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 겁쟁이둘 크랭크인 (2)
* * *
정하윤의 오른손을 잡고 사람이 별로 없는 산책로를 걸었다. 불빛을 내리 뿜는 전봇대를 지나쳤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헤어짐이 가까워져 가는 거였다. 그리 생각하니 이 길이 너무 아까워졌다. 발 속도를 느리게 했다. 정하윤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봐왔다.
“야.”
“응.”
“갑자기 왜 이리 느리게 걸어?”
“좀만 더 같이 있으려고.”
정하윤이 피식 웃었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오른쪽 주변 시야로 카메라 렌즈가 보였다. 내심 깜짝 놀랐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대사를 되새겼다. 다음 전봇대를 지나치고 정하윤이 입을 열었다.
“너 그거 기억나?”
“뭐?”
“학교 끝나고 같이 걸어갈 때 있잖아.”
“우리 맨날 같이 다니잖아.”
“응. 근데 네가 이서은이랑 영화 보러 간다고 하면서 이거 그린라이트냐구 막 그랬던 때. 그때 기억나?”
“응...”
“너 그때 뭐라 했지?”
“... 난 모르겠는데?”
정하윤이 피식 웃었다.
“‘우리 친구 그만할래?’”
“...”
시선을 피했다. 정하윤이 빙긋 웃으면서 내 왼팔을 잡고 팔짱을 껴왔다.
“뭔 생각으로 그런 말 한 거야?”
“몰라...”
“진짜 개 찌질했다, 이윤우.”
“... 지나간 일이잖아.”
정하윤이 히히 웃었다.
“삐쳤어?”
“아니.”
“삐쳤네.”
“아냐.”
“그럼 뽀뽀해줘 봐.”
피식 웃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정하윤도 멈춰 서더니 팔짱을 풀어주고 나를 올려봤다. 양손을 정하윤의 어깨에 얹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정하윤이 눈을 감았다. 입술을 정하윤의 왼 귀 가까이 댔다.
“해줄 줄 알았어?”
“응?”
정하윤이 눈을 뜨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정하윤이 고개를 쳐들었다.
“야...”
양손으로 정하윤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덮쳤다. 정하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술을 움직였다. 정하윤이 손을 쫙 폈다가 내 옆구리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마주 입술을 움직여왔다. 되게 서툴렀다. 진짜로 키스를 몇 번 해본 적 없는 애랑 키스하는 느낌이었다. 미치도록 흥분됐다. 여기에서 발기하면 장면 다 버리는데.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가슴이 뜨거웠다.
“쯔읍...”
입술을 뗐다. 정하윤을 가만히 내려봤다. 정하윤이 슬며시 눈을 떴다. 시선을 마주치면 데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눈을 피했다. 정하윤의 오른손을 잡았다.
“가자.”
“응...”
앞으로 나아갔다. 정하윤이 순간 오른발을 헛디뎌 휘청였다. 오른손으로 하윤이의 오른팔을 붙잡으면서 몸을 지탱했다. 정하윤이 입을 벌린 채 나를 올려봤다가 다시 바로 섰다.
“똑바로 걸어. 다치잖아.”
정하윤이 살폿 웃었다.
“알겠어.”
“...”
무릎을 쪼그려 정하윤의 발목을 살폈다. 왼손으로 한 번 주물렀다. 정하윤이 피식 웃고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였다.
“괜찮아.”
“그럼 됐어.”
다시 일어섰다. 정하윤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왼손으로 맞잡고 주머니에 넣었다. 나란히 걸었다. 할 일은 다 했다. 마음이 놓였다.
“컷! 오케이!”
오지윤 감독 목소리였다. 한시름이 놓였다. 한숨 쉬었다. 이수아가 미소를 띤 채 나를 올려봤다.
“나 손 안 놔줄 거야?”
“응? 아니.”
주머니에서 수아의 손을 꺼내고 놓아줬다. 수아가 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돌아섰다. 나도 따라서 뒤돌았다. 오지윤 감독의 표정이 산뜻했다. 잘 담긴 모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지윤 감독이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말이 퍼지고 촬영진이 부산해졌다.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이번 컷만 찍고 오늘 끝나는 거였지. 갑자기 온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고개 숙이면서 다가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지윤 감독이 빙긋 웃고 나랑 수아한테 다가왔다.
“온유 군 수아 양 오늘 연기 처음 한 거 맞아요?”
멋쩍게 웃었다.
“네...”
오지윤 감독이 살폿 웃었다.
“내일 푹 쉬고 월요일에도 좋은 컨디션으로 또 봐요.”
“네.”
왠지 창피했다. 고개를 꾸벅이고 자리를 벗어나 사람이 없는 쪽으로 갔다. 이수아가 도도도 뛰어 오른편에 나란히 서서 같이 걸었다. 두리번거리면서 윤가영을 찾았다. 윤가영도 나를 찾았는지 계속 고개를 돌리면서 둘러보다가 나를 보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김민준 실장님한테 연락했어요?”
“음...? 아니...”
“내가 할게요.”
폰을 꺼내 김민준 실장한테 촬영 끝났어요, 라고 문자 보냈다.
[위치 캡처해서 보내줄래?]
[네]
지도 앱을 켜서 현위치를 캡처하고 보냈다.
[금방 갈게]
[네 기다릴게요]
[응]
“온대?”
어느새 윤가영이랑 벤치에 앉은 이수아가 나를 올려보면서 물었다.
“응. 금방 온대.”
“으응.”
시선을 돌려 윤가영을 바라봤다.
“근데 계속 보고 있으면서 힘들지 않았어요? 오늘 찍히는 신도 없어서 심심했을 건데.”
윤가영이 고개 저었다.
“아냐. 좋았어. 너랑 수아 연기하는 거 보니까 되게 뿌듯하기도 하구... 공부도 되구.”
웃음이 나왔다.
“그럼 다행이네요.”
이수아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귀여웠다. 윤가영도 이수아도 다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느낌이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정서아랑 정시은이 팔짱을 낀 채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느껴졌다. 정서아가 고개 숙이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했다. 윤가영이랑 이수아가 인사를 받아줬다. 정시은이랑도 인사했다. 정서아가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가? 매니저님이 데리러 오셔?”
“응. 너희는 어떻게 가?”
“우리는 아빠가 데리러 와.”
“어어... 택시기사셨지, 너희 아버님.”
정서아의 눈이 커졌다.
“응. 내가 얘기했었나?”
“몰라. 근데 나 어쩌다가 한 번 너희 아버님 택시 타본 적 있었어 가지고.”
“아 그래? 근데 우연히 타는 건 돼도 우리 아빠인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탔을 때는 몰랐는데, 다음 날인가 이슬 누나가 승객이 나였다는 거 알고 나한테 얘기해줘 가지고 아버지였구나 알았어.”
“진짜? 근데 왜 아빠 나한테 얘기 안 했지? 언니한테만 말하고?”
“음, 그때 아버님이 내 전화번호 받아가서 너랑 협상할 때 히든카드로 쓰겠다고 하기는 했어.”
“진짜로 우리 아빠가 그랬었어?”
“응.”
“아... 미안해...”
피식 웃었다.
“아냐. 왠지 전화번호 드리고 싶어서 드린 거니까.”
“으응...”
정서아의 얼굴이 살짝 의기소침해 보였다. 평소 이미지랑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픽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그냥 그때 아버님이 네가 내 영상 보여주면서 얘 나랑 동갑이라고 하면서 호들갑 떨었다고 해가지고.”
“어...? 그런 얘기를 했다고...?”
“응.”
“그럼, 그럼 아빠가 뭐 더 말한 거 있어...?”
왜 다급해하는 거 같지.
“아니? 딱 그렇게만 말했는데?”
“응...”
“아버님한테 뭐 더 말한 거 있어?”
“아니...?”
어두워서 잘은 안 보이는데, 정서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 같았다. 정시은이 피식 웃었다. 나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글쎄요?”
“얘 하나도 몰라. 뭔 말 하면 거짓말일 거니까 믿지 마.”
무슨 일이 없었으면 그냥 없다고 하면 될 텐데. 얘는 모른다고 부인하는 게 되려 수상했다.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은데.”
정시은을 바라봤다.
“서아가 뭐 했는데?”
정서아가 정시은을 노려봤다. 정시은이 모른 체하는 건지 입을 열었다.
“뭐 딱히 한 거 없어요. 걍 덕질 비슷하게 오빠 영상 좀 찾아본 정도.”
“덕질까진 안 갔거든. 그럴 거면 내가 온유 버스킹 같은 거 할 때 시간되면 다 찾아가고 그랬지.”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부인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확실히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그럼 너 내가 버스킹하는 거 한 번은 본 적 있어?”
“어... 그냥 어쩌다가 한 번...?”
“딱 한 번만?”
“뭐 두어 번 어떻게 스쳐 가다가 보긴 봤던 거 같아...”
“으응. 근데 몇 번 봤으면 기억에 남았을 거 같은데 왜 모르지? 이슬 누나 거의 바로 생각났을 거인데.”
“좀 멀리서 들었거든... 그리고 금방 지나가고 그랬으니까.”
정시은이 픽 웃었다.
“언니 오빠 직캠 찍은 거 미공개 영상 하나 있어요.”
“야 뭔 직캠이야. 그냥 폰으로 남긴 건데.”
살폿 웃었다.
“무슨 영상인데?”
“‘참 묘한 일이야.’ 이랬어요.”
정시은이 멜로디를 넣어 말했다. 음색이 깨끗했다. 음정이 흔들리지도 않아서 듣기 좋았다.
“‘묘해 너와’인가 봐. 근데 너 노래 잘 부른다.”
“히. 그쵸.”
정서아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을 정시은한테 보냈다가 나를 쳐다봤다.
“너무 띄워주지 마. 진짠 줄 알아.”
“진짜야.”
정시은이 장난스레 웃었다.
“오빠가 잘 부른다잖아. 언니 나 억까하지 마.”
“... 어.”
정서아 표정이 살짝 못마땅해 보였다. 정이슬이랑 정시은이 장난기 있는 편이고, 정서아가 중간에서 무게감을 잡아주는 모양이었다.
“근데 이슬 누나는 요즘 뭐해? 오디션 한다 했잖아.”
“몰라요? 아직 탈락은 안 했다는데. 잘 되는가 봐요.”
정시은이 답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한테 직접 연락 안 해봤어요?”
“응. 애초에 누나가 나한테 오디션 본다고 얘기를 꺼낸 것도 아니니까 내 쪽에서 먼저 말하기도 그래 가지고.”
“아... 그랬죠.”
“응.”
“언니 근황 궁금하면 나한테 톡해. 얘기해줄게.”
정서아가 말했다. 정시은이 정서아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어. 고마워.”
“응.”
“매니저님 왔어 오빠.”
수아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밴이 시야에 잡혔다.
“어.”
정서아랑 정시은을 바라보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우리 갈게.”
“응. 잘 가.”
“잘 가요 오빠.”
“어. 잘 가.”
정서아가 이수아랑 윤가영을 봤다.
“잘 가 수아야. 어머님도 안녕히 가세요.”
“언니들도요.”
“둘만 있어도 되겠니...?”
“저 싸움 잘해요. 걱정 마세요.”
정시은이 말했다. 윤가영이 으응, 하고 답하고는 웃었다. 아무래도 정시은도 사차원 기질이 있는 듯했다.
“잘 가세요. 수아도 바이.”
“네.”
수아가 답하고는 밴 뒷문을 열었다. 수아랑 윤가영이 인사하면서 안에 들어갔다. 조수석에 타서 인사를 나누고 벨트를 맸다. 김민준 실장이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로 정서아랑 정시은을 봤다.
“아버지가 데리러 오신대요.”
이수아가 말했다.
“어? 응...”
김민준 실장이 멋쩍게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궁금해하는 표정이라서요.”
“으응...”
밴이 출발했다. 정시은이 우리 쪽으로 양손을 흔들었다. 정서아가 팔짱을 끼고 있다가 정시은을 보고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왔다. 창문을 열고 왼손을 짧게 흔들었다. 정시은이랑 정서아가 피식 웃었다. 창문을 닫고 백미러를 봤다. 이수아가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봤다가 눈을 감았다. 뭔가 잘못했다는 직감이 들었다. 방금 이수아랑 윤가영하고 같이 있었는데 둘보다는 정씨 자매랑 대화한 것 때문인 듯했다. 돌이켜보니 불쾌할 만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쪽으로 온 둘을 무시할 수도 없고 윤가영이랑 수아를 억지로 대화에 끌어들이는 것도 별로였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따 집에 가서 풀어줘야 할 듯했다.
“오늘 되게 힘들었지.”
김민준이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라서 그런가 지금 좀 피곤한 감은 있는데 다들 편의 봐주셔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으응. 수아는 어땠어?”
“괜찮았는데 지금 졸려요...”
“어, 자.”
“네...”
김민준이 입을 다물었다. 나도 조용히 정면을 봤다. 이수아가 눈 감은 채 윤가영한테 기댔다. 윤가영이 이수아를 보면서 살폿 웃었다. 영락없는 사이 좋은 모녀의 모습이었다. 나 때문에 어색해진 감은 있어도 돈독한 관계는 깨지지 않은 거였다.
이수아가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다가 폰을 꺼냈다. 지수랑 선우한테 촬영이 끝났다고 문자 보냈다. 금방 답장이 왔다. ng는 잘 안 났냐고, 연기해보니까 느낌이 어떻냐고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둘이 퍼붓는 질문들에 답장하다가 김민준 실장이 의식되어서 집에 가서 통화하면서 얘기하자고 보냈다. 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차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느닷없이 유은이가 떠올랐다. 서예은이 계속 착취하고 있을까. 연기 활동이라도 하고 있다면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서 유은이가 덜 괴로울 텐데. 그렇지도 않아서 더 걱정스러웠다. 유은이가 빨리 어떻게 도와주면 될지 나한테 얘기라도 해주면 몸이 피곤해지더라도 좋을 텐데. 한숨 쉬고 싶었다. 한숨을 쪼개듯 해서 입으로 작게 여러 번 숨을 내쉬었다. 세은이는 잘 지낼까. 바쁜 게 좋은 건데 빨리 여유가 생겨서 볼 수 있었으면 했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서 충돌했다. 심란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윤가영이 오른손으로 수아의 왼팔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딸, 일어나.”
“으음...”
수아가 눈꺼풀을 들었다. 눈 뜨는 게 되게 힘들어 보였다. 수아가 나를 쳐다봤다.
“내려서 나 업어줘...”
픽 웃었다.
“알겠어.”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뒷문을 열었다. 이수아가 내 등에 달라붙었다. 말랑한 가슴이 느껴졌다. 윤가영이 다음에 내리면서 김민준한테 고개 숙였다.
“감사해요.”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실장님도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내가 말했다.
“응. 잘 가. 수아도.”
“안녕히 가세요...”
수아가 인사하고는 오른손 검지로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빨리 들어가자...”
“응.”
윤가영이 앞장서서 대문이랑 집 문을 열어줬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아가 내 왼 귀 가까이에 입을 댔다.
“오빠 방으로 가자...”
“너 안 씻어?”
“오빠 방에서 씻어도 되잖아...”
윤가영 앞에서 말하기엔 대범한 말 같은데. 한편으로는 그런 말을 하는 수아가 미치도록 꼴렸다. 고개를 돌려 윤가영을 봤다. 눈이 슬펐다. 원래도 애처로움을 간직한 인상인데 평소보다 더 그런 느낌이 강했다. 사랑해주지 않고는 못 배길 얼굴이었다. 수아를 케어하고 나면 바로 아껴줘야 할 거였다. 왼손으로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눕혀줘...”
“응.”
침대 앞으로 가 뒤돌고 몸을 조심히 낮춰 수아의 허벅지가 침대에 닿게 했다. 수아가 편히 드러누웠다. 수아가 눈 감은 채 왼손을 뻗었다.
“와...”
“왜?”
“그냥 자자...”
“아냐. 일단 먼저 씻어.”
“흐응...”
“빨리.”
“알겠어...”
수아가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방에서 나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윤가영이 양손으로 초콜렛을 들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다가가서 윤가영의 뒤로 가 껴안았다.
“여보.”
“네...”
“내 입에도 초콜렛 넣어줘요.”
윤가영이 살폿 웃고는 오른손으로 초콜렛을 살짝 떼서 내 입에 넣어줬다. 혀로 녹여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같이 자요.”
“네...? 어떻게요...?”
“내 침대 넓잖아요.”
“... 근데 수아 있잖아요...”
“수아 금방 잘 거 같아요. 잠은 셋이서 잘 수도 있잖아요.”
“으응...”
“수아 자면 문자 보낼게요. 그때 들어와요.”
“네...”
미소 지었다. 윤가영도 빙긋 웃었다. 왼 볼에 입술을 맞췄다. 윤가영이 히히 웃었다. 미소가 어울렸다. 슬픈 인상이면서도 이토록 웃는 게 잘 어울리는 게 신기했다. 여러모로 놀라움만 안겨주는 사람이었다. 윤가영이 초콜렛을 한 조각 또 떼어내서 내 입에 넣었다. 당연하게 받아먹었다. 윤가영이 미소 지은 채 남은 초콜렛을 자기 입에 넣고는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씻으러 갈게여.”
“알겠어요.”
윤가영을 놓아줬다. 윤가영이 내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까치발을 들어서 오른볼에 입술을 쪽 맞추더니 2층으로 총총총 걸어갔다. 진짜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방문 앞으로 돌아가서 지수한테 전화 걸었다. 바로 연결됐다.
“여보세요.”
ㅡ여보세요.
ㅡ온유야?
선우 목소리였다. 바로 옆에서 같이 있던 듯했다.
ㅡ응.
ㅡ으응. 집 들어갔어?
“어. 잘 들어왔어.”
ㅡ어때? 되게 피곤하지 않아?
“조금? 근데 약간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그런 거 같아. 은근 체질인가 봐 연기하는 거.”
ㅡ으응. 다행이다.
ㅡ얘 나한테 전화 걸었거든.
ㅡ그래두 같이 얘기할 수도 있잖아.
ㅡ너만 자꾸 얘기하잖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귀여웠다. 웃음이 나왔다.
“말해 지수야.”
ㅡ으응... 근데 나 딱히 할 말 없어. 아까 문자로 물어볼 것도 다 물어보고 해서.
ㅡ그럼 나 더 얘기해도 돼?
ㅡ맘대로 해.
ㅡ흐흫. 너 진짜 왤케 귀여워?
ㅡ아 몰라. 하지 마.
ㅡ싫엉.
ㅡ아 진짜...
픽 웃었다. 둘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ㅡ야 이온유.
“응.”
ㅡ내일은 올 거야?
“음, 확답은 못할 거 같아.”
ㅡ올 가능성은 있는 거지?
“응.”
ㅡ그럼 와.
“알겠어.”
ㅡ응. 내일 봐.
“응. 사랑해.”
ㅡ나도 사랑해.
ㅡ사랑해 온유야.
“응. 나도 사랑해 선우야.”
ㅡ흐흫...
ㅡ나도 이름 넣고 해줘.
“사랑해 지수야.”
ㅡ응.
ㅡ그럼 형평성 맞게 나도 마일드 사랑해 한 번 해줘.
“응. 사랑해.”
ㅡ흫. 응.
ㅡ진짜 너 개유치한 거 같애 선우야.
ㅡ고마워. 나 평생 어리게 살 거야.
ㅡ그래라.
선우가 히히 웃는 소리가 들리고 쪽, 하고 입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꺅, 하고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음이 좀 낮은 게 지수가 낸 듯했다.
ㅡ너 미쳤어?
ㅡ네가 볼 뽀뽀 못 참게 굴었잖아.
ㅡ아니, 진짜 얘 개 미쳤나 봐.
ㅡ흐흫... 솔직히 얘 잘못 지분 좀 있는 거 같지 않아 온유야?
“지수가 귀엽고 사랑스럽긴 하지.”
ㅡ그니까.
ㅡ하아...
ㅡ네가 사랑스럽게 태어난 걸 탓해 지수야.
ㅡ뭔 개소리야 진짜...
살폿 웃었다.
“사랑스러워도 좀 참아줘 선우야.”
ㅡ으응... 지수 네 거니까?
“응.”
ㅡ존나 개오글거려...
ㅡ왜? 좋지 않아?
ㅡ몰라...
ㅡ어. 또 뽀뽀해주고 싶게 군다.
ㅡ하지 마라.
ㅡ히. 알겠어.
ㅡ하... 온유야.
“응.”
ㅡ음, 내가 뭔 말하려 했지?
“사랑해?”
ㅡ아... 그래. 사랑해.
“응. 나두.”
ㅡ나도 사랑해 온유야.
“나도 사랑해 선우야.”
ㅡ흐흫. 응.
ㅡ아 나 생각 났다. 너 지금 피곤하댔지?
“응. 근데 조금이야.”
ㅡ그래도. 일단 피곤하면 자둬. 잘 쉬어둬야 내일 우리 보지.
“으응.”
ㅡ지금 자.
“어. 근데 나 일단 씻어야 돼.”
ㅡ응. 씻고 자.
“알겠어.”
ㅡ잘 자.
ㅡ잘 자 온유야.
“너희도 잘 자.”
ㅡ응.
ㅡ알겠어.
ㅡ끊는다.
“응. 사랑해.”
ㅡ나도 사랑해.
ㅡ흐흫. 나도 사랑해 온유야.
“응. 진짜 끊어.”
ㅡ응.
전화가 끊겼다. 지수가 끊은 듯했다. 방 안에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물소리가 작게 들려오다가 끊겼다. 수아가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큰 수건으로 몸을 가린 수아가 나왔다.
“오빠도 빨리 씻어.”
“어.”
반팔 티랑 속옷만 챙겨서 안에 들어가고 최대한 빨리 씻었다. 침대에 내 티셔츠랑 반바지를 입은 이수아가 누워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빨리 와. 나 자게.”
“알겠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웠다. 이수아가 오른팔이랑 다리로 나를 바디 필로우처럼 쓰고 눈을 감았다. 가만히 이수아를 바라봤다. 수아가 소리 없이 숨만 쌔액쌔액 내쉬었다. 호흡이 안정되었다. 눈을 감고 속으로 100초를 셌다. 다시 눈을 뜨고 수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느낌이 잠든 듯했다. 속으로 1분만 세고 수아의 팔이랑 다리를 걷어내고 내 폰을 잡았다. 윤가영한테 문자 보냈다.
[수아 자요]
[갈게요]
즉답이었다. 문을 열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살구색 브라랑 팬티를 입고 네글리제 차림을 한 윤가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윤가영이 문을 닫고 내 왼편으로 와 누웠다.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왜인지 음탕했다. 덮치고 싶은데 수아 옆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왼팔을 윤가영한테 내어줬다. 윤가영이 내 왼팔을 베고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가영이 흐흥, 하고 콧소리 냈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행복했다. 입꼬리를 올린 채로 눈을 감았다.
여태 안 좋은 일이 많았지만 그만큼 오늘날 반대급부로 돌려받는 것만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