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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348화 (347/438)

〈 348화 〉 대본 리딩하는 날 (3)

* * *

내 침대에 드러누운 이수아가 왼손으로 대본집을 들어 올리고 오른손으로 휙휙 넘겼다. 대충 오 분은 넘은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장면 고르는 데 오래 걸리는 거지?

“너 뭐해?”

“몰라.”

이수아가 대본집을 내려놓고 두 팔을 침대에 댔다. 뭔가 현탐이라도 온 듯한 표정이었다.

“오빠가 정해.”

얘 왜 이러지.

“... 어.”

대본집을 슥슥 넘겼다. 해가 저무는 시간, 하굣길에서 정하윤과 느릿느릿 나란히 걷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오디션에서 연기한 부분이라서 그런 건가. 마음에 내켰다.

“나 겁쟁이둘 오디션 갔을 때 한 부분 기억나?”

“거기 그, 눈에 입김 불어주는데?”

“응.”

이수아가 히죽 웃었다.

“존나 변태야 오빠?”

“싫음 딴 데 하고.”

“아냐.”

이수아가 벌떡 일어나 상체를 세우고 대본집을 왼손에 쥐었다.

“해.”

이수아가 대본집을 빠르게 넘겨 장면을 찾고 대본집이 접히게 꾹꾹 눌렀다.

“또 외우고 할 거야?”

“응. 기왕이면 읽는 것보단 외우고 하는 게 좋지 않아?”

“그래. 난 보고 할게.”

“어.”

대답을 듣고 고개 숙여 대본을 봤다. 내가 깨알 같은 크기로 적어놓았던 글귀가 많았다. 둘이 함께 걷는다는 점에서는 평소랑 같지만, 왠지 모르게 거리가 한 발짝 먼 느낌. 이서은의 조언에 따르면서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던 것이 오히려 더 우리 사이를 멀게 한 걸까 하고 가슴 졸임. 초조함을 안고, 정하윤을 보지 않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함.

고개를 들었다. 이수아는 아직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 외우면 말해.”

이수아가 대본집을 침대에 엎어지도록 내려놨다.

“다 외웠어.”

“그럼 시작한다?”

“응.”

시선을 내려 대본을 보고, 입을 열었다.

“걔가 나랑 영화 보재.”

정하윤이 나를 보면서 픽 웃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쩔, 아 씨... 왜 혀 꼬이지?”

뭐지. 애드리브인가? 정하윤이 가끔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이니 한 번쯤은 이렇게 혀가 꼬이는 것도 적절한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아 다시 해.”

“어. 미안.”

이수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사과해?”

“... 너 애드리브한 거 아니었어?”

“아닌데? 그냥 혀 꼬였던 거였어.”

“아... 너 연기 잘해서 실수한 건 줄 몰랐어.”

이수아가 피식 웃었다.

“지금 나 칭찬해준 거야?”

“어. 하지 마?”

“아니?”

이수아가 히죽 웃었다.

“오빠 지금 좀 귀엽다?”

“뭐래. 기어오르지 마라.”

이수아가 킥킥 웃었다.

“오빠 반응 격하게 하는 거 왤케 웃겨?”

“됐어. 연기나 해.”

“왜. 좀 놀아줘.”

“내가 장난감이야? 너랑 놀아주게?”

“아니, 친구랑 같이 놀아주는 느낌으로 놀아달라는 거지. 뭐 수동적으로 갖고 놀아져달라고 했어 내가?”

“너 평소에 나한테 발기 드립 치고 그래서 저절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잖아.”

“안 해. 나 지금 좀 긴장돼서 풀려고 놀아달라고 한 거야.”

“네가 긴장을 왜 해.”

“아니 존나 긴장될 수밖에 없으니까 긴장하지.”

“그렇게 긴장되면 대본 리딩할 때 실수 안 하게 더 연습이나 해.”

이수아가 콧숨을 내쉬었다. 심술이 나는지 뾰로통해 보였다.

“진짜 개 꽉 막혔네.”

“맞는 말 한 거로 꽉 막혔다 하면 어떡해.”

“아니 맞는 말을 해도 좀 유하게 말하거나 내가 부탁한 대로 긴장 좀 풀게 도와줄 수도 있는 거잖아.”

“난 안 그래.”

이수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오빠 나한테만 그렇게 다 공격적으로 받아치는 거 맞아?”

“응.”

“다른 사람들한테 하는 것처럼 해줘 보면 안 돼?”

“아까 한번 했잖아. 너 실수한 거 안 무안하게 연기 잘한다고 칭찬하고.”

“그럼 계속 그렇게 해줌 되잖아.”

“근데 네가 이상하게 반응하잖아.”

“이상하게 안 할게.”

“못 믿어.”

“아니... 근데 내가 이상하게 반응하기는 했어?”

“아까 칭찬해주니까 피식 웃고 나한테 귀엽다고 했잖아.”

“아니 내가 느낀 게 그거라서 솔직하게 말한 건데 뭐.”

“난 네가 나 귀엽게 보는 거 싫어.”

이수아가 픽 웃고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빠 그건 뭐 어디 드라마 대사야?”

“...”

내가 했던 말을 돌이켰다. 부끄러웠다. 전신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아니. 내 말은, 네가 나 귀엽다고 말하는 게 싫다고. 귀엽다 같은 인물에 대한 호감이 기반된 긍정적인 평가의 말을, 나에 대해서, 네가 네 입으로 하는 걸 듣기 싫다고.”

이수아가 눈웃음 지었다.

“알겠어 오빠.”

“...”

“오빠 거울 좀 봐봐.”

“싫어. 존나 빨개졌을 건데.”

“오 어떻게 아네?”

“...”

“오빠 지금 존나 쪽팔리지.”

“어.”

이수아가 히 웃었다.

“그러게 누가 드라마 남주처럼 말하래?”

“씨발...”

이수아가 더는 웃음을 못 참겠는지 끅끅대면서 대소했다. 난 왜 그 순간 존나 이상하게 말했을까. 현자타임이 왔다.

이수아가 왼손으로 내 오른 가슴팍을 팍팍 때렸다. 오른손을 들어 손등이 내 가슴팍에 닿게 하고 이수아의 손을 막았다. 이수아가 왼손으로 침대를 짚고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오빠 존나 웃겨.”

“긴장 풀렸어?”

이수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몰라. 좀 더 해주면 안 돼?”

“못 해.”

“맘만 먹으면 해줄 수 있는 거 같은데.”

“못 한다고.”

이수아가 히히 웃었다.

“뭐가 웃긴대?”

“아니, 아까 오빠가 말한 거 생각나서.”

“...”

“근데 오빠 지금 진짜 존나 귀여운 거 알아?”

“귀엽다고 하지 마라.”

이수아가 큭큭거렸다. 창피해서 정신이 살짝 혼미했다.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어야 하나.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수아가 눈으로 나를 좇았다.

“왜?”

“세수하게.”

“창피해서?”

“어.”

“으응... 빨리 해.”

“어.”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늦으면 딸 치는 거로 알 거야.”

고개를 돌려 이수아를 내려봤다. 눈웃음 짓고 있는 게 영락없이 장난기 넘치는 어린 애였다.

“너 진짜 자꾸 그러면 뒤진다.”

“욕한다. 또 당황했다.”

“...”

이제 이수아는 위협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 그냥 화장실 안에 들어가고 싱크대 물을 틀어 빠르게 손 씻은 다음 양손을 모아 물을 받았다. 얼굴을 밑으로 내리고 손을 올려 찹 소리가 나게 물을 끼얹었다. 세 번만 물을 묻히고 수도를 닫은 다음 한숨을 쉬었다. 체온이 그나마 좀 내려간 듯했다. 수건에 물기를 닦고 나갔다. 이수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무릎에는 대본집이 올려져 있는 게 이제는 적어도 앉아서 연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딸은 안 쳤네?”

“...”

말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수아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왜 그래.”

이수아가 말하면서 내 뒤에 빠르게 붙어와서 양손으로 내 오른손목을 잡았다.

“미안해. 이제 안 할게 오빠.”

“진심?”

“응. 연습해야지.”

“... 너 이상하게 반응 안 하고 그런다면서 바로 나한테 드라마 남주냐고 하고, 화장실 가는데 딸 친다 드립 친 거 생각하면 그냥 안 지킬 마음 먹고 공수표 던지는 거 같은데.”

“아냐. 나 진짜 연기에는 진지하잖아. 대본 리딩 망칠 생각 없으니까 오빠 괜히 더 자극할 맘 없어.”

“... 그래도 약속은 받아야 될 거 같아.”

“어. 해.”

이수아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어왔다. 똑같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어서 고리를 걸었다. 두 번 흔들고 고리를 풀었다. 이수아가 손가락은 안 풀고 히 웃으면서 나를 올려봤다.

“도장은 안 찍어?”

“찍고 싶음 찍어.”

“응.”

이수아가 오른손 엄지를 내 엄지에 맞대고 꾹 눌렀다.

“사인도 하자 오빠.”

“사인?”

“손가락으로 손바닥 간질이기. 손 펴봐.”

“어.”

새끼손가락을 풀고 오른손을 폈다. 이수아가 서로의 오른손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대고 중지 검지 약지로 내 손바닥을 간질여왔다. 웃음이 나왔다.

“웃지만 말고 오빠도 해.”

“어.”

나도 이수아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수아가 킥킥대며 웃었다.

“아 간지러...”

“간지럼 진짜 잘 탄다 너.”

“말했잖아...”

“으응.”

“둘이, 뭐해...?”

흠칫 놀랐다. 뭔가 들켜서는 안 될 걸 들킨 느낌이었다. 전혀 그런 게 아닌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윤가영 목소리가 들린 곳을 봤다. 회색 브라탑에 레깅스 차림인 윤가영이 서 있었다. 살짝 헐떡이는 느낌이 있는 게 운동을 하다가 이수아랑 내 목소리가 들려서 온 듯했다.

“나 오빠한테 장난 안 치기로 약속하고 있었어.”

“으응... 또 오빠한테 짓궂게 굴었어...?”

“그런 건 아니구.”

“맞잖아.”

“온유가, 그렇다는데...?”

이수아가 오른손으로 내 왼팔을 쓱 쓸었다. 이수아는 은근슬쩍 스킨십을 잘했다.

“그리 느꼈음 미안해 오빠.”

“어. 연습이나 더 하자.”

“아니? 이제 복사랑 코팅도 해야지.”

“... 그래.”

이수아가 히 웃고 오른손을 들었다. 마주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맞대고 느리게 당겼다.

“오빠 손 너무 차.”

“방금 손 씻어서 그래.”

“그래도. 이제 코팅하자.”

“어.”

이수아가 왼손도 들었다. 서로 오른손이 맞닿게 하고 그 위로 왼손을 덮었다.

“여기서도 당겨야 되는 거 아냐?”

“응. 근데 오빠 손 이젠 좀 따뜻하다? 이상하게?”

“내 몸이 원래 뜨거워서 그래.”

“오빠 태양인이야?”

피식 웃었다. 윤가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왠지 모를 배덕감이 느껴져서 자지가 찌릿했다.

“둘이 사이 되게 좋네...”

윤가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살짝 시무룩한 느낌이었다.

“좀 친해지긴 했어.”

이수아가 답했다. 윤가영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잘됐네...”

“히. 그치.”

“응...”

“엄마는 또 운동하고 있었어?”

“응... 하체 운동... 근데 코팅은 언제 끝나...?”

“아. 까먹었다.”

이수아가 나를 쳐다봤다.

“이제 빼줘.”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리지.

“... 응.”

서로 양손을 뒤로 뺐다. 왠지 잘 안 빠지는 게 이수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힘 빼.”

이수아가 히히 웃었다.

“응.”

손이 빠져나왔다. 사소한 죄책감이 들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괜히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윤가영이랑 눈을 마주쳤다. 언제봐도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눈이었다. 마주 보고 있을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빠 이제 들어가자.”

“어...”

“우리 계속 연습할게 엄마.”

“그래...”

이수아가 윤가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윤가영도 마주 미소 지었다. 웃음이 억지스러운 감이 있었다.

“제가 쓰는 홈짐에서 운동하는 거예요?”

“그치...?”

“네, 열심히 잘해요. 안 다치게 조심하시고.”

윤가영이 히 웃었다.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네.”

이수아가 말없이 나를 올려보다가 윤가영을 봤다.

“막 중량 있는 거 하지 마.”

“알겠어...”

“응.”

이수아가 다시 나를 보고 오른 팔꿈치로 내 왼팔을 툭 쳤다.

“가자.”

“어.”

마지막으로 윤가영을 흘깃 보고 이수아랑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이수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른쪽으로 가 같이 걸터앉고 대본집을 펼쳤다.

“아까 한 데 다시 할까?”

“좋아.”

이수아가 답했다.

“외운 거 아직 기억하고 있나 봐?”

“응. 까먹기 전에 시작해.”

“응.”

시선을 내려 대본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걔가 나랑 영화 보재.”

정하윤이 나를 보면서 픽 웃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오기가 들어 표정 살짝 찡그린다. 억지로 다시 얼굴을 펴고.

“그린라이트지? 이거.”

“그린라이트지.”

목소리가 살짝 퉁명스러웠다.

“나 걔한테 뭐라고 고백하면 돼?”

“뭐?”

정하윤이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왼손을 들어 주먹 쥐고 내 오른팔을 한 대 툭 쳤다.

“네가 그러니까 여태 여친이 없던 거야.”

“뭔 소리야 뜬금없이.”

“그 정도면 그냥 대충 사귀자고만 해도 돼.”

“아니 좀 로맨틱한 말들 있잖아.”

“아 그딴 거 좀 묻지 마. 나도 모솔이니까.”

피식 웃었다. 정하윤도 웃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봤다. 표정에서 미묘한 씁쓸함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완벽히 몰입한 듯했다.

긴장은 다 풀린 듯하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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