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9화 〉 대본 리딩하는 날 (4)
* * *
내 왼편에 앉은 정하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너 이세은이랑... 아...”
정하윤 배역을 벗어던진 이수아가 입을 벌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아 존나 혀 꼬여...”
이수아가 한숨을 쉬고는 오른손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연기를 잘못했다고 스스로 혼내는 건가. 이수아는 진짜로 답답해하는 것 같은데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귀엽게만 보였다. 더 놀리고 싶었다.
“너 시간 흐를수록 점점 더 못해지는 거 같은데?”
“아 씨...”
이수아가 나를 째려봤다.
“짜증 나게 하지 마...”
짜증내는 것도 왠지 의기소침한 게 귀여웠다. 웃음이 나왔다.
“왤케 쫄았어.”
“씨발... 넌 안 쫄림?”
“몰라. 긴장은 되는데 너만큼은 아닌 듯.”
“존나...”
“근데 이세은은 누구야? 이서은이랑 김세은 섞었어?”
“몰라. 그런가 보지.”
겁쟁이둘에서 정하윤이 연적으로 생각하는 게 이서은인데, 그럼 이수아는 김세은을 이서은 같은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진짜 윤가영이 말했던 대로 이수아가 나를 이성으로서 호감을 품고 있는 걸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냐?”
“걍. 근데 너 만약에 나중에 진짜 촬영 들어갔을 때도 이세은이라고 하면 어떡해?”
“아 안 그래.”
픽 웃었다. 이수아가 불만스러운지 표정을 구겼다.
“아 왜 그러는데에... 나 진짜 존나 긴장돼서 미칠 거 같은데...”
“왜? 너 연기 잘하잖아.”
“아니이...”
이수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긴장이 그렇게 많이 되나. 약간 걱정이 되기는 한데 위로의 말을 건네주기 이전에 웃음이 나왔다.
“아 왜 웃는데에...”
“너 안절부절못하는 게 웃겨서.”
“오빠 존나 사디스트야?”
“아니. 그래서 왜 긴장하는데? 너 연기도 잘하고 자신감도 있었잖아.”
이수아가 한숨 쉬었다.
“대본 리딩 하다가 잘 소화 못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도 있대...!”
“응? 왜 갑자기 그런 걱정을 해.”
“아니 대본 리딩 찾아보는데 그런 소리가 있잖아...”
“너 연기 잘한다니까. 내가 보기에 걱정 안 해도 돼, 진짜로.”
“아니 나 떨어서 못하면 좆되잖아... 지금도 존나 긴장되는데...”
“흠. 너 약간 악순환하는 느낌인데? 캐스팅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대본 리딩 다가올수록 긴장하고, 그 긴장감 때문에 더 못하고, 그렇게 평소보다 못하는 거 스스로 알아서 현장에서 잘못할까 봐 더 떨고.”
“아 나도 알아...”
“알면 순환고리를 끊어.”
“어떻게 끊는데...?”
“연습을 멈추고 릴랙스를 하면 될 거 아냐.”
“아 안 돼... 지금 잘돼야 가서도 잘할 거 같단 말야...”
“그럼 잠깐 진정하고 연습 재개하자.”
“아니 그럴 시간 없잖아... 이제 좀만 있음 갈 시간인데...”
“음. 그렇게 생각하면 더 연습할 시간도 적지 않아?”
“그니까... 빨리 해야 된다고...”
“무슨 장면할 건데?”
“...”
“뭔데. 빨리 말해봐.”
“...”
이수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키스신, 이라고 우물거렸다. 얘 진짜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 뭐?”
“키스신이라고오...”
“... 왜 키스 신을 갑자기?”
“대본 리딩할 때 뒷부분 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나 거기 정하윤 이해 잘 안 된단 말야... 다른 사람으로 교체 안 되려면 캐릭터 이해도도 높여 놓아야 되고... 지금 다른 장면 더 할 시간도 없으니까...”
“아니 그 정도 시간은 있는 거 같은데.”
“... 나랑 키스하기가 그렇게 싫어?”
이건 뭐 긍정도 부정도 못 할 질문인데.
“싫은 거 아님 걍 하면 되잖아...”
“나 뭐라고 답 안 했잖아.”
“침묵이면 긍정 아냐?”
“꼭 그런 건 아니지.”
이수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싫어도 어차피 나랑 키스해야 되거든?”
“알아.”
“... 존나 짜증 나...”
말은 짜증 난다고 하는데 표정은 서운해 보였다.
“오빠는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돼도 상관없어?”
지금 부정하면 트롤짓이든 뭐든 할 거 같은데.
“그건 아니지.”
“그럼 왜 존나 나랑 연기하기 싫은 것처럼 구는데?”
“너랑 연기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키스신 연습하기가 그렇다는 거지. 일단 남매 사이니까.”
“... 피 안 이어졌는데 남매 사이인 게 뭐가 중요한데?”
나한테는 중요했다. 새엄마랑 섹스한 것도 모자라서 새엄마의 딸인 새여동생까지 내 여자친구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좀.”
“... 나는 좀 이러네.”
“삐쳤어?”
“아니. 존나 삐칠 게 뭐 있다고.”
이수아가 오른손으로 대본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등지고 서서 뒷모습만 보였다. 검은 돌핀팬츠 밑으로 살짝 드러난 엉덩이랑 허벅지가 시선을 빼앗았다. 이런 걸 볼 때가 아닌데 왜 눈에 들어오지. 입을 열었다.
“어디 가?”
“아니 오빠가 연습 더 안 한다며. 그럼 나도 잠깐 쉬어야지. 내 방 들어가서. 존나 대본 리딩 망하든 말든.”
삐칠 대로 삐친 거 같은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궁시렁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웃음이 나왔다.
문으로 가는 걸음이 좀 느린 게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게 보내면 이수아가 진심으로 마음 상해서 대본 리딩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집에 머물러 있겠다고 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냥 단순히 귀엽다고 웃고만 있어도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근데 붙잡으면 또 키스신을 연습한답시고 입술을 맞대게 될 텐데. 그래도 좋은 걸까. 윤가영이 싫어할 텐데. 그렇다고 이대로 보내면 또 어떻게든 트러블이 생길 거고. 머리가 번잡했다. 일단은 붙잡아야 할 거였다. 입을 열었다.
“수아야, 일로 와.”
이수아가 뒤돌아서 나를 봤다. 눈빛이 사나웠다. 붙잡지 않았으면 완전히 엎어졌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더 연습한다며.”
“... 내가 뭐 존나 오빠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해야 돼?”
자존심 세우는 것도 귀엽네.
“그럼 안 할 거야?”
“...”
이수아가 말없이 도로 걸어와서 내 왼편에 앉았다.
“키스신하는 거다.”
여기서 못을 박네. 불러 세운 입장에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일단 수긍해야 했다.
“응. 입술만 잠깐 맞대는 거다.”
“어. 대본이 그렇게 돼 있잖아.”
“그니까.”
“... 근데 내가 먼저 하고 그 담에 또 네가 키스해오는 부분 있잖아.”
“응.”
“생각해보면 그거는 좀 길지 않아?”
“그래도 일단은 연습이니까 짧게 하고 끊어도 상관없겠지.”
“... 근데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맞지 않아?”
“나는 그렇게 하기 좀 그래.”
“아니, 뭐만 하면 좀 그렇대 아까부터.”
“진짜 좀 그러니까 그렇지.”
“아 뇌절 그만해!”
살폿 웃었다.
“알겠어.”
웃고는 있지만, 속은 복잡했다. 이수아랑 키스를, 진짜로 해도 되나? 난 얘 엄마랑 키스도 모자라서 섹스까지 한 사람인데?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배덕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죄악감이 가슴을 쥐어짜댔다. 심장이 바삐 뛰었다.
이수아가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나랑 키스하는 걸 상상하나. 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고 싶었다.
“대본 안 봐?”
“... 봐야지. 난 오빠가 나한테 할 말 있나 해서.”
“아냐. 없어.”
“응.”
이수아가 자기 대본집을 펼치고 고개 숙여 장을 차차 넘겼다.
이수아는 나랑 키스하기 위해서 핑계 삼아 키스신 연습을 하자고 제안한 걸까 아니면 진짜로 정하윤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어서 키스를 해보자고 한 걸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당장 중요한 건 이수아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키스를 해보자고 한 것인가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이수아랑 키스를 해도 되는가였다. 고민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었다. 빨리 생각을 마쳐야 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이수아랑 키스를 해야 했다. 만약 지금 연습 차원에서 한 번 입술을 맞댄다고 해도 거시적으로 보면 지금 키스를 안 했을 때와 했을 때를 비교할 시 그다지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수아랑 키스한 사이가 되리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니까, 처음으로 이수아랑 키스를 한 시점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 외에 크게 뭔가가 있지는 않을 터였다.
“오빠 나랑 빨리 키스하고 싶어서 그래?”
“아니, 나 그냥 머리 복잡해서.”
“... 그냥 입술 맞대는 건데 복잡할 게 뭐 있다고.”
“키스 한 번도 안 해본 애가 말하기에는 너무 대범한 말 아니야?”
“아니. 오히려 안 해봤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그럼 해보고 나면 너도 머리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거야?”
“몰라. 뭘 그런 걸 따져. 그냥 빨리 대본이나 읽어.”
왠지 이수아도 어색해하는 듯했다.
“어.”
대본집을 잡고 펼쳐서 빠르게 장을 넘겼다.
“첫키스 장면 말하는 거 맞지?”
“응.”
“...”
정하윤이 박력 있게 키스하고 이어서 이윤우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확실히 이수아 말대로 이윤우가 키스할 때는 좀 길게 이어져야 했다. 물론 당장은 최대한 짧게 끊겠지만, 실제로 촬영에 돌입했을 때는 적당히 끌어야 할 터였다. 어쩌면 ng를 당해서 반복적으로 이수아랑 키스를 오래도록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이수아가 노려서 ng를 여러 번 낼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안 될 일인데 내가 어떻게 막을 수도 없을 거였다.
“다 읽었어?”
“어...”
대본에서 시선을 뗐다. 이수아는 이미 다 읽었는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갑자기 얼굴이 확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수아도 나랑 비슷한지 얼굴이 발그레해진 느낌이 났다.
이제 진짜 이수아랑 키스해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