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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401화 (400/438)

〈 401화 〉 긴급대피

* * *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하자마자 돌아다니던 남자 직원이랑 눈이 마주쳤다. 말을 걸려는데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온 일행분 있으시죠? 키 크신 남자분.”

이준권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보는 거라서 일행이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직원이 앞장섰다. 군말 없이 뒤따랐다. 얼마 안 가 창가 의자에 앉아 스테이크를 씹고 있는 이준권이 보였다. 순간 몰라볼 뻔했는데, 턱수염이 검게 자라난 탓이었다. 게다가 뿔테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원래 눈은 좋았으니 도수는 없을 터였다. 아마 위장을 하고자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쓴 듯했다. 기사는 본 모양이었다. 아니, 기사를 못 볼 리는 없을 거였다. 주변인이 연락했을 테니까. 기사를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랄 게 아니라 여태 기사에 대해 별 대응을 안 한 것을 신기하게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직원이 친절한 표정을 짓고 이준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굳이 지목 안 해도 보였는데. 괜히 불쾌했다. 스테이크를 씹고 있던 이준권이 나를 쳐다보면서 생긋 웃었다. 심히 불쾌했다. 직원을 보며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네.”

이준권의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 왠지 입이 떫었다. 이준권을 봐서 그런 건지 처음 본 직원이 내 얼굴만 보고도 이준권한테 안내했다는 사실 때문인 건지 분간이 안 됐다. 그냥 둘 다일 것도 같았다.

이준권이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뭔가 볼이 살짝 패여 들어간 듯했다. 이준권이 냅킨을 접어 내려놓고 스템을 잡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목을 살짝 들어서 턱으로 시선이 갔다. 턱선이 갸름해진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했는데 조금은 수척해진 거였다.

이준권이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여태 수고스러웠겠구나 온유야. 이것저것 궁리하고 시행하느라.”

기사 얘기하는 건가. 뭔가 느낌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것저것이라는 표현이 걸렸다. 기사 얘기만을 한 게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점심 먹고 왔니?”

“아뇨.”

“그럼 좀 들어. 네 것도 시켰는데.”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드네요.”

“그래? 네가 스테이크 좋아해서 여기로 온 건데. 괜히 왔다. 분식집이나 갈 걸 그랬어.”

지금 나랑 농담하자는 건가. 속이 끓는 듯했다.

“왜 불렀어요?”

“응?”

이준권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 재수 없었다.

“간만에 아들 보는 건데 그것 말고 또 이유가 필요하니?”

너무 기가 차서 헛웃음도 안 나왔다. 그냥 짜증만 솟구쳤다.

“그나저나, 근래 힘들진 않았니?”

씨발 진짜 뭔 소리 하는 거지?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걸까? 어머니 장례식 얘기하는 건가? 아니면 기사 터뜨리기까지 자료 같은 거 제공하느라 힘들지 않았냐고 비꼬는 건가? 너무 화나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와인 병을 잡고 머리를 치고 싶었다. 컵에 물을 따르고 한 입 마셔서 화를 삭이고 입을 열었다.

“조금요. 근데 별 보람은 없네요. 당신 낯도 괜찮아 보이고.”

이준권이 웃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이었다.

“그러니? 그래도 꽤 장시간 비행했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왜 웃기지도 않는데 농담을 해대는 거지? 토가 쏠렸다. 이준권이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지나치게 깔끔 떨었다. 누구보다 더러우면서 항상 겉치레만 화려했다.

“그나저나, 반말할 줄 알았는데 아직 존대해주는구나.”

“해야죠. 모르는 사람인데.”

이준권이 살폿 웃었다.

“그래.”

이준권이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이빨로 음식을 씹어대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나 없는 동안 바뀌었다거나 하는 거 있어?”

“바뀐 거라뇨.”

“네 새엄마랑 새여동생과 사이가 좋아졌다거나 나빠졌다거나. 아님 뭐 일상도 좋고. 드라마 얘기나 학교 얘기 같은 거.”

심장이 욱신거렸다. 존나 얼마나 아는 거지? 한국에도 없던 인간이. 엄마랑 나는 안중에도 없던 게. 갑자기 뭔 지랄을 하는 거지? 폐에 불이 질린 것 같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요?”

“모르는 사이니까, 이제 알아가자는 거지.”

“장난해요?”

“아니. 진지하단다.”

“진짜 지랄하지 마요.”

이준권이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봤다. 침묵. 이 침묵이 차라리 듣기 좋았다. 이준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섭섭하구나. 나는 네가 벌인 근시안적인 실수도 용납하고 화해하자 하는 건데.”

“좆 까요.”

주변에서 시선을 보내오는 게 느껴졌다. 오지윤 감독이 새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 언젠가 기사 같은 게 뜰 텐데. 구설수 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욕이라도 안 하면 이 자리를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다.

이준권이 주변을 흘깃 봤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참을 수 없이 좆 같았다.

“어지간히도 칭얼대는구나.”

이준권의 와인잔을 잡고 이준권의 얼굴에 뿌렸다. 이준권이 눈을 질끈 감고는 후, 하고 숨을 뱉었다. 쾌감이 느껴졌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했다.이준권의 턱수염을 적신 와인이 방울방울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이 대놓고 나랑 이준권을 보는 것 같았다. 드라마 찍는 거야, 하고 어떤 여자가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왼쪽 귀에 들렸다. 시선이 느껴지는 게 기분 탓은 아닌 듯했다.

이준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냅킨을 뽑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라.”

무시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직원들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냥 나갔다. 이준권 성격상 계산까지는 철저히 할 터였다. 어쩌면 음식도 먹을 만큼은 다 먹고 일어날 거였다. 그러니 시간은 어느 정도 있었다. 빠르게 걸어서 건물을 빠져나갔다. 연락처를 뒤져 윤가영을 찾고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몇 번 들렸다. 빨리 받아야 되는데. 마음이 졸여졌다. 빨리, 빨리. 어느 순간 연결됐는지 수신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ㅡ여보세요...?

비몽사몽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자던 건 아닌 듯했다.

“준비는 했어요?”

ㅡ지금, 지금 하고 있어요... 왜요...?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그 사람 당신 보려 할 거예요.”

ㅡ그래요...?

“네. 빨리 어디로 피하든가 해요.”

말하면서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준권은 윤가영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근거는 딱히 없었다. 그저 아까 이준권이 네 새엄마라고 얘기를 꺼냈을 때 호의적이지 않은 느낌은 없었다는 거 정도뿐이었다.

윤가영을 아직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이준권이 왜 갑자기 한국을 뜨고 다른 여자랑 떡을 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딴 건 아무런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밥을 먹고 난 이준권이 윤가영을 보러 가리라는 거였다.

그런데 윤가영은 왜 이렇게 답을 안 하는 거지? 무슨 일이 생겼나? 짐 정리하던 게 무너졌나? 그런데 큰 소리도 안 들렸는데.

“왜 대답 안 해요?”

ㅡ... 저 한 번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왜요?”

ㅡ저 임신했으니까... 준권 씨 자식으로 만들려면...

“안 돼요!”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버렸다. 행인들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발을 더 빨리 놀렸다.

ㅡ그럼 어떻게 해요...? 임신한 시기 안 맞으면...

“그건 내가 이준권을 구워삶든 어떻게든 할 테니까, 만날 생각하지 마요. 당신 내 사람이에요.”

ㅡ알겠어요... 그럼 저 어디로 가요...?

“무인텔이든 어디든, 당신이 잘 안 갈 것 같은 곳으로 가요. 이준권이 예측 못 하게.”

ㅡ알겠어요...

“짐은 얼마나 챙겼어요?”

ㅡ거의 다 챙겼어요. 이제 수아랑 나가면 돼요.

“좋아요.”

ㅡ네... 근데요...

근데요라니. 뭔 얘기하려는 거지. 걱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말해요.”

ㅡ그럼 나 거기로 가도 돼요...?

“거기요? 거기가 어딘데요?”

ㅡ제가 여보 찾아갔던 곳이요...

지수 별장 말하는 건가? 확실히 이준권도 지수 별장은 모를 거였다.

“한번 물어볼게요.”

ㅡ고마워요...

“네. 지금 바로 물어볼게요. 끊어요.”

ㅡ네.

전화를 끊었다. 백지수한테 문자 보냈다.

[오늘 이준권 왔는데 윤가영이랑 수아하고 별장으로 가도 돼?]

폰 화면만 바라봤다. 숫자가 금방 사라졌다. 말 줄임표가 떴다.

[존나 장난하냐?]

[미안해]

[근데 진짜 어쩔 수가 없어]

[아니]

[내 자취방이 네 집이냐고]

안 되는구나. 끔찍이 이기적인 부탁이니 지수로서는 당연히 거절해도 될 일이었다.

[어려운 부탁 해서 미안해 안 된다고 말할게]

말 줄임표가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답장이 왔다.

[아냐. 오라 그래. 너 나한테 빚진 거다.]

환호하고 싶었다. 미치도록 고마웠다. 키패드를 두드렸다.

[고마워]

[어]

[사랑해]

[와서 말해]

[응응]

뒤로 가기를 눌러서 윤가영한테 문자 보냈다.

[된대요]

[진짜로...?]

[네]

[고마워!!]

[이따 지수한테 얘기해요 고맙다고]

[응!]

[주소는 알죠?]

[응 저번에 갔던 카페로 택시 부르려고]

[혹시 모르니까 카카오 택시 쓰지 마요]

[알겠어]

[네 이따 봐요]

[응]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택시들이 줄지어 주차한 곳이 보였다.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면서 폰으로 지수 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프랜차이즈 치킨집 주소를 골라 주소를 띄웠다. 택시 줄 맨 앞에 있는 차량의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에, 안녕하세요.”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치며 폰을 내밀었다.

“여기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기사님이 폰 화면을 내려보면서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다 됐습니다.”

“네.”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이제 도착해서 내리고 카페로 가 윤가영이랑 수아를 만난 다음 지수 별장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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