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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412화 (411/438)

〈 412화 〉 아침

* * *

편의점에 들어가 장바구니를 손에 들었다. 일단 500ml 물 페트병부터 하나 넣고 즉석섭취 식품 코너를 어슬렁거렸다. 스트링 치즈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유치원에서 봉사하다가 편의점에서 마주쳤을 때 윤가영이 먹었던 거 같은데. 스트링 치즈 두 개를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간단하게 먹을 거랬으니 한두 개 더 사면 될 듯했다.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 참치 마요 삼각김밥이랑 제육볶음 삼각김밥을 바구니에 넣고 275ml 카페라떼도 두 병 꺼내서 폰으로 계산했다. 편의점에서 나오고 접수처 앞에 있는 의자 열의 맨 뒤쪽으로 가 앉았다. 메시지 앱을 켜 윤가영한테 문자 보냈다.

[지금 바빠요?]

[조금만.]

[넌 어딨어?]

[살 거 사고 편의점 나왔어요. 지금 병원 1층.]

[응 내가 갈게]

[알겠어요]

[먼저 먹고 있어도 돼]

[이따 같이 먹어요]

[응 빨리 갈게]

[네]

뒤로 가기를 눌렀다. 위에 윤가영이랑 수아, 지수하고 선우가 있었다. 밑에는 이준권이 나한테 연락할 때 쓴 번호도 있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있던 사람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죽었다니. 아무리 상기해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멍하기만 했다. 꿈에라도 빠진 느낌이었다. 뭐랄까, 이준권이 활보한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면 잠깐 개꿈을 꿨다가 현실로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될 듯했다.

폰을 집어넣고 주머니에서 유서를 꺼내 펼쳤다.

[오래 생각해본 결과, 깊은 욕심 끝에 내가 져버린 행복은 돌아올 길 없고, 내다본 앞날은 내리막뿐이다. 내 삶에 회의를 느끼고 떠난다.

온유야, 아들아. 세상 모든 일이 네게 호의적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을 수 있다.

분명 세상 모두가 네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테다. 기억해둬라.]

몇 번 되읽었다. 세상 모든 일이 호의적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수 있다, 이 말은 살면서 뼈저리게 느껴온 말이었다. 세상 모두가 호의적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느껴왔다. 일이 호의적으로 흘러가지 않은 일 중 많은 경우가 일에 얽매인 이가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아서 그리된 것이었으니까. 결국에는 다 아는 내용이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말했던 걸 생각하면, 이준권은 내가 겪어온 일들을 대략적으로는 알았을 텐데. 왜 굳이 하나 마나 한 말을 나한테 남겼을까. 그냥 저주의 의미에서 쓴 걸까. 아니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이나 일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니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쓴 걸까. 어쩌면 두 의미를 다 담아낸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입이 씁쓸했다. 경고와 훈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면 나한테 호의가 남아 있었다는 건데. 어째서 그런 걸까. 윤가영이 자기한테서 정을 떼도록 내가 수를 썼다는 것도 눈치챈 것 같았었는데. 역정을 내면 냈지, 좋은 마음을 품기는 어려웠을 텐데. 왜 그랬을까. 왜 유서에서 나나 윤가영한테 불리하게 적용될 만한 글귀를 남기지 않았을까.

목이 탔다. 침을 삼켰다. 비닐봉투에서 페트병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뚜껑을 닫고 한숨 쉬었다. 답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준권이 나랑 윤가영을 사랑하고 있어서였다. 절대로 좋은 아버지도 좋은 남편도 아니었는데,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사랑을 하고 있었다니. 심사가 복잡했다. 쉬이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서를 도로 접고 주머니에 넣었다. 고개를 들어 정문 쪽을 바라봤다. 윤가영이 문밖에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닐 봉투를 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유리문이 열리고 윤가영이 들어오면서 나를 쳐다봤다.

“일단 나가죠.”

“응...”

윤가영이 어색하게 뒤돌아 나갔다. 재빨리 왼쪽에 붙어 걸었다. 햇빛이랑 비를 가리는 지붕이 위를 덮고 있는 벤치가 몇 줄 있었다. 윤가영도 그걸 보고 있었는지 그쪽으로 검지를 가리켰다.

“저기 앉자.”

“네.”

같이 가서 앉았다. 봉투를 오른쪽에 내려놓았다. 윤가영이 내 왼쪽에 앉고 나를 올려봤다.

“좀 더 붙을까?”

“마음대로 해요.”

“응.”

윤가영이 가까스로 닿지 않을 정도로 바투 붙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흥, 하고 콧소리가나왔다. 윤가영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뽀뽀라도 하고 싶은데 밖이라서 불가능할 듯했다. 시선을 돌려 비닐봉투를 들고 내 허벅지 위에 올렸다.

“삼각김밥이랑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 스트링 치즈 샀어요.”

“으응, 많이 샀네?”

“뭐 좋아할지 몰라서요.”

“응. 일단 고마워.”

“네. 뭐 먹을래요?”

“삼각김밥부터 먹자.”

오른손을 넣어 삼각김밥을 두 개 꺼냈다.

“참치 마요랑 제육볶음 있어요.”

“너 뭐 먹을 건데?”

“당신이 결정해요.”

“그럼 나는... 제육볶음 먹을게.”

“그래요.”

제육볶음 삼각김밥을 건넸다. 윤가영이 비닐을 벗기고 쓰레기를 왼손에 모았다. 나도 비닐을 벗겼다. 윤가영이 나를 쳐다봤다.

“비닐 줘.”

“네.”

윤가영의 왼손에 비닐을 넘겼다. 윤가영이 일어나서 일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도로 앉아서 삼각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나도 한 입 베어 물었다. 윤가영이 어딘지 모를 곳에 시선을 던진 채 우물거렸다. 볼이 움직이는 옆모습이 귀여웠다. 귀여운 동물을 보면 자꾸만 뭘 먹이려고 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래서 그랬구나 싶었다.

비닐봉투에 왼손을 넣어 커피를 찾아 잡았다.

“커피도 샀어요.”

“으음.”

윤가영이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고마워.”

“네.”

한 손에 커피 두 병을 동시에 꺼냈다. 윤가영이 왼손으로 커피 하나를 받았다. 내 커피는 오른쪽에 내려놓고 삼각김밥을 두 번에 나눠 입 안에 다 넣은 다음 뚜껑을 열었다. 적당히 씹고 음식물을 삼킨 다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되게 빨리 먹는다.”

“남자 고등학생이라 그래요.”

윤가영이 살폿 웃었다. 나도 미소 지어졌다.

“무슨 웃음이에요?”

“그냥... 너 볼 때면 어른스럽고 단단하다는 생각 많이 해가지구...”

“제가 좀 단단하긴 하죠.”

윤가영이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앞뒤 양옆을 두리번거렸다가 이내 나를 올려봤다. 눈꼬리가 살짝 휘어져 있는 게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밖에서 그런 말 하지 마...”

“안에서는 해요?”

“그건...”

안 그래도 작았던 윤가영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네 마음이지...”

“맘대로 할게요.”

“...”

윤가영이 팔꿈치로 내 왼팔을 톡 건드렸다. 살폿 웃었다.

“다음은 샌드위치 먹을래요?”

“응. 근데 스트링 치즈까지 다 먹을 수 있을까?”

“힘들 거 같으면 내가 샌드위치 많이 먹을게요.”

“알겠어.”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를 꺼냈다. 하나씩 집어 들었다. 우물거리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차가워서 그런가 맛있다는 느낌은 크게 없었다. 윤가영이 먹다가 멈추고 나만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내 몫을 다 먹었을 때 자기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를 반 갈라서 입이 닿지 않은 부분을 내게 건네왔다. 우물거리면서 군말 없이 왼손으로 받았다. 윤가영이 히 웃고 자기 손에 남은 샌드위치를 작게 베어 물었다. 말도 안 되게 사랑스러웠다. 샌드위치를 빠르게 먹어치우고 손을 턴 다음 폰을 꺼냈다. 메모 앱을 켜고 키패드를 두드렸다. 윤가영한테 화면을 보여줬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요?]

윤가영이 히죽 웃었다. 마주 웃으면서 메모를 지웠다. 윤가영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폰을 올려줬다. 윤가영이 자기만 폰을 볼 수 있게 수직으로 들어서 양손 엄지를 놀리고 나한테 화면을 보여줬다.

[누구 덕분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진짜 키스하고 싶었다. 이 정도면 정신적 고문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밀실로 가고 싶었다.

윤가영이 나한테 폰을 건네줬다. 왼손으로 주머니에 넣었다. 윤가영이 커피를 마셨다. 나도 따라 마셨다. 비닐 봉투에서 스트링 치즈를 꺼내 윤가영한테 건넸다. 윤가영이 익숙한 듯 포장을 뜯어 스트링 치즈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렸다. 물을 꺼내서 건네줬다. 윤가영이 왼손으로 받아서 자기 왼쪽에 놓고는 또 한동안 오물거리다가 꿀꺽 삼키고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고마워.”

“네.”

나도 스트링 치즈 포장을 뜯었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작네요.”

윤가영이 픕, 하고 웃고는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응, 그치. 좀 작지.”

픽 웃었다.

“밖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면서요.”

“뭐가? 난 가격 치고 작다는 거였는데.”

“알겠어요.”

윤가영이 눈을 찡긋했다. 미치도록 귀여웠다. 진짜 너무 뽀뽀하고 싶었다. 스트링 치즈를 입에 물었다. 지금 입으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치즈를 더 입 안으로 넣어서 우물거렸다. 야금야금 전부 먹어버리고 커피를 마셔 입가심했다.

“연락은 다 했어요?”

“이제 해야 돼... 그런데 드라마는 어떡해...?”

“글쎄요... 사정 설명하고 양해 구해야겠죠.”

“일단 매니저님한테 연락해봐...”

“그럴게요.”

“응... 그리고 준권 씨 주변인들은 어떡하지...?”

“폰 뒤져서 회사 사람 한 명한테 연락해 가지고 부고 소식 좀 돌려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죠.”

“으응...”

“도와줘서 고마워요. 장례식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하나도 몰랐는데.”

“나도 잘 몰라... 오히려 네가 옆에서 도와줘서 내가 고맙지...”

“서로 고마운 거로 해요.”

윤가영이 살폿 웃었다.

“응...”

커피를 다 마시고 쓰레기를 구분해 버렸다. 다시 벤치에 앉았다. 폰을 꺼내고 메시지 앱을 켜 김민준을 찾았다. 문자 보냈다.

[형 지금 전화 가능해요?]

금방 숫자가 사라지고 전화가 걸려왔다. 김민준이었다.

“여보세요.”

ㅡ어 온유야. 왜?

왠지 한숨이 나왔다.

“저 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셨어요.”

ㅡ어? 어, 괜찮아 온유야...?

“괜찮아요.”

ㅡ지금 옆에 같이 있는 사람 있어?

“새엄마랑 같이 있어요.”

ㅡ으응... 그럼 장례식 치르는 건 어떻게 진행 잘 될 거 같아?

“아마도요.”

ㅡ어디에서 할지는 정한 거야?

“네. 제가 문자로 주소 보낼게요. 아마 가능하면 오늘부터 시작할 거예요.”

ㅡ으응... 아버님 명복을 빌게. 오늘이나 내일 보러 갈게.

“네. 감사해요.”

ㅡ응. 힘내 온유야.

“네.”

ㅡ그나저나 드라마 촬영 미뤄야겠네. 일단 내가 감독님한테 연락해볼게.

“감사해요 형.”

ㅡ응.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진짜 고마워요. 끊을게요 형.”

ㅡ응.

전화를 끊었다. 윤가영을 바라봤다.

“연락할 사람 더 많지...?”

“그리 많지는 않아요. 학교 친구들 정도밖에 없어서. 물론 더 찾아보면 있기는 할 거 같은데, 아무튼.”

“그래도 학교만 해도 몇 명이야...”

“그쵸. 많은 거 같네요, 생각해보니까.”

“그니까...”

고개를 주억였다. 윤가영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제 들어갈까?”

“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 없이 지붕 위에서 빠져나왔다. 순간 아차 싶었는데 머리에 빗방울이 닿는 느낌이 안 들었다. 하늘을 슬쩍 봤는데 비는 완전히 멎어있었다.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면서 물웅덩이를 피하며 걸어갔다. 세상이 서서히 환해졌다. 햇살이 목을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해 떴다...”

윤가영이 말했다.

“그렇네요.”

답하면서 무심코 하늘을 봤다.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다시 앞을 보며 발을 뻗었다. 아무래도 더는 어둡지 않을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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