도 줄어 있었다. 아직까지 남아 았는 분이 모두 고요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소리를 만들어내는 절대적인 수가 적다보니 티가 났다.
자리를 지키시던 분들이 조금씩 인사를 하고 떠나가셨다. 좀만 있다가 자러 들어가면 될 듯했다. 그런데 세은이는 내일 오려나. 데뷔하고 얼마 안 지나 막 활동하는 와중이니 어쩌면 내일 오는 것도 조금 힘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은이가 와주었으면 하는 건 이기적인 바람일 터였다.
물 페트병을 가져와 윤가영이랑 수아 사이에 섰다. 수아는 힘든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윤가영은 서 있었다. 바닥에 앉고 윤가영의 왼소매를 잡았다. 윤가영이 나를 내려보고 바닥에 앉았다. 페트병 뚜껑을 따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졸리니...?”
고개 저었다.
“괜찮아요.”
“졸리면 들어가...”
“알겠어요.”
“응... 수아도 잠 오면 들어가서 자...”
“알겠어. 엄마는 언제 잘 거야?”
“엄마도 졸리면 들어갈게.”
“으응...”
수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왠지 졸려 보였다. 이따 수아 먼저 자게 해야 할 듯했다. 고개 돌려 입구 쪽을 봤다. 복도를 걷는 소리가 나직이 울려퍼졌다. 누군가 오는 것 같았다. 양손 손끝으로 수아랑 윤가영을 톡톡 건드리고 일어섰다. 윤가영이랑 수아가 따라 일어났다. 입구로 키가 큰 여자 한 명이 나왔다. 검은 정장 위로 장례식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얼굴에는 크기 작은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얼굴이 원체 작아서 마스크가 조금 커 보였다. 어디를 봐도 김세은이었다.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었다. 특히나 김세은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만큼은 더욱이 그랬다.
김세은이 신발을 벗고 신발장 왼쪽 아래 구석에 놓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째선가 감동적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눈이 마주쳤다. 세은이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김세은이 마스크를 벗고는 접어서 정장 왼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명부에 이름을 쓰고 분향했다. 세은이가 영정에 절을 하고 우리랑 맞절했다. 함께 일어섰다. 세은이가 바로 나한테 걸어와서 와락 안아왔다. 깨나 압력이 느껴졌다. 세은이를 마주 안았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강하게 안았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왼손으로 세은이의 등을 쓸었다.
“왜 울어...”
“미안... 안 울려 했는데... 얼굴 보니까...”
“으응...”
오른 옆구리가 쿡 찔리는 느낌이 났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수아가 가족실 문을 가리키고 입을 옴싹였다. 안에 들어가, 라고 한 듯했다. 한 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세은아...”
“응...”
포옹을 풀었다. 빈틈없이 맞닿았던 김세은이 몸을 떨어뜨렸다. 가족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세은이가 문을 닫았다. 문을 잠갔는지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뒤돌았다. 눈가에 물기 어린 세은이가 코앞에 있었다. 훌쩍이는 모습이 한없이 귀여웠다. 품에 안았다. 김세은이 나를 마주 안고 내 오른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앉을래 세은아?”
“조금만 이대로 안고 있자...”
“응.”
오른손으로 세은이의 등을 쓸었다. 좋은 향이 났다. 맡자마자 이 향기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감고 세은이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이렇게 껴안고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것만으로 좋았다. 이 순간이 너무 감사했다.
“이런 때밖에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해...”
김세은의 말에 심장이 쿡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은이는 언제나 이렇게 순전히 나만을 생각하고 아껴주는데, 나는 보답은 못 할망정 여태 너무 많은 죄를 지어왔다.
“아냐... 와줘서 고마워.”
“... 읍... 행복할 때 보고 싶은데... 윽... 같이 있을 때, 항상 행복하게만 해주고 싶은데...”
“네가 와줘서 행복해. 같이 있기만 해도, 그냥 껴안고만 있어도 좋고 행복해.”
“흡... 정말...?”
“응.”
“응... 끅... 고마워...”
연인 사이에 당연하게 여겨도 될 일인데. 가벼이 받아들이는 것 없이 깊이 생각해주는 게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나 너무 늦게 왔지...”
“아냐... 시간 내기 어려운데도 억지로 만들어서 바로 와준 거잖아.”
“응... 내일 오면 너무 늦는 거 같아서...”
“아냐.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했을 거야.”
“응...”
“그래도 오늘 와줘서 되게 좋아... 많이 보고 싶었어.”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응...”
세은이의 오른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가 고개를 들었다. 세은이도 얼굴을 들어서 눈을 마주쳐왔다. 눈물 그친 얼굴이 귀엽고 애처로웠다. 김세은이 양손을 들어 내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쪽 맞춰왔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마주 얼굴을 잡았다.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세은이가 오른손 엄지를 내 입술에 댔다.
“너 나랑 계속 뽀뽀하면 자국 남을 건데 괜찮아...?”
“외로워서 입술에 뭐 바르고 혼자 음음, 거렸다고 하면 되지.”
세은이가 살폿 웃었다.
“진지하게 말할 수 있어 그거?”
“하면 되지. 나 배우야, 이제.”
“으응. 드라마 촬영하지?”
“응. 너랑 걸맞은 남자친구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래? 우연이다. 나도 똑같이 너랑 걸맞은 사람 되려구 노력하고 있었는데.”
“똑같네 그럼.”
“응...”
“벌써 잘 맞는데 어떡하지 우리.”
“히힣... 그러게? 어떡해야 되지?”
“그니까...”
왼손으로 김세은의 오른볼을 쓰다듬었다. 결혼 얘기를 꺼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순서상으로 맞는지가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여자친구를 더 많이 사귀었다는 말을 먼저 하고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결혼 얘기를 먼저 하는 건 결혼이라는 볼모를 잡아놓고 나를 용서할 것을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늘었다고는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내가 과연 말할 수는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일단 이제 우리 앉을까...?”
내가 물었다. 세은이가 응, 이라고 작게 답했다. 허그를 풀고 같이 바닥에 앉아 서로 마주 봤다. 왠지 웃음이 났다. 세은이도 마주 웃었다.
“그냥 눕자 우리.”
“응.”
“잠깐만. 밑에 깔 거 꺼낼게.”
“응.”
벽장에서 베개 두 개랑 이부자리를 꺼냈다. 세은이가 일어나서 요를 바닥에 까는 걸 도왔다. 베개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같이 누웠다. 세은이가 바로 바짝 붙어왔다. 같은 베개를 벴다. 세은이가 미소 지었다.
“왜 베개 하나 더 가져왔어?”
“그러게.”
김세은이 히 웃고 왼손으로 내 오른볼을 쓰다듬었다.
“오늘 스케줄 어땠어?”
“그냥 별거 없었어...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하라는 거 하구...”
“응... 재밌는 건 없었어?”
김세은이 고개 저었다.
“재미없는 건 별로 없었어. 멤버들이랑 매니저 오빠도 다 좋은 사람이고, 아이돌도 내가 하고 싶은 거였으니까.”
“으응... 다행이네. 안 맞았으면 되게 힘들었을 텐데.”
“그니까... 나도 조금 걱정했었어... 만약 아이돌 못 되거나 일이 안 맞아서 헛고생만 한 거면 어떡하지 하구.”
“응... 첫 걱정은 안 해도 됐겠다. 연습생 된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데뷔조 들어가고 아이돌 됐으니까.”
김세은이 히 웃었다.
“그치.”
“응. 마음먹은 순간 아이돌 될 수밖에 없었어.”
“히... 재능이 있으니까?”
“당연하지.”
“히힣...”
세은이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내 입에 입술을 쪽 맞췄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여기 올 때 뭐라고 하고 왔어?”
“그냥 나한테 정말 중요한 친구가 부친상을 당해서 지금 장례식장에 있다고. 꼭 가서 위로해줘야 된다고, 그렇게 말해서 찾아왔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안 물어봤어?”
“물어봤어. 남자라고 했어.”
“남자친구냐고 묻지 않았어?”
“응. 장난치지 말라고 하다가 후다닥 왔어.”
“잘했어.”
“히... 근데 나중에 또 막 캐묻지는 않겠지...?”
“안 캐물을 거야. 다른 일도 아니고 장례식 때문에 간 거니까.”
“응...”
세은이가 고개를 주억였다. 무구한 눈이 나를 바라봐왔다. 내 잘못을 고백해야 할 텐데. 엄두가 도저히 나지를 않았다.
“너는 언제 가는 거야...?”
“이따가... 미안해...”
“아냐... 내가 미안해...”
오른팔로 김세은을 끌어안았다. 세은이가 나를 마주 안았다.
“미안해 온유야...”
가슴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목이 메었다.
“요즘 많이 바쁘지...”
“응...”
지금은 말할 수 없었다. 당장은 안 됐다. 떠오르기 시작하는 세은이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없었다. 부친상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나를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여유 시간 좀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해볼게... 만날 수 있게...”
“고마워...”
“아냐... 근데 백지수 걔는 어딨어...?”
“시험 보는 주간이니까 공부하라고 가게 했어...”
“으음... 그치... 시험기간이었구나...”
“응...”
“근데 걔도 공부 되게 안 되겠다... 너 걱정돼 가지구... 나 같았으면 차라리 와서 공부하는 게 더 잘됐을 거 같은데...”
“으응... 근데 지수가 여기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것도 그렇네...”
세은이가 내 입에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나 여기 오래 있음 안 되겠지...?”
“아마...? 사람들이 의심할 수 있으니까...”
“응... 근데 지금 들어온 것도 이상하지 않아...? 너 보자마자 울구... 나 엄청 티낸 거 같은데...?”
“네가 마음이 여리다고 해야지. 그리고 이미지가 중요한데 화장 지워져서 고치려고 들어갔다고 하고.”
김세은이 살폿 웃었다.
“그런 말에 넘어가면 바보 아냐...?”
“믿게 해야지.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야.”
“응... 그럼 나 최대한 가기 전까지 있을래.”
“응.”
김세은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김세은이 다시 입술을 맞춰왔다.
“우리 키스하는 것도 오랜만이야...”
“그니까...”
김세은이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만졌다.
“나 진짜 매일 너 생각한 거 알아? 일어나서 세수할 때, 밥 먹을 때... 자기 전에도. 매일. 스케줄 따라가다가 힘들 때도 너 보고 싶어지구. 노래 얘기만 나와도 너랑 듀엣하는 거 생각나구...”
김세은이 기습적으로 뽀뽀해왔다.
“나중에 듀엣곡 내자, 우리.”
“응. 좋아.”
김세은이 배시시 웃었다. 미소가 화사했다. 아무리 봐도 내게 과분했다. 김세은의 왼볼에 손을 대고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사랑해 세은아.”
“나도 사랑해 온유야...”
세은이가 또 입술을 맞춰왔다.
“너랑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노래 같이 내구... 어쩌면 합동앨범도 내구... 뮤비도 같이 찍구... 놀이공원 같은 데도 다니구...”
한 번 더 키스했다.
“우리 앞으로는 쭉 행복하자.”
김세은이 말했다. 죄악감이 나를 깊숙한 곳으로 끌어내리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응...”
무슨 일이 있어도 세은이만큼은 행복하게 하고 싶었다. 행복하게 할 거였다.
“사랑해줘서 고마워...”
세은이가 나직이 웃었다.
“크게 웃을 뻔했잖아 바보야...”
김세은이 눈을 마주쳐오면서 내 오른볼을 쓰다듬었다.
“나도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나 사랑해줘서... 너무 미숙하게 몰아붙였었는데... 안 떠나고 계속 끌어안아줘서...”
김세은에게서 점점 목멘 소리가 났다.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왜 울어어...”
“고마워서... 나 끔찍한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끔찍한데... 사랑해주는 게 고마워서...”
“히잉... 씨... 그만 울어... 나도 눈물 나잖아...”
“응...”
눈물을 참았다. 김세은이 엄지로 내 눈물을 닦아줬다. 나도 똑같이 김세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얼굴을 마주 봤다. 입술을 맞췄다. 조금 길게 입술을 맞댄 채로 있다가 입술을 뗐다.
“꼭 행복하게 해줄게 세은아.”
김세은이 배시시 웃었다. 눈물 어린 미소가 끔찍이 사랑스러웠다.
“응...”
반드시 세은이가 평생 미소 지을 수 있게 할 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