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 사랑의 결실, 책임, 최악의 타이밍
* * *
절로 눈이 뜨였다. 왼손을 뻗어 폰을 확인했다. 아홉 시 이십 분이었다. 간만에 푹 잔 느낌이었다. 폰을 도로 내려놓았다. 근데 윤가영은 어디 간 거지? 먼저 일어나서 빨래 같은 거 하는 건가.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는데. 아니면 아침 만드나. 일단 빨리 나가서 뭘 하는지 보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할 듯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수아가 내 쪽을 향해 옆으로 누워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 쪽이 부풀었다가 들어가는 게 귀여웠다. 남겨두고 싶은 모습이었다. 폰을 잡고 카메라를 켜 10초 정도 녹화했다. 근데 찍은 거 알면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됐다. 일단 영상을 한 번 틀어봤다. 실없이 웃음 지어졌다. 너무 귀여웠다. 수아가 일어나면 영상을 찍었다고 먼저 말을 꺼내서 영상을 간직하고 싶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빠르게 세면하고 양치한 다음 폰을 잡았다. 지수랑 선우한테 일어났냐고 문자 보냈다.
[일어났어]
지수 문자였다. 키패드를 눌렀다.
[아침은 먹었어?]
[별로 안 배고파서 안 먹었어]
[점심에 배달 시켜서 선우랑 먹게]
[으응]
[근데 잘 챙겨 먹어야지 거르면 안 돼]
[네가 와서 챙겨주면 되잖아]
[알겠어]
[저녁 전에는 오는 거지?]
[모르겠어 얘기해볼게]
[응]
[꼭 와]
[최선을 다할게]
[안 오면 혼낼 거야]
[응]
[넌 아침 먹었어?]
[이제 일어났어]
[오래 잤네]
[응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은근 피곤했나 봐 연기 처음해서 그런가]
[그럴 수 있지]
[응]
[근데 지수야]
[왜?]
[왜 먼저 문자 안 보내줘?]
[아]
[너무 연락 많이 하면 너 부담될까 봐]
[그래서 자제했어]
[너한테 의존한다는 느낌 주기도 싫고]
[그리고 내가 먼저 연락 안 하면 네가 얼마나, 언제 연락하는지도 보고 싶었고 해서]
[응...]
[근데 이제 볼 만큼은 본 거 아니야?]
[너 지금 삐쳤어?]
[아니]
[사실 조금]
[ㅋㅋㅋㅋㅌ 갑자기 왤케 귀여워짐?]
[몰라 앞으로 한 번씩은 먼저 연락해줘]
[알겠어]
[밥이나 먹어]
[너도]
[잘 챙겨 먹을게]
[응]
뒤로 가기를 눌렀다. 선우한테서는 아직 답장이 오지 않았다. 선우는 자는 건가. 다시 지수한테 문자 보냈다.
[선우는 지금 자?]
[응]
[왜?]
[그냥 답장이 안 와서]
[자서 그래]
[얘 거의 인간고양이야 휴일 되면 개 많이 자]
[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선우한테 따로 중요하게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잘 잤냐고만 보냈어]
[ㅇㅇ]
[이제 진짜 밥이나 먹어]
[응 알려줘서 고마워]
[어]
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방을 나서고 주방으로 갔다. 윤가영이 안 보였다. 테이블도 깨끗했다. 진짜 뭐지. 이상했다. 수아 방으로도 한번 들어갔다. 윤가영은 안 보였다. 자기 방에 있는 건가. 아님 밖에다 빨래 너는 걸까.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슬리퍼를 신고 밖을 봤다. 윤가영이 안 보였다. 자기 방에 있나 보다. 도로 집에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갔다. 윤가영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들어갈게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웅크려 앉은 윤가영이 이불로 몸을 꽁꽁 덮고 있었다. 뭔가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기분 탓인지 몸도 떠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말없이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고 윤가영을 바라봤다.
“여보.”
“네...”
“...”
침대 위로 올라가 윤가영의 뒤로 갔다. 두 팔로 윤가영을 끌어안았다. 다행히 윤가영은 떨지 않았다. 원래도 떨고 있지 않던 건지, 내가 안아줘서 떨지 않게 된 건지는 분간되지 않았다.
“무슨 걱정 있어요?”
“그게...”
“말해봐요.”
“...”
윤가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봐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으흐응...”
윤가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무릎으로 기어 윤가영의 왼편으로 가 앉았다. 양손으로 윤가영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쪽 맞췄다. 그러고 말없이 윤가영을 안아서 오른손으로 등을 쓸었다. 윤가영이 웅크린 자세를 고치고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나를 꼬옥 껴안아 왔다. 내가 입은 반팔 티셔츠의 얇은 면이 조금씩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뜨거웠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내 잘못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흑... 여보오...”
“네.”
“나... 나아... 끕...”
“당장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요. 이따가, 나중에 말해도 돼요.”
“흡... 안 돼요오...”
“... 알겠어요.”
“윽...”
왼손으로 윤가영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오른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토닥였다. 윤가영의 호흡이 안정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윤가영이 애써 자신을 다잡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까. 오히려 아까 내가 찾아와서 마음을 무너뜨려 버린 거 아닌가. 속이 복잡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여보...”
“여보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끅... 미안해요...”
“아니에요. 미안해하지 마요.”
“으흐으응...”
윤가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봤다. 두 눈에서 눈물이 그린 선이 그어져 있었다.
“저 진짜, 죽을 만큼 잘못했는데도요...?”
“무슨 잘못이든 용서해줄게요.”
“끕... 저 사랑해줄 수 있어요...?”
“사랑해요. 죽어도 사랑할 거예요.”
“... 저 진짜 나쁜년인데...”
“아니에요. 당신이 앞으로 나한테 평생 잘못해도 나만큼 나쁜 사람 못 돼요.”
윤가영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나 지금 웃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농담하면 어떡해요...”
살폿 웃었다.
“난 여보 웃는 거 보고 싶은데.”
“그럼 일단은 아끼고 이따가 그만큼 더 웃어줘요.”
“못 웃을 거예요...”
“내가 웃게 해줄게요.”
“으으응...”
윤가영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쪽 맞췄다.
“잘못한 거든 뭐든 얘기해줘요. 여보가 이미 나 봐줬으니까 나도 다 용서해줄 수 있어요. 해결해야 할 일이면 나도 같이 고민할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 있을 테니까, 다 말해줘요.”
“으응...”
“얘기해줄 수 있어요?”
윤가영이 흐흐흑, 하고 숨을 내뱉었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한번 숨을 내뱉은 윤가영이 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미소 지어 보였다. 윤가영이 입술을 열었다.
“오늘 테스트해봤는데...”
윤가영의 목소리가 차츰 작아져서 말꼬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두 줄, 떴어요...”
멍했다. 테스트, 두 줄. 머리가 웅웅거렸다. 어떡하지?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나만을 쳐다보는 윤가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윤가영을 꼭 껴안았다. 윤가영이 나를 마주 안았다.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오른손으로 윤가영의 허리를 감싸 잡고 왼손으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애, 지워야겠죠...? 윤가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답을 해야 하는데. 혼란스러웠다. 내가 지금 정신 차려야 했다.
아이를 지운다면, 윤가영은 영영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지며 살 터였다. 여자친구에게 영원한 트라우마를 안길 수는 없었다.
내가 만약 이기적으로 윤가영에게 낙태를 요구한다면, 이후에 다른 여자친구들에게도 그런 요구를 아니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아직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했다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쓰레기 짓을 할 수도 있었다.
지금 내린 판단이 미래의 내가 내릴 모든 판단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책임져야 했다.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 됐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윤가영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양손으로 윤가영의 볼을 잡았다.
윤가영이 고개 들었다. 눈을 마주치면서 입을 열었다.
“나 아직 부탁 하나 더 할 수 있죠.”
윤가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 지우지 마요. 부탁이에요.”
“으으응...”
울상이던 윤가영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여태 봐왔던 중 가장 아기 같은 표정이었다.
“으하앙...”
결국 울음을 터뜨린 윤가영이 내 품에 파고들었다. 양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쓰다듬었다.
“사랑해요.”
“저도, 끅... 사랑해요... 흡...”
미소 지었다. 눈을 감고 윤가영의 등을 토닥였다. 내 품에 안긴 윤가영의 몸이 작게 느껴졌다. 살내음도 약간 아기 냄새 같았다. 내가 책임져야만 할 사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머리에 꽂혔다.
윤가영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호흡도 안정되어서 새근새근 숨 쉬었다. 평소 서로를 껴안으면 으레 듣던 그 소리였다.
“여보...”
윤가영의 목소리가 살짝 쉰 듯했다. 미치도록 귀여웠다. 살폿 웃었다.
“말해요.”
“저 졸려요...”
“자요. 재워줄게요.”
“으응...”
나한테 안긴 윤가영이 스르르 몸을 옆으로 누였다. 이제야 윤가영이 네글리제를 입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윤가영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나도 이불 안에 들어가서 오른팔을 벴다. 윤가영을 바라보면서 왼팔로 윤가영을 안고 왼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토닥였다. 윤가영이 내 가슴팍에 이마를 박고 오른팔로 나를 꼬옥 안았다. 그러면서 내 오른 옆구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왠지 모르게 갓난아이가 작달막한 손에 잡힌 아빠의 손가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떠올랐다.입꼬리가 약간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윤가영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깊고 안정된 게 확실히 잠든 것 같았다. 오늘이 드라마 촬영을 하지 않는 날이라서 다행이었다. 이따 점심을 만들고 나서 윤가영을 깨워서 먹인 다음 다시 보듬어줘야 할 거였다.
점심은 죽으로 할까. 임산부는 뭘 먹어야 하지. 검색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이것저것 알아봐야 할 게 많았다.
그런데, 이준권이 돌아오게 되면 어떡하지.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준권은 윤가영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확신을 할 터였다. 순진한 바보도 아니었고 윤가영에게 눈멀지도 않았으니까. 윤가영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곧바로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앞으로 드라마 촬영에도 임하고, 가수 활동도 하고, 임신한 윤가영이 불안하지 않도록 케어해야 하고, 유은이가 도움을 바랄 때 손을 뻗어줘야 하고, 윤가영의 임신 사실을 밝혀서 여자친구들에게 용서받아야 하고, 세은이에게 내 모든 잘못을 털어놓아야 하고, 언젠가 돌아올 이준권을 상대해야 했다. 절대로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몸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나를 껴안은 윤가영의 가는 팔이 급격히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 아마 이건 책임의 무게였다.
폰이 울렸다. 진동만 울리는 게 내 폰이었다. 조심히 윤가영의 팔을 걷어서 내려놓고 뒤돌았다. 오른손을 뻗어 내 폰을 잡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깐 고개를 돌려 윤가영을 봤다.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호흡하고 있었다. 깨울 수는 없었다. 발소리가 안 나게 조심히 걸어서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면서 연결했다.
ㅡ아들.
아빠. 소름 끼쳤다.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ㅡ여보세요.
다시 들어도 이준권이었다. 끊었다. 한국에 왔나? 누구 폰으로 전화 건 거지? 어디에 있는 거야. 집으로 오는 건가? 집에 윤가영이랑 수아가 있는데. 둘 다 자고 있는데. 어떡해야 되는 거지. 씨발. 왜 하필이면 지금. 여태 윤가영이 아파할 동안 전화도 안 걸던 새끼가 갑자기 왜. 최악이었다. 더 나쁠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극악스런 타이밍이었다.
문자가 왔다. URL 형식인 게 링크인 듯했다.
[폰 들여다보고 있는 거 안다. 확인해라.]
침을 삼켰다. 목이 탔다.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찬물을 반 담아 마셨다. 문자를 확인했다. 패밀리 레스토랑 링크였다. 농담이라면 지독했다. 별생각 없이 고른 거라도 지독한 거였다.
[기다릴 테니 와라.]
기다리겠다는 게 거짓말은 아닐 거였다. 지금 마주하지 않는다면 이준권은 식사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것도 꽤 불쾌해진 상태로.
차라리 지금 내가 이준권을 보러 간다면 이준권을 마주하는 시간 만큼 묶어두는 게 되니 윤가영이랑 이수아가 대피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지금 가야 했다.
[갈게요]
[그래.]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 방으로 들어갔다. 이수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옷이랑 코트를 챙겼다. 방을 나와서 옷을 입었다. 2층으로 올라가 윤가영이 자는 모습을 내려보다가 집주소로 택시를 불렀다. 조용히 방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가며 윤가영한테 문자를 보냈다.
[이준권 귀국했어요. 지금 그 사람 보러 간 거니까 옆에 저 없다고 너무 놀라지 마요.]
[일어나서 문자 확인하면 바로 밖에 나갈 수 있게 준비해요.]
[사나흘은 집에 안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챙겨요. 이사한다 생각 들 정도로는 안 챙겨도 돼요. 이준권이 집에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집 비우게 될 때 또 챙길 기회 생길 거예요.]
[이따 또 연락할게요.]
집을 나서고 이수아한테도 같은 내용으로 문자를 보냈다.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에 바로 탑승했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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