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화 〉 커피차, 칼빵 소식
* * *
학교 운동장과 하늘을 배경으로 한 채 클로즈업 샷으로 내 얼굴이 크게 화면에 잡혔다. 보는데 목이 간지러웠다. 붐 마이크랑 카메라가 따라붙는 건 조금씩 익숙해지는데 모니터링할 때 내 얼굴이랑 몸을 마주하고 있자면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약간 버스킹하고 처음으로 내가 나온 영상을 봤을 때랑 비슷하게 생소했다. 내 목소리부터 전체적인 모습까지 전부 묘하게 다가왔다. 살짝 부끄러웠다.
슬쩍 뒤로 물러나 돌아서서 의자에 올려둔 먹다 남긴 샌드위치를 집었다. 의자에 앉고 멍하니 운동장 바닥을 보면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씹어서 목으로 넘겼다. 어느새 손에 쓰레기만 남았다. 주변이 살짝 웅성거렸다. 뭔 일이지. 교복 치마를 입은 누가 다가와서 내 오른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 들어서 얼굴을 봤다. 정시은이었다.
“커피차 왔대요 오빠.”
“응? 어. 왜?”
“네?”
정시은이 살폿 웃었다.
“오빠 아는 사람이라던데요. 오빠 응원한다고 보낸 거래요.”
무슨 소리지. 내가 드라마 찍는 걸 누가 안다고. 설마 이준권인가? 순간 온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커피차만 보냈겠지. 최소한의 양심이랑 눈치라는 게 있으면 여기 오면 안 될 건데.
“같이 가요.”
정시은이 말했다. 이준권 말고 다른 사람 누구 없나. 머리가 아팠다. 일단 일어나고 폰을 챙겼다. 만에 하나 보낸 사람이 이준권이고 커피차랑 같이 여기 오기까지 했다면 브레이크타임이 끝내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쫓아내야만 했다.
“가자.”
“네.”
정시은이 정문 쪽으로 선선히 걸었다. 아무래도 차가 정문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나란히 걸어갔다. 눈살을 찌푸리고 주시했다. 커피를 손에 쥔 스태프들이 몇 명씩 학교 정문을 넘어왔다. 빨대를 입에 문 스태프들이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멋쩍게 웃으면서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뭔 일이지. 속이 탔다. 정문에 가까워질 때까지 상상했던 얼굴이 안 보였다. 그냥 차라리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더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정문을 넘어서니 커피차가 보였다. 탑차 위에 현수막이 있는 것도 모자라 조수석 옆에 배너까지 있었다. 둘 다 내 얼굴이 박혀 있었다. 현수막은 ‘이온유와 모든 배우, 스태프를 응원합니다’라고 쓰여 있었고, 배너는 ‘시원한 커피 드시고 힘내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어투가 지나치게 건조하다 싶었다. 아무래도 최소한 보낸 사람이 남자인 건 맞는 것 같았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커피차랑 배너를 훑던 정시은이 고개 돌려 나를 올려봤다.
“백도영이 누구예요?”
“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저기요.”
정시은이 오른손 검지로 배너 밑부분을 가리켰다. 배너에서 내 상반신이 프린팅된 부분 밑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있었다. ‘온유 아는 형 백도영 드림’.
“아.”
“뭐가 ‘아’, 야.”
백도영 목소리였다. 바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손에 톨 사이즈 커피를 들고 있는 백도영이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슬렁거리는 폼이 다큐에서 나오는 사자를 보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다. 백도영이 빙긋 웃고 나한테 다가왔다. 비명이 튀어나갈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에서 백도영이 매제라고 하면 뒤지는데. 숨이 턱 막혔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백도영한테 다가갔다.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백도영이 오른손을 뻗어왔다. 양손을 올려 맞잡았다. 백도영이 한 번 손을 흔들고 오른손으로 내 왼팔을 톡 치면서 가져다 댔다. 백도영이 피식 웃었다.
“왤케 굳었어.”
백도영이 내 왼 어깨를 주물렀다. 손아귀에 힘이 있었다. 분명 마사지인데 근육이 풀리는 게 아니라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멋쩍게 웃음 지었다.
“이런 거를 제가 처음 받아봐서요...”
“그래? 음.”
백도영이 왼손에 든 커피를 쪽 빨았다.
“앞으로 심심찮게 받게 될걸.”
앞으로도 보내주겠다는 뜻인가? 머리가 빙빙 돌았다. 문맥이 파악이 잘 안 되는 느낌이었다.
“네...”
백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는 주문 안 해?”
“일단 형이랑 얘기하고요.”
“제가 대신 주문할까요 오빠?”
정시은이 불쑥 물었다. 백도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시은을 내려봤다. 맹수의 눈이었다. 도망치라는 말이 단전까지 차올랐다. 일단 그냥 빨리 아무거나 말해서 보내는 게 나을 듯했다.
“나 그냥 아메리카노 줘. 고마워.”
“왜? 메뉴 많은데 맛있는 거로 시키지.”
백도영이 말했다. 정시은도 동의하는지 커피차로 가지는 않고 가만히 나를 올려봤다. 그냥 가지. 살짝 답답했다. 고개를 들어 메뉴판을 슥 훑었다.
“그럼 나 초코 쉐이크로 주문해줘.”
“네.”
정시은이 그제야 커피차로 가서 줄을 섰다. 백도영이 정시은의 등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잘하고 있지?”
단순한 말이지만 의미는 단순한 것 같지 않았다. 분명히 중의적이었다. 주변 상황을 고려하면 표면적으로는 연기를 잘하냐고 묻는 것으로 비치지만, 동시에 지수한테 잘하고 있냐고 묻는 거였다.
“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백도영이 왼 눈썹을 치켜세웠다.
“최선?”
“잘하고 있어요.”
“응.”
백도영이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빨아 마셨다.
“그래. 다행이네.”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속이 거북했다. 어쩌면 이러다가 토가 쏟아져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백도영이 정시은을 힐끔 봤다가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너 얼굴도 봤고, 할 얘기도 다 끝났으니까 가볼게.”
“네...”
“지켜볼게, 항상.”
“넵...”
백도영이 살폿 웃고 내 왼팔을 톡톡 쳤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매제라고는 부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생각해보면 촬영장 안쪽으로 아예 들어오지 않고 나를 기다려준 것부터 배려해준 것 같았다. 일단 이목이 최대한 안 쏠리게 한 거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나한테 오는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긴장감을 줄 다른 방안이 있기도 했다. 커피차를 보내면서 자신은 아예 오지 않고, 자기가 보냈다는 표시도 하지 않는 거였다.
그래도 이 정도 감시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니 이 정도로 멈춰준 거에 감지덕지라고 해야 할 거였다. 백도영이라면 얼마든지 나한테 압력을 가할 수 있었으니까.
“누구예요?”
흠칫했다. 살폿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정시은이 초코 쉐이크를 든 오른손을 내밀어 오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받았다.
“고마워.”
“네. 근데 진짜 누구예요?”
“그냥, 아는 친한 형...”
멀리서 배기음이 났다. 백도영이 몰고 온 차를 타고 가는 모양이었다.
“음, 뭐랄까. 되게 묘하게 부티났어요, 분위기가.”
“맞아. 돈 많아, 그 형.”
“으응... 근데 또 이상하게 얼굴이 익숙한 거 알아요? 진짜 어디에서 본 거 같은데.”
기사 같은 거로 본 건가.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어디에서?”
“몰라요. 저도 궁금해요. 어디서 봤지... 아.”
아, 라니. 제발 몰랐으면 좋겠는데.
정시은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좀만 더 가까워지면 위험하겠다 싶을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백도영...”
목소리가 작았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또 초롱초롱한 게 자기만 깨달은 굉장한 비밀을 속삭이는 아이 같았다.
“저 언제 한 번 기사 같은 거 봤는데... 백화 그룹 회장 아들 이름 아니에요...?”
어떡하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가?”
정시은이 살폿 웃었다.
“그런가가 뭐예요...”
뭔가 느낌이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빨리 돌아가자고 해야 할 듯했다.
“몰라. 그 형한테 그런 거 물어본 적 없어서. 일단 돌아가자.”
“그래요.”
정시은이랑 나란히 걸어서 정문을 넘어섰다. 심장이 저렸다. 무서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백 씨 부자가 할 수 있던 게 무궁무진했구나 싶었다. 지수 별장에 불시에 찾아오는 것도 가능했다. 여태 내가 죽도록 안일했었던 거였다.
지수 별장은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거기에서 이준권은 피할 수 있어도 백 씨 부자를 볼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다행히 백 씨 부자가 지극히 상식적이고 매너 있는 사람들이라서 지수랑 내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기에 망정이었지, 어제나 오늘에 둘 중 한 명이라도 기습적으로 별장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했다면 나는 완전히 망해버렸을 거였다.
한숨이 나왔다. 정시은이 올려보는 게 느껴졌다. 왼주머니에서 폰이 진동했다. 백도영인가. 우뚝 멈춰 서서 폰을 꺼냈다. 정시은도 멈췄다.
“먼저 가.”
정시은이 입술을 삐죽였다.
“알겠어요.”
정시은이 빨대를 입에 물고 터덜터덜 갔다. 폰을 내려봤다. 문자가 와 있었다. 강성연이 보낸 거였다. 갑자기 웬일이지.
[야]
[너 드라마 찍어?]
얘는 또 어떻게 안 거지.
[어. 어떻게 알았어?]
[하회탈이 말해서.]
[아]
흐름이 예상됐다. 내가 안 온 걸 의아하게 여긴 애들이 있었을 거고, 하회탈이 드라마 촬영하러 갔다고 툭 얘기했을 거였다.
[제목은 뭐야?]
[겁쟁이둘.]
[ㅇㅇ]
[근데 갑자기 왜?]
[걍. 신기해서.]
[ㅇ]
[지금도 촬영 중?]
[잠깐 브레이크. 이제 가야 돼]
[ㅇㅋ 힘내.]
[어]
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초코 쉐이크를 한 입 빨고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오지윤 감독이 나를 쳐다봤다.
“윤우 군?”
“네?”
스태프들이 웃었다. 뭐가 이상한 건가 했는데, 윤우 군이라고 부른 거에 너무 당연하게 대답해서 그런 듯했다. 괜히 민망했다. 초코 쉐이크를 한 모금 더 빨고 내가 앉았던 의자에 내려놓았다.
이제 다시 들어가야 했다.
*
“컷! 오케이.”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껏 올랐던 감정이랑 긴장감이 뚝 끊기고 흐지부지되는 느낌이었다.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모니터 쪽으로 가면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민준 실장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내 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있는 건가. 자석에 이끌리듯 김민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김민준이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진짜 뭔 일이 생긴 건가. 불안했다. 일단 따라갔다. 사람들한테서 조금 멀어진 김민준이 돌아서더니 나를 바라봤다.
“온유야...”
목소리가 작았다. 붐 마이크를 들이대야 겨우 녹음될 수준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그게...”
김민준이 작게 한숨 쉬었다.
“네아버지가 칼에 찔리셨대...”
무슨 소리지. 순간 멍했다.
“어디에 얼마나 맞았는데요...?”
“복부에, 잘은 모르는데 두어 번... 지금 가야 하지 않겠어...?”
“...”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움직일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세상에 얼마나 잘못을 저질러왔으면 칼에 찔리기나 하는 걸까. 이게 진짜 사필귀정인가. 싱숭생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했다. 입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강한 분이니까, 괜찮으실 거예요... 촬영 다 마치고 갈게요.”
“으응... 그래.”
김민준이 내 왼팔을 톡톡 쳤다. 눈빛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문득 내가 좋은 사람을 곁에 정말 많이 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