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화 〉 대본 리딩하는 날 (2)
* * *
밖에서 윤가영 목소리가 들렸다. 반복 재생을 시켜놓은 탓에 잘 안 들렸지만 아마 밥 먹어, 라고 한 것 같았다.
얼굴이 천장을 향하게 누워 폰을 보던 이수아가 왼쪽으로 몸을 굴려 두 팔을 침대에 대 상체를 살짝 들고 문 쪽을 봤다가 나를 쳐다봤다.
“엄마 뭐라 했는지 들었어?”
“밥 먹으라 했던 거 같아.”
“어? 그럼 나가야지 왜 가만히 있어.”
“나갈 거야.”
“응. 같이 가.”
“어.”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수아가 뒤따라서 침대에서 내려오고 밖으로 나와 도도도 뛰어 내 왼편으로 왔다. 나란히 주방으로 갔다. 커피 냄새가 났다. 테이블에는 커피잔들 옆에 나이프랑 포크가 세팅되어 있었다. 양식을 만들었나. 뭘지 궁금했다.
고개를 들었는데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윤가영이랑 눈을 마주쳤다. 아침 메뉴를 만들고 있다가 우리가 오는 것만 기다린 듯했다.
윤가영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윤가영의 입술이 열렸다.
“둘이 같이 왔네...?”
“응. 뭐 만들어 엄마?”
이수아가 윤가영에게로 다가갔다. 윤가영이 왼쪽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프라이팬이 보였다. 얇은 크레이프 위에 베이컨, 양송이버섯, 계란 등이 올려져서 사각형으로 접혀 있었다.
이수아가 윤가영의 오른편에 서서 프라이팬을 들여다봤다.
“음, 엄마 이거 크레이프 아냐?”
“응...”
“이거 보통 디저트로 먹지 않아? 생크림이랑 딸기 같은 거 넣어서.”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해서 아침 식사로도 먹는데.”
“으응... 신기하다.”
“그치.”
윤가영이 불을 끄고는 오른손으로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아 들고 각도를 기울여 크레이프를 흰 접시에 옮겨 담았다.
“이거 세 개 다 됐으니까 테이블에 옮겨주라.”
“응.”
이수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오빠도 와.”
“어.”
“아냐 내가 들게. 네가 하나만 들어주라.”
“음? 응.”
이수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양손으로 흰 접시를 들었다. 윤가영이 양손에 접시 하나씩을 들고 빠르게 테이블로 와 내려놓은 다음 익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나도 원래 앉던 자리에 앉아서 윤가영의 오른편을 차지했다. 이수아가 윤가영의 왼편으로 가 접시를 놓고 의자에 앉았다. 이수아가 윤가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엄마 근데 나 방금 순간 되게 놀랐어.”
“왜?”
“엄마가 나보고 딸이라고 안 하고 네가 라고 해 가지고. 느낌이 좀 쌀쌀해서.”
“으응... 미안해. 근데 엄마가 평소에 네가 라고도 많이 부르지 않았어?”
“아닐걸? 몰라. 근데 엄마가 나한테 딸이라고 부르는 게 너무 익숙해서 좀 그랬어.”
“알겠어. 미안.”
“응...”
“... 근데 오빠랑 둘이서 뭐 했어...?”
“그냥 같이 있었는데? 소리 안 들렸어?”
“소리...? 무슨 소리...?”
윤가영의 목소리가 순간 떨렸다. 윤가영은 또 뭔 생각을 하는 걸까. 왠지 모르게 아래 쪽으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우리 대화하는 거.”
“으음... 집이 방음 잘 돼 가지고 못 들었나 봐... 그래서 무슨 얘기했는데...?”
“음, 일단 오빠 방 들어갔는데 오빠가 연습 안 하고 생각 없이 노는 거 같아 가지고 대본 리딩 어떡할 거냐고 묻고 그랬어.”
윤가영이 멋쩍게 웃었다.
“오빠한테 생각 없이가 뭐야...”
“이렇게 말해도 오빤 별생각 없을걸.”
이수아가 나를 쳐다봐왔다.
“그치?”
“어...”
짧게 고민했다. 여기에서는 이수아 말에 수긍해도 딸이랑 친해진 모습을 보이는 거니 윤가영도 좋아할 듯했다. 괜히 부정하면 이수아가 또 토라져서 귀찮게 할 것 같고.
“괜찮아. 진심으로 무시하고 그런 거만 아님 되지.”
이수아가 윤가영을 봤다.
“그렇대.”
“으응...”
윤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기죽은 듯 보였다. 내가 실수했나? 근데 이수아 말에 한 번 긍정했다고 이렇게 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윤가영이 이수아를 진지하게 연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좀만 더 생각해보고 말을 꺼낼걸. 잘못했다 싶었다.
“근데 엄마 또 오빠 옆자리에 앉았네?”
이수아가 말했다. 윤가영의 눈이 커졌다.
“응...? 온유보다 엄마가 먼저 앉았는데...?”
“아니, 엄마. 오빠 보면 맨날 앉는 자리 정해져 있는데 엄마가 거기 앉은 거면 오빠 옆자리 앉겠다 작심한 거잖아.”
“아냐, 그냥 앉아보니까 이 자리였어.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몰라도, 아무튼.”
“앉는 자리가 어떻게 익숙해진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딸도 학교 가면 맨날 같은 의자에 앉고 그러잖아.”
“근데 급식실 가면 맨날 다른 곳에 앉잖아.”
“급식실은 같은 학생이 매번 같은 순서대로 오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그런 거지, 집이랑은 다르잖아.”
“흐음... 그래도, 평소 앉는 자리가 익숙하려면 내 옆자리가 익숙해야 되는 거 아냐?”
“딸 옆에 많이 앉았잖아...”
“그니까. 많이 앉았는데 왜 요즘에는 내 옆에 안 앉고 오빠 옆에 앉냐구.”
“그건 그냥 엄마가 아까부터 말한 대로 여기 있는 의자가 익숙해진 거지, 네 오빠 옆이 익숙해서 그런 게 아니라구...”
“오빠 옆이 익숙한 게 아니라니. 엄마가 오빠랑 친해지려고 옆자리 앉다 보니까 익숙해졌다고 한 거면, 오빠 옆이 익숙해진 거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냐?”
“아냐아...”
윤가영이 곤란한 듯 보였다. 이수아는 왜 자기 어머니를 이렇게 몰아붙이듯이 말할까.
“엄마한테 왜 그래... 혼내는 것처럼...”
“서운해서 그래. 맨날 오빠가 우선이고 나는 다음인 식으로 대하니까.”
“그런 적 없어...”
“거짓말.”
“...”
“만약 엄마가 나랑 오빠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노력은 했다고 해도, 보면 맨날 오빠가 먼저였고, 또 내가 그렇게 느꼈는데?”
“... 엄마가 미안해...”
이수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오빠보다 나 우선으로 대해줘.”
“... 알겠어... 그렇게 느낄 수 있게 노력해볼게...”
“진짜지?”
“응...”
이수아가 윤가영에게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약속...”
윤가영이 새끼손가락을 마주 댔다. 이수아랑 윤가영이 서로의 손가락에 고리를 걸고 두 번 흔들었다. 이수아가 히히 웃었다.
“됐어. 고마워 엄마.”
“응... 딸 화난 거 풀린 거지...?”
“응.”
이수아가 오른손으로 윤가영의 왼볼을 쓰다듬었다.
“우리 귀여운 엄마.”
윤가영이 빙긋 웃었다. 귀여워서 미소가 지어질 것 같았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괜히 헛기침한 다음 다시 이수아랑 윤가영을 봤다.
“이제 슬슬 먹죠?”
“응? 응.”
윤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 먹자.”
“네.”
“잘 먹을게 엄마.”
“응...”
이수아가 포크랑 나이프를 들어 크레이프에 댔다. 나도 포크랑 나이프를 잡고 크레이프를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었다. 이수아랑 윤가영이 대화한 시간이 약간 길었는지 조금 식어 있었다.
이수아가 우물거리다가 윤가영을 보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엄마 이거 요리 이름은 뭐야?”
“갈레트래.”
“갈레트?”
“응.”
“흐응...”
“맛은 어때? 괜찮아?”
“응. 맛있어.”
윤가영이 눈웃음 지었다.
“다행이다.”
이수아가 마주 미소 지었다. 윤가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온유 입에는 맞아?”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네. 괜찮아요.”
“엄마도 빨리 먹어.”
“알겠어.”
윤가영이 그제야 포크랑 나이프를 들어서 썰었다. 윤가영이 포크로 한 조각 찍어놓고는 이수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딸, 밥 먹고 나서 뭐할 거야?”
이수아가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 오빠랑 대본 리딩 연습.”
“온유 방에서 하는 거야?”
“응.”
“으응... 그럼 엄마가 좀 같이 지켜봐도 될까?”
“음? 왜?”
“그냥, 대본 리딩이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거잖아.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음 연습이 잘되지 않을까 해서. 가서 긴장도 덜 될 거구.”
“아냐, 난 긴장 안 할 거야. 사람 많은 데서 연습해봐서.”
이수아가 나를 쳐다봤다.
“그치 오빠?”
이수아가 나랑 많은 사람 앞에서 제대로 연기한 적은 우리 학교로 와서 나 조진 날밖에 없을 건데. 그 얘기를 이렇게 상큼하게 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구나. 살짝 감회가 새로웠다. 살폿 웃었다.
윤가영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짜야 온유야?”
“네, 수아 진짜 연기 잘해요.”
“으응...”
윤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아가 나를 보며 픽 웃었다.
“근데 왠지 나 욕한 거 같은데?”
“그건 네가 찔려서 그런 거야. 난 진심으로 칭찬하는 거였어.”
“그래, 고마워.”
“어.”
이수아가 짧게 답했다. 윤가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수아를 봤다.
“그럼 진짜 둘이 연습하는 거 엄마가 안 봐도 돼...?”
“응.”
윤가영이 멋쩍게 웃었다.
“근데 엄마는 보고 싶은데...?”
“...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엄마 앞에 있음 몰입 좀 깨질 거 같애. 이윤우랑 정하윤이 있어야 되는데, 방 안에 셋이서 있으면 나 오빠 엄마 이렇게 있는 느낌 날 거 같아.”
“으응... 알겠어...”
이수아가 히 웃고 윤가영을 끌어안았다. 윤가영도 소극적으로 이수아를 안았다. 윤가영과 이수아의 가슴이 각기 다른 정도와 모양으로 짓눌리는 게 보였다. 미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수아가 미소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엄마 너무 귀여워.”
“그래...”
“엄마 귀여운 거 인정하는 거야?”
“딸이 귀엽다고 하면 귀여운 거지...”
이수아가 히히 웃었다.
“응. 맞아.”
이수아가 나랑 눈을 마주쳐왔다.
“엄마랑 껴안고 있는 거 부러워?”
윤가영이 흠칫했다.
“으응...? 뭐 왜 그래...?”
“아니, 오빠가 우리 안고 있는 거 뚫어져라 보고 있어서.”
“뚫어져라 안 봤거든.”
“내 눈엔 그렇게 보였어.”
“네 눈이 잘못된 거야.”
“어.”
이수아가 나한테서 시선을 떼고 윤가영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윤가영이 이수아의 등을 토닥였다.
“딸, 이제 그만하고 밥 먹자...”
“알겠어.”
이수아가 이마를 뗐다. 조금 붉어져 있었다. 웃기는 모습이었다.
“왜 웃?”
“너 이마 빨개져서.”
이수아가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고 왼손으로 앞머리를 살짝 걷은 다음 얼굴을 비쳐 보았다.
“아.”
“빨갛지?”
“어.”
이수아가 왼손으로 앞머리를 쓸어내려 이마를 가렸다.
윤가영이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밥 먹자 온유야.”
“네.”
“엄마 나 먼저 챙겨준다 했잖아 아까.”
윤가영이 멋쩍게 히 웃었다.
“딸한테 먼저 밥 먹자고 했잖아...”
“흐응... 알겠어. 이번은 봐줄게.”
픽 웃었다. 이수아가 날 째려봤다가 윤가영의 포크를 들어서 윤가영이 찍어놨던 갈레트 조각을 윤가영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엄마, 아.”
윤가영이 순순하게 아, 하고 소리 내며 입을 벌렸다. 이수아가 웃으면서 윤가영의 입에 갈레트를 넣어줬다.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정도로 귀여운 모녀였다.
이수아가 포크를 내려놓고 자기 플레이트에 놓인 갈레트를 잘라서 한 입 크기 조각을 하나 만들어 푹 찍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밑을 받쳐서 내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다.
“뭐 하냐?”
“오빠도 내가 주는 거 먹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수아야... 오빠 부담스러워하잖아...”
“아닐걸? 빨리 먹어 오빠. 나 포기 안 하는 거 알지?”
헛웃음이 나왔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고집이 세서 결국에는 내가 좀 굽혀주고 말 거였다. 차라리 지금 받아주는 게 나을 터였다.
입을 벌리고, 이수아가 주는 걸 받아들였다. 이수아가 포크를 자기 접시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맛있어 오빠?”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맛있네. 근데 만든 건 네 어머니인데 왜 네가 생색내?”
“엄마 작품이어도 결국에 준 건 나니까.”
뭔가 맞는 말 같기는 했다.
“할 말 없지?”
“어.”
이수아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윤가영을 봤다.
“엄마. 오빠가 맨날 나한테 되게 건성으로 대답해.”
윤가영이 살폿 웃었다. 왠지 기분 좋아 보였다.
“그래...?”
“응. 좀 혼내주면 안 돼?”
“음... 안 될 거 같은데...?”
“엄마 오빠 못 이겨?”
“응...”
윤가영이 나를 쳐다봤다. 은은히 미소 짓느라 휘어진 눈꼬리가 왠지 모르게 존나 야했다. 친딸은 모르게 새아들한테 야한 속뜻을 담아 눈웃음 치는 새엄마라니. 또 윤가영을 이겨주고 싶었다.
윤가영이 고개를 돌려 자기 접시를 봤다가 이수아를 봤다.
“딸. 이제 진짜 그만하고 먹자. 너희 연습할 시간도 없어지니까.”
“응.”
“네.”
다 자기 포크랑 나이프를 들고 갈레트를 잘라 먹었다. 식었지만 맛있었다.
살짝 몸이 굳고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안 지나면 대본 리딩을 해야 해서 그런 건가. 지금은 긴장되지만 막상 하면 즐기게 될 거 같았다.연기에 별생각이 없었다가 겁쟁이둘 오디션을 하게 됐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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