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 대본 리딩하는 날 (8)
* * *
“저기예요.”
다 같이 걷던 중에 김민준이 말했다. 문 앞에 겁쟁이둘 대본 리딩실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나만 떨리는 건가. 고개를 돌려 왼편에 있는 이수아를 봤다. 말없이 걷고만 있는 게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웃음이 나왔다.
“떨려?”
“...”
이수아가 말없이 나를 째려봤다. 날 서 있는데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고 귀엽기만 한 게 겁에 질려서 털을 세우는 고양이 같았다.
“오빤 긴장 안 돼?”
“돼. 너보다는 조금.”
“씨...”
이수아가 내 왼팔을 잡아서 강제로 팔짱을 꼈다. 한 발짝 뒤에서 걷던 윤가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 들어가게...?”
“응. 안 떠는 기운 좀 받게.”
“으응...”
윤가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준 실장이 우리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갈까요?”
“네.”
내가 답했다. 김민준 실장이 문을 열었다. 길게 늘어진 두 줄의 테이블이 중앙에 있었다. 배우들이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미 앉아있는 사람도 몇 명 보였다.
각 자리에는 대본하고 500 ml 짜리 생수 하나랑 보리차가 함께 있었다. 배우 이름과 배역이 쓰인 삼각명패도 같이 있어서 누구인지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을 듯했다.
생소한 곳이라 그런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살짝 얼떨했다. 이제 돌아다니면서 배우분들이랑 인사를 나누고 해야 하나. 조금 어색했다.
더 안쪽으로 발을 뻗는데 우연히 어떤 여자랑 눈이 마주쳤다. 얕게 고개 숙이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했다. 상대가 아, 안녕하세요, 하고 멋쩍게 답하고 도도도 뛰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잘은 모르겠는데 스태프였던 것 같았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앉아있던 사람 중 몇몇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다가가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이수아랑 윤가영도 내 옆에 붙어서 안녕하세요, 라고 했다. 이윤우의 친구 역을 맡은 남자 배우분이 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맞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윤우, 정하윤, 그리고 정하윤 어머님 맞죠. 역할.”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보자마자 느낌이 왔어요. 비주얼이랑 인상 같은 게 되게 찰떡이셔서.”
멋쩍게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답했다. 돌아다니면서 기계적으로 안녕하세요를 반복하며 다른 배우분들이랑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배우분들이 성격이 다 제각기 달라서 그런가, 어조나 반응이 다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대체로 다 살가운 느낌이었다.
눈으로 훑어 내 자리를 찾았다. 내 이름이랑 배역 이름이 적힌 삼각명패가 앞자리에 있었다. 내 오른편에는 이수아 자리였다. 이수아의 오른편에는 정하윤 어머님이라고 배역 이름만 쓰여 있고 배우 이름은 쓰여 있지 않았다. 아직 배우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자리는 만든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정하윤 어머님 역은 작 중에 되게 안 나오는데. 자리 배치를 비중 순으로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앗, 다 오셨네요.”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겁쟁이둘의 작가인 정이슬의 동생, 정서아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도수 없는 안경에 흰 와이셔츠,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뭔가 어른스러운 느낌을 주는 차림새였다. 옷과는 별개로 정서아라는 사람 자체도 성숙한 인상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많은 스태프와 배우, 그리고 자본이 투입되는 드라마를 써냈으니비성인인 지금에도 정서아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서아가 윤가영을 보며 고개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
“수아도 오랜만이네.”
“안녕 언니.”
“응.”
정서아가 이번에는 나를 쳐다봤다. 내가 전에 정서아랑 말을 놨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았다. 입을 열었다.
“안녕.”
정서아가 눈웃음 지었다.
“응. 배우분들이랑 인사는 나눴어?”
“응, 있는 분들이랑은 짧게 다 했어.”
“으응. 그럼 일단 자리 앉아있을래?”
“응.”
정서아가 윤가영을 봤다.
“혹시 어머님 역 맡아주실 생각 있으세요? 이미지 맞는 분을 찾기가 어려워서...”
“아, 네. 저 그 말 하려고 했어요...”
윤가영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는 게 창피한 듯했다.
“네, 네. 편히 말씀하세요.”
“그니까, 제가 그 역 해도 될까요...?”
정서아가 빙긋 웃었다.
“네!당연하죠!감사해요. 감독님이 되게 좋아하실 거예요.”
“네... 다행이네요...”
정서아가 정하윤 어머님 배역이 적힌 명패를 봤다.
“그럼 저거 빨리 바꿔 놔야겠네요. 우선 앉아 계세요.”
“네...”
윤가영이 얼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자리에 앉았다. 오른쪽에 이수아가 있고, 그 옆에 또 윤가영이 있는 모습이 뭔가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장소의 변화가 주는 느낌이 커다랬다.
내 자리에 놓여 있던 대본을 펼쳐 들었다. 이윤우, 정하윤, 그리고 이서은의 비중이 거의 지배적인 수준으로 높았다. 이수아, 나, 정시은 중 한 명이라도 캐릭터의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게 역할을 잘못 소화한다면 문제가 생길 거였다. 각본 자체가 워낙 재밌어서 흥행이야 할 테지만, 한 명밖에 없는 남주 연기가 아쉽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죄책감과 미안함에 이루 할 말이 없게 될 터였다.
괜히 목이 탔다. 물을 들이마시면서 천천히 장을 넘겼다. 익숙한 대사들을 속으로 곱씹었다.
“오빠.”
이수아 목소리였다. 오른쪽으로 고개 돌려 이수아를 바라봤다.
“응.”
이수아가 히 웃었다.
“지금 좀 쫄리지.”
“어. 너도?”
“난 막상 다가오니까 오히려 괜찮은데.”
“실전에 강하다 이거야?”
“응.”
이수아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오고는 오른손을 까딱였다. 설마 지금 대뜸 키스하자는 건 아닐 테고. 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겠지. 일단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근데 진짜 우리 교체 안 되겠지...?”
웃음이 나왔다. 자신감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어야 될 건데 자꾸 오락가락 해대는 게 귀여웠다.
“아닐 거야.”
“응...”
멀리서 오지윤 감독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손에 삼각명패를 든 오지윤 감독이 출연자들 한 명 한 명과 인사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게 우리도 서야 할 듯했다. 오른팔 팔꿈치로 이수아를 톡 건드리고 일어났다. 이수아도 따라 일어서고는 윤가영을 봤다. 이수아가 오른손 검지로 윤가영의 왼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윤가영이 이수아를 쳐다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느새 다가온 오지윤 감독이 윤가영을 보면서 미소 짓고는 윤가영의 자리에 삼각명패를 내려놓았다.
“가영씨.”
윤가영이 흠칫하고는 고개 돌려 오지윤 감독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지윤 감독이 눈웃음 지었다.
“결심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아뇨... 아무것도 없는데 믿고 기회 주셔서 감사해요...”
오지윤 감독이 흐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 가영씨 왜 이렇게 맘에 들죠? 계속 보고 싶은데.”
윤가영이 멋쩍게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알겠어요.”
오지윤 감독이 이수아랑 나를 바라봤다.
“간만이네요. 수아 양이랑 온유 군.”
얕게 고개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수아가 뒤따라 말했다.
“근데 시험은 언제 봐요? 촬영 시작하면 학교 좀 자주 못 나가게 될 건데.”
“5월 초일 거예요.”
“그럼 시험 기간에 걸칠 확률 높겠다. 괜찮아요 그래도?”
“네. 드라마가 더 중요하죠.”
오지윤 감독이 빙긋 웃었다.
“그래요 그럼.”
뭔가 이제 슬슬 시작할 분위기인데. 짜증스럽게도 오줌이 마려워졌다. 목이 타는 탓에 물을 많이 들이부은 게 화근이었다. 중간에 흐름을 끊을 수는 없으니 당장 빨리 가야 할 듯했다.
“근데 시작은 언제 하죠?”
“곧 할 거예요. 왜요?”
“저 잠깐 화장실 좀 가야 할 거 같아서요.”
“아. 빨리 가요. 나가면 바로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왠지 너무 급하게 가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거 같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화장실 마크가 눈에 보였다.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교복 와이셔츠에 조끼, 그리고 교복 치마를 입은 정시은이 화장실에서 나와서 복도를 걸어오는 게 보였다. 바로 눈이 마주쳤다.
“어, 온유 오빠. 안녕하세요.”
내가 정시은이랑도 말을 놨었나. 아마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정시은이 히 웃었다.
“네. 근데 오빠 우리 첫째 언니랑 연락 자주 해요?”
“자주는 안 하는 거 같은데요.”
“으음... 그럼 우리 언니 어제 오디션 본 거는 알아요?”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느껴졌다.
“아 그랬어요?”
“네. 연락 없었어요?”
“네... 몰랐어요.”
정시은이 히 웃었다.
“창피해서 주변에 감추고 우리한테만 말했나 봐요.”
“아... 근데 그럼 그거 저 알려줘도 되는 거예요?”
“상관없을걸요. 애초에 제가 알려줬다는 걸 언니만 모르면 되죠. 오빠가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해주면 끝이고.”
“으음...”
“그럼 우리 비밀 하나 생긴 거네요?”
웃음이 나왔다. 정시은도 마주 빙긋 웃었다.
“오빠. 저한테 반말해주셔도 돼요.”
“그래? 알겠어 그럼.”
정시은이 히히 웃었다.
“오빠 반말하는 거 좋아요.”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뭐라 반응하기가 어려운데?”
“히... 그래서 저도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했어요. 암튼. 언니 오디션 적당히 올라가고 방송에도 비중 있게 나오고 하면 알아서 셀프 피알하고 다닐 거예요.”
“으응. 그럴 거 같네, 확실히.”
“그쵸. 근데 우리 언니가 오빠 좋아해요?”
“응?”
되게 직설적이네. 근데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만약 정이슬이 동생들한테 많은 걸 털어놓는 편이라서 나한테 공개 고백했다는 일 같은 걸 밝힌 적이 있다면 어떡할까.
그냥 적당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정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어요. 화장실 가던 거였어요?”
“응.”
“아, 죄송해요.”
“괜찮아. 급한 건 아니라서.”
“네. 회의실에서 봐요.”
“응.”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요 오빠.”
왜 또 부를까. 뒤돌아봤다.
“요도가 길수록 오줌을 잘 참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어디서 들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 그래...”
정시은이 헤헤 웃었다.
“tmi 죄송해요. 제가 좀 생각나는 대로 뱉어서요.”
“어...”
당황스러웠다. 쟤도 약간 정이슬 과구나. 정이슬이랑은 좀 다르게 배우스러운 차분한 느낌도 있던 거 같은데. 아마 은은하게 미친 타입인 모양이었다.
정시은이 돌아서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얼떨떨한 상태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바지를 내리고 방뇨했다. 손을 씻으면서 거울을 봤다. 곧 이윤우가 되어야 할 얼굴이 보였다.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