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4화 〉 어쩌면 시한부
* * *
“안아줘.”
“응.”
지수한테 더 가까이 다가붙었다. 지수가 기어서 내 품에 들어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몸을 기대오면서 나를 꼬옥 껴안았다. 지수를 마주 안았다. 샴푸 향이 맡아졌다. 오른손으로 지수의 등을 쓸었다. 지수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직하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귀여웠다. 왼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지수가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봤다. 미묘하게 눈물 기가 남아 있어서 금방 울음을 그친 게 티 났다. 선명하게 붉은 입술이 예뻤다. 왼손을 들어 엄지를 지수의 아랫입술에 댔다. 그대로 왼쪽으로 쓸면서 만졌다. 지수가 피식 웃었다.
“뭐해?”
“입술 되게 예뻐서.”
지수가 코웃음 쳤다.
“뭐래... 양치는 했어?”
고개 저었다.
“너 올라가는 거 보고 바로 왔어.”
“으응. 그럼 일단 양치하고 와.”
“응.”
지수가 뒤로 물러났다. 침대에서 내려가고 화장실에서 빠르게 양치했다. 도로 나왔다. 침대에 지수가 누워 있었다. 걸어가서 마주 보는 방향에서 누웠다. 지수가 오른손을 들어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쓸었다. 시선이 정직하게 내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장난기가 들었다. 기습적으로 고개를 앞으로 움직이고 지수의 엄지를 입술로 감싸서 물었다. 지수가 눈웃음 짓고 엄지를 뒤로 빼려 했다. 그대로 따라 움직여 엄지 끝마디를 계속 물었다. 지수가 피식 웃었다.
“개도 아니고 뭐하는 거야.”
“몰라.”
“바보 같애...”
지수가 내 입 안에서 엄지를 빼고 내 왼볼에 문질렀다.
“나 뭐 할 말 있었는데.”
지수가 말했다.
“뭐?”
“까먹었어. 네가 내 엄지 물어가지고 순간 되게 어이없어서 잊어버렸어.”
“내가 맞혀볼까?”
“맞혀봐.”
“키스하자.”
지수가 피식 웃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 아냐?”
“맞아.”
“그럼 해.”
눈웃음 지었다. 입술을 포갰다. 지수가 등을 침대에 붙였다. 자연스럽게 지수의 위로 올라가면서 입술을 붙였다 뗐다.
“쮸읍... 쯉... 츕...”
지수가 눈웃음 지었다. 요망했다. 지금 너무 섹슈얼한 무드로 가면 안 되는데.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뗐다. 지수가 양손으로 내 볼을 잡았다. 그러더니 양손 엄지랑 검지로 내 볼을 약하게 잡아 늘렸다.
“머야.”
지수가 악동같이 히죽 웃었다.
“그냥.”
지수가 꼬집듯 한 것을 놓았다.
“나 할 말 기억났어.”
“으응. 뭐야?”
“일단 옆으로 누워봐.”
“응.”
지수 왼편에 누웠다. 왼팔을 지수의 옆구리에 감아서 안았다. 지수가 오른손으로 내 왼볼을 잡고 주물주물거렸다.
“...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응?”
“네 새엄마랑 여동생. 데려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으음... 그냥, 솔직히 말하면 이준권이 모를 만한 장소 찾다가 왔어.”
“딱 그 이유만 있을 거는 아닐 거 아냐.”
“응...”
일단은 윤가영이 여기로 오는 것은 어떻냐고 제의해서 온 거이기는 한데 그것을 이유로 앞세우기는 뭐했다. 지수가 반갑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예상 가능하니 내 선에서 끊고 다른 데로 가자고 할 수도 있었으니까. 결국에는 내가 원해서 온 거였다. 지수랑 선우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그럼 나는 결국 윤가영이랑 수아가 지수랑 선우하고 대면해서 모두 다 같이 한 지붕 아래에서 잠들기를 바란 건가.
“그래서 뭔데?”
“그냥 너랑 선우가 가영 씨랑 수아 만나고, 서먹하지 않은 사이 됐으면 해서 여기로 왔나 봐. 욕심이 컸어.”
“으응...”
지수가 내 왼볼을 약하게 꼬집었다가 풀었다. 표정이 살짝 심각했다.
“근데 난 살갑게는 못할 거 같애. 아니 못해. 데면데면하게는 대해도.”
“그것만으로 충분해. 거리 좁히는 건 가영 씨랑 수아가 노력하면 되는 거니까.”
“응... 근데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수아 걔는 좀 퉁명스러워 보이던데.”
“그런 면이 없진 않아. 근데 친해지면 살가워져.”
지수가 입술을 삐죽였다.
“넌 너무 친해져 버린 거 아냐?”
멋쩍게 웃었다.
“뭘 웃어.”
“할 말이 없어서.”
“그러게 누가 맨날 잘못하래.”
“미안해.”
“...”
지수가 검지로 내 가슴 중앙을 콕콕 찔렀다.
“그럼 있잖아.”
“응.”
“두 사람 다 여기에서 묵게 해주고, 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둘한테 날 안 세울 수 있게 노력해볼 테니까...”
“응.”
“... 임신은 내가 제일 먼저 하면 안 돼?”
“응...?”
“안 돼?”
눈빛이 순수했다. 임신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런 눈빛을 보내온다니. 모순적이었다.
지수가 오른손을 내 옷 아래로 집어 넣어 내 왼 가슴을 주물주물거렸다. 눈초리가 답을 재촉해왔다. 곤란했다. 이미 윤가영이 내 아이를 임신해버린 상태에서 지수에게 제일 먼저 임신시켜준다고 약속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우선 고백이 선행되어야 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
“응... 근데 먼저 내가 고백해야 할 게 있어.”
“...”
지수의 표정이 굳었다.
“뭐, 너 정자 없어? 말이 돼? 그럼 씨발...”
피식 웃었다.
“아냐, 그런 거.”
나는 정자가 너무 건강해서 문제였다.
“아니라고?”
“응.”
“그럼 문제 될 게 없잖아.”
“으음...”
“... 뭐길래 그러는데.”
“... 내가 가영 씨 임신시켰어.”
“뭐어?”
“...”
“진짜야?”
“응...”
“아니, 왜... 언제? 뒤질래?”
“살려주라.”
“언제 했냐니까?”
“날짜 생각하면 처음 했던 날에 한 거 같아.”
“여기서 처음으로 했다며.”
“응...”
“씨발 진짜...”
지수가 내 옷에서 오른손을 빼고 내 왼가슴팍을 밀었다. 등을 침대에 붙였다. 지수가 내 배를 깔고 앉고는 윗옷을 벗었다. 검은 브라에 감싸진 커다란 가슴이 드러났다. 모욕이라도 당한 듯 지수의 얼굴이 붉었다.
“네가 사람이야? 존나 짐승 새끼 아냐?”
“미안해.”
“씨발...”
지수가 양손을 내 가슴팍에 대고 손을 말아쥐었다. 손아귀로 티셔츠 면이 말려 들어갔다. 지수의 손이 떨렸다. 지수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안했다.
“왜 맨날 난, 끕... 처음이 아닌 건데...”
지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 오른 가슴팍에 닿았다. 뜨거웠다. 양손을 들어 올렸다.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양손으로 지수의 볼을 붙잡고 눈물을 훔쳤다. 지수가 고개를 숙였다. 양손을 내려 침대를 짚고 상체를 세웠다. 지수를 품에 안았다.
“끄윽... 흑...”
“미안해.”
“좆까아... 윽...”
“사랑해.”
“끕... 미워...”
“미안.”
“나빴어어... 끅...”
왼손으로 지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지수가 내 왼어깨에 이마를 박듯 했다. 티셔츠가 조금 젖는 게 느껴졌다.
“내가 제일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 너야. 내가 가족 문제 처음으로 털어놓은 사람도 너고, 내가 가장 힘들 때 심적으로 가장 많이 도와주고 위로해준 사람도 너야.”
“흡... 끅...”
“반쯤 동거하듯이 사랑 나눈 것도 처음이었고, 요리랑 디저트 서로 만들어줘서 먹고 행복해한 것도 처음이었어. 너랑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겪고 느낀 게 많아. 꼬옥 껴안고 자면서 외롭지 않다고 느끼고, 너한테 위로받으면서 내 삶이 마냥 비극은 아니구나 생각했어.”
“흑... 맨날, 맨날 말만 잘하고... 끕...”
“사랑해.”
“끅... 개새끼야아...”
“응.”
지수가 픽 웃었다. 아까 울렸을 때 개새끼라 했을 때 왜 대답 안 하냐고 한 게 생각나서 반사적으로 답했는데, 다행히 통한 듯했다. 잘못하면 화가 날 수도 있을 만큼 꽤 위험한 농담이었는데.
“흑... 짜증 나...”
“미안해.”
“미안하다고만 하면, 끕... 맨날 다 봐주니까 그러지...?”
“아냐.”
“그럼 뭔데...?”
“... 내가 쓰레기라서 그런가 봐... 뒤틀려서...”
“흡... 전에도 똑같은 말하지 않았어...?”
“그랬던 거 같아...”
“바보...”
“응...”
지수가 코웃음 쳤다.
“왜 대답해...”
“바보니까. 바보라고 부르면 답해야지.”
“바보 같애...”
“바보 맞으니까.”
지수가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지수가 고개를 살짝 들어 왼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지수의 오른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지수가 입을 열었다.
“윤가영, 그 여자 배에 있는 애. 걔 생부로 네가 등록되는 건 아니지. 네 아버지랑 결혼한 사람이니까.”
“응...”
“... 그럼 네 첫 애기는 내가 낳을래.”
“세은이랑도 얘기를 해봐야...”
지수가 입술을 맞대서 내가 소리를 내는 걸 막았다.
“쯉...”
지수가 입술을 뗐다.
“김세은이 결혼은 양보 안 할 거 아냐.”
“... 아마...”
“그니까 처음 네 애 낳는 건 내가 할 거야.”
“근데 생각해야 할 게 임신하고 있는 시기는 다 다르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최소한 네 공식적인 애 임신하는 건 내가 처음으로 할 거야.”
“으응...”
“지금 약속한 거야.”
“알겠어.”
“도장 찍어.”
오른손을 들었다. 지수가 오른손을 맞잡고 엄지를 꾹 찍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내 목을 붙잡고 입술을 맞춰왔다.
“쮸읍... 츄읍... 쯉...”
지수가 입술을 뗐다. 울음기가 남아 있는 두 눈이 어두운 방 안에서 형형한 빛을 품고 있었다.
“내가 무조건 처음으로 낳을 거야.”
“응...”
왠지 지수는 세은이랑 비슷한 시기에 임신해도 진짜로 자기 의지대로 먼저 애를 낳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나는 세은이랑 결혼해서 임신도 시킨 상태로 지수 사이에서 난 아이의 생부로 출생신고를 하게 되는 건가. 그때쯤이면 세은이는 물론이고 나도 인지도가 조금은 있을 텐데. 그날엔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히고 말 거였다.
아니 그 이전에 세은이랑 결혼하면 백 씨 부자가 나를 죽이려나. 운이 좋을 경우 세은이랑 결혼했을 때까지는 반 정도만 죽여놓겠지만, 그렇게 반은 산다고 해도 지수의 배가 불러오게 되고 나면 그때는 확실히 나를 죽여버릴 터였다.
어쩌면 나는 시한부 인생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