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화 〉 대본 리딩하는 날 (12)
* * *
침대에 누웠다. 멍하니 천장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나 살피다가 눈을 감았다. 잠이 몰려왔다. 대본 리딩을 한 피곤이 몰려온 느낌이었다. 아직 자면 안 되는데. 뭔가 지수랑 선우한테 대본 리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고 문자 보냈다. 지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연결했다.
ㅡ잘했어?
“응. 잘 된 거 같아.”
ㅡ으응. 그럼 촬영은 언제 하는 거야?
“다음 주 토요일로 알고 있어.”
ㅡ되게 가깝네. 너무 이르게 하는 거 아냐?
“몰라? 근데 오히려 좋은 거 같아. 드라마든 음악이든 빨리할수록 계획에 가까워지는 거니까.”
ㅡ으음... 그렇긴 하네.
“지금 선우 옆에 있어?”
ㅡ어. 낮잠 자고 있어. 아침 일찍 깨고 영화 보다가 지쳐 가지고.
“으응.”
ㅡ너 없어서 심심하대.
살폿 웃음이 나왔다.
“그래?”
ㅡ응. 나도 심심해. 너 없어서.
“으응... 미안해. 옆에 있어 줘야 되는데.”
ㅡ그럼 와. 옆에 있어 주고 싶으면.
“알겠어. 근데 나 저녁은 먹고 가야 될 거 같아. 이미 떡볶이 시킨 거 있어서.”
ㅡ흐음... 친구가 저녁 먹자고 불렀다고 하고 나오면 안 돼? 어플로 주문한 거면 이미 다 계산됐을 거고 받는 거는 다른 사람이 받아도 되잖아.
“으응, 그렇긴 한데... 그냥 가버리면 가영씨가 서운해할 수 있으니까...”
ㅡ... 왤케 여친이 많은 거야 너는.
“미안해.”
한숨 소리가 들렸다.
ㅡ네가 쓰레기 아니었음 나도 너랑 못 만났을 거니까 뭐 할 말이 없네...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
ㅡ됐어. 나한테도 소홀하게 안 하면 돼.
“잘할게.”
ㅡ응. 그럼 저녁 빨리 먹고 나와.
“알겠어. 배달 오는 대로 금방 먹고 나갈게.”
ㅡ어. 그럼 우리 저녁 안 먹고 기다리고 있을까?
“아냐. 배고플 수 있잖아. 괜히 나 때매 배고픈 거 참는 거 싫어.”
ㅡ그래도 난 너랑 밥 먹고 싶은데.
살짝 서운한 듯한 톤으로 말하는 게 귀여웠다. 웃음이 나왔다.
“사랑해 지수야.”
웃음소리가 들렸다.
ㅡ존나 뭐야 갑자기...
“너 귀여워서. 사랑스러워 가지구 말했어.”
ㅡ으응... 그럼 빨리 와서 사랑해주라...
“응. 진짜 좀만 먹고 바로 갈게.”
ㅡ알겠어. 선우랑 나 저녁 안 먹고 기다리고 있는다?
“음, 그럼 내가 밥 먹고 밖에 나오면 전화할 테니까, 그때 배달 주문해놓는 거 어때? 요리하는 것도 시간 걸리니까.”
ㅡ그래. 네 것도 약간 주문할까? 조금 먹고 오는 거면 배고파질 수 있을 거니까.
“음, 응. 고마워.”
ㅡ알겠어.
살폿 웃었다.
“사랑해 지수야.”
ㅡ나도 사랑해 온유야.
“응. 사랑해.”
ㅡ응... 사랑해...
평소 시큰둥한 모습만 보여주는 지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오직 나만 들을 수 있었다.
“사랑해.”
ㅡ언제까지 할 거야...
“너 지칠 때까지.”
흐흥, 하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ㅡ너 좀 귀엽게 군다 갑자기?
“원래 귀엽잖아, 나.”
ㅡ미친놈... 귀엽긴 해 솔직히.
“그치. 근데 네가 더 귀여워.”
스피커로 백지수가 큭큭 웃는 소리가 넘어왔다.
ㅡ존나 돌았나 봐...
히히 웃었다. 통화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빨리 보고 싶다.”
ㅡ그럼 빨리 넘어와. 너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겠어.”
ㅡ응.
다 대화했어, 하고 송선우가 물어보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ㅡ아 깜짝이야!
송선우가 흐흫,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ㅡ아니 깼음 깼다고 말을 하든 뭐 신호를 보내든 해야 되는 거 아냐?
ㅡ둘이 알콩달콩 통화하길래 무드 안 깨려고 말 안 했지.
ㅡ하아... 알겠어.
ㅡ흐흫. 삐쳤어?
ㅡ아냐. 아 안지 마.
ㅡ왜애. 아 밀어내지 마.
ㅡ아니 볼은 왜 비벼대.
ㅡ말랑말랑해서.
ㅡ아 씨. 내가 뭐 네 애착인형이야?
ㅡ몰라. 내 애착인간이 되어줄래 지수야?
ㅡ아 싫어. 이온유나 데리고 애착인간 만들어.
ㅡ그럴까? 온유야.
“응. 잘 잤어 선우야?”
ㅡ응응... 잘 잤지. 지수가 쓰는 침대 진짜 너무 좋은 거 같애.
“맞아. 자기 진짜 좋아, 지수 침대.”
ㅡ하기도 좋구. 그치?
살폿 웃었다.
“응.”
ㅡ흫... 이따 오는 거야 온유야?
“그러려고. 저녁 진짜 조금만 먹고.”
ㅡ그럼 또 그거 하는 거야? 셋이서?
“원하면 하는 거지.”
ㅡ너는 하고 싶어?
“난 맨날 하고 싶지. 꼭 셋이서 하는 게 아니라도.”
ㅡ흫. 알겠어. 내가 책임져줄게. 지수랑 같이.
ㅡ... 근데 꼭 다 같이 해야 돼?
ㅡ그런 건 아니지. 그럼 따로 하기로?
ㅡ응... 둘이서만 교감하는 그게 있으니까.
ㅡ으응. 그건 맞지. 오키. 오늘은 따로 하기로.
ㅡ응.
나랑 섹스하는 걸 주제로 협의한다니. 자지가 참지 못하고 껄떡거렸다. 빨리 가고 싶었다.
“얼마나 할 거야?”
ㅡ당연히 만족할 때까지지.
백지수였다. 경험상 백지수는 성적으로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인데. 아마 지칠 때까지 박아달라는 것 같았다.
“알겠어.”
ㅡ나는 네가 원하는 만큼만 하고 싶어.
송선우 목소리였다.
“그럼 나랑 평생 섹스해야 될 건데?”
흫,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ㅡ오히려 좋아.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ㅡ몰라. 빨리 와서 나를 시험해줘.
“알겠어. 진짜 혼내줄게.”
ㅡ응. 기대하고 있을게.
살폿 웃었다. 이런 기대는 충족시켜줄 수밖에 없었다.
계속 지수랑 선우하고 통화하는 중인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인 게 아마 배달이 온 모양이었다.
“나 배달 전화 왔나 봐.”
ㅡ으응. 오케이. 빨리 받고 빨리 와.
“응.”
ㅡ기다리고 있을게.
지수 목소리였다.
“알겠어. 사랑해 지수야. 사랑해 선우야.”
ㅡ나도 사랑해.
ㅡ나도 사랑해 온유야.
웃음이 나왔다.
“끊을게. 사랑해.”
ㅡ응.
ㅡ응!
통화를 끊고 끼어든 전화에 연결했다. 배달왔습니다, 하고 건조하게 말하는 소리가 넘어왔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방을 나서서 현관에 갔다. 슬리퍼를 신고 나가 떡볶이를 받았다. 주방으로 가 테이블에 봉투를 놓고 하나씩 다 꺼냈다. 이수아한테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가다가 통화가 연결됐다. 물이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씻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윤가영의 나신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수아의 몸이 상상됐다. 둘은 비슷한 몸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수아가 약간 더 키가 크고 윤가영보다는 가슴이랑 엉덩이가 조금 작다는 거였다. 뭐 이런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한심했다.
“여보세요.”
ㅡ왜?
“떡볶이 배달 왔어.”
ㅡ아 너무 빨리 온 거 아냐?
“아직도 씻는 게 더 에바 아냐?”
ㅡ아니 물 받아서 목욕하면 그럴 수도 있지.
“어. 끊을게. 빨리 나와.”
ㅡ응.
ㅡ곧 나갈게 온유야...
윤가영 목소리였다. 왠지 모르게 야릇했다.
“네. 끊을게요.”
ㅡ응...
전화를 끊었다. 물소리를 의식하게 된 뒤부터 완전히 알몸이 된 모녀가 욕조에 들어가 살을 맞대는 모습이 자꾸만 그려졌다. 자지가 움찔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미칠 것만 같았다. 이게 다 이수아 탓이었다.
포장을 다 뜯어두고 기다렸다. 얼마 안 가 윤가영이랑 이수아가 나란히 걸어왔다. 둘 다 머리가 약간 물기 어려있었다. 드라이어를 약간 쓰기는 한 거 같은데 차마 다 말리지는 못하고 온 듯했다.
윤가영은 검은 긴 바지에 베이지색 롱슬리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자기 옷인 듯 잘 어울렸다. 티셔츠는 사이즈가 살짝 커서 몸매가 부각되지는 않았다. 반면 이수아는 분홍 돌핀팬츠에 검은 브라가 비치는 흰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살색이 보였다. 진짜 나를 꼬이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발칙하기 그지없었다. 피가 밑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살짝 조정했다.
이수아가 자연스럽게 내 왼편에 앉고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맛있겠다.”
이수아가 나를 쳐다봤다.
“맛있게 먹을게 오빠.”
“응.”
윤가영이 이수아의 왼편에 앉고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나도 나무젓가락을 잡았다.
이수아가 저돌적으로 떡을 집어 먹었다. 나도 빨리 먹고 가야 하는데. 핫도그를 들고 떡볶이에 푹 찍은 다음 입에 넣었다. 자극적으로 맛이 있었다.
분모자랑 떡이 금방금방 사라졌다. 이수아가 먹는 속도가 꽤 빨랐다.
이수아가 우물우물거리면서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음, 진짜 떡볶이 존맛.”
“너 근데 왜 떡만 먹어.”
“떡 먹으려고 떡볶이 주문한 거니까.”
“튀김도 좀 먹어.”
“알아서 먹을게.”
“어.”
이수아가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오른손으로 핫도그를 들어 로제 떡볶이 소스에 푹 찍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이수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으음.”
이수아가 젓가락으로 떡볶이에 있는 소시지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들어간 게 많은지 볼이 빵빵했다. 욕심 많은 햄스터라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햄스터보다도 귀여운 느낌이었다.
윤가영이 이수아를 보면서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급하게 먹지 마... 체해...”
이수아가 우물거리다가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겠어. 조심할게.”
“응...”
“근데 나 요즘 식욕 너무 많아진 거 같애. 나 살찌면 어떡해 엄마?”
“딸은 좀 쪄야 돼. 지금 너무 말라서.”
“아닌데. 나 찌면 볼품없어질걸.”
“아니야... 딸이 어떻게 볼품없어. 그럼 엄마는 폐품일 건데...”
“아냐.”
이수아가 콜라를 마시고 두 팔로 윤가영을 안고는 윤가영의 오른 어깨에 왼볼을 댔다. 윤가영이 오른팔로 이수아를 안았다.
“엄마 엄청 예뻐. 그냥 여신이야.”
윤가영이 히죽 웃고 왼손으로 이수아의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떡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둘을 앞에 두고 떡볶이를 먹자니 뭔가 간식을 먹으면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시트콤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수아를 보던 윤가영이 고개 돌려 나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저녁 먹고 뭐 할 거야 온유야?”
“아, 저 친구들 보러 가야 돼요.”
“친구들...?”
“네.”
“으응...”
이수아가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봤다.
“뭐 집에 안 돌아와?”
“응.”
“왤케 외박을 많이 해?”
“내가 외박을 많이 하는 건가?”
“어. 존나 많이 하는데? 완전 밖에서 사는 수준으로?”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
“아냐. 거의 분가한 정도야 진짜.”
확실히 지수랑 거의 결혼한 것처럼 살기는 했다.
“그런가. 뭐아무튼.일단 친구 만나고 친구네에서 잘 거 같아요.”
“응...”
“그럼 내일은 뭐 할 거야 오빠?”
“몰라.”
“학교 끝나고 집 올 거지?”
“글쎄? 좀 놀다가 친구네에서 잘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건 진짜 안 돼.”
“왜.”
“나랑 대본 연습해야지.”
“리딩 오늘 잘 마쳤잖아.”
“그래도 촬영 전까지는 계속해.”
“생각해볼게.”
이수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놓고 애교스러운데 가증스럽지는 않고 귀엽기만 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볼게.”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그냥 오겠다고 해.”
“알겠어.”
“그럼 촬영 전까지 매일 집 오는 거다?”
“그건 조금 아니고.”
“이 씨... 알겠어. 주에 한두 번은 밖에서 자는 거 허락해줄게.”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네가 무슨 사감이야? 단속하게?”
“아니? 뭘 사감이라고 비유를 해. 여자친구면 몰라도.”
“여자친구는 아니지.”
“왜? 나이 같은 거 생각하면 사감보다는 낫지 않아?”
“아닌데.”
“그럼 뭐 내가 오빠보다 어린데 엄마라고 해?”
윤가영이 흠칫했다. 당장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아니. 뭐 암튼 여자친구는 아니라고.”
이수아가 피, 하고 김빠진 소리 냈다.
“저녁이나 먹자.”
내가 말했다. 이수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젓가락으로 망설임 없이 소시지를 집어 입에 넣었다.
식욕이 많아졌다는 게 빈말이 아니기는 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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